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의 슬픔이 되겠다
3rd 젤귤합작 <AU> 참여작
이따금 정한은 승관의 이야기 속에 상상처럼 깃들어 있던 세계를 떠올렸다. 동일한 상성 아래의 다른 세상에는, 우리와 똑같은 이름과 생김새를 가진 사람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정한은 말마따나 사실이라면 두 눈동자를 닮은 은밀한 천구가 그곳이겠거니 짐작했다. 승관은 그곳이 가령 실재한들 형은 쉬이 믿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듯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알 것도 같다고.
“그럼 그곳에서도 저희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승관의 귓가에 성좌처럼 세 개의 검은 별이 나란히 떠 있었다. 답을 망설이는 호흡 틈으로 아릿한 꽃내음이 뒤섞여 났다. 투명해진 하늘 너머로 비쳐오는 살별의 무리들이 경이로운 점묘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건 저 누리가 기어이 쏟아져 내리던 순간이었겠지. 승관이 예쁘게 웃었다.
“우리가 지금처럼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든 결말은 똑같을 거야.”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형도 알잖아.”
정신없이 돌아가는 쳇바퀴 같은 삶 속,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코앞에 닥친 사건에 급급해하느라 고개를 들지 않으면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봄의 절정은 벚꽃이 흐드러져야 찾아오고, 짓눌린 목련의 화편들이 거름으로 변했을 때에 비로소 여름이 시작되며, 가을이라 명명되는 모든 것은 산자락에 내려앉은 때이른 노을뿐이고, 천공에서 흩뿌려지는 별조각들이 가시구역에 도달하면 그제야 겨울임을 깨닫는 행위들 말이다. 24절기를 판독할 수 있는 건 태양력뿐이었지만 근래 들어 일어나는 각종 환경 문제들로 인해 이마저도 딱딱 들어맞지 못하는지라, 자다 깨서 얼핏 목도하는 바깥 풍경을 통해 날씨 및 기온을 얼추 예측해 보는 것까지가 인력의 한계였다. 계절 구별이 왜 중요하냐. 바꿔야 하는 옷차림과 안부로 우려먹을 첫인사를 구상하는 데 한몫을 할뿐더러 사람의 감정을 자제하거나 표출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3년 전, 파주 A단지 세트장에서의 밤. 연상되는 장면들의 주인공은 한 사람뿐이었다. 연이어진 촬영에 잔뜩 지친 눈가를 비비며 피곤을 덜어내던 손짓, 승관을 향한 경이로운 심야의 빛깔, 볼캡을 쓰고 있느라 미처 정돈되지 못한 머리칼의 부스스함, 좋아한다는 말을 발음할 때 미약하게 떨리던 입꼬리와 호흡, 승관의 몸을 덮은 그의 패딩에서 나긋하게 풍겨오던 달큰한 향기. 섬세한 기억력은 윤정한의 사소한 순간들을 흐트러짐 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고백이라는 일상적이고도 벅찬 단어가 현실화되던 무렵, 함께 올려다본 우주에선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모니터 앞에 얼굴을 박고 있느라 첫눈조차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에게 비로소 한 해의 막바지를 실감케 해 준 건 다름아닌 밤하늘 속 성좌였다.
― 나한텐 우주가 두 개네.
정한이 승관의 뺨을 문지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퍼지는 숨결도 천공의 은하수처럼 신비로움을 가득 품은 것 같고, 눈을 깜빡이느라 아주 잠깐 흘러가 버린 수십 개의 찰나들조차 아쉬웠던 그날은 정말이지 승관의 인생에서 손꼽히는 기억 중 하나였다. 너무도 꿈 같아서, 마치 반대로 나타난 현실이 당연하다 느껴질 만큼.
같은 방송 일 하는 신세라도 하는 역할들은 천차만별이었다. 퇴고하랴 취재 보고하랴 게스트 섭외하랴 온갖 멀티태스크에 신경을 쏟느라 밤을 꼬박 새었다는 청군과 서른여섯 시간 동안 디렉과 사인을 외치느라 목이 다 나가 버렸다는 백군 간의 전쟁은 회식 자리가 겹치기만 하면 제법 당연한 수순으로 시작됐다. 방송국의 시계를 견디며 축적된 피로 덕에 한층 향상된 말빨들이 공중에서 난타처럼 흥미롭게 오갔다.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덩달아 열이 올라 언성을 높이는 게 부승관의 직책이요, 멀찍이 물러나 반쯤 나간 넋을 간신히 부여잡고 그 가관을 관망하는 게 윤정한의 역할이었다. 그러기를 수 차례. 독한 성정들은 국장 앞에서마저 그 짓거리를 감행했고, 강화나 다름없는 휴전을 맺은 건 술김이었다. 드라마국 예능국 콜라보를 조건으로 한 협정과 함께. 개같이 싸울 그 열정 촬영장에서나 불태워 보라는 명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승부욕이 발동한 국장 간에 동의가 오감으로써 협정은 체결됐다. 편성 피디만 뒷목 잡을 일이었다. 아무튼 이 갑작스러운 계기로 인해 버라이어티 서브작가 부승관과 드라마 메인 프로듀서 윤정한은 한 팀으로 분하게 된다. 당시 어색한 얼굴로 첫 인사를 나누었던 두 사람이 신성한 업무현장에서 어쩌다 감히 눈까지 맞게 됐느냐. 봄바람이 불러온 망각이라고밖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얼마 전부터 직원들 사이에서 불미스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용인 즉슨 윤정한에게 썸녀가 생겼다는 거였고, 상대는 현재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드라마의 작가랬다. 정한과 승관이 비밀스런 사내연애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한여름 낮의 십자포화 아래서 잔뜩 성난 인내심이 이미 탈주한 지 오래인 데다, 직업 특성상 서로의 공적 영역만큼은 존중해 주자던 너그러운 아량조차 예민해진 상태를 파고들고 만 오물 같은 풍문이었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다. 두 사람을 제외한 방송국 사람들 모두가 연애 정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당황하는 티라도 냈다간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적절히 반응해 주면서도. 그래요? 어디서 봤는데요? 그런데 동료라면 보통 그 정도쯤은 붙어 있지 않나요. 스스로 태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답지 않게 구구절절 늘어지는 말꼬리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듯한 어조 그리고 목소리. 포커페이스에 능숙하지 못한 승관은 싱숭생숭해진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흘려들어도 되는 걸 굳이 부정하고 말았다. 에이 아니겠죠. 더군다나 오랜 시간 동안 이성 스태프들의 호감을 꾸준히 사 왔던 윤정한을 상대로. 백이면 백 믿어 의심치 않던 그 말에 이견을 내놓은 사람은 승관이 유일했다.
오프닝 원고를 타이핑하던 승관이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 작가 어디 가! 화장실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면서 대놓고 헛소리였다. 저거 저 정신 나갔네. 하긴 인생 같은 거 화장실 하나 잘못 찾는다고 망하기야 하랴, 옆자리의 서브 작가 최영우는 동료를 잡을 생각도 않고 퀭한 눈길을 도로 모니터에 고정시켰다. 승관은 화장실 대신 편집실이 있는 B동으로 직행했다. 아마 지금쯤 편집하느라 눈코 뜰 새 없겠지. 겸사겸사 자판기에서 늘 먹던 냉커피 두 캔을 뽑아 손에 꼭 쥐고 부지런히 걸었다. 정한이 있을 곳이 어딘지는 잘 알고 있었다. 종합편집실은 긴 복도 중에서도 가장자리에 속하는 위치였다. 오래 걷지 않으려면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탔어야 했는데 자판기를 거쳐 오느라 미처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승관은 끝없이 느껴지는 복도의 길이에 순간 유감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탔더라면 정한과 꼼짝없이 정면으로 마주쳤으리란 사실을.
정한이 누군가와 함께 복도 반대편 코너를 돌아왔다. 승관은 저도 모르게 옆에 난 통로로 몸을 숨겼다. 소문의 그 여자일 테다. 확신이 머릿속을 지배한 와중에도 그는 정한과 한껏 가까이 걸으며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치근거리는 모양새가 저보다도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각자 같은 카페에서 사 온 듯한 아이스 커피를 들고 있었다. 승관은 제 손에 쥐어진 천 원짜리 캔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볼품없는 디자인에 맛까지 없게 생겼다. 매번 저렇게 붙어 다니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 소문이 날 만도. 전혀 다른 분야에 몸을 담은 스스로가 이곳의 정한에게는 꼭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아서 괜시리 울적해졌다.
결국 캔커피는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고 궤도를 이탈하고 말았다. 자 마셔요, 커피를 내밀자 영우가 승관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여기에 뭐 탔냐? 따지도 않은 캔에다 대고 의심까지 했다. 가뜩이나 기분 안 좋은데 자꾸만 신경을 벅벅 긁어대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놓고 미간을 구겨 보인 승관이 영우의 자리에 턱 하고 커피를 올려놓았다. 존나 피곤해 보이시길래 제 돈 주고 뽑아 왔으니까 닥치고 드세요 좀. 영우가 그제야 감격에 젖어 승관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새끼 드디어 정신 차렸네. 같은 서브 주제에 어떤 대접이라도 바라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던 참이었다. 아무리 신분 상승을 나란히 코앞에 둔 처지라 해도 경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드라마 쪽에서 메인 한 번 달아 봤던 승관이 더 위였는데, 선배 대접을 해 주지는 못할망정 저리도 나잇값을 하려 들었다. 사람들은 그 꼴을 통칭하여 꼰대라 불렀지만 공들여 타박할 기운도 없어 그러려니 했다. 윤정한 몫이니까 억울하지나 않게 꼭 다 마셔요, 하기도 전에 영우는 즉시 200밀리리터짜리를 원샷해 버렸다.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사회성과 대인관계로 따지면 작가진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였던 승관이 첫 연애부터 이리 고전을 면치 못할 줄이야. 드넓은 직장 안팎을 마구 쏘다녀야 하는 서브 작가 부승관의 시야에 윤정한은 제법 자주 포착됐다. 백조를 수놓는 데 주제도 모르고 엉켜 버린 붉은색 실낱처럼 아주 아니꼬운 누군가와 꼭 함께. 일에 치여 바쁜 사람 치고는 그다지 어두운 얼굴도 아니어서 더 심란해졌다. 형 이번에 또 사극 들어간다며. 같이 일하게 된 스태프들은 어때? 슬쩍 떠보는 김에 차라리 솔직해질 걸 그랬나 싶었다. 덤덤하게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정한의 얼굴만 보고 섣불리 마음을 놓았던 과거의 자신이 미워졌다. 감정에 못 이겨 속내를 털어놓아 버리면 그의 업무 영역에 지장이 갈까 봐. 그 무엇보다 인맥이 중요한 이 판에서 혹여 사적 문제로 트러블이라도 생긴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참았는데. 어떻게든 무시해야지 했는데. 표현되는 마디와 마디 사이에 깃들어 버린 권태를 승관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뜬금없이 여자를 상대로 오른 질투조차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워진 자신의 변덕도 이해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형. 일요일에 시간 돼?
― 어⋯ 아니. 촬영 있어. 왜?
― 아냐, 아무것도.
촬영이 없는 날엔 없다는 이유로 편집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고, 촬영 스케줄이 있는 날에도 편집실로 퇴근해 못다 한 업무를 봐야 하는 처지였으니 쉬는 날이 있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걸 알면서도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승관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정한이 뒤에서 승관을 끌어안았다.
― 애기야, 무슨 일인데. 원하면 일정 조정해 볼 수도 있어.
―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 상관 있는 거 같고, 신경이 쓰이는데 어떡해.
― 형. 우리 사귀고 있는 거 맞지.
― 당연하지.
― 혹시 더 이상 좋아하는 마음도 없는데 나 혼자 매달리고 있는 거면 빨리 말해 주라. 구차해지기 싫으니까.
정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갑자기 왜 그래.
― ⋯갑자기라니. 정말 모르겠어?
야밤의 충동을 참지 못한 승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불 꺼진 방 안에서 킹 사이즈 매트리스만이 약하게 출렁였다. 예감한 듯 잔잔한 정한의 표정은 승관의 낙담을 한층 아래로 끌어내렸다.
―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 왜 고작 그거 가지고 쓸데없이 예민하게 구냐는 말로 들리는데 나한테는.
― 부승관.
― 말마따나 그딴 걸로 질투나 해대는 찌질한 인간 되기 싫었고.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형 일에 지장 줄까 봐 참았어. 그런데 형은 자꾸 여지를 줘 그 사람한테. 선 하나 못 그은 형 때문에 이 넓은 회사 안에 개같은 루머가 파다해. 자꾸 회의가 들더라. 나만 혼자 애태우는 것 같아서. 나도 귀 있고 말 알아들어. 사실이든 아니든 그걸 알고 있었으면 어떤 조치라도 취했어야 될 거 아냐.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음 좋겠어.
정한의 말끝은 명민했다. 그게 꼭 제 속내를 떠보는 듯하여 짧은 날숨만 샜다. 데일 만큼 뜨겁고 아찔하던 그날의 습도는 멀리서 추억 혹은 악몽으로 자리할 기억에 불과했다. 견고한 시선에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을 말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너 하나쯤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자신이 깃든 것도 같았다. 밤기운이 서늘했다. 심간까지 파고들 요량으로 매섭게 몰아쳤다. 그날과 같은 한겨울이었다.
기깔나는 연애 같은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평생 눈에 띄는 재능으로 살아온 사람들만 모인 방송사에서 관계를 드러내지 못하고 산다는 건 아예 모르는 척 남남처럼 지내잔 말과 비슷한 결이었다. 업무량이라도 적당했음 말을 않았다. 둘 다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하나는 에디우스를 하나는 워드를 붙잡고 야근을 밥 먹듯 하니까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동해버린 마음은 갈 데까지 가서 거주지를 합치기에 이르렀고, 시시콜콜 겪었던 좋고 나쁜 일들을 상기하며 속내를 털어놓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애를 썼다. 제아무리 망해 버렸음 하는 세상일지언정 그 안에 보고 싶은 사람이 숨을 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거라고. 좀비처럼 넋빠진 육신으로 직장과 집을 오가면서도 서로의 하트 섞인 문자 한 통에 까마득한 수십 시간을 버텨낼 힘을 얻던 시기였다. 남들에 비해 조금 늦었음 어떠랴. 빈틈없이 최선을 다하는 시간들을 일컬어 청춘이라 부르는 것을.
