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And Royal 上

Title. 나락이 락이냐?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대한제국 유민愉旼 원년이자 서기 20XX년의 가을, 국상國喪 중의 뒤숭숭한 기류가 미처 가시지 않은 오후 11시. 서울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귀가하는 열아홉 승관의 핸드폰에선 연신 신호음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려 사흘 째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애인이란 사람이, 아무런 낌새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뒤 연락이 뚝 끊겨 버린 거다. 전날까지도 문제는 없었다. 다투기는커녕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낄 만한 어떤 사건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딱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걱정하는 사람 처지는 생각도 않는다. 아무리 미움을 사는 아무개라 할지라도 대함에 있어 보통의 절차까진 지켰는데. 적어도 승관이 알고 있는 정한은 이런 잠수이별 따위 행할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면 이 형에 대해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걸까. 이런저런 사념들에 사로잡혀 몸에 익은 길을 정처 없이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마천루 중심의 8차선짜리 대로변이었고 승관의 집은 가도 건너 멀지 않은 위치에 고고히 자리잡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전화를 걸며 무심코 고개를 들자 맞은편 고층 빌딩의 전광판이 보였다. 커다랗게 반짝이는 전자시계 아래, 당일자의 뉴스에서 낮에 거행된 황제 즉위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멍하니 뉴스를 보면서도 신경은 온통 귓가의 신호음으로 쏠렸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진짜 음성메시지로 쌍욕이라도 날릴까. 화를 참던 승관은 스스로와 정한에게 마지막 기회를 베풀었다. 통화 버튼을 다시 눌렀다. 혀 끝에 장전된 욕 한 다발을 기꺼이 내뱉어 드릴 준비를 하고서.

[여보세요.]

“야 윤정한! 너 대체 뭘 하길래 전화를 안 받,”

⋯어. 저게 뭐지.

안도감에 발칵 터지던 목소리가 돌연 멎었다. 전광판 모니터에 나타난 익숙한 용모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잠시 제동이 걸린 탓이다. 보도는 선황제 사후 2일, 즉위식과 함께 치러진 태자의 책봉식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철저히 함구되어 왔던 황태손의 정체가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 순간이었다. 물론 이미 낮부터 인터넷이 같은 주제로 떠들썩했겠지만 승관은 수능을 코앞에 둔 열아홉이었고, 밴드부 스케줄에 덧대어 친히 골머리를 썩혀 준 누구 덕분에 그런 데 관심을 둘 여유 따위가 없었더랬다. 당장 오늘자 우선순위에 황태자의 정체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단 뜻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안중에 들어오지 않는 뉴스거리였는데, 계속 무시하기엔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은 이목구비인지라. 승관은 저도 모르게 전화를 뚝 끊고 눈을 비볐다. 며칠 동안 얼굴을 못 봤더니 헛것이 보이는 참인가 싶었다. 제 시력을 의심하던 눈앞에 황태자의 존함이 자막으로 떠올랐다.

아니 그러니까, 윤정한이 왜 저기 있는 건데.

피가 차갑게 식었다. 핸드폰을 들어 방금 끊긴 수신자 저장명을 보았다. 그 짧은 순간 세상의 초월적 존재들을 죄 불러내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시바신⋯ 또 누가 있더라. 아무튼 누군가로부터 숭배되는 모든 신이시여. 종교의 자유가 명시된 헌법 아래 살아가는 승관은 기어이 탄식을 뱉어내고 말았다. ‘정하니형’으로 저장되어 있던 이름은 근 사흘 동안 자주도 바뀌어, ‘윤정한’에서 ‘정한아전화좀받아라’로, 또다시 ‘남친맞음?’을 거쳐 마침내 ‘나쁜 놈’으로 종결되어 있었다. 승관은 영리했다. 재빠른 두뇌 회전과 민첩한 상황 판단 및 순발력을 타고났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가 꿈 속이 아니라면 X되어 버린 나쁜 놈은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걸.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해 섰다. 이미 한참 전에 초록불로 바뀌었던 신호는 어느새 3초를 남겨 둔 상태였다. 승관은 순간 도로 속으로 냅다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까마득한 8차선을 3초 안에 가로지르는 건 우사인 볼트에게도 무리인 행위였으므로. 죽더라도 지금 죽는 게 제일 곱게 갈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 것 같았다.

승관은 공동현관 앞의 인영을 보고 방금 전 생존욕구에 의거한 제 선택을 강하게 후회했다. 그냥 아까 죽을걸. 유리 통창에 기대어 서 있던 정한이 천천히 걸어왔다. 도망치거나 머리를 박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했지만 얼어붙은 하체는 움직일 생각도 않았다. 어디까지 가까워지려나 싶던 정한과의 거리가 좁혀지다 못해 품에 안겨버린 걸 실감할 때까지 승관은 숨도 쉬지 못했다. 와중에도 울컥 가슴께로 열이 올랐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연락해 주려고 했는데⋯ 조금도 시간이 안 났어. 미안해.”

지난 달 병상에 몸져누우셨다던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황제였고.

“미리 말 못한 것도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가장 먼저 밝혔어야 했는데,”

예전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건 분명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하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라온 아들인 줄로만 알았지. 제 입으로 잘 산다곤 했었으나 그래 보았자 가족 중 대기업 주요직을 둔 재벌가 격으로 넘겨짚었더랬다. 어떻게 남자친구가 황태자. 무언가를 감히 예상하기에 승관의 그릇은 아직 한없이 작았다. 무심결에 접착제라도 삼켰나. 목구멍이 붙어 버린 듯 옴짝달싹도 않았다. 할 말이 많았지만 사실 하면 안 될 말들이 더 많았다. 승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정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승관아.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될까. 뭘 하면 네 마음이 풀릴까, 응?”

지금 이미 주체가 바뀌었다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을 텐데 엄한 이의 다리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양 움찔댔다.

“전하께선⋯ 여기 계시면 안 되죠.”

눈가가 뻐근해져 왔다. 손을 뻗어 밀어냈다. 정한이 이렇게 나오면 안 됐다. 그간의 무례를 책하지는 못할망정 이리도 변함없이 굴면 정말 승관만 죄인이 돼 버린다. 결례를 무릅쓰고 돌아섰다.

“모르고 행한 잘못이라 탓하지 않으신다면 앞으로는 그마저도 용납되지 않는 사이이니, 그만 돌아가세요. 전 더 이상 전하와 할 말이 없,”

“난 할 말 있어.”

정한이 다급히 승관의 손을 잡아 돌려세웠다. 승관아 형 좀 봐 줘, 응? 존대하지 말고. 너한테 그런 말 듣기 싫어. 뒤따르는 애원에 절로 아랫입술이 짓씹혔다. 견고한 척 마구잡이로 진동하던 시선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정한이 약하게 웃었다. 세상의 모든 빛을 머금은 듯하여 좋아하던 미소였다. 다름없는 채도의 햇빛 아래, 용龍과 산山,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이 차례로 수놓인 곤복을 차려입고 9류 12옥 면류관을 쓴 채 책문을 하사받던 서늘한 눈빛은 간데없었다. 맞잡힌 손 위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딘가의 긴장과 떨림과 설렘을 한아름 안아든 것처럼 불규칙한 박동이었다.

“우리 결혼하자.”

“⋯⋯.”

“너랑 나, 결혼해야 돼 승관아.”

⋯와 윤정한 진짜 미친놈인가.

Young And Royal (上)

Title. 나락이 락이냐?

부승관은 이 ‘미친’ 윤정한과의 시작점이 철저히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황태자의 국혼 같은 게 애당초 인생 계획에 포함될 리가 없었으니 처음부터 의심 같은 건 제끼고 살아온 셈이다. 그날 밤, 주저하면서도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 승관은 고해성사하듯 숙연히 말을 꺼냈다.

“엄마.”

“응?”

“오늘 뉴스 봤어?”

“아니, 오늘 유난히 환자들이 몰려서 바빴거든. 폐하 즉위식이랑 태자 전하 책봉식 있었다고 얘기만 들었어.”

태자 전하. 호칭을 듣기만 해도 가슴 속 한켠이 갑갑해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전혀 본 거 없어? 기사 같은 것도?”

“시간이 없었다니깐.”

쉽게 말을 않고 있으니까 엄마가 생긋 웃었다. 용건이 뭔데 그래, 하고 너그럽게 다그치는 것이 꼭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 나, 사귀는 사람 있잖아. 정한이 형⋯ 들었지? 내가 한 번도 데려온 적 없어서 기억 안 날 수도,”

“아냐, 알아.”

“형, 아니⋯ 그러니까. 그⋯⋯.”

“응.”

“그 사람이⋯⋯.”

“태자님이라서?”

불규칙하게 팔딱이던 심장이 돌연 내핵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승관은 차마 입도 못 다물고 눈만 간신히 깜빡였다. 스스로 털어놓아도 단어 선택을 알맞게 했는지 돌아봐야 할 판이었는데, 엄마는 그 막중한 한 마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고도 태연했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언제 알게 된 거야?”

평소의 표정과 말투 그대로, 엄마가 되물었다. 이거 혹시 장르가 스릴러인가.

잠시 뒤 승관은 엄마로부터 건네진 적금 통장의 잔고 금액을 확인하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십억⋯백⋯ 안계가 아른거려 끝까지 읽지도 못했다. 이게 말이 돼? 아무리 엄마 아빠 모두가 대형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라지만 그래 보았자 월급 받는 입장일 텐데, 어떻게 이 금액이 실존을 해. 평생 한 푼도 쓰지 않은 거냐고 물으니 말없이 거실을 둘러보기에 따라 보니까 이 칠십몇 평짜리 집이 자가랬던 게 생각났다.

