라이켄

문림

수도 없이 많은 활자가 잡초처럼 난무한다. 무엇을 취하고 또한 무엇을 취하지 않을 것인가, 그는 자신을 취하기를 택하며 또한 생을 취했다.

상록 by 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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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어지고 있다. 나의 손이 아닌, 나를 죽이려 했던 타인의 손에 의해! 자신이 식물을 다룰 때 보였던 섬세한 손길도, 제가 타인을 대할 때 늘상 두르고 있던 확신에 찬 손길도 되지 못할, 오로지 충족만을 위한 악의에 의해. 제가 스스로를 극단적인 선인이라 여겼으며 그 질서를 추구했더라면 그것에 더욱 분노하였을지 몰랐으나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분노의 온도는 차갑게 식어 재로 화하고 만다. 희뿌연 재가 흩어지듯 노기가 사그라들고 나면 그 이후에 남는 것은 생, 제가 말했던 것과 같이 그 여느 때보다도 역동하는 생이다. 진실로 분노는 삶의 강렬한 원동력이 되어 준다. 혈흔 하나 없는 상처가 기껍지는 않았으나 타자에 의해 상해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익숙치 못한 일은 또한 아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 위를 닦아낼 수 있었다. 바라는 것이 눈물이더냐! 쉬이 당신을 위해 그 투명한 혈을 흘려 보내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제 자존심과 마음에 깃든 제 삶의 자세, 혹은 그 삶의 자체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럼에도 또한 희미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낯에 머무를 시간을 두는 것은 땅이 비에 젖을 여유를 남기는 것과 같다. 천천히, 자신을 뜨겁게 달구었던 열기가 식어 본디의 초록을 되찾을 수 있도록. 혹은 당신이 그 수확을 더욱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가! 문장을 곱씹듯 지금의 이 순간을 곱씹어라, 한 차례의 승리는 당신에게 있으니 결론적인 흐름은 무승부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 무언가를 허용하는 것은 또한 당신의 생을-무엇인가를 빚고 써내리며 새기는 행위로 증명하는 그 생을 위함이요, 다시 한 번의 찬사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무엇이 나빠? 전부 뒈져버린 누군가의 몸 위에 흙을 덮고, 그 위에 그들의 이름을 심고, 그들의 생을 애도하며 이어질 새로운 삶과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어.”

상대가 굳이 수정한 단어를 다시 원형으로 돌려놓는다. 어떠한 의태도, 거짓도 없는 이 대화에서는 어떤 가식도 용인될 수 없었다. 애초 사회와는 동떨어진 이가 아니었던가, 이해될 수 없는 재생을 신념-누군가에게는 신앙으로 비추어질 지경의 믿음으로 삼는 나나, 악의와 경계와 히스테리, 불안, 괴로움, 그 따위를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 써 감추는 당신이나! 자신을 감추지 못한 채 그 밑바닥까지 당당하게 토해내고 마는 것마저를 생각하면 더욱 저와 타인을 우리라는 단어로 붙들어 묶는 데에 거리낌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생각한다, 우리는 비슷한 씨앗이 우연찮게 다른 환경에 굴러 들어가 너무나도 다른 모양새로 피어난 그 결과이리라고……. 유대 따위는 되지 못할 분류였다.

“하나 정정할 필요가 있겠군. 나는 한 번도 내가 르노의 소유라고 여겨 본 적이 없다. 단지 소속되어 있다고 여기고, 스스로 그리 정의내렸을 뿐이지. 르노에 남은 인간이 나 하나 뿐인 지금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 그러니 어순을 바꾸는 말장난으로 무언가를 꾸며내려 하지 마. 나는 독생자이며 후계자일지언정 저 땅의 지배자는 되지 않아. 네가 나를 정원사라 불러도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감히 타지의 과실을 물고 와 제 입에 물리려 드는가, 독사여. 믿음이 있는 이라면 그 속삭임을 마귀의 것이라 이를 것이나 어떠한 것도 주인 삼지 않는 인간은 그 말에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존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거듭할 따름이나 누군가를 지배하며 조종하는 것에는 관심도, 재주도 없었다……. “나에게 신의 이름은 필요치 않아. 그 이상의 이름을 이미 지니고 있으니까.” 그리 맺음은 인간의 오만이며 휘브리스, 때로는 누군가에게 수치 따위를 남기는 것, 제 죽음 뒤에도 가죽과 함께 남아 영영 재생될 것, 오로지 이름만이. 그리하여 다시금 되뇌이니,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르노의 라이켄이다!

