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 갈까요,
[ 검색 결과 ] 일본 도쿄도
토요일 오전 5:00 비
기온 10℃
강수확률 100%
습도 72%
풍속 13m/s
가득 덮인 구름이 우울에 침잠되었던 새벽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전선성 강우가 보통비 수준으로 쏟아지다 잦아든 지 20분이 지난 후였고, 때아닌 비소식에 잔뜩 사나워진 바람은 애꿎은 느티나무의 잔가지에 대고 화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꼭 저를 비웃기라도 하는 양 거대하고 암울한 자태였다. 무슨 자격으로 내 심정을 떠봐. 텅 빈 시선이 허공에서 나풀대는 먼지를 따라 이리저리 부유했다. 비행기 못 뜰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표 취소하고 기차로 갈까? 정한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바람을 삼키고 창문을 닫은 승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비행기 떠. 네가 조종사도 아니고 어떻게 확신해. 떠야 해, 기차로는 밤이나 돼야 도착하니까. 꼭 일몰 전에 도착해야 돼? 우리 3박 4일이나 가는데. 정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처럼 여행이잖아. 1분 1초가 아깝지.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승관의 얼굴은 안도하거나 들뜬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예보는 주저했지만 천계의 변화무쌍은 사람과 과학 따위가 감히 예측하기 힘든지라. 승관은 해가 높이 뜨면 분명 먹구름이 물러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풍세는 재빠른 속도로 강풍을 도려내어 시커멓던 하늘에 태양을 띄워 주었다. 본래 오전 10시 도쿄발이었던 나리타 공항의 비행기는 바람이 가라앉는 동안 연착을 거듭하느라 12시가 되어서야 겨우 활주로를 떴다. 국내선 항공의 종착지는 신치토세 공항, 그러니까 홋카이도 이시카리 시의 남쪽이었다. 두 사람은 렌터카를 몰고 북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표가 보였다. 札幌市. 삿포로는 그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오호츠크해의 습기를 머금은 지역에선 늘 그러하듯 눈발이 약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몸뚱아리를 새빨갛게 부풀린 햇덩이가 지평선 아래로 느리게 투신했다. 그 열기에 부근은 물론 지상의 눈더미까지 덩달아 타오르듯 붉어졌다. 일몰을 마주한 승관은 저도 모르게 정한의 손을 붙잡았다. 중대한 임무를 지닌 수행자처럼 숨을 크게 쉬었다. 수도의 번화가와는 다른 습도가 비강 안으로 틈없이 들어찼다. 정한이 예쁘게 웃었다. 좋다, 겨울 냄새. 발 밑으로 뽀득뽀득 때 묻지 않은 눈이 짓이겨졌다.
그리고 며칠 뒤, 아무도 살다 가지 않은 듯 순결하고 온전한 설원 위에 서서 승관은 잠연히 통보했다.
“형.”
“응.”
“우리 헤어지자.”
거슬러 올라가자면 8년 전쯤 된다. 21세의 정한이 경제학과 학부생이던 시절, 교환학생에 파견되느라 한 학기 동안 한국을 떠나야 했을 때 승관은 잡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영영 가는 것도 아니고 딱 4개월이잖아. 방학하자마자 바로 올게. 지구 반대편도 아니야. 일본이라 시차도 안 나고. 매일매일 전화할게. 네가 질려서 그만하라고 할 만큼 자주 할게. 정한은 떠나는 입장에서 긴장하거나 섭섭해할 틈도 없이 가기 직전까지 승관을 달래야 했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승관은 퉁퉁 부은 눈으로 정한을 힘주어 안았다.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코를 박았다. 같이 쓰던 샴푸와 바디로션 향이 났다. 목구멍 안쪽이 다시금 홧홧해졌다.
― 승관아.
― 응.
― 울어?
― 아니.
미약하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버젓이 들리는데도 끝까지 도리질이었다. 입꼬리를 힘주어 누른 정한이 몸을 떼어냈다. 승관아 형 봐.
― 너 내년에 3학년이지.
― 응.
― 공부 열심히 해서 형이 다니는 대학교 가. 그리고 복수해.
― 응⋯⋯?
― 형 기다리게 만들라고.
싫어 내가 왜! 승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난데, 왜 형이 복수를 운운해. 그게 복수야? 나도 힘들잖아 그러면.
―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그게 아니라,
― ⋯⋯.
― 형이랑 하루도 안 떨어지고 오래오래 같이 사는 거야.
정한이 픽 웃었다. 너 그거 그대로 친구들한테 말해 봐, 십중팔구 복수는커녕 청혼이라 할 거다. 검은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어 주자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승관은 정한이 게이트 안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흔들고서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집에 가면 이제 혼자일 테니. 앞으로 무려 네 달 동안 형 없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해내야 하니까. 열여덟에 겪는 막대한 별리이자 부담이었다. 정한은 꼭 장학금을 타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그거 받으려고 일본까지 보내주는 거 아니라며 확고한 거절을 표해 두었다. 9시 비행기니까 1시간 동안은 형이랑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있겠네. 기둥에 기댄 몸이 스르르 웅크러졌다. 분명 1시간만 더 있자고 결심했는데.
승관은 11시 반을 넘겨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뻐근해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아으, 허리를 굽혀 툭툭 허벅지를 두들기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국제전화였다.
― [나 도착했어 승관아.]
―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 [목소리 잠겼네. 집에 가긴 한 거지?]
― 나랑 계속 통화하면 안돼?
― [내일 월요일이잖아.]
― ⋯⋯.
― [학교 가야지, 너.]
승관은 물론이고 정한 또한 내일 학교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달리 반항도 못했다. 하여간. 자기 공부가 더 중요하지. 애인 생각은 죽어도 안 하고. 바깥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 내일 눈 장난 아니게 붓겠네. 온종일 울어댔으니 뻔히 보이는 결과였다. 집을 향해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저를 두고 가버린 정한이 밉고 미워서 원망의 시발점을 되짚다 결국 태초의 단계까지 되돌아가 버렸다. 달큼한 봄 냄새에 잠시 미쳐버린 부승관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새끼 오리마냥 윤정한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며 되도 않는 플러팅을 일삼던 그때. 스무 살 윤정한은 이렇게 말했었다.
― 너 스무 살 되는 날까지 기다려 줄게. 사귀는 건 그때부터 하자.
정한이 허락 않던 건 단 세 가지뿐이었다. 남자친구라는 호칭과 관계를 정의하는 부끄러운 낱말, 그리고 뽀뽀 이상의 스킨십. 그거 말곤 다 했다. 매일같이 서로의 집에 들락거리기를 3개월. 이후 승관은 급기야 정한의 자취방에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 살림을 합쳤다. 열넷부터 홀로 살던 집은 원룸이었고 정한은 투룸에 살았으니 형이 들어오는 것보단 이 편이 낫지 않겠냐는 이유에서였다. 같이 살고 밥 먹고 주말을 보내고 산책을 하고 운동하고 잠들기를 9개월 동안 반복했다. 꼬박 한 해를 서로만 보며 보냈다. 그러자 성큼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정한 또한 학부생 2년차였다. 그 해 여름, 정한이 와세다대학의 교환학생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잘됐다며 축하를 해 주던 승관은 정확히 5초 만에 현실을 자각했다. 지금 내가 이걸 듣고 기뻐해야 되는 거야?
가지 말까? 걱정스런 목소리가 몇 번이고 물었다. 형 안 갈 수 있어, 승관이가 원하면. 말해 뭐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싫다고만 하면 당장 여권을 찢어버릴 수도 있는 작자였다. 차라리 스스로 계획했다면 뭣하러 그런 걸 지원했냐며 화난 척이라도 했을 터인데, 정한의 능력을 높이 산 교수의 추천이라 하니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으리라. 거기 명문이라며. 특히 경제라면 더 알아주는 학과인데. 스펙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나이였다. 자신이 형 앞길을 방해하는 일은 그를 떠나보내는 것보다 더더욱 용납하기 힘들었다. 정한의 감언이 들이닥칠 때마다 격하게 고갯짓을 했다. 잔말 말고 가. 그리고 포기 기간 지날 때까지 나한테 묻지 마. 이 마음 언제 바뀔지 나도 모르니까.
그렇게 윤정한은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훌쩍 떠났다.
넓지도 않은 집은 사람 한 명 빠졌다고 심술이라도 부리는 모양인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스비 걱정에 마음껏 보일러를 틀어제낄 수도 없어서, 승관은 하는 수 없이 거실에 이부자리를 깔고 밤새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이튿날 담임에게 찾아가서 이번 학기만 기숙사에서 지낼 순 없을까요 했지만 티오가 다 찼다는 이유로 보기 좋게 퇴짜맞았다. 붕어눈을 단 채 먹어 본 큰맘이 단김에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무관심이 극점까지 다다라 눈두덩이가 그 지경이 된 걸 보고도 무슨 일 있냐는 걱정 한 마디 없었다.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다.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기에엑. 낡은 의자가 밀리며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승관의 심경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 날카롭고 슬픈 곡조였다. 냅다 팔을 괴고 얼굴을 묻자 옆자리의 차영이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내가 말했잖아, 기숙사 자리 없다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감한 목소리였다. 승관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 고맙다. 그래도 살짝 희망은 품었었는데.
― 통학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는 이송호가 기숙사 떨어진 거 보면 모르냐.
자취가 처음이면 말을 않지, 중학교 1학년부터 혼자 살아온 애가 고작 4개월 형이랑 떨어져 있는다고 온갖 청승을 다 떠네. 그러곤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아직 애인도 아니라며.
이씨⋯⋯.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어서 속만 터졌다. 난 왜 미성년자일까. 윤정한은 왜 나보다 삼 년이나 일찍 태어나서 사람을 이렇게 간절하게 만들까. 스물까지 얼마가 남았더라. 일 년 하고도 사 개월 가량이 남았다. 무려 수능을 보고서도 한 달 반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끔찍이 까마득하여 눈이 질끈 감겼다.
― 수업 듣는 건 어때? 친구들은? 환경은 괜찮아?
― [하나씩 물어봐.]
모니터 속 정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형 난 있지, 아직 2주도 안 됐는데 2년은 넘은 거 같애. 집에 벌레가 나와도 잡을 용기를 내기 어렵고 텅 빈 벽 마주보면서 밥 먹는 것도 힘들어. 그래서 맨날 류차영 불러서 외식하거나 배달음식 시켜 먹고. 형 있을 땐 틀어놓지도 않던 텔레비전을 밤새 보면서 잠이 들어. 난 그러고 사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승관은 혀끝까지 차오르는 문장들을 힘주어 씹어삼켰다.
― ⋯⋯안 힘들어?
― [엄청 힘들지. 우리 승관이 손 잡고 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매일 허전해. 룸메랑도 아직 어색하고.]
― 어떡해. 내가 갈까? 나 당장 검정고시 봐서 그 학교로 갈까?
― [너 합격 통지서 받기도 전에 귀국할 텐데?]
― ⋯⋯.
― [종강까지 3개월 반 남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내가 매일 사진 보내줄게. 아, 방 구경시켜 줄까? 여기 되게 좋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 너머가 쑥 돌아갔다. 정한이 몸을 비켜나자 기숙사 방 안이 훤히 다 보였다. 맞은편 텅 빈 침대는 강의를 들으러 간 룸메이트의 것이란다. 집만큼은 아니지만 방이 크고 넓었다. 내 책상 볼래? 정한이 손을 뻗어 카메라를 후면으로 전환했다. 곧바로 보이는 책장과 책상 위에는 새끼손가락 길이만한 두께의 전공책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히익. 승관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게 다 뭐야.
― [이거는 선형대수학 기초. 이건 함수만 모아서 정리해둔 거. 라그랑주 승수법, 쿤 터커 조건 같은 거 배우는데 보기완 달리 그렇게 어렵진 않아. 이건 최적제어이론 프린트랑 과제물이고, 미분방정식은⋯⋯.]
무슨 말이야 대체. 일본어와 영어가 뒤섞여 적힌 책 제목을 정한이 풀어 설명해줬지만 회득하기 불가능한 건 매한가지였다. 흘러나오는 음성이 페이드 처리를 한 음악처럼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이름부터가 수학이랑 함수인데 저기가 어떻게 인문계열이람. 그가 자연계 교과과정을 수료하고 교차지원을 통해 경제학과에 간 사실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애초에 시스템 자체가 반대로 굴러가는 거 아닌가. 신나게 설명하던 정한은 뒤늦게 카메라를 확인하고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 와중에 저게 또 감내하기 힘들 만큼 예뻐서 만지고 싶어졌다. 보고 있는데 보고 싶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피부로 체감하는 날이 오게 될 줄, 꿈에서나 감히 상상했을까.
― 형.
― [응.]
― ⋯⋯열심히 공부하고 와. 난 진짜 괜찮으니까,
― [우리 승관이 다 컸네. 의젓할 줄도 알고.]
부러 강한 척을 해 보였지만 돌아오는 건 또 어린애 취급뿐이었다. 뷰루퉁 튀어나온 승관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던 정한이 쪽 소리를 내며 뽀뽀하는 시늉을 취했다. 화를 내려던 말문이 단숨에 막혀 버렸다. 세상의 채도가 잠시 뒤틀렸다. 따라붙는 수식어처럼 명도도 휘어서 순간 시야에 윤정한밖에 안 보였다. 승관은 지금 제 표정이 어떤지 몰랐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정한의 눈빛으로 미루어 추측할 뿐이었다. 나 또, 견딜 수 없게 설레고 있구나.
― 약속해. 보고 싶어도 참고⋯⋯ 목소리 듣고 싶은데 통화 안 돼도 실망하지 않기로.
― [너 자신한테 말하는 거야?]
― ⋯⋯어.
장난이었는데. 정한이 트허허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닿을 수도 없어서 모니터에 제각각 붙였다. 허공에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그래 약속해. 서로를 아프게 그리워하지 않기로. 재회가 기약된 이별은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
정한은 약속대로 매일 연락을 취해 왔다. 요금이 폭탄처럼 쏟아지는 국제전화 대신 인터넷 통화를 자주 했는데, 그마저도 상황이 변변찮게 되면 메신저를 이용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걱정했지만 다행히 착한 친구들과 사귀며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사진을 받는 족족 저장을 했더니 어느새 백여 장이 족히 찼다. 받은 사진 중 가장 예쁜 것으로 배경화면을 설정하고 책을 펼쳤다. 슬슬 수능 준비를 해야 할 시기였다. 고3까지 다섯 달 남짓 남았다. 이 말인 즉슨 3개월 후면 정한이 귀국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선행학습 좀 해 놓을까. 내년부터 특별 과외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했던 그를 놀라게 해 주고 싶어졌다.
잠시 쉬었던 아르바이트를 새로 구했다. 머리 좋은 정한이 아무리 장학금 받으며 학교를 다닌다지만 고등학생인 승관이 소비하는 돈 또한 적은 양은 아니었으니. 얼마 전 새 학기를 맞아 칼같이 빠져나간 등록금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 영향이 컸다. 승관은 통장정리 후 잔액을 확인하다 저도 모르게 한숨과 상욕을 동시에 짓씹었다. 아 이거 안 되겠는데. 건강 해쳐 가면서 밤 늦게까지 일하는 건 절대 안 된다는 정한의 뜻을 받들어 학교 근처 학원에 일자리를 얻었다. 심부름 등을 맡는 잡일 담당이었고 시간도 18시부터 23시까지 주 5회만 하면 되는 좋은 조건이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일하는 사업장이라 대접이 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최저 시급에 1,000원을 더 얹어 주었다. 심지어 일이 없을 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해도 된다는 엄청난 배려까지 더해졌다. 이 정도면 돈 받으며 학원 다니는 게 아닌가 싶었다.
― 학생들이 적어서 할 일도 별로 없어. 원장실 한 켠에 책상이 있어서 거기서 틈틈이 공부하는데, 모르는 거 있음 원장님께 여쭤보면 돼서 좋아. 아주 잘 알려주셔. 선생님들도 다 친절하시고.
― [⋯⋯으응.]
― 나 진짜 괜찮아. 지금은 좀 불가피하잖아, 수입이 없으니까. 이번 학기 나 등록금도 냈고, 월세랑 관리비랑 전기세랑 통신비랑 또⋯⋯ 아무튼 필요한 거 다 빠지고 나면 통장에 돈이 확확 줄어서.
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 [⋯⋯승관아. 내가 잘할게.]
― 무슨 말이야. 충분히 잘하고 있어.
― [우리, 부자까진 아니어도⋯⋯ 돈 걱정하면서 살진 말자. 난 너한테 그렇게 해 주고 싶어.]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돌연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 난 형만 행복하면 돼. 알지?
반복되는 일상은 가볍고 무료하게, 때로는 무겁고 무력하게 지나갔다. 하루하루 눈을 감았다 뜨면 날짜가 넘어가 있었다. 음양오행을 따르는 일주일의 하루들을 살아가고, 주말이면 각자가 있는 나라에서 가장 익숙한 도서관 혹은 독서실을 찾아 활자를 들여다봤다. 까마득하기만 하던 넉 달은 시험 두 번을 치르고 나니 어느덧 막바지였다. 성적표를 받아든 승관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어졌다. 취약 과목이던 수학이 30점이나 올랐고, 지난 학기와 비교해 정확히 1.4등급이 상승했다. 차영이 5등급짜리 성적표를 승관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너 이거 기만이야. 나는 성적 떨어졌는데도 이따가 피씨방 갈 궁리나 하고 있는데 1.3짜리 들고 장난해? 차영의 말을 들었는지 흘렸는지 반응도 않던 승관은 멍하게 입을 열었다.
