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세계엔 너의 기적도 있을까
젤 없는 젤귤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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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이어집니다.
“⋯형?”
“⋯⋯응.”
아. 승관이 입을 틀어막았다.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잊혀져 가던 목소리가 제 부름에 대답을 했다.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그의 얼굴이 있을 텐데도. 꼭 꿈을 꾸거나 허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만 뒤척여도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정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살이 많이 빠져 왜소해진 몸을 품에 안고 죽어라 울음을 참았다. 맞닿은 살결에 익숙한 향이 스몄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갈급하게 바랐던 서로의 정인이었다.
“⋯다, 죽었다고 했어.”
“⋯⋯.”
“연락이 두절되면 찾을 방법이 없어서, 그리고 그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하니까⋯ 모두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어.”
“⋯그래서. 믿었어?”
“아니.”
“⋯⋯.”
“윤정한은 그런 식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정한이 소리 없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떼고 승관을 빙글 돌려세웠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보였다. 승관이 다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형 봐야지.”
정한이 승관의 손을 겹쳐 잡고 천천히 내렸다. 승관이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피했다. 정한의 시선이 승관을 다급히 훑었다. 답하지 못한 핸드폰에 쌓여 있던 2년여 간의 흔적들.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했던 나머지 닿지 않을 가능성도 잊어버린 채 눈물처럼 토해냈던 지난 날의 이야기들. 날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정한은 하염없이 울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가 향하는 종착지가 부승관이라는 사실이. 한낱 청춘 시절 사랑했던 사람이 영원이 되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단다. 죽어가면서도 살고 싶어 기다리겠단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혀를 깨물었다. 다 흘려보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차오르려 했다. 승관을 끌어안았다. 미련했다. 자기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맞아. 난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야.”
“⋯⋯.”
“근데, 가끔은⋯ 다른 사람들 말도 좀 듣고 해.”
“⋯⋯.”
“왜 내가 네 세상이야, 승관아.”
정한의 목소리가 차츰 떨려왔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 살아. ⋯널 지켰어야지.”
끝내 제 품에 기대어 소리 내어 울어 버리는 연인에게, 정한은 그렇게 말했다. 난 네가 기다리지 않았어도 왔을 거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너에게 도달했을 거라고.
그러니,
정말 보고 싶었다고.
정한이 부서 이전과 함께 해외 파견령을 전달받은 건 승관이 2학년으로 막 복학했을 무렵이었다. 아침밥을 먹다 느닷없이 보고가 날아들었다. 승관은 상황 파악도 못하고 두 눈을 끔뻑이며 입에 남은 밥알을 씹고만 있었다. 그러다 꿀꺽 삼킨 뒤 빤히 정한을 쳐다봤다. 형이? 국제부로? 한참 침묵을 지키던 승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 ⋯형 영어 잘해?
얼토당토않은 궁금증이었다.
한 번 가는 데 며칠이 고작이었으며 길어봤자 몇 주였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저 그랬다. 그이는 발로 뛰느라 바빴고 학교 생활에 재차 적응해야 했던 승관 또한 매한가지였으니. 하지만 기다림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오래 걸렸다. 건당 4분 남짓 송출되는 짧은 목소리와 그보다 더 짧게 비춰지는 얼굴을 보고자 애인은 몇 날 며칠을 참아줘야 했다. 모든 것을 불가항력의 시간에게 맡겨 가면서.
정한은 출국을 밥 먹듯이 했다. 세계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났고, 메이저 언론사는 그런 능력 있는 특파원을 곧이곧대로 써먹으려 했다. 돈 드는 국제전화보단 카톡 메시지가 일상이 되어갔으며 습관처럼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단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타지까지 날아가거나 가지 말라며 잡아끌기에는 형편이 곤궁했다. 하나는 수당 받아먹고 사는 국제부 방송기자였고 하나는 학자금 대출 갚아 나가기에 급급한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전자도 불과 작년까지는 승관과 다를 처지가 못 되었더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돈을 벌러 가야 한다면 보내줘야 했고, 남은 쪽은 기다려야 했다. 운명이려니 받아들이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롱디가 뭐냐고 물어보면 승관은 이렇게 대답할 작정이었다.
그거, 사람이 못할 짓이야.
그리고 제 진로의 수많은 방향들 중 기자를 가장 먼저 배제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주변국들로만 파견을 오가던 정한이 돌연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본래 미국에 거처를 두고 있던 특파원이 급작스런 국장의 호출로 입국하게 되어 대신 가게 됐단다. 이젠 놀랍지도 않아서 평온하게 되물은 승관이 눈썹을 올려떴다. 무슨 건이냐는 거였다.
— 아카데미 시상식 취재.
— 아.
— 금방 올게. 평소랑 다르지 않을 거야.
특파원 애인을 둔 처지를 애진작 통감해야 했다. 정한은 윗선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경력자였다. 동기들 중에서도 실적이 높은 축에 속했고 이대로만 한다면 월급 인상과 재빠른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니 정한이 가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승관은 늘 그랬듯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한 듯 내놓는 수긍이었지만 어쩐지 투정이 어려 있었다.
— 내 생일 다다음 준데.
— 그 전엔 와.
— 꼭 와.
— 선물 사들고 올게. 뭐 갖고 싶어?
— 필요 없으니까 그 전에만 와.
— 알았어.
승관을 덥석 끌어안은 정한이 실없이 웃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일 주일하고도 사흘이 지났다. 침대에 눕자 그동안의 노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래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온몸이 푹 꺼져서 정한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고된 일정이었다. 당일의 일을 아무리 반나절만에 해결하고 왔다지만 그동안의 비행 시간이 있었고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던 존재가 있었으니. 기사 송고를 미리 해 두길 백번 잘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황금 같던 자유시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눈에 불을 켠 채 노트북을 붙들고 있어야 했을 게 뻔했다.
손을 뻗어 캠코더를 집어들었다. 오늘의 외출을 함께했던 동반자이자 승관을 위한 생일 선물이었다.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던 정한의 입꼬리가 둥실 호선을 그렸다. 좋아할 승관의 얼굴을 떠올리자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주지. 뭐라고 하면서 줘야 가장 좋아할까. 캠코더를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좋은 꿈을 꾸면서 편안하고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순간 노크도 없이 방문이 덜컥 열렸다. 잠들기 직전이었던 정한이 짜증 섞인 얼굴로 몸을 뒤척였다. 함께 아카데미 취재를 나갔던 선배였다. 방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더니 밖을 돌아다녔던 모양인지 외출복 차림이었다. 정한은 상기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느리게 일어났다. 저것은 필시 어딘가로 나가자는 다그침. 멀지 않은 곳에서 배우들의 수상을 축하하는 기념식이라도 열리나 싶었다. 허면 그걸 정한이 모를 리가 없었는데.