승관은 자신의 그 시절을 정한에게 모두 바쳤다고 생각했다. 밑바닥까지 싹싹 긁힌 어린 날들이 오롯이 한 사람에게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줬음 그에 걸맞는 어떤 것이 돌아와야 맞는 법인데. 멋대로 시작해 놓곤 바득바득 사랑하다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는 최후를 맞이하게 만들다니. 단순 권태였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았을 거다. 뻗치는 열불이 집중력까지 앗아간 탓에 일은 일대로 진전이 안 됐고 마음은 마음대로 문드러졌다. 평생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과 작별을 결심하자 남은 건 반반씩 낸 전세 보증금뿐이었다. 이별의 과정은 의외로 아주 간단했다. 구구절절 서론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헤어지자, 우리 충분히 즐겼잖아. 단 두 마디 끝에 기나긴 침묵이 뒤따랐다.
― ⋯그게 승관이가 원하던 거구나.
― ⋯⋯.
― 오래 생각했겠네. 많이 괴로웠겠다.
― 너 진짜⋯.
승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피로와 억울함이 뒤섞인 눈동자가 차오른 눈물 아래에서 일렁였다.
― 미안해.
그것이 정한의 마지막 인사였다. 변명은커녕 잡으려는 의지조차 상실한 채로 담담히 말했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승관이었다. 끝까지 날 이렇게 치졸한 새끼로 만들어야 속이 편하지 너는. 극으로 치닫는 감정에 못 이겨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꼴사납게 소리 내어 울어 버릴 것 같아 입은 열지 않았다. 과정은 간단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눈두덩이를 팅팅 불린 채 사무실로 올라가자 놀란 시선들이 하나둘 승관에게 고정됐다. 몇 시간 뒤 타박을 습관으로 삼던 영우에게서 온정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자판기도 아니고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해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연민하듯 인상을 찌푸린 영우는 먹어, 한 마디로 나오려던 말까지 막히게 만들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갔을 땐 정한이 짐을 싸 나간 후였다. 누구에게와는 달리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날 승관은 오래도 울었다. 원망스럽고 미워 견딜 수 없었다. 멋대로 떠나 버린 것 같았다. 정작 말할 시간을 주지 않은 건 자신이었으면서. 확신했던 근원이 사라졌지만 0.1퍼센트의 행복조차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펜을 놀려도 애시당초 오류가 섞인 공식에서 정답이 도출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인생이 하나의 프로그램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도입과 결미가 확실하고 뒷이야기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게 우리네 삶이면 얼마나 후련할까. 적어도 끝은 끝이니까.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영원히 완결나 버리기에 모두에게서 잊혀질 수 있는 존재가 부러워졌다. 승관은 눈을 뜬 순간부터 혼자라는 걸 실감하는 기분이 끔찍이도 싫었다. 정한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여즉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는 없었다. 날을 잡아 사소한 것들까지 대판 정리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여유로워지면. 이 일만 끝나면. 다음 회 대본만 쓰고 나면. 난생 처음으로 무언가를 뒷일로 미루고 미루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승관이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예능과 드라마는 부서가 분리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작가로서는 편집실 근처에 갈 일이 드물었고 피디와 접선한다 쳐도 한정된 작품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게 전부였으니까. 신규 런칭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작가진으로 합류한 승관은 2차 답사를 또다시 가겠다고 나섰다. 하고많은 작가들 중 유일한 자원자였다. 반나절 넘게 차를 몰고 해남 땅끝마을까지 내려가야 하는 대장정이었으므로 쉬이 엄두를 내기 어렵긴 했다. 너 지금 툭 치면 쓰러질 거 같은 거 알아? 조연출 유도진이 걱정스레 승관의 낯을 살폈다.
“부 작가는 그냥 서울에서 도진이랑 게임 시뮬이나 돌려라. 해남은 개뿔 병원부터 가 보고.”
“저 진짜 괜찮아요. 가게 해 주세요.”
“너 요즘 일 3인분씩 도맡아서 한다며. 왜 그래? 보아하니 거의 숙직실에서 사는 거 같던데. 우리 정 피디도 그 정도로 열심히는 일 안 해.”
“갑자기 나는 왜 걸고 넘어지냐?”
메인 작가의 우려 섞인 타박에 난데없이 불똥을 맞은 메인 피디가 장난스레 발끈했다. 회의실 내부에 소소한 웃음보가 터졌다. 이 중 웃지 않는 건 메인 작가와 승관 둘뿐이었다.
“답사는 내가 갈게. 막내랑 정 피디랑 해서 스태프 몇 명 데리고 가지 뭐. 승관이는 그날 게스트한테 연락만 돌려 놓고 촬영장엔 오지 마.”
“작가님.”
“우리 스튜디오 녹화도 아닌데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더 큰 일 생기는 거 알지? 나 손수 고생시키려면 따라오고.”
“⋯⋯.”
“네 이름으로 휴가 써 줄 테니까 사흘 동안 푹 쉬고 다시 출근해.”
상대는 경력 23년의 소위 왕작가였다. 한낱 9년 차 서브에겐 반항할 건덕지도 없었다. 지금 이러는 것도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잡념을 잊어 보려 일에만 집중하겠다는 핑계도 건강할 때 한정이었다. 스스로도 그걸 느끼고 있었고 차라리 어딘가 사고라도 나는 게 편하겠단 이기적인 생각에까지 도달하려던 무렵이었는데. 정신이 조금 들었다. 승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작가는 그제야 웃었다. 우리 기분 좋게 다시 만나자, 하면서.
여지껏 묶여 있던 몸살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불 꺼진 형광등이 특수효과처럼 회전했고 호흡을 감각하면 오한이 돋았다. 병원에 갈 힘도 없어서 이틀 내리 잠만 잤다. 오로지 본능에만 의거한 생활 패턴이 서른 시간 이상 지속됐다. 얼마만의 휴가인지 돌이켜 봤지만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사생활보단 일이 우선이었으니 지금 이 꼴이라고 해서 개연성이 엇나간 건 아니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자 익숙한 향이 폐 안으로 가득 들어찼다. 이것도 윤정한, 저것도 윤정한. 들이키는 숨조차 그 사람 체취였다. 배어 버린 향은 좀처럼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러니 잊을 수가 있나. 나중에 정리할 때 이불까지 싹 바꿔 버릴까.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계속 뻗어만 있다간 꼼짝없이 아사할 것만 같았다. 방 안에 안개라도 낀 듯 눈앞이 흐렸다. 부드러운 이불천에 스치는 살갗이 섬칫 따가웠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자글대며 끓는 것이 손난로가 따로 없었다. 비틀비틀 부엌으로 향했다. 한기를 참으며 냉장고 안을 훑었지만 재료조차 동이 난 상태였다. 장을 본 지 오래 되었다는 걸 그제야 자각했다. 배달음식을 기다리고 싶지도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찬장의 라면을 꺼냈다. 인덕션을 켜고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러자 기억 한 구석이 부유했다. 이사 첫날, 인덕션을 처음 접했을 당시의 정한이 승관의 앞에서 처음으로 우물쭈물 헤매던 장면이었다. 이거 왜 안 돼. 가볍게 터치만 하면 되는 걸 전원도 켜지 않은 채 꾹꾹 누르면서 제 동작이 먹히지 않는다고 심통을 부렸다. 애처럼 짜증내는 게 귀엽기도 해서 승관은 동생 가르치듯 정한의 손을 잡고 전원과 플러스 버튼을 차례로 눌러 주었다. 그다운 모습은 물론 그답지 않던 모습까지 열렬히 사랑하던 시절이었다. 싱거운 웃음이 흘렀다. 연심인지 비소인지 자조인지조차 구별이 가지 않았다.
“⋯더럽게도 안 끓네.”
이마와 속내에선 열이 부글부글 올라 용광로마냥 불씨까지 튀는데 냄비 안의 물 550밀리리터는 여즉 기포조차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수영을 한 것도 아니건만 귓속에 물이 찬 것처럼 멍했다. 웅웅 울리는 것도 같았다. 집 바깥에서는 일말의 소음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직장이 도보권이고 건너편엔 대로변까지 있지만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고요였다. 온통 분주해야 마땅한 한낮 서울의 중심부가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다. 시공간이 뒤틀리듯 시야가 휘청였다. 중심을 잡아 보려 싱크대에 손을 짚었지만 눈꺼풀은 기어이 내려앉았다. 몸이 옆으로 쏠렸다. 대뜸 천공이 추락하고 바닥이 가까워져 어딘가에 쿵 부딪히는 느낌이 들던 순간, 세상 속으로 조금 이른 심야가 한달음에 닥쳐왔다.
코끝을 찌르는 나무 냄새에 눈을 떴다. 낮은 천장에 수놓인 건 조명 대신 견고히 짜인 서까래뿐이었다. 승관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기절한 주제에 팔자 좋게 꿈이라도 꾸는 건가. 그러다 부엌에서 물을 끓이던 도중이었단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하지만 불행히도 승관은 자각몽에서 깨어나는 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재미없게 한옥이 뭐란 말인가. 이러면 또 사극 전문가였던 윤정한 생각이 나는데. 잡념은 뒤로하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벌떡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승관은 헛숨을 들이키며 복부를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 까닭이었다. 흰 설복 바깥으로 붉게 배어나온 혈흔이 선명했다. 마치 칼에 찔린 듯 등허리까지 욱신 아려왔다. 이게 뭐지. 목구멍으로 치미는 호흡만 가까스로 삼키며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정갈하게 꾸며진 단칸방은 그리 좁은 크기도 아니었다.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구시대 한옥이었고, 예전 언젠가 정한이 이렇다며 알려 주었던 양식과 매우 비슷한 생김새였다. 그나저나 꿈에서 이렇게까지 아픔을 느끼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그렇다 해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였다. 혼자만의 진퇴양난에 빠져 앉지도 눕지도 못한 자세로 엉거주춤 버티고 있는데 불투명한 창호문 너머로 어렴풋 비치던 인영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도련님! 정신이 드셔요?”
다 해진 황갈색 한복 차림의 꾀죄죄한 사내가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더니 기쁜 숨을 몰아쉬며 문을 닫지도 않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니 저기, 승관은 손을 뻗으려다 망연히 바깥을 쳐다보았다. 흙으로 덮인 작은 뒤뜰 끝에 어깨 높이까지 솟은 기와돌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찢긴 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담 너머로 신경을 집중해 보려는데 누군가 방 안으로 다급히 걸어들어왔다. 장년의 남성과 아까 전 그 사내였다. 전자는 정자관을 쓴 것으로 보아 꽤나 높으신 대감 같았다. 어째 상황이 점점 더 난국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이더냐, 이불 머리맡에 앉은 대감이 잔뜩 염려스런 어조로 추궁해 왔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듯한 얼굴로. 승관에게서 어떠한 답을 빠짐없이 얻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장 묻고 싶은 게 많은 쪽은 오히려 승관이었다. 지금 몸을 담고 있는 이곳이 꿈이란 것부터 실감을 해야 했는데 흉부로 통해야 할 호흡이 유난히 복부까지 닿는 것만 같고, 손 끝에 전해지는 감각까지 무엇 하나 예민하지 못한 게 없었으니.
“누구세요?”
승관의 한 마디에 방 안이 일순 멎은 듯 고요해졌다. 두 사람 모두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멍해졌다. 대감이 더듬더듬 물었다.
“승관아. ⋯정녕 이 아비를 못 알아보겠느냐?”
어떻게 반응해야 잘 대처했다고 소문이 날까. 순발력 및 임기응변으로 여지껏 살아온 승관이었지만 느닷없이 이런 식의 깜짝카메라가 닥치면 수가 없어진다. 설상가상 사내까지 초조히 말을 걸어왔다. 쇤네, 이 돌쇠도 몰라보시겠습니까 도련님? 자꾸만 저더러 도령이라고 불러오는 연유마저 모르겠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나름 대접 받으며 자라 왔어도 생전 종갓집엘 가 보길 했나, 족보를 한 번 들춰 보길 했나. 아무래도 좀 많이 부담스런 호칭인지라 절로 이맛살에 주름이 잡혔다. 몽중을 빙자해 귀족 체험을 시킬 거면 설정값을 좀 제대로 줬어야지 이 멍청한 무의식아. 아무리 황당한 전개가 펼쳐져도 나 자신만큼은 늘 그래온 듯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승관은 제 기억이 뚜렷함을 상기했다. 최댓값부터 최솟값까지 헤아려 봤다. 방송작가였고, 윤정한과 사랑을 했고, 짜증나는 이별을 했고, 더 짜증나는 후유증을 겪었다. 지독한 몸살에 걸렸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다 쓰러졌던 것까지 빠짐없이 명백했다. 정말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정말 우주 너머 다른 세계로 넘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아,”
결국 열이 올라 바락 성을 내자 또다시 통증이 밀려왔다. 말끝이 애매하게 멎었다. 어서 의원을 불러오거라. 대감이 허둥지둥 승관을 도로 눕히며 명했다. 허리를 숙여 보인 돌쇠가 황급히 달려나갔다. 승관은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이렇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 집이겠지. 별난 꿈을 꾸었다고 친구들에게 말해 줘야겠다 다짐하면서. 상처의 요동인지 먹지 못해 고픈 건지 배 안쪽이 꼬르륵 말려드는 소리를 내며 곯았다. 아 라면 먹고 싶다. 살기 위해 먹어 왔던 라면이었지만 유난히 그리워졌다. 이제 물은 충분히 끓었을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관은 못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흘렀지만 믿기 싫을 만큼 정상적인 나날들이 규칙적으로 깨고 졌다. 현실이었다. 과학자가 아니기에 자세한 내막은 몰랐고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얼토당토않게도 이곳의 국명이 조선이랬다. 황당할 따름이었다. 제 부친이란 자가 높은 관직에 올라 있는 영감이란 건 대강 눈치 챘건만 청리淸吏로 소문난 도승지리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어쨌든 그를 비롯한 모든 주변인들은 사건의 충격으로 인해 승관의 기억이 모조리 소실된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 승관이 자신 있게 읊을 수 있는 거라곤 제 이름뿐이었으니.
