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

After Scene N

因緣

Dx3 팬시나리오 『더티 페어』 캠페인 전체 스포일러

AFTER SCENE 01 협력의 형태 : ::: 【 Event horizon 】 :::

하야토가 타케가미 시를 다시 방문한 때는 보름하고도 사흘이 더 지난 후였다. 그간 일어난 사건의 뒷수습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었고, 이를 위해 코사코 지부와 타케가미 지부는 장기적이고 긴밀한 협력에 대해 문서로 합의하기로 결정했다. 피해자들이 대부분 타케가미 시의 병원에 입원해있는 만큼, 타케가미 지부를 중심으로 코사코 지부원들이 협력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어차피 코사코 지부는 활동 가능한 에이전트가 그리 많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지부장들은 지부장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무척이나 바빴기 때문에 사건 후 첫 지부장 간의 회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율은 유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가끔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각 지부의 에이전트가 일부 권한을 위임받아 오가고는 했는데, 전문적인 용어로 부르자면 뺑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야토의 차례가 왔다. 그동안은 코사코 내부에서 정보를 정리하고, 타케가미 지부로부터 오는 요청을 처리하는 일에 에이전트 라파엘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코사코에 돌아온 이후로는 외부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말하자면 몇 번은 지부장의 부탁이 있어왔으나 그럴 때마다 이벤트 호라이즌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아카조메 유카리의 강렬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한 이유가 더 컸다.

하야토는 늘 기꺼이 타케가미 시에 찾아가는 일을 아카조메에게 넘겨주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는데, 아카조메가 이미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아카조메가 어째서 자신을 부르지 않았냐고 화를 내며 기다리지 않길 바랐다.

다시 돌아온 타케가미 지부의 모습은 새삼스러웠다. 처음 이 지부에 왔을 때는 “그리즐”의 환상 속이었고, 두 번째는 단서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정작 진짜 지부는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규모있고 깔끔한 건물은 환상과 별 다를 바 없었으나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소란한 인기척들은 확실히 어설픈 환상으로 구현하기 힘든 진짜였다.

이 정도 인원이 있으면 새까만 수단을 차려입은 신부도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간간히 낯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곧 떨어져나갔다. 누구 집에 놓인 수저 갯수까지 알고 지내는 코사코 지부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야토는 처음 코사코 지부에 가게 되었을 때의 침체된 분위기와 음울함을 어렴풋이 떠올렸다가 관둔다. 얼마 들리지 않던 우는 소리 조차 앳되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이미 한 번 가본 지부장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서서 노크를 서너번 했음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하야토는 고민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얼굴에 그대로 필통을 처맞은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고, 그걸 두 번 겪고 싶진 않아서였다. 아무리 한 번은 실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는 법. 하누만이 던지는 필통을 피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겸허히 자신의 예견된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한 뒤 지부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예상한 물건은 날아오지 않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지부장의 책상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리던 찰나 이 방에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은 당신이군요.”

무던한 말투로 지부장 대신 손님을 반겨준 이벤트 호라이즌, 이치노마에 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오한 것보다는 훨씬 나은 만남이었다. 하야토는 신이 앉아있던 소파로 걸어가며 그가 한 말에 담긴 무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아카조메씨는 이미 다른 일로 바빠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지부장은 10분 내로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이치노마에는 생략한 말에 담긴 뜻과 사정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 듯 간결하게 답했고, 원하는 정보도 함께 돌려주었다. 하야토는 이제 이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없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다.

이치노마에의 손짓에 하야토는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는 올 손님을 위한 몫의 커피가 있었다. 딱히 취향을 맞춘 대접은 아니었지만 세 자리의 앞에 공평하게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기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이비츠 지부장이 베풀었을 440엔 정도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이즈미가 보았다면 호기심이 이는 얼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괜찮으세요? 이탈리아에서 왔는데도요.’ 라고 물어봤을 만큼 평온하게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신 하야토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이치노마에에게 건넸다. 상대는 말 없이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읽는 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간단하긴 했지만 유선 상으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망쳐버린 “밴디거”와 “타타라 만다라”가 남긴 흔적에 대한 단서였으므로. 이치노마에가 서류의 마지막 장을 읽고 있을 때 즈음 하야토는 그가 알고 싶어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현재는 코사코 지부의 에이전트 두 명이 추적 중입니다만, 도심으로 들어가 수색 범위가 넓어졌어요. 증원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쪽에서 추가 인력을 추리도록 하죠. 이 다음은 지부장이 온 다음에 논의하도록 합시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가 끝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하야토는 문득 깨달았다. 둘 모두 가벼운 수다, 스몰토킹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깐 여기에 이즈미가 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즈미는 이즈미대로 바빴다. 이제 학교가 개학한 것이다. 그 아이는 아직 학생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할 때였다. 작게 한숨을 쉰 하야토가 물었다.