— 뭔 일 났어요?
— ⋯좀 큰 일이 난 거 같다.
달아오른 낯빛의 연유가 공포와 당혹감이었단 사실을 알아챈 정한이 침대에서 내려와 황급히 겉옷을 챙겨들었다. 분주한 움직임에 미약하게 밀쳐진 협탁 끝의 캠코더가 일순 휘청였다. 정한은 그것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앞장서는 선배를 재빨리 뒤따라야 했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가고, 정적만이 감도는 방 안.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한 캠코더가 협탁 아래 그림자 속으로 툭 곤두박질쳤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달렸다.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가 보면 안단 말뿐이었다. 특종 준비하고, 속보 날아갈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날 서린 어투에 절로 한기가 겹쳤다.
— 우리 잘하면 오늘 잠 못 잘 수도 있겠다.
— 왜요?
— 미친 놈이 하나 나타났거든.
그게 무슨, 대로변까지 다다른 정한이 눈을 의심하며 멈춰섰다. 되묻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흐려졌다.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선배가 핸드폰을 들며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 정한아.
— ⋯네.
— 짐 싸자. ⋯숙소 새로 잡게.
[속보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복판에서 총기 난사가 벌어졌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자는 총 열다섯 명으로, 이 중 한국인 여행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국의 수사 기관은 도주한 범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윤정한 기자입니다.]
“뭐?”
승관은 여느 때와 같이 뉴스를 틀어 놓고 배달된 짬뽕 그릇을 가져오다 자칫 발을 헛디딜 뻔했다. 방금 제가 들은 이름이 윤정한이 맞는가. 아카데미 시상식 기사가 끝난 뒤라고 완전히 긴장을 풀고 있던 속내가 돌연 대지진을 일으켰다. 승관이 후다닥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 볼륨을 높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를 노리고 벌인 계획살인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난사로 피해자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순식간에 한국인 여행자 한 명을 포함한 열다섯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그 중 두 명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사망했습니다. 범인은 범행 후 도주 중이며,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은 범인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정한의 목소리가 깔리는 동안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의 외관과 거리의 풍경이 차례로 지나갔다. 밤중에 난데없이 총성을 들었던 첫 신고자와의 인터뷰에 이어 마이크를 든 정한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마치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처럼 황폐하고 척박해 보였다. 당장 전날 저녁까지 활기찬 도시의 호흡이 이어지던 곳이라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테이블 위로 그릇을 내던지듯 올려놓은 승관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시차 같은 걸 신경 써 줄 여력이 못 됐다. 잠에서 막 깬 듯한 정한이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바락 소리를 질렀다.
— 미친 거야?
— [으응⋯?]
— 응은 뭔 응? 몰라서 물어?
— [⋯⋯아. 그거.]
— 미쳤다고 범인도 안 잡힌 사건 현장에 뛰어드냐고!
— [우리 기사 마감 다 했어. 두 시간 후면 출국해. 경찰들 깔렸고 머지않아 잡힐 거니까 걱정하지 마. 무사하면 됐잖아?]
—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수명이 깎인다 깎여. 저 천진난만한 인간을 어찌할까. 승관이 차오르려는 열불을 간신히 식혔다. 정말 그의 말마따나 여태 아무 일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라도 표해야 됐던 걸까.
— [승관이 선물 기대되지? 다 준비해 놨어.]
정한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사뭇 밝아진 목소리는 와중에도 선물 타령이었다. 승관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런 거에 호기심이 동할 줄 알고. 윤정한은 자기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저도 이제 성인이며, 미국에서 가져오는 선물 따위엔 관심이⋯.
— ⋯뭔데?
— [엄청 좋은 거.]
생기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번엔 또 얼마나 예상을 벗어날까. 두 사람의 관계는 높은 확률로 이렇게 승관 쪽에서 안달해 마지않는 구조였다. 정한이 승관을 그렇게 바꾸어 놨다. 이상한 면에서 흥미를 돋우고 거기에 서서히 스며들어 윤정한 아니면 안 되게 만들었다. 기막힌 인간이었다. 기대가 크면 매번 실망했으니 이번엔 얼마나 실망할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승관은 괜히 배시시 웃었다. 지금 당장은 선물이고 뭐고 그가 보고 싶을 뿐이었으니, 하다못해 길가의 풀뿌리를 뽑아 제게 준답시고 가져와도 웃으며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간수 잘 해서 가지고 와.
— [그러엄.]
이제와 분명한 건, 그때 문장의 객체는 선물이 아니라 윤정한이었다.
정한은 출국에 앞서 짐가방을 정리하다 머리가 하얗게 식는 것을 느꼈다. 캠코더가 보이지 않았다. 전의 숙소에 두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돌아오자마자 호텔을 옮기고 기사를 마감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탓이었다. 그것을 놓아둔 장소는 명백했지만 이미 분실물로 취급되어 누군가 가져갔을지도 몰랐다. 사색이 된 정한이 곧장 선배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악 남의 방에 갑자기 들이닥치고 난리야! 짐을 챙기던 선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러면서 조속히 최근 이틀 간을 회고했다. 한국으로의 출국만 앞둔 이 시점에서. 실수한 거 없고, 기사 마감 끝냈고. 특종을 보내주었으니 본사 반응이야 물론 굉장했고. 무엇이 문제인가. 정한의 낯빛은 자괴에 난잡해져 있었다. 뭣보다 특종을 따낸 사람의 것 치고 무언가에 대차게 차인 듯해 보였다.
— 왜, 무슨 일인데 그래?
— 저⋯ 두고 온 거 있어요, 예전 숙소에.
— 그래서. 지금 찾으러 가겠다고?
정한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의 얼굴이 멀뚱해졌다. 여기서 그곳까지는 차로만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 공항까지 가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여유였다.
— 중요한 거라서요.
— 우리 출국 시간은 알고 있냐?
— 네. 선배 스태프들 데리고 먼저 가세요. 저는 바로 뒤따라 갈 테니까.
저런 미친 놈을 봤나. 선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두고 온 건 그렇다쳐도 당장 거기까지 다시 간다는 건 한창 타오르고 있는 불길에 뛰어들겠단 말과 견주어도 손색없었다. 제정신 아니네. 선배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한이 흘긋 바깥을 내다보았다. 행인들이 오가는 거리는 어수선하기는커녕 보통과 같았다. 옆 동네에서 일어났던 난리를 모르는 세상처럼 평온한 아침이었다.