“있잖아 승관아, 엄마랑 아빠 말이야.”

“⋯⋯.”

“사실⋯ 태의太醫야.”

티 없이 설토되는 진실에 승관은 끝내 말을 잃고 말았다.

승관의 부모는 이 나라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일터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국내 최고의 의과대학부터 해외 명문 박사 과정까지 엘리트 코스를 차곡차곡 밟아온 그들은 각자 다른 대형 종합병원의 펠로우와 조교수로 재직하다 돌연 황실에 불려오면서 처음 만났다. 황제의 갑작스런 건강 악화 때문이었고 이는 조금만 더 방치했더라면 생명이 오락가락할 위기에 놓일 수도 있었던 급성 중병이었다. 본래 황실의 태의였던 병원장이 인턴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면모를 보여왔던 엄마 쪽에 먼저 컨택을 걸어온 것이었으며, 많지 않은 나이에 최연소 조교수를 딴 아빠 또한 수술 잘하기로 명망이 높았으므로 어찌어찌 때맞춰 인연을 잘 만난 셈이었다. 그들은 결론적으로 전례 없던 수술 기법을 시도하여 고귀한 목숨을 살려냈다.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컨디션을 회복한 황제는 매우 흡족해하며 이들을 곧바로 태의로 임명해 곁에 두었다. 벼슬길이란 건 예나 지금이나 부족함 없는 수익을 보장해 주었으므로 착실히 복지와 혜택을 누리다 보니 얼결에 사랑까지 성공한 거다.

두 사람의 결혼식이 치러지기 전날 밤, 그들을 따로 불러들인 황제는 거절 못할 제안을 해 왔다. 그대들의 소생이 세상 빛을 보게 되면 이 어린 황손과 부부의 연을 맺어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예나 신분 따위를 따졌지 지금의 정3품이면 절대 누군가와 함부로 비교되지 않는 집안이니 걱정 말라는 격려까지 덧붙여졌다. 정략결혼 계획이 성사될 당시 황제의 품에 안겨 무구하게 방긋 웃던 윤정한은 겨우 두 살이었으며 승관은 그로부터 2년 뒤 태어났다. 부모는 내정된 국혼이 아이의 성장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적령기에 다다를 때까지 묵비하자는 언약을 청했고, 덕분에 승관은 열아홉까지 제 족보가 평범한 중산층에 속한 줄만 안 채로 순진하게 자라왔다. 정3품 태의 소생 황실 정혼자의 가문, 그게 뭔데. 어째 낱자 하나 익숙한 게 없었다.

그와 처음 대면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려서부터 노래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탓에 다양한 밴드의 페스티벌 현장을 자주 찾았던 승관에게 어느 날부턴가 이상하리만치 자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지난 주에도 왔었던 것 같은데. 자꾸만 눈에 밟혔다.

― 저희 저번에도 봤었죠? 지난 주 잠실에도 오시지 않았어요?

마침 입장하는 타이밍이 겹치자 때를 놓치지 않은 승관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이리 우연히 맞닥뜨리는 것도 세 번은 족히 넘긴 듯하여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나른한 목소리는 어딘지 묵직하고 촉촉했다.

― 밴드 좋아하시나 봐요.

― 혹시 누구 좋아하세요?

― 저는⋯ 다이아몬드요.

― 오늘 다이아몬드는 안 오는데, 그냥 즐기러 오신 거죠? 제 최애 밴드도 오늘 안 나오거든요. 역시 우리 같은 사람끼린 통하는 뭔가가 있다니까.

승관이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방을 고쳐 메는 가느다란 손목에서 응원밴드가 넉넉히 흔들렸다. 자리는 어디세요? 친근히 말을 걸자 그의 손가락이 B구역을 가리켰다. 어 저도 그쪽인데, 승관은 반갑다는 듯 잠시 눈을 반짝이고선 망설임 없이 협소한 통로를 가로질렀다. 당장은 친목보다 무대 시야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찾으면 어련히 인사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 대박. 옆자리예요?

― 그러게요, 신기하네.

입술을 동그랗게 만 승관이 그의 티켓을 연신 흘끔거렸다. 14번 15번. 깔끔히 정렬된 순번이었다.

―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능청스런 붙임성에 비해 덜 자란 아이의 손이 반듯이 내밀어졌다. 미성년자라는 점에서 매한가지였던 그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부승관이에요! 승관의 호기로운 외침 뒤로 그의 입이 벙긋거렸는데, 공교롭게도 무대 아래의 스피커에서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악기 소리가 퍼져나온 탓에 목소리가 완벽히 묻혀 버리고 말았다. 승관이 무대를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 타이밍 진짜 나쁘다. 죄송해요, 음악 소리 때문에 못 들어서. 다시 한 번만,

그가 상체를 기울여 왔다. 아니 굳이 안 그래도 되는, 얼결에 몸을 옆으로 뺐지만 머지않아 귓가에 닿아오는 온기 하나에 승관은 손쓸 틈도 없이 얼어붙었다.

― 윤정한이에요.

귓속말을 마친 정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승관이 살짝 기우뚱해진 자세 그대로 좀 전의 상황을 되짚는 동안 공연은 이미 시작되어, 속도 모르고 분위기를 달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감정을 정의할 단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승관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나 뭐 하는 거야. 다른 누군가로 인해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다. 애써 앞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집중하려 노력했지만 신경이 온통 옆자리로 쏠려 도저히 평소와 같은 컨디션이 나오질 않았다. 어쩐지 조금 억울하고 혼란스러워져서 결국 내내 조용하던 옆자리를 슬쩍 돌아보았을 때 정한은 무대 대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승관이 마주했던 정한의 첫인상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중 마지막 순번에 불과했다.

승관은 곧 공연장으로의 발길을 끊어야만 했다. 날이 갈수록 음악적 흥미는 더하면 더해졌지 결코 사그라들진 않았으므로 고의는 아니었지만 일시적 희락과 취미 생활보다 중요한 고등학교 입시가 코앞이었다. 승관은 예술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잡은 뒤 모든 시간을 거기에만 쏟았다. 좋아하던 밴드의 스케줄 대신 목 상태를 관리하는 데 집중했으며 음악을 잘 듣는 방법보단 잘 부르는 방법에 익숙해져 갔다. 실력은 점점 물이 올랐고, 스승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동안 승관의 머릿속에서 정한의 존재는 빠르게 잊혀져 갔다. 낯선 공연장에서 정한이 자신을 찾진 않을지 하는 우려 따윈 아예 할 겨를조차 없었다. 미숙한 삶에서 처음으로 맞는 번잡함이었다. 이 공사다망에서 비롯되는 긴장감과 초조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미처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아직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아서. 때맞춰 제 목소리를 집어삼켜 버린 독감 바이러스에게 완패한 덕분에 사활을 걸어가며 준비했던 실기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어 버렸다. 건강 관리도 실력이라 믿어 온 승관은 자책감에 휩싸여 이틀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꼬박 지새다가 아쉬운 대로 근처의 일반계 사립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입학 이후 처음 자발적으로 걸음한 곳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명성 또한 자자하던 밴드부 오디션장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정한과 재회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이상한 놈이, 밴드부 부장이랬다.

하지만 이건 다른 쪽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시작은 알다시피 윤정한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태어나 보니 할아버지가 황제요, 아버지가 황태자였던 걸 어찌하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분명 국가 단위의 구원을 다섯 번도 넘게 이루어 냈었을 텐데. 유모를 포함하여 제 밑으로 시종 수십 명을 거느린 젖먹이 갓난쟁이는 돌잔치와 동시에 황태손으로 책봉되어 아낌 없는 사랑과 함께 자라왔다. 그러나 무한히 쏟는 애정과는 별개로, 군주의 자질에 대한 긍지와 신뢰가 무척이나 강했던 직계는 아직 분내가 마르지도 않은 아이를 전담 스승 아래 넣어 주는 대신 일반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사회 실정과 국민들의 일과를 몸소 체험하며 자라라는 깊은 뜻이었다. 허나 정한 또한 제 조부와 부친을 닮아 어지간히 난놈인지라, 스스로의 신분을 자각하고서도 그 흔한 의문이나 불평 따위 토로하는 법이 없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부당한 일이 아닌 이상 아버지가 그러라면 그랬고 할아버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 무엇보다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 싫지 않았다. 보통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공부하고 장난치고 혼나고 노닐다 지쳐 잠드는 게 즐겁기만 했다. 너그러운 성격 탓에 늘상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정한이었지만 모친과 부친을 고루 닮아 똑똑하고 강단졌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만만하게 보진 못했다. 말간 얼굴에 함부로 침을 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절대 아무에게도 네 정체를 발설해선 아니 된다. 정한에게 주어진 당부는 딱 한 가지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언더커버 같은 건가 싶어 처음엔 흥미로웠다. 비밀을 품고 산다는 점에서 마치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밀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매우 많았다. 나이를 먹고서야 알았다. 진실된 비밀은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밝혀지고야 만다는 걸. 무심코 뱉은 거짓말로 인해 끈끈했던 우정이 박살나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정한은 마음을 나눈 친구일지라도 후일엔 의도와 상관없이 제 곁을 떠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신분은 분명 그들과 달랐으니까. 말괄량이 장난꾸러기였던 태손은 어느덧 훌쩍 자라 있었다. 이를 알아챈 태자는 열일곱의 아들이 생일을 맞이하던 날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너도 이제 혼인이란 걸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암만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라지만 여기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제 정혼자를 할바마마께서 정해 주셔요. 투정 섞인 볼멘소리가 앞으로 있을 혼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상대의 집안과 약조가 되어 있으니 결코 무를 수 없다는 것조차도. 파혼이란 황실의 권위와 존엄을 훼손할 수 있는 행위였다. 역사 속이었다면 말이 좀 달라졌겠지만, 21세기의 현대는 수 가지의 성문이 존재하는 법치국가였으니. 영예 하나로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황족에게 씻지 못할 불명예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정한은 마른세수를 했다. 알고 보니까 이 결혼 상대라는 사람이, 애였다. 자기보다 세 살이 적어 무려 열네 살에 불과한 중학교 1학년짜리 어린애. 일단은 알겠는데, 그래서 국혼 날짜가 언제라고요?

