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Royal 下
Repackage/ Title. 우연偶然도 연聯이다
온 세상의 고요를 졸여 놓은 듯 잠잠하기 그지없던 방 안의 평화를 깬 건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나란히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정한과 승관이 반사적으로 번쩍 눈을 떴다. 이어 현실을 자각한 정한의 입에서 좀비의 신음처럼 버거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아아 진짜 미치겠다. 승관이 몸부림치며 베개 양끝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내리 이틀 밤을 꼬박 지새다시피 했으니 누적된 피로는 천근만근의 몸뚱이를 일으켜 세울 리 만무했다.
“인간적으로 한밤중에 응가는 하지 말자 제발⋯⋯.”
정한이 비틀비틀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아기 침대 안으로 손을 넣어 기저귀를 확인하자 안도인지 답답함인지 모를 한숨이 옅게 터져나왔다.
“우리 연이, 쉬야도 안 했는데 왜 울어. 아빠 없어서 놀랬어요? 아빠 여기 있네.”
떠지지도 않는 눈을 겨우 뜬 정한이 아이에게 까꿍 놀이를 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승관에게는 그만큼 처량한 애원조가 따로 없었다. 고작 칠십 센티미터 남짓의 아이 앞에다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으니. 이것은 아이의 수면 패턴이 얼마 전 백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돌변해 버린 탓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된 이유는 알 방도가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승관 또한 그 시기에 똑같이 밤낮이 바뀌어 부모를 힘들게 했다는 충격적인 과거사만 듣고 말았다. 돌 넘기면 괜찮아질 거야, 대수롭지 않게 흘러나온 대답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남은 9개월이 이등병의 앞날처럼 까마득했다. 앞으론 번갈아 가며 낮잠이라도 자자고 정한과 나눈 타협조차 주간의 업무량 때문에 현실화될 수가 없었다. 기어이 아이를 안아들고 토닥이는 정한을 향해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승관이 버릇처럼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부신 빛을 참으며 몇 차례 톡톡 액정을 굴리자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중 한 곡이 적당한 볼륨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노래라는 점에선 여타 아기들과 다르지 않은 비법이었다. 그 ‘노래’가 좀 결이 달라서 그렇지.
“연이 나중에 가수 되겠네. 대중 가요도 좋아하고 목청도 우렁차서.”
정한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빠가 미안해, 우리 아기 가수로 못 키워 줘서. 지금 신파극 찍을 타이밍이니? 승관이 황당한 얼굴로 그 꼴을 지켜봤다. 겨우 잠든 아이를 침대에 도로 내려놓고 슬금슬금 돌아온 정한이 승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승관아.”
“어.”
“연이 말야. 아무리 봐도 널 닮았어.”
“⋯⋯.”
“화가 많아, 애가.”
좋은 소리 아닐 줄 알았다. 승관은 힘이 없어 정한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원래의 부승관은 이렇지 않았는데. 변한 건 윤정한을 만난 뒤였다. 좀 더 정확히 되짚어 보자면 그에게 코가 꿰어 황실에 입궁한 그 시점 즈음을 어림잡아야 했다. 승관은 자신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 돌이킬수록 사랑앓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널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내가 더 사랑한 죄⋯. 열병처럼 치르는 지독한 이 연심은 나을 방도도 없댔다. 그러니 이것들은 깡그리 그 업보일 테다.
대한제국 유민愉旼 4년의 동궁전. 이곳에선 주야를 막론하고 울려 퍼지는 파릇파릇한 생명력의 증거가 살아 숨을 쉬고 있다. 탄생일에 접시꽃을 품은 아이는 밤을 마시며 자란다. 그러나 그깟 잠쯤 빼앗겨도 그것이 사랑이다. 두 배로 불어난 부성애가 차기의 국본을 힘껏 떠안았다.
황태자 윤정한과 황태자비 부승관의 유일한 소생이자, 현 제국의 무이한 황태손 윤부尹夫연聯이었다.
Young And Royal (下)
Repackage/ Title. 우연偶然도 연聯이다
“발을 이 선에 나란히 두고. 팔을 뻗어. 손가락은 여기다 받치고.”
입술이 꾹 다물렸다. 집궁執弓한 지 불과 일 개월, 활을 잡은 승관의 팔은 아직 단단하지 못해 정한이 잡아줘야만 했다. 처음에야 새롭고 낯선 것이었으니 몸 아픈 줄 모르고 몰입했다 쳐도 이젠 허리춤의 궁대마저 무겁게 느껴질 판이었다. 등을 가볍게 감싸오던 정한의 온기가 서서히 떨어졌다. 심호흡을 한 승관이 신중하게 원거리의 과녁을 조준했다. 화살의 궤도가 깊은 포물선을 그렸다. 과녁이 수십 보 떨어져 있어 꽂히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만큼 승관의 활속이 느린 탓도 있었겠지만. 과녁 맨 아래 가까스로 붙듯 꽂힌 화살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 파들거렸다. 승관의 성에 들어찰 리 만무한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전통 활터는 황족들의 취미 생활 및 궁술 연마 장소로써 여즉 견고히 보존되어 있었다. 승관은 거기서 활쏘기를 배웠다. 정한을 포함하여, 예로부터 모든 황손들이 한 번씩은 거쳐 간 무술이라기에 호기심이 생겨 덜컥 시작한 거였다. 허나 이 궁술이란 게 단순한 사법이랴. 운동 경험이라곤 중등 체육 교과 과정 속 종목 체험들에 불과한 채로 평범한 일반 학교에서 십이 년을 보내 왔던 승관으로서는 낯설기만 한 자세와 활의 강한 탄성에 몇 번이고 근육통을 앓았었다. 화살을 쏘고도 그 사거리와 정확도를 가늠하는 데 이른 지금은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칭해도 실상 손색없었다. 그래도 저건 꼬라지가 좀. 할 말을 잃고 서 있노라니 정한이 옆에서 짝짝 박수를 쳤다. 와 우리 승관이 너무 잘했다, 명중입니다 명중! 시종장 김다경도 칭찬 일색이었다. 진짜 개쪽팔리니까 그만 좀 해 줄래. 절로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긴장한 탓인지 어깨가 욱신거려 정한에게 각궁을 떠넘겼다. 정한이 몸풀기 삼아 활시위를 주욱 당겨 보았다.