 

“그 속의 실상을 보았거든 그런 말 따위 할 수 없었을 거다. 아, 제길! 이런 상황인 탓에 직접 눈 앞에 들이밀어 보여줄 수도 없군 그래.” 자그마한 한탄과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그 뒤를 잇는 것은 실낱같은 실소, 자신의 음성을 자각한 이는 그것이 제 색을 잃지 않도록 천천히 모든 단어를 곱씹어 내뱉었다. “그 곳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나도 첫 순간만큼은 도망칠 것을 생각했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죽음만이 가득한 그 땅을 등질 생각을 했어, 재생과 삶에 모든 것을 걸어 살아가고 있던 열 아홉의 나조차도. 아무리 재생되었다고 한들 도시 하나를 채우는 것은 적막 뿐이요, 식생을 삶보다는 환경으로 여기는 인간들의 눈에 ‘삶’이라 할 수 있을 법한 흔적은 나 하나 뿐인 땅. 그 모습을 보고 너는 과연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을까? 예상하건대, 결코 그렇지 못했을 거야.”

시야의 앞에서 회백색이 점멸한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발작과 같은 풍경임에도 그 차가운 색은 오래토록 눈 앞에 남아 일렁였고, 시각을 침범하는 과거의 재생에 미간을 살그마니 찌푸렸다 놓았다. 시골도, 도시도 되지 못할 작은 땅. 유리 벽으로 가로막히고 그 속의 초목으로 다시 한번 틀어막혀 바깥의 비명도, 그 속의 절박함도 주고 받을 수 없던 땅……. 그러한 실상에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은 공포심만이 굴뚝같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하여 침묵을 택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땅이 그들이 정의하는 죽음만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진정 두려웠던 것은 그것인가-그것마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스스로 ‘글쎄,’라는 답변만을 남길 수 있었지만.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너를 르노에 들였더라면 네가 이 땅을 정원이라 부르는 일도 없었겠지. 적어도 초록이 가득한 그 자리 하나하나에 우리와 같은 존재들이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테니까. 그리 되었다면 네 입을 통해 나의 집을 부르는 언어가 바뀌었을까, 네 위선도 내게만은 선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르겠군. 내 땅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팔아 나를 그야말로 전설 속의 존재나 맹수로 둔갑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재구성, 덧칠, 때로는 거짓말……. 네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으니 말이야.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있어.”

 닿지 않아 희망, 허용되지 않아 낙원, 그것을 비틀면 닿는 순간 절망이요 허용되는 순간 실낙원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라는 심산이다. 환상과 기대를 일찍이 깨뜨리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인가! 목이 건조하다. 당신의 말마따나 독이 여전히 몸 속을 돌며 그 속을 뒤흔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려는 듯 마른 침을 삼키고서는 무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것 또한 헛소리군.”

그리고 그 헛소리를 제 책장에 소중히 쌓아 담으며 그 속을 거니는 수많은 맹수를 마주하던 상상의 구석을 기억한다. 바깥 세상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당신이 살아 어디선가 제 할 일-당신의 글이라고는 엉망인 삼행시만을 기억하던 당시의 저는 당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퍽 의외라 여겼으나-을 다하고 있으리라는 희망만을 남기기에는 충분한 몇 장의 글. 그 활자의 주인이 이러한 꼴로, 이러한 상황에서 다름 아닌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은 그 예상 바깥의 일이었으나 고정된 현실을 아주 바꿀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의 통제를 다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 뿐이었기에 다시 자신을 주체로 한 작문을 시작했다.