절대 안 돼. 미친 거야. 이건 다름아닌 도덕의 문제였다. 민며느리제를 어디서 했는지 알아? 3천 년 전 옥저야 옥저. 아바마마는 멀쩡히 스물둘에 혼인했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물론 어마마마께서도 당시 십 대였긴 했지만⋯. 이런 말을 면전에 대고 할 순 없으니 이불 속을 대나무 숲으로 삼았다. 크고 넓은 침소의 방음재는 믿을 만했으니까. 무슨 이런 쓸데없는 원칙을 세워 고집하는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황실 교육은 이른 나이부터 받아야 하는 법이라나 뭐라나. 아무리 그렇다지만, 끼고 살아도 제가 살고 뭘 가르쳐도 제 몫인데 어째 간섭의 정도가 지나쳤다. 세상 물정도 모를 것이 분명한 애를 데리고 와서 대체 얻는 게 뭐란 말인가. 적어도 정한에게 남는 건 악감정뿐일 게 분명했다. 이 답답한 곳에서 좋은 기억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극히 적은 축에 속했으니. 잘못 결정했다간 평생이 고생스러워질 것이 뻔했다. 아무튼 이로 인해 정한은 단식 투쟁을 감행했다. 조건은 혼사 5년 유예. 그래 봤자 스물둘이었고 저쪽만 가까스로 열아홉이었으나 당사자가 내걸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이었을 테다. 며칠 동안 들어오는 삼시세끼를 모조리 내치고 이불만 덮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드넓은 침소 안에 상당량의 간식과 소형 정수기가 있다는 건 부모와 조부도 모르는 바 아니었기 때문에 형식뿐인 식음 전폐엔 딱히 겁을 내지 않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학교에서 전화가 몇 번 온 거다.

― 태손.

― ⋯⋯.

― 태손.

― ⋯⋯.

― 정한아.

― ⋯⋯.

― 다음 주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부모 소환을 한단다. 이 아비가 정녕 그곳에 가야겠느냐.

정한은 이불을 덮어쓴 채 일어나 보지도 않았다.

― 유모 보내면 되잖아요. 여태 그래 왔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 전적이 더 쌓이면 퇴학 처리가 될 수도 있다는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터졌다. 명색이 황족인데 최종 학력이 중졸이면 좀 쪽팔리지 않겠냐니. 그러게 애시당초 왜 이 사단을 만들어서 험한 꼴을 보느냐 이 말이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꿋꿋이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주말에 궁을 나섰다. 따사로운 낮볕 아래 서서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적당히 도착하려면 지하철이 좋겠지. 비서원 김 실장을 채근해 캐낸 정보는 정확했다. 그렇게 승관을 처음 만났다.

무질서한 진동이 뇌를 주물렀다. 잇따라 너저분하게 이는 잔음을 가만히 감각했다. 누군가에겐 인생의 방향성을 알려 줄 수도 있는 존재라 육신과 혼을 맡긴 채 환호성을 내지르게 만든다지만 정한의 취향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시끄럽지도 않은가. 결국 뒤로 멀찍이 물러난 정한은 무대에서 시선을 떼고 잔뜩 신이 난 승관의 뒤통수만 망연히 응시했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정혼자 녀석 얼굴이나 보고 올 요량으로 김 실장에게 신상만 가볍게 좀 털어봐 달라고 부탁했던 건데 어째 나온다는 게 요리조리 쏘다니는 것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부 락밴드 공연이란다. 어떤 날은 실내 콘서트장, 어떤 날은 또 야외 페스티벌. 조그마한 것이 종류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잘도 뽈뽈뽈 다녔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외모를 타고나서는 상당히 거친 쪽을 좋아했다. 가벼웠던 편견에 덧대어 생각하자 조금 흥미가 돋았다.

승관은 진실된 사랑으로 음악을 대했다. 공연 전 시간이 남는다는 핑계로 간식거리를 조금 사 줬더니 옆에 앉아 조잘조잘 떠드는 거다. 제가 얼마나 이 공연을 기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마저 기쁜 모양이었다. 발갛게 상기된 두 뺨에 미소가 번졌다. 설레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두근대지 않아요? 형은 안 그래요? 뽀얀 강아지마냥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맑게도 웃어 보였다. 심장이 뛰긴 뛰는데. 공연 때문은 아니고. 정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생수를 들이켰다.

―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한테 원래 그렇게 잘 웃어 줘요?

승관이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저 낯 가리는데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싶었다.

― 형이랑은 통성명도 했고. 이제 꽤 자주 본 사람이니까.

― 그래도. 내가 누군 줄 알고.

― 원래 좋아하는 분야가 겹치면 곧잘 친해질 수 있잖아요. 형이 누구긴, 다이아몬드 팬이지.

주워 들었던 이름들 중 적당히 생각나는 걸 말한 것뿐인데 대단한 오해가 생겨 버린 모양이었다. 정한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이아몬드라는 밴드에 대해 아는 것이 일절 없었다. 물론 여즉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연에 올출하면서 몇 번 영접하긴 했으나 그들의 생김새는커녕 기억나는 노래조차 전무했다. 승관의 달뜬 낯빛을 관찰하는 데에 여념이 없느라 무대는 매번 뒷전이었으니까. 승관은 소시지를 씹으며 종알댔다. 제가 좀 오프를 많이 뛰는 편이라 이 정도로 스케줄 겹쳐 본 사람은 형이 처음이거든요. 그 아래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고 저리 순진하게 굴었다. 심지어 좌석이 붙어 있는 경우도 제법 잦았는데 신기하다고만 할 뿐 별다른 의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런 건 신기보단 기묘하다고 표현해야 마땅했으니. 이쯤 되면 저를 가소롭게 여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더러 들었으나 어수룩한 미소를 보면 이내 거두어지기 일쑤였다. 얘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듬어 줘야 하지. 시작도 하지 않은 일에 벌써부터 이른 걱정이 앞섰다. 그 와중에 형은 왜 안 먹냐는 물음이 정곡을 찔렀다. 너랑 결혼 날짜 미루느라 단식 투쟁 한다고 안 먹어서 속이 부대낀다고는 차마 밝힐 수 없었으므로, 그냥 소화가 잘 안 된다고 얼버무렸다. 승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훼스탈이라도 사 오겠다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반동을 견디지 못한 플라스틱 의자가 가련히 나뒹굴었다. 고요하던 편의점 앞 공기 틈으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 괜찮아요. 약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라.

― 그래도⋯! 속 안 좋으면 노래도 편하게 못 들어요.

원래도 그쪽만 보느라 편히 못 듣긴 했었는데. 정한은 고개를 저으며 의자를 바로 세웠다. 아 우리 스승님들 고생 좀 하시겠네.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 ⋯왜 웃어요.

― 그냥. 귀여워서.

동그란 얼굴이 가을철 과실처럼 발갛게 익었다.

정한은 밴드부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다. 그 1년 새에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냐고 묻는다면 그냥,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다. 승관이 좋아하는 대화를 이끌어 나가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니까 승관이 입시 준비로 한창 바쁠 때에도 꾸준히 오프를 뛰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 팔자에도 없는 이른 기상을 한 뒤 부랴부랴 짐을 챙겨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나면 부지기수로 현타가 찾아오기도 했다. 진짜 별 짓을 다 하네. 그렇다고 이렇게 열정에 넘칠 필요까진 없었는데.

다니던 학교는 자퇴했다. 어차피 무단 결석 일수 두 자리를 넘긴 생기부 꼴은 박살이 났으니, 어차피 아쉬운 것도 없는 마당에 근처 이름난 밴드부가 있는 고등학교로 재입학을 단행한 거다. 당시 정한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중앙 게시판에 빼곡이 붙어 있는 동아리 홍보지를 둘러보다 혼자 방에서 연습하며 놀았던 베이스를 들고 밴드부 오디션을 봤다. 늦깎이 페널티에도 불구하고 본인 소유 악기라는 이유로 가산점을 받은 정한은 입구컷 빡빡하기로 악명 높은 밴드부로부터 보기 좋게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그렇게 예상 외로 제법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단체생활에 얼떨결에 녹아들어 갔다. 어느덧 스무 살,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신입생 적응 기간에 열린 오디션장에서 센터에 앉아 심사를 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명성이 명성이니만큼 폭주하는 지원자로 인해 반나절 가량 비등비등한 수준의 실력만 목도하던 정한은 그만 자리를 탈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시간상 1절만 보는 건데도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진짜 쓰레기 같아 못 들어주겠어. 프로들의 기교 어린 라이브에 익숙해져 버린 귀에게 열일곱 아마추어들의 코인 노래방급 실력이 음악처럼 들릴 리가 없었다.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고 귀는 점차 막혀만 갔다. 매기는 점수가 차츰 바닥을 기었다. 노래 대신 괴성을 쏟아내며 폭주하던 아무개가 퇴장하자마자 책상 위로 푹 고개를 처박았다. 눈과 귀가 차례로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 우리 앞으로 2학년들한테 예심 먼저 보고 올라오라고 하자. 아니면 며칠 나눠서 하든지. 작년에도 겪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할 짓이 못 되는 거 같애.

