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하나 니노

개요: 파란

변화는 늘 그렇듯 갑작스레 찾아온다. 어떤 예고도 없이. 미세한 음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던 건반을 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어머니, 정말 당신이 옳았네요. 신이라는 건 정말 실존하는 존재였군요……. 어쩌면 그건 일종의 깨달음이고, 모든 깨달음은 희열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눈먼 감상 끝에 남는 건, ……의문이다. 언제나 그랬듯.

 

무엇이든 아무 이유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바란 적도, 얻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는 재능이 사라지는 일쯤이야 그간 일어났던 수많은 비현실적인 사건과 사고에 비하면 그 정도의 일은 사건이라 불리기에도 민망한 축에 낄 것이다. 사람의 재능이란 그 정도로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 천재라는 이명은 허상과 같은 뿌리를 지닌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핑계 없어도 최선을 다해 틀어지는 일만큼 기꺼운 게 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결국 어떻게 해야 했던 거지. 자가당착에도 정도가 있지. 아쉽지 않은 것을 아쉬워 하다보면 결국 끝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억의 끝은 언제나 질문이고, 수많은 질문의 끝은 언제나 회상이다. 온통 푸른 것이 범람하는 파란波瀾의 역사들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담담히 돌이키면 이윽고 단 하나의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결말이란 일종의 근원.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것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아, 가장 최초의 기억은 건반 위를 자유롭게 오가던 손가락과 입 안에서 구르던…….

 

 

 

누군가 물었다. 여전히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모든 호오好惡의 구분은 다른 기억들이 으레 그러하듯 가장 강렬한 기억들로 덮이기 마련이다. 분명 한 때는 좋아했을 것이다. 어떤 노력 없이 주어진 것들은 으레 사람으로 하여금 섣부른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법이므로.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고, 시야가 한결 높아진 지금 그는 망설인다. 여전히 나는 같은 것을 좋아할 수 있는가? 시선이 달라지면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 역시 달라지는 법이다. 성장은 필연적으로 성장통을 동반한다. 통증에 둔감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잊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대답을 순순히 내어놓지 못하는 것 역시 일종의 자연현상이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상념이 대답을 막아선다. 사실 알고 있다. 선뜻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이 늘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타협과 부정, 미련과 선택, 집중과 후회. 사랑과 신앙.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무엇을 선택했던가? 기억하지 않는다. 낯선 신의 이름을 잊듯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을 잊는다. 악보를 바라보면, 그것은 여전히 불가해한 기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한 때는 검고 흰 종이 위에 새겨진 것들을, 의미를, 선율을 이해했으나 그 역시 과거의 잔재에 불과하다. 정말로? 자가당착에 불과한 의문 역시 잊어두기로 한다. 때 늦은 고민의 시간이다.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파란이 없는 곳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 모를 평을 내린다. 무엇에 대한 평인가? 그 역시 아직은 알 수 없다. 알아낸 것이 전무하므로 아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바꿀 수 없다.

 

 

항해일지를 쓰는 기분으로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기로 한다. 회상은 거듭되는 후회를 동반한다. 배 한 척에 몸을 선뜻 맡기는 이들은 대체 어떤 기분으로 끝 모르는 시간을 견뎠을까.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남는 파란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을까. 과연 그들도 조표가 잘못 붙은 악보를 보며 아쉬움을 느낄까. 그렇다면 이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이고 일률적인 고민인가. 그 정도로 하찮은 것에 이렇게, 오래, 매달려서……. 목적지의 유무는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난해한 문제를 풀듯 삶을 성찰해본다. 간단한 것들부터 나열하기로 한다. 그간 지표로 삼아온 중간 지점들, 목적지가 될 수는 없지만 목적지를 추정할 수 있게끔 만드는 가장 중요한 단서들. 이를테면 칭찬처럼 주어지는 형형색색의 사탕, 기대, 파랑, 그리고, 결국 사랑 같은 것들. 그러다 보면 늘 같은 결말에 도달하듯 같은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랑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추측하듯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가는데, 모호한 것들은 빗물이 불어나듯 날마다 수없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답 사이에 자리한 공백은 체념을 닮아있다.

 

세상 모든 것들에는 음악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진실로 그렇다. 책상에 엎드리듯 누워 평평한 나무판을 두드리는 것조차 음악이 된다. 이렇게 쉬운 것들이 왜 내게만 늘 쉽지 않은건지. 알 수 없다. 생각하며 얼굴을 묻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여전히 낯선 신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체념조차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표가 엉망인 악보를 읽을 수 없고, 은유와 직유로 인해 와해되는 문장의 원본을 찾을 수 없고, 햇살 아래 부서지는 파란이 실종되는 순간에서조차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종용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제는 그것의 이름을 안다. 결국 그건…….

 


 

여전히 너는 음악을 좋아하니. 쟈하나의 손 안에서 구슬 두 개가 굴렀다. 바닥으로 떨어질 뻔 한 구슬들을 잽싸게 잡아챈 그가 답잖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오래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대답이 신속했다. 정말 단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어? 물론 그렇진 않겠지. 어린아이들의 사고란 대개 그런 식이지 않나. 시간이 흐르고 보면 기억 한 구석에도 남지 않을 하찮은 시간들에 곧잘 목을 매곤 하는 법이고,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 어른스러울 수는 있어도, 그게 아이의 성숙함을 대변하지는 않듯 그 역시 평범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천재라는 말만큼 무의미한 허명도 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때 좋았던 모든 것들은 모래알이 포말과 함께 쓸려나가듯 더 강렬하고,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 씌워지는 법이다. 한 때는 좋았을지 모르지. 침묵으로 얼버무린 문장의 끝은 분명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존재하는 법이고, 어떤 것들은 아무 계기 없이도 쉬이 끝나곤 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등장인물이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주 당연한 명제.

 

이가 썩는 줄도 모르고 마냥 단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게 어디 오롯이 자신만의 탓인가. 살면서 너무 쉽게 단 것을 맛 본 이들은 결국 그것을 놓지 못하는 법이다. 제 것이 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다. 통증에 무뎌질 수는 있어도 그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외면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포기는 시작보다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결국 그는 아주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 이들만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정할 수 있다. 결국 좋아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거고, 미련을 애정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거야.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이 어디 자신의 몫인가.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그렇다. 그래도 한 때는 나한테도 좋아하는 게 있었어. 정말이야. 누구에게 건네는 지 조차 알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양 손에 얼굴을 묻는다.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결국 기만이다. 언제나 수많은 기만은 자기혐오로 종결된다. 그렇지만 알고 있지 않나. 좋아하는 것들이 없어도 시계 바늘은 돌고, 내일은 끝없이 이어진다. 현재를 잃었다 한들 삶은 결국 수많은 과거와 미래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거짓말을 해도 괜찮겠지. 그 또한 자신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 포기하지 않고서는 파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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