― 이거 형한테 얘기하면 뭐라고 할까.
― 뭘 뭐라고 해 인마. 잘했다고 하겠지.
― 형 없어서 공부 더 열심히 했는데⋯⋯ 그랬다고 자기 때문에 성적 떨어질 거 걱정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 씨발, 상팔자 나셨다 진짜.
차영이 환멸난 표정으로 기어이 욕을 뱉었다.
최근 몇 주간 상습적으로 끼니를 걸렀다. 공부에 집중하겠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며칠 전부터 속이 좀 메스꺼웠다. 정한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배 곯는 소리도 입 안에다 음식물을 집어넣는 데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너 그거 안 먹어서 그런 거야. 그러다 속 다 버린다. 차영이 성심껏 걱정해 주었지만 급식도 맛이 없었다. 곧 겨울방학이었다. 정한이 돌아올 거고, 그와 함께 지내며 공부도 잠시 쉬면 되었다. 이래서 사람이 외롭게 지내면 안 되는 거라고. 모두 알게 모르게 받아온 스트레스 탓이라고 생각했다. 책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돌연 휘청였다. 어어 왜 이래 얘가. 차영이 화들짝 놀라 승관을 부축했다. 당황한 건 승관도 마찬가지였다. 어수선한 교실 안 형형색색의 패딩 색깔이 뒤섞이는 물감처럼 목전에서 이지러졌다. 눈을 깜빡여 초점을 되찾는 데까진 몇 초 걸리지 않았다.
― 괜찮아. 잠시 어지러워서.
― 한국인은 밥심인데 정체성 부정하다 건강 다 나가게 생겼네. 너 링거라도 맞아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2년 동안 봐온 부승관 중에 제일 마르고 무기력해 지금.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승관은 교실 밖을 나서며 눈을 똑바로 떴다. 정신 차려야지. 다음 주면 형이 오니까.
― 배고파서 그래. 집에 가서 뭐라도 먹을게. 오늘은 학원도 쉬는 날이라.
― 같이 먹어 줘?
― 됐어. 너 빨리 가. 피씨방 간다며.
차영은 염려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몇 번이고 손을 흔들다 멀어져 갔다. 이럴 땐 도보권으로 통학하는 형편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버스라도 탔다간 꼴사나운 일을 치를 것 같았다. 단층 주택가에 들어선 승관은 본격적으로 속이 뉘엿거리는 걸 느꼈다. 학교 근방을 벗어나자 아스팔트 위로 조금 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는데 이것이 기분 탓인지 실제로 해가 넘어갈 무렵이어서 그런 건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호흡이 자꾸만 역류하여 헛구역질이 났고 시야가 길지 않은 간격으로 점멸됐다. 길바닥에서 쓰러지면 무슨 민폐야. 이를 악물고 걸었다. 이십 미터 앞에 집이 보였다. 뺨과 귀 사이를 타고 흐르는 걸 닦아내자 온통 땀이었다. 몸과 닿은 패딩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듯 주저앉았다. 머리 뒤로 도어락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동하려는 초점을 억지로 맞추며 신발을 벗기 위해 노력했다.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불현듯 덜컥 겁이 났다. 눈물이 고일 틈도 없이 뚝 떨어졌다. 무서워. 나 왜 이래. 주머니의 핸드폰조차 꺼낼 수 없었다. 사지의 말초에서 중심으로 차츰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뚜렷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두워진 시야가 무너지듯 회전했다. 승관은 끝내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벽지가 구겨진 천장이 보였고 신발도 채 거두지 못한 다리는 여전히 현관 앞 타일 바닥에 걸쳐진 상태였다. 주머니 안쪽에서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허겁지겁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아들었다.
― ⋯⋯어, 형.
― [무슨 일 있어? 전화를 왜 안 받아.]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정한으로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만 네 통이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한낱 악몽이라도 꾸었단 듯 몸 상태는 잘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멀쩡했다. 승관은 신발을 벗으며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 아무것도 아니야. 집에 오자마자 잠들어서. 핸드폰이 무음이라 못 들었나 봐. 미안.
― [별 일 없는 거 맞지?]
정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응.
― [일 주일만 기다려. 나 종강했어. 수속만 밟고 나면 바로 출국할 거야.]
몸이 멀어진다고 마음까지 멀어지랴. 물론 고작 4개월에 멀어질 마음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겠지만. 승관은 울던 것도 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 그깟 일 주일쯤이야.
어, 배고픔이 극에 달하니까 사람이 쓰러지더라. 빵을 뜯으며 덤덤하게 말하자 차영은 경악스러운 듯 입을 떡 벌렸다. 그 상태가 됐는데 119 안 부른 네가 미친 놈이지. 승관은 그러면서도 틈틈이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잠금화면을 채운 정한의 사진을 본 차영이 헛웃음 섞인 날숨을 쉬었다. 좋겠네. 드디어 만나서.
― 너는 인생이 그 형 위주로 돌아가지? 형 걱정할까 봐 병원도 안 갔다에 오른쪽 손모가지 걸어도 될 거 같은데.
― 그러고 나서 괜찮았으니 된 거지 뭐. 그날 이후로는 음식도 잘 들어갔고 체하지도 않았어. 위장 문제는 아니었나 봐.
― ⋯⋯그렇겠지. 너 작년에 다이어트 한다고 굶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뭐 다른 데 이상 있는 건 아니냐?
― 뭐래, 멀쩡한 거 보고도 몰라. 나 이제 간다. 놀아줘서 고맙다.
조소를 지어 보인 승관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라. 차영은 서운치도 않은 듯 쿨하게 손을 흔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염불을 외던 그 위대하신 ‘정한이 형’이 귀국하는 날인데 당연히 시간 맞춰 가야지 암. 현자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를 뒤로하고 승관은 기쁘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운 좋게 빈 택시를 잡아탔다. 공항까지는 차로 10분 남짓이 걸렸다.
오후 5시에 떠오른 도쿄발 비행기는 7시 47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SRT 타고 부산 가는 거랑 비슷한 시간이네. 그나마 부산이면 내가 멋대로 갈 수라도 있지. 난 여권도 없고. 존재하는 구실이라곤 정한이 형뿐이었으니. 승관은 줄지어진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했다. 연착만 되지 않는다면 20분 후에 정한을 만날 수 있었다. 첫 직장 면접을 본다 해도 이만큼 떨리고 긴장되진 않을 것 같았다. 형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마지막 통화가 불과 3시간 전이었지만 유선상이랑 대면은 다르니까. 온갖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단어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중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게이트 앞은 어느새 북적이고 있었다. 승관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게이트가 열리고 몸만한 캐리어를 낀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은 이맘때쯤 글리터 효과를 등에 업고 멋지게 등장하던데. 우리 정한이 형 얼굴도 그들만큼, 아니 훨씬 더 잘났는데. 제 심박수가 게이트 사이의 거리와 반비례하는 것을 감지하며 손톱을 뜯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의 뒤통수 사이로 무대 같은 공간이 온전히 보이던 순간. 걸음을 멈춘 승관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걸어나온 빛이, 승관을 보며 활짝 웃었다.
― 승관아!
다리가 떨려와서 쉽사리 걸어가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정한이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분명 서광 덩어리였는데. 신기하게도 윤정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한은 캐리어를 놓고 팔을 벌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다가와 느리게 승관의 몸을 안아넣었다. 갓 떠오른 햇살의 온기처럼 너그럽고 따뜻한 포옹이었다. 승관이 팔을 들어 정한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아, 형이구나. 윤정한이 왔구나. 드디어 나한테 돌아와 줬구나. 타국의 향내가 배인 몸에서 어렴풋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 ⋯⋯보고 싶었어.
나름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점을 넘어선 줄로만 알았는데, 4개월이란 시간은 사점의 축에도 속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적함과 막막함에 몸이 익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윤정한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시간을 뒤늦게 몰아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물둘과 열아홉은 스물하나와 열여덟처럼 살아갔다. 정한은 새해를 함께 보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전야의 11시 58분에 전화가 와서 그랬었다. 물론 아쉽긴 했어도 이런 사소한 것까지 서운해하기에 승관은 자신들의 나이가 어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정한은 못내 애석했는지 돌아오자마자 뒤늦은 새해 인사를 건넸다. 일본에서 사온 갖가지 선물과 식료품들을 진열하듯 꺼내놓으면서. 이거 다 네 거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아침이 아침답게 느껴지고 호흡을 자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빠르게 일과가 돌아갔다. 대화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밤이 금세 노을을 삼켰고 야심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아도 잡을 수 있는 손이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정한이 옆으로 누워 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어진 눈빛이 모스 부호를 신호하듯 깜빡였다. 그걸 해독하려 빤히 보다가 쥔 손에 힘을 주며 무언으로 의미를 묻자 흘긋 시간을 확인한 정한이 말했다.
― 사랑해.
― 나도.
― 생일 축하해.
화들짝 놀라 시계를 보았다. 여즉 제 생일을 잊어 본 적이 없었건만 요즈음 들어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행복했던 까닭이다. 열아홉이 된 지 16일째. 정확히 12시 정각, 3초를 지나고 있었다. 승관이 푸스스 웃었다. 감미로움 따위 내다 버린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지만 설렘으로 막혀 버린 목구멍은 그 흔한 아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렇게 벅찬데 손을 잡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고 손은 연신 움찔거렸다. 정한은 기다리는 말이 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 갖고 싶은 거 있어?
잠시 고민하던 승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
― 으응.
― 뽀뽀⋯⋯,
응? 정한은 굳이 되물었다. 들었으면서. 방 안이 이렇게나 조용한데 아무리 웅얼거리며 흘린 혼잣말이라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감당 못할 부끄러움에 결국 얼굴이 빨개졌다. 손을 놓고 이불을 덮어썼다. 하지만 그래 보았자 같은 이불 아래라 숨바꼭질도 소용이 없었다. 승관아. 승관아. 뭐라고 했어 방금? 나쁜 윤정한.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자기도⋯⋯ 나 싫어하는 거 아니면서. 우리 사이에 입맞춤이 뭐 그리 대수라고. 정한이 이불 안으로 들어와 소근거렸다.
― 승관아.
― ⋯⋯.
― 뽀뽀해 줘?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승관의 입술 위로 온기 하나를 가볍게 얹어오는 것이다. 승관은 온몸이 굳는 걸 느꼈다. 장기와 사고가 일시적으로 멎었다. 이건, 그러니까.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하강하는 유성처럼 찰나였지만 떨어져 나간 후에도 한참이나 따뜻했다. 드나드는 숨의 온도가 마치 폭발 직전의 시한폭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고개를 돌려 정한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다사로운 손이 다가와 승관의 뺨을 어루만졌다.
― 1월이니까 1초만.
아니지. 16일이니까 16초 해 줘야지. 이 말도 목구멍 즈음에서 어쩔 수 없이 불타 사라졌다.
― 다음 해 첫날에는, 11초 해 줄게.
자려고 누웠던 건데 정신이 씻은 듯 선명해졌다. 1월 1일. 그래서 11초. 낭만이 극한까지 다다라 숫자로 변모한다. 날개가 없어서 입술에 닿는다. 수학에서 문학이 된다. 보통의 밤이 감정이 된다. 수줍음을 타는 아이처럼 몸이 움츠러들고 마는 단어가 뇌를 지배한다. 비로소 사랑이었다.
― 약속해. 어떤 리액션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끝내야 돼.
― 알았다니까.
― ⋯⋯나 이번 학기 전교 1등 했어.
진짜? 정한의 눈과 입이 크게 뜨였다. 가뜩이나 작은 크기도 아니건만. 승관은 곱게 접은 성적통지표를 내밀며 멍하니 허상을 지었다. 웃기다. 내가 성적으로 윤정한을 놀라게 하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줄줄 낌새가 길어지자 표정 위로 깔린 기대 속에 서서히 의심이 싹트던 걸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던 와중이었다. 1학년 것까지 합산하면 1.9등급 정도 돼. 정말? 그래도 전교권에 반 1등이고 담임한테 칭찬도 받았어. 대단하네. 우리 담임 완전 기둥인 거 알지. 응. 그 꼰대가 날 보는 눈빛이 달라졌더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정한은 신기한 듯 성적표를 읽으면서도 착실히 승관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아이처럼 들떠서 고개를 갸웃대던 승관은 이윽고 헤실헤실 웃으며 정한의 다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얼굴은 여지없이 경이로웠다. 앞으로 1년만 더 노력하면 같은 대학에 갈 수 있다. 그러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구도까지 맞춰가며 정밀히 그려내는 큰 그림을 정한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정한이 형.
― 응.
― 형 나 좋아해?
― 그럼.
― 좋아하기만 해?
잠시 머뭇대던 정한이 성적표를 내려놓고 승관을 보았다. 짙은 흑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방황했다. 방긋 웃는 낯 위로 나직이 깔린 목소리가 살포시 얹혀왔다.
― 승관아.
― 응.
― 나 요즘 매일 생각해, 시간을 다루는 초능력이 생기면 좋겠다고.
― ⋯⋯.
― ⋯⋯자꾸 인내심만 늘거든. 네가 열아홉이라.
― ⋯⋯.
잠깐만.
이게 무슨 말이야. 승관은 눈을 굴리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즉 지녀왔던 제 인내심은 정한을 포함한 그 누구의 것보다 곱절로 가혹하게 다져져 왔음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 신심이 뒤틀릴 수도 있겠다고 넘겨짚어 버린다. 쌍방이다. 서로의 참을성에 차례로 불이 붙었다. 자연스레 정한을 등진 채 굳어버린 승관이 입을 열었다.
― ⋯⋯일부터 백까지.
― 백.
둘만의 수치화 판단에 정한은 즉시 답을 내렸다. 심중을 차지하고 있는 윤정한 애정도 그래프가 상향 곡선을 그리다 못해 격자를 뚫고 치솟았다. 아무리 연애답지 않다 해도 연애고 사랑인데 이걸 확인하는 과정은 어째 매번 겪어도 낯설고 버겁게 설레었다. 표정을 숨기는 데에 재능이 없는 승관이 두 뺨을 가리고 뒤돌아 앉았다.
― 장난치는 거 아니었음 좋겠다.
― 내가 그 정도로 똑똑하진 않은데.
어딜 갔다 오든 늘 기다려 줄 사람처럼 다정하기 짝이 없는 눈빛 아래, 그 시절의 봄날처럼 싱그러운 미소가 뒤따랐다. 손쓸 틈도 없이 안긴 승관의 귓가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언어가 새겨지듯 들려왔다.
― 진짜 사랑해 승관아. 셀 수 없을 만큼.
불우하게도 그해 승관의 이름 앞엔 수험생이라는 잔인한 호칭이 추가로 붙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의 소유자인 이상 떼어낼 수 없는 숙명이자 대부분의 어른들이 겪고 밟아왔던 절차였으므로 고통스럽지만 견뎌야 했다. 생각해 보니 최종학력 중졸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정한 또한 여즉 고졸이었다. 사랑 확인 끝냈고. 어차피 같이 살고. 아르바이트도 그만뒀고. 이제 뭐 달리 걸릴 것도 없으니 정한은 아예 승관의 스케줄에 맞춰 수강신청을 해냈다. 무려 두 학기 연속으로. 신청 버튼을 누르는 클릭 속도가 거의 기계나 다름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승관이 무심결에 감탄을 뱉을 정도였다. 덕분에 승관은 생활 패턴을 정상적으로 지켜가며 바지런히 학업에 임했고, 딱 코피 쏟기 직전까지 철저히 공부했다.
당해 11월 셋째 주 목요일, 목도리와 패딩에 둘둘 싸인 채 정한의 응원을 받으며 고사장으로 들어간 승관은 약 10시간 후 부정도 긍정도 아닌 상기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어땠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돌아왔다. 본인이 못 하겠다기에 정한이 대신 가채점을 했다. 그때까지 승관은 눈을 가리고 침대에 엎어져 숫자를 세었다.
⋯⋯사백팔십삼. 사백팔십사. 사백팔십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사백팔십,
― 승관아. 너 마킹 실수 없이 한 거 맞지.
― ⋯⋯검토 세 번 했어.
육.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한이 말없이 채점을 끝낸 시험지를 보여 주었다. 승관은 제 눈을 의심하며 붉은 펜으로 쓰인 숫자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방금까지 속으로 백 단위의 수를 세었지만 스스로가 맞게 읽는 건지조차 헷갈렸다. 정한은 표정을 숨기려 입술을 말아물고 승관의 표정을 살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끝내 승관이 토하듯 발음한 건 단 한 글자의 감탄사 뿐이었다.
― 헐.
입을 틀어막자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륵 흘렀다.
그날의 발언은 가을밤의 고백처럼 아무런 알음장조차 없이 불쑥 내밀어졌다. 5년 전, 그러니까 승관이 정한과 같은 대학의 통계학과에 정시 수석으로 입학한 뒤 1년 하고도 7개월이 흐른 스물하나. 이맘때즈음 형이 교환학생을 갔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어른으로 훌쩍 자란 무렵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일자리 모색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시기의 정한은, 웬일로 점심시간을 빼서 학생식당으로 승관을 불러냈다. 통상적인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으므로 식당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저 역시 과제에 치여 끼니를 거를 뻔 했던 승관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식판을 들었다. 뭔가 용건이 있는 건 분명했지만 예측할 순 없었더랬다. 제법 빤해진 눈치로도 섣불리 잡아내기 힘든 무언가가 대체 뭘까. 승관은 대놓고 께름한 얼굴로 정한을 훑었다. 그러다 종내에는 제가 답답해져서 추궁하듯 물었다.