― 조금만 더 힘내요. 마지막 한 명 남았어요.

황태손이 몸소 심사를 봐 주는 걸 영광스럽게 알아야 할 텐데 쟤들이. 정한은 혀끝까지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씹어삼키고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 포지션은?

― 보컬이요.

피날레 고통 예약이네. 속으로 비관을 짓이기며 지원서를 넘긴 정한의 움직임에 덜컥 제동이 걸렸다.

― 어?

― 왜요, 아는 애예요?

― 너 몰라? 서연중 보컬로 다 씹어먹던 애. 얘 엄청 유명한데.

옆자리에서 초콜릿을 까던 우해민이 의아한 듯 거들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단 눈치였다. 동네에 소문 많이 났잖아, 백퍼 예고 붙을 줄 알았는데 하필 전날 독감 걸려서 실기 망쳤다고. 듣기론 그래서 우리 학교 온 거래, 밴드부 때문에. 정한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테이블 아래서 거스러미를 뜯었다. 형도 알죠? 어 그런 거 같다. 툭툭 치며 들어오는 질문에 멍하니 주억거리자 해민의 표정이 자뭇 의기양양해졌다.

― 정한이 형이 알면 백퍼야. 얘 그냥 당장 합격시킬까요?

― 개소리야. 들어오세요!

드러머 강준희의 당돌한 부름 뒤로 쭈뼛쭈뼛 한 인영이 들어섰다. 동아리일 뿐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구색은 나름 갖춘 탓인지 살짝 경직된 듯한 표정이 얼핏 보였다. 바닥만 쳐다보며 잰걸음으로 다가와 냅다 허리를 굽히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보컬 지원자 부승관이라고 합니⋯.

눈이 마주쳤다. 성하처럼 잘게 반짝이던 안광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애매하게 맺어 버린 인사의 끝으로 두 개의 시선이 스미듯 얽혔다. 끝내 소멸하는 영겁의 최후처럼 어지럽게도 길고 고요한 정적이었다. 당혹스러움에 살짝 벌어진 입이 다물릴락 말락. 마침내 적막을 깨뜨린 건 해민이었다.

― 반가워요. 서연중 출신 맞죠? 익히 들었어요, 노래 잘한다고.

― 감사합니다.

승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정한에게 고정된 눈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 아, 나는 우해민이고 기타 담당. 여긴 우리 리더님, 베이스.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 독재자야, 정한을 가리킨 해민이 입을 가리며 장난스레 벙긋댔다.

― 그만하고. 노래 좀 듣지?

―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어 죽을라 하더니? HP 회복 되게 빨리 되네요.

얌전히 상황을 파악하던 승관이 조심스레 마이크를 쥐고 작게 심호흡했다. 곡 정보를 확인한 준희가 노트북 플레이어를 재생했다. 작은 스피커를 통해 짧은 피아노 음이 흐르다 곧바로 첫 소절이 이어졌다. 긴장한 줄로만 알았는데. 청상한 음색 끝으로 처음 보는 짙은 풍미가 뒤따랐다.

All I need's a little love in my life, A little but I'm hoping it might kick start.*

노래는 점차 무르익어 갔다. 정한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복잡한 시선은 어느새 한껏 느즈러져 있었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옛 감정을 복기하자 당연한 수순으로 심장이 제 존재를 알려대기 시작했다. 마치 여태 거쳐 온 3년의 시간들은 오직 너를 만나기 위해 존재했단 것처럼. 낭만이 깃든 척 비틀린 사랑을 노래하는 음성에서 꽃내가 났다. 정한은 신소를 지었다. 나, 너의 안부가 몹시도 궁금했었나 봐 승관아.

*Push Baby - Me And My Broken Heart

― 노래 부르는 거, 부모님이 반대하진 않으셔?

― 그냥 하고 싶으면 하라던데요.

승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리 자유로운 사고방식 가진 부모라도 하나뿐인 아들한테 거는 기대는 당연히 있기 마련일 텐데, 저희 엄마 아빠는 진짜 그런 게 하나도 없어 보이거든요. 정한이 팔을 지지대 삼아 몸을 젖히며 싱긋 웃었다. 그 부모님께서 너 모르게 아주 큰 사고를 치셨단다. 그걸 알면 이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단 둘뿐이 남은 연습실 안, 허공의 틈새로 달콤한 체취가 흘렀다. 물어보니 향수도 안 뿌린다는데 어쩜 사람이 깨물면 과즙이라도 터질 것처럼 생겼다. 경연 대회가 코앞이었지만 두 사람만으로 제대로 된 연습이 가능할 리 만무했다. 거기에 정한이 포함되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승관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가사지만 살폈다. 연습하며 메모해 둔 필기 자국들이 빼곡했다. 정한이 흘긋 얼굴을 들이밀었다.

― 가사가 보여? 네 글씨에 다 가려졌는데.

― 선배.

― 응.

― 결혼은⋯ 꼭 사랑을 전제로 해야 되는 거예요?

헛숨을 들이켰다. 물을 삼키는 중이었다면 대번에 사레가 들렸을 터였다. 지레 뜨끔한 정한이 몸을 뒤로 물렸다.

― 갑자기 그건 왜.

― 그냥, 여기 가사를 이해하기가 좀 어려워서요. ‘널 사랑하지 않지만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는 말. 근데도 결혼에 대한 여지를 남겨 두는 걸 보니까 더 애매한 느낌이 들어요. 제가 보기엔 이것도 사랑 같은데요.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어떻게 사랑이 아니에요?

승관이 빤히 정한을 응시했다. 바닥을 짚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림자를 삼켜낸 흑갈색 눈동자는 견고했다. 꾸밈 없는 궁금증이었다.

― 승관아.

― 네.

― 너 나 사랑해?

눈동자 속 선명하던 형상 위로 봄철 아지랑이가 미약하게 일었다. 정한은 살풋 흔들렸다. 승관의 진동 탓이었다. 규칙적인 진동보단 휘우듬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세 번, 네 번, 다섯 번. 승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번잡히 지긋하던 기다림에 비해 무척이나 간결한 대답이었다.

― 내가 불행했음 좋겠어?

― 아뇨.

같은 부정, 다른 의미. 이번엔 고민 따위 없었다.

― 같은 거야.

― 그럼⋯ 그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게. 어떻게 될까. 정한은 몸을 일으켰다. 여전한 시선이 그를 따라 서슴없이 올라갔다. 승관은 왜 이 노랫말의 화자와 자신이 동일시되는 건지, 왜 하필 우리 둘을 예시로 들어 설명해 준 건지 묻지도 않았다. 베이스를 챙겨든 정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 나도 모르지. 사람마다 속도는 다르니까.

― ⋯⋯.

― 그리고 있잖아.

― ⋯네.

― 형이라고 불러. 말 놔도 돼.

승관의 눈이 커졌다. 3학년 선배들조차 꼬박꼬박 존대하게 만들던 윤정한이 반말을 허락한 첫 번째 상대란 사실은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았다. 벙벙해진 승관을 향해 씩 웃어 준 그는 베이스와 함께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오롯이 자신만을 향하던 눈웃음의 잔상이 감돌았다. 명명되지 못한 정체 모를 촉진제가 승관의 심장 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무슨⋯. 표정을 굳힌 정한이 가방을 의자 위에 턱 올려놓았다. 주인보다 한 발 앞서 자리에 도착한 선물 상자 꾸러미가 책상 위를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맨 위의 상자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To. 윤정한 선배, 좋아해요.’ 놀랍지도 않게 다가온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였다. 원한 적 없는 성탄절인걸. 이맘때쯤엔 예수도 살아 있었을 텐데. 가뜩이나 땀이 흘러 불쾌한 와중에 눈앞에서 손수 모닥불까지 지펴 주는 꼴이었다.

― 전 이럴 때마다 우리 학교가 공학이란 게 실감 나요.

짝 정민영이 속도 모르고 부러워했다. 화를 참은 정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 봤어?

― 이거 두고 간 애요?

― 어.

― 아뇨. 저 오기 전에 다녀간 거 같던데. 듣기로는 2학년 3반 여자애래요. 이름이 이주현이랬나, 주원이랬나.

상황은 순식간에 종결됐다. 두 팔 가득 상자들을 안아들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간 정한이 조용히 그 애를 따로 불러내어 시원하게 일단락을 내 버린 거다. 심지어 그 애의 이름은 이주현도, 이주원도 아닌 위주경이었다. 어떻게 하면 파열음이 마찰음과 비음으로 혼동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직 소란이 닿지 못한 아침 일곱 시의 학교 복도 끝, 주경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무력히 상자를 받아들었다.

― 혹시 소문 못 들었어? 나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애들 셀 수 없이 많다는 거.

― ⋯⋯들었어요.

― 알면서 왜 했어. 최초 타이틀을 그렇게 따고 싶었어?

주경의 눈가로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존심 문제일까, 단순한 억울함일까. 너무 몰아붙였나 싶었지만 현재 차오르는 짜증에 비하면 아주 순한 수준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어봐 놓고서도 사실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유였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 난 고백 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리고 껍질뿐인 고삼이란 거 너도 알잖아.

― 사귀는 사람⋯ 있어요?

― ⋯아직은 아니지만,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한텐 내가 직접 고백하려고.

― ⋯⋯.