“그날이요? 밝지 못한 월광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밤이었는데 대문 밖으로 기척이 들려와 나가 보니 도련님께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계시더이다. 어후,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요. 이레 동안이나 잠들어 계신 탓에 끔찍한 걱정마저 서슴지 아니하였으나, 이리 깨어나셨으니 하늘이 도운 일이지요.”
돌쇠는 여즉 기억이 생생한 듯 몸서리를 쳤다. 그 말인 즉슨 이 상처의 원인을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오직 이 세계를 살아온 부승관과, 그를 다치게 한 누군가뿐일 터. 승관은 대답도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치부를 다시 확인했다. 상처는 거의 아문 상태였다. 그동안 이동 범위라곤 방 안과 그 앞 작은 마당이 전부였던 탓에 좀이 쑤셔 못 견딜 지경이었다. 발로 뛰지 않으니 편한 것도 며칠까지였지, 그 이상 되자 성격상 고문이 따로 없었다. 문을 슬쩍 열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돌쇠는 빗자루로 앞마당을 쓸어대느라 바빴고 부엌에선 중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감은 일찍이 입궐한 상태였으며 별당채엔 승관의 방 하나뿐이었다. 당장 승관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단 얘기였다. 이제 제법 거동이 자유로워진 승관은 일찍이 쟁여 두었던 옷들을 챙겨 입고 가볍게 담을 뛰어넘었다. 고교 시절 담 너머 편의점으로 몰래 들락거리던 실력이 애꿎은 데에서 빛을 발했다.
어딘지도 모를 길을 무작정 걷다 보니 전방 너머에서 어렴풋한 소란이 퍼져왔다. 듣기로 집이 도성 근처라더니 시전도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음 돈도 좀 챙겨올 걸 그랬나. 방 안을 조금 더 뒤져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곱씹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점차 먹음직스런 향이 풍겨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펼쳐진 드넓은 저잣거리는 재작년 정한이 연출한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흡사한 광경이었다. 단 3초 지나가는 장면이라도 섣불리 무시해선 안 된다던 정한의 말이 떠올랐다. 이런 고증은 대체 어떻게 지킨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전 중앙을 거니는데 수선스럽게 들끓는 상인과 객들 틈으로 낯익은 모습이 잡혀들었다. 승관은 불현듯 목을 빼고 미간을 좁혔다. 설마.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있어서 보이는 생김새로는 구별이 불가했지만 어딘지 와닿는 직감이 남달랐다. 승관은 제 처지도 잊고 무작정 달려가 그를 잡아세웠다.
“윤정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시선이 승관에게로 고정되었다. 본능과 경험은 틀려먹는 법이 없었다. ⋯진짜 맞네. 습관처럼 익숙한 이목구비가 살아 있다는 걸 실감케라도 하듯 미동을 일으켰다. 똑같다. 똑같았는데. 어딘지 생경했다. 똬리를 튼 먹구름처럼 조금 더 흐리고 막연한 안광이 승관의 낯을 어지러이 헤집었다. 시선 어딘가에 점차 물기가 어려 가는 것 같았다.
“내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혹시,”
“⋯⋯.”
“나⋯ 알아요?”
그가 짧은 숨을 뱉었다. 승관은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뇌리를 지배한 의문과 난제를 풀어낼 방법을 찾느라 혼란에 빠진 탓에 결코 안정된 형색이 아닌 줄은 알았다.
“⋯아뇨.”
부질없는 거짓이었다. 관계에 얽힌 상처를 모두 떠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잘도 모른다고 말했다. 자괴와 죄책 사이에선 뻔뻔함도 소용없었다. 승관이 견고히 반문했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닐 리 없을 텐데.”
“⋯⋯.”
“그럼 내가 당신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가 입술을 말아물었다. 정한의 눈빛이 저리도 진동하는 것을 승관은 본 적이 없었다. 물러 보이는 인상을 가졌을 뿐 결코 생긴 대로 놀진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성큼 다가섰다. 달큰한 체취가 아찔한 꽃내음과 섞여 머릿속을 진탕 짓쳐갔다. 승관은 무력하게 그의 품으로 얼굴을 기대었다. 오가는 조심스런 손길이 몸을 깊이 감싸왔다. 반드러운 비단결이 뺨에 닿아 간질거렸다. 정한이 승관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으며 울먹였다.
“⋯무사하시다면 전 그걸로 되었습니다.”
무림武臨 7년의 가을, 세책점으로 가는 길목은 유난히 분란했다. 가뜩이나 내키지 않는 걸음에 사나워진 승관의 속내마냥. 하지만 앞선 호기심은 걸음의 속도를 높여 곧 미성숙한 쟁란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수십 명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그의 소리에 열중하고 있는 걸로 보아 간만에 이야기꾼이 내동한 모양이었다. 재미있는 거라면 만들어서라도 만끽해야 하는 승관에게 전기수의 등장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반짝 빛낸 도령은 감색 사규삼 자락을 휘날리며 인파 틈으로 끼어들었다. 듣자 하니 왕의 자리를 탐내려 했던 한 신하에 대한 야사野史였다. 임금의 오른팔을 자처했던 좌의정 윤씨가 모반을 꾀하다 참수를 당한 후로 그와 비슷한 야사들이 서민들을 중심 삼아 비밀스레 퍼져 나가던 중이었는데, 이젠 아예 이야기꾼조차 이를 입요깃거리로 삼아 버린 모양이었다. 돌이켜 보니 벌써 그 일이 작년이었다. 임금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었다.
점점 절정을 향해 흘러가는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있을 즈음이었다. 전기수가 돌연 말을 끊고 딴청을 피웠다. 아, 승관은 끝내 탄식을 뱉었다. 요전법邀錢法이었다. 청중들의 애타는 아우성이 빗발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좀 봐 주시오 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오합을 흘긋 보았다. 공방孔方으로 제법 채워져 있었지만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지. 승관은 묵직한 두리소매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상술을 남발하는 전기수를 책망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결말을 알지 못하면 오늘 밤을 지새고야 말 것 같았던 승관은 결국 가져온 열 냥 중 다섯 냥을 헌납하고 말았다.
간간한 이야기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면 뭘 하나, 덕분에 정작 본전 근처엔 가지도 못하는데. 빌리려는 서책은 여섯 냥이요, 승관의 사유 재산은 다섯 냥뿐이었다. 전날 책쾌가 다녀갔다면서, 주인이 인심 좋게 처음 부른 값의 반절이나 깎아 주었지만 딱 한 냥이 모자랐다.
― 또 전기수한테 붙잡히셨죠? 소인은 다 압니다.
뜨끔한 승관이 답을 거부하자 주인은 쾌활하게 웃었다.
― 외상.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봐 주면 아니 되겠느냐.
― 춘당椿堂께서 도련님을 앞에 두고 소인의 약조를 받아내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두 번 다신 외상을 드리지 아니하겠다구요. 일개 상인에 불과한 소인이 대감의 명을 어기면 어찌 되는지 정녕 몰라서 이러십니까?
― 그럼 한 냥만 더 깎아 주거라.
― 이거 원가가 열두 냥입니다. 반촌泮村에선 같은 책이 열다섯 냥이라는데요 도련님.
사실 전기수를 거쳐 오며 물 흐르듯 돈이 빠져나간 횟수로만 따져도 어림잡아 너댓 번째였다. 그 간격이 길어 체감하지 못했을 뿐. 승관의 입술이 화난 물오리마냥 댓발 튀어나왔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오늘은 도련님께 책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흥정이라면 승관만큼이나 이골이 난 주인이 판대에 내놓았던 책을 도로 가져가려던 그때, 승관의 눈앞으로 다른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놀랄 틈도 없이 통보 열두 냥이 후두둑 떨어지는 손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공색 도포에 환도를 찬 선비였다.
― 도령께 서책을 주시오. 값은 이쪽에서 지불할 터이니.
― 아, 예에⋯.
얼결에 책을 건네받은 승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 또한 다를 바는 없었으나 어찌 됐건 제값을 받았으므로 상관없다 생각했는지 한결 홀가분한 듯 보였다.
― 저⋯ 고맙습니다.
책방을 나온 승관이 반대편 길목으로 돌아서는 선비를 향해 계면쩍게 인사했다. 여청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가벼운 목례로 답을 대신했다.
― 혹 누구십니까. 내 빚을 진 듯한데,
― 떠돌이 한량의 이름은 알아 무엇 하시려구요.
― 그래도⋯.
― 박 가家의 정한이라 합니다.
그가 생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승관은 흔들림 없이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초면의 누군가와 이리 말을 섞어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음에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의연히 깜빡깜빡. 갖가지 방향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그날의 바람은 티 한 점 없이 개운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기로 이름났던 도승지 부 대감은 열일곱의 나이로 장원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자리에 최연소 임용자로 이름을 올렸다. 홍문관에 내내 몸을 담고자 했던 당시의 뜻과 달리 현시 도승지 대감으로 불리는 연유라 하면. 범상치 않은 자질을 눈여겨 보던 주상이 스물여덟의 그를 정3품 동부승지로 임명하고, 청렴한 지도자의 재능을 잘 타고나 아낌없는 총애를 받아온 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적장자인 부승관은 어떤가. 뛰어난 성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혀 물려받지 못한 채 나고 자랐다. 좀처럼 학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승관이 바깥을 나돌아다니며 챙겨 준 걸인들만 수십 명이요, 무상으로 나눠 준 사유 재산만 수백 냥이었다. 그러나 대감은 아들을 한번 꾸짖지도 않았다. 그저 옳게 살라고만 했다. 부당한 일에 손을 대거나 엮이지 말며, 세상의 정의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그것의 길이 꼭 학문만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살아라. 그리고 성심껏 너와 네 사람들을 지키거라. 그것이 곧 너의 세상이며 모두를 위한 도리이니. 허나 아직 피고 지는 풀꽃의 원리도 모르는 아이에게 세상의 구원법을 터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승관은 갖가지 장식품들이 늘어져 있는 가판대 앞에서 한참을 바장였다. 마침 제 접선에 딱 어울리는 선추가 눈에 들어와 망설이던 참이었다. 오뉴월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았던 접선 아래에 직접 대어 보며 훗날의 만족도를 가늠했다. 금방 싫증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나름 경제관념을 허투루 배우진 않은지라 사치에 쓰는 값은 남달리 까다로웠다. 마지못해 선추를 도로 가판대에 내려놓으려 허리를 숙이는데 승관의 태사혜 옆으로 흑혜의 신발코가 언뜻 비쳤다. 그것이 전조라도 된 양 이어진 건 사뭇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 서책을 대급받는 데 갈급하시어 학문에 여념이 없으신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과연 귀경에 걸맞은 도련님이셨군요.
정한이었다. 허리에 단정하게 묶인 세조대와 옥색 도포의 천자락이 조추 하늬바람에 잔잔히 나부꼈다. 놀랐던 마음도 잠시, 반가운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승관이 제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정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돌연 녹빛 갓끈 하나를 집어 들어 정한의 흑립 아래에 갖다 대었다. 도포와 비슷한 빛깔이라 제법 잘 어울렸다. 어찌 이러십니까, 당황한 정한이 상인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 이거 하나 주시오.
승관은 선뜻 값을 치른 뒤 정한에게 갓끈을 건넸다.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야들야들한 두 뺨에 미약한 홍조가 올랐다.
― 이리 귀한 걸 제게⋯.
승관이 제 복건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 보시다시피 전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아 갓이 없어서요.
― 선추를 보고 계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또 언제 보셨답니까. 승관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 그냥 드리고 싶어 그랬습니다. 세책방에서의 일을 벌써 잊진 않으셨을 테지요. ⋯그러니 받으십시오. 빚을 지고 사는 건 딱 질색이니까.
정한이 옅게 웃으며 흑립을 벗었다. 움직임과 같은 경로로 흐린 목청색 구슬이 그림자처럼 잘랑였다. 기다림을 구실로 정한의 용모를 구경하던 승관의 시선이 어느덧 허리춤의 환도로 가 닿았다. 검을 다룰 줄 아십니까. 무심코 중얼거린 걸 용케 들어낸 정한이 대답했다.
― 제 몸 하나 간수할 정도는 됩니다.
― 여혹⋯ 제가 선비님께 검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 출신도 모르는 자와 이리 밀담이 길어지는 것조차 도련님껜 충분한 결점이 될 터인데요.
승관이 억울한 듯 눈을 홉떴다.
―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도승지 대감의 소생인 이 몸은 어느 누가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말에 정한의 표정이 어렴풋 굳었다.
― 방 안보다는 바깥 공기에 애호가 깊은지라 오래 전부터 학문 대신 검술 익히기를 원해 왔으나, 적기를 찾지 못하던 차에 마침 적당한 스승감을 만났으니 이것이 기회가 아니면 무어란 말입니까.
연신 주저하는 정한의 모습에 오기가 돋은 승관이 제 품에서 장도를 꺼내 내밀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칼집 위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장과 승관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었다.
― 나으리의 환도가 그러하듯 이것 또한 제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물건입니다.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되면 정녕 필연이란 뜻이니 그때 돌려주세요. 회신은 허락인 줄로 알 터이니.
― 만나지 못한다면요.
― ⋯⋯.
―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전 거처하는 곳도 정해져 있지 않은 방랑자라 말씀드렸습니다.
승관의 눈동자에서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잔잔하던 물웅덩이가 그리 된 건 분명 무언가 추락했기 때문일 테다.