“야마다 가로마루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직은 좀 더 관찰해봐야 알겠지만, 인간에게 호의적인 태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에 반해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니 기준을 확실히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코드네임도 새로 짓기로 했다더군요.”

아주 잠깐 찌푸린 미간이나 떨떠름한 말에서 그 행간에 포함된 것이 어느 레니게이드 비잉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말하는 태도가 덤덤한 걸 보면 별 일 없이 잘 지내는 모양이다. 이즈미가 종종 가로마루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으니 안심시켜줄 소식을 들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는 소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카조메 유카리가 그를 다시 만나 좋아하지는 않았는지, 그가 만나보았을 다른 코사코의 에이전트는 괜찮았는지. 먼저 요구하지 않은 히비데와 이즈미의 근황까지 알려주었다. 이치노마에는 하야토의 태도에서 무언가 느낀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느낌을 섣불리 공언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하야토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지금 그가 말하는 이 이야기가 바로 하야토가 일전에 부탁했던 협력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 수 있는 이야기도 거의 떨어져 갈 무렵,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치노마에가 돌연 손을 앞으로 휙 뻗었다. 하야토는 짐짓 놀랐지만 그게 위협을 위한 행동이 아님을 알고 가만히 있었다. 퍽! 곧 하야토의 귓가 근처에서 무언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아프지는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뻗은 이치노마에의 손에 웬 캔이 들려있었다. 겉면에 둘러진 포장지를 보니 자판기 녹차였다.

“미쳤나? 알류미늄 캔같은 건 함부로 던지지 마.”

“그러게 네놈이 재깍재깍 손님이 도착했으면 했다고 얘길 했어야지!!!”

“문자를 곧바로 확인하지 않은 건 너잖아.”

“크흠…….”

시원하게 소리를 지르고 난 “아라미타마”가 멋쩍어 헛기침을 하자 곧 “니기미타마”가 대신 표면으로 나왔다. 하야토는 그동안 저 캔을 얼굴에 그대로 맞았으면 멍이 들었을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급한 일이 있어서.”

“아닙니다.”

솔직히 그는 250km/h 강속구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지부장 앞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다음 논의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건이 끝난 뒤부터 두 지부에서는 도망친 야차처 셸의 주범들을 추적해 일본 UGN 총본부에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적합한 인선을 미리 꾸려놓은 뒤였다. 정해진 일은 다시 문서로 작성되었고, 하야토와 이치노마에의 손에 각각 한 부씩 들려졌다.

“그럼 이건 지원조에 전달하고 오도록 하지.”

이치노마에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일어났다. 하야토도 들고 있는 서류를 한다 지부장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일어섰다. 붙잡는 말이 아니면 그랬을거란 소리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인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아라미타마”가 돌아와 있었다. 가려던 사람을 붙잡고는 한참을 옆에 있던 서류철을 뒤적이던 아라미타마가 갈색의 서류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것도 한다 지부장에게 가져다주란 이야기인가? 하야토가 질문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그건 나라카 녀석에게 좀 가져다줘라.”

“예?”

하야토가 당혹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부하도 타케가미 지부 소속이 아닌데요?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라미타마가 너무 뻔뻔하고 당연한 얼굴로 ‘서류 봉투 안 받아? 팔 떨어지겠다.’ 하고 쳐다보고 있어서였다. 하야토는 이 일에 대해 항의해줄 타케가미 지부의 엘리트 에이전트를 찾아 고개를 돌렸지만, 불운하게도 행동이 빠른 편인 이치노마에는 이미 지부장실을 나간 뒤였다. 지부장도 딴지를 걸 이치노마에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를 붙잡은 게 틀림 없었다.

하야토가 봉투를 바로 받지 않고 가만히 있자 아라미타마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탁자에 놓여있던 녹차 캔을 선심 쓰듯 함께 내밀었다.

“이건 가면서 마시도록.”

“……그러죠.”