― 미안해. 정성만 받을게. 마음이랑 선물은 도로 가져가. 앞으로 그런 돈은 너를 위해서 쓰고.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정한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사과의 주체가 이게 맞나. 미안하단 말은 날 번거롭게 만든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속으로 온갖 역정을 씹어대며 계단으로 들어서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승관이 벽에 기대었던 등을 떼고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형 멋지다. 고백도 많이 받고. 근데 간지나게 다 거절하네. 정한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라.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엿들어서 미안. 바깥으로 돌아 나가야 했는데 상황 보니까 못 지나가겠는 거 있지.

그때보다 많이 자랐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정한과 견주어도 될 만큼 키가 제법 컸고, 그가 없던 동안 갖가지 경험들을 해 보았으니까. 시간과 물리가 성숙을 이루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겪는 기분이다. 이전까진 생각도 안 나던 사람이, 마음 한구석에 퍼질러 앉아 내내 심장 바닥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주제 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고. 승관은 아직 어렸다. 그러니 속도를 조금 더 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승관의 집은 정한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 사는지는 모르겠다만, 항상 인적이 드문 골목 쪽으로 빠지더랬다. 궁금증의 가짓수와 비례해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았다. 승관은 정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매번 먼저 다가온 그가 승관이 원하는 걸 딱딱 알아채고 해결해 줬기 때문에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밴드부 활동도 엄연한 공사公事였으니 이것이 사적 관계와도 통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사실 뚜렷하지 못했다. 정한은 승관이 그런 잡념들에 빠져 멍하니 걷도록 내버려 두었다. 헤쳐 나가는 기해의 온도가 자못 후더분했다. 절기상 소서가 갓 지난 무더위는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도 기승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려대는 열대야 주의보가 영 터무니없는 소식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승관은 제 뺨과 귀 사이를 스치는 손길에 놀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땀이 흘러서. 정한이 셔츠에 제 손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웃었다. 두 사람은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 오가는 사람은 절무했다.

―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느려지던 걸음이 끝내 멈추었다. 승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형.

― 응.

― 나한테 왜 잘해 줘?

― 내가 너한테 잘해 주면 안 될 사람이야?

깔려 있던 시선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정한은 예의 미묘한 표정으로 승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짜증 나. 그런 거 혼자만 알지 말라고. 어딜 가야 하는지 파악해야 속도를 내든 말든 할 거 아냐. 어금니가 맞물렸다.

― 모르지. 어떤 사람인지 안 알려 줬잖아. 맨날 나만 다 말하고, 형은 비밀 투성이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그렇게까지⋯.

말하자면 한복판의 여름 같아. 형과 있으면 매번 극한까지 치닫는 이 어려운 기분으로부터, 달려서 벗어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피할 수도 없는 장마와 태풍이 차례로 밀려오는 이 계절과 다를 바가 없어서. 거센 재난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이유 모를 다정이란 걸 알긴 할까. 자승되는 여름을 헤쳐 나가기에 열일곱이란 나이는 극히 적었다.

― 내가 대단한 사람이면, 달라지는 게 있어? 우리 같은 고등학생인데.

― 언제는 껍질뿐인 고삼이라며.

― 너한테는 해당 안 돼.

― ⋯뭐야, 그건.

― 승관아.

― ⋯⋯.

― 내가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 궁금해?

윤정한 특기 나왔다. 개떡같이 에둘러 말해도 찰떡같이 본질을 잡아내는 신의 능력. 승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말아물었다. 정한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픽 웃었다. 자꾸 이러면 진짜 돌이킬 수 없어진다. 생전 처음으로 입이 근질거렸다. 엄비면 어떻고 천기면 어떠랴. 너만 원한다면 당장 모든 걸 털어놓고라도 싶은 심정인데. 자기 때문에 잔뜩 억울해서 톡 튀어나온 입술이 만지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웃는 얼굴을 조금 더 자주 보고 싶었다. 최근 들어 정한만 보면 골똘해지는 까닭에 풀어진 말랑이와 못 만난 지 오래 되었다.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들을 그리 하는지 도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다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승관이 고민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안 궁금해.

― 진짜? 들으면 놀랄 텐데.

― 그거 자랑하려고 나랑 같이 가자 했어? 필요 없으,

― 좋아해.

일순 사고가 정지됐다. 승관은 제가 마침내 정신이 나가, 환청 따위를 다 듣는 줄 알았다. 경연이 내일 모레였으니 어딘가 이상이라도 생겼다면 큰일이 난 건데.

― ⋯방금 뭐라고 했어?

― 내가 좋아하는 사람, 너라고 승관아.

윤정한은 드디어 일을 치렀고. 부승관은⋯.

― ⋯⋯왜?

정말⋯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황당한 되물음을 내놓고 말았다. 한겨울의 캠핑장 모닥불처럼 속내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고적한 평지를 거느리다 못한 더위가 그곳까지 침투한 까닭이었다. 그뿐이었다. 승관의 속도는 아직 정한만큼 능숙하지 못했다.

“아⋯ 씨발.”

즐비하게 늘어선 학원가 옆 빌딩 3층, 무인으로 운영되는 코인 노래방 11호실. 의도치 않게 출생의 비밀을 통달한 지 정확히 일 주일이 지난 뒤였다. 가사를 잃은 멜로디가 보라색 옷만 입어가며 허망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첫 소절은 부르지도 못했는데 벌써 1절 후렴이 끝나가고 있었다. 500원이 이렇게 또 증발됐다. 스트레스라도 풀고자 왔더니 오히려 한층 농축되는 암울함에 절망만 앞섰다. 당장 흘러나오는 노래의 제목이 사건의 지평선인지 샷건의 집현전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승관의 정신력은 가히 그로기에 다다른 상태였다. 거대한 스피커 밖으로 농도 짙은 상욕이 울려퍼졌다. 발음될 수 있는 험한 비속어들마저 전부 윤정한으로부터 배운 거였다. 방이 좁아 메아리가 울리니까 꼭 자기 자신에게 짓씹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내가 좀 많이 멍청하긴 했지. 그것도 눈치를 못 채고. 결미는 자괴였고, 되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승관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 같았다. 난생 처음으로 교제한 사람이 황태자라는 것도 황당해 죽겠는데 저도 모르는 새에 그와 약혼이 돼 있단다. 세상이 날 상대로 깜짝 카메라를 하고 있나. 내가 지금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기엔 누구에게도 밉보인 게 없었다. 물론 트루먼도 무고한 사람이긴 했지만. 승관의 죄를 굳이 따지자면 단지 오는 사랑을 막지 못했던 것 그뿐이었다. 시작을 돌이켜 보면 이십 년도 넘은 일이었다. 애초에 승관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단 얘기였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벌써 무슨 결혼이냐고. 성춘향과 이몽룡이 아무리 이팔청춘 십육 세에 그랬⋯다지만 그건 몇백 년 전 조선시대였으니 이상하지 않았던 거고. 로봇이 집안일도 대신해 주는 21세기인데 이놈의 황실은 아직도 15세기, 아니 더 훨씬 전에 머물러 조혼 따위나 하고 앉아 있었다. 이마저도 정한이 무력 시위까지 해 가며 겨우 유예한 결과라는 말을 들었을 땐 어처구니가 없어 반응조차 못했다.

사랑해야 했다.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승관은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윤정한은 존엄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였다. 승관은 제가 지금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아무 마음도 없었더라면 선택은 쉬웠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어느덧 마지막 소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떠오르는 게 이별 노래밖에 없어 끝없이 우울해졌다. 씨발 두 글자로 무려 10점이 나왔다. 후해서 좋네, 십팔 점 아닌 게 어디야. 실성한 듯 낄낄대면서 옆을 걸터듬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번호로 고민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한 번도 채 가지 않고 끊겼다. 승관아. 여지없는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왔다. 하. 실소가 흘렀다. 진짜⋯ 밉다. 얼굴을 감싸쥐며 혼잣말을 했다. 어쩜 그대로냐. 나는 괴로워 죽겠는데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변한 게 없어.

“윤정한.”

[응.]

“전하.”

[그렇게 부르지 마.]

“나 미쳐가나 봐.”

[⋯⋯.]

“이 상황에서도⋯ 형 보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든다.”

방법이 없었다. 정해진 운명엔 순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학우들이 벌건 눈으로 책상 앞에 앉아 다 먹은 커피캔 구길 때 저 혼자 유유자적 베이스나 퉁기며 연애질이나 했던 거네. 동화 속 베짱이가 인간으로 변한대도 그 정돈 아니었을 텐데. 당시엔 남 일이었지만 막상 열아홉이 되자 저게 한없이 못마땅하고, 샘이 나고 부러워지는 거다.

“승관이도 공부 싫음 하지 마.”

“뭔 말이야 그게. 내가 여태 좋아서 공부한 줄 알아?”

“어차피 황궁에선 대학 공부 소용없어.”

정한이 소주잔을 꺾어넘기며 태연히 말했다. 저게 진짜.

“생기부 양 늘린답시고 3년 동안 꼬박꼬박 개근하고 방학 바쳐가며 대회 수상 봉사 비교과 챙겨놓은 거 다 날리는 거네 그럼? 10모만 보고 나면 다음 달이 수능인데. 뻔히 옆에서 지켜봐 놓고선 싹 헛수고 돼 버리는 꼴 보니까 좋아? 그동안 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았냐?”

말하다 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절로 언성이 높아지자 작게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승관이 이마를 짚었다. 평일 저녁 일곱 시의 포차 안. 정한이 저를 지키고 선 익위사들더러 물러가라 명한 탓에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새어나가고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되네, 낯짝 다 팔리면서.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내 신상을 알게 되고. 맘만 먹으면 전 세계 사람들까지도. 와 인생 재밌다.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진짜 미쳐가나 싶었다. 감정 굴곡의 깊이가 마리아나 해구를 뚫었다가, 열권을 뚫었다가를 반복하며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미안, 승관아. 너 일찍 알았음 도망갔을 거잖아.”