“쏠 거면 깍지 끼고 해.”
승관이 손가락에 낀 덕각지를 빼며 말했다.
“괜찮아. 이거야 뭐.”
까딱하면 손가락 나가 미친 놈아. 승관은 제 궁대에서 화살을 빼가는 정한의 손에다 잽싸게 깍지를 끼웠다. 정한은 씩 웃으며 위치를 매만지고선 익숙한 자세로 과녁을 향해 섰다. 양 발을 사선으로 놓은 뒤 상체를 자연스레 세우고. 줌통을 잡은 손을 앞으로 뻗고 시위를 쥔 다른 손으로 고자에다 화살을 얹었다. 순식간에 차갑게 돌변한 정한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과녁의 중앙을 향했다. 그 단단하던 활시위가 가볍게 당겨졌다. 승관은 한 걸음 물러서 정한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쿵쿵. 심박의 십 자리 수가 발사되듯 올라갔다. 또다시 속내에 재난이 불어닥친다. 대지진이었다. 그 감각을 느끼느라 저도 모르게 참았던 날숨은, 정한의 엄지손가락이 시위에서 떨어지자마자 탁 터져나왔다. 탄성과 비슷한 소리였다. 승관을 돌아본 얼굴이 여지없이 예쁘게 웃었다. 화살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가 정한의 목표였던 곳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꽂혔다. 1장 8척 어사御射용 웅후의 6척짜리 정곡. 깔끔한 명중이었다.
내 남편 활도 잘 쏘고. 못하는 게 없다 진짜. 다가가 폭 안기자 정한이 자연스레 승관의 허리춤에서 궁대를 풀어 활과 함께 김 실장에게 전달했다. 그런 뒤에야 승관을 꼭 마주안고 흔들흔들 토닥였다. 사람들 본다고 가벼운 애정 표현조차 질색했던 아이는 어디 가고 이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안겨오는 걸 보면 새삼 신기해졌다. 그게 다 정한이 길들인 탓인데도. 아무튼 이래저래 껴안기 좋은 계절이었다. 푹푹 찌던 더위가 조금 가시나 싶더니 어느덧 날이 제법 선선해져 있었다. 정한의 생일이 코앞이었고, 그 뒤엔 결혼 기념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또 승관의 생일, 아이의 생일⋯.
“연이 보러 가야 돼.”
불쑥 터져나온 승관의 말에 정한도 따라 대꾸했다.
“나도 보고 싶어.”
“형은 안 될 텐데.”
“태자 전하께선 외교 방문 건으로 긴히 주재하셔야 할 회의가 있으십니다.”
“언제?”
“이십 분 뒤에요.”
김 실장이 시간을 확인했다. 딴 생각 말고 빨리 가자는 재촉이었다. 거 봐, 승관이 실소하며 정한을 떠밀었다. 떨어지기 싫어 죽상을 하고서도 별 말 없이 밀려나는 얼굴이 꼭 예전을 상기시켜 새삼 웃음이 났다. 업무에 치여 원할 때 태손을 보지 못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좀체 적응하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 보았자 한두 시간에 불과할 텐데도. 잘 다녀와, 승관이 입술을 쭉 내밀어 허공에다 뽀뽀를 했다. 당돌한 인사치레일 뿐이었는데. 성큼 걸어온 정한이 말랑한 입술에다 쪽 입을 맞추고 돌아갔다. 움직임이 너무도 재빨랐던 탓에 경탄하거나 몸을 물릴 새도 없었다. 승관은 한동안 멍하게 서서 멀어지는 정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고생 많았어 유빈이, 어린 나이에 팔자에도 없는 육아를 하느라 퀭해진 서 주임의 눈가를 승관이 안쓰럽게 살폈다. 아무리 황실 태의로부터 엄중하고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지만 슬하에 둔 자녀 하나 없는 그에게 십육 개월짜리 아이를 홀로 맡긴다는 건 가히 취업사기나 다름없었다. 분명 처음 배당된 보직은 그저 성심을 다해 태자를 보필만 하면 되었던 시종관이었는데, 그 태자가 사랑에 미친 까닭으로 머지않아 후사까지 보더니 난데없는 양육까지 하게 생겼더랬다. 내가 지금 베이비시터인가 시종관인가. 게다가 나름 소질은 있어서 목소리를 바꿔 가며 인형놀이를 해 주다가도 습관처럼 발생하는 정체성 혼란을 바로잡아야만 했단 소리다. 하지만 여즉 서 주임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꼽으라면, 동궁전 시종관들에게만 특별히 하사되는 보너스 월차 및 급여와 다행히도 별나지 않게 성장하여 저를 가족처럼 잘 따라 주는 황태손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은혜들의 권한이 태자궁의 수장인 승관에게 있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았다.