— 너 본분 잊었어? 어제 리포트하던 거 그놈이 봤으면 어떡할래. 네 얼굴 이미 외신에 다 팔렸어. 그놈 아직 안 잡혔고 혼자 일 저질렀단 보장도 없어. 갱 단원일 수도 있다고. 가뜩이나 경호원 없이 다니는 특파원들 안전성 문제 대두되고 있는 와중에 너까지 이럴래? 그게 뭔데 그래?
— 애인 생일 선물이요.
— 새로 사 그냥.
— 제가 그러려고 아이다호까지 갔다온 줄 아세요?
— ⋯⋯.
— ⋯저 여기서 죽으면 산재 처리 됩니까?
— 미친 새끼.
정한이 트허허 웃어 보였다. 와 진짜 쟤를 어떡하지. 선배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국장의 부름으로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을 따라 남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저 못 믿으세요? 하니까 선배는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온 만큼 저리 고집을 부리면 달리 꿰찰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 행동이라 치부하며 말리기엔, 특파원의 소지품이란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래, 나처럼 급할 것도 없는 앤데. 하루쯤 귀국이 늦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랴.
그날 승관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발을 구르며 기다렸지만 정한은 제가 말했던 예상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승관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그다음 비행기를 끝없이 기다렸다. 항상 출발하기 전엔 연락부터 하던 사람이 전화도 받지 않았다. 왜 안 오냐, 어디 있냐는 카톡 메시지만 수신되지 못한 채 쌓여 갔다. 표가 매진되어서 오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지.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얼마 뒤, 숙소와 공항을 잇는 경로 어딘가에서 다시 한 번 난사가 벌어졌으며 얼마 못 가 도주하던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들려왔다. 정한이 본래 출국하기로 되어 있었던 그 시간 즈음이었다.
윤정한이 실종됐다. 샌프란시스코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튄 핏자국만 남겨둔 채 사라졌다. 대부분은 죽었다고 말했고 일부는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었다. 후자의 일부는 극히 소수라, 승관을 제하면 남는 인원이 없었다.
정한은 샌프란시스코 변방의 한 병원에서 눈을 떴다. 그동안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잠시 정말로 심장이 멈추었고, 수술을 하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으며,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로 어림잡아 2년이 흘렀단다. 이 믿을 수 없는 발언들을 술술 읊는 의사를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리엔 몸만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두 개의 총알이 가슴과 정강이를 차례로 관통했단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조차 새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정신을 잃으며 어딘가에 부딪쳤던 건지 화면을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액정이 박살나 있었다.
승관아.
불현듯 두고 온 아이가 떠올랐다. 애원하다시피 하여 소지품의 행방을 물었다. 다행히 대부분 그대로였다. 정한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캠코더의 메모리마저 손실된 곳 없이 깨끗했다. 안도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승관을 보러 가야 했다.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핑 돌아 금세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당장 퇴원해야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걸었다. 기억하는 번호를 정확히 눌렀지만 다른 사람이 받았다. 승관의 이름을 댔더니 전화 잘못 거셨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무런 소득 없이 신호가 끊겼다. 몇 번이고 다시 걸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부승관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상대방의 화를 돋우고 나서야 포기했다. 정한은 박살난 핸드폰을 쳐다봤다. 저걸 고치지 않으면, 연락을 취할 방도는 더 이상 없었다.
그동안은 재활에만 힘썼다. 오로지 한국으로 돌아가겠단 일념으로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점차 다리의 감각이 회복되어 갔다. ‘밟는다’는 느낌을 알아차리기까진 짧지 못한 시간이 소모됐다. 정한이 의지로 말아쥔 주먹의 횟수는 승관이 연인을 위해 흘린 눈물의 양과 빗대어질 만했고, 닿지 않는 소식에 초조하게 졸인 마음은 승관이 마주했던 암흑의 크기와 거개 반비례했다. 서로는 서로가 아니면 안 됐다. 승관은 정한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현실을 부정했다. 실종과 사망은 글자부터가 다르다며 경찰에 실종 신고 접수부터 했다. 출국한 상태였기 때문에 국내 경찰이 쏟을 수 있는 힘이 비교적 적다는 걸 알면서도 잡아 본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끝끝내 지쳐서, 기어이 살기만을 바라게 된 때. 믿음이 돌아왔다.
부승관이 죽어서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제 운명이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다.
말아쥔 주먹이 가슴팍을 퍽 때렸다. 윽, 정한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눈썹이 꿈틀댔고 이가 세게 맞물렸다. 수술한 환부를 정확히 얻어맞은 탓이다. 가까스로 고통을 참아내면서도 웃음이 샜다. 아파도 싫지 않았다. 그것이 승관이라 좋았다. 승관의 붉어진 눈시울은 사그라들 생각을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을 뜨거운 무언가가 크게 빙글 회전시키곤 사라졌다. 감정이 후유증처럼 무질서하게 울컥댔다.
“사과해.”
“미안해.”
“뭘 사과해야 되는진 알아?”
“너 못 지켜준 거.”
제주의 밤은 계절에 상관없이 푸르렀다. 그래서 희미한 수평선으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짓는 일이 쉽지 않다. 승관은 이따금 조금 몸을 떠올려 사방의 바다에 잠겨 버리는 상상을 했었다. 시꺼먼 바다는 미지의 세계니까, 끝없이 빠지고 빠지다 보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어느 날은 정말로 꼬르륵 물에 잠겼다. 잠시 허우적대다가 몸에 힘을 풀면 웅대한 암흑 속으로 천천히 잠식됐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귀에는 정한의 목소리 대신 바닷물만이 차올라 먹먹했고 승관은 점점 더 해저로 낙하해 갔다. 엄연한 추락이었다. 바다가 거침없이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눈이 떠졌다. 온몸이 땀 범벅이었고, 베개는 잠결에 흘린 눈물로 축축해져 있었다. 승관은 그렇게 매일 죽는 꿈을 꾸었다. 2년이란 긴 시간을 홀로 견디는 동안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뜻모를 형언들을 모두 포괄하는 단 한 마디였다. 윤정한은 부승관을 지키지 못했다는, 빌어먹게도 단조롭고 정확한 문장. 구구절절 나열하는 법을 모르는 정한의 그다움이 승관으로 하여금 재회를 실감케 했다. 승관은 울먹이며 정한이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선 덧붙이기를, 조금 많이 늦은 생일 선물이랬다.