― 왜 그러는데 왜. 할 말 있음 빨리 해, 답답해 죽겠으니까.
― 승관아.
― 어.
― 나 잠시 일본 좀 다녀와도 돼?
뜸을 들인 이유가 있었다. 활화산보다 더했음 더했지 절대 못하진 않는 폭탄발언이었다. 가을이지. 그래. 입동을 2주 앞둔 가을이지. 그래도 아직 귀뚜라미는 우는데. 고백의 결이 다소 모험적이고 도전적이다. 설마 요즘은 이별 통보를 이런 식으로 해? 나 혼자 못 알아듣는 건가. 연인의 충격적 선언을 이해하는 데 버퍼링이 걸린 승관은 급기야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자연에 귀의하고 싶어졌다.
― 혹시 헤어지잔 말 돌려 하는 거면 직관적으로 해. 나 이해력 딸리니까.
― 아니, 아니야 승관아. 그런 거 절대 아니고.
정한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 뭐, 아침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서도 그새를 못 참아 부벼댄 입술이 여즉 얼얼한데. 그렇다면 또 무슨 짓을 한 걸까. 어떤 일에 휘말린 걸까. 정말 윤정한이랑 평생 살면 당장 반나절 후 머리 위로 운석이 떨어진다 해도 놀랍지 않겠구나. 그만큼 사람이란 게 결국, 해탈을 하게 되는구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영해 너머로 날아가는 연인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열여덟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이 인간이 또 생이별을 하자고 한다. 승관이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어 말해. 어금니가 꽉 깨물렸다. 나 조금만 힘 주면 이거 휠 수 있을 거 같아. 여차하면 형 대신 얘라도 휘어 버릴래.
― 히나타 알지. 나 교환학생 갔을 때 룸메였던 애.
― 응.
― 걔가 일본에서 알아주는 큰 금융회사 대표 아들이라는 것도 알지.
― ⋯⋯어.
아. 점차 직감이 발현했다.
― 걔가 예전부터 나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었거든. 그러다 오전에 연락이 온 거야. 요즘 취업 준비 중이라 했더니 마침 재무팀 인턴계약직 쪽에 공석이 하나 있는데, 나보고 면접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기어이 쓴웃음이 터졌다. 잘났다. 정말 한없이도 잘났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애인만 힘들구나. 처지를 뼈저리게 통감하는 게 어째서 학생식당 창가 방면 두 번째 테이블인지는 모르겠지만. 날짜를 물으니 확실히 정해지진 않았지만 다음 주 경이란다. 물론 승관은 이번 달 내내 산더미 같은 과제에 파묻혀 살 예정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 그래서. 내 허락이 필요해? 내가 가지 말라면 안 갈 거야?
― 안 갈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어.
― 미루는 건 안 되지. 그럼 기회 놓치는 거야. 그쪽 상황도 급하단 건데.
― ⋯⋯.
― 나 알잖아. 형 앞길 막는 일은 죽어도 못 참는 거. 고려해 볼 정도로 끌리는 회사라면 난 보내줄 수밖에 없어.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영영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붙잡을 이유가 없는데? 그리고 난⋯⋯ 애초에 형한테 무언가를 허락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 왜 내 결정을 따르려고 해.
부쩍 영글어 골격이 잡힌 얼굴은 전보다 얄쌍해져 있었다. 정한의 시선이 더디게 승관의 뺨을 매만졌다. 단정히 자리잡은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움직이며 만들어 내는 언어는 상실과 비슷했다. 목소리에 굴곡이 일었다. 그러니까 조심히 가. 그러곤 싱긋 웃어 보였다.
― 나 돈 걱정 안 하게 해 준다며.
― ⋯⋯미안해. 또 두고,
승관이 다급히 응수했다.
― 그딴 말 할 거면 가지 마. 거기가 무슨 전쟁터라도 돼? 잘 되러 가는 건데 왜 그런 얼굴로 날 봐.
― ⋯⋯.
― 일하게 되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거기 시험 보러 갈 거니까. 오늘 이별 통보 안 한 거 후회할 정도로 따라다닐 거야 내가.
정한이 결국 픽 웃었다. 승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빨리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헤어짐에 익숙해진 척, 실은 전혀 괜찮지 않은 낯빛을 하고서.
그럴 줄 알았다. 언변 능력으로는 빠지지 않는 윤정한이 또 일을 냈다. 회사 이름을 말해 주자 차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래졌다. 일본에선 메이저급 금융 회사야. 진짜 거길 붙었다고? 그러시단다. 한숨을 푹 내쉰 승관이 이불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 넌 절대 잘난 사람이랑 사랑하지 마라.
그러는 너도 만만치는 않은데. 고개를 끄덕이려던 차영이 멈칫했다. 생이별도 두 번째 하니까 순응할 만한 것도 같, 기는 개뿔. 여전히 엄청나게 보고 싶었다. 어딜 가든 적응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사랑 앞에선 죄다 무용지물이었다. 심리와 물리적 거리는 비례하는 법이라던 옛말은 뭐 하나 맞는 게 없었다. 좀 덜 보고 싶으면 안 되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어째 그리움만 격납되듯 더해지는 게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차영아. 나 요즘 머리가 아프다. 자주 어지럽고 속도 울렁거려. 초점을 제거한 승관이 뇌리를 더듬으며 중얼거리자 차영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거 상사병 아니냐?
― 그럼 이것도 윤정한 때문이네.
― 그런 셈이지.
그렇구나. 나한테 별 걸 다 남겨두고 갔네 이 형. 실실 웃어대자 차영의 눈빛이 점차 걱정스럽게 변해갔다. 술도 안 마셔놓고 왜 이러는 거야.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든 승관이 또렷이 말했다.
― 야. 나 대학 조기졸업하고 취직할 건데 어떻게 생각하냐.
― 넌 왜 항상 남들과 다른 길을 걸으려고 해. 빨리 돈 벌고 싶어?
―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힘들어서.
눈치 빠른 차영은 순간 무언가를 즉감한 듯 입을 떡 벌렸다.
―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길 바란다. 맞으면 너 진짜 미친 놈이야.
알면 됐네 신경 꺼. 승관이 꾸물꾸물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썼다. 아니 무슨 일본이 옆동네 이름이냐 겁도 많은 애가 뭐 그렇게 과감해! 비명처럼 날아드는 잔소리를 이불로 대신 퉁겨낸 승관은 대꾸도 않았다. 으휴 속 터지는 건 나지, 차영이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가기 싫으면 여기서 자고 가든가.
― 됐거든? 지금 일어나려고 했거든?
― 붙잡을 생각은 없는데 너 거기 있음 정신병 걸릴 거 같다며.
내가 아무리 너한테 관심이 없어도 친구가 고시원에서 찌들어 살며 정신병 걸리는 꼴은 못 보지. 이어 다시 철퍽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짜증나. 그 말에 설득당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 자괴감 어린 목소리가 웅얼댔다. 승관이 이불 위로 빼꼼 눈을 내밀었다. 차영은 쪼그려 앉아 세운 무릎 위로 팔을 걸친 채 좌절하고 있었다. 껄렁한 자세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 너 바리스타 자격증 있잖아. 카페 하면 잘 할 거 같은데.
― 진짜 공시 관두고 카페 차릴까? 대출 바짝 당겨 봐?
자조한 차영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누런 옛날 장판이 깔린 바닥은 보일러를 따로 틀지 않아도 알맞게 미지근했다. 이런데도 윤정한 하나 없다고 이불 없인 못 사는 몸이 됐네. 승관은 누운 그대로 팔만 뻗어 얇은 이불을 끌어왔다. 이거 덮고 자라. 침대 아래를 향해 던지듯 이불을 미끄러뜨렸다. 푸헥! 얼굴로 이불을 받아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기억에서 특정 기간만큼을 도려내 주겠노라 하면 승관은 주저 없이 스물하나의 겨울부터 스물셋까지의 2년을 꼽을 것이었다. 어린 시절 빛 바랜 사진만큼의 채도도 지니지 못했던 그 시기엔 사랑보다 믿음이, 그리움보다 기다림이, 설렘보다 조급함이 앞서 있었다. 서로를 향해 오가는 비행기 표 값으로 중고차 한 대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였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나날들 속에서 미처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새벽을 맞이한 적도 더러 되었다.
그냥 다 때려칠까. 지칠 대로 지쳤던 승관은 도쿄 중심부의 금융회사 로비에 앉아 연인을 기다리다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덧 스물셋의 12월이었다. 많은 것이 함축된 ‘다’에는 당연히 정한도, 승관 자신도 내포되어 있었다. 정한이 아니면 지금껏 아등바등 해온 노력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그러면 삶의 의미도 기화되어 버릴 걸 알고 있었으므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형이랑 헤어지고 나도 죽을까’ 정도가 됐다.
그 문장을 가슴 속으로 천천히 읊던 순간 안쪽의 금빛 엘리베이터에서 정한이 걸어나왔다. 그는 여전한 미소와 변하지 않은 속도로 달려와 승관을 껴안았다. 찰나에 인 관성과 부력에 몸이 뒤로 휘청였다. 옷깃에 사무실의 종이와 기계 냄새가 그윽이 스며 있었다. 같이 쓰던 화장품 향은 이제 남아 있지도 않았다. 공허한 눈동자에 빛마저 잃어버린 승관은 정한을 마주 안지도 못했다. 정한은 보이지 않는 각도로 고개를 숙여 승관의 목덜미에 약하게 입을 맞추었다. 승관아. 응. 애인의 대답으로부터 예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정한은 다시 승관을 불렀다. 애기야. 응. 정한의 음성은 전에 없이 차분했다. 할 말이 있었다는 듯. 마치 승관이 저를 만나기 직전에 되짚던 셈의 활자를 마주쳐 보기라도 한 것처럼.
― 나, 여기 그만두고 너랑 한국 갈까.
그렇게 우리⋯⋯ 예전처럼 다시 살까.
사랑이 무어냐. 그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내 인생 하나쯤 버린 양 살아가는 것? 오직 재회만을 위해 지구 반 바퀴를 거뜬히 돌아오는 것? 모두 틀렸다. 하지만 이를 모두 망라하는 단어일 테다. 승관은 뼈저리게 체감했다. 사랑이란 의지였다. 말 그대로 죽고 싶어질 때 버텨낼 수 있는 지의. 기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그렇게 살아가게 만드는. 어쩔 수 없이 애틋하게 만드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도쿄로 거처를 옮겼을 때 승관은 겨우 스물넷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제1금융권에 운 좋게 일자리를 얻었다. 정한의 직장인 본사 계열이었으므로 오다가다 가끔 마주칠 기회도 있었다. 직원용 기숙사에 들어간 뒤 일에만 집중하며 착실히 돈을 모았다. 저 또한 기숙사에서 사는 탓에 승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형편이 못 되어 안타까워하던 정한은 급기야 함께 쓸 통장을 하나 만들어 왔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한 모든 급여를 저축해 두는 용도였다. 그 사이에 정한은 인턴 딱지를 뗐으며, 경력이 쌓여감에 따라 저금되는 금액은 점점 늘어갔다. 비로소 잔액이 여덟 자리에 도달하자 두 사람은 곧장 기숙사에서 짐을 빼고 셋집을 구했다. 둘이 살기 적절히 넓은 면적에 방 3개가 딸린 구식 맨션이었다. 도쿄에서 이 정도 크기면 평타 이상은 친 거야. 정한이 아이처럼 기뻐했다. 승관도 감열하여 따라 웃었다. 후련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기분이었고 당장은 정말 그랬다. 작아진 실타래가 잘도 엉키지 않게 실을 풀어내는 것이, 남은 실의 양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임을 자각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 형. 내 서류 파일 모아 놨던 거 어디 있는지 알아?
승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방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자다 깬 정한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궁금증 어렸던 시선이 오히려 의아의 빛을 띠었다.
― 어제 방 정리 형이 했잖아.
― 어제는 승관이 네가 청소했지. 너 따로 어디에 넣어 두고 잊어버린 거 아니야?
― ⋯⋯내가 했다고?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예기치 못한 때에 중요한 물건이 사라졌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정한은 괜찮았는데 승관만 그랬다. 서류 파일은 다음 날 아침 정한의 책상 옆 서랍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각 부엌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그에겐 제 가방에 있었다고 둘러댔다. 승관은 전담해서 방 정리를 맡는 날에도 책상을 비롯한 개인적인 영역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실도 아닌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건망증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넓은 집은 투룸이나 기숙사와 비교해 관리되어야 할 부분이 엄청나게 많았다. 청소하는 범위가 커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쌓이는 먼지를 제때 치워 주어야 했다.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의 개수가 많아졌으며 새로운 공간들을 이르는 호칭이 생겨났다. 비로소 거실과 방이 구분되었고 물건을 둘 장소의 면적만큼 기억해야 할 위치도 늘어났다. 주거 공간이 넓다는 것은 상당히 높은 주의력과 책임감을 요했다. 한평생 스스로를 책임지고 살아온 둘이었지만 얼결에 떠안은 새로운 의무는 환기와 동시에 혼란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피곤한 만큼 상대도 지쳤다는 걸. 달라진 생활 속도에 대한 적응과는 별개로, 평범한 ‘어른’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의 고단함을 서로 깊이 참아내는 중이란 걸 말이다. 하지만 감정이란 건 인지만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리고 망각의 심각성에 의심을 품은 승관이 검진 차 들른 종합병원에서 뜻밖의 선고를 받았던 날도 이 즈음이었다.
정한은 요사이 승관이 예민해졌다고 생각했다. 전이었다면 사랑의 표현 중 일부로 받아들였을 가벼운 장난에 오해부터 앞서 짜증을 부리기도 했고, 소리 내어 웃는 날이 드물어졌으며 늘상 피곤해 보였다. 회사 일이 많이 힘든가 하고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 차 승관이 근무하는 부서에 잠깐 들렀을 때 사소한 실수로 상사에게 혼이 나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말았기 때문일까. 정한은 그날 저녁 넌지시 물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때? 승관은 그게 절 떠보는 질문인 줄도 모르고 잔잔하게 대답했다.
― 괜찮아. 다들 보통 사람들이야.
― 누군가가 밉진 않고?
승관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 ⋯⋯나는⋯⋯ 내가 싫어.
정한은 한참 전부터 텔레비전 화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승관은 흥미가 없는지 연거푸 하품을 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들고 소파 위에 올라앉았다. 정한이 슬금슬금 다가와 승관의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승관아 저거 봐봐. 임도용 타이어가 장착된 슈퍼 모터드 위로 몸을 실은 바이커들이 험로를 누비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도로 위를 지날 때마다 타 버릴 듯한 꼬리자국을 남겼고 강렬한 엔진음은 절벽을 뚫고 들어간 기차의 경적 소리처럼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이곳의 공기를 제 소음으로 양껏 채우기 위해 욕심이라도 부리듯 장대한 파열음이 일었다.
― 홋카이도에 바이크 여행하기 좋은 장소가 있다는데, 들어봤어?
― 위험하잖아 저런 거.
승관이 미간을 좁혔다. 이 겁대가리 상실한 인간이 또 헛소리를 시작했다는 표정으로.
― 안전하게 타면 괜찮아.
― 사고 난 사람들은 일부러 위험하게 탔나 그럼.
― 나 너랑 바이크 데이트 하는 게 꿈인데.
― 형은 면허라도 있지. 난 그마저도 없어.
― 고등학생 때 잠깐 배달알바 한 거 가지고 뭘. 그때도 꾸역꾸역 시간 내서 원동기 면허 따 갔더니 125cc짜리 한 달 겨우 탔었나.
장롱이야 장롱. 그러면서 헤헤 웃었다. 그 한 마디가 점수 대폭 깎아먹은 거 눈치 못 챘지 지금. 승관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정한의 핸드폰이 불쑥 내밀어졌다. 이거 한번 볼래? 그동안 쭉 욕심내왔던 모양인지 사진첩엔 각종 현란한 바이크들의 모델 정보가 캡쳐되어 있었다. 아래에 적힌 가격을 본 승관은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무려 4개월 치 가량의 월세를 훌쩍 넘어서는 금액이었다. 제정신이니 진짜.
― 우리 월세 몇 달 치인 줄 알아 이게?
제아무리 정규직일지언정 직급은 사원이었다. 정년이 보장된 대감집 노비 중에서도 서열 최하위란 소리였다. 용의 꼬리 주제에 넘보는 용기가 하늘을 찔렀다.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재산 문제가 다시 화두에 오를 참이었다. 정한의 망연한 표정을 살핀 승관이 눈알을 도륵 굴렸다.
― 정 타고 싶으면 다음에 렌트해서 타 보든지. 홋카이도? 거기 좋다며.
― 정말? 그럼 우리 이거 탈까? 제일 비싼 걸로!
열일곱의 저를 두고 애기라 부르던 스무 살의 윤정한 어디 갔나.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철이 없어진 것 같았다. 어렵사리 애인 20대 만들어 놓고 저는 맘 편히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건지. 예전과 똑같은 얼굴로 그리 새하얗게 웃으면 피차 변치 않은 제 마음은 질리지도 않는 요동을 쳤다. 어렵사리 살아가는 일과 속,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사랑을 감각하는 기분은 매번 겪어도 나쁘지 않았다. 승관이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2월에 휴가 내서 가자. 한겨울이라 그 즈음 가장 예쁠 거야.