“괜찮습니다. 태손께서 태자비 전하를 닮아 아주 순하셔서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정말? 연이 나 닮았어? 나는 빼박 윤정한 주니어라고 생각했는데.”
“두 분께서도 서로 닮으셨잖아요.”
“말이라도 고맙다.”
어라⋯ 진짠데 안 믿어 주시네, 서 주임이 뚱한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승관은 제 품으로 안겨드는 연을 가만 받았다. 외모는 정말로 윤정한 판박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황손 유전자가 조상들의 말마따나 더 우월하긴 한 건지. 괜시리 억울해질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아이에게서 승관이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취향 또는 성격 면에서나, 성장 과정 면에서나. 아이의 건강검진을 도맡아 하는 태의와 서 주임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그러했다. 애착 인형을 꼭 껴안은 연이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던 걸 승관의 눈앞으로 뻗어 보였다. 가볍게 흔들기만 해도 오리 모양의 캐릭터가 거세게 헤드뱅잉을 하는 장난감이었다. 매일 가지고 놀던 건데도 날마다 흥미로운지 되풀이되듯 똑같이 재미있어하는 게 신기했다. 아이들은 다 이런가. 나 또한 옛날에 이랬을까. 승관은 그런 아이를 향해 곧잘 반응해 주면서도 틈틈이 겨를을 엿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였다.
“유빈아.”
“예.”
“잠시 휴가 갔다 올래? 2주 정도.”
“예?”
서 주임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휴가. 휴가라고 했다. 입궁 후 스스로 월차나 연차를 써서 낼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상관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내려지는 특별 휴가 기간이라. 서 주임은 일순 너무 놀라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왜요? 혹 소신이 뭐 잘못한 것이라도⋯.”
“너 그동안 대체 윤정한한테 어떻게 시달렸길래 휴가도 죄스럽게 받아?”
승관이 미간을 좁히자 서 주임이 펄쩍 뛰었다.
“아뇨, 전하. 그것이 아니라 본래 황궁에서 특별 휴가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럽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럴 걸요.”
“그런가? 그냥, 우리가 너무 고생시키는 거 같아서. 나한테 유급 휴가 줄 권한 정도는 있는 거 맞지?”
“그럼 그동안 태손 전하는⋯.”
“걱정하지 마. 형이랑도 합의된 거니까 너 원할 때 아무때나 휴가 내고 쉬어.”
서 주임의 목전에 굉대한 빛무리 한 줄기가 스쳤다. 우리 태자님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좋아서 어쩌지. 지금 서 주임의 앞에 앉아 있는 건 태자비가 아니라 광원 하나였다. 그 자체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항성. 내 이 망극한 성은에 평생 충성하리라. 서 주임은 오늘도 평생직장을 꿈꾸었다. 아무리 소란스럽고 피곤한 일터여도 동궁전만큼 복지가 탁월한 곳은 드물 테다. 개고생 끝에 실장 진급을 불과 일 년 앞둔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아 주는 이는 태자와 태자비뿐이었으니.
“너무 좋아하진 마. 연이 서운해한다. 너 되게 잘 따르던데.”
승관이 장난스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연이 자꾸만 ‘무야, 무야’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승관이 물병을 쥐어 주었지만 싫다 하는 걸로 보아 물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젠 물이 좀 차가울 텐데. 그럼 쪼꿈만 놀자?”
연이 방긋 웃으며 승관의 목을 감싸안았다. 승관이 서 주임을 향해 턱짓하며 눈을 찡긋했다. 황공한 얼굴을 하고 편전으로 물러나는 그에게 밝게 손을 흔들어 보인 승관이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희수당 뒤 약수터와 멀지 않은 곳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쪼르르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부근을 조금 파내고 돌을 얹어 길을 만들어 주었더니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가 된 거다. 연은 그곳을 유난히 좋아했다. 맑게 구르듯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찰박찰박 치는 손장난은 가장 즐겨 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서 주임이 정전의 서편에 있는 큰 누각에도 데려가 보았지만 큰 연못이 낯설었던지 신기해하기보다는 겁을 먹었다더랬다. 황궁을 견학하러 오는 관람객 중에선 연못 안에 자리한 아름다운 누각을 보기 위해 손수 걸음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정한은 그 빼어난 절경 앞에서 농담처럼 ‘얘가 아직 뭘 볼 줄 몰라서 그렇다’고 했다. 거기엔 승관도 동의했다. 제아무리 예술성을 띠는 건축물이어도 아이에겐 당장 다감한 존재가 아니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누각 아래 연꽃을 한가득 덮고 있는 못은 아이를 품어줄 만큼 소박하거나 다정하지 못했다. 연은 서 주임의 품에 안겨 제 이름과 닮은 꽃을 멀리서만 지켜보다 도로 동궁전으로 와야 했다.
애착 인형을 제 배와 무릎 사이에 가둔 연이 조심스레 쪼그려 앉아 손을 적셨다. 물이 정말 차가워지긴 했는지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픽 웃은 승관이 아이의 겉옷을 단단히 매어 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토람이는 아빠 줘. 불편하잖아.”
연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인형이 잘 빠지도록 몸을 뒤로 물렸다. 승관은 흙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뻔한 인형을 용케 잡아냈다. 홀가분해진 아이가 수면을 힘주어 내려치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재미있는지 만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덩달아 물보라를 맞은 승관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물질이 더 이어졌다. 이러다간 쫄딱 젖을 것을 예감한 승관이 허둥지둥 연의 눈앞에 인형을 내밀었다. 촘촘한 단모에 드문드문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연아, 토람이 읏추. 팡팡은 하지 말자, 응?”