― ⋯가을이 본디 그렇습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낙엽이 원하는 곳까지 도달하고 서풍에 사선으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구경할 수도 있는 금왕지절金旺之節인데, 어찌 유연 하나 확신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 이레가 넘도록 도련님과 조우하지 못한다면⋯ 삼봉산 중턱의 가장 큰 적송 아래 묻어 두겠습니다.
― 꼭 정히 피하겠다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승관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한은 사계의 원리를 거스르는 사람이었다. 인과 혹은 필연 따위에 기꺼이 저항할 용기마저 지닌 이였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던 승관은 죄 없는 날들만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낮과 밤이 겨루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뒤바뀌는 것 같았다. 무가치한 자상임을 알면서도 오가는 시간이 아쉬워 선잠을 잤다. 이레 뒤 승관의 장도는 삼봉산 적송 아래에서 곱게 묻힌 채 발견되었다.
석죽색 도포를 차려입고 사가를 나섰다. 지난 봄 관례를 치른 까닭에 이제 승관에게서 앳된 도령의 모습은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홀로 무예를 연마한답시고 환도를 구해 밤낮으로 끼고 다녔지만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니 방법을 몰라 휘두르지도 못했다. 무언가를 베어 본 적 없는 검은 하나의 장신구에 불과한 꼴을 하고서도 허리춤에서 줄기차게 매달려 버티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이 산길을 올랐다. 이름난 무인이 옆 마을에 은거하고 있다기에 찾아가 볼 요량이었다. 산하에 접어드나 싶더니 어느덧 사위가 푸르렀다. 위로 난 빼곡한 숲 너머는 길도 트여 있지 않았다. 주변을 에운 모든 녹빛이 생명의 증거임에도 온몸을 감싸오는 을씨년스러움에 미력한 소름이 돋는 것도 같았다. 최근 크고 작은 동란으로 인해 혼잡해진 도성 내의 형세를 간과하고 무작정 지름길을 택한 탓이 컸다. 도읍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낮은 산일지라도 누군가가 숨어 살기엔 충분한 깊이였으니. 승관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반절 가량 온 느낌이었지만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아직 제가 살던 마을이 작게나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걸음이 느렸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상록 소목 너머로 그새 기운 해가 열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이곳에서 밤을 보내게 될 거라 경고하는 듯 매서운 붉기였다. 허나 마을을 건너자니 이미 꼬박 하루를 낭비한 것이 되었으므로 그것 또한 영 마뜩잖은 처신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데 저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불안감에 슬그머니 칼자루를 쥔 승관이 엄포를 놓듯 소리쳤다.
― 게 누구냐.
어조에 비해 확연한 떨림을 청자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곧이어 험상궂게 생긴 사내 예닐곱 명이 승관의 앞에 나타났다. 요사이 산중에 기거하며 양반들의 재물을 빼앗는 도적들이 성행한다더니 이곳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를 꽉 물었다. 정신 차리자. 당장엔 가진 패물도 마땅치 않았다.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마을을 건너온 제자가 잡히는 곳마다 통보나 금을 내놓으면 스승이 될 분께서 조금 짐스럽지 않겠어요? 사례는 다음 번 만남에 하여도 되는 걸요. 돌쇠의 가벼운 간언에 홀랑 넘어가 내린 결단이었다. 헌데 잡은 양반에게서 거두어 갈 금품이 없으면 어찌할까. 결국 무력히 바쳐야 하는 건 목숨뿐이지 않을까. 흉흉한 소문이 돌고 돈 끝에 산적은 민가들 사이에서 사자使者나 다름없는 존재로 낙인찍혀 있었다. 막상 마주하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하여, 승관은 두려움을 꾹 삼키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 보아하니 복건 벗은 지 얼마 되지도 아니한 애기나으리 같은데, 가진 게 있긴 있소?
―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 낮추느냐. 반상의 법도가 지엄하거늘,
― 아이고, 유학을 공으로 때우셨나. 그 위대하신 공맹께서 저승엔 나뉘어진 신분이 없음을 알려주진 않더이까?
발끈한 승관이 환도를 빼들었다. 손과 눈에 힘을 바짝 실었지만 초조한 기색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흔들림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 보람도 없었다. 어이쿠, 그들이 과장된 몸짓으로 놀라는 척을 했다. 우리 나으리 아주 용감하시네. 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농간들이 오갔다. 보아하니 활 같은 건 없었다. 훔친 것이 분명한 검과 철퇴가 전부였다. 잘하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끝까지 맞설 생각은 없었다. 싸우면 진다는 건 서기 확실한 사실이었다.
― 나는 가진 것이 없는데, 탈취할 패물이 없다면 해할 셈이냐.
― 게 어찌 궁금하시오. 우리를 따라가면 알 수 있을 터인데, 함께 가시렵니까.
― 예서 해결하거라.
― 실은 패물이나 목숨보단 그쪽 체신이 더 탐나서.
― 뭐⋯?
― 곧장 처리하면 아깝지 않겠소. 재미를 좀 보아야지.
그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며 낄낄댔다. 승관의 낯이 하얗게 질려갔다. 죽는다, 이대로면 난 죽는다. 벌어진 입가에서 겨운 숨만 연신 흘러나오던 찰나. 날아오듯 나타나 승관을 가로막고 선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검을 빼들었다.
―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 ⋯선비님.
고개를 돌린 정한이 생긋 웃어 보였다. 승관의 눈가가 단숨에 달아올랐다. 오롯이 정한만을 향한 책망과 아쉬움으로 토해내는 무언의 야단이었다. 다가오려던 산적들이 걸음을 멈추고 실소했다.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또 하나의 먹잇감에 오히려 잘 되었다 싶은 표정도 몇 보였다. 정한이 태연하게 서두를 끊었다.
― 하등 별 것 없겠다는 낯이구나. 이분께서 누구신지 알면 곧장 큰절을 올리고도 남을 터인데.
― 그건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지.
― 그쪽은 아니어도 나한텐 아주 중대한 일이라. 예로부터 본거지가 멀리 있느냐?
― 어찌 묻소.
― 오늘은 너희들이 제발로 걸어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을 듯하여 그렇다. 친히 걱정해 줬건만 그 눈깔이 참으로 아니꼬워 못 봐주겠구나.
정한이 서운한 표정으로 뻗은 검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여리한 체구에 되도 않아 보이는 기개가 퍽이나 어처구니없었던지 그들이 와하하 웃어댔다. 일순 정한의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걷히듯 사라졌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정한이 들으라는 양 목소리를 높였다.
― 저들이 도련님께 무어라 했습니까. 패물을 수탈하려 했습니까.
― ⋯아뇨.
― 허면, 숨줄을 끊어 놓겠다 했던가요.
― 바로 죽이진⋯ 않는다 했습니다.
정한이 눈썹을 올려뜨며 콧숨을 쉬었다.
― 어찌할까요.
―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십니까.
― 근거지까지 모조리 소탕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정한의 낯은 온화했다. 한 떨기의 긴장감조차 없었다. 정말, 승관이 원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양 강단지고 명료한 눈빛이었다. 이럴 거면서 일전엔 어찌 그러셨습니까. 승관은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켜내고 말했다.
― ⋯생명을 빼앗진 마세요.
입꼬리를 가볍게 올려 보인 정한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승관은 기어이 사지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정한의 칼끝은 시선이 따라갈 수조차 없는 재빠른 속도로 그들의 살갗을 가르고 베어냈다. 범상치 않은 칼부림이 아스라하게 급소만 비껴갔다. 정말 간신히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곤 명줄뿐이도록. 승관은 차마 숨도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똑똑히 목도했다. 심간이 박동에 울렁이는 것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분간조차 불가할 정도로 비릿한 재회였다.
― 검 쥐십시오.
― 싫습니다. 구술로만 읊어도 도령께서 척척 알아듣고 행하시는데 굳이요.
― 혹 제가 성가시거나 일쩌우신 겁니까? 허면 어찌 가르침에 응하셨는지요.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꼭 필요할 때만 검을 뽑는 자라 그럽니다. 여즉 무탈히 잘 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 이제 모르겠습니다. 대관절 누가 스승이고 제자란 말입니까.
― 둘 다 아닙니다. 그저 한량에 불과하오만.
한 마디도 져 주지 않자 약이 오른 승관이 홧김에 소리쳤다.
― 나으리께 놀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에 응시하렵니다.
― 알고 있는 유학의 구절이 있으십니까?
― ⋯⋯.
― 무과라도 치르시려구요?
예, 때가 닿으면 그리라도 하지요. 승관이 살벌히 을렀다. 이길 수가 없었다, 말로든 기로든. 정한이 작정하고 대꾸하면 매번 휘둘렸다. 그 휘둘림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오기와 객기만 늘어갔다. 무색해 보이는 웃음 뒤에 어떤 빛이 번져 있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제가 삼은 스승과의 자리에서 우위를 점하길 원했다. 정작 정한은 관심도 없는 승부인데 홀로 핏대를 세우고 되도 않는 자존심만 내세우는 꼴이었다.
― 나으리.
― 예.
― 제가 보기엔 나으리가 조선제일검 같습니다. 감히 능가할 자가 없을 듯하여 그럽니다.
― 그런 말씀 함부로 입에 올리시면 아니 됩니다.
― 헌데 정말인걸요. 전 나으리께 알고 싶은 것이 참 많습니다. 사정이 있으신 듯하여 구태여 여쭙진 않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연유도 궁금하고,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타고나신 건 얼만큼인지, 그리고,
― ⋯⋯.
― 저를 흠모하시는지⋯ 같은 것들이요.
정한은 대답 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보처럼 조각난 양광이 무질서하게 흩뿌려졌다. 정한의 얼굴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눈이 파발꾼의 수신호처럼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승관은 끝내 알아듣지 못하고 정한을 따라 고개를 올려들었다. 정한이 상념하듯 중얼거렸다. 저 하늘은 토양 위를 덮고 있는 주제에 참으로 이기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닿을 수 없어 심술이라도 부리듯 저리 맹렬한 신열을 퍼부으니 말입니다. 허공은 잔잔했지만 평온이 후더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승관의 경우라면 목검을 휘두른 탓이라 하겠으나 정한은 내내 앉아 움직이지도 않던 쪽이었으니. 우리 바람을 만들까요. 의아하던 참에 갑작스런 제안이 닥쳤다. 승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어찌 그럽니까?
― 헤치고 걷는 수가 최선이겠지요.
그러고선 엷게 웃었다. 승관은 손쓸 틈도 없이 정한에게 끌려 나갔다. 여즉 넌지시 물었던 진심엔 답도 않더니. 실로 예측 불가한 위인이었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저자였다. 흥취에 겨운 악곡의 가락이 중앙 거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승관은 낮바람 사이를 거스르듯 걸으면서 일력을 돌이켜 보았다. 관례를 치른 건 봄이요, 지금은 그로부터 스무 날도 채 지나지 않은 하계의 도입이었다. 아, 승관이 뒤늦게 깨달음의 탄식을 뱉었다. 눈 깜짝할 새 수릿날이 다가와 있었다.
화향이 깃든 장내는 여느 날과 다른 온도로 힘껏 북적였다. 승관은 금세 신이 나서 점포 이곳저곳을 오가며 두리소매를 비워갔다. 나으리 쑥떡 좋아하십니까? 예. 이건 어때요? 망개떡이랍니다. 좋습니다. 수리취떡 처음이시면 한번 드셔 보실래요? 그러죠. 정해진 것처럼 일관된 담화가 길어질수록 손에 든 먹을거리는 점점 늘어만 갔다. 중앙 거리를 지나다 신명나는 풍물놀이와 씨름 경기 구경도 했다. 잔뜩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승관을 보고 정한은 처음으로 걱정 없이 웃었다. 그러느라 승관이 손바닥까지 맞대 가며 몰입했다던 연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 손에 요깃거리들을 한가득 이고 지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느새 장신구처럼 조막만한 빛들이 쏟아질 듯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저자 옆 작은 도랑 아래에 나란히 앉아 사 온 것들을 펼쳐 놓았다. 온종일 쏘다닌 탓에 배가 꼬륵 곯았다. 비교적 인적이 드물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라 잠깐 쉬어 가기엔 알맞은 장소였다.
― 고수레!
승관이 풀숲을 향해 쑥떡을 던지며 외쳤다. 정한이 픽 웃으며 입 대지 않은 다른 떡 하나를 따라 던졌다.
― 그런 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 어릴 적 조부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리 하면 언젠간 하늘이 도와주신다나 봐요. 헌데 더 신기한 건 뭔지 아십니까? 이건 조상이 내려 주시는 은덕과도 같아서 제가 간절히 염원만 하면 길운이 누구에게든 옮겨갈 수 있답니다.
― 신기하네요.
― 그렇죠? 나으리께 길운을 드릴까요?
승관이 눈을 빛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법한 가까운 거리 너머로, 보름도 아닌데 벌써 달이 동그랗게 차올랐다.
― 어찌 도련님 소원을 빌지 않으시고요.
― 전 아직 운에 의지하여야 할 만큼 간절한 것이 없습니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좋아서요. 그러니 나으리 하세요!
정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승관은 호기심이 솟아 베어문 떡을 마저 먹지도 못하고 가만히 정한의 움직임을 좇았다. 곧 도랑 곁에서 이름 모를 풀 하나를 뽑아 온 그가 승관의 허리끈을 조심스레 들추어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환도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은 초엽이 가뿐하게 팔락거렸다. 정한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수릿날에 창포의 뿌리를 허리춤에 착용하면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라 합니다.
― 하오면 이것이⋯,
― 예, 저의 보답입니다. 저 또한 도련님께 길운을 드렸습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훗날 언제든 꺼내어 사용하시라구요.
먹던 떡을 내려놓고 제 심박을 가만히 감각하던 승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짙은 묵화 같은 눈동자가 새까만 밤을 앞서 담고 진동하듯 흔들렸다.
― 나으리. 저 조금 이상합니다.
― 무엇이요?
― 낮에 보았던 풍물놀이가⋯ 과경부터 제 심간에서 울려 댑니다. 온통 요란하고 번잡스레 하나의 큰북만을 치는 듯한데, 그 음성이 나으리만을 부릅니다. 견디기 쉽지 않은 강도로요.