― 알았어.
아 왜 내일 월요일이지. 붕붕 뜬 정한이 승관의 목에 팔을 둘러 오더니 투정 부리듯 칭얼댔다. 애기야. 응. 나 회사에서도 너 보고 싶은데 어떡해, 방법 없을까? 참아야지 뭐. 실수 몇 번 적당히 저지르고 좌천돼 버릴까? 미친 소리 한다 또. 그럼 어쩔 수 없다 승관이가 나한테 와 주는 수밖에. 승관이 몸을 틀어 정한을 마주안았다. 그러곤 가만히 중얼거렸다. 형. 응. 적당히 사랑하는 거⋯⋯ 진짜 힘들다 그치.
그새를 못 참고 전화가 걸려왔다. 버스에서 내린 승관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10분만 더 가면 되었는데.
― [마중 나갈까?]
― 아 뭔, 애도 아니고.
― [사실 이미 나왔지!]
저 멀리 골목 안쪽에서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정한이 보였다. 하여튼 웃겨. 마주 손인사를 해 주었다. 정한은 횡단보도 건너에 서서 입모양으로 말했다. 천천히 와 애기야. 회사 퇴근길에 오른 연인을 저리 낯간지럽게 칭해서야. 어차피 한국말이었고 두 사람을 비롯해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열 명도 안 되는 소수였지만 승관은 오히려 그래서 더 창피해졌다. 어딜 내놔도 부끄럽⋯긴 한데, 멀리서 얼굴만 보고 있자니 또 참으로 사랑스러워서. 저 역시 중증이라고 생각했다.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승관은 저편에서 정한이 제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느직이 발을 내딛었다. 그때였다. 가까워지던 정한의 모습이 돌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한 차량이 승관의 눈앞에서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매끄럽게 포장된 도로에 타이어가 마찰되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횡단보도와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엉겁결에 그쪽으로 돌아간 승관의 시선이, 눈을 뜨고 기절한 피해자의 것과 정확히 마주쳤다. 중심을 잃은 동공이었지만 왠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듯했다. 나약해진 영혼을 집어삼킬 요량으로 달려들기라도 할 것 같았다. 승관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머리로부터 흘러나온 검붉은 선혈이 보도의 흰색 페인트를 조금씩 물들여 가고 있었다. 119. 빨리 신고해야 하는데. 패닉에 빠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급히 달려온 정한이 승관의 두 뺨을 감싸쥐고 눈을 마주쳤다.
― 나 봐. 저기 보지 말고 형아 봐. 응?
― ⋯⋯.
― 승관아.
시선이 느리게 이동했다. 흐려졌던 초점이 돌아왔다. 승관이 울먹였다.
― ⋯⋯정한, 정한이 형. 어떡해. 사람이⋯⋯.
보지 마. 정한이 손을 들어 승관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이 눈물에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떨림이 잦아들지 않아서 품 안으로 안아넣었다. 정한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재촉 없이 등을 다독였다.
이후 며칠간 승관은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휙휙. 슬롯 머신의 릴처럼 쉴 틈 없이 돌아가던 텔레비전의 채널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정한은 리모컨을 꼭 쥐고 반가운 글자들을 찬찬히 읽었다. 오밀조밀한 폰트로 쓰인 한글자막이 특수 효과를 떠안은 채 화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높은 퀄리티의 세트장 안, 익숙한 외모의 연예인들은 코너 중 하나인 웃음 참기 미션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승관이 좋아하던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정한은 문득 거기서 빛 같은 걸 봤다. 일본에 온 후로 미디어 방송을 보며 처음 마주하는 희망이었다. 출연진들을 자세히 살폈다. 승관이 즐겨 듣던 노래의 가수도 거기 있었다. 그가 있을 부엌 쪽으로 고개를 빼며 목소리를 높였다.
― 승관아! 이리 와 봐. 여기 한국 예능이 나오,
쨍그랑. 귓전을 강타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말허리를 뚝 잘랐다. 정한은 곧장 리모컨을 내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사를 올 때 샀던 접시 중 하나가 산산조각 난 채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승관은 당황한 얼굴로 굳은 듯 서서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가스레인지 위 찬장이 열려 있었다. 밥그릇을 꺼내던 과정에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정한은 승관의 발부터 살폈다.
― 안 다쳤어?
― ⋯⋯어.
― 나와. 내가 치울게. 쓰레기통만 좀 가져다 줘.
붕대처럼 손에다 두껍게 휴지를 감고 한 곳으로 조각들을 모았다. 다행히 멀리까지 날아가진 않은 듯했다. 고분고분 식탁 뒤쪽으로 물러난 승관이 곧 작은 쓰레기통을 내밀었다. 비싼 건데 어떡해⋯⋯,
― 미안해. 내가 더 좋은 거 사다 놓을게.
바쁘게 움직이던 정한의 손놀림이 덜컥 그쳤다. 들려오는 승관의 목소리는 일탈을 감행하다 잡혀온 소심한 중학생 같았다. 자책하는 듯 보였고 무언가를 놓쳐온 사람처럼 허했다. 정한은 유리 조각들을 꼼꼼히 모아 쓰레기통 안으로 쏟아부으며 말했다.
― 승관아. 네 잘못 아니잖아. 형 화 안 났어.
― ⋯⋯.
― 같이 산 건데 왜 네가 책임을 져.
승관을 돌아보았다.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꼭 쥔 채였다. 몸을 일으켰다. 사고를 직면했던 충격이 컸던 걸까. 정한은 승관을 껴안고 달래듯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 맞다, 얼마 전 사고 있잖아. 그 피해자가 알고 보니 우리 회사 동료의 지인이더라고. 내가 현장에 있었다니까 말해 주더라. 그분, 무사히 잘 회복하고 있대. 다행이지?
안심하라고 한 거짓말인데, 믿으려나.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 ⋯⋯응.
―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버티자.
어깨팍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애써 목소리를 밝힌 정한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 승관이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이 다 사 줄게. 나 오늘 월급 들어온 거 알지.
― 월급, 나도 들어왔는데.
― 에이. 그냥 형이 사 주고 싶어서 그래.
간만에 어릴 때 기분도 내 보고. 어릴 때? 응. 그럼 우리⋯⋯ 거기 가자. 승관의 제안에 정한은 두말없이 동의했다.
유명한 한식집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정적 속에서 걸었다. 수많은 가짓수의 ‘하고 싶은 말’ 중 ‘해도 괜찮은 말’ 하나를 찾는 게 그리도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일은 심신에 존재하는 기력을 상당량 소비해야 했다. 불필요한 감정이 쓰였고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쉽게 나른해졌다. 최근 들어 정한은 사랑에 고단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승관 또한 비슷할 터였고, 이 갈등 같은 무더운 걱정만 해결된다면 이깟 피로쯤은 씻은 듯 사라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승관이 걸음을 늦추었다. 저 앞에 식당이 보였다. 제가 가자 했던 곳이지만 이제 와 내키지 않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 정한이 형. 우리 그냥 집에서 술 마실래?
― ⋯⋯그러고 싶어?
― 응. 내일 주말이잖아.
그러자, 하고 따르려던 말이 순식간에 은몰되었다. 내일, 목요일 아닌가. 잠시 기억 속의 날짜를 되짚느라 정한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너무도 당연히 확신하기에 하마터면 속아넘어갈 뻔했다.
― 승관아. 오늘⋯⋯ 수요일이야.
― 아이, 형이 그랬잖아. 내일 주말인데 프레젠테이션 있다고 오늘 최종 검토 하고 왔⋯⋯,
말꼬리가 맺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걸음이 동시에 멎었다. 지난 주의 일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끝난 지가 언젠데. 주말에도 일한다고 출근길 배웅까지 해 줬으면서. 관류하는 분위기를 살핀 승관은 이내 아하하 웃어댔다. 기민한 눈치와 비례한 부자연스러운 대소였다. 바보. 헷갈렸다. 미안. 그럼 술 안 되겠는데. ⋯⋯또 실수할라. 언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승관이 배시시 웃으며 왔던 길을 가리켰다.
― 형. 나 오늘은 저녁 안 먹을래. 졸려.
― ⋯⋯.
― ⋯⋯그냥 집에 가자, 응?
승관은 정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앞서 걸었다. 정한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누군가가 초점을 쥐고 흔드는 듯 어지러웠다. 자꾸만 진동했다. 애원과 함께 터지는 호흡이, 겨울 냄새가 뚜렷이 나기 시작한 바람이, 간절히도 꼬옥 쥔 차가운 손이. 이렇게 되면 당해낼 재간이 없어진다. 바람 빠진 배구공처럼 발 닿는 대로 힘없이 나부낄 수밖에.
승관의 야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은 달라진 수면 패턴으로 인해 자연스레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관은 모처럼 일찍 퇴근하게 된 날에도 늦은 시간에 맞춰 귀가했고, 경유지는 대개 병원이었다.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에 종종 스스로가 그 자리에 왜 있는지 기억나지 않으면 메모장에 기록해 둔 일기를 보았다. 한국어로 쓰인 활자는 윤정한으로 시작해 윤정한으로 끝맺음되어 있었다. 승관은 정한의 이름을 혀끝으로 굴려 보다 결국 울었다. 그리고 제 상태가 점차 나빠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겁이 덜컥 나서 견딜 수 없어지면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세밀히 기록해 둔 집 주소를 반복적으로 살피면서. 현관문을 열고 가지런히 놓인 두 사람의 신발과 정한의 모습이 차례로 보이면 그제야 안심이 됐다. 그런 날에는 무턱대고 달려가 아이처럼 안겼다. 정한이 등을 토닥이며 많이 힘들었냐고 다독이면 다시 눈물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고개만 끄덕였다.
뇌는 모든 걸 기억하기 버거워했다. 그럼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은 많았다. 업무의 순서가 중요했고 고객 대응 매뉴얼을 알아야 했다. 몸이 기억하던 자연스러운 항목들도 이따금 까맣게 잊어버리는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건 제법 드문 일이라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러니까 예를 들면 제 사무실 자리에 놓인 액자의 주인공 이름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기억나지 않을 땐 꽤나 애를 먹었다. 그래서 얇은 액자의 틀에다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한국어로 또박또박 적어 놓았다. ‘부승관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윤정한’이라고.
자꾸만 투정을 부리게 됐다. 별 것 아닌 일에도 걸핏하면 짜증이 났고 평소 같았음 웃고 넘겼을 장난에도 날카롭게 반응했다. 정한은 승관에게 맞대응하는 법이 없었다. 아 불편했구나. 미안해. 알았어 잘 치울게. 다음부턴 안 그럴게. 그러면 퍼뜩 정신이 들었고, 정말로 화가 치밀었다. 사과할 이유도 없는 그가 죄인처럼 목소리를 죽이고 기분을 맞춰 주려 애를 쓰는 게 열받았다. 정한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제 방으로 향하다 승관의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말하곤 했다. 승관아 잘 자. 그 음성을 들으면 잠결에도 눈물이 흘렀다.
― 아윽,
― 괜찮아요?
뒤따르던 료스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또. 팔을 짚고 일어나며 입술을 세게 물었다. 놓친 서류의 종잇날에 뺨이 베어 피가 흘렀다. 서류를 정리해 주던 료스케가 승관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던 그가 곧 밴드 하나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꾸벅 인사하자 료스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승관을 살폈다.
―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다쳐요.
넘어지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발이 꼬였다. 하도 부딪힌 탓에 만성처럼 무릎과 발목에서 통증이 일었으나 걷는 데는 지장이 없어 숨길 수 있었다. 팔과 다리에 늘어난 찰과상은 옷으로 꽁꽁 감추면 되었지만 하필, 뺨에 상처가 났다. 반사신경이 순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탓이었다. 귀가한 승관의 얼굴을 본 정한이 놀라 표정을 굳혔다. 넘어져 생긴 상처라고 변명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또 어딜 다쳤냐며 팔을 들어 걷어붙이려는 걸 저도 모르게 뿌리쳤다. 정한이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 하지 말라고. 발 걸려서 좀 넘어진 거 가지고 왜 이렇게 과민해.
― 지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누군데 이래.
정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화가 난 것 같았다. 승관은 정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꾸만 이 얼굴을 잊어버린다. 매일 보는데도. 한시도 빠짐없이 마주하는데도 계속 잊어버린다. 그래도 아직은 이름을 확인하면 기억이 돌아왔는데, 조금만 있으면 그것마저 안될까 봐 무서웠다. 정한의 존재를 지워낸 승관이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는 스스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감히 추측할 수도 없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랜만이었다. 무엇이든 공백기가 길어지면 닿는 곳의 낯선 자극을 감지하는 데 훨씬 수월해지는 까닭에, 정한은 그 찰나 승관에게서 무언가를 보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할 순 없었지만 분명 뭔가 달랐다. 승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잔뜩 피곤에 절은 눈동자가 시선의 경로를 좇았다. 그게 번져서 심장 한켠을 찔러왔다. 전송되지도 않은 신호를 수신하려 안간힘을 쓰는 저 눈빛이 하도 애가 타는 바람에 덩달아 견디기 힘들었다. 순간의 감정을 눈치채는 데 윤정한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 너⋯⋯ 어디 아파?
다툼이 시작되면 피하기 바빠 단 한 번도 자신을 봐준 적 없던 정한이, 승관의 눈동자에 빨려들 듯 가까워진 상태로 물어왔다. 좀 전의 화는 모두 사라진 목소리로. 미래를 암시하는 영신으로부터 모든 걸 듣고 온 신자처럼, 그럼에도 그가 틀렸을 거라는 확신과 의심을 골고루 나눠 가진 사람처럼. 뿌리를 튼 불길함이 기어코 싹까지 틔워내 버린 것처럼. 승관은 애써 표정을 감추고 실소했다.
― 이제 하다하다 사람을 병자로 몰아. 간섭하지 말고 형 앞가림이나 잘해.
충동이 정인에게 비수를 꽂았다.
방에 들어와 불도 켜지 않고 닫힌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시야가 핑 도는 것이 병의 증세인지 기분 탓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정한의 눈빛이 뇌리를 떠나지 못했다. 어쩐지 잠깐이나마 앞날을 보고 온 것 같다. 강경히 나가지 않았다면 제 입으로 모든 걸 설토해 버렸을 게 뻔했다. 아직은 마음이 약해서. 승관은 좀 더 엄해져야 했다. 자기 자신과 윤정한 모두에게.
핸드폰을 켜 차영의 SNS 프로필을 탐색했다. 정말 카페를 차렸다더니 입지도 괜찮고 손님도 제법 오가는 모양이었다. 간간이 찍혀 있는 차영의 얼굴은 이십 대 초반의 그 시절보다 곱절은 더 즐거워 보였다. 타임라인을 내리자 어느새 학창 시절의 사진들이 보였다. 승관을 비롯한 동창들에게만 공유해 놓았던 소소한 추억들이었다. 부드럽게 스크롤을 내리던 승관의 손가락이 어느 한 사진 위에 뚝 멈추었다. 이름 모를 카페테리아에서 승관과 차영이 작은 빵 몇 개와 음료를 각자의 앞에 두고 찍은 셀피였다. 그 아래에 달린 코멘트는 이러했다.
‘부승관 애인 귀국하는 날. 시간 같이 때워 주는 착한 친구.’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늦은 시간이라 걱정했지만 아직 퇴근 중이랬다. 다행이네.
안 그래도 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조만간 연락해 보려고 했었는데
회사 적응은 좀 됐냐 오후 11:45
간만에 연락해서 이런 말 미안한데
오후 11:46 혹시 너 알바 안 필요해?
알바는 항상 필요하지
왜? 누구 소개해 주게? 오후 11:46
아냐 그럼 됐다
오후 11:47 당분간 자리 하나만 비워놔 줘
야 니 생각보다 우리 카페 훨씬 잘 되고 있어
언제까지? 오후 11:48
오후 11:49 한국 가서 연락할게 조만간
한국에 온다고? 너 혼자? 오후 11:49
메시지 창을 끄고 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이걸로 답이 되었을 테니까. 갈 곳 없던 시선이 배경화면에 고정됐다. 정한과 승관이 카메라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다. 곧 모든 게 끝날 터였다. 정한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때쯤이면 정한이 슬퍼하는 이유를 자신은 모를 것이 분명했으므로. 형을 위해서야. 날 위해서이기도 해. 형은 이해해 줄 거야.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고 미워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연즉 빨리 마음을 뗄 수라도 있으니.
그러니까, 울지 않기. 차분해지기.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기. 오로지 형을 위해 선택을 행하기. 승관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것만큼은 잊어버리지 말자고.
― 정한이 형.
― 응.
― 휴가 좀 일찍 당겨 쓰자 우리.
정한이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다 말고 승관을 보았다. 새벽을 갓 넘어선 아침. 씻은 뒤 아직 바깥 공기를 쐬지 않은 보송한 뺨이 여섯 시경의 햇살 아래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상처는 아물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구태여 물었다.
― 왜?
― 여행 가게. 우리 모아둔 돈 있잖아. 그걸로 가자.
― 그래.
배시시 웃음이 났다. 승관의 입꼬리가 약하게 따라 올라갔다.
― 삿포로 설경이 예쁘대.
― 응. 거기 가자. 승관이 가고 싶음 거기로 가자.
― 형도 원해야 하는데.
― 나도 좋아, 당연히.