안고 이셔, 연이 승관의 품에 인형을 밀어넣으며 당부했다. 토람이가 아니라 내가 춥다고 내가. 지지 않고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물 이렇게 튀니까 재밌어?”
“웅.”
당돌하고 간단한 대꾸에 승관이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구나, 재미있구나. 재밌으면 됐지 그래. 까맣고 맑은 눈동자가 햇빛을 머금자 그 속에 담긴 깊은 우주가 승관을 향했다. 꼭 누굴 보는 것 같아 잠시 심장이 아렸다. 그러느라 인형을 쥔 손을 애매하게 놓아갈 무렵이었다.
“까꿍!”
돌연 뒤에서 어깨를 짚어오는 손길에 소스라친 승관이 파득 몸을 떨었다. 인형은 기다렸단 듯 물에 퐁당 빠졌고, 정한을 발견하고 환히 웃던 아이는 이윽고 얼어붙어 좁은 수면을 동동 유영하는 인형을 넋 나간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차. 정한이 아연해져 입을 벌렸다. 말 그대로 애착 인형이었다. 세탁은커녕 한시라도 몸에서 떼어 놓지조차 못하는 영아기의 분신이란 의미였다. 주기적으로 아이가 잠든 틈을 타 비밀 요원마냥 몰래 인형을 빨아오던 수 개월 간의 노력들이 한꺼번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승관이 다급히 건져올렸다. 정한을 탓할 새도 없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젖은 인형을 탈탈 털며 아이를 안아든 승관이 정한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내가 진짜 윤정한 때문에 못 산다.”
“미안해, 토람이 들고 있는 줄 몰랐어⋯.”
“안 들고 있었음 그래도 돼? 애까지 놀랐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갑자기 와!”
승관이 인형을 들어 연에게 보여주었다. 흠뻑 젖어 뚝뚝 떨어지는 물기가 꼭 제 눈물 같았다. 속내에서 흐르는 땀일지도 몰랐다.
“연아, 토람이 세수했대. 어푸어푸 해서. 연이만큼 예쁘다 됐네?”
연이 훌쩍이며 깜빡였다. 고여 있던 닭똥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예삐야?”
“응. 아야 아니구 예뻐진 거야. 그러니까 그만 울어.”
애원 섞인 어름에 발개진 눈가를 문질러 닦은 연이 다시 인형을 안으려 두 팔을 뻗었다. 이럴 때 서 주임이 있었더라면. 승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연이랑 많이 놀아서 오늘은 피곤한가 봐. 낸내하고 싶대.”
어떡하지? 아바마마가 잘못했으니까 낸내해주세요 할까? 우리 연이는 이제 맘마 먹으러 가야 하잖아 그치. 어금니 꽉 물린 음성이 정한을 종용했다. 어 으응, 정한이 홀린 듯이 인형을 받아들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승관의 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정말이지 도통 경황이 없었다. 어떻게 별궁까지 걸어갔는지 기억도 안 났다. 승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식탁에 앉아 아이에게 달걀찜을 떠먹이는 중이었다. 그 전에 얼핏 어떤 대화가 오간 것도 같았는데. 다행히 중요한 화제는 아니었던지 승관에게 되물음이 돌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정한이 남몰래 젖은 인형을 흔들며 말리는 동안 아이는 무구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승관이 주는 밥을 답싹답싹 잘도 받아먹고 있었다. 아기 의자 위에서 야무지게 엉덩이를 당겨 앉은 채, 짧고 통통한 다리를 파닥파닥 흔들면서. 상석에 앉은 황제가 비어가는 밥그릇을 흘끔 보고선 손짓으로 시종관들을 불러들였다. 승관의 식사를 위해 잠시만 태손을 맡아 주라는 뜻이었다. 평소 자신과 자주 응대하던 시종관들이 오자 연 또한 별달리 싫어하는 기색이 없어 다행이었다. 아이가 식당을 나가고 두 손이 자유로워지니 거사라도 끝마친 양 절로 한숨이 새었다. 배가 쪼르륵 곯았다. 눈앞의 진수성찬이 그제야 보였다. 승관은 큰 술을 뜨면서도 자신을 향한 황제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복스럽게 밥을 씹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흡족한 웃음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더랬다. 사레가 들릴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승관이, 정한이랑 연이랑 당분간 행궁에 가 있거라.”
“예?”
아까 전 주재한다던 회의의 안건이 심히 궁금해졌다. 외교 안건 아니었나. 행궁 나들이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어? 몸을 기울인 정한이 속삭여 왔다.
“우리 다음 달 7일에 출국하잖아. 그 전에 시찰 겸 해서. 경기 북쪽에 비워 둔 지 좀 오래 된 궁이 하나 있거든.”
“시찰?”
“응.”
“그걸 원래 태자가 해?”
