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

소년의 기억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허황되고 아름다울까

머무르는 곳 by 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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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W: 민간인 살해 암시, 청소년이 당한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상해 상황과 정신적 충격 묘사

* DX3rd 시나리오 「Dirty pair」 캠페인 《Code Magenta》 테이블 플레이의 백스토리와 UGN에 대한 일부 개인적인 설정, 시나리오 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래 선정: Ref:rain (Aimer)


코사코 UGN 지부 훈련실이 있는 복도를 막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본관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웬일로 평소처럼 숨 가쁘게 뛰어다니지 않는 한다 지부장과 마주쳤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눈짓으로 인사하고 지나치려던 하야토의 발길을 상냥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하야토군, 혹시 지금 바쁘니?”

“……아뇨. 어차피 늘 별 일이 없는 건 아시잖습니까.”

지부장은 가끔 이곳의 젊다 못해 어린 에이전트들이 수행하기 어려운 몇 가지 임무를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별달리 대단한 일을 주지 않았다. 바티칸에 있었을 때야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오는 파견임무를 수행하느라 한 때 집이 수면실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했지만, 약 일 년전 코사코 지부에 임시로 적을 옮긴 후에는 너무 한가한 날이 이어지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동네를 돌아다니는 게 하루의 제일 큰 일과였다. 그러니 대낮에 지부 건물에 어슬렁거리는 한량 에이전트의 일정이 비어있음은 지부장이 누구보다 더 잘 알텐데, 구태여 시간이 있느냐는 질문은 그의 상냥함일 것이다.

“그럼 잠시 지부장실에서 차라도 한 잔 할까? 마침 좋은 찻잎이 선물로 들어왔는데, 마땅히 함께 할 사람이 없거든.”

“예, 그렇게 하죠.”

한다 지부장이 앞서 걸었고, 검은 옷을 차려입은 신부가 그 뒤를 따랐다. 걸어가다보니 지난 한 해동안 어느정도 안면을 익혔던 이들이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온다.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어떤 사람은 한심하게, 어떤 사람은 즐거워하며……. 그 수가 열을 넘었을 때 즈음 드디어 지부장실이 보였다. 원래 지부 건물이 이렇게 넓었던가. 꽤 걸은 것 같은데 이제야 도착하다니.

본래 개인실은 사람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사저의 방보다는 못하겠지만 따뜻한 햇빛을 온전히 받도록 배치되어 있는 손님맞이용 탁자나 소파, 그보다 좀 더 뒤로 물러나 창을 가리지 않도록 배치된 지부장의 업무용 책상과 책장따위가 이 지부를 어떤 사람이 맡고 있는지 무엇보다 선명히 보여주는 듯 했다. 처음 지부에 방문한 이들이 가장 먼저 오게 될 장소가 지부장실임을 생각하면 방문객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적절한 화분과 방향제까지 완벽한 인테리어다.

그를 돕기 위해 찻잎이 있을 찻장으로 다가갔으나, 번거로운 일을 손수 하기 좋아하는 한다 한조는 고개를 내저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하야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번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앉았다. 이런 번거로운 일은 보통 적당한 사람에게 대신 시켜도 뭐라고 반박할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그가 아는 ‘어른’들은 결코 사소하고 번거로운 일일수록 남에게 넘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는 안될 이유를 알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고, 자신은 아직 아닐지도 모른다.

지부장실에 마련된 작은 탕비실에서 몇 번 소음이 나고, 곧 희미하게 허브의 향이 풍겼다. 차를 우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찻잔과 주전자가 올려진 트레이를 드는 일 정도는 지부장에게서 넘겨받을 수 있었다. 하야토가 찻잔을 탁자에 두는 동안 한다 지부장은 조금 짭짤한 맛이 나는 비스킷과 몇 주 전 선물로 받은 듯한 브라우니, 마들렌 등을 접시에 솜씨 좋게 담아 가져왔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을 때 즈음에 벽에 걸린 시계가 시야에 걸렸다. 오후 4시. 딱 좋은 시간이다. 티타임이 영국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얼마 간은 오늘 날씨는 어떻느니, 최근 동네 분위기는 이렇고, 저렇고, 별 정보값이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잔 안에 든 찻물이 절반 쯤 줄어들었을 무렵, 하야토는 상대의 묘한 표정을 읽었다. 난처함. 조심스러움. 안쓰러움. 걱정……. 그는 어떤 때 자신을 대하는 ‘어른’ 들이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어쩔 수 없이 하야토는 저 머나먼, 고향이 되지 못한 땅에 있을  스승을 연상하고 말았다.


“좋아, 이번이 몇 번째지?”