― ⋯⋯.
― 헌데도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선비님을⋯.
정한의 손이 제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는데도 승관은 고분고분 딸려갔다. 이윽고 입술이 붙어오는 걸 저지하지도 않았다. 접촉이 이어질수록 제 속내를 터뜨릴 듯 강하게 내리치는 박동에 정신마저 혼미해진 까닭이었다. 정한이 입맞춘 채로 소리 없이 웃었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승관이 헐떡이며 떨어질 때까지도.
― 횡설수설하시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 ⋯⋯.
― 처음이라 두려우십니까.
― 나으리는⋯ 어떠하세요.
― 일찍이 알고 있었으므로 더 두려웠습니다. 어쩌면 도련님보다 더요.
― 허면 어찌할 셈이십니까.
그렇게 묻는 시선이 애걸하듯 흔들렸다.
―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맞서 보고 싶습니다. 그리 하여도 되겠습니까.
승관은 기다렸다는 듯 정한의 품으로 안겨왔다. 속절없이 파묻힌 몸이 밭은 호흡에 잘게 오르내렸다. 달빛은 분명 백광이었는데. 승관의 얼굴은 대낮의 금오를 삼킨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말미암아 겪어 본 중 가장 싱거운 여름이었다. 되알지게 따뜻하면서도 축축하고 포근한, 차라리 절멸되어 버렸으면 했던 모순적인 수만 번째 계절.
― 나으리, 저⋯ 소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하루, 다시 하루. 그리고 제 이레, 여러 번의 삭. 무수한 횟수로 장닭이 목청을 텄고 연심은 날로 부피를 불려 나갔다. 정한은 승관의 거처를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직접 와 주는 법이 없었고, 승관은 정한이 묵는다는 주막을 심방하며 만남을 이어갔으나 주기적으로 행방을 옮기는 통에 남겨진 서신을 보며 그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내심 이러한 접선에 피핍을 느껴가고 있었던 승관은 그날도 텅 비어 있는 방부터 살피며 막막한 숨을 내쉬었다. 주막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주모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일순 불길한 감이 들어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정돈되지 않은 흙바닥에 드문드문 핏자국이 보였고 주모는 찬간 뒤편에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머무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승관은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저자로 달려나갔다. 자주 가던 곳부터 살펴가며 정신없이 그를 찾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는 관군들이 보였다. 누군가를 쫓고 있는 듯해 보였지만 승관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이윽고 곁을 지나던 관군들이 근처에서 비단을 개던 상인의 눈앞에 구깃한 저와지를 들이밀었다. 이 자를 본 적 있소? 관군들은 고개를 젓는 상인을 익숙한 듯 지나쳐 갔다. 그 저와지에 어떤 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승관도 보지 못해 몰랐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만난 정한의 환도엔 이름 모를 이의 검붉은 자취가 묻어 있었다. 승관은 애써 모른 척하고 번연히 정한을 보았다. 여전한 이목이 승관만을 향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정한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승관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조력처럼 반사적으로 가슴께가 아려왔다. 분명 달큼하기 그지없는 감로수였는데. 꼭 독약 같았다.
돌쇠가 방 안으로 들었다. 승관은 무언가를 쓰는 데 열중하느라 반응도 않았다. 먹음직스런 약과들로 가득한 소반이 궤상 앞에 놓였다. 먹 냄새만 가득하던 방 안으로 희미하게 고소한 향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글 아래에 제 이름 석 자를 써낸 승관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용건이 이미 끝을 맺었을 터인데 돌쇠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필히 농지거리를 엿보고 있는 듯한 기웃거림이었다.
― 어찌 그러고 있느냐.
승관은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슬쩍 소매를 들어 글을 가렸다. 미처 마르지 못한 먹을 조심하느라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어차피 까막눈인 탓에 들이대도 읽지 못할 것이건만 나름 찔리는 것이 있어서였다. 돌쇠가 수상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이 즈음 외출도 잦아지시고 부쩍 안색도 좋아지신 걸 보니⋯ 혹 춘정에 홀리기라도 하신 것입니까.
승관의 두 뺨이 순식간에 홧홧하게 붉어졌다.
― 그게 무슨⋯! 상전을 앞에 두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 쇤네가 글을 알진 못해도 도련님의 태와 그 연서에 담긴 것이 순정인 줄은 아옵니다.
― ⋯⋯.
― 대관절 어떤 기예한 분께서 우리 도련님 마음을 홀랑 채 가셨을까.
아예 승관의 앞에 엎드리듯 무릎을 괸 돌쇠는 흥미롭다는 듯 화선지의 오른편 공중으로 원을 그려 보였다.
― 이곳 어딘가에 그분이 계실 터인데. 맞지요?
스스로 먹여 키우다시피 한 도령이 손수 연심에 허우적거릴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감복이라도 했는지 돌쇠의 눈이 그렁해졌다. 승관이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 박 가의 정한이라 하셨다.
― 예?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은 돌쇠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 객년客年에 참수당한 좌상 윤씨의 외아들이 같은 명을 쓰지 않았습니까.
― 본적이 다르지 않느냐. 어찌 그리 함부로 넘겨짚어. 피휘避諱가 사대부에게까지 해당되는 일은 아니거늘.
하긴, 민가에서조차 그들을 칭하길 개 부르듯 하는 판에 돌쇠라고 다를 것이 있나 싶었다. 승관이 침착히 손짓했다.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몸을 일으킨 돌쇠가 머뭇거리다 허리를 굽혔다.
― 주제 넘어 송구하오나, 존체를 보전하십시오 도련님. 요사이 끔찍한 일들이 잇달아⋯.
― 알아들었다.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꾸벅 인사한 돌쇠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승관은 잠시 닫힌 문을 응시하다 자약하게 연서를 접쳤다. 겉보기엔 태연했으나 손끝에서는 연신 불안정한 미진이 일고 있었다. 입꼬리가 무겁게 올라갔다. 마르지도 않은 먹을 차마 생각지 못하여 접힌 곳에 얼룩덜룩 자국이 붙었다. 와중에도 저와 정한의 이름 석 자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승관의 주먹이 마침내 맞물려 오그라들었다. 정결하던 연서가 손바닥 안으로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뜨리고 나서야 두 손을 폈다. 정한의 이름이 흑지처럼 새카만 자취 아래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 형님.
― ⋯⋯.
― 형님이라 칭해도 되겠습니까.
희소를 지은 승관이 몸을 돌려 앉았다. 담벼락 같은 풀숲을 등에 인 채였다. 정한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부정의 신호였음에도 마주본 얼굴빛은 변함없이 환했다.
― 싫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그리 하겠다 뜻을 정하였으니 꺾지 아니할 겁니다.
― 도련님.
― 형님께서 보셨던 세상의 이면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보름이 수없이 되풀이될 동안 팔도 곳곳을 오가셨던 나날들이 궁금합니다. 재미있거나 신기한 사건을 겪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제가 듣고 싶은 것부터 말씀해 주세요.
정한은 승관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승관은 감정을 숨기는 데에 재간이 부족했으며 정한은 무언가를 약삭빠르게 알아채는 데 타고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를 거스르는 속성이라 쉬이 들켰다. 승관에 관한 것은 무엇 하나 허투루 넘겨짚지 않는 정한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승관은 애원하듯 졸랐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도성 바깥의 일을 굳이 캐묻는 건 당장을 모면하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가능한 늦은 시기에 전해 달라고. 정한은 그마저도 눈치챘다.
― 오늘따라 막무가내로 구는 것이 꼭 아해와 같으십니다.
― 형님.
― ⋯⋯.
― 바다의 염도는⋯ 눈물보다 높던가요?
사람의 수론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그 물웅덩이란 것이, 이 눈에서 흐르는 것보다 어찌 더 간하단 말입니까. 승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관례를 치른 후로 미숙한 이들을 칭하는 단어라면 질색을 했던 그였다. 대놓고 아해라는 놀림이 날아드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한한 사려 속으로 농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다는 의미였다.
―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승관이 정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면에 흐르던 웃음기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 예, 바다는 짭니다. 그곳은 조선 땅을 수백 번 합친 것보다 훨씬 드넓으며, 어떤 기구로든 측량이 불가할 정도로 매우 깊습니다. 멀리서 보면 양광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해원이지만 실은 험하고 흉폭한 덫과도 같은 곳입니다. 얼마든지 육신을 집어삼킬 수 있는 날을 품고 있으니까요.
― ⋯그리고요.
― 허나 밤이 저물면 뒤집힌 세상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하늘의 광채들이 배로 부풀어 수면에 머무는데, 그 광경은 초파일의 마을처럼 몹시도 경이롭고 눈부십니다. 집집마다 밝은 등불이 성신과 꼭 닮았거든요.
― 응, 그럼⋯ 우리의 세상은 바다네요. 아주 위험하고 포악해서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 ⋯⋯.
― 형님. 형님께선 무슨 연유로 이 바다 위를 떠돌게 되셨습니까.
― ⋯⋯.
― 어찌⋯ 스스로 택하지도 않은 고역의 길을 힘겹게 걷고 계시냔 말입니다.
남몰래 차오르던 눈물이 뚝 흘렀다. 정한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 하시려던 말씀이 무엇이었던 줄 압니다. 해서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를 내치겠단 말을 형님께 듣게 되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 도련님.
― 서자로 태어난 몸이라 제게 존대를 하고. 정체가 발각되면 해를 입을까 봐 성씨를 바꾸어 거짓을 고하고. 붙잡히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하니 한량이라 속이며 떠도는 선비 행세까지. 그것이 어찌 유랑입니까, 필경 도망자에 불과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게 진실을 말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긴 하셨습니까.
뱉는 말의 마디마디에 힘이 실렸다. 승관은 울분을 참고 있었다.
― 허면⋯ 모든 걸 형님께 내건 저는 무엇이 됩니까.
― ⋯그뿐이었습니다.
― ⋯⋯.
― 윤 씨의 칼끝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다름아닌 제 목이었습니다. 적자들이 모두 요절하여 외아들로 자라난 저에게. 단 하나, 모반의 꾀를 우연히 알아챘다는 이유만으로요. 제가 가진 힘이 한 떨기의 깃보다도 미약하였다는 걸 그때에서야 알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야망이 이미 이성까지 삼켜버린 걸 알고는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가 저를 가담자로 몰아세운 뒤 참수를 당했다는 소식은 한참 뒤에 전해졌지요.
마지막 문장을 들은 승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도련님의 길운을 바랐던 것, 두려움과 맞서 보겠다 결의한 것, 날마다 은애한 것 모두⋯ 거짓이 아닌 진정이었습니다.
― ⋯⋯.
― 우리가 재회했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제 존재가 도령께 결점이 될 수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의지하지 말자, 함부로 마음을 주지 말자 다짐했었는데. 감히 주제에 도련님을,
승관이 다급히 입술을 맞부딪혀 왔다. 정한의 술회는 끝을 맺지 못하고 끊겼다. 그만. 제발⋯ 그만. 부절히 흐르는 눈물에서 짠맛이 났다. 바다에서 바다 내음이 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건만. 더 이상 늦어 버리면 영원히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처절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정한의 사지를 사슬처럼 옭아맸다.
― ⋯제가, 제가 어떻게든 아버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형님은 결코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거사를 막으려다 그 자에게 목숨을 위협받기까지 했었다,
― 이미 살은 활시위를 떠났습니다.
― 죄를 저지르지 아니하였으니 살이 꽂힐 일도 없습니다.
정한이 실소하며 몸을 일으켰다.
― 도련님께 품어온 연심부터가 중죄임을 어찌 부정하려 드십니까.
― 하여⋯ 후회하십니까.
― 아뇨.
― ⋯⋯.
― 그러니 도령께서만 절 후회하세요.
그리워해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겠단 무언의 통보였다. 승관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가지 말라 한들 안 갈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너무 무섭거나,
돌아서 가려던 걸음이 멈추었다.
― 힘에 부쳐 버거우면⋯ 돌아오겠다 약조하십시오.
― 도련님.
― ⋯약조하세요.
― 세상은, 그리 함부로 내걸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꺼낸 간절한 부탁이었지만 정한의 마지막 문장은 단연했다. 어떠한 존재로도 숨거나 묽어질 수 없도록. 승관은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쥐어 본 한 움큼의 지복조차 모진 바다에 불과했으니.
승관이 마을을 벗어나 주막들을 돌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열하루 째였다. 도성 내에 머물 수 있는 곳이라곤 다 찾아가 보았지만 정한을 만날 순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주막에서 술을 산 승관은 병나발을 불며 인적 없는 저자를 걸었다. 어두운 월색 아래 온기가 자취를 감춘 거리는 소슬하기 짝이 없었다. 터벅터벅, 고요 속 발생하는 변동이라곤 발자국 뒤로 피어오르는 토연뿐이었다. 아무리 취하려 해 봐도 머릿속은 또렷해져만 가니 소용이 없었다. 술이 거의 그대로 남은 병을 거꾸로 들었다. 조르륵 무방비하게 흘러내린 감주가 흙바닥을 소리없이 적셔갔다. 공들여 숙성시킨들 이리 쏟아부으면 땅을 축이는 빗줄기와 같아지니, 참으로 덧없는 일이었다.
승관의 예민한 귀가 돌연 번쩍 뜨였다. 정적 틈 어딘가로부터 이질적인 소음이 희미하게 섞여들고 있었다. 승관은 환도를 쥔 채 순식간에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진원지는 외지어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근처였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확인하려 눈을 찌푸리던 움직임에 덜컥 제동이 걸렸다. 마주하지 않아도 소리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정한의 숨통을 노리는 시퍼런 날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그 사이를 막아선 건 순전히 승관의 의지였다.
― 이미 내건 세상이 괴멸하려 드는데 어느 누가 자중하고 있답니까.
― 도련님, 물러서세요.
― ⋯싫습니다.