승관은 일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입안에 밀어넣었다. 회사원으로서의 마지막 아침 인사는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길었다. 곱게 접힌 사직서가 품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삿포로는 그야말로 눈의 왕국이었다. 인격을 가진 눈덩이가 왕으로 군림하고 눈으로 만들어진 백성들이 그 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소국이 존재하고 있다 해도 긴가민가 믿어 볼 만큼, 백색의 서화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대로변 중심부의 오도리 공원에선 삿포로 눈 축제가 한창이었다. 승관은 카메라 그리드 아래에 정한의 모습들을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럴 때마다 코끝이 달아오르고 눈물이 맺혔지만 추위 때문이라 자신하며 해명했다. 여러모로 겨울은 슬픔을 감추는 핑계로 써먹기 좋은 계절이었다. 특히 모에레누마처럼 찬란하기 그지없는 설경 속에서라면 여지없이.
그리고 순백은 끝없이 고결해서, 때로는 무척이나 잔인해졌다.
“형.”
“응.”
“우리 헤어지자.”
“⋯⋯그런 장난 함부로 치는 거 아닌데.”
“진심이야.”
“승관아.”
“충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했고.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야.”
감정에 이끌린 파도였음 내가 지금 어떻게 이래. 속마음을 삼킨 승관의 눈동자는 냉담히 견고했다. 정한은 말없이 승관을 응시했다. 바로 어제까지 저를 향해 웃어주던 연인에게서 누군가 온기를 도려내어 간 것 같았다. 장난이 아니란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만하고 싶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이 떠났어.”
“아닌 거 다 알아.”
“맞다고.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내가 형 싫다고. 윤정한이 싫어졌다고 이제.”
승관의 목소리는 선인장조차 살아갈 수 없는 사막처럼 건조했다. 진창 메말라 금방 갈라질 것만 같았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순진한 아이는 여즉 제 정인을 스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입술에 닿았던 온도가 아직도 선명한데. 잠들었다 착각하고 깊숙이 밀려오던 너의 다정이 꿈이 아니란 걸 내가 가장 잘 아는데. 끝에 묻어났던 맛이 눈물의 것인 줄도 알았다. 정한은 다 알았다. 그러나 독심술은 지니지 못해 승관이 말하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승관아. 진짜 이유 말야. 내 손으로 알아내게 되면, 정말로 화가 많이 날 거 같아. 그러니까 지금 말해. 형이 너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뭔지. 응? 나 그거라도 알아야,”
“행복하지 않아.”
“⋯⋯.”
“형이랑 헤어지지 않으면⋯⋯ 내가 불행해져.”
승관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 몰래 물어뜯었던 건지 능선처럼 울퉁불퉁해진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감춰졌다. 정한은 승관에게서 진심을 마주쳤다. 자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애인의 말은 안타깝게도 거짓이 아니었다. 정한의 시선은 여전했다. 변함없이 귀중했고 한결같이 예뻤다. 여상히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정한은 보기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앞이라는 이유만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문드러지는 속을 간신히 쥐어잡고. 스러지려는 다리를 죽을 힘을 다해 버티면서. 정한이 보고 있으니까. 승관이 보고 있으니까.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토록 애타게 매달려 왔던 맞사랑이 단 몇 초간의 담화로 결말을 드러냈다. 정한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도쿄행 다섯 시 비행기 타. 티켓은 캐리어에 넣어 놨어. ⋯⋯먼저 갈게.”
승관은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뒤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속도를 내기 위해 다리에 힘을 싣자 기어이 눈물이 주륵 흘렀다.
사랑해, 윤정한. 이렇게 보내게 해서 미안해.
겨울은 한복판 절정의 크기만큼이나 생채기가 나기 쉬운 계절이었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챙겨 나온 승관은 곧장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연락을 받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차영은 승관의 행색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오는 것처럼 말해 놓고 짐이 왜 이민자마냥 한보따리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식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어떤 새끼가 굶겼어. 윤정한이야?”
“내 앞에서 정한이 형 욕하기만 해 봐.”
버럭 화를 내던 차영은 승관이 눈을 사납게 뜨자 대번에 꼬리를 내리고 졸졸 뒤를 따라왔다. 변한 게 없는 성격이었다. 가방 하나를 옮겨 받은 차영이 참다 못해 물음표를 띄웠다.
“뭐야 너? 혼자 온 거 보면 아주 오는 것도 아닐 텐데. 형은?”
“아주 온 거 맞아.”
“어?”
차영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방금 정한이 형 욕하지 말라던 부승관 어딨더라. 승관이 다시 천천히 읊어주었다.
“나 다시 살려고 온 거 맞고. 정한이 형이랑은⋯⋯ 헤어졌어. 그러니까 형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마.”
“그러니까 왜, 아니, 알았어. 그럼 이것만 묻자. 헤어졌음 헤어진 거지 한국엔 왜 온 건데.”
“거기선⋯⋯ 기댈 사람이 형밖에 없어서.”
승관은 제 목소리가 젖어들어가는 걸 느끼고 부러 헛기침을 했다. 한국엔 너라도 있지. 그나마 차영의 얼굴을 보니 살 만해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숨이 좀 트인다 류차영. 낯선 환대에 차영만 당혹스러워졌다. 답이 적혀 있지도 않은 저 동그란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보게 됐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공항 바깥으로 나선 승관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차영아. 나 어디로 가지?”
지낼 만한 곳을 구할 때까지 고시원에서라도 살아 보려고 한다는 승관의 말을 들은 차영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제정신이야? 내가 2년 동안 고시원 살다 미칠 뻔한 거 너도 알잖아. 거긴 안 돼. 사람 살 곳이 못 돼. 생활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 곳이야. 살아 숨쉬어야 생활이지. 온통 죽은 자들의 건물에 숨은 개뿔. 어둡고 축축하고 더러워. 관리에도 소홀해. 승관이 그건 네가 지하에 방을 둔 90년대식 낡은 고시원에서 살았던 까닭이라고 몇 번이나 일러 주었지만 도무지 들어먹질 않았다. 차영은 그러니 어쭙잖은 생각 말고 당장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강요와 부탁 사이 어딘가였다. 어지간히 외롭고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상아색 벽지로 도배된 거실 한가운데. 직접 구워낸 쿠키를 야무지게 씹던 승관이 무구한 시선을 올려들었다. 강경한 대답이었다. 으휴, 차영이 한숨을 지으며 널브러졌다. 물론 몇 달 차이지만 내가 정한이 형보다 널 일찍 만났는데. 이렇게 친구 무시하기 있나. 난 너한테 비밀 같은 거 하나도 없는데. 나 서운해지면 어떡해. 승관아 친구 슬퍼진다. 빨리 좀 어떻게 해 줘라. 승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성가셔. 먹던 쿠키를 내려놓자 차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접이식의 작은 테이블이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삐걱거렸다. 대단한 각오를 하고 난 승관의 마음처럼.
“내가 왜 온 거 같애?”
“그니까, 그걸 도저히 모르겠다고. 자유와 사랑을 찾아 세상 후련하게 출국할 땐 언제고. 너 혹시 차였냐?”
“아니.”
“그럼 형 잘못이야?”
“그럴 리가.”
차영이 지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그럼 설마 네가 바람을,”
“생각을 거기까지밖에 못 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 게 누군데 지금!”
“사랑 식은 거 아니야.”
“형 쪽도?”
“⋯⋯몰라. 그래서 더 어려워.”
승관이 무릎을 감싸안았다. 야 이거 심상치 않은데. 덩달아 심각해진 차영이 자세를 고쳐앉았다.
“승관아. 왜.”
“⋯⋯차영아.”
“응.”
“나⋯⋯ 기억이 점점 사라진다.”
그 말뜻을 한번에 이해하지 못한 차영이 미간을 좁히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낯 위로 흐르던 장난기는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승관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헤어진 거야 형이랑. 내가 형 잊어버려서 헤매는 꼴을 어떻게 보게 해.”
“⋯⋯.”
“야근하는 척 형 몰래 병원 다니면서 진단 받았고, 실제로도 느끼고 있어. 잃어버린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까 그만큼 두려워져서. 그냥 내가⋯⋯ 겁이 많아서. 이걸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형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던 차영이 마른세수를 했다. 승관은 잠시 숨을 가누며 대답을 기다렸다.
“너⋯⋯ 이거 구라면 내가 진짜 죽여버린다.”
“⋯⋯네가 안 그래도 어차피 곧 죽을,”
“그만해 씨발, 뭐라는 거야!”
“약속 하나만 지켜 주라 차영아.”
“⋯⋯.”
“만약 형이 한국에 와서 날 찾아도⋯⋯ 이 사실 절대 말하지 않기로.”
차영이 끝내 울먹였다. 한동안 어쩔 줄 모르던 그는 책상을 옆으로 물리고 다가와 품을 내주었다. 정한과는 다른 온기였다. 승관은 가만히 차영의 어깨에 코를 묻고 숨을 쉬었다. 그래도 나, 아직 살아있네. 윤정한의 온도가 아직 기억나는 걸 보면. 차영은 아이 달래듯 승관의 등을 다감하게 토닥였다. 그러곤 가만히 속삭였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목소리였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
“⋯⋯어떡해⋯⋯, 내 친구 어떡해.”
목이 메었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꼭 맘껏 울어도 된다는 위로의 신호 같았다. 승관은 숨을 헐떡이다 결국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미안해. 미안해 차영아. 죽어도 형한테 상처 주는 건 싫었어. 이기적이어서, 이 짐을 너까지 지게 해서 내가 너무 미안해. 불분명한 발음으로 용서를 구했다. 차영이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잘못 없어. 형도 그걸 알아.
승관은 한국에 와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다. 자신에 대한 모든 사실과 진실과 감정들을 기록할 용도였다. 자주 병원을 오가며 의사의 소견과 스스로 감지하는 상태를 옮겨 적었다. 일기장의 겉표지엔 그날의 처방전과 먹어야 할 약의 분량을 메모지로 붙여 놓아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카페의 카운터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을 시작했다. 사장이자 전문 바리스타인 차영이 원두 관리부터 커피 추출까지 직접 했기 때문에 승관은 고객이 오면 주문을 받아서 전달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름만 올려 놓고 월급은 주되 일 같은 건 시키지 않겠다던 그를 한사코 만류한 결과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더 빨리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카페가 붐비는 시간이 지나 한산해지면 차영은 승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커피 내리는 법을 재미삼아 가르쳐 주었다. 틈틈이 이론적 설명도 곁들여졌다. 세상의 커피가 그렇게 많은 종류로 나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승관의 손에서 처음 탄생한 건 에스프레소 룽고였다. 그걸 한참 신기하게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시음해 보았을 때는 그야말로 죽는 줄 알았다. 반응을 살핀 차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리스트레토보다 연한 건데. 아 카페인 함량이 높아서 그런가. 리스트레토 한번 먹어 볼래? 승관은 손사래쳤다. 그럴 거면 첫 문장을 말하지 말았어야지.
승관의 최종 픽은 아메리카노였다. 거기다 얼음까지 잔뜩 넣은. 그마저도 조금 썼지만 룽고를 맛본 뒤였으므로 금세 가볍게 삼켜낼 수 있었다. 이 맛알못아. 차영이 장난스레 혀를 찼다. 이탈리아 사람 앞에서 그렇게 먹어 봐 너 큰일난다. 어차피 이건 미국식이잖아. 승관이 멀뚱해졌다. 처음에 이탈리아인들이 미국에 이걸 전래하면서 물을 타느라 이름이 그렇게 되긴 했는데 웃긴 건 뭐냐면 미국에선 아메리카노를 거의 안 먹는댄다, 오히려 브루잉이나 이걸 먹지. 차영이 카페라테를 쭉 빨며 말했다.
“너는 커피가 처음이야? 일본엔 카페 없냐?”
“있긴 있는데 이런 에스프레소 계열은 없어. 거의 수제거나 캔이라.”
전에 동료를 따라 UCC 캔커피를 넙죽 마셔 보았다가 혀를 지배하는 담배 맛 때문에 온종일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에 비하면 룽고는 고급스러운 축에 속했지만 결이 다를 뿐 이러나저러나 쓴맛인 건 변치 않았으니.
승관은 밤마다 생각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뿌리째 뽑혀 버린 나무와 같다고. ‘잊다’와 ‘잃다’는 달랐다. 잊는 건 의도적으로 지워내는 거고 잃는 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거였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 승관은 잊기 두려워하는 것들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승관아. 난 예전부터 네가 부러웠어. 처음엔 단순히 공부를 잘해서라는 이유밖에 없었는데 갈수록 더 생기더라. 넌 기억력이 좋았어. 학업 지식뿐 아니라 사람한테까지. 사람은, 특히 성인의 날을 기념해 보지 못한 학생일 때엔, 사소한 나의 무언가에 세심히 반응해 주는 상대에게 쉽게 마음이 끌려. 네가 1학년 때 나한테 처음 건넸던 말이 뭐였는 줄 알아? ‘안녕, 너 웃는 게 참 예쁘다.’ 그랬었어. 내가 보기엔 네가 제일 예뻤고 잘 웃었는데. 너는 누군가를 향해 쉽게 마음을 열었고 감정에 솔직했어. 그게 진짜 신기했다? 너랑 있으면 힘든 것도 잠시나마 잊혔거든. 나도 너처럼 순수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처음으로 직업이 아닌 꿈이 생긴 거지. 그러니까 나는⋯⋯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아무튼 넌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모든 게 미성숙하던 시절에도 남에게 꿈을 주고 사랑을 주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건 지식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거라서 그깟 기억 좀 잊는다고 달라지지 않아. 넌 모든 걸 잃고 무너지는 게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거야.”
차영은 승관 옆에 나란히 누워 꿈꾸듯 말했다. 천장엔 전의 집주인이 자녀들을 위해 붙여 둔 야광 스티커가 반짝이고 있었다. 자기 직전이나마 잠깐 어려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아 굳이 떼어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걸 멍하게 응시하고 있자니 스스로가 잠시 우주보다 커진 것 같았다. 차영의 목소리가 선잠에 들려오는 잡음처럼 웅웅거렸다. 승관은 고요히 눈을 깜박이며 응, 하고 대답했다.
“형은 곧 날 잊을 거야 그치. 좋은 사람이니까, 네가 말하는 나보다 훨씬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니까⋯⋯ 그만큼 멋진 사람 만나서.”
“야. 넌 이 지구에 정한이 형이랑 단둘이 남아도 피할 거야? 성숙한 사람은 부딪히는 방법도 잘 알아야 해. 물론 꼭 피해야 될 때도 있긴 하지. 그게 언제냐면 사랑하는 사람이 식인을 하는 괴물로 변했다거나, 평생 사죄받지 못할 아주아주 나쁜 길로 들어섰을 때, 그 사람이 악독한 마음을 먹고 나를 사지로 몰아가려고 할 때 등등. 근데 더 끔찍한 건 뭐게. 지금 이렇게 회피하는 데 끈질긴 네가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하면, 절대 도망치지 않고 부딪힐 것만 같다?”
순 바보잖아 바보. 이런 애를 내가 똑똑하다고 좋아했네. 차영이 실소를 뱉으며 팔로 눈을 가렸다.
“⋯⋯내가 결정한 일이야.”
“알아. 친구로서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단 거 잘 아는데. 나 있잖아, 네가 귀국한 후로 웃는 걸 단 한 번도 못 봤어.”
“⋯⋯.”
“행복하냐?”
“⋯⋯.”
“불행을 피하기 위함이었음 행복해져야지. 근데 그것조차 안 되고 있잖아.”
“⋯⋯그래서.”
“너한테 형이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라 쳐. 지금 그 형이 정말 괜찮을까? 너랑 사랑했던 9년간의 시간 따위 단번에 털어버리고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난 절대 아니라고 본다. 막말로 두 사람 몫의 기억이 한 사람한테만 남게 되는 거잖아. 형이 평생 모를 것도 아니고 언젠간 알게 될 텐데.”
“⋯⋯류차영.”
“응.”
“잘 자.”
승관이 차영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그래, 자라 자. 차영은 발치에 널브러져 있던 이불을 끌고 와 승관에게 겹쳐 덮어 주었다. 작은 폭으로 어깨가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밤마다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하는 건 차영에게도 꽤나 힘겨운 감인을 요하는 일이었다.
인천(ICN) ― 도쿄(NRT) [ 검색 ]
이른 아침. 카페 오픈은커녕 차영이 아직 출근을 하기도 전. 텅 빈 카페 한구석의 테이블을 차지한 승관은 마우스 스크롤을 분주히 움직였다. 역시 이 편이 가장 쌌다. 그래 보았자 50만 원대 아래를 못 뚫었지만. 예전엔 이 금액의 무서움도 모르고 감연히도 바다 건너를 오갔었다. 승관은 제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예산을 대강 추렸다. 차영이 꼬박꼬박 챙겨준 급여 덕분에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도 여유롭게 남았다. 살뜰히 비교하고 골라낸 저가 항공편 예매 버튼 위에 오른 마우스 커서가 잠시 방황했다. 막상 저지르려니 엄장해진 까닭이었다. 그래 아주 잠깐만.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만 하고 오면⋯⋯. 크게 심호흡을 하고 클릭하려던 찰나. 따르릉, 정석에 가까운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도 아니고 카운터였다.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차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비보를 전해왔다. 공장에서 배달을 오던 트럭이 도로 한복판에서 퍼졌다는 소식이었다.