“몰라요.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세고 다니겠어요.”

어쭈, 이제 말대꾸도 따박따박 한다 이거지. 땅바닥만 노려보느라 뒤통수를 훤히 보여주는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던 리암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암 디아즈, 가브리엘이 통칭 ‘장미십자회’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있는 바티칸 UGN 지부의 지부장을 내정받게 된 뒤로는 공식적인 인사이동이 있기 전까지 지부장의 일부 업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 년간 보고서에 단연 압도적으로 이름을 올린 녀석이 하나 있었으니…….

“기억이 안 나면 내가 말해주마, 라파엘. 마흔 세번째다.”

세례명이자 코드네임 라파엘, 2년하고도 7개월 전 정식 서품을 받아 신부라는 대외적 직위도 얻게 된 바티칸 지부의 에이전트였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라파엘은 마흔 세 번 시말서를 작성했다. 일반적인 기업이었다면 2년간 40번 넘게 시말서를 쓸만한 짓을 저지르는 직원이 남아있을 수 없겠지만 UGN은 어느 지부든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처지였고, 거기에 바티칸 지부는 다소 특수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더더욱 인력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을 듣고도 “앞으로 일곱번 더 하면 딱 떨어지고 좋겠네요.” 따위의 말을 지껄이는 녀석에게 시말서와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소소한 징계, 진심 어린 반성을 시키는 일 말고는 딱히 뭘 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 여기저기 붕대와 거즈를 덕지덕지 붙인 라파엘이 병실에 드러누워 휘갈긴 시말서를 건네받는 일은 지겹기까지 했다.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쉰 리암이 손에 든 시말서를 대강 흔들었다. 성의 없이 휘갈긴 필체로 내용을 꽉꽉 채워둔 데다 그 와중에 대강 훑어보니 지부 시스템 개선점까지 덧붙인 게 보여여 가증스러울 지경이다. 지금의 지부장이 대신 왔더라면 여기에서 뭐라 더 몇 마디를 얹었겠지만…….

“루카.”

“…….”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알고 있잖아.”

부드럽게 어르는 말에 청년은 대답하기 싫다는 듯 입술을 앙 다물었다. 저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변함없다. 리암은 10여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종종 그가 라파엘이 되기 이전, 루카 디베르티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고는 했다. 그만큼 잊기 어려운 강렬한 풍경이었다.

그 때는 아직 리암, 가브리엘도 꽤 젊은 에이전트에 속했다. 열의 넘치고, 뭐든지 노력만 있다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던 청년이었고, 실제로 바티칸 지부의 기대주 취급을 받으며 세계 각지에서 성당을 통해 올라오는 어려운 임무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갔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며 구원자가 된 기분에 도취되어 있던 것 같다고도 회상했다.

세계에는 수많은 UGN 지부가 존재하지만, 그 중 이탈리아 지부 중 몇은 다른 국가와는 다른 별도의 시스템이 하나 있었다. 교황청이라는 존재 탓이다. 아무리 그들이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의 존재를 숨긴다고 해도 신에 대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교황청은 논의 끝에 레니게이드를 부정하는 것보다 협력 대상으로서 움직이는 편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일부 UGN 인력과 협력해 교황청의 시스템과 연계하는 UGN 바티칸 지부를 세운 뒤 ‘구마사제’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실제로 비오버드의 눈에는 레니게이드의 힘과 악마의 초자연적 능력이 그리 다르지 않게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바티칸 지부에서는 수천년간 그들이 구축해놓은 시스템을 타고 올라오는 정보를 받아 파견 임무를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했고, 밀리노 지부에서 올라왔던 지원 요청도 그런 종류였다. 밀라노의 어느 마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버드 집단이 움직이고 있으며, 그 움직임이 불온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그 요청에는 접근과 정보 탐색은 이미 지부에서 시도해보았으며, 에이전트 몇이 크게 부상을 입었으니 심상치 않아 지원을 해달라는 이야기도 섞여있었다.

자연히 상당한 위험등급으로 분류된 임무는 바티칸 지부의 기대주에게 할당되었고, 가브리엘은 이번에도 별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밀라노로 향했다. 이전과 그리 다를 것도 없겠지. 위기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구한다. 그거면 되는 일이다다. 시급한 일이라고 하니 딱히 게으름을 피우며 간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이후를 생각하면 충분한 대처였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더 빨라야 했다. 