“진짜 나쁘다⋯.”
그깟 게 뭐라고. 승관이 원망스런 눈길로 캠코더를 쳐다봤다. 널 위해 태어났다는 듯 의기양양한 자태가 퍽 얄미웠다. 너 때문에 우리 형이.
“아이다호까지 가서 뭘 했어.”
“그때가 겨울이었잖아. 네가 유럽 여행 가면 꼭 보고 싶다고 했던 거.”
“오로라?”
“응.”
“⋯⋯진짜 그걸 찍어 왔다고?”
먹는 약의 개수만 열 알이 넘었다. 정한은 승관의 옆에 머무르며 그걸 전담으로 책임졌다. 시간 맞춰 상태를 체크하고, 자고 있으면 그 옆에 앉아 잠든 얼굴을 바라보거나 쓰다듬어도 보고, 고통에 겨워 힘들어하면 대신해 줄 수 없는 미안함 때문에 함께 울음을 삼켰다. 승관은 자주 피를 토했고 가끔 의식을 잃었다. 그럴 때마다 맨몸으로 병원엘 데려갔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없었으며 승관에게 쓸데없는 지출을 냈단 이유로 야단만 맞았다. 그러지 않겠다 하여, 약속했다. 먹어야 하는 항생제가 고갈되거나 승관이 원할 때를 제외하곤 병원에 가지 않기로. 정한으로선 납득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정한은 선뜻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정말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시한부 판정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기정된 사실이었으니까.
승관은 틈날 때마다 캠코더 영상을 보았다. 차가울 것이 분명한 바람결 속 정한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승관의 이름을 불러왔다.
[여기는 프리스트 호수.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명소래. 근데 여긴 그냥도 예쁘다. 저기 산 봐. 만약 오늘 오로라 못 보면 다음에 같이 오자. 승관이가 좋아할 거 같애. ⋯]
“⋯⋯.”
[승관아, 저기 보여? 초록색 아른거리는 거? 저게 오로라래. 곧 저게 더 커져서 하늘을 덮을 거래.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경이로워.]
가만히 정한의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가 곧 삼각대 위에 얹혀 구도를 잡았다. 넓은 하늘이 화면 안으로 가득 담겨났다. 새벽을 닮은 빛이 점차 퍼져가며 우주로부터 도달한 신호를 전송하듯 일렁였다. 자전이 이루어내는 지구의 숨결 소리가 짐승의 하울링처럼 어렴풋이 고여 있었다. 좀처럼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 대자연의 커튼은 되레 몸집을 부풀려 가면서 한참 동안 밤하늘 아래서 펄럭였다. 정한은 숨을 죽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승관아, 사랑해.]
승관도 따라 숨을 죽였다.
[생일 축하해.]
짧지 않은 영상이 머지않아 끝나면 되감기를 했다. 속도와 어투 하나하나 외워낼 수 있을 만큼 수없이 보았다.
정한은 승관의 방에 들어가려다 영상 속 제 목소리가 들려오면 손을 멈추고 가만히 멈춰섰다. 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했을 음성들이었다. 스스로에게 드는 후회의 무게감에 억눌려 스러지려는 걸 간신히 버텨낸 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그려냈다. 그런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승관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한 사람의 연인이, 날마다 마주해도 믿기지 않는 현실 속 중심이었다.
“우리 산책하러 나갈까?”
승관이 구한 집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동네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라.
고등학생 시절의 승관이 수학여행을 명목으로 제주행 비행기를 탔을 때, 같은 장소로 엠티를 왔던 신입생 정한도 거기 있었다.
— 도민 아니시구나?
일행과 떨어져 걷다 길을 잃어 헤매던 정한을 승관이 불러세웠을 때, 정한은 당황스러움을 숨기고 예의 사교성 어린 미소로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길거리 보도블럭에 주저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승관은 태연히 아라요, 하고 답했다. 그리곤 제 주변을 휘 둘러보며 덧붙였다. 여기 다 논밭인데. 서성거리는 사람 치고 열에 아홉은 여행자라.
— 숙소가 어딘데요?
— ⋯일도랬나.
— 일도? 거기 우리집 있는 덴데.
— 아.
— 저도 여행 왔거든요. 일도면 걸어선 못 가고 버스 타고 가야 해요. 길 건너서 왼쪽으로 쭉 걸어가면 정류장 하나 나오니까 거기 오는 버스 아무거나 타고 가요. 다 근처로 갈 거예요.
정한은 순간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 여행을 와요?
— 수학여행이요. 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거든요. 그래서 이러고 있잖아요. 관광지 구경이 별로 놀랍지가 않아서.
앗차, 티엠아이. 승관이 가볍게 제 입을 때리고는 헤헤 웃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손을 크게 흔들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정한이 문득 물었다.
— 혹시 이름이?
— ⋯왜요?
— 왠지 우리가 다음에 또 만날 거 같은 예감이 드네.
— 반말을⋯.
— ⋯⋯.
— 부승관이요.
그러고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스몄다. 멀어지는 뒤통수가 동그랬다. 민들레 홀씨처럼 팔랑팔랑 흩날리는 머리칼이 유난히 보드라워 보였다. 정한은 그날, 그 밤에, 제주의 삼다三多 중 하나를 처음 체감했다. 감귤밭이 가까워 새큼한 향이 풍겨오는 섬에선 쉼없이 부는 바람마저 달콤했더랬다.
“승관이 귤 서리 해 봤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널린 게 귤인데 왜 서리를 해.”
기자 맞아? 좀 합법적인 대화 좀 하면 안 될까? 승관이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우리 내일부터 할 거 있어.”
“뭔데?”
“하루에 두 끼 이상 맛있는 음식 먹기.”
갑자기? 승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리스트도 뽑아 놨어. 정한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기자 시절 잠 시간 버려가며 키워냈던 자료 수집 능력이 예상치 못한 데에서 빛을 발한 결과였다. 부쩍 건조해진 눈길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알아?”
“그래? 내 오랜 꿈이었는데.”
난생 처음 듣는 소리다. 승관이 무시하듯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쫓아간 정한이 길가 끝을 가리켰다. 저기 식당 가 봤어? 아니. 정한이 신난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대뜸 승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저길?”
“어. 맛집.”
거절할 새도 없이 끌려온 곳은 단층 컨테이너 사이즈도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식당이었다. 테이블에 앉자 보이는 메뉴판엔 백반 한 가지뿐이었다.
“여기 백반이 그 리스트에 있었어?”