승관은 진실로 몰라서 물었다. 여즉 황실에 머물며 정한을 보아 온 5년 동안 그의 영역 안에서 행궁의 히읗 자도 들어 보지 못했으니까. 그동안 부지 문제로 중세부터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던 수많은 이궁들을 국민들의 몫으로 대다수 돌려 놓은 탓에 별달리 행行할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계획에 잠시 멍해졌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시찰은 명목일 뿐이고. 연이와 본궁을 떠나 휴양 삼아 다녀오라고 허한 것이니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뭐든 우리 승관이 마음. 옆에서 황후가 인자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갑 취급해 주는 이 황실에 대한 부담감은 도통 사그라들 기미를 안 보였다. 그걸 왜 제 마음대로 합니까 폐하 제발. 당장이라도 조아리고만 싶은 심정을 이해는 하실런지. 승관이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수긍했다. 아뇨 갑니다 갈게요. 태자의 고집을 빙자한 황제의 명이겠거니 넘겨짚기로 했다. 설령 그것이 아닐지라도 환기의 필요성을 느낀 정한의 뜻을 굳이 거절하고 싶진 않았던 탓이 컸다. 승관 또한 연이 태어난 뒤로는 궁 밖으로 좀체 나가질 못했으니. 틈만 나면 락 페스티벌 현장을 누볐던 중학 시절의 그로선 상상조차 못했을 생활 패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껍진 못했다. 저희야 아이와 짐만 챙기면 됐지만 함께 이동하는 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민간인 생애를 겪어 보았던 이의 자연스러운 걱정이었다. 공식적으로 궁을 벗어나 장기간 기거하는 것이 처음이라. 승관이 속닥였다.
“출국 이틀 전까진 돌아와서 준비해야 되잖아. 익위사랑 시종관들 비서들 대거 오가려면 번거로울 텐데 어떡하려고.”
“어엉, 걱정하지 마. 각 부서별로 두 명씩만 가니까. 짐차 빼면 세 대도 안 될 걸.”
“뭐?”
정한이 여유로이 밥을 씹으며 손을 내저었다. 태평한 그와는 달리 승관은 좀 더 생각해야 했다. 당장 동궁전의 직원들만 꼽아 보아도 서른 명을 훌쩍 웃돌았다. 물론 서 주임과 같은 직속 보좌 인력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만 승관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행궁 전출과는 사뭇 다른 행색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그러니까 우리 별장이라고 생각해 승관아, 정한이 생글생글 웃었다. 좋⋯은 거지? 그 예쁜 미소에 한층 불안감만 더해졌다.
서 주임이 휴가를 내고 이름 모를 곳으로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조촐하게 도착한 행궁은 경기도 변방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하여 본궁보다 한층 소박하고 단조로웠다. 건물의 수가 적었으며 돋아난 초록이 많아 행궁이라기보단 꼭 유물로 등재된 사찰에 온 것 같았다. 연은 아장아장 서툴게 뛰어다니며 들뜬 기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처음 보는 꽃들이 천지를 지배한 탓에 흑구슬 같은 두 눈동자는 신기함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연아 여기 우리 세상이다! 덩달아 신난 정한이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렀다.
“집이야?”
“응, 우리 집.”
“할부지는?”
“앞으로 우리끼리 잠시 여기서 지낼 거야. 다시 궁으로 가고 싶어? 연이 좋은 대로 하자.”
큰 눈을 도륵 굴린 연이 크게 고개를 저었다. 쪼꿈이면 갠차나! 당차게 외치고선 어느새 잔디 위에 철퍽 주저앉아 있는 정한에게 잰걸음으로 달려가 안겼다. 몸을 일으킨 승관이 두 사람을 등지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큰 침전. 앞으로 2주 간 집과 같이 머무를 공간. 유현당柳晛堂이라 써진 현판에 시선이 닿았다. 문득 아이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지구의 자전처럼 일정한 진동음이 박동으로 변했다. 작은 호흡처럼 고요하고 긴밀한 세상의 원리다. 이제 승관에게 목숨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음성들이 바람결에 저미듯 어울려 버들잎을 흔들었다. 사랑이란 그만큼 어질고 고귀했다. 생에게 빛을 주고 사에게 어둠을 주어 낮과 밤을 연결짓는 순리만큼이나. 뒤돌아 선 승관은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곤, 더없는 행복을 잃기 싫어서, 정한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달렸다. 정한이 두 팔을 벌렸다. 아이가 하얗게 웃었다. 승관은 저항 없이 낭군의 품으로 떨어져 키스했다. 정한은 놀라지도 않았다. 갑작스런 입맞춤은 오래도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도 웃음이 났다.
“승관아, 연이가 우리 쳐다보잖아.”
“알아.”
짧은 대화를 틈에 두고도 붙은 이마는 떨어지지 않았다.
“애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바마마들 참 열렬히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하겠지.”
그래, 사랑하자.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후회 없이 사랑하자. 씩 웃은 정한이 도로 입술을 맞부딪혀왔다. 우리의 연정이 영원을 이겨, 시간의 항복쯤은 가볍게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날 위해서라면 우주에라도 가 줄 수 있다던 그가, 정말 온 세상을 다 가진 윤정한이 이렇게 완전한 부승관의 소유라는 것을 제 손으로 확인시켜 줄 때면 으레 들곤 하는 벅찬 포만감이었다.
행궁의 모든 것은 황궁보다 작았다. 전체적인 대지 규모부터 욕조와 식탁의 크기까지도. 하지만 싫지 않았다. 승관에겐 익숙한 아담함이 오히려 약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되었으니. 세 사람은 대청에 낮은 밥상을 두고 사과와 키위를 씹으며 각각 널브러져 있었다. 제 집의 것보다 한 뼘 작은 텔레비전에서 송출되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멍하니 감상하면서. 개운한 가을 바람이 열린 문 틈으로 나른하게 불어들어왔다. 시시각각 바뀌는 화려하고 재미난 색채감에 연이 넋을 놓을 때쯤 정한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승관이는 집 안 가고 싶어?”
“우리 집? 본가?”