밀라노에 도착한 가브리엘이 정체 모를 오버드 집단의 흔적을 추적하다 닿은 그 작은 가정집은 겉보기에는 꽤 깔끔했다. 단정한 단독주택에, 새하얀 벽돌로 지어진, 길가의 다른 집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단란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이어지는 흔적이나, 안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레니게이드의 반응에 이 집이 그들의 거처, 혹은 위장처라고 예상한 가브리엘과 동료들은 단번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은 예상했던 것보다 딱 열 배 정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집에 공기가 밀어닥치는 순간 바람을 타고 죽음의 향이 빠져나갔다. 밖과 다르게 집 안은 온통 엉망이었다. 벽지와 바닥은 혈흔이 가득하고 한 때 살아있었을 무언가가 집 안을 굴러다녔다. 여러가지 사건을 보았지만 이 정도로 망가진 현장은 흔치 않았다. 어쩌면 바깥에서 본 풍경이 너무나 평소와 같은 일상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 괴리감이 느껴진 건지도 모른다……. 함께 들어왔던 동료들도 잠시 말을 잃은 채 문간에 서 있었다.

그 때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거실 안쪽에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현장에 놀라 눈치채지 못했던 게다. 놀란 가브리엘이 안쪽으로 달려가자 어린아이가 한 명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레니게이드의 힘이 느껴졌다. 이 아이가 집에서 느껴지던 반응의 근원이다. 오버드라도 아이라면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 특히 FH과 관련이 있다면. 때문에 몇 사람은 조금 주춤했지만, 기브리엘은 현관 신발장에 있던 사진의 금발의 소년과 이 아이가 같은 얼굴임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니? 말할 수 있겠어? 괜찮아?”

“…….”

“내가 손을 대도 괜찮겠어?”

“…….”

무슨 말을 하던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말을 들었다는 반응조차 없었다. 혹 가브리엘은 아이가 이대로 죽은 게 아닌지 확인까지 했다. 졈도 아니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걸까? 그는 현장의 수습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아이를 안아들었다. 차라리 거부를 하거나 비명이라도 지르면 좋을텐데, 아이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반응도 하지 않은 채 헝겊인형처럼 들렸다.

안아들고 나서야 그는 아이의 상처를 제대로 확인했다. 아직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상은 대부분 깊지 않았지만, 분명한 치명상의 흔적이 옷가지에 남아있다. 서둘러 병원으로 데려가야지, 하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햇빛이 들어왔기 때문인지……새까맣게 말라붙은 혈흔의 흔적이 남은 마루바닥을 보았다. 질질 끄는 듯한 걸음의 작은 족적이 이리저리 헤메는 것처럼 집안 곳곳에 이어졌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때만큼 가브리엘의 인생에서 참담한 순간이 없었다. 이 애는 이미 가족의 죽음을 전부 확인했다. 그들은 아이가 부정하지도 못할 만큼 충분히 그 사실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절망하고 난 뒤에야 도착하고 만 것이다…….

그 뒤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루카 디베르티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피렌체에 있는 홈에 맡겨졌다. 잘 지낼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잘 지내길 바랐건만, 그 뒤로 간간히 소식을 알아볼 때마다 들리는 이야기란 소년이 도저히 가만히 있질 않는단 말투성이었다. 몇 번이고 제멋대로 홈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오고, 위험한 기밀을 마음대로 파헤치고 현장에 숨어들고……. 그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 곤란하다고 말이다.

가브리엘은 홈에 맡기기 전에는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숨을 쉬는 일 말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던 아이가 기운을 차렸다고 안도해야할지, 혹은 사고뭉치처럼 헤집고 다니는 것에 이마를 짚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뭘 하고 싶은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기 때문에 더 그랬다. 결국 그 상태로 몇 년이 지나자, 가브리엘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안타까움과 책임을 통감하며 방황하던 소년을 바티칸 지부로 데려왔다.

그로부터 약 6년이 지나, 소년은 성인이 되어 그를 돌보아 준 이의 뜻에 따라 신부가 되었다. 이제 말은 곧잘 하는 것을 넘어 얄미울 수준까지 혓바닥이 길어졌고, 뛰어난 훈련결과에 따라 여러 쉽지 않은 임무도 해낼만큼의 실력이 되었다. 그러나 제멋대로에 불리할 때는 딱 입을 다물어버리는 습관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날은 루카 디베르티의 어떤 부분을 열셋이라는 나이에 영영 박제시켜버렸다. 리암조차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무라다가도 결국 과한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고 말을 줄이고 말았다. 

지금도 봐라, 대답하기 싫다고 시위하듯 침묵했으면서 자신의 기분을 확인하려는 마냥 시선을 올리는 꼴을. 눈칫밥 먹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즉시 루카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바뀌었다. 리암의 얼굴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버린 모양이다. 하필이면, 노이만이라서. 