하야토는 현명하게도 얌전히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쥐고 있는 캔을 곧바로 안면에 250km/h로 던질 수 있는 다혈질의 옆 도시 지부장에게 항의하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AFTER SCENE 02 이해와 몰이해 : :::: 【 Wheel of six realms 】 ::::

아라미타마가 알려준 마장麻場을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길을 잘 가르쳐줬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야토는 방향감각이 좋은 편이었고, 길을 금세 외울 능력도 가지고 있어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헤매지 않고 주파했다. 마장은 타케가미 지부가 있는 번화가와 코사코 시와 맞닿은 시의 경계선 어드메의 골목길에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가는 길에 겸사겸사 이것도’ 라고 건네줬단거지.

새삼스럽게 하야토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레니게이드 비잉이 하던 모바일 게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깜찍한 효과음과 함께 화면에 뜬 마작패의 이미지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옥의 왕이 인세에서 마장을 운영하다니……. 교황청의 사제였지만 그만큼 다른 종교의 학문에 대해서도 공부했던 그는 쉽사리 그때 제대로 듣지 못한 이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라카 니라야奈落爾羅夜라는 이름이나, 그 코드네임을 듣고도 모르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 사건 이후로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하야토는 이 만남이 조금 불편했다. 환상에서 나온 뒤로 한 사람과 한 레니게이드 비잉은 마치 그 안에서 주고받았던 말싸움이란 일절 없었던 것처럼 암묵적으로 합의한 채 대화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레니게이드 비잉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서였겠지만, 하야토는 아니었다. 들은 말을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 어느 에이전트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종종 그 순간의 대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싫다고 해서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하야토가 타케가미 지부에 도착했을 때가 조금 늦은 오후였기 때문에, 마장 앞에 도달했을 즈음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는 건물 앞에 서서 간판을 한 번 바라본 뒤 아라미타마가 말한 마장임을 확인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타케가미 지부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들어가자마자 의아한 시선이 우르르 쏠려 떨어져나가질 않았다. 하야토는 그 이유가 자신의 복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눈길을 죄다 무시한 채로 안쪽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탁자에 앉아있는 꽤 많은 수가 인간이 아님을 알았으나 티 내지 않았다. 왠지 이치노마에가 이 파트너를 떨떠름히 여기는 이유를 하나 더 알 것 같았다.

“호오, 이건 예상치 못한 즐거운 손님이구먼 그래.”

마장 안쪽을 헤매고 있을 때 개인실 안쪽에서 커튼을 걷으며 길쭉한 인영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바 없이 느긋한 미소를 지은 장신의 레니게이드 비잉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야토는 절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삼키고 아라미타마가 주었던 서류 봉투를 그에게 건네며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이비츠 지부장이 전달해달라고 하더군요.”

“후후, 이 몸에게 말인가? 그걸 자네에게 시키다니, 그 이도 참 제멋대로야.”

레니게이드 비잉, 나라카는 별로 비밀스럽게 읽어보려는 기색도 없이 그 자리에서 안에 들어있는 서류를 꺼내 내용을 훑었다. 이치노마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대번에 노려보았을 행동이었지만 유감이게도 그는 여기에 없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나라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곧 서류와 봉투는 그의 손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휘날렸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전달을 확인했으니 자신의 일은 끝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그가 감당해야할 몫의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건네고 난 직후 마장을 나가도 누가 뭐라고 하지 못했다. 하야토는 자리를 뜨기 위해 움직였으나 어느덧 나라카는 마장을 나가는 길목 쪽에 옮겨 서 있었다.

“그러지 말고 마작이라도 한 판 하고 가지 그러나. 객을 홀대하는 주인은 없는 법이거늘, 대접할 기회는 주어야 그 사실을 증명해보일 수 있는 법일세.”

보통 마작하라는 게 대접이랑 같은 말인가? 하야토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알 수 있는 건 이 거대한 레니게이드 비잉 때문에 나갈 길목이 막혔다는 사실 뿐이다. 빙그레 웃는 얼굴은 늘 그렇듯 뜻 모를 표정이었고 하야토는 한숨을 쉬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마작은 해본 적도 없고, 방법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 가르쳐주도록 하지, 이 몸이 손수.”

나라카는 태연하게 소매를 흔들며 친절하게 말했다. 하야토는 나라카가 비켜줄 생각이 없으며, 자신이 이 상황을 명백히 피하고 있음을 그가 알아차렸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서 신부니 뭐니 하는 핑곗거리는 들어먹지도 않을 것이다. 레니게이드 비잉은 마침 무료했고, 그 때 적절하게 나타난, 호기심을 적당히 채워줄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하야토는 실랑이하며 시간을 끄느니 이 자와 마작 한 번 하는 게 더 빠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야토가 빠져나가길 포기한 것을 보자, 나라카는 즐거운 듯 웃으며 사제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마장의 가장 안쪽에 있는 탁자였는데, 여기에 있는 것 중에 가장 깔끔하고 번듯한 걸 보니 마장의 주인을 위한 자리인 듯 했다. 한 사람과 한 레니게이드 비잉이 자리에 착석하자 두 자리가 남았다. 나라카는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던 새까맣고 붉은 것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지엄한 왕의 명령에 따른 영혼들이 나머지 자리를 차지했다. 솔직히 꼴이 조금 웃기긴 했다.