“아니. 여긴 내 기준.”
“와 본 거야? 언제?”
“스물한 살 때.”
스물하나⋯ 조심스레 읊으며 눈을 굴리던 승관이 이윽고 눈썹을 올려떴다. 설마, 하는 눈빛이었다. 정한이 씩 웃었다.
“숙소 가는 길에 배가 엄청 고팠던 거 있지.”
“⋯지금도 배고파?”
“우리 저녁 시간 한참 지났어.”
형은 먹고 싶은데, 같이 먹어 주면 안 돼? 여기 진짜 맛있어. 기민한 눈치로 승관의 컨디션을 알아챈 정한이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배를 움켜잡아 보였다. 마지못한 수긍의 답이 돌아왔다.
테이블 위로 차려진 백반 한 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팔천 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반찬의 가짓수에 비례한 정성이었다. 승관은 수저도 들지 않고 음식들을 잠자코 응시하다 눈을 데룩 굴렸다. 국을 그릇째 들이켜는 정한이 보였다. 형이 원래 저렇게 밥을 잘 먹었었나. 마치 구경꾼처럼 두 눈만 깜빡이며 관람하고 있자 정한이 그릇에 코를 박은 채로 말했다.
“승관아. 나 체할 거 같애.”
“⋯아. 미안.”
“왜 안 먹어.”
“입맛이 별로.”
정한의 시선 끝에 가지런히 놓인 약통이 닿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습관적으로 꺼내 놓은 승관의 몫이었다. 항생제는 사람의 식욕을 부진하게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병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선 많이 먹어야 했다. 정한이 숟가락 위에 밥과 반찬을 조금씩 얹은 뒤 승관에게 내밀었다.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던 승관이 곧 입을 벌려 순순히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씹는 표정이 싫진 않아 보였다. 정한은 그마저도 다행이었다. 우리 내일부터 이렇게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거야 승관아. 제안을 빙자한 종용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으로 트인 녹지는 대부분이 감귤을 재배하는 농장이었다. 그날 두 사람이 마주쳤던 거리를 사이에 두고. 포실한 뒤통수를 보며 민들레를 연상했던 군청색 밤. 정한은 그날과 같은 간격에 멈추어 서서 승관을 보았다. 키가 크고 살이 빠져 앳되었던 면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어른이 된 승관은 정한에게 시시때때로 겁을 주었다. 잃기 싫었다. 헤어져 있던 시간을 희생이라 부른다면 더 이상의 반복은 두려웠다. 그것은 자칫 영영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거기 서서 뭐 해?”
승관이 걸음을 돌려 쪼르르 달려왔다. 정한은 제 손을 잡으려는 걸 도리어 안아넣었다.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한 승관이 중력을 잃은 천체처럼 정한의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왜 이래,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가만히 숨을 쉬었다.
“이렇게⋯ 와 줄 거야? 형이 안 가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심장이 타듯 저려왔다. 울음을 참은 정한이 다시 물었다.
“승관아. 우리 여기서 아주 살까?”
승관이 정한의 어깨팍에 얼굴을 비비며 목을 가다듬었다. 오랜 침묵 끝으로 약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관의 두 팔이 허리를 감싸안았다.
“형.”
“⋯응.”
“나 무서워.”
사랑을 경험해 본 자에게는 부력과 인력이 정상보다 과도하게 작용하여, 쉽게 뜨고 쉽게 가라앉게 만든다. 그래서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조금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조금만 더.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몸을 맡기었다. 그곳에 그가 있으니. 어떻게든 떠오르고 싶게 됐다. 세상은 그걸 필연이라, 승관은 그 존재를 윤정한이라 불렀다. 그러나 무서웠다. 지금 가라앉아 버리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과 시간은 순환되지 않는다. 마음의 의지가 아무리 거세다 한들 흘러야만 하는 시간은 비켜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털어놓고 있었다. 형이라도 버텨 달라고. 자길 놓아줄 수 없다면, 끌어당기지 않아도 좋으니 떨어지지 않게 잡고만 있어 달라고.
한계까지 다다른 제가 마침내 손을 놓을 때까지.
승관이 울었다. 겁이 나서, 억울해서, 두려워서, 서러워서 처음으로 가장 크게 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면 단단하게 받쳐 주는 사람이 있었다. 제 이름의 발음을 감각했다. 그가 불러줄 때 가장 사랑 같은 어절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가장 중요한 지금, 그가 곁에 있다. 오로지 승관을 위해 제 모든 걸 내던졌던 정한이 있다. 살아야 할 이유다.
제주의 무한한 여름, 까마득히 검푸른 밤 아래서. 정한이 승관의 뒷머리를 감싼 채 입술을 포개어 왔다. 걱정에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더 깊게 아득해졌다. 눈꼬리를 타고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정한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날짜를 센 지 오래 되었다. 내일 이상으로 일정을 계획하지 않았다. 뜻모를 계절의 한복판을 짐작하고 인정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면. 이미 충분한 행복을 한움큼 쥐고 있다면 조급히 시달리거나 추격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승관은 오늘을 여름의 늑장이자 가을의 첫걸음이라 일컫기로 했다. 단풍나무가 노을빛을 삼키기 전까지 이 호칭은 내일도 모레도 그대로일 테다. 그러면 승관은 정한과 몇 번의 오늘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마음 놓고 어제를 추억할 수 있는 지금을.
“친구들이 그랬다?”
정한의 다리를 베고 누운 승관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꿈꾸듯 말했다. 평상 가장자리에는 다 먹은 치킨 상자와 콜라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술만 마시면 그렇게 형 얘기를 했대. 그래서 형이 떠난 후 나랑 친해진 애들도 윤정한 이름만 대면 다 어련히 내 애인인 줄 알았다고.”
팔불출이 따로 없지. 승관이 부끄러운 듯 헤실거렸다. 정한은 따라 웃지 않고 가만히 승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고맙네, 그 친구들. 형 생각도 해 주고.”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승관은 장난에 걸린 어린아이처럼 몇 차례 혼란 섞인 눈동자를 굴렸다. 가볍게 죽음을 생각할 만큼 나락 같았던 그 시절도 떠올리니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됐다. 명도가 짙어져 가는 하늘에 그믐달이 선명했다. 주변에 별은 없었다. 그림자에 가려진 틈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빛나려 홀로 덩그러했다. 우리완 달리 외로워 보인다고, 승관은 스쳐 생각했다. 잘게 부서진 제 순간들이 별이 되어 하늘을 뒤덮으면 고루 밝아져 대낮 따위 부럽지 않을 텐데. 기억의 우주. 어쩌면 그것이 현재 승관이 살아가는 세상의 별칭일지도 몰랐다.