“됐다, 됐어. 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내가 늘 하려는 얘긴 이미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리암은 무시했다. 이렇게 모른 척은 해도 루카가 일으키는 ‘문제’는 늘 그 자신 혼자만의 일로 끝났다. 그를 신학대학에 보낸 것도, 에이전트이자 사제로 추천한 것도 리암이 밀어붙인 일이므로 ‘문제 많은 에이전트를 추천’한 리암의 ‘책임’이 되지 않도록 손 쓴 것이다. 이제 막 스무살이 좀 넘었고, 거리낌없이 도움을 청해도 될 나이인데 이미 아이는 혼자 지내는 법을 터득한 듯 했다. 아니면 남의 도움을 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표현해야할까. 어느 쪽이든 루카 디베르티가 타인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루카, 네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는 모르지 않아.”

“……네.”

“하지만 가끔은…….”

짧은 상념은 비스켓이 부스러지는 소리에 끝났다. 루카─하야토는 별 달리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단 것처럼 손에서 부스러진 비스켓을 자연스럽게 입에 털어넣었다. 여전히 한다 지부장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걱정스러운 표정…….

가브리엘은 그가 무슨 사고를 치고, 어떤 실망을 안겨줄 행동을 하든, 종종 화를 내다가도 결국은 저런 표정을 지었다. 한 때 하야토는 가브리엘이 말을 잃어버렸던 어린 소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다 지부장은 그 사건에 대해 몇 줄의 문장으로 접했을 뿐임에도 다를 바 없었다. 이 사람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리 안타깝다 여기는건지. 나의 무엇이 사람들에게 비탄을 부르는지…….

“그렇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하야토군이 하루에 한 번은 마을을 순찰하고 있으니 나도 덕분에 안심이야.”

“별 말씀을요.”

“늘 이즈미군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도.”

그 말에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지만, 한조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미소지었다. 딱히 용건도 없는 별관의 칠드런 전용 훈련실을 매일같이 갈 이유같은 건 묻지 않아도 명확했다.

“말을 걸어보진 않을거니?”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지부장……. 그 애에겐 모르는 사람인 편이 나을텐데요.”

“그런가,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이즈미군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처음 부탁했던 것 말고는 더 부담을 주지는 않을테니까.”

만나봤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그 날 너를 구했던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 다음은? 말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그는 가브리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마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이해하고, 다독여주거나 인생을 전부 책임질 수도 없다. 그 아이를 마주하고 이야기해봤자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자신을 거둬준 스승의 열화판을 흉내내는 것 뿐이다.

하야토는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어떤 부분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전히 어렸다.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었다……. 어쩌면 한다 지부장이 그에게서 보는 비탄과 슬픔은 그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스무 해가 다 되어 가도록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라니, 얼마나 작아보이고, 서글프겠는가, 이미 자라버린 어른들이 보기에는.

지부장은 그 답을 듣고도 별달리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하지만 가끔은 스스로도 신경써주도록 해, 하야토군.”

“……네?”

그렇게 말했다.

“이즈미군에 대한 소식은 늘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부탁은 했지만, 조금 걱정될 정도로. 그런데 하야토군은, 일 년 정도 밖에 알고 지내지 않았지만……가끔은 꼭 내일은 오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

그리고 하야토는, 불리할때 늘 가브리엘의 앞에서 그랬던 마냥 버릇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즈미군을 지켜주길 바랐지만, 그건 하야토군의 안위와 맞바꾸어주길 바랐던 건 아니야. 그러니 혹시 이즈미군과 함께 움직일 일이 생기더라도……. 그 뒤로도 조곤조곤 이어진 상냥한 걱정에도 모조리 침묵으로 대응하길 택하고도 10여분이 지난 뒤에야 지부장의 걱정 어린 상담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부장들이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하야토는 복도를 걸어가며 한다 한조가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걱정된다며 품에 잔뜩 안겨준 찻잎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불면증을 완화하고 날카로운 신경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어주는……뭐 대충 그런 효능이 있다고 말했다. 불면증이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어쨌든 저런 게 지부장의 덕목이라면 하야토는 결코 될 수 없을 만 했다.

찻잎은 집에 가져다두는 편이 좋겠지. 찻잎 포장에 적힌 설명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든 하야토는 지부 건물 바깥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으로 익숙한 사람이 지나갔다. 목소리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손에 꼽지만, 늘 복도 창문 너머로 보던 모습. 빛을 받아 선명한 하늘색을 띄는 곱슬머리의 소년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가, 웃었다가, 곧 신나게 달려나갔다.

그 모습이 어딘가 아득하고, 그립게 느껴져서.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시절에 대한 시큰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금발의 소년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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