정한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변명했다. 기가 막혔다. 것도 틀린 말은 아니어서. 암만 그를 우정을 넘어선 감정으로 좋아했다 한들 열일곱의 마음이 진중했을 리 없었다. 이런 사람일 줄 알았다면 진즉 내뺐을⋯, 아니.

“십칠 십팔세 고딩이 도망가 봤자 국내지, 어딜 가. 내가 없어지면 포기라도 하려고 했어?”

“아니. 찾아낼 건데. 나 그런 거 잘 해.”

상대는 황태자였다. 그의 손바닥 안 면적은 한반도보다 훨씬 넓었다. 버뮤다 삼각지대로 투신하여 실종되지 않는 이상 정한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지 않을 수는 없단 얘기였다. 승관은 제 자아가 이대로 소멸될까 봐 두려워졌다. 평생 이 인간에게 휘둘릴 인생이 전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시겠죠. 비아냥 섞인 답과 함께 나오려는 험한 말을 애써 집어삼킨 승관이 작게 속삭였다.

“저기요, 전하. 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친한가 보다 하겠지 뭐.”

“과연? 저 미친 고딩이 감히 태자님께 반말을 찍찍 쏴 대는데 폐하 영혼 빙의된 숙주가 아니면 대체 정체가 뭐길래 저러나 싶지 않을까?”

“아바마마랑 어마마마도 내 이름 함부로 안 부르는데?”

“⋯⋯.”

“너밖에 없어, 승관아.”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냥 뇌내가 통째로 깔끔히 증발됐다. 세상 유일한 놈. 태자의 본명을 면전에서 멋대로 부르고 예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투로 하대를 툭툭 던지는, 윤정한을 쏙 빼닮은 미친놈. 아아, 평범한 서울 시민이었던 부승관이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승관은 입꼬리를 힘주어 올렸다. 단 둘이었음 그 위대하신 옥체에 손찌검이라도 날릴 뻔했던 걸 가까스로 참아 내면서.

“그럼 어떡할까. 이제부터라도 존칭, 써 드릴까요?”

“으응, 싫어. 승관이한텐 형 소리 듣고 싶어.”

“우리 뭐 하다 여기까지 온 거야? 돌이킬 수 없어?”

“엉, 안 돼. 그러려면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야 돼.”

세상 과학자들아 뭐하냐, 빨리 타임머신 안 개발하고. 초음속 우주선으로 은하계까지 탐사하면서 어찌 시간 하나 못 돌리냔 말이다. 형 소리조차 안 하고 싶은데 정한아, 윤정한. 내가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 진짜 죽을 거 같애. 정한이 귓속말하듯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입술을 내밀어 왔다.

“여기서 하면 9시 뉴스 타이틀.”

승관은 정한의 주량을 알지 못했다. 술 마시는 걸 못 본 건 아니었다. 그냥, 안 취했다. 소맥에 폭탄주까지 말아 몇 잔을 마셔도 혀 꼬임 하나 없었고 멀쩡히 걸어 후차까지 갔다. 얼마나 먹어야 취하는지 몰랐으니 주량 또한 미지수였다. 최대한 간추려 잡아도 소주 네 병쯤은 가뿐히 넘길 것이 분명한데 지금 주먹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는 잔으로 겨우 세 모금 삼키고 이러는 거다. 내가 속아줄 줄 알았나 보지. 아이 아쉽다, 정한이 입맛을 쩝 다시며 물러났다. 멀쩡한 제정신으로도 이렇게 수작을 부려 대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받아줬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감도 안 왔다. 진짜 사회면 1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박제될 뻔했다. ‘황태자와 입 맞춘 고등학생, 그는 누구인가’ 따위의 끔찍한 제목을 달고. 게다가 장소도 좀 어지간해야지. 포차가 뭐냐 포차가.

“승관아⋯. 너는 나 싫어?”

“⋯⋯.”

“진짜루? 싫어?”

그럴 리가. 싫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승관의 체력 스펙트럼은 어느새 한껏 넓어져 있었다. 그와 비례해 속도 또한 늘었다. 상대가 행복하길 바라는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감각하는 것이 사랑인 줄도 알았다. 이미 그걸 겪었다. 드물었지만 연애다운 연애를 하는 동안 몇 번이고 느꼈다. 호기심으로 싹을 틔운 가벼운 시작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육중한 관념으로 자랐다. 광활했고, 온통 윤정한이었다. 싫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우주를 담아낸 저 깊은 눈동자가 부정적인 단어들을 모조리 사멸시킨 채 승관에게로 쏟아지려 했다. 그러면 남는 건 결국,

“아니.”

“진짜?”

“어. 형 때문에 180도 돌아버려서 엄청나게 좋아해. 나 이제 형 못 잊는다. 그러니 어디 가지 마. 나는 민간인이라 찾아낼 능력도 없으니까.”

“그러엄. 우리 승관이 옆에 오래오래 있어야지. 절대 어디 안 가.”

시작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사랑뿐이라. 오래오래 있겠다는 그 말이 조금이라도 못 미더웠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더디게 다루어진 소중한 약조를, 윤정한은 어떻게든 지켜내고야 말 것 같았다. 승관은 깊게 숨을 쉬었다. 여지껏 뜸들여 온 본론을 꺼내려니 공연히 호흡이 무거워졌다.

“그래, 결혼하자.”

“어?”

“국혼 치르자고. 그까짓 거.”

“⋯승관아.”

정한이 대답 대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승관을 불러왔다. 이게 아닌가. 거절당할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괜스레 불안해졌다. 저건 수월한 승낙의 낯빛이 결코 아니었다. 자기가 먼저 하재 놓고선 이제 와서 발뺌할 셈인가. 그래도 나름 굳게 먹어 본 마음인데. 일 주일 동안 얼굴도 못 보고 고민한 끝에 결심을 했으면 최소한의 정성 정도는 좀 알아 줘야⋯.

“너는 뭐 그런 말을 포차에서 소주 먹다가 하니.”

“⋯⋯.”

“프러포즈할 거면 내일 다시 해 주라. 마침 레스토랑 하나 예약해 놨거든.”

아.

이 보기 드문 또라이를 어쩌면 좋지.

윤정한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놈의 프러포즈 때문에 한껏 가다듬었던 결심이 무효가 된 후로부터 정확히 25시간 뒤, 보내온 주소를 찾아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레스토랑 입구는 잠겨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약간의 불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이 인간이 날 또 골려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젠 놀랍지도 않아서 한숨을 푹 내쉬고 전화를 걸려던 찰나, 돌연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아악! 승관이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이지 너무 놀라 간이든 쓸개든 어느 곳 한 짝은 떨어진 줄 알았다. 웨이터 복장을 한 사내는 승관을 확인하고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이리 일찍 오실 줄 모르고⋯ 들어오시지요. 이제 막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당혹스럽기론 마찬가지였으므로 예? 하고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는 말없이 길을 비켜났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웨이터가 태자 우익위랬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였던 승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실내의 조명이 일순 파도타기하듯 밝아졌다. 붉은 장미의 화편을 물감처럼 덮어쓴 채 깊게도 뻗어 있는 흰 주단 끝으로 정한이 보였다. 홀린 듯 앞으로 나아갔다. 발 아래로 짓이겨지는 꽃잎의 생경한 느낌에 절로 속도가 느려졌다. 한없이 긴 것 같았던 길이 어느새 가장자리를 드러냈다. 뒤늦게 알아차린 그의 옷차림은 제복과 흡사한 정장이었다. 등 뒤로 감추고 있던 꽃다발이 천천히 내밀어졌다. 뒤섞인 라일락과 리시안셔스의 짙은 향에 정신이 그만 아찔해져 얼결에 받아들고 말았다.

“청혼은 내가⋯ 윤정한보단, 이 나라의 태자로서 하는 게 맞을 것 같았어. ⋯어때. 너무 성대하면 네가 싫어할까 봐 적당히 조절해 본 건데.”

기껏해야 스테이크 우물우물 씹으면서 멋없이 끝낼 줄 알았지, 함께 있다 보면 그의 신분을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잦았기 때문에 복기하건대, 윤정한은 그럼에도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났지만 어찌 되었든 우린 정혼자잖아. 시작에 의미를 둔다면 첫사랑이고, 현재의 마음을 보여준다면⋯ 진심이야, 오래 전부터.”

정한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승관의 왼쪽 약지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어두운 금색의 반지엔 작은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는데, 이후 듣기를 황족만이 지닐 수 있는 국장國章이라고 했다.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야. 많이 힘들 거고, 무섭거나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행복하게 해 줄게. 최선을 다해 사랑할게. 난⋯ 평생 너만 바라볼 자신 있어서.”

“⋯응.”

“나의 비가 되어 주라, 승관아.”