“오늘은 가장 잘 알려진 규칙으로 할까. 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네. 머리 하나와 몸통 넷을 만드는 게 승리 조건이지.”

그렇게 말하며 나라카는 유려한 손길로 마작패를 뒤집었다 눕히며 규칙을 설명했다. 어렵지 않다기엔 꽤 여러 예외적인 상황도 있어보였지만, 노이만이 규칙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 번의 설명이면 충분했다. 손 안에 들어온 마작패의 서늘함을 느끼던 하야토가 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느덧 그의 설명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라카가 다시 한 번 손짓하자 자리에 앉지 않은 다른 영혼들이 포르르 날아와 설명을 위해 올려두었던 패를 전부 뒤집어 섞기 시작했다.

“이무기가 될지, 용이 될 지 선택해보게. 자, 본을 보이기 위해 첫 오야는 내가 하지.”

즐거운 목소리로 한 마디 이른 나카라가 영혼들이 섞어둔 패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하야토 또한 오늘 몇 번째 내뱉고 있는지 모를 한숨을 토하고 패를 끌어왔다. 규칙은 전부 이해했다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라, 그는 자신에게 들어온 손패가 어느정도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함께 탁자에 앉은 이들은 형체도 뭉그러진 영혼 둘과 늘 미소를 짓고 있는 레니게이드 비잉 하나라 표정을 읽어보기도 요원했다. 어차피 구태여 이기겠다는 마음도 없었지만 이 기이한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탁. 탁. 패가 앞에 놓이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한 바퀴 돌아 순서가 하야토의 앞에 왔을 무렵, 그동안 별다른 말 없이 마작패를 움직이던 나라카가 물었다.

“구하는 답은 찾을 수 있을 듯 한가?”

“…….”

하야토는 불편한 주제에 침묵하며 패를 하나 버렸다. 그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나라카는 나긋한 목소리로 다음을 이어갔다.

“많은 인간들은 해가 지면 이 마장으로 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인다네. 길을 알려줄 빛이, 하늘에 타오르는 불꽃이 져버렸기 때문일세.”

탁. 탁.

“불꽃은 죄인을 태우지만, 그 자체로 이정표가 되어 인간이 어디로 나아갈지 가르쳐주기도 하지. 이 불길은 와서는 안될 곳이라고 말이야.”

탁. 탁.

“말을 들어주는 착한 아이는 얼마 없지만……. 아하, 이런, ‘퐁’이로군.”

나라카의 차례가 돌아오자, 그는 앞에 놓여있던 패 하나를 가져왔다. 하야토가 버렸던 패였다.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사제의 시선에, 인간을 귀애하는 자비로운 영혼의 왕이 웃었다. 현명한 자이니, 구태여 그가 버린 패를 가져온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깨달음의 길이란 이토록 험난하고, 또 험난함을. 몸통을 하나 완성한 나라카가 말한다. 자, 다음은 그쪽 차례일세…….

판이 전부 끝난 후, 하야토는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에 다소 떨떠름했다. 몇 마디 묵직한 화두를 던진 뒤로는 아이들이나 가로마루, 지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최근 나라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게임에 대해 떠들었기에 그 와중에도 소리가 비는 일은 없었다. 가만히 두어도 말에 끊김이 없으니 하야토는 평소에 나라카와 이치노마에가 함께 서 있을 때 어떤 식일지 조금 더 상상할 수 있었다. 어쨌든 초보자의 운이 있더라고 해도, 그는 이 레니게이드 비잉이 다소 사정을 봐주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카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는지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사실 늘 웃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좋았는지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해가 질 때였다. 너무 오래 붙잡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야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라카는 딱히 붙잡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나갈 수 있을 듯 했다.

“아, 참.”