차영의 카페에서 판매되는 에이드와 차 등은 별도의 수제 과정 대신 공장에서 납품받은 파우더를 이용했다. 사실 이곳은 커피 전문점이었기 때문에 그런 음료들 없이도 하루 정돈 굴러가긴 했다. 하지만 사장 류차영은 하나라도 준비가 되지 않았을 시 절대 오픈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적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내가 지금 공장으로 가고 있거든? 급한 대로 직접 가져와야지 뭐. 영수증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하루 운영을 위해 준비할 건 많았다. 오픈 전까지 카페로 배달된 파우더를 정리하는 것 말고도 로스팅된 원두의 날짜를 계산하여 알맞게 가스가 빠진 걸 확인한 후 준비를 마치고 머신 점검 및 세팅을 해야 했다. 포스기를 켜고 각종 디피 상품들을 재진열해야 했으며 간밤 쌓인 먼지를 닦는 데에는 카페의 규모만큼이나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됐다. 시계를 보니 아직 넉넉하긴 했지만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촉박할 수도 있었다. 승관은 전화를 든 채로 로스팅된 원두의 양을 확인했다. 손님이 없을 경우를 가정해도 딱 이틀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원두를 받아와야 하는데. 대부분은 커피마저도 공장에서 생산된 반제품을 사용하지만 차영은 전문점을 창업한 바리스타로서 커피에 대한 자부심과 가치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커피만은 꼭 원두를 직접 사 와서 볶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필 오늘. 악재에 악재가 겹쳤다.
“오늘 원두 받아와야 하는 날 아니야?”
[어. 그래서 말인데 오늘 카페 오픈 시간 좀 늦춰야겠다. 왔다갔다 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 같아서. 앱에다 공지 띄워 주고 문에 걸려 있는 팻말 시간 좀 바꿔 줄래?]
“원두는 그쪽에서 배달 안 돼?”
[우리가 원래 직접 가지러 가기도 했고, 지금 이 시간대에는 그쪽도 남는 트럭이 없대. 내가 진작 전화해 봤지.]
오픈 시간을 늦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까. 뭐라도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승관이 말했다.
“아니, 내가 갔다올게.”
[네가? 안 돼.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운전대를 맡기게.]
“그 정도 거리는 운전할 수 있어. 내가 빨리 다녀오면 오픈 정시에 할 수 있잖아.”
[⋯⋯진짜 괜찮겠어?]
“그럼.”
거듭 주저하면서도 상황의 긴급성을 무시하지 못한 차영에게서 결국 승낙이 떨어졌다.
[미안해. 딱 한 번만 부탁할게. 옆 주차장에 있는 트럭 타고 가. 차키는 금고 세 번째 칸에 있을 거야. 필요한 종만 말씀드리면 양은 그쪽에서 알아서 잘 맞춰 주실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미리 전화해 놓을게.]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쪽지를 확인했다. 차영이 헷갈린다며 적어 놓았던 로스팅 매뉴얼이었다. 거기에 필요한 커피 씨앗의 종류가 있었다. 아라비카와 카네포라. 알고 있지. 호기롭게 운전석에 올랐다. 과거 언젠가 차영이 정말 급한 일에 쓰려고 뽑아 놓은 소형 트럭 짐칸엔 카페의 로고가 크게 붙어 있었다.
도매 업체가 있는 부근에 다다라서야 핸드폰을 카페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문단속을 철저히 했으니 도난보단 차영으로부터 올 연락이 더 걱정되었다. 에이. 승관은 머리를 털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연락 수단이 끊기면 으레 겪는 현대인들의 불안 증세라고 여겼다. 필요한 내용 공유 모두 끝냈고 행방까지 알렸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혹시 모를 초조함에 풀악셀을 밟고 달린 덕분인지 다행히 카페로 돌아올 때까지 어떤 사건이라 부를 만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승관의 기억도, 원두의 상태도 멀쩡했다. 거의 동시에 도착한 차영의 카니발 트렁크에는 파우더가 포장된 박스가 한가득이었다. 두 사람은 모든 재료들을 정리한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 빨리 끝냈는데? 승관이가 큰 역할 했다 진짜. 고맙긴 한데 앞으로 이런 일 다신 안 시킬 거야.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애도 아니고 걱정은 무슨.”
차영이 카운터 쪽으로 돌아들어가다 걸음을 멈칫했다.
“여기 마무리 안 된 거 하나 있네.”
“맞다 나 아까 핸드폰 두고 가서.”
서두르느라 지쳐 벽 쪽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승관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와 가장 가까운 작은 테이블 위엔 두고 간 그대로 노트북과 마우스, 핸드폰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내가 치울게. 탕비실 테이블에 올려 놓으면 되지?”
어 고맙다. 승관이 그러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새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 있는 노트북을 닫은 차영이 잠시 주춤했다. 잠겨 있지 않은 핸드폰 화면 위로 확인되지 못한 알림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게 뭐지. 부재중전화 1통. 한국식 발신번호라기엔 앞자리 숫자가 달랐다. 긴가민가하여 승관을 부르려는데 다시 같은 곳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승관아.”
“어?”
“전화가 왔는데 모르는 번호야. 같은 번호로 부재중도 와 있고.”
“스팸 아니야?”
“무시하자니 왠지 좀 찝찝한데. 내가 받아?”
벨소리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울려댔다. 승관이 다가오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호기롭던 차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묘한 빛으로 변해갔다. 예? 아 잠, 잠시만요. 차영이 황급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국제전화, 스팸은 아닌데⋯⋯ 이분이 널 찾는 거 같아. 의아한 얼굴로 엉겁결에 전화를 바꿔 받은 승관은 수화 너머의 언어를 듣자마자 차갑게 식어갔다.
“⋯⋯네. 제가 부승관입니다. ⋯⋯네. ⋯⋯네.”
“⋯⋯.”
“⋯⋯방법은요. 가능성은요.”
차영은 일본어를 발음하는 승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마구 요동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통화가 끝났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승관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전화가 끊긴 건지 제가 끊은 건지조차 불분명했다. 차영은 영문을 몰라 눈치만 살폈다.
“왜⋯⋯ 무슨 일인데. 일본에서 왜 전화가 와 너한테. 네 바뀐 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차영아.”
승관은 아득히 흐려진 음성으로 차영을 불렀다.
“정한이 형이⋯⋯ 사고가 났대. 문제가 있는 바이크인 줄도 모르고, 그걸 타다가⋯⋯ 의식은 남아 있어서 지체 없이 수술에 들어갔는데⋯⋯ 피를 많이 흘렸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가 많이 났대.”
승관은 울지도 않았다.
“의사가 엄청 돌려 말했대. 근데 이분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곧바로 이해했대. 수술엔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라고. ⋯⋯형이 죽을 수 있다고.”
눈앞이 핑 돌았다. 어지러웠다. 어떡하지 차영아. 나 숨을 쉴 수가 없어. 들이마시고 내뱉는 법을 잊은 것도 아닌데 몸이 말을 안 들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손이 움직이질 않아. 이름 모를 곳에 갇혀 버린 혼령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형이 그렇게 된 게⋯⋯ 다 내 탓만 같아서.
“내가 말렸으면⋯⋯ 안 갔을 텐데. 말렸어야 했는데. 죽어도 타지 말라고 협박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아니 적어도⋯⋯ 비싸고 좋은 거 사겠다는 걸 내치지만 않았어도.”
“⋯⋯승관아.”
“⋯⋯히나타 씨는 정한이 형이 교환학생을 갔을 때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였어. 나중에 회사도 같이 다녔고. 그래서 형한텐 둘도 없는 일본인 친구야. 우리가 헤어진 것도 아는데, 난 알아야 할 것 같아 전화했대. 내 동료들을 수소문해서 겨우 얻어낸 연락처라 한참을 망설였는데 어쩔 수 없었대. 형이⋯⋯ 날, 그리워했대.”
승관이 고개를 올려들어 차영을 보았다. 곧게 선이 난 눈꼬리를 타고 기어이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차영아. 나 갈래. 형한테 가고 싶어. 이대로 보내면 후회할 거 같아.”
일어나려다 휘청이는 몸을 차영이 잡아세웠다. 팔을 뿌리쳤다. 옮겨진 걸음이 막혔다. 눈동자의 빛이 서늘해졌다. 금방 사그라들어 버릴 듯한 작은 성냥불 같기도 했다. 승관은 위태롭게 서 있었다. 비켜. 이어지는 말의 온도는 더없이 매정했다.
“너 지금 안 좋아. 이 상태로 거기까지 어떻게 가.”
“갈 수 있어.”
“승관아. 내 말 들어. 형 안 죽어. 그리고 너도 안 죽어. 다시 만날 수 있어.”
“네가 의사야? 의사가 아니라잖아. 형 못 살린다잖아. 그리고 나도,”
“의사가 못 살려도 형이 살면. 형 운 좋은 거 몰라? 그러니까 믿어 봐. 살고 싶은 욕심에 꼭 눈 뜰 거야. 그때 봐. 그날까지 너만 버티면 돼. 옛 기억 온전히 가지고 형 만나.”
승관이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차영의 다리를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데 차영아. 내가, 내가 그랬어.
“내가 먼저⋯⋯ 형한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했어.”
기적을 믿으시나요?
어쩌면요.
기적을 원하시나요?
지금은 조금⋯⋯ 간절해지네요.
그럼 거래를 시작하죠. 건투를 빌어요.
잠,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거래라면서요. 저한테서 뭔가를 가져가는 게 아닌가요?
이미 가져갔어요.
가져갔다고요?
그러니 기적은 일어날 거예요.
눈을 떴다. 이런 꿈도 있나. 온통 암흑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목소리만 울려오는 것이 꿈이라기엔 너무도 또렷했지만 그렇다고 진짜라기엔 비현실적이어서. 한참을 멍했다. 그러다 차츰 주변의 소음들이 귓전을 찔러오는 게 느껴졌다. 기분 나쁜 기계음이었다. 규칙적으로 메아리치는 것이 제법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크게 놀랐고 이어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공격적으로 가까워졌다.
“윤정한 씨, 정신이 드세요?”
정한은 의사의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내려 제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방금 전 목소리의 정체를 두 개의 후보군으로 좁혔다. 꿈이 아니라면 그곳은, 저승의 문턱이었겠구나.
일 주일 간만 경과를 지켜보자는 의사의 지침이 있었지만 정한의 몸은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아직 중환자실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일반 병실에 있는 환자들과 견주어 보아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정한은 예정되었던 7일보다 이틀이나 빨리 일반 병실로 옮겨갔고, 절차대로 행해지는 검사 결과 또한 호전의 연속이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의사가 분명 널 포기하려고 했다니까. 히나타는 의사의 말을 전하며 감격에 젖었다. 당연하지. 내 회복력이 좀 강하냐. 정한은 멀쩡하고 곧 멀쩡해질 예정인 제 사지를 뜯어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잘하면 곧 퇴원도 가능하겠네. 그러다 문득 말했다.
“히나타. 내가 꿈을 꿨거든? 지난 주에. 딱 깨어났을 때 말야.”
“응.”
“거기는 눈을 꾹 감은 것보다 더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고,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동굴 속에 들어온 것처럼 엄청 울려댔어. 그 목소리가 나더러⋯⋯ 기적을 주겠다는 거야. 당연히 원한다고 했지. 그랬더니 거래를 하재. 내가 알겠다고 하니까 기적은 일어날 거라며 그대로 가 버리는 거 있지.”
“거래 대상은?”
“몰라. 그러고 깼어.”
“⋯⋯뭐야.”
“난 그래서 내 팔다리 중 하나가 없어져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거 봐. 보다시피 아주 멀쩡해. 혹시 나 곧 죽나? 수명을 대가로 기적을 준 건가?”
“그 기적이 뭔데. 네가 살아나는 거야?”
정한은 대답을 망설였다. 제 추측이 사실이라기엔 아귀가 맞지 않았다. 대체 어느 멍청한 신이 수명을 단축하는 대가로 생존을 하사한단 말인가. 애초에 그리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근데 보통 이런 거 들으면 개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거 아냐? 정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히나타는 생각보다 몹시 진지했다.
“네가 바라는 기적이란 거 말야. 살아남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
네 몸과 목숨보다 소중한 걸 원했겠지. 근데 그런 게 있나. 없으니 정말 개꿈인 건가. 조금 심드렁해진 히나타가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정한은 순간 스쳐가는 직감을 간과하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수 없는 이변. 그리고 이미 빼앗긴 무언가라면. 다급히 물었다.
“나 사고난 거. 너 말고 누가 또 알아?”
히나타는 잠시 머뭇거렸다. 정한은 그 반응만으로 간접적인 대답을 들은 셈이었다. 정한의 사적 인맥은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히 꼽을 수 있단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술에 취하면 하릴없이 불러대던 이름. 그걸 알고 있는 사람 또한 한 명뿐이었다. 바뀌어 버린 루틴이 몸에 익고 체취가 달라지고 말투가 변해가고. 눈에 띄는 모든 사랑의 증거들을 감각할 기회가 가장 많았던 이 또한.
“승관이한테⋯⋯ 연락했어?”
“정한아,”
“어떻게, 아니⋯⋯ 처음부터 다 말했어?”
“미안해. 그건 정말,”
“히나타. 탓하려는 게 아니야.”
정한이 오른팔을 뻗어 히나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단단한 석고붕대 안에서 왼손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나선? 전화가 다시 왔었어?”
히나타가 착잡하게 고개를 내둘렀다.
“내 핸드폰, 엊그제 부서져서 수리를 맡겼어. 많이 망가져서 초기화가 됐고 며칠은 걸릴 거래. 그동안 전화가 왔는지는⋯⋯.”
“그 애. 어땠어?”
“응⋯⋯?”
“목소리. 어땠냐고.”
“⋯⋯슬퍼 보였어.”
친구의 대답을 기다리던 정한은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선 작별인사를 하듯 조용히 말했다. 잘 들어. 난 퇴원 수속을 밟는 대로 한국에 갈 거야. 그러니 그날 우리, 깊이 인사하자. 그 애를 만나면⋯⋯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니까.
운이 좋았다. 깁스는 한 달이 지나야 풀 수 있으니 그동안 다친 부위만 조심하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난 뒤에야 의사는 퇴원을 허락했다. 히나타는 눈물이 번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정한을 배웅했다. 약속대로 그들은 탑승 시각이 임박할 때까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잘 가. 몸 조심해야 해. 이건 정확히 열세 번 전한 히나타의 인사였고, 다음에 한국 놀러오면 연락해. 이건 정한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끝까지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랑한 시간 9년. 결코 가볍지 못한 현재진행형. 정한은 멍하니 좌석 앞의 모니터를 주시했다. 작은 비행기 모양의 아이콘이 소축척지도 위 도쿄 땅에서 깜빡였다. 곧 비행할 경로는 포물점선을 그리며 서울에 닿아 있었다. 소요시간 2시간 20분. 9년과 비교하면 찰나일 뿐이었다. 차분히 숨을 쉬었다. 겪어 본 중 가장 무질서한 긴장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먼저 연락을 취해 온 건 차영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승관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차영의 지인에게 닿았던 모양이었다. 차영은 첫인사 한 마디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나는⋯⋯ 승관이가 이런다고 날 원망할 사람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전화한 거예요.]
“⋯⋯지금 같이 있어요?”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핸드폰 하나를 두고 우주의 중심부처럼 메마르고 기묘한 침묵이 불규칙하게 이어졌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어요.]
“그게 무슨 말,”
[그 애⋯⋯ 지금 많이 아파요 형.]
차영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거기 어디야.”
차영은 전부 털어놓았다. 형 때문에 자긴 결국 친구와의 약속을 못 지킨 나쁜 놈이 돼 버렸다는 협박 아닌 통보, 그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연락을 시도해 볼 걸 그랬다는 후회와 함께. 차영이 과거의 이야기를 한 문장씩 꺼낼수록 정한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이울어 버린 달빛처럼, 으깨져 침강하는 빙하처럼 무력히 낙하했다.
저는요, 사랑이란 게 이렇게 대단한 것일 줄 몰랐어요. 승관이가 뭐랬냐면요. 자기 기억이 사라지는 대신 형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악마보다도 못한 새끼가 네 기억도 가져가고 형 목숨도 가져가면 어떡할래. 걔는 확신하던데요. 형은 죽지 않을 거라고. 일본에서 온 전화를 받고 사흘쯤 흘렀나. 그때까지 우울감에 빠져서 저한테 한 마디도 않던 애가 갑자기 그랬어요. 숨었던 친구를 찾아낸 술래처럼 갑자기 밝아졌다가, 다급히 식어갔어요.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올수록. 제 이름을 불러줬던 것도 어쩌면 그때가 마지막이었겠네요. 형, 그 애 지금 아무것도 기억 못해요. 후회하지 않을 거면 가 봐요. 대신 이거 하나만 알아 둬요. 승관이는⋯⋯ 끝까지 형 사랑했어요.
“주문하시겠어요?”
정한은 몇 번이고 침을 삼켰다. 생각했던 말을 하려면 다소 답답한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기다리는 손님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쪽이⋯⋯ 제일 잘 만드는 걸로 주세요.”
예? 승관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수많은 진상들을 만나 왔지만 이런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예의 있고 정갈한 태도로 이러니 짜증보단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좀 새로운 결인데. 동네 맛집 식당도 아니고 이게 지금 카페에서 할 말인가. 승관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저는 카운터 담당이고요. 여기는 전문 바리스타가 따로 있어서⋯⋯,”
“사장님한테 들었는데. 에스프레소 잘 내리신다고.”
“아, 사장님 친구분이세요?”
“친구는 아니고. 아는 형 동생 사이.”