승관은 정한을 등지고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위협이나 다치게만 할 목적이 아니었다. 오로지 살의로만 가득 차오른 칼끝이 급소를 지날 때마다 질펀한 강혈이 힘차게 솟구쳤다. 그렇게 몇 차례. 두 명만 더 제거하면 되었는데. 무심코 돌아본 정한의 허리춤이 텅 비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늘 매어져 흔들리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허면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구태 걸음했단 의미던가. 어째서.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승관의 칼부림 사이로 언뜻 빈틈이 생겨났다. 살수의 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묵직한 냉기가 복부를 관통했다. 찰나에 숨이 멎었다. 도로 스스럼없이 쑥 빠져나가자 울컥 토혈이 흘렀다. 자상을 감싸쥐고 휘청이던 몸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정한이 다급히 승관을 받아들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귓전에서 벙벙 울려댔다. 눈앞이 흐린 것이 어둠인지 의식 탓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호흡이 턱턱 넘어갔다. 정한은 가물가물 꺾여가는 시선을 마주하다 조용히 승관의 검을 집어들었다. 목표물을 파악하는 눈동자가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처럼 형형히 빛을 냈다.
제아무리 훈련된 살수라 할지언정 정한의 칼끝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승관에게 공격을 가했던 이는 가장 무참하고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다. 제 앞에서 차례로 죽어간 이들을 응시하던 동공이 점차 말라갔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 조금만 버텨 주세요, 제발⋯.
정한은 승관을 업고 달렸다. 참지 못해 우는 모습을 승관은 처음 보았다. 강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윤정한에게도 흐를 눈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기대어 왔음에도 뒷등의 체온을 온전히 감각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멎을 생각을 않는 피가 정한의 무복을 빠르게 적셔갔다.
― 그리 찾아다닐 땐, 끝까지 숨어 계시더니⋯ 기어이⋯ 죽으러 나오셨습니까.
어절 사이로 가쁜 숨이 맺혔다.
― 보고 싶어 찾아다니던 건,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도성 밖에 그리⋯ 수많은 주막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정한은 잔뜩 짓이겨진 채 울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모두 잘못하였습니다. 흥건한 발음 속 선명한 자책이 승관의 속내를 헤집었다. 뜀박질 위로 몸이 흔들릴 때마다 시야가 거세게 점멸됐다.
― ⋯예, 모두 형님 탓입니다. 세책점에서의 일도⋯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것도, 품어선 안 될 마음을 품은 것도, 제가 검을 잡고 나선 것도 전부, ⋯윤정한 나으리 때문입니다.
― ⋯⋯.
― 헌데 어찌⋯ 제게만 후회하라 하십니까. 전, 바다로 내몰린 잘못이 다인데.
― ⋯⋯.
― 형님께서 저를 후회하지 않으신다면⋯ 저 또한 그리 합니다. 그러니 죽어서도 잊지 마세요. 제가 형님을, 아주 많이 연모하고 있다는 걸.
승관은 한동안 멍하여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보통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현실을 실감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긴장한 목구멍은 말을 더듬더듬 뱉어냈다. 그 나쁜 놈 말이 뭐라고 철석같이 믿어. 설령 정말 그렇다 해도 자기 아들을 사지로 내몰 친부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의 마음과 목숨은 본디 그러한 곡해에도 좌우되는 연약한 존재니까요.”
정한은 좀체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올곧은 답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 오해. 권태에 붙들려 부풀어 버린 왜곡과 사정들. 여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건 자신의 사랑이 아니었다. 불변하는 싫증이었을 뿐. 확신이 섰다. 윤정한은 두 개의 세계에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지는 사람이었다.
“허나 그러하다 믿는 데엔 용납될 만한 연유도 있기 마련입니다. 해답을 풀어내는 건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몫이지요.”
“⋯내가 잘못했단 소리네.”
영문을 모르는 정한이 당황한 낯으로 손을 내저었다.
“도련님께서 소우하신 것이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실수한 게 뭐냐고? 드라마 팀으로 이적하라는 꼬드김에 안 넘어간 거, 비밀 연애 지킨답시고 딴 여자 눈치 보다가 결국 내 성에 못 이겨 깨뜨려 버린 거. 더 말해 볼까.”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됐다, 알려 줘 봤자 이해도 못 할 걸.”
공손한 윤정한, 웃기다. 승관이 입꼬리를 힘주어 눌렀다. 이 별 볼 일 없는 나무들 틈에서 산새들이 정성스레 찌르르 오리지널 스코어를 깔고 있는데,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은 윤정한이 아닌 윤정한이다. 그러니까, 피곤함을 디폴트로 깔고 촬영 스폿 찾기에 여념이 없는 윤정한이 아니라 이런 극적인 환경에서마저 오직 자기만을 바라봐 주고 있는 윤정한이란 뜻이다. 세 살 형에게 존대를 받는 기분이 썩 묘했다. 누구든 친해지면 상호 간의 동의 하에 말부터 까고 봤던 승관이었지만 정한으로부터 당연시 흘러나오는 옛 어투가 싫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다정함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
“형. 나 이름 한 번만 불러 주면 안 돼?”
“제가 어찌⋯.”
“우리 둘만 있을 땐 괜찮아. 내가 듣고 싶어서 그래.”
승관아, 하고 불러 봐. 고요한 눈동자가 승관을 곱다랗게 담아냈다. 거기에 도리어 쑥스러워지려던 참이었다.
“⋯승관아.”
승관이 대답 대신 정한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등을 타고 내려간 손이 정한의 손을 맞잡았다. 감각해 본 지 오래된 온기가 빠른 속도로 퍼져왔다. 망설임 없는 긍정이었다.
“형.”
“⋯⋯.”
“단풍이 이미 갈변했는데, 겨울은 영원히 안 올 건가 봐.”
조심히 월담하여 별당으로 들어서는 도중 마침 뒷간을 나서던 돌쇠와 딱 마주쳐 버렸다. 아 들켰네. 승관이 아쉽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기겁하듯 토로했다.
“혹 쇤네가 천것이라 하여 염려마저 무시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환부도 성치 않으시면서 어쩜 이리 멋대로신지 원. 정녕 무탈하신 거지요?”
대감께서 곧장 입궐하셨기에 망정이지, 아셨다면 혼쭐이 날 뻔했습니다. 도련님이 아니라 쇤네가요.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등짝만 안 때렸다뿐이지 잔소리의 농도는 친부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건강 좀 챙겨 가며 일하라고 한 손 가득 비타민을 들이밀었을 때 윤정한 기분이 이랬을까. 곧장 도포를 벗어 보인 승관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이거 봐, 나 진짜 멀쩡해. 거의 나았다고.”
“⋯믿겠습니다. 허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바람만 쐬다 온 것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반신반의, 미심쩍은 눈빛이 양심을 후벼왔다. 승관은 헛기침을 하며 예사로이 뒷짐을 지었다.
“그나저나 너, 오일장이 어디서 열리는지 알고 있느냐.”
“예. 저편 최 참판 나으리 댁을 돌아 쭉 걸어가면 저자가 나오는데, 내처 들어가는 길목부터 장이 섭니다. 헌데 그건 어찌 묻습니까?”
“아니다. 잘 알고 있는지 시험해 본 거야.”
“⋯소인, 또 속은 것이 맞지요?”
“누굴 닮아 이리 눈치가 빠를까. 내일은 여기 별채 쪽으론 눈길도 주지 말고 할 일만 해. 알겠지?”
도련님 제발. 아랫사람 할 일이 도련님 모시는 것 말고 무어가 있답니까, 한탄 섞인 넋두리를 가볍게 무시한 승관은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지근히 데워진 맨바닥에 팔을 베고 드러누웠다. 이젠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익어 버린 천장이었다. 고고한 서까래마저 친근해져 버렸으니 윤정한은 오죽하랴. 시작은 달랐지만 결말은 같았다. 두 사람은 어디에서나 만나고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다. 학부 시절의 승관에게 누군가 물어왔던 적이 있다. 운명을 믿냐고. 승관은 주인공의 서사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였지만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연 따위는 믿어 본 적이 없었단 뜻이었다. 가짜 세계관에서 정해져 있는 운명은 극적 감수를 극대화하고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쓰이는 요소일 뿐, 내 인생이라면 개척 또한 내 손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냐면서. 처음부터 방송 일을 하고 싶다던 승관의 목표는 드라마 작가가 아니었다. 남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건 오로지 시청자나 독자로서의 자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말이 정해져야 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그놈의 운명론 따위로 설파해 낼 자신이 없었다. 제 손 안에서 휘둘리는 주인공들을 떠올리면 절로 물음표부터 띄워졌으니. 그보다 실습으로 나갔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의 경험이 훨씬 재미있었다.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들과 함께 마음 놓고 웃으며 촬영하는 게 좋았다. 그래서 고민 없이 걸어왔던 길인데. 한참의 직진 끝에 정한을 만났다. 그는 하필 드라마 감독이었고, 승관은 정한의 손 안에서 구상된 주인공처럼 보란 듯이 휘둘렸다. 실력 좋기로 소문난 윤 피디가 부 작가의 인생을 멋대로 연출하기 시작했다. 홧김에 일탈을 해 보았자 어차피 프레임 안에 갇힌 등장인물이었다. 부승관이 사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윤정한은 없었다. 어쩌면, ‘운명론 따위’를 한번쯤 믿어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한은 승관이 좋아하는 걸 재깍재깍 알았다. 이곳에 살던 그와 관심사마저 같았던지 정한으로부터 건네지는 모든 것들은 승관의 취향에 전적으로 걸맞았다. 맛있고, 재미있고 즐거우며 자꾸만 되풀이해도 질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정한은 승관이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기억이란 거, 다시 돌아올 순 없을 것 같았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찰나를 틈타 봄바람이 불어왔다. 장닭이 올라서서 아침을 알리는 곳엔 이미 여명부터 서리가 어는데. 두 뺨을 간질이는 건 분명 춘풍이었다. 사계가 비틀릴 수도 있을까, 하고 승관은 정말 궁금하여 물었다. 정한이 싱겁게 웃었다. 간절히 원하면 그리 될지도요, 그것이 도련님의 길운이자 염원이라면. 승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장담컨대 원한 바는 없었다. 바라는 건 따로 있었으니.
“나는, 형의 슬픔이 될게.”
“어찌 좋은 걸 품지 않고요.”
“웃음 없인 살 수 있어도 슬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거든. 상실감이 고통으로 변해, 슬픔을 잃으면.”
“⋯⋯.”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나만큼은 못 놓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게.”
문장의 온도와 어울리지 않게 승관의 낯빛에 해사한 미소가 피었다.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우린 돌고 돌아 만날 수밖에 없더라. 하지만 에둘러 오는 길목의 중간에서 형이 날 보고 싶어하면, 그땐 내가 형한테 갈게. 숨이 차올라도 조금만 달리면 되니까. 그러니 그곳에서 형은 날 반기며 웃어 줘. 난 그거면 돼.
“형.”
“⋯⋯.”
“도망가.”
정한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도성 안은 위험해. 최대한 멀리 떠나. 산이든 바다든, 발이 닿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
“⋯도련님.”
“왜 칼도 없어. 싸움 잘하는 거 아는데 너무 맹신하지 마. 무기는 있어야 해.”
승관이 제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정한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난 가진 게 이거밖에 없네. ⋯뭐 겸사겸사 추억 팔이 좀 하라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이랬다면서.”
“⋯⋯.”
“다시 만나는 날 그때 돌려줘. 그날은 웃으면서 볼 수 있겠지? 형 웃는 얼굴 되게 예쁜데.”
“여전히⋯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응. 절대.”
두 인영이 겹쳐졌다. 승관은 자꾸만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을 정한의 품에 힘주어 비볐다. 운명론자에게 기약되지 못한 재회 같은 건 없는데. 단지 정해진 때가 확실치 못하다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차오르는 아쉬움이 버거웠다. 정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깊이 인사했다.
“부디 무탈하십시오.”
“응. 약속 지켜요.”
“⋯⋯.”
“죽지 않기로.”
불어오는 서풍이 서늘했다. 쑥스럼 가득한 고백이 비로소 다다랐던 그날의 밤처럼.
세지 않아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사이 오일장이 여섯 번 가량 열렸다더랬다. 저녁 문안을 위해 안채로 든 승관에게 대감은 여상히 평부를 물어왔다. 짜여진 일련의 명령처럼 매번 오가던 대화가 끝이 났음에도 어쩐 일인지 나가보란 말이 없었다. 승관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손가락만 움찔거렸다. 늘상 온화하던 얼굴에 긴장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승관아.”
“네.”
“윤정한이란 자를 아느냐.”
바닥에 고정된 승관의 시선이 멈칫 진동했다. 일순 등줄기를 따라 냉한이 흘렀다. 육감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움텄다. 온통 머릿속을 지배하려 들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대감은 재차 물었다.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했던 죄인 윤씨의 아들을 알고 있느냐 물었다.”
“모릅니다.”
“정녕⋯!”
내리치는 호통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대감이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따라 기신한 승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아비를 보았다. 정확한 전말보다는 그것을 덮을 만한 부재증명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실로, 자신은 그와 연관되지 않았음을 확언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내놓은 아들의 낯빛은 결코 솔직하지 못했다.
“⋯잡혔습니까.”
“걱정하는 게냐.”
“알고 싶어 그렇습니다.”
“이틀 전 수포하여 사살하려 했으나 도주했다.”
“다쳤습니까.”
“얼마 버티지 못할 게야.”
“⋯⋯.”
“이미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르지.”
울음을 삼킨 노력이 무색하게도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단전으로부터 치미는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어금니가 세게 깨물렸다.
“소자에게 말씀하신 연유는요.”
“그놈이, 너의 장도를 지니고 있었다더구나.”
하. 비소가 뒤섞인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해서요. 아버님께 소자가 동급의 죄인으로라도 보이셨나 봅니다.”
“승관아.”
“연좌란 게 대관절 무엇이기에 무고한 사람을 그리도 참혹히 해하려 하신답니까. 반역의 주모자는 죄인 윤 씨였으며 그의 아들 정한은 고작,”
“고작 소생인 것. 그뿐이 어디더냐. 서자라 하여도 혈족인 것을.”