혹시 타케가미 지부는 나가려고 할 때 한 마디 붙잡는 게 습관인가? 하야토가 마장 입구에서 나가려다 말고 돌아보자, 나라카가 왼손바닥을 좍 펴서 내밀었다. 무슨 뜻이지? 손을 내밀라는 뜻인가? 미심쩍은 눈으로 손을 내밀자, 나라카가 그 위에 무언가를 톡 얹어주었다. 작은 종이봉투였고,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아까 보니 녹차를 들고 있더구먼. 그래서 나를 이긴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것을 주겠네. 가로마루 군은 꽤 좋아하더군. 잘 가게나. 안부도 전해주고.”

아, 그 녹차……. 마작을 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두고 잠시 잊었던 녹차 캔이 생각났다. 거기에 가로마루의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무언가 먹거리라도 되는 모양이다. 하야토는 돌아가면 미적지근해졌을 캔의 내용물을 자신이 마시고 이 봉투는 지부의 칠드런들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곤 마장 밖으로 나서며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단정한 모양으로 잘린 밤양갱이었다. 문득 이치노마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어느 시대 입맛이냐?”

AFTER SCENE 03 인因과 연緣 : :::: 【 フェラーリ 】 ::::

코사코 지부로 통하는 큰 길가에 들어설 때 즈음에는 벌써 오후 아홉시였다. 지부장도 가정이 있으니 돌아갔을 시간이었고, 그나마 지부에는 칠드런 몇과 당직을 맡은 에이전트 두 셋정도가 남아있을 것이다. 여즉 그의 휴대전화가 메세지로 불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카조메는 아직도 그가 타케가미 지부에 다녀온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들키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른 척 잡아떼기로 했다.

지부에 돌아가면 봉투에 든 양갱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 보관하고, 먹고 싶은 사람은 먹도록 메모지에 남겨두어야지. 탕비실에 둔다면 새벽 내 일을 하며 배고파진 에이전트 중 하나가 주린 배를 채울 게 없는지 기웃거리다가 반갑게 가져갈 것이다. 이 시간이면 지부 한 골목 건너의 만둣집이 문을 열고 있을텐데, 그것도 사다두는 편이 좋을까. 다들 좋아하니까…….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가며 반쯤 생각에 잠겨있던 하야토는, 골목 바로 앞을 뛰쳐나가는 인영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힐 뻔 했다. 다행이게도 적절한 때에 멈출 수 있었는데,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나자 멈추지 못했더라도 부딪힐 일은 없겠거니 했다.

“어, 신부님?”

“어딜 그리 급히 가는 중이었나요, 이즈미군.”

달빛을 받아 유독 새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의 소년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이즈미의 입장에서는 딱히 급하게 달리는 것도 아닌 듯 했지만,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게 지부 건물에 숙제를 두고 온 것 같아서 얼른 가져오려고 했어요. 다음주까지 해야하거든요. 그런데 신부님은 어딜 갔다 오세요? 이제 오시는 거예요?”

“타케가미 지부에요. 오늘은 아카조메 씨가 일을 나가 있어서.”

“앗……. 비밀로 해드릴게요.”

아카조메는 코사코의 지부장실에서 이벤트 호라이즌을 다시 만난 이후, 며칠간 내내 완전히 들떠서는 그 이야기를 자랑처럼 지부에서 몇 번이고 이야기하고 다녔으므로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이즈미조차 아카조메가 누구의 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면 아카조메가 몹시 속상해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즈미는 입가를 잠그는 시늉을 해보였다.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즈미는 그 옆에서 느릿한 신부의 보폭을 맞추어 가며 함께 걸었다.

“그런데 손에 든 게 왜 그렇게 많아요? 좀 들어드릴까요?”

“아뇨…….”

라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발 빠른 소년은 그의 품에서 서류봉투와 녹차캔을 빼갔다. 그리곤 의아한 듯 녹차캔을 이리저리 달빛에 비추어보았다.

“녹차 좋아하세요?”

“별로 그런 취향은 없지만, 받았어요.”

“맨날 없다고만 하고. 그건 뭐예요?”

툴툴거리던 이즈미는 다른 손에 들려있던 종이 봉투를 보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물었다. 아, 만났으니 조금 줄까. 봉투를 열고 양갱 한 조각을 꺼낸 하야토가 이즈미에게 건넸다. 그러자 이즈미는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냥 손에 건네줄 생각이었던 하야토는 조금 당황했지만 아이의 입에 양갱을 넣어주었다. 내가 주는 게 뭔 줄 알고 덥썩 받아먹지. 그런 점에서 하야토는 종종 아이가 살아온 환경의 따뜻함을 느끼고, 또 낯섦을 함께 받았다. 입에서 양갱을 우물거리던 이즈미가 몇 번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우와, 이거 밤양갱이네요. 맛있다, 어디서 샀어요?”