제가 커피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사장인 차영뿐이었으니. 진상은 아니었던 걸까. 승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전히 망설여지긴 하지만 거절하기에도 뭣한 애매한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승관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한번 해 볼게요, 맛 없어도 이해해 주셔야 해요. 그러면서 방긋 웃었다. 그랬지. 넌 이다지도 예뻤지. 이제 와 붙잡지 못한 걸 후회하게 만들 만큼. 나 역시 단 한 순간도 널 잊은 적이 없었는데. 늦어서 미안해.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해요.”
포스기를 두드리던 승관의 손이 멈칫했다. 가볍게 차리는 예의라기엔 상당히 무거웠고 얼핏 감정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정한은 헛기침을 하고 재빨리 카드를 내밀었다. 왼팔의 깁스가 거슬렸다. 괜찮아요 저는. 제가 이해한 의미가 맞는지도 모른 채 대꾸하며 카드를 건네받는 움직임이 느렸다. 들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건만.
“많이 아프세요? 팔.”
눈이 빨개서. 승관이 리더기에 카드를 꽂으려다 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왼팔을 가리켰다. 섬세함은 후천적 지식이 아닌 본능이었다. 정한은 그리도 바라던 익숙한 색을 끝끝내 마주하고 말았다. 더없이 경탄스럽고 아늑한 빛이었다. 제가 사랑했던 사람의 것이 분명한.
“아뇨. ⋯⋯괜찮아요.”
무슨 정신으로 결제를 끝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리로 향하는 정한의 뒷모습을 응망하던 승관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했다. 대체 무슨 사연을 품고 있기에 저런 낯빛으로. 왠지 모르게 심장 부근이 찌르르 저려왔다.
그날, 승관이 내려 준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는 세상에서 가장 깔끔하고 진한 맛이었다.
이후 정한은 매일같이 카페를 찾았다. 평생 마실 커피를 그 즈음 다 마셔버리겠다는 각오라도 한 사람처럼 그 쓴 걸 자주도 마셨다. 승관은 정한의 얼굴을 천천히 기억해 갔다. 항상 같은 시간에 와서 오래 머물다 갔기 때문에 여유가 날 때면 담소를 나누었고 승관이 자발적으로 커피를 내려 와 권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만들 줄 아는 종류가 한정적이었던 그는 새로운 레시피를 차영에게 배워서 곧 써먹었다. 그리고 첫 시음 대상은 항상 정한이었다. 자신은 맛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난색을 표해도 정한 씨한테만 맛있으면 되는 거라며 해사하게 웃어 보이는 걸 어찌하랴. 정한은 거기에 매번 휘둘려 커피를 마셨다. 맛있어요. 기대 어린 긍정이 도달하면 걱정 넘치던 눈동자에서 광화가 피어났다.
머신 앞에 서서 일에 열중하는 승관의 모습은 넋을 놓고 보기에 알맞았다. 장비를 데우고 탬핑을 하고 포타필터의 물기를 닦을 때엔 말랑한 볼이 빼꼼히 드러났고 크레마를 확인할 땐 집중한 눈빛이 빤히 보였다. 잘록한 허리를 둘러싼 앞치마가 잘 어울렸다. 정한은 그럴 때마다 평행세계에라도 떨어진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원래의 그대로 돌아가던 곳에 저 홀로 낙오된 것 같았다. 승관은 정한과 처음 만났던 열일곱부터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연심이 깃들지 않은 눈동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정한은 기꺼이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9년 전의 승관이 그러했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로. 아주 평범한 인사를 나누고. 사건 없는 일과를 기대하고. 끝없이 행복해지고. 무난하게 사랑하고. 부끄러운 표현에 익숙해지고. 웃음이 헤퍼지고. 잦아지는 홍조의 빈도에 적응하고. 침묵의 어색함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스쳐가는 모든 감각과 존재들에게 감사해하고. 장난스런 변덕을 이용하고. 세상의 채도가 짙어지고. 좋아하는 글자가 생기고.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지고. 음성에 담긴 진심의 농도에 감동하고. 그렇게, 거개의 사람들이 살아가듯. 그것이 천체가 운행하는 원리라면 기꺼이 몸을 맡겨 주겠다고. 승관아. 이제 와 감히, 형이 널 욕심내도 될까.
하늘이 유별스레 높았다. 왼팔이 마침내 붕대를 벗어나 자유로워진 날이었다. 정한은 차영으로부터 묵직한 종이가방 하나를 건네받아 집으로 가지고 왔다. 덧붙이기를 승관이 예전에 썼던 물건들이라고 했다. 돌려줘 보았지만 쓸모를 기억하지 못한 그 애가 호기심조차 없이 탕비실 구석에 방치해 놨다면서. 살펴본 것 같지도 않으니 어차피 둘 거면 정한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단다. 함께 지내던 방 안에 앉아 정성스레 마감된 포장을 뜯어보았다. 일본에서 정산받은 첫 급여로 큰맘 먹고 장만한 작은 노트북부터 열아홉 그 시절 손에 꼭 쥐고 공부했던 펜까지, 가방 안에 든 물건들은 승관의 태도만큼이나 적당한 가짓수였다. 정한은 가장 눈에 띄는 공책 하나를 집어들었다. 한 손에 가득 들어올 정도로 두꺼운 일기장이었다.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잔뜩 손때를 탄 겉표지에는 이름 모를 병명과 약의 품번이 적힌 처방전 여러 장이 겹쳐 붙어 있었다. 미색의 속표지는 별다른 그림이 인쇄되어 있지 않은 빈 공간이었는데, 그 중심에 승관의 글씨체로 다짐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잊어버리지 말자.
내 이름은 부승관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윤정한이다.
일기의 낱장은 아주 더딘 간격으로 넘어갔다. 사랑하고 아파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한 나날들 속의 솔직한 단어들이 무심한 척 열렬히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제 이야기를 들어줄 존재가 이 일기장 뿐이라는 듯 절박해 보였다. 상상하지도 못할 고통을 견디며 홀로 처절히 분투하던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사랑을 시작한 땅 위였다.
⋯⋯
2월 20일
핸드폰을 새로 샀다. 데이터 이동 없이 이전 폰은 초기화했다. 차영이가 말렸지만 내 뜻대로 했다. 번호도 바꾸었지만 아직 탈퇴하지 않은 그룹 메신저에 자동으로 업데이트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쇼오쿠로부터 오랜만에 알림이 와서 알았다. 내친김에 대폭 계정 정리를 했다. 이제 더 이상 형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 바라던 결과였지만 서러워져 한참 울었다. 자꾸만 탓을 하게 된다.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인데도.
⋯⋯
4월 2일
카페 앞 나무에 목련이 피어났다. 형은 알까. 열일곱의 봄날 언젠가 교정의 목련나무 아래 서 있던 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걸. 흩날리는 백색의 화편들 때문에 꼭 봄에 내리는 첫눈 같았었다. 그날 형이 친구를 따라 우리 학교에 들르지만 않았어도 내 첫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텐데. 실감할수록 경이로웠다. 우연이 운명을 낳았다. 그리고 난 여전히 그 우연을 후회하지 않는다.
4월 3일
윤정한.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덜컥 겁이 났다. 형 얼굴을 보면 여전히 눈물이 나는데 재빨리 글자를 떠올리지 못한다. 내 뇌는 점점 심장보다 멍청해져 가고 있다.
4월 4일
꿈에 정한이 형이 나왔다. 함께 무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슬프지 않았던 걸 보면 좋았던 거겠지. 내가 잠꼬대로 형의 이름을 불렀다고, 차영이가 말해 주었다. 다행이었다. 무의식이 사랑을 기억한다. 사소한 것에 안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
5월 11일
보고 싶다. 이 감정은 언제쯤 질릴까. 틈만 나면 액자를 들여다본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첫날, 한강을 등지고 앉은 우리가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다. 그때 형은 나더러 예쁘다고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형이 더 잘 나왔다. 내가 소유하지 못해 사랑한 빛을 형은 잃어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형. 정한이 형. 윤정한. 형은 미소로만 답한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렇게 갈증 나는 이름일 줄 알았다면 더 많이 불러줄걸. 장난스레 여러 번 불러도 형은 언제나 그 횟수만큼 대답해 주었는데.
5월 12일
히나타 씨에게 연락이 왔다. 형이 사고를 당했다고. 내가 위험하다고 타지 말랬던 바이크를 타다 크게 다쳤댔다. 차영이에게 기대어 많이 울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운동 신경이 좋으면 뭘 해, 오토바이의 결함을 판별해 낼 노련함도 없으면서. 형은 내 안전에 민감한 만큼 자기 몸을 안 챙겼다. 절대 타면 안 된다고 화라도 내 볼걸. 그날 미적지근히 반응한 게 실수였다. 내가 조금만 더 말렸었다면.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수라도 써 보려 노력했더라면. 아니 애초에, 내가 형의 옆에 있어주었다면. 돌이킬 수도 없는 일에 가정을 붙이는 습관은 좋지 않은 건데.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형은 고작 그렇게 떠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신에게 무고의 여부를 분간할 줄 아는 능력 정도는 있겠지. 윤정한은 살아야 한다.
5월 13일
하품이 제대로 터지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내뱉는 양은 반절도 안 되는 것 같다. 누군가 방해라도 하는 듯 자꾸만 숨이 좋지 않은 곳에서 멎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산화탄소가 기도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다. 끝도 없이 답답했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졌다.
하지만 난 그렇게 죽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지금의 고통도, 예전의 행복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죽어갈 것이다.
⋯⋯
5월 22일
나의 무엇이 형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을까.
5월 23일
꿈을 꾸었다. 별도 달도 걸리지 않은 사막의 밤마냥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원하는 기적을 이루어 주는 대신 거래를 하자고. 뇌를 짓이기듯 쩡쩡 울리는 음성이 듣기 힘겨웠지만 난 망설임 없이 알겠다고 했다. 목소리는 기적이 곧 일어날 거라는 예고만 남긴 채 일방적으로 사라졌다. 그곳은 끝까지 적응되지 않는 어둠으로 포화되어 있었다. 마치 죽음을 앞에 둔 저승의 입구처럼. 그래서인지 꿈을 꾸는 동안 엄청나게 아팠던 것 같다.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을 때 차영이는 날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5월 24일
경미한 우울증의 증세가 나타났다. 이유 없이 마음이 아파오고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정말이지 거추장스러운 기분이다.
5월 25일
갑자기 슬퍼졌다. 훗날의 내가 형을 마주하고서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형의 표정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내게 둘러댈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조차 구별해내지 못한다면. 옛날이었음 어떻게든 기억해 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호언장담했을 테지만 그럴 용기가 점차 사라진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데 드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단 의미다. 실수가 잦아졌고 최근의 일들을 쉽게 잊어버렸다. 형의 사진을 보고도 무감해지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웠다. 가뜩이나 겁이 많았던 나는 툭하면 무서워 울었다.
5월 26일
형의 안부가 궁금했다. 히나타 씨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
6월 1일
짐을 정리했다. 형과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들은 이제 쓰레기 더미에 섞여 거대한 기계 아래 분쇄될 것이다. 방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형이 보이지 않는다. 내 손으로 지어낸 끝인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
6월 2일
상자를 다시 들여왔다. 새벽 일찍 쓰레기장까지 나가서 청소차가 수거해 가기 직전에 무사히 가져왔다. 분리된 액자와 구겨진 사진들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었다. 형의 얼굴이 엉망이 됐다. 어제의 내가 원망스러워져 눈물이 났다. 미안해. 울면서 사과해도 형은 웃기만 한다. 바보같이. 다시 정리한 물건들은 나만 아는 곳에 숨겨 두었다.
내가 죽고 나면 뭐, 차영이가 알아서 버려 주겠지.
6월 3일
차영이에게 말했다. 혹여 이다음에 형이 날 찾아도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물론 이건 예전에도 했던 약속이지만 여기다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래도 형이 기어이 날 찾아오겠다 한다면, 차라리 죽었다 전하라고. 덕분에 차영이한테 날씨만큼 참 좋은 소리 한다며 타박을 들었지만. 이 약속 어기면 너 진짜 나쁜 놈 되는 거라고 쐐기까지 박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차영이에게 알았다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사실 예상하고 있다. 내가 아는 류차영은 충분히 나쁜 놈이라 불려도 끄떡없는 담력을 지닌 사람이다.
⋯⋯
6월 11일
이 일기장을 펼쳐 보게 될 유일한 사람이 생긴다면 윤정한이길. 이다지도 모순 가득한 나를 그때까지도 좋아해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나한텐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니까. 영광이네. 평생 그리워한 사람이 형 하나뿐이라니.
6월 12일
한 번만 더 겨울을 만나 보고 싶다. 이왕이면 형과 함께였음 좋겠고, 끝없는 눈밭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지막 계절이었으면. 궁극이란 존재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딴 건 불가능하다는 듯 굴었다. 꼭 내 기억의 주인이 자기라는 양.
6월 13일
사랑해.
죽기 싫어.
6월 14일
보고 싶어, 윤정한.
자신을 부르는 승관의 시간이 마지막 장에 다다르면 몇 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일찍이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자꾸만 기억력에 흠집이 나는 게 보였을 때 어서 의심하고 대처해 주었어야 했는데. 여유롭지 못했던 나날들에 무능히 항복만 되풀이하느라, 그저 일상의 분주함 탓이나 사고를 목격한 후유증에 불과했던 줄 알고. 불완전한 권태의 이유조차 몰랐으면서 멋대로 지쳐버린 거라 단정지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얼마나 아팠어. 얼마나 힘들었어. 함부로 헤아릴 수도 없는 괴로움을 어떻게 혼자서 삭여갔어. 그러는 동안 정한은 크게 울었다. 승관이 짐작지도 못할 만큼 오래도록.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몸을 들썩이며 아파했다. 낯선 울음소리는 그렇게 밤새 세상을 적셔갔다.
카페의 유리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실내 맞은편의 카운터가 바로 보였다. 능숙하게 주문을 받아 처리한 승관이 바깥의 정한을 발견하고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듯 카운터 안에서 반가이 붕붕 뛰던 승관은 이내 정한의 낯을 살피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울었어요?”
“아닌데.”
“거짓말. 정한 씨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지 모르죠.”
카운터에 상체를 기댄 정한이 지그시 승관을 바라보았다. 부승관이 죽었다고. 누가 그래. 내 앞에서 이리 예쁘게 살아 숨쉬고 있는데.
“난 그냥⋯⋯ 승관 씨가 좋아서.”
“좋은⋯⋯데 왜 울어요. 웃어야지.”
“안 울었다니까.”
정한이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승관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로 가려진 감정을 캐내어 보려 애를 쓰다 스스로가 제법 오래 정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귀를 붉혔다. 커, 커피. 당장 둘러댈 만한 핑계는 그것뿐이었다. 어디선가 로브스타의 짙은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기분 전환엔, 커피가 좋대요. 과학적 근거도 있다는데.”
“승관 씨.”
어수선하게 자리를 뜨려던 승관의 움직임에 주춤 제동이 걸렸다.
“⋯⋯형이라고 불러 주면 안 돼요?”
뒤따라 나온 건, 제안을 가장한 시도라기보단 부탁에 가까운 어투였다. 마치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처럼. 승관이 천천히 뒤를 돌아 정한을 마주보았다. 그의 표정에 변함은 없었다. 늘 승관을 대하던 온도는 그대로였다.
“⋯⋯형.”
“⋯⋯.”
“왜⋯⋯ 그런 슬픈 눈으로 날 봐요.”
“⋯⋯.”
“사람 헷갈리게.”
승관의 투정은 진심이었고 정한은 거기에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자기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정의조차 내릴 수 없는 낯선 감정들이 마구 뒤섞였다. 모두 윤정한 때문이었다. 잡생각을 하며 커피를 내리느라 결과물이 엉망이 됐다. 그러고 보니 탬핑조차 빼먹었다. 묽기가 짝이 없는, 지옥에서 강림한 에스프레소의 탄생이었다. 이씨. 승관이 새 데미타스를 꺼내들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시 해서 줄게요. 완전 망했어.”
“그냥 줘 봐요.”
“절대 안 돼요.”
“괜찮아요.”
정한이 손을 내밀었다. 그냥 말하지 말고 바로 버릴걸. 할 수 없이 터덜터덜 건네주었다. 크레마마저 뜨지 않은 태는 커피라고 칭하기에도 민망했다. 정한은 그 꼴을 보고도 단결에 잔을 비웠다. 그걸 삼켰어? 올라오는 향도 쓰던데. 승관이 기겁을 했다.
“맛없네. 약 같다.”
“그⋯⋯ 그러니까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망쳤다고.”
애초에 나는 바리스타도 아닌데 뭘 바라는 거야. 그제야 억울해졌다. 정한의 얼굴은 전혀 힘든 기색도 없이 평온했다.
“승관아.”
“⋯⋯.”
“나, 네가 좋아. 아주 많이.”