승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스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이 몸을 일으켜 입술을 맞대왔다. 부드럽고 농염한 밀착은 천공 어딘가의 은하수처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득히도 흘렀다. 어지러운 농도에 승관의 팔에 차츰 힘이 풀려가자 안겨 있던 꽃다발이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정한이 기다렸단 듯 승관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첫키스는 여전한 박자로 호흡과 초점과 사랑을 모르던 시절의 기억들을 차례로 앗아가고 있었다. 사지가 녹아 흐늘거리는 듯한 느낌 속에서 승관은 제 정혼자의 허리 뒤로 팔을 뻗어 손깍지를 꼈다. 포화된 어둠에 흠뻑 젖은 세상 속, 어쩌면 이처럼 사랑하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너와 나’보단 ‘우리’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고, 상대가 아니면 상념에 빠지기가 힘들어지고. 날 울리고 웃게 할 사람은 서로뿐이라는 걸 실감하고. 너를 위해서라면 헌신이나 희생 따위쯤은 무작정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아져서. 입술을 떼고 혀끝으로 소리내어 보는 이름조차 사랑의 변화구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멀리 와 버린 뒤였다. 아. 이제 어쩔 수 없다. 승관은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내 전부를 바친다 한들 연정밖에 더 되나. 어차피 남는 건 서로뿐인데. 평생 바라볼 자신 나도 있어. 그러니까.

함께 살자 우리.

“아 윤정한, 그만 좀!”

늘 그러하듯 사랑의 기복은 들쑥날쑥 곡절을 탔다. 하지만 밑천은 여전했으므로 언제나 애증 중 애愛였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승관이 문제집에 코를 박은 채 달력을 가리켰다. 보여? 오늘 11월 1일이라고. 두 시간만 있음 2일이야.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러는지 감이 안 와? 시무룩해진 정한이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어쩐지 오늘 유난히 야자를 하고 싶더라니. 신경질적으로 펜을 탁 내려놓은 승관이 의자를 돌려 정한을 보았다. 말없이 가만히 있으니까 잔뜩 흐물어진 목소리가 웅얼대기 시작했다.

“나도 알지, 아는데에⋯ 승관이도 우리 집에 데려가 보고 싶단 말야. 아바마마께 인사도 드려야 하고. 곧 혼례식 올리려면 날짜도 잡아야 하고⋯.”

“한번 들어가면 평생 살아야 하는 곳인데 뭐하러 답사까지 가. 물론 그 전에 폐하를 뵙긴 해야겠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잖아. 형 설마 뭐 걸리는 거 있어?”

이불에 묻힌 얼굴이 느리게 주억여졌다. 뭔데 그게. 물어보니 시강원 강관講官이 꼰질렀단다. 정확히 밝히자면 정한의 시강원 출석부 및 생활기록부를 황제 폐하께 갖다 바쳤다고 했다. 대국 다 끝난 바둑판마냥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꼴을 목도한 아바마마께서는 당연히 격노를 하셨을 테고. 허구한 날 궁 빠져나와서 우리 집에 와 노니까 그 사달이 나지. 본인 말로는 흠 없는 탈출에 소질이 있다지만 이쯤 되면 황궁 경비원들을 매수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한심하단 듯 쳐다보자 정한이 슬쩍 승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슬프지, 스승님이라 내 힘으론 자를 수도 없어. 혈압이 올랐다. 강관이 감히 국본을 상대로 부러 약은 수를 쓴 것도 아니고, 응당 주기적으로 보고를 올려야 하는 절차를 수행한 것뿐이었을 텐데. 아직 자기 잘못이 뭔지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빨리 돌아가서 죄송하다고 빌고 좋은 모습 보여 드려도 모자랄 판에 여기로 도망쳐 와?”

“그러니까⋯ 승관이가 같이 가서 내 변호인 좀 돼 줘. 아바마마도 너 보면 화 풀리실걸.”

“지금 여기가 사법연수원인 줄 아나 본데, 나는 태자비가 될 사람이지 변호사가 아니야.”

“으응⋯⋯.”

“그냥 거기 있어 그럼. 이따가 엄마랑 아빠 퇴근하고 오시면 인사하든지 말든지.”

도로 의자를 홱 돌려 앉은 승관은 칭얼거리는 정한을 뒤로하고 다시 펜을 집어들었다. 여즉 문제 1번이었다. [보기]를 바탕으로 (가)와 (나)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하아. 이미 집중력은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다이빙한 지 오래였다. 달력을 흘끔 보았다. 내일은 금요일이었지만 수능이 코앞인 3학년들은 대부분의 수업을 자습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하루쯤 빠진다고 별다른 문제가 되거나 하진 않았다. 이걸 고민하고 있는 제 자신이 싫어졌다. 작게 숨을 내쉰 승관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래서, 입궁 안 할 거야?”

“⋯응.”

“진짜 그래도 괜찮아?”

“몰라⋯.”

“⋯⋯지금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가자.”

정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둡던 낯 위로 순식간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승관아!”

“오늘 밤은 여기서 자. 궁 비서원에는 따로 연락해 주고.”

정한이 신난 듯 두 팔을 벌려왔다. 하는 수 없이 가서 상체를 파묻어 줬다. 아무리 자기를 애 취급하는 형이라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철없음인지라. 별안간 앞날이 막막해졌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황제 앞에서 처음 선보일 제 이미지가 몹시 걱정되었다. 윤정한의 방패라니. 눈이 질끈 감겼다. 고생길이 훤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정한을 확인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황궁의 경비원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승관은 그제야 입궁한 사실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황궁과 바깥 세상을 가름하는 정문은 꼭대기를 보기 위해 턱을 높이 쳐들어야 할 정도로 크고 높았다. 교과서의 자료사진으로나 만나던 걸 실제로 통과하자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저 앞에 정전으로 보이는 큰 건축물이 서 있었다. 정한이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웠다.

“최 주임, 나 승관이랑 걸어가고 싶어.”

“예.”

최 주임이란 사람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전석에서 하차했다. 갑작스런 명이었지만 수행하는 데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어어떡해, 내려? 문을 열려던 승관의 시야로 팔이 쑥 침범해 왔다.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정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있어, 앞으로 받아야 할 대우니까 적응해야지. 최 주임의 손에 뒷문이 열리고 나서야 정한은 당연하다는 듯 차에서 내렸다. 알던 모습과 너무도 다른 태도와 말투, 목소리. 승관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 정한으로부터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 중 단연 가장 어수선한 혼란이었다.

미약히 침전된 승관의 눈동자가 떠나는 차량의 뒤꽁무니를 번연히 지켜보았다. 눈치를 살피던 정한은 승관의 뒤로 손을 뻗어 익위사들을 물렸다. 그들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정한이 승관에게로 몸을 기울여 왔다.

“승관아, 왜 그래.”

“그냥. 새삼스럽게도 다른 세계라.”

“낯설어 보였어? 승관이도 앞으로 계속 이 다른 세계에서 살아야 되는데?”

정한이 예의 태도로 승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분명 멀리 떨어지라 했음에도 금세 가까워지는 저놈의 익위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와중이었다.

“하오나 전하⋯ 폐하께서 도착하는 대로 침전으로 오시라 명하셨,”

“알았다, 알았어. 그거 얼마 된다고 이리 채근을 해. 네 말만 들으면 우리 궁이 여의도 크기만한 줄 알겠다.”

“⋯⋯.”

“바로 갈 테니까 거리는 유지하고 따라와. 붙기만 해 봐.”

승관아 봤지, 너는 혼례식 전까지 맘껏 자유를 누려야 한단다. 입궁하고 나면 너도 저렇게 과잉보호당할 게 뻔하니까. 장난스레 겁을 주던 정한이 저 너머를 가리켰다. 저긴 내가 사는 동궁.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진 궁전이 보였다. 희수당熙秀堂. 지붕 아래 현판에 적힌 세 글자가 그곳의 이름이었다.

“네 침소도 다 준비해 놨다? 나중에 보여 줄게.”

두 사람은 성근 걸음으로 동궁의 서쪽을 향해 걸었다. 익위사들과의 거리는 여전했다. 이미 가을이 자리를 내줄 준비를 마친 뒤였음에도 흐드러진 부용과 분꽃 향은 여태 흐붓했다. 힘주어 맞잡은 손 안으로 오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뒤집기도 못하던 아기 때 본 것이 마지막인데, 그새 많이 컸구나. 잘 자라 주었다.”

황제는 승관을 기쁘게 맞이했다. 마치 올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았다. 곧바로 앉히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평범하게 사는 것이 힘들진 않았냐, 이곳의 풍경은 어떠하더냐, 혼인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느냐 등 열아홉에겐 다소 부담스러운 질문들을 던지던 그가 이내 눈썹을 늘어뜨렸다.

“저놈과 함께 사는 것 말이다, 힘에 부치진 않겠느냐. 하도 천방지축인 까닭에 염려가 좀 되어야지.”

트히히, 정한이 실없이 웃자 황제는 이마를 짚었다. 골치가 아려왔다. 아무리 열아홉이라지만 아직 아이인데, 제 아들을 떠안기는 게 못내 미안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승관은 저도 모르게 황제의 용안을 골똘히 살폈다. 어째 판박이였다. 그동안 어떻게 몰랐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정말 닮아 있었다. 윤정한 삼십 년 후 모습이 저렇겠구나. 그러다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승관은 화들짝 놀라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뭘 그리 보느냐.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망설이던 승관이 이내 답했다.

“전하께서⋯ 폐하를 쏙 빼닮으셨습니다.”

“황족이 아닌 이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구나.”

황제가 재밌단 듯 턱을 괴었다. 아, 똑같다. 정한이 저를 놀릴 때의 얼굴과 분신술 쓴 것마냥 판박이였다. 승관은 눈앞이 캄캄해지려는 걸 애써 눌러참았다. 앞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사람이 무려 윤정한 두 명이라는 사실에 절로 현기증이 차올랐다.

“나는 저놈과 다르게 정실 속을 썩이진 않았거늘.”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정말?”

“예. 평생 사랑할 자신 있다 하였습니다.”

“내 아들과 로맨티시스트는 거리가 먼 줄 알았더니 별일이구나.”

“승관아. 나 멋졌어?”