“⋯아무도 몰라?”
“뭘?”
“형 돌아온 거.”
으응, 아마도. 정한이 주억였다. 승관은 차마 반응하지 못했다. 윤정한이 저에게만 산 사람이란다. 돌이켜 보니 아무에게도 신뢰가 안 갈 사실일 듯했다. 미국에서 행방불명됐던 연인, 그간의 세월처럼 덩달아 고요했던 2년만의 귀환. 소문을 내고 다닐 작정은 아니었음에도 어쩐지 오묘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승관뿐이었으니.
“나 복직하,”
“꿈도 꾸지 마.”
승관이 정색하며 대번에 말허리를 잘라냈다.
“⋯긴 힘드니까 알바라도 구해 보려고. 이 근처에.”
승관이야 통장으로 입금되는 병가 급여가 있었으니 하릴없이 요양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쳐도 정한이 더해진 입장에서는 말이 달라지긴 했다. 기자의 커리어는 어디서나 거뜬히 내세울 수 있음과 동시에 별 도움이 못 됐다. 너무도 특수한 직업이기 때문에 이직이 쉽지 않을 뿐더러 다른 일과도 쉽게 병용되지 못하는 속성이라 그랬다. 다만 정한은 근방 도처를 오가며 봐둔 곳이 있었다. 문앞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투박한 손글씨가 붙어 있던, 동네의 작은 단칸짜리 책방이었다.
돌연 흉부께가 울리듯 아려왔다. 승관은 손이 끈적거린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쿨럭, 기침이 터졌다. 뜨겁고 벌건 점액이 입술 밖으로 비져나왔다. 승관이 차가운 눈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목구멍에서 피맛이 번졌다. 세면대를 짚고 눈을 감았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끝이 가까워진다는 걸 실감한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거리를 거닐고 순수한 욕구로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평범하게 웃다가 너무 재밌어서 울고 그걸 한가득 되새기고 각자의 일을 하고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통화를 하고 상사의 흉을 보고 애환을 토로하고 살결을 맞대며 잠에 드는 일상적인 나날들을 도로 소유하고 싶었다. 제 것이던 적이 분명 있었건만 마치 먼 과거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크게 숨을 쉬었다. 다스리자. 더 이상 울지 말자.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형⋯?”
적막한 한기에 눈을 뜨자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들려오는 인기척은 절무했다. 승관은 순간 잠결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곧 꿈이 아님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전화를 걸며 거실로 나갔다. 벨소리는 식탁 위에 놓인 정한의 핸드폰에서 울렸다. 그걸 본 승관의 손이 툭 힘을 잃었다. 공허하게 늘어지던 원초적 벨소리가 무작정 끊겼다. 정한을 부르는 목소리가 차츰 떨리기 시작했다. 넓지도 않은 집 안을 모두 돌아보았음에도 사람의 온기는 찾을 수 없었다. 또 사라졌다. 말도 없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듯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은 정지된 지 오래였다. 휘청거리며 마당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새푸른 잔디가 아침 햇살을 맞아 안화하게 흔들렸다. 승관은 가차없이 그것들을 짓이기고 걸어가 대문을 열었다. 단칼에 나서려던 걸음은 누군가의 그림자를 밟은 찰나에 우뚝 멎었다. 눈물이 매달린 시선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아.”
정한이 양손에 가득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놓치듯 떨구었다. 그리곤 다급히 껴안았다. 아침 바람을 쐬어 냉해진 손이 머리를 애타게 감싸왔다. 그 손길에 거짓말같이 안심이 됐다. 또 없어진 줄 알았어, 승관이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다 쉬어 갈라진 목소리였다.
“미안해. 너 잠들어 있는 동안 얼른 장 봐 오려고 서둘렀는데. 형이 늦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승관아.”
그러나 한번 소스라친 심장께는 좀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떨리는 손으로 정한의 허리를 당겨안았다. 화내고 원망할 여유는 없었다.
“⋯맛있는 거 해 주려고?”
“응.”
“형 요리 안 한 지 오래 됐잖아.”
“기대해. 자신 있어.”
저 무해한 자신감에 결국엔 웃음이 났다.
고기국수와 두부조림. 탄단지의 완벽한 조화였다. 아침부터 고기를 삶고 양념을 졸이느라 시간은 꽤 걸렸어도 기다리는 게 나름 지루하진 않았다. 정한이 해내는 모든 요리의 과정들이 불안과 긴장과 신기함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일전의 함께 산 세월 동안 정한이 요리를 해 준 적은 있었어도 그것은 즉석식품에 비견되는 비교적 간단한 레시피들이었으므로 선보이는 데 무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정식 ‘요리’라는 건 가히 처음인 수준이었다. 걱정이 된 승관이 도와주려 했지만 정한은 완강히 사양했다. 결국 꼼짝도 못하고 흔들리며 그 꼴을 지켜보던 승관은 마침내 제 앞에 도달한 요리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봐도 음식의 모양새이긴 했다. 아마추어 대회에 출품된 정체 불명의 요리도 아닌데 어쩐지 선뜻 시도하기 어려워 머뭇거리고 있자니 정한이 승관의 손에 손수 수저를 쥐어 주었다. 불가항력에 이끌려 시도해 본 첫 술은,
“⋯맛있네?”
왜 맛있지? 승관은 동그래진 눈으로 국수를 씹었다. 어릴 적 먹어 봤던 고기국수의 맛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형 알바 말고 식당 하나 차릴래? 거짓말 아니고 진짜 맛있어.”
“싫어. 승관이한테만 해 줄 거야.”
귀찮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서 한다. 승관이 흐, 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리고 나 일자리 구했어. 건너편 책방 알지? 거기서 알바 구한다길래.”
“바로 됐다고?”
“어. 내일부터 출근하라 하시던데.”
도대체가, 전조라는 게 없다. 속전속결이 도를 넘었다.
“⋯다른 건 안 물어보셨어?”
“전과 없냬서 없다고 했어. 절도나 횡령 쪽 유무가 제일 중요하다면서.”
“⋯⋯.”