난데없이 나온 본가 이야기에 승관이 목소리를 홱 높였다. 그러다 연의 눈치를 보고 지레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왜 그래, 뭔 일 생겼어 본가에? 짐짓 심각해지자 정한이 푸스스 웃었다.
“아니, 그냥. 승관이가 가고 싶지 않나 해서.”
“⋯가고야 싶지. 근데 연이 데리고 어떻게 가.”
엄마랑 아빠도 궁 자주 와 주는데 뭐, 괜찮아. 승관이 버릇처럼 정한의 팔을 끌어당겨 안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애매하게 엮여서, 오도카니 앉아 있는 조그마한 아이의 등 뒤를 방어하듯 지키는 꼴이 됐다. 정한은 그런 우스운 모양새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작은 몸을 끌어당겨 제 시야를 가리고선 분내처럼 풍겨오는 아기 냄새에 코를 박았다.
“그럼 어디 놀러 갈래? 놀이공원이라든가.”
마침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놀이공원의 거대한 관람차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 말에 스스로 감복한 정한은 대뜸 몸을 일으켜 연의 시야를 침범하곤 캐물었다.
“연아, 아빠랑 놀이공원 갈까? 저기 관람차도 타고, 동물도 보고. 어때?”
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생 이 년쯤 살았으면 놀이공원 한 번은 가 봐야 한다는 철없는 아비의 채근이 소용이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아이에겐 자유의지가 없었고, 당장 가고 싶은 마음은 정한이 곱절은 더 커 보였으니. 승관이 몰래 정한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찰싹 내리쳤다. 정한이 히히 웃었다. 아프지도 않은지 반응도 없었다.
“정신 차려 좀. 교통 마비시킬 일 있어?”
“몰래 가면 되지. 익위사 모르게 마스크 쓰고 궁 탈출하는 거야. 거기까지야 택시 타면 금방이고. 나 그런 거 잘 해. 알잖아.”
“아니까 이러지 내가.”
“승관아, 생각해 봐. 연이도 좀 더 자라면 학교를 가야 해. 정체 숨기려면 스무 살까진 밖에서 우리랑 있지도 못한다고. 이럴 때 조금씩 다니는 거야. 애기 얼굴을 누가 기억하겠어?”
승관은 그 말에 설득당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냥 학교 때려치고 시강원 교육이나 시킬 요량으로 황태손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해 버릴까 충동적으로 생각해 보았던 적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승관은 윤정한이란 사람을 봐 온 대표적인 사람이다. 비견될 수 없는 남다른 혈통을 지닌 황족에게 평범한 일상이란 배움이 아니라 선물이었다. 남들과 같은 생체 리듬을 소유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연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어찌하지 못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상황이 달랐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일부인 근처 유원지 나들이면 몰라도,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 있는 놀이공원이라니. 겁이 많은 승관은 감히 꿈꿔 볼 수도 없던 발상이었다. 그래서 극구 반대했다. 정한은 끝내 승관을 안심시켰다. 알았어 너 걱정 안 시킬게.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탓이 가장 컸다. 약속하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오는 데에, 지장 찍고 사본 출력해 코팅까지 해 놨어야 했다.
그로부터 일 주일이 흘렀다. 세 사람은 귀촌한 가족처럼 하루를 살아갔다. 그 사이에 황궁으로부터 오는 전보나 사소한 업무들을 처리하는 일을 비롯하여 문명의 혜택 또한 조금씩 받아 가면서. 자연히 일전의 대화 같은 건 점차 까맣게 잊혀져 갈 무렵이었다. 잠결에 뒤척이던 승관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언제 아침이 밝은 건지 닫힌 눈꺼풀 너머로 쨍한 햇볕이 새었다. 승관의 손이 본능적으로 옆 자리를 더듬었다. 언젠가부터 틈만 나면 정한과 함께 잤더니 그새 몸에 붙어 버린 습관이었다. 텅 빈 이불만 한참 짚어대고서야 전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제가 아이를 데리고 잘 테니 편히 자라는 정한의 배려 섞인 목소리가 녹음기를 튼 듯 선명했다. 승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몸이 씻은 듯 개운했다. 잘 잤단 것은 수면의 질이 좋았다는 뜻. 더불어, 그 시간까지 조금 길었다는 건데.
“⋯오메.”
열두 시였다. 무려 열한 시간을 내리 잤다. 그런데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았다. 아무리 쉬러 왔다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규칙적인 생체 시간에 몸이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건드리지 않으면 언제고 흐트러질 준비가 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이온아.”
“전하,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맞지?”
“기침하셨음 아침이죠.”
으응, 시종관 정 주임의 활기찬 인사에도 승관은 웅얼거리며 눈을 비비기 바빴다. 푹 잔 것과는 별개로 의식이 완전히 깨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형은?”
“아⋯ 태손 전하와 함께 놀고 계십니다.”
답지 않게 조용히 노네, 어색한 정 주임의 답을 미처 이상하게 여기지 못한 승관이 비몽사몽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뭘 하고 있으려나. 밥은 챙겨 먹었을까. 조용한 걸 보니 숨바꼭질을 하는 건가. 그렇다면 누군가 찾는 소리라도 들려와야 마땅할 터인데. 바깥은 놀랍도록 적막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번뜩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휩쌌다. 그제야 정 주임의 어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눈치챈 승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온아.”
“네.”
“바른대로 말해.”
“⋯⋯넵.”
“윤정한 어디 갔어.”