잔잔한 목소리가 커피 향과 뒤섞여 자욱하게 흘러왔다. 승관은 정지된 사고회로에 손수 불을 붙이느라 잠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당황스러워야 맞는 거 아닌가. 저 말을 들은 심장이 뛰었다. 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내린 판단이었다. 거센 강도에 늑골마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전에 없던 확신이 일었다. 혹자에겐 착각이라, 어떤 이에겐 혼란이라 불리는 이것을, 정한은 사랑이라 부를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이상히도 사람이 붐비었다. 아무리 맛있고 서비스 좋은 전문점으로 입소문을 탔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장사가 잘 돼도 되는 걸까. 소속을 불문하고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연령별까지는 괜찮았다. 어찌 되었든 말은 통하니까. 승관을 가장 경혹하게 만드는 건 외국인들이었다. 자국의 언어로 뭐라뭐라 읊어대든 서툰 한국어를 사용하든 알아듣기 곤란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여태까진 이런 경우 차영이 승관을 대신해 주문을 받아 주었는데 그날따라 쉴 틈 없는 물량 공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차영은 아예 머신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였다. 죽기 전에 바리스타 한 명 더 고용하든가 해야지.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렴풋 들려왔다. 도울 능력이 없는 승관조차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티나지 않게 헛기침과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 선 상대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힘겹게 생소한 영어 발음을 굴려 가며 무어라 말을 걸어왔다. 그러다 저도 답답한지 메뉴판을 가리키며 공손한 말투의 일본어로 ‘저걸 달라’고 했는데, 승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 흠칫 놀랐다. 뭐지. 나 왜 알아듣는 것 같지. 스스로 경황망조하여 굳어버린 탓에 더 이상 반응을 않자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렸다.
“도와드릴까요?”
그 순간,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누군가가 승관을 대신해 능숙한 일본어를 구사해 보였다. 승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형?”
그는 구세주라도 발견한 마냥 연신 감사 인사를 섞어가며 커피 두 잔과 컵케이크 한 개를 주문했다. 승관은 혼돈 속에서 멍해졌다. 힘주어 애쓰지 않아도 듣는 순간 청해가 가능했던 까닭에. 꼭 그곳에 살다 왔던 사람처럼 결코 낯설지 않은 향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일본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해 본 적은 전무했는데. 그동안 정한은 손님의 주문 사항에 성실히 반응해 가며 포스기를 대신 눌렀다. 대화 몇 마디가 오가고 주문된 메뉴가 입력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초 가량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끝이 났다.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단순한 몇 년의 공부로는 내기 힘든 구사력이었다. 승관은 제 어깨를 툭툭 치는 자극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계산이요.”
정한이 손님으로부터 건네받은 카드를 내밀었다. 아, 어어. 손님이 진동벨을 가지고 자리를 뜬 후에야 승관은 어렵게 정한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아. 일본에 잠깐 살았었어. 5년 정도.”
“⋯⋯어, 그랬구나. 근데 형.”
“응.”
“⋯⋯나, 그 대화 다 알아들었어요. 일본어 공부한 적도 없는데. 그게 들렸어.”
그래서, 나도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형이 와 줬어요. 정한이 순간 굳었다. 놀란 것 같아 보였던 표정은 승관이 착각했다고 느낄 만큼 금세 풀어지더니 이내 장난스런 미소 아래 숨어 버렸다. 그럼 이것도 알아들어? 정한이 상체를 기울여 귀엣말을 했다. 그걸 듣자마자 승관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스키다요도 아니고, 아이시떼루. 좋아해가 아닌 사랑해. 그 문장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 같은 사람이. 주변을 살피며 정한의 셔츠 옷깃을 붙잡았다. 응? 대답해 줘. 네 마음은 어때. 정한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 몰라요. 이따 얘기해. 생각나는 대로 웅얼거리며 겨우 밀어내자마자 다가오는 손님이 보였다. 승관은 필사적으로 손등을 얼굴에 문지르며 홍조를 가라앉혔다. 순순히 물러난 정한은 승관이 주문을 받는 동안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돌아 들어가 등을 기대었다. 뒤늦게 차오르는 호흡과 요동치는 심장을 가다듬는데 가슴께가 저릿 아려왔다.
카페가 바쁘게 돌아갈 때에나, 그렇지 않을 때에나 정한은 항상 승관의 곁에 있었다. 분명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 중심의 그 어드메에서 매번 물음표가 생겼다. 승관은 저조차도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감각에서 비롯된 의문들은 불현듯 나타났다가 예고 없이 답을 내놓는 법이었다. 때는 늦은 밤. 마감 작업을 끝낸 후 퇴근을 하던 시간이었다. 정한과 함께였고, 나란히 걷는 거리 위로는 인적 대신 어스름한 야음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온종일 공기가 습하더니 비가 올 모양이었다. 눅눅한 먼지 냄새가 스며왔다. 열대야가 완전히 물러간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형은, 백수예요?”
그래. 이거였다. 하루의 일과라곤 절 보러 카페까지 행차하는 것이 전부인 이 번듯한 사내한테 그럴 듯한 직업 하나 없는 게 정말이냐고. 정한은 주저 없이 그렇다고 했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났다. 승관은 잠깐 멍해졌다가 바보처럼 되물었다.
“왜요?”
“나 돈 많아.”
정한은 그 말을 하고 스스로 웃겨서 웃었다. 열다섯 평짜리 투룸 사는 주제에 빗대는 처지가 다소 과분했다. 그래도 뭐, 모아둔 돈도 있고. 수도권에서 전셋집 구할 형편까진 되니 아주 못 사는 건 아니지 않나. 정당화는 재빨랐다. 승관이 뭣도 모르고 감탄을 하니까 뭐라 더 첨언할 수가 없었다.
“혹시 금수저?”
“그런 건 아니고. 열심히 일했었지. 소중한 사람이랑 잘 살아 보려고.”
“근데 왜 그만뒀어요?”
“일할 필요가 없어져서.”
“왜요?”
“소중한 사람이, 헤어지자고 했거든.”
그러니까, 승관의 입장에서는 초행의 카페에서 바리스타도 아닌 종업원에게 커피를 요청하며 대뜸 눈시울을 붉혔던 사람의 사연을 처음 접한 셈이었다. 타별하지 못했던 그날의 대면이 처음인 줄 알았는데. 제 기억 속에서 끝을 되짚자면 그뿐이었는데. 어딘지 빈 공간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통하는 길로처럼 팔팔히 뛰던 것이 몸 안쪽으로 깊숙이 아려오던 순간부터 꾸준히. 입술을 오므리고 잇새와 혀를 이용하여 발음하는 이름 세 글자가 오래도록 연습해 온 말처럼 쉽다는 사실과 그가 내비치는 낯꽃들 하나하나에 심간이 동요하는 걸 인지할 때면 어김없는 설의와 함께 우울이 밀려왔다. 알 수 없는 존재는 그렇게 어지러이 의식을 짓쳐갔다. 승관은 이유도 모른 채 울며 생각했다. 윤정한이 보고 싶다, 라고.
“그래서. 헤어져 줬어요?”
“응.”
“왜요?”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이 불행해진댔으니까.”
“형은요.”
“나는⋯⋯ 그 사람 아니면 안 되지.”
“지금도요?”
“응.”
승관의 가슴팍 어딘가에서 어렴풋한 미동이 일었다. 또 이상한 기분. 자꾸만 낯선 무언가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 끝에 아파트의 공동 현관이 보였다.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붕괴될 듯한 위태로움을 안고. 새카맣게 전소되어 버린 옛 시간의 틈에서 짧은 음성이 들려왔다.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처럼 잔뜩 뭉개져 있어 목소리의 주인을 가려낼 수는 없었다. 승관은 그 자리에 서서 고요히 말했다. 많은 걸 참는 듯한 얼굴로.
“조심히 가요.”
정한이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뒷모습을 보자 이유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말아쥔 주먹에 힘을 실었다. 붙잡고 싶었다. 할 말이 있는데. 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그는 알고 있을 게 분명해서. 그럼에도 끝까지 모르는 게 나을 것만 같아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한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날 밤 승관은 허덕이며 앓았다. 인내하기 버거워 허겁지겁 뒹굴었다. 그가 와 주었으면 했다.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차영은 본가에 내려갔고, 승관은 정한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영원히 해갈되지 않을 것만 같은 울결이 몰려오자 차라리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사지에 힘이 빠져갔다. 막혀오는 호흡을 그냥 두었다. 머지않아 끊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던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승관을 불러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즉시 자각할 수 있었다.
일어나 보기 위해 애를 쓰자 말단에서 중심부로 점차 힘이 붙었다. 꿈결처럼 낯선 공기의 촉감이 피부를 감싸왔다. 다리를 이끌고 침대에서 내려와 무의식이 더듬는 길을 걸었다. 평소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다이닝 룸 수납장을 열었다. 맨 위 칸 안쪽에 숨겨지듯 놓여 있는 열쇠 하나를 꺼내었다. 용도를 표기한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기본적 프레임이었다. 손에 꼭 쥐고 베란다로 나갔다. 왼쪽 끝에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집주인인 차영마저 잊고 지내던 창고였다. 승관은 열쇠를 구멍에 밀어넣었다. 힘을 주어 돌리자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연약한 달빛이 비쳐들던 창고는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꽃가루 같은 설진을 휘날렸다. 데자뷰 같았다. 내가 여길 온 적이 있었던가. 분명 낯이 익었다. 쓸모없는 잡동사니들 앞으로 단정히 정돈된 상자 여러 개가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었다. 조심스런 손길로 테이프를 뜯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상자에서 윤기를 잃은 종이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흩어졌다.
[승관이가 전화를 안 받아요, 형.]
정한은 차영의 이 말만 듣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메시지로 온 현관문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다급히 문을 열었다. 승관이 서 있었다. 마치 정한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미약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님을 방증했다. 정한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여기 있었구나. 왜 전화를 안 받았어. 난 또 네가 어딘가로 사라져 길을 잃어버린 줄 알고⋯⋯, 하려던 말은 나오기도 전에 막혀 버렸다. 휘청이며 다가온 승관이 그대로 입술을 맞대왔기 때문에.
사계가 멈추었다. 영원히 겨울이어도 꽤 괜찮겠다던 옛 공상이 뒤늦게 실현되기라도 하듯. 별똥이 추하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머물던 온기가 천천히 떨어졌다. 점습된 시선은 깊이를 가늠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왜⋯⋯ 안 막아요.”
“⋯⋯.”
“왜 그만하라고 안 해.”
승관이 울먹였다. 헝클어진 눈빛엔 억울함과 혼란스러움이 가득 뒤엉켜 있었다. 겨울 같은 사람. 내 세상을 환한 빛으로 맘껏 뒤덮어 놓고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날의 찬연한 설경 속에서도 유난히 어여뻤던 사람. 정한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모두 알고 있는 눈동자로. 승관은 점차 절망했다. 그렇게 장난스럽던 사람의 만면에 웃음기 한 점 없었다. 정한이 스러지려는 승관의 몸을 붙잡고 끌어안았다. 먼지 섞인 바람을 뚫고 달려왔을 텐데도 달콤하고 따뜻한 체취가 번져왔다.
“⋯⋯무슨 꿈을 꿨어.”
정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 형 좋아하는 거 같아요. 많이 아팠는데도, 보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았어. 그래서 당장 형 찾아가려고 했는데.”
“⋯⋯.”
“이것도⋯⋯ 꿈이에요?”
승관은 푹 젖은 채 흔들렸다. 정한이 승관의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느릿한 손길은 아끼고 아껴 왔단 듯 너그럽고 조심스러웠다.
“아니.”
정한의 단연한 대답이, 가장 약한 빛이 되어 어둠을 한 겹 걷어냈다. 어렴풋이 형체가 보였다. 열일곱. 봄냄새. 목련나무 아래. 우연. 동거. 여름. 외로움. 첫눈. 겨울. 생일. 스물. 키스. 눈물. 고통. 도쿄. 사랑. 병. 삿포로. 설원. 이별. 사랑. 또 사랑. 후회. 윤정한. 내 연인. 내 운명.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견디기 벅차서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 류차영⋯⋯ 진짜 나쁜 놈이네.”
다리에 힘이 풀려 결국 주저앉았다. 따라 내려앉은 정한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몸을 떨어뜨렸다. 물기 어린 시선이 짧은 간격의 허공에서 이지러지듯 얽혔다. 이런 얼굴을 하고 어떻게 그 많은 계절을 버텨냈어. 적어도 그런 선택을 한 건 후회하지 않게 해 줬어야지. 날 잊고 잘 살았어야지. 왜 미련하게 사랑해서 날 아프게 만들어. 형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데에선 바보처럼 둔해.
“그날⋯⋯ 내 마음 알았잖아.”
“⋯⋯.”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왜 원망조차 안 해.”
선이 약해진 정한의 낯 위로 애틋하고 연한 미소가 피어났다.
“승관아. 형⋯⋯ 이름 불러 줘.”
예전의 목소리로 원한다는 게 기껏. 승관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정한이 형.”
“응.”
“윤정한.”
“으응.”
“보고 싶었어.”
셀 수 없을 만큼. 승관이 옅게 웃었다. 붉어진 눈시울 끝으로 눈물길이 만들어졌다. 길고 가느다란 엄지손가락이 정한의 뺨을 닦아 주었다. 정한은 제가 우는 줄 그제야 알았다. 왜 이렇게 슬퍼해. 난 형이 웃었음 좋겠는데. 형도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승관을 꼭 끌어안았다. 아주 많이. 네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심장으로 느껴지는 온도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직 무탈한 생명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형. 우리⋯⋯ 겨울 보러 갈까?”
자기와 어울리는 계절 속에 다시 몸을 담고 싶다는 말.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찔히도 평온한 소원. 정한은 그 의미를 곧바로 즉감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목이 메어왔다. 응, 승관의 귓가로 들려온 답은 울음을 삼켜 나직했다.
“우리가 아는⋯⋯ 가장 먼 곳으로 가자.”
“⋯⋯그러자.”
그 해, 삿포로의 첫눈은 평년보다 조금 이르게 쏟아질 예정이었다.
+ Epilogue
― 승관아.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가 봐.
― 이만큼?
― 조금만 더.
― 됐어?
어어. 정한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앵글을 맞추었다. 타이머를 설정하고 승관의 옆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아홉 칸으로 나뉜 격자 안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당장의 걱정거리들을 모두 거두어 낸 깨끗한 미소를 지은 채로. 붉은 빛이 생체 신호처럼 점멸하다 이내 플래시가 터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가만히 웃고만 있던 승관이 복화술을 하는 듯 웅얼댔다. 된 건가? 정한이 뛰어가 결과물을 확인했다. 승관이 예쁘네. 흐뭇하게 중얼거리는 걸 들은 건지, 아니면 추위에 홍조가 오른 건지 승관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한이 카메라를 내밀며 승관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깔았다.
― 우리 이거 액자 사진으로 뽑자.
― 그러고 보니까 정말, 우리 집에 사진 하나 없구나.
이왕 뽑는 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도 골라 볼까? 승관이 눈을 반짝였다. 좋네. 옮겨지는 시선 끝마다 우리가 있는 거.
― 스무 살 되면 하고 싶은 거 있어?
― 형 애인.
― 그거 말고.
스물둘의 정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열아홉의 승관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다. 형이랑 술도 마실 거고 같이 학교도 다니고 싶은데, 이 모든 걸 함축하는 답은 하나뿐이니까.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명분. 강바람이 품은 냉기에 살갗이 시려왔다. 새해를 축복하기라도 하는 듯 불어닥치는 추위는 한껏 껴입은 옷 안으로 파고들 수 있을 만큼 매서웠다. 곧 연도를 표기하는 일의 자리 수가 바뀐다. 승관이 드디어 20대에 오를 영광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였다.
카운트가 줄었다. 전국 곳곳에서 같은 시간을 기념하는 신비로운 축제 의식이었다.
20대의 첫날은 3년 동안 기다려 온 것 치곤 제법 허무하고 가볍게 다가왔다. 이렇게 거창하지 않았어도 당연히 와 줬을 거라는 듯. 승관은 제야의 종이 울리던 순간 스무 살이 되었다. 정각에 맞추어 한강 너머로 불꽃이 연발됐다. 웅장한 전율이 일었다. 지나치게 행복해서 잠깐 세상이 내 것인 양 굴게 됐다. 승관의 마음을 대변해 주듯 불꽃의 모양이 유달리 자주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정확히 11초⋯를 넘겨 오래도 했다. 새로운 시작을 감축해 주듯 정한은 깊고 묵직하게 승관의 입술 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손을 잡아올려 제 목에다 감아 주면서. 승관은 서툴게 감각을 받아들이다 저도 모르게 정한의 옷깃을 꽉 쥐었다. 터져대는 광염이, 사람들의 감탄 섞인 웅성거림이 두 사람의 심장 소리를 무겁게 덮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겠지. 압력에 짓눌린 박동이 머리까지 퍼져서, 제야의 종소리를 닮은 경음이 서른 번쯤은 더 들렸다는 걸. 정신이 몽롱해지려던 찰나 바람이 불었다. 와 형. 나 잠깐 여름을 겪은 것 같아. 승관은 풀린 초점을 좀처럼 되찾지 못하고 정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게 키스라는 거구나. 숨도 차마 못 쉴 만큼 힘든 건데 아득하게 좋은 거구나. 첫사랑을 직접 감각한 20세의 자정은 생각보다 훨씬 기뻤고, 어지러웠고, 요란했다.
새해 기념식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한 폭의 점묘화처럼 밤하늘 위를 수놓는 불꽃들은 점차 몸집을 불려가며 피날레를 암시했다. 폭죽의 잔해로 해무가 낀 듯 천공이 뿌옇게 희미해졌지만 작은 빛 안에서 쏟아지는 형태만큼은 분명히도 뚜렷했다. 정한은 그걸 멍하니 보다가 말했다.
― 승관아.
― 응.
― 우리 지금 결혼하면⋯⋯ 내가 너 훔쳐가는 거 같을까?
스무 살의 1월 1일. 새벽과 함께 다다른 낭만 없는 청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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