정한이 속없이 낄낄거렸다. 그렇구나. 할 말을 잃어버린 승관이 로봇처럼 납득했다. 하기야 책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에 이전 커리어나 병력이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해는 수없이 뜨고 저물었고, 달 또한 금세 차올랐다. 계절은 기척도 없이 성큼 다가와 이전의 흔적들을 재빠르게 앗아갔다. 겨를에 첫눈이 내렸고, 그 즈음 승관은 앉아 있는 날보다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색소가 전멸된 나무를 응시하면서 때때로 멍해졌고 그대로 잠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으며 찍어 놓은 영상들을 보며 뜻 모를 생각에 잠겼다. 승관은 분신처럼 캠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이따금 직업병이 도져 앵글을 신중히 맞춰 보다가도 정한이 예쁘게 웃으면 서둘러 그쪽으로 화면을 돌려 초점을 잡았다. 캠코더는 관찰 카메라처럼 돌아갔다. 어둠 속 인간계를 지켜보는 달처럼 은밀하게 두 사람의 사생활을 엿봤고 나누는 사랑을 들었다. 속성이 비밀스럽지 못해 누구나 열어볼 수 있다는 건 장점이었다. 승관에게 주변인이라곤 정한뿐이었고, 이는 의도한 전유물이었으니. 메모리 속에 담긴 그들의 일상은 나노미터 미지의 공간에서 예전의 오로라처럼 어지러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한이 책방에서 만화책을 빌려다 주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침대에 엎드려 <슬램덩크>를 읽는 데 몰두하고 있던 승관은 문득 다음 권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 권을 눈 깜짝할 새 통독해 버린 거다. 온종일 그것만 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약 먹는 걸 잊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어 승관아.]
“슬램덩크 13권 있어?”
[벌써 다 봤어?]
“웅.”
[그럼 이따 퇴근할 때 가져갈게. 몇 권 필요해?]
“⋯내가 거기로 갈게.”
사실 그 정도로 급한 건 아니었다만. 정한이 보고 싶었다.
내려앉는 채하가 짙었다. 사선 아래로 꺼져가는 주제에 경이롭게도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도로까지 번진 잔상이 온색 계열의 물감을 아무렇게나 덧칠한 것처럼 어수선했다. 승관은 만화책 세 권을 소중히 품에 안고 색의 징검다리를 밟았다. 지나쳐 가는 붉은 도로는 승관을 위해 깔린 융단처럼 고고했다. 책방은 도보권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책방이지만 아는 이들만 이따금 찾는 곳이라 내내 조용했다. 승관이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료했는지 핸드폰을 보고 있던 정한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반겼다. 서재의 가장자리에다 가져온 책들을 꽂아넣으며 안부 건네듯 물었다.
“좀 안 쑤셔?”
“뭐가?”
“형 말야. 바쁜 일과에 익숙했었잖아.”
옛말처럼 되새기자 정한은 가볍게 웃어주고 말았다. 나 이제는 바쁜 일 못해, 다른 의미로 좀이 쑤셔서. 카운터를 빠져나온 정한이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쪽도 엄연히는 손님인데. 취급이 영 변변찮았다. 승관이 정한의 다리를 안아들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음 권 보고 싶다더니. 승관의 빈손을 본 정한이 유심해졌다.
“집에 갈 때 가져가자.”
“어?”
“나 형 보고 싶어서 왔어, 그냥.”
이런, 미치도록 요망하고 예쁜 아이를 봤나. 정한이 벌떡 일어나 승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애기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지. 어리광 부리듯 마구 비비자 승관이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었다.
“승관아. 서귀포에 동백꽃 명소가 있대.”
“응.”
“같이 갈래?”
“그러자.”
승관은 언젠가부터 울지 않았다. 제 일은 깨끗이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러니까 예전과 같이 행동했다. 자주 웃었고 더 자주 종알댔다. 아플 텐데도 티 한번 내지 않았다. 내성이 생겼다면 전보다 약효 또한 덜해야 정상일 터였으나 간간이 기침만 할 뿐이었다. 적어도 정한의 앞에선 늘 그러했다. 정한은 승관이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억눌러 왔던 것이 언젠가 터져 버릴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럼에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것이 승관이 원하는 길이었다. 함구해 달라는 무언의 독촉이었다. 정한은 눈을 감으며 이마를 기댔다. 승관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무사히 뛰고 있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릿한 박동이 전해져 왔다.
남쪽으로 가려면 차를 몰아야 했다. 버스를 타기엔 왕복 시간이 많이 걸려 렌터카를 선택했다. 연식이 조금 된 경차였다. 둘이 타고 뒷좌석에 가방을 싣기엔 딱 적당한 크기였다. 승관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캠코더를 만지느라 분주했다. 예쁜 델 가면 남는 게 사진이란 이유였다. 정한은 신호에 차를 세울 때마다 백미러를 살피는 척 승관을 보았다. 컨디션은 어떤지, 하고 싶은 말이 있을지,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낌새로 알아내기엔 시간이 걸렸으므로 그럴 때마다 부담스러운 눈길을 느낀 승관은 손을 옴찔거리며 신호등만 응시했다.
“그만하지? 신호 바뀌었는데 안 가면 뒤차가 욕한다.”
“우리 승관이가 봐 주고 있잖아, 신호등은.”
“자꾸 그러면 안 봐 줄 거야.”
“알았어, 미안해.”
정한이 비실비실 웃으며 핸들을 고쳐잡았다. 신호가 다소 오래였다. 멈춰 선 지 꽤 된 듯했지만 여전히 바뀔 생각을 않았다.
“승관아. 형 일 초만 봐 주라.”
“내가 언젠 안 봤다고,”
무심코 돌린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흑갈색 눈동자에 잠긴 정한의 형상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거울처럼 맑다가도 우물처럼 흐려졌다. 날씨의 변덕처럼 자꾸만 안개가 스몄다 걷히는 것 같았다. 일 초라더니. 시간이 멎은 것처럼 느렸다. 신호등은 그대로였고, 승관은 묶인 듯 얼어붙어 숨만 겨우 쉬었다.
“사랑해.”
“⋯맥락이라곤 없어 진짜.”
얼음땡의 땡 신호 같은 그 말에 정신이 든 승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홍조 띤 뺨이 봉실봉실 움직였다. 세 글자의 고백이 촉발탄이라도 된 양. 억겁 같았던 신호가 기다렸다는 듯 초록으로 바뀌었다.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빼곡히 식재된 숲은 입구부터 붉었다. 겨울의 복판을 뚫고 비로소 나는 부단한 생명력이었다. 예로부터 사랑의 상징이었던 붉은 꽃은 얕게 포개어진 설경 틈에서 한층 수려했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유명한 곳이었지만 날짜상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승관은 캠코더를 켰다. 조매화鳥媒花였기 때문에 향은 없었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만개였다. 몇 차례의 감탄사가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어릴 적 자주 보았어도 서울에 오래 머물러 있던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낯익은 숨결이 서린 겨울의 심장. 낭만처럼 범람하는 동백꽃 아래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걸었다. 평소와 같았다. 의미 없는 대화가 꼬리를 물고, 투닥투닥 장난을 치면서도 두 손은 가운데에서 꼭 맞물린 채였다.