정 주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더 이상 태울 속도 없었다.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사태를 간과한 제 탓이라 무작정 책망하지도 못했다. 정 주임은 태자님께 명을 받았다고 이실직고했다. 미리 일러둔 시간에 맞추어 태자비를 그곳으로 모셔오라 했다더랬다. 또 뭔 짓을 벌이려고. 승관은 익위사 한 명만 대동한 채 곧장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혹시나 싶어 온갖 SNS를 탐독해 보았지만 떠오른 목격담 하나 없었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평일 오전임을 감안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가 있나 싶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에 대해 관심이 없단 문장에 조금씩 신뢰가 얹히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아이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외척 조카라 둘러대면 될 일이라고, 언젠가 정한이 장난처럼 그랬던 기억이 났다. 서 주임의 말마따나 정말 연이가 나를 닮아서인 건가. 승관은 점차 바뀌어 가는 주변 풍경을 관망하며 바보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금세 붉어진 계절의 색조가 완연한 가을의 당도를 알리고 있었다.
저 멀리 토끼 귀가 보였다. 정말 토끼라기엔 키가 아주 컸지만 까딱까딱 흔들리는 깜찍한 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옆엔 조그맣고 동그란 곰돌이의 귀가 아른아른 솟아 있었다. 아기 곰을 안은 어른 토끼는 시원스레 뻗은 가로수길을 느슨하게 걸었다. 놀이공원 입구와 조금 떨어진 곳의 한적한 메타세쿼이아숲이었다. 정말 우리밖에 없었다. 무한한 생명력의 발광 속 인적이라곤 셋뿐이었다. 승관은 긴장을 풀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양변으로 나립한 나무들이 꽃비처럼 제 이파리를 끝없이 흩뿌렸다. 채도를 점차 잃어가는 잎들이 승관과 두 사람 사이를 흐붓하게 날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평화로웠다. 행여 약간의 소란이라도 섞여들어 이 안정감을 망칠까 염려마저 되었다. 무력한 안도감이 심신을 낮은 고도로 이끌었다. 승관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전부터 제법 돌아다녔던 모양인지 정한의 팔에 걸린 기념품 가방이 묵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나직한 대화 소리가 바람결에 사근사근 실려왔다.
“⋯오늘 중요한 날이야. 그러니까 연이가 의젓해져야 돼. 아바마마한테 멋지게 보여야지, 그치?”
“으응.”
승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저 객체는 분명 승관을 가리킬 테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되짚어 보아도 기억나는 것이 딱히 없었다. 정한의 생일은 이미 며칠 전에 거쳤으며 결혼 기념일은 11월이었고 제 생일은 한참 멀었다. 날짜를 돌이켰다. 시월 중순엔 별달리 챙길 만한 기념일이⋯⋯.
아. 설마.
“그날 나보다 지금 연이가 훨씬 더 멋있고 예쁘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우리 연이, 아바마마한테 뭐 해 주고 싶어? 뭘 해 주면 비궁이 행복해할까?”
“뽀뽀!”
연이 작은 입술을 쭉 모아 내밀며 옹알거렸다. 뽀뽀? 그건 연이가 좋아하는 거 아니야?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 주자 뽀얀 얼굴에 함박웃음이 담뿍 번졌다.
“진지하게 대화 좀 해 보려고 먼저 데려왔더니, 이놈이 뽀뽀만 독차지하네.”
“웅.”
“응? 뭘 알곤 대답하는 거야?”
“우웅!”
“우리 연이 누구 닮아서 이렇게 사랑스럽지? 승관이 닮았나?”
그 후로도 몇 차례의 입장난이 이어졌다. 목에다 대고 뽀뽀를 퍼붓자 아이가 넘어갈 듯 꺄르륵댔다. 천사의 달음질처럼 무해하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걸음이 뒤로 빙글 돌았다. 호선을 그리며 내딛으려던 발이 정지된 듯 멈추었다. 저기 저 편, 작고 또렷한 승관의 윤곽을 담아낸 눈동자가 은하처럼 잘게 반짝였다. 희미한 웃음기가 정한의 만면에 피어올랐다. 하여튼, 진짜 말 안 들어. 모든 것을 예감했다는 듯 또렷한 감정만이 담겨난 눈빛이 한 사람만을 향했다.
그새 놀이공원의 색을 입어, 새롭게 쌓은 기억을 정빙이라도 하듯 조금 더 평범하고 다채로워진 정한은 승관으로 인해 차츰 환해져 갔다. 아이가 승관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제가 보는 것이 아빠가 맞냐는 듯 정한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응 그러네, 정한은 그런 연의 마음을 단번에 읽어냈다.
“아바마마가 와 줬지. 우리 연이랑 형아 보러.”
형아? 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투명한 물음표가 승관을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정한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급하고 벅찬 마음에 천천하던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느릿느릿 좁혀지는 두 사람의 거리. 다만 계절의 흐름은 그대로여서 책갈피처럼 사이를 탄 풍경에선 녹빛 낙엽이 나렸다. 승관은 무채색에 가까운 절경 속의 정인을 그림 보듯 보았다. 자칫 홀릴 것만 같았다. 영화의 삽입곡처럼 어디선가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다. 꿈을 꾸듯 환청을 듣는 줄 알았더니 정말 저 멀리의 스피커에서 흐릿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가열찬 생명의 나락 속 모순되게도 감정의 잉태를 노래하는 옛 음악이었다. 오래 전 승관과 정한이 같은 무대에 올라 함께 불렀던 곡이기도 한, 이름 모를 밴드의 선율. 정한의 입모양이 옅게 노랫말을 그렸다. 승관은 그 순간부터 귀가 아닌 눈으로 기억하듯 들었다. 자연히 투영되는 정한의 목소리로. 애정의 뜻으로 이따금 깨물었던 말랑한 입술이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you’를 발음했다. 나의 세상. 나의 목적. 나의 무대이자 관객.