“해석은 각기의 몫이니만큼 그들이 나를 정원사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어. 공개적으로 그 명칭에 대한 반감을 표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지. 하지만 또한 해석은 나의 몫이기도 하니 그 호칭에 대해 불쾌함을 지닐 수 있는 권리 또한 내게는 있어. 그래, 네가 나를 무엇이라 부르고 내 모든 것에 의심을 품더라도 그것에 대한 불쾌와 용인은 다른 문제야. 그러니 내 표정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질문해 보라고.”

그리 내뱉고 나면 희미한 자각이 떠오른다-당신은 제가 찡그리는 모습이 아닌 낯 따위는 신경조차 쓴 적이 없다. 웃음에는 불쾌를, 불편에는 유쾌를 보이던 상대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옅은 웃음이 번지는 것은 주도권을 되찾기 시작한 것의 신호였다. 휘둘리는 것은 이 즈음이면 되었다. 나는 당신의 픽션과 가장이 아닌, 논픽션과 현실에서 활자活字가 아닌 활자活者의 숨을 쉬리라.

“대답하지. 그래, 물리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았으나 정보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아 오지는 않았어. 저 바깥에 어떤 국가들이 존재하고 그 국가들은 어느 문화를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삶을 이어나가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 즈음은 어렵지 않았지. 그러한 연유로 너희의 소식을 아는 것도 실상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꼭 만남을 맺지 않고 설명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두 번째 질문과 이어지겠군 그래.”

밖으로 나오기 두려웠던 것은 아닌가에 대한 물음,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흐르는 독소, 위협적인 식물, 여러 위험과의 공존이 강제되는 공간 속에서 어린 제게 진정한 두려움이었던 것은 차라리 그 바깥이 아닌 온실 속이었다. 그러한 두려움을 벗겨내게 된 계기는-

“열 아홉의 라이켄에게 르노는 생지옥이었어. 사랑하던 것들은 무가 되어 사라진 듯 보였고, 평생 안전할 것이라 믿었던 온실의 벽은 무너졌으니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지. 그 이후로도 르노는 내게 낙원이었던 적은 없다. 허나, 그곳이 집이라는 명칭을 되찾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바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내부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열쇠는 또한 그 속에 있었거든. 몸을 피하기 위해 향했던 지하 연구소에서 르노의 공존을 위한 노력을 보았어. 그들이 재생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듯한 풍경을 보았지. 그들의 죽음이 고통에 찬 것이 아닌 공존의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은 없더군.”

-또 다시 재생이다. 오롯 자신만의 정신, 당신이라면 질색을 하던 그 녹색의 언어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그 바깥의 사회에 속할 이유도 없어 온실에 주어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를 지켜내었다. 그리 수식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겠어. 왜 내가 그리 무모하고 겁이 없어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답이 되었겠지. 내가 죽어 이 땅에 묻히게 된다 하여도 그 위에 이끼를 덮어 줄 이는 없겠으나, 적어도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만은 실현될 것을 알아. 그리고 10년 간 홀로 그 죽음과 공존하며 분투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으니, 내가 나 스스로를 위협에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나 스스로를 분쇄해 저 땅에 뿌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 즈음은 쉽게 알 수 있겠지. 내게는 자신이 있어. 죽더라도 허투루 생을 흩어내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끝까지 살아남으리라는 그 자신이.” 그리 이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며 의심하고, 그 의심만큼 신뢰하여 다져진 이의 음성-성스러운 것 따위는 되지 못할, 지극히 인간적인, 합리에 의한 생의 증명. 자신을 믿으며 그 재생을 믿으라는 설파 따위는 없었다.

 

“크기가 적당할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그릇이 그것이라면야.” 다른 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구겨진 알루미늄을 바라보았다. 재생은 그 재료가 거쳐 왔던 기다림의 시간과 감정 따위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하는가-타자에 비해 뒤틀리고 찢기듯 뭉개진 지금의 당신에게는 퍽 어울리는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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