철이 덜 든 아이처럼 한동안 가볍던 승관은 이내 초향에 잠식된 공간에 다다르자 속도를 늦추었다.
“형. 지금 우리 사는 집 있잖아.”
“응.”
정한이 여전히 신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나중에 전세금 빼면 새 집 구할 정돈 될 거야. 서울 집도 그렇고.”
“⋯⋯.”
“그러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살아.”
일순 맥동이 차게 식었다.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빠졌다. 손을 빼려는 줄 알고 순순히 놓아준 승관이 정한을 돌아보았다. 정한은 직감했다. 직접적인 이별을 예고하는 눈동자는 더없이 견고했다. 세상에서 가장 싱겁고 단조로운 색을 띠고서. 애써 웃어 보았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나중에 언제? 우리 다른 집으로 이사 갈 거야? 난 지금 집이 좋은데. 한옥 같기도 하고, 주택 같기도 해서.”
승관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 이거 봐, 예쁘다. 입술을 축인 정한이 땅에 떨어져 있던 꽃송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대화가 자연스레 끊겼다. 화엽을 통째로 매달고 낙화한 붉은 꽃이었다. 사람이 빈번히 오가지 않은 길이었는지 밟힌 흔적조차 없이 깨끗했다. 먼지를 후후 불어내고 승관의 눈앞에 뿌듯하게 내밀었다.
“자, 선물.”
“고마워.”
승관은 꽃을 받아들면서도 끊긴 대화를 굳이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말을 전한 것만으로도 족한 모양이었다.
다시 걸음이 이어졌다. 숲의 끝으로 들어가 볼 계획이었다. 정한이 승관에게서 캠코더를 넘겨받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한 앵글 속에 나란히 붙었다. 새벽녘 달의 흔적처럼 옅은 미소가 승관의 입가에서 고요히 파동을 일으켰다.
정한이 오로라와 함께 선물로 준 캠코더는 그날의 동백숲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빨간 불이 켜지지 않았다. 승관이 동백의 화엽처럼 붉은 피를 토하던 날. 전에 없이 눈물 섞인 몸부림을 쳤던 날. 격통에 가빠지던 숨이 끝내 꺼져가던 날. 정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원을 향해 달려갔던 날. 생애 처음으로 아이를 붙잡기 위해 울부짖었던 날. 맞잡은 손을 쥐고 있다가 기어이 무너져 내린 그 순간.
캠코더는 승관이 남긴 첫 번째 유품이 되었다.
“나 내일 서울 가.”
정한이 모래를 밟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가는 건 아니고 잠깐. 파도가 철썩이며 대신 대답했다. 얕고 가벼워서 응, 도 아니고 아, 도 아닌 것이 꼭 잠투정을 부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책방은 그만뒀어. 다시 언론사로 돌아갈 거야. 물론 복직은 아니고. 작은 신문사 하나 차려 보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더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안 할게. 안전하게 몸 사리라면⋯ 사무실에 앉아 총괄 검토만 하지 뭐.”
사장 한가운데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고 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경계를 가름하듯 곧게 난 수평선이 하늘의 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아, 혹시 기서호 알아? 그 사람은 너를 알던데.”
정한이 발로 모래를 슥슥 문질러 파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홀로 여행을 왔는데 게스트하우스 위치를 헷갈려서 길을 잘못 들었다나 봐. 자길 알아보고도 덤덤한 내가 신기했는지 시종 날 빤히 보길래 일단 집에 들여서 길을 알려줬거든? 그러다 탁자 옆에 놓여 있던 우리 사진을 본 거야. 네 얼굴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 아는 척을 하더라. 자기랑 같이 일했던 피디님이라고. 정말 친절하고 열심이었던 분이라 기억에 남아 있다면서. 나와는 어떤 사이인지,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셨어. 근데⋯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냥 조금 멀리 떠났다고만 했어.”
무릎을 세우고 턱을 묻었다. 고개를 기울여 바다를 보았다. 시소를 탄 듯 삐딱해진 수평선이 정한의 세계를 저울질했다. 노래를 듣듯 주변을 빈틈없이 감싸오는 정적에 집중했다. 불어오는 해풍과, 그 바람을 타는 격랑뿐이었다. 작고 부서지기 쉬운 청백색의 세계. 너의 새로운 목적지는 어디일까. 어딜 향해 날아갔을까. 매일 마주하지만 때론 무섭다던 바다는 어땠을까.
정한은 그 후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대양의 가장자리를 내다보았다. 그러다 이따금 흰 바람이 불어오면 그 속에 스며들어 있을 제 연인의 목소리와 뽀얀 얼굴을 떠올렸다. 시린 손을 스스로 그러쥐고 이름을 불렀다. 승관아.
나는 아직 너를 잃은 겨울에 사는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발끝으로 무언가 채였다. 송이째 낙화한 동백꽃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정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가는 사람조차 없는 해변가 말미엔 온통 상록수뿐이었다. 갓 여름이 피어난 날씨는 현저히 안온해져 꽃잎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는데. 정한은 한동안 새푸른 나무들을 응시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무거워서 바람에 실려 날아왔을 리 없는 꽃송이였다. 어디선가 승관의 것 같은 향이 풍겨왔다. 품에 꼭 안고 숨을 쉴 때 으레 속으로 들어차곤 하던 따뜻하고 포근한 체취였다.
정한은 손가락 끝으로 꽃잎을 어루만지며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파도가 닿는 가장자리에 발을 디디고선 조심히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자 사락 소리를 내며 밀려온 물결이 동백꽃 반절을 가볍게 적셨다. 대해는 그깟 눈물 몇 방울 떨어진다고 불어나지 않았다.
“승관아.”
이제 보내 주어야 할 때였다.
“⋯⋯잘 자.”
파도는 모래를 진한 색으로 물들인 뒤 금세 물러났다. 손을 놓았다. 꽃송이가 너울을 타고 멀어져 갔다. 정한은 별 같은 단색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인사했다. 승관에게, 승관이 있을 바다에게, 그의 내일에게, 두 사람의 과거에게, 저물어 가는 오늘에게. 잘 가라고, 그러니 잘 자라고.
내가 많이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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