“생각보다 멀리 못 왔네. 좀 실망했어. 황태자가 이 정도밖에 안 돼?”
“진짜? 태평양 한가운데라도 떨어질 걸 그랬다.”
“안 돼. 그러면 이 노래 못 듣잖아.”
승관이 하늘을 가리키며 픽 웃었다. 정한이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뭔들 못 해, 널 위해서라면 선상 프러포즈쯤은 거뜬한데. 코가 닿을 듯 가까이 걸어가 승관의 뺨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가을의 조명 탓인지 기분 좋게 따끈한 온기가 입술을 발갛게 물들였다.
“이건 연이 선물.”
정한이 팔에 감겨 있던 기념품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곤 곰돌이 인형을 하나 꺼내어 승관에게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건 내 선물.”
저 작은 가방에 어떻게 구겨져 들어 있었는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로 큰 크기였다. 승관은 조금 벙벙해졌다. 이윽고 정한의 손가락이 아이를 가리켰다. 그새 가변에 쪼그려 앉아 작은 꽃을 탐색하고 있는 연의 머리엔 곰돌이 귀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다 닮았어, 연이랑 승관이랑 이 곰돌이. 정한이 귀엽다는 듯 트허허 웃었다.
“형 지금 하나도 안 멋있는 거 알지.”
“그럼.”
“왜 내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궁금했음 처음부터 물어봤겠지. 더 멀리 가길 원했으면서.”
“⋯⋯.”
“다 컸어, 우리 승관이. 튕길 줄도 알고.”
5년 전의 오늘. 레스토랑 하나를 통째로 빌려 황태자다운 청혼을 했던 밤. 승관이 정한에게 처음으로 확신 섞인 긍정을 보내던 순간. 일생 일대 가장 큰 결심으로, 송두리째 인생을 뒤바꿔 놓을 한 사람에게 비로소 온몸을 맡겼던 날. 그리고 정확히 5년 뒤. 이번엔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려 그 시절의 노래와 함께 마주 서 있다. 소년일 땐 예감하지 못했던 그들의 아이를 곁에 두고. 그날보다 훨씬 깊어지고 능숙해진 사랑을 실감할 수 있게 된 어른이자 일국의 태자 그리고 태자비로서. 승관이 싱긋 웃었다. 진짜 어떡하지. 온 세상이 나만을 노래하더라도 난 평생 형을 원할 것 같다. 심장이 맹렬한 뜀박질을 이었다. 승관이 좋아하는 질감이다. 함부로 무언가를 약속하고 싶어질 만큼.
윤정한과 부승관은 서로 사랑한다. 그로써 두 개의 세상을 가진 이 땅 위의 유일한 사람들이다. 일거수일투족 역사에 기록될 나날들을 후회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매번 새롭고 매일 기대하고 걱정하고 만족하고 애틋하다. 그것이 혹 때로는 우습거나 피상적이거나 싱겁다 할지언정, 그럼에도 그대라서 괜찮다고.
─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났지만 어찌 되었든 우린 정혼자잖아. 시작에 의미를 둔다면 첫사랑이고, 현재의 마음을 보여준다면⋯ 진심이야, 오래 전부터.
무지하던 소년들이 심박을 자각하고 혼란에 몸부림쳤던 최초의 여러 날들. 몇 년치의 청춘을 당겨 썼다고 해도 가볍게 믿어 버릴 만큼 눈부시게 푸르고 찬란했던 시절. 생애 첫 번째의 사랑이었다.
─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야. 많이 힘들 거고, 무섭거나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행복하게 해 줄게. 최선을 다해 사랑할게. 난⋯ 평생 너만 바라볼 자신 있어서.
“고마워, 나의 비가 되어 줘서.”
너라면 제 세상의 모든 계절들이 우기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비妃, 내 여름의 비雨. 정한은 그날 승관에게 모든 것을 약속한 셈이었다. 나는 기꺼이 우산이 되어 너를 내 품에 안아넣겠다고. 그러니 이 불가침의 영역으로 언제든 파고들어.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이자 너만을 위한 존재이니. 못 견디겠다는 듯 입술을 깨문 승관이 정한에게 와락 안겼다. 그 모습을 본 연이 타박타박 다가와 질세라 두 사람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세 사람은 한 몸처럼 뭉치듯 엉겼다.
“이렇게 예쁜 아이도 만나게 해 주고.”
“⋯⋯.”
“우리 둘째도 가질까, 승관아?”
“⋯⋯그럴까.”
A truth so loud you can't ignore, My youth is yours.*
아무렴 좋지, 사랑하니까. 저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의 청춘도 이미 서로의 것이 된 지 오래니까. 승관이 희게 웃었다. 5년 전과 같은 어여쁜 얼굴로 두 번째 영원을 고백한다. 허황이 아니다. 사라지지 않을 우리의 기록들은 정말 영구히 남아 보존될 테다. 표정과 말투, 목소리, 몸짓, 감정들이 먼지처럼 쌓인 대지의 무게마저도. 바람이 숨을 참듯 잦아들었다. 살갗을 감싸는 모든 공기가 꼭 들어맞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들을 위해 차근히 마련되어 온 공간인 것처럼. 가을은 여러모로 더없이 다정한 계절이었다.
*Troye Sivan - YOUTH
結
happy GELGYUL day.
두 사람이 서로의 무수한 내일들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읽어 주신 분들도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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