승관이 떨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구천의 한복판 같은 땅 위에서 정한의 편에 서 줄 이는 자신뿐임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저와 제 사람을 지키라 하신 건 아버님이십니다.”
“옳은 일을 하라 하였지, 그놈이 어찌 너의 사람이더냐. 네 지위를 생각해야 하거늘.”
“마음을 준 이가 제 사람이 아니면 누구란 말입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전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몸입니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앞뒤 꽉 막힌 분들끼리 나눠 가진 명예의 존엄을 위해, 제 세상을 구원해 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이것이 만물의 이치이고 조정의 대신들을 비롯한 주상의 공통된 신념이라면 말입니다.”
“⋯⋯.”
“이 나라를 구원하는 일은 진작에 틀려먹었습니다.”
발개진 승관의 눈가에 독기가 어렸다. 그대로 뒤돌아 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섰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대기를 짓누르는 것 같아 달릴 수조차 없었다. 홀로 별당에 당도하자 대폭 느려지던 걸음이 어느덧 멎었다. 희미한 혈흔으로 얼룩진 창호문 앞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승관은 끝내 내려앉았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내어 정한을 불렀다. 미약히 꿈틀대는 움직임이 보였다. 기어가듯 다가가 안아들었다. 그렇게 날래던 몸이 피로 흠뻑 젖은 채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승관을 확인한 정한의 입꼬리가 미력하게 올라갔다. 승관의 얼굴 위로 무질서한 눈물길이 생겨났다.
“웃으며 만나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이리 서럽게 우세요.”
“멀리 가랬잖아. 원하는 곳으로 도망치랬잖아.”
한때는 아까워 손조차 댈 수 없었다. 사랑이 깃든 사소한 단어 하나에 심박이 기어코 규정속도를 이탈하고야 말았던, 그 무엇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승관의 세상이었다. 하늘은 예고도 없이 땅과 맞붙으려 들었다. 제 아래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존재 따윈 안중에도 없이. 외계는 까마득히 멀었고, 당장의 승관에겐 하늘을 넘어설 비행체가 없었다.
“⋯감히 보고 싶어, 조금 일찍 왔습니다. 늦은 밤이라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리 뵈어 좋습니다.”
정한은 슬픈 눈으로 웃으면서도 간헐적으로 몰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입술을 짓씹고 천천히 깜빡였다. 땀과 핏기로 질척한 손에 승관의 장도가 쥐어져 있었다. 다물린 잇새로 참지 못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얼른 혜민서에 가자. 급한 대로 업어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정한은 크게 아파했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의원을 데려올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일어나려던 승관의 움직임이 덜컥 멈추었다. 응달 같은 손이 한쪽 뺨을 감싸온 탓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만두세요. 우주를 닮은 동공에 물기가 맺혔다. 불규칙한 무리의 성운은 꼭 영원한 소멸을 통보하는 것처럼 무력히 빛나고 있었다. 승관은 어쩔 줄 몰라 안달복달하다 결국 정한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멸절의 지척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체감하는 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고 쓰라린 일이었다. 마지막 숨을 끌어낸 정한이 다 젖은 얼굴로 웃었다. 최후를 직감한 망울이 희미해졌다.
“⋯걱정 마세요, 도련님. 존귀한 연심은⋯ 약조대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순간 팔 위로 한층 무게가 실렸다. 아니, 아니잖아. 형. 일어나 봐. 승관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절박하게 정한을 고쳐 안았다. 고개를 숙여 한껏 끌어안아도 보고 연신 불러도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더 이상 아무런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승관은 겹게 헐떡이며 공포에 떨었다. 여지껏 잔잔하던 한파가 동시에 몰아치기라도 하듯 정한의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울부짖던 승관은 이내 가슴팍에 기대어 고꾸라진 채 생기 잃은 눈만 깜빡였다. 수십 번, 수백 번. 그리고선 마지막을 고하듯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형. 거기 되게 춥나 보다.”
바람처럼 새는 음성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나는 형 아님 안 될 거 같은데. 걷는 길이 너무 험했다, 그치.”
정한의 손을 꽉 그러쥐자 머물던 냉기가 체온에 의해 잘게 뭉개졌다. 칼집에서 장도를 빼어 들었다. 완고히 움켜잡은 칼자루가 심장을 겨냥한 채 어둠의 농담을 가늠하듯 서서히 올라갔다. 승관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번진 묵수처럼 새카맣던 동공 속, 마지막 형상은 오롯이 정한뿐이었다.
“다음엔⋯ 좀 더 다져진 길 위에서 만나자.”
― 부 작가야.
― 어.
―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지 알아?
승관이 눈을 깜빡였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거든. 아빠랑 삼촌이랑 산에 오르다 발을 헛디뎠어. 그대로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서 기절했다? 눈 뜨니까 언제였게.
― 언제였는데?
― 2년 뒤.
― ⋯헐.
정한이 재밌다는 듯 어깨를 좁히며 웃었다. 승관은 입을 틀어막으며 놀라다 차츰 눈빛을 식혀 갔다. 설마 또 구라야? 작가님 입에서 구라가 뭐니 구라가. 형은 피디면서 쌍욕하잖아. 아 그렇네. 말 바꾸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거짓말이었어 방금? 아니 진짜야, 나 그래서 검고 성적으로 대학 갔잖아. 진지한 답이 돌아오자 어안이 벙벙해져 올렸던 손을 다시 내려놓지도 못했다. 우리 애기 놀랬네! 정한이 빙글 돌아누워 승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건강하니까 된 거잖아 그치.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여간 깊지 않았다. 승관은 생경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시선을 피해 버렸다.
현대식으로 개조된 한옥 숙소의 앞마당. 사람 두 명이 대자로 누워도 한참 여유로운 평상은 몸집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서, 보통의 뒤척임에도 괴랄한 소리를 질러 댔다. 하지를 앞둔 여름, 오전 2시 47분이라는 시간까지 따져 보면 그야말로 납량특집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시끄러우니까 움직이지 마. 엄중한 명에 얌전해진 정한이 고분고분 팔을 베었다. 쏟아질 듯 무수한 별무리 아래에 눕자 남모를 위압감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폭포처럼 쏟아져 버릴 것만 같았다.
― 승관아, 드라마 쪽으로 전향해 볼 생각 없어?
― 갑자기 뭔 말이야 그게.
승관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이 날아든 스카웃 제의였다. 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정한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 너도 이번에 시청률 봤잖아. 공중파인 거 감안해도 요즘 같은 때 36퍼센트면 그야말로 대박 친 건데.
― 그건 그렇지만⋯.
― 너 메인 역량 충분하다니까. 서브로 썩을 인재가 아니야.
감미로운 꼬드김이 귓전을 간질였다. 안 오면 후회할 텐데에, 정한이 아이처럼 웃으며 속삭였다. 승관은 인내하듯 공기를 삼켰다. 참자 참아. 예능국에 뼈를 묻겠다 다짐하진 않았어도 앞으로 일 년만 더 버티면 메인을 다는데. 못 미덥기 짝이 없는 사기꾼의 유혹도 아닌 까닭에 마음이 동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로지 커리어의 문제였다면 이렇게 갈등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 우리 사이 발각되고 싶어서 작정했음 그렇게 해. 소문 나는 거 순식간이다, 알지?
― 승관이랑 같이 일하고 싶단 말야. 예능국이랑 너무 멀어. 게다가 너네 프로는 컨셉 자체가 여행이잖아.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팔도 곳곳을 떠도는데 내가 안 보고 싶어 배겨?
― 다 때야 때. 우리 봐, 집까지 합친 마당에 뭐가 두려워. 제주도로 로케 갔다가 풍랑주의보 떠서 사흘 동안 갇혀 있었을 때만 해도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때 기억나? 형이랑 단둘이 한 방에서 밤 보냈던 거, 나 어색해 미칠 뻔 했었거든.
승관이 싱그럽게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슬금슬금 다가가 어느덧 맞잡힌 손깍지는 초하의 안온한 대기 속 유일한 한여름이었다.
― 별도 많네. 나는 북두칠성밖에 못 찾겠다.
― 북두칠성이 뭐야? 내 별자리는 여기 있는데.
정한이 귓가의 나란한 세 개의 점에다 가볍게 입을 맞추어 왔다. 깜짝 놀란 승관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상의 울음소리가 강약을 반복하며 이어지더니 날카로운 가락을 만들어 냈다. 오리온자리랬나. 정한은 눈꼬리를 휘며 승관을 빤히 응시했다. 승관아 그거 알아? 나한텐 매 해가 겨울이다. 오리온자리는 전갈자리를 피해 지금 지구 반대편 하늘에 올라 있다던데, 내겐 이 땅 위에서도 주극성과 다를 바가 없어서. 이내 풀썩 드러누운 승관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 겁도 없어 진짜.
― 뭐 어때. 여긴 우리 둘만 쓰는 숙소인데. 새들도 아가양도 다 잘 시간이라 괜찮아. 아, 여기 야외 카메라는 24시간 돌아가는구나.
뭐? 그대로 굳어 버린 승관의 낯빛이 뒤늦게 창백해졌다. ⋯망했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카메라와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리얼리티 촬영 현장이었고, 배우들의 숙소를 비롯하여 메인 촬영지로 이용된 모든 장소에 ENG카메라가 거치되어 있다는 걸. 정한과 승관이 묵겠다 자처한 곳은 대낮 동안 인근 논밭을 오가며 품앗이를 한 출연진들이 새참을 얻어먹었던 한 가정집이었다. 간밤을 틈타 주인 아주머니는 읍내로 딸을 만나러 갔고, 이 집엔 정말 두 사람뿐이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목표물을 설정하지 못한 부아가 냅다 치밀었다. 아니 쓸데없이 야외까지 돌리고 난리야. 하필 온통 검은색이라 온에어를 알리는 붉은 빛이 꼭 산중의 도깨비불 같았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만 남아야 할 모든 장면들이 빠짐없이 카메라 메모리에 담겨져 버렸음을 자각하자 속절없는 암담함이 잇따랐다. 팔로 눈을 가린 승관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 나 지금 쌍욕하고 싶은데 참는 거야, 윤정한.
― 카메라 돌아가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 그러게 누가 여행 온 것처럼 행동하래? 형이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까먹은 거지.
― 편집은 내가 하는데 뭐. 걱정하지 마. 다 덜어내면 돼.
― ⋯너 일부러 그런 거지.
환멸난 표정으로 정한을 바라보던 승관이 이내 벌떡 일어나 방으로 도망치듯 숨었다. 승관아, 자려고? 같이 자자. 정한이 헤실대며 쫄랑쫄랑 툇마루로 올라섰다. 몰라 바보야! 앙칼진 야단이 날아들었지만 정한에겐 무용했다. 어차피 방은 하나였고, 그 안에 설치된 카메라는 없었으므로.
2022년 6월 17일자 16번 카메라의 녹화 기록. 지난 해 초여름의 소유물이었던 이것은 95분 분량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자, 20부 드라마 <보통맛 첫사랑>의 종영 스페셜 촬영분이었다. 본래 원본 영상은 편집을 거친 뒤 방송이 되고 나면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 장면만큼은 따로 잘라 개인 편집실 컴퓨터에 꼭꼭 숨겨 놓았었다. 현장에서 함께 진땀을 뺐던 마지막 촬영이었고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본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리 연결해 두었던 핸드폰에 전송 완료 표시가 떠오르자 정한은 고민 없이 삭제 후 휴지통을 비웠다. 그동안 무사히 비밀을 지켜낸 두 사람 스스로와 컴퓨터에게 수고를 표하며. 전원을 끄고 막 일어나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고개를 들이민 건 후배 신 피디였다.
“어, 선배님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잠시 볼 게 있어서. 이제 갈 거야.”
정한의 기색을 살피곤 편히 나오라며 문을 활짝 연 신 피디가 예감하듯 물었다.
“오늘도 병원으로 퇴근하세요?”
“그래야지.”
“지극정성이다 진짜. 차도 생기면 저한테도 꼭 연락 주시구요.”
“알았어. 나 내일부터 다음 주까지 휴가 썼으니까 회사 망하는 일 아니면 연락하지 마. 애들한테도 전하고.”
“분부 받들겠습니다.”
과장된 몸짓으로 거수경례를 올리는 신 피디를 뒤로하고 정한은 걸음을 빨리했다. 점멸하는 택시의 위치 신호가 점점 근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의 밤샘촬영은 가히 지옥을 방불케 했다. 이별 이후 늘상 저기압이었던 정한은 물론 배우들의 컨디션까지 정상이 아니었더랬다. 그래서인지 성히 넘어갈 수 없는 요소들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디렉에 쏟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한의 체력은 하강하는 롤러코스터처럼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NG가 계속되자 서서히 짜증이 몰려왔고 분위기를 우려해 잦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럼에도 편치 못한 마음 한켠이 줄곧 까끄름했다. 예정된 촬영이 모두 끝났지만 평소 같았음 정성들여 진행했을 모니터도 필요한 사항들을 제외하곤 거의 배우들이 다 했다. 현장을 철수하던 도중 관록 있는 고령의 배우에게 결국 주의를 들었다. 윤 피디 요즘 뭔 일 있는 거 같은데, 힘든 건 알겠지만 공과 사는 구분 좀 잘 하자 우리. 여태 안 그러다 갑자기 왜 이래. 정한은 이어 건네어진 박카스 한 병을 손에 꼭 쥐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시효를 잃은 고력처럼 낡아빠진 사의였지만 그는 말없이 정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만 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침 여덟 시였고, 신발만 벗은 채 대강 이불 위로 엎어져 잠에 들었다. 열두 시에 알람이 울려 눈을 떴을 땐 당연하게도 혼자였다. 정한은 비몽사몽한 잠결에 무심코 승관을 찾았다.
“승관아⋯ 씻고 있어?”