“……나라카씨가 주더군요.”

“아, 그 엄청 크고 길쭉한. 저 하나만 더 먹어도 돼요? 나중에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봐야겠다.”

연락처 교환은 또 언제 한 걸까? 미묘한 표정을 지은 하야토가 양갱을 다시 소년의 입에 넣어주었다. 조금 목이 막힌 것 같길래 들고 있는 녹차를 마셔도 괜찮다고도 했다. 시원스레 녹차를 마신 이즈미가 기분이 좋아진 듯 경쾌하게 걸어갔다.

“양갱 좋아해요?”

“네? 저요? 저는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데요. 아, 먹었더니 좀 배고프다. 우리 저 골목길 좀 돌아서 만두 사가요.”

“지금 더 먹으면 언제 자려고요…….”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까 괜찮아요! 좀 사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먹어요. 다들 좋아하잖아요, 그 가게.”

이즈미는 반대는 듣지 않겠다는 듯 하야토의 소매를 잡아끌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소년의 걸음을 따라 걷고 있자니, 하야토는 그가 한 말이 자신이 이 거리에 들어서며 했던 생각과 똑같음을 깨달았다. 언제 이 거리에 대해 이렇게나 많이 알게 되어버린 것인가. 언제부터 내일도 당연히 이곳에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하야토는 혼란스러웠다.

문득 그는 주머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메세지가 하나 떠올랐다. 밴디거와 타타라 만다라의 음모를 완전히 저지하고 난 후의 일이다. 자세한 사정은 보안상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그는 지켜야 할 소년을 노리는 위협을 잡았다는 내용의 메세지를 그의 스승이자 바티칸의 지부장에게 보내두었다. 얼마 안 가 답이 돌아왔다.

[그럼 언제 돌아올 예정이지?]

하야토는 그 메세지에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1년 전, 이름과 얼굴밖에 알지 못하는 아이를 부탁받았을 때,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 작은 지부에 대한 미약한 동정심과 책임감으로 그 부탁을 받아들였을 때. 아주 잠깐이라고 생각했다. 바티칸에서 적을 옮길 때에도 그렇게 설명했다. 임시일 뿐이고, 그 범인을 잡아 소년이 안전해지고 나면 끝날 일이라고. 그러니 가브리엘이 저런 메세지를 보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종종 바티칸에 있는 몇몇 동료들도 그가 언제 돌아올지를 궁금해했다.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개로, 나름 공들여 키운 인력이 다른 곳에 빠져 있는 것을 반길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러나 그 일 년은 지부의 에이전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들이 언제 지부에 남아있는지, 어떤 버릇이 있는지……그런 사실을 깨닫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이 며칠 간 하야토의 머릿속에는 그 메세지가 수도 없이 떠올랐고, 갈등했다. 이치노마에에게 자신이 아닌 지부에 대한 협력을 부탁하고, 그가 코사코의 지부원들을 보아주길 바라며 묻지도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했던 것 따위의 행동이 마음 속에 자리잡은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무언가를 알아버린 모양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변하던 표정이나 자신의 버림패를 보란듯이 보여주며 가져간 태도가 떠올랐다. 정말 그러겠냐는 것마냥. 몇 번 대면하지 않은 이들조차 아는데, 늘 얼굴을 보며 인사하는 눈치 빠른 아이가 자신의 마음에 내려앉은 갈등을 정말 모르고 있을까? 혹은 짐짓 어른스레 모른척해주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떠난다고 큰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 많은 아이가 조금은 섭섭해할 거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주춤 느려졌다. 어느덧 소매를 놓고 앞서 걸어가던 아이가 점점 멀어져간다. 홀로 걸어가는 것이 외로워보이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넘어지지는 않을지, 속상해 하진 않을지, 또 서러워 우는 일은 없을지……. 소년의 등이 골목의 그림자에 가려질 즈음, 하야토는 휴대전화를 꺼내 짧은 메세지를 썼다.

“거기서 뭐 하세요?”

고개를 드니 그림자로도 가려지지 못한 달빛을 받은 아이가 가만히 서있었다. 얼마든지 더 빨리 갈 수 있음에도 뒤를 돌아 멈추어있는 동행인이 다가오길 기다리면서. 하야토는 메세지의 전송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아이를 향해 걸어갔다. 띠링. 하고 메세지의 답이 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 딱 조금만 더.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정말로 그때까지만…….

[ 아직은 없어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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