그러다 화장실의 위치가 다른 걸 깨닫자 정신이 들었다. 둘이 살던 아파트 전셋집이 아니라 여덟 평짜리 원룸이었다. 아, 헤어졌구나. 이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는 데까지 거쳐가는 절차가 이다지도 복잡했다. 피로를 완전히 풀지 못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샤워를 했다. 손에 잡히는 옷을 대강 걸치고 다시 회사로 나섰다. 승관이 없는 집은 그저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해소하는 공간에 불과했다.
반쯤 뜬 눈을 끔뻑이며 습관처럼 대본을 펼치고 있는데 옆자리의 남 피디가 주르르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윤 피디.”
“네.”
“자네는 왜 이렇게 사극에 집착을 해?”
“집착하는 거 아닌데요. 저 데뷔작 현대극이었어요.”
“그거 빼고 쭉 시대극이잖아. 네 경력에 쌓아 온 필모가 얼만데.”
“시간 많으신가 봐요. 남 커리어 간섭까지 해 주시고.”
정한은 남 피디를 쳐다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걱정돼서 그러지. 요즘 너무 피곤해 보이길래. 가뜩이나 역사물은 고증에 철저해야 하니까 준비할 것도 많은데. 물론 그쪽으로 윤 피디 실력 뛰어난 건 다 알지만⋯. 신기하긴 해, 아무리 전공자라지만 너무 수준급이잖냐. 역사학자들 놀래키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정한이 눈을 흐리게 떴다. 잊지 못한다. 달리는 제 등에 업힌 채 희미해져 가던 숨소리, 애달프게 옷자락을 쥐고 있다 기어이 툭 떨어지고 말던 피투성이 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남 피디는 말끝을 흐리며 정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몸은 챙겨 가면서 일해. 너 그러다 있던 여자도 떠난다.”
그 말에 실소가 터져 마른세수를 했다. 정한이 대본을 덮으며 남 피디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활자들이었다.
“저한테 여자가 어디 있어요.”
“모르는 척 마. 우리 다 알고 있어.”
눈을 가늘게 뜬 남 피디가 놀리듯 말했다. 너무도 당연한 양 맹신이 깃든 어투에 정한은 순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허탈해졌다.
“사실 아니고 소문입니다. 언론계에 종사하신다는 분이 어쩜 그런 낭설을 쉽게 믿으세요.”
“아니⋯,”
“그 여자가 떠들고 다녔어요? 저랑 사적인 관계라고?”
낮아진 목소리에 살기마저 괴자 남 피디는 자긴 아는 게 없다며 줄행랑치듯 자리로 돌아갔다. 벌떡 몸을 일으킨 정한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빈 자리의 주변엔 불안감 어린 적막만이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연결 통로 근처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고 있던 정한에게 돌연 반가운 인사가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따라 목례한 정한은 그를 기억해 내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누구더라. 어디서 봤더라. 마땅히 떠오르는 접점이 없어 난처해지려던 찰나였다.
“아, 윤 피디님은 저 잘 모르시겠구나. 멀리서만 봤어서. 저 승관이랑 같은 팀에서 오래 일했던 작가 최영우라고 합니다. 소개를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영우가 뒷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운 듯 사과했다. 난중을 도피해 온 곳에서마저 잡념이 허락되는 여유 따윈 없었다. 착잡해져 예의상 인사치레만 해 주었다. 그런 정한을 유심히 보던 영우가 별안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귀엣말을 해왔다.
“차셨어요, 아님 차이신 거예요?”
이건 또 뭘까.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정한이 영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금 사위를 둘러본 영우가 덧붙여 속삭였다.
“승관이 말예요. 피디님이 차신 거냐구요.”
“그걸 어떻게⋯.”
당혹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자 영우는 결심한 듯 털어놓았다.
“사실 얼마 안 됐어요, 두 달 전쯤인가. 아시죠? 걔 소주 반 병에도 해롱거리는 거. 작가팀 회식할 때 승관이가 좀 일찍 취해서 차 끌고 온 저랑 먼저 일어났었거든요. 잠든 줄 알고 뒷자리에 눕혔는데 갑자기 말을 걸더라고요. 안 잤냐고 물었더니 저더러 윤 피디님 이름을 부르길래⋯ 그때 알았어요. 보통 사이 아닌 거.”
승관 못지않게 정한 또한 ‘그 시기’가 도래했음을 체감할 무렵, 승관이 잔뜩 취한 채 귀가했던 적이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얼마나 들이부었던 건지 내뱉는 발음엔 리을과 이응이 산더미였다. 깜빡 잠들었던 정한이 도어락 소리에 어렴풋 몸을 일으켰을 때, 승관은 신발장에서 마룻바닥으로 엎어지며 웅변하듯 외쳤었다. 야 윤정한, 내가 존나 호구로 보이냐 이 나쁜 놈아!
“⋯그 애가 또 무슨 말 안 했어요?”
“제가 말씀드리면서도 좀 죄송한데, 그 전에 혹시 싸우셨어요? 거의 울면서 서운함을 막 털어놓는 와중에 욕이 절반이었거든요.”
알코올의 힘은 대단했다. 정한에게서 조금만 비속어가 나와도 동그란 주먹으로 팔뚝을 콩콩 두들겨 대던 승관이었는데. 맨정신엔 상상도 못할 단어들이었다. 사실 할 말이 없긴 했다. 그걸 다 누구한테서 배웠으랴. 강렬한 된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정한은 승관을 안아 일으키며 피식 웃었다. 너 이제 말로 싸우면 형 이겨먹겠다. 거실 바닥에 다리를 펼치고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승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널 위해서라면 세상과 다시 맞서 볼 수도 있어. 우린 돌고 돌아 다시 만난다며. 나는 네 말이라면 다 믿으니까, 그리고 정말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한번 기다려 볼게. 내 여생에 네가 있길 기대하는 게 너무 큰 욕심이면 어떡하지. 살아 숨쉬는 사람들 모두가 날 죽이려 들어도 너만은 내 편이 돼 줬음 좋겠는데. 내가 죽으면 그리움에 못 견뎌 울어 줬으면 좋겠어 승관아.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을 만지작거렸다. 나직한 애소가 끝을 맺자 승관은 대답처럼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 그건 있었다. 자긴 형한테 아직도 처음 그 마음인데 왜 형만 몰라주냐, 사랑이 뭔 양은냄비도 아니고 달아올랐던 건 까맣게 잊고 이 지경까지 식냐고요. 그리고⋯.”
기억을 되짚던 영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헤어지잔 말 하면 죽여 버릴 거라고⋯⋯.”
“⋯⋯.”
“근데 다음 날 보니까 제가 데려다 준 줄도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모른 척해 줬죠. 보아하니 일부러 숨긴 것 같아서.”
“⋯고마워요.”
“그때까진 그나마 집에 가라 하면 꼬박꼬박 잘 갔거든요. 최근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거 보고 대강 짐작은 했었는데. 피디님 반응 보니까 진짜네요. 걔 그저께 휴가 냈어요. 보다 못한 왕작가님이 강제로 집에 보낸 거지만. 저희 메인 작가님 장난 아니게 까다롭고 빡세기로 유명하거든요? 그런 분이 냅다 휴가 써 주실 정도면 어느 정도였는지 예상 가시죠. 거의 좀비였다니까요. 눈이 거의⋯. 어, 아무튼 전 이만 가 볼게요.”
정한의 뒤를 흘끔거린 영우가 서둘러 말을 끊었다. 누군가가 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선 진작 배출구로 떨어져 있던 음료수를 꺼내며 정한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인간적이네요, 연애 쑥맥인 거.”
영우는 부러 능청스레 웃어 보였다. 정한은 그 말에 담긴 진심을 고스란히 느꼈다. 다름아닌 책망이었다.
조수석의 열선 시트를 켜고 포장된 죽을 올려놓았다. 혹 엎어질까 꼼꼼히 안전벨트까지 매 주었다. 넉넉하게 2인분을 샀다. 남기면 몇 차례에 걸쳐 나눠 먹으면 될 일이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익숙한 경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뒷좌석에 놓인 정한의 가방 안에는 해열제와 진통제가 들어 있었다. 죽을 주문해 놓고 근처의 약국에 들러 구입한 거였다. 약을 챙겨 먹지도 않았을 게 뻔했다. 예부터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심하게 앓았던 승관이었다. 옆에서 정한이 챙겨 주지 않으면 어지럼증에 쉽게 움직이지도 못했더랬다. 그럼 이틀 내내 잠만 잤을까. 걱정과 함께 방 안의 풍경이 훤히 그려졌다.
벨소리가 울리기에 발신인을 확인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 내부에 목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내비게이션 모니터를 보았다. 아 괜히 받았다. 정한이 속으로 자조를 짓씹었다.
[피디님,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아니. 나 바빠. 왜?”
[아⋯ 영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같이 가면 어떨까 싶어서요.]
정한이 한숨을 쉬며 핸들을 고쳐 잡았다.
“왜 자꾸 사적 영역을 넘보지? 나 애인 있다고 말 안 했었나?”
[⋯아뇨. 알아요.]
“신인이라고 적응하기 힘들어하길래 몇 번 조언해 준 걸 혹시 다른 걸로 착각한 거야? 송 작가, 난 차라리 내가 자의식 과잉인 거면 좋겠는데. 대답해 봐.”
[⋯⋯.]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까 만만하게 봤어? 난 무엇보다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혹 작품에 차질 생길까 봐 꾸역꾸역 참고 있었던 거 알아줬음 했거든. 내 커리어 망가지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어서. 이런 간단한 눈치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 마음을 떠봐, 그치.”
[⋯죄송합니다.]
“맘 같아선 너랑 싸우고 싶은데 참는 거야, 대본 망가질까 봐. 이거 나뿐 아니라 네 커리어이기도 해. 너 데뷔작이잖아. 유종의 미 못 거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거라 믿어.”
아파트 단지에 진입한 차량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어린아이에게 일러주듯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한 어조였지만 그 속성은 날이 선 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정한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승관의 집이 코앞이었는데 이런 일로 시간을 끌 순 없었다. 익숙한 자리에 주차를 마친 뒤 들어가려던 걸음이 섬칫 멎었다.
“⋯저게 뭐야?”
무심코 올려다본 윗층 창문에서 미약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죽이 아스팔트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 어떻게 뛰어올라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관을 열었을 때는 이미 부엌으로부터 강한 화염이 번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한은 부엌 안쪽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승관을 발견하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불길을 헤쳤다. 살아야 해. 오로지 이 욕심뿐이었다. 뜻밖의 재난에 바깥 상황은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다급히 승관을 들것에 눕혀 이송했다. 목 안이 타들어갈 듯 따갑다는 걸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정한은 구급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승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식이 없었다. 숨이 아주 희미하다고 했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승관은 두 번의 계절이 지날 동안 곤히 잠만 잤다. 정한은 승관의 손을 잡고 매일 기도했다. 그 어떤 답을 듣지 않아도 좋으니, 날 기억하는 너의 앞에서 사죄할 기회를 한 번만 달라고.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감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아래 숨어 있을 눈동자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승관아. 거긴 어때. 지금은 겨울이라 많이 쌀쌀한데. 네 세상에도 사계가 존재한다면 어쩐지 여름일 것 같다. 내 소원은 단 한 가지야.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조차 모르는 너의 계절 속에서도, 내가 살아 행복하기를.
“부승관 환자 의식 되찾았습니다!”
의료진들이 오가는 소리가 분주했다. 정한은 잠결에 버릇처럼 승관의 손을 그러쥐다가 낯선 감각에 번쩍 눈을 떴다. 맞잡힌 손을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올려들었다. 승관이 느릿한 시선을 깜빡이며 정한을 보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심박 곡선이 뚜렷하고 규칙적인 굴곡을 그렸다. 활력 징후 모두 정상이었다. 젖은 얼굴에 안도 어린 미소가 어렴풋 번졌다.
“윤정한.”
“응.”
“사랑 안 한다며.”
낯설게 내는 목소리가 아스라이 잠겨들어갔다. 정한이 번죽스레 웃었다.
“내가 언제.”
“⋯⋯.”
“나 너 사랑하지 않은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승관아. 네가 말할 기회를 안 줬잖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승관은 손가락을 움직여 정한의 마디마디를 감각했다. 마치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는 것처럼 섬세하고 간곡한 손길이었다. 여긴 평화롭지, 형. 더 이상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 눈물을 닦아준 정한이 한껏 다정히 얼렀다.
“대견하게 깨어나 놓고 왜 울어. 슬픈 꿈이라도 꾼 거야?”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반짝이자 또다시 울컥 무언가가 차올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도 아프지 않은 이곳이 오히려 꿈 속 같았다.
“그곳에 나도 있었어?”
“응. 그래서 더 아팠어.”
승관의 손에 머리를 기댄 정한이 차분히 숨을 쉬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작게 힘이 붙은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갈라졌다. 그토록 해 주길 바라던 말이었는데도 정작 그로 인해 후련해지진 못했다. 이미 한참 전, 정한의 모습을 마주하던 순간부터 동토는 녹아가고 있었으니까.
“우리 윤 피디님 출근하셔야 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올해 연차 싹 당겨 썼어. 이제 이거 끝나면 나 새해 될 때까지 휴가 못 낸다?”
아님 크리스마스에 그냥 냅다 째고 여행이나 갈까. 농담조 섞인 진담이었다. 해고가 두려우랴. 무려 네가 돌아왔는데. 와중에도 승관은 짐짓 심각해졌다. 형이 거기 어떻게 들어갔는데, 잘리면 아깝잖아. 예전부터 듣던 말이 감회로워 그만 크게 웃어 버렸다.
“고마워, 다시 와 줘서.”
그토록 염원하던 재회란 거, 끝내 이뤄지면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한없이 반갑고 애틋하기만 한 나의 사람이라. 몇 번의 생을 거듭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선택할 제 운명이라. 지금 걷는 이 길이 다듬어진 길일지의 여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지금 이 시간, 최선을 다해 널 사랑하겠다는 마음만은 뚜렷해서.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많이 기다렸지.”
“⋯좀 기다리면 어때.”
“⋯⋯.”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속 지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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