조용히 해, 승관이 복화술하듯 웅얼거리며 옆구리를 툭 쳤다. 흡족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황제는 제 일정을 되짚으며 유심해졌다.

“혼례 날짜는 언제가 가장 좋겠느냐?”

예? 윤정한 데려다 주러 왔더니 본 김에 쇠뿔까지 뺄 작정인 모양이었다. 전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던 승관은 당혹하여 우물쭈물댔다.

“그건 저희 부모님과 상의를 거쳐야⋯,”

“내 권한이니 그쪽에서도 관여치 않겠다고 이미 말을 마쳐둔 상태이나, 나는 너의 뜻에 맡기고 싶어 그렇다.”

“아⋯ 그렇습니까.”

아바마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한이 눈치를 살피며 제 아비에게 눈짓했다. 뭐, 뭘. 황제가 신호를 알아차리기 위해 미간까지 좁혀가며 아들과 눈빛 교환을 하고 있을 무렵 승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여태 해 온 것이 아까워서 그러니 수능 시험까지만 치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태자비 전하! 태자께서 사라지셨⋯.”

허둥지둥 문을 열어젖힌 시종관 주임 서유빈의 걸음에 끼익 제동이 걸렸다. 덩달아 말문도 멎었다. 승관은 한숨을 짓씹으며 눈을 꾹 감았다. 강관이 긴급한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시강원의 고요한 교실 안, 승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던 정한이 벌떡 일어났다. 안도에서 비롯된 탈력감으로 전신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린 서 주임을 향해 못마땅하단 듯 눈을 뜨면서.

“유빈아.”

“⋯⋯.”

“눈치 좀 챙겨.”

아주 적반하장이었다.

혼례식이 치러지던 날엔 첫눈이 내렸다. 태자의 첫 결혼 상대에 대한 관심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창창한 스물둘의 태자가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그 잘난 외모에 대해 말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적잖았으니, 차라리 연예인이었음 좋았을 텐데 왜 하필 황족으로 태어나서 넘보지도 못하게 하냐는 댓글을 본 승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넘보고 싶어서 넘봤나. 그래도 자기는 복 받은 놈인 줄 알았다. 정한이 태자가 아니었어도 같은 마음이었을 터이니.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윤정한을 사랑하는 거지, 어떻게 황궁의 생활까지 사랑하겠어.

승관은 혼례를 치르자마자 미리 싸 두었던 짐을 들고 신행을 갔다. 말이 신행이지 그냥 일찍이 마련되어 있던 처소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 길엔 신혼집 보듯 승관의 부모님과 정한이 동행했고, 앞으로 엄마 아빠도 못 만나는 거냔 울먹임에 정한은 제 이름을 걸고 동궁으로 자주 불러 주겠다 약속했다. 태의라 명분은 충분하다면서. 대학이 아닌 시강원에서 입학례를 치른 승관은 전공 공부 대신 황실 교육을 받아야 했다. 수능만 치르고 진학을 포기한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두 계절 내내 황궁 바깥은 구경도 못할 제 운명이 더 이상의 새로운 시작을 반기지 않은 탓이 컸다. 무궁자재처럼 살아왔던 부승관은 이제 제국의 고등학생이 아니라 태자비였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역사에 기록되고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떠받들어 주는 신하들이 생겼단 의미다. 스승조차도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태자비의 이름을 멋대로 부를 수 있는 건 윤정한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제 비를 맘껏 보지 못하는 시기였다. 하루의 열두 시간을 꾸역꾸역 별궁이나 다름없는 시강원에 틀어박혀 보내야 하는 승관도 괴로웠지만 정실이란 사람을 반나절이나 뺏겨야 하는 정한도 나름 고역을 맛보고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시종관 몰래 침소를 빠져나와 승관이 있는 교실로 몰래 숨어들곤 했는데, 마침 딱 들켜 버린 거다. 정한을 눕혀 놓고 할당된 숙제를 풀어내기에 여념이 없던 승관은 서 주임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마침 잘 왔네. 전하 좀 데려가 줘. 좀체 집중이 돼야 말이지.”

“응당 그래야죠.”

고개를 꾸벅 숙인 서 주임이 다가왔다. 정한은 의외로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마냥 죽상을 하고 털레털레 멀어지는 뒷모습이 어딘지 가엾기도 했으나 이 광경을 강관에게 들키면 오늘 하루는 밤샘공부에 매여 아예 정한의 얼굴을 못 볼 수도 있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 그들에게 가장 큰 처벌이었다. 승관은 허리와 어깨를 펴고 목을 바로 세웠다. 지난 한 달 간 배웠던 기본 자세였다. 예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며 머리 위에 책을 올리고 걸음걸이를 교정하는 걸 실제로 하게 되리라곤 상상치도 못했건만. 승관은 반강제로 차츰 궁의 시간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야외 수업 하면 안 돼요?”

“언어를 배우는 데에 있어 바람과 햇볕은 필요치 않습니다, 전하.”

“바깥 사정도 좀 알아야죠. 여기 갇혀 있으니 알 수가 있나.”

“매일 뉴스 보시지 않습니까.”

“그거랑 그거랑 다르죠!”

저 대나무 같은 인간. 꿋꿋이 고개를 젓는 강관을 보며 승관이 원망스레 눈가를 붉혔다. 그래도 끄떡도 안 한다. 하긴 이런 공격에 넘어갈 인간이었다면 진즉 황제가 알아보고 승관에게 붙여 주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저 정도 고집은 있어야 황실 시강원 우두머리가 되는구나 싶었다. 체육 수업 때 바깥 공기 마시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애교도 안 통해, 동정심 유발도 안 돼, 협박도 안 먹혀. 방공호 같은 스승의 대쪽을 이길 자는 세계를 뒤져도 전무할 터였다. 이미 책 속의 꼬부랑 글씨는 외계어처럼 구불거려 해석은커녕 독음도 되지 않는 상태였다. 승관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거 혹시, 전하도 다 했던 건가요?”

강관이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자께서는 선황제의 명에 따라 본래 시강원의 교육을 받지 않는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대신 초등학교 시절부터 정규 교육 과정을 밟으며 평범한 아이들과 함께 자라 오신 것, 알고 계시죠?”

“그럼요.”

“전하의 언어 습관 또한 잘 아시겠네요.”

“아주 잘 알죠.”

“국본이신 당시의 태손께서 비속어를 허물 없이 써 대시니 폐하의 근심이 도를 넘어, 결국 선황제께서 전하를 주말마다 이곳 시강원에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현재 태자비 전하께서 하고 계신 것과 동일한 과정을요. 당시의 태자사太子師 또한 저였지요.”

그래도 쓸 땐 잘 쓰던데. 교육을 받을수록 습관이 고쳐진다기보단 본모습을 끄고 켤 수 있는 스위치만 발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마저도 윤정한다웠다. 어쩜 이런 사소함 하나 남다르지 못한 게 없었다. 참 재미있는 팔자였다. 꽉 막힌 환경에서의 성장이 불가피한 황족으로 태어난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강관은 하는 수 없이 책장을 덮었다. 다음 수업으로 넘어가야 할 시간이었고, 나간 진도는 목표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닥칠 일도 모르고 해맑게 통쾌해하던 승관의 낯이 이어 나온 스승의 말에 한순간에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오늘 다 나가지 못한 진도, 내일까지 꼼꼼하게 예습해 오십시오. 원어민 교사가 직접 물어볼 겁니다.”

그야말로 꼼수 부리려다 딱 말아먹힌 상황이었다.

더 이상 안 돼, 못 해. 승관은 링 안에 풀썩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글러브 끈을 풀 힘도 없었다. 이렇게 정신적 육체적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난 날엔 눈만 감으면 딱 기절해 버릴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대한을 갓 넘긴 바깥 세상은 아직 채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한 시간 가량을 운동장 달리기에 쏟은 데다 실내 체육관에서 체력 단련까지 하려니 실로 죽을 맛이었다. 굳건히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펀칭백을 보며 초점 잃은 눈만 깜빡였다. 승관은 저 모래 주머니에게 패배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쨌든 우리 둘 중 서 있는 건 쟤밖에 없으니까. 자존심이 상했지만 당장 일어날 힘도 없었으므로 소리 없이 제가 졌음을 인정하던 찰나였다.

“많이 힘드셨습니까. 오늘은 이만 할까요?”

“그러면⋯ 계속 할 생각이셨어요?”

저와 같은 운동량을 소화했음에도 여즉 멀쩡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승관은 별안간 좌절감을 느꼈다. 소싯적 슈퍼웰터급의 스트라이커였다던 체육 담당 강 태사는 전직 종합격투기 챔피언이었다. 아무리 은퇴 후라 할지라도 날려온 이름과 다져온 체력을 무시할 순 없었다. 흔들림은커녕 여유롭기까지 했다. 시계를 볼 힘도 없어서 천장만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몇 시입니까⋯?”

“일곱 시 반.”

대신 답해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정한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수업 다 끝난 것 같아서 데리러 왔는데, 왜?”

링 안으로 들어와 털썩 주저앉은 정한이 글러브를 대신 벗겨내 주었다. 승관은 도로 드러누워 그의 움직임에 고분고분 몸을 맡겼다. 정한은 익숙한 동선으로 핸드랩을 빨래통에 집어넣고 볕이 잘 드는 창가에 글러브를 벌려 놓았다. 도륵도륵 굴러가는 큰 눈동자가 얌전히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오늘도 열심히 했네 우리 승관이. 땀 때문에 축축할 텐데도 거리낌 없는 다룸이었다.

“저녁 식사 소화 다 됐겠다. 설마 스파링도 했어?”

“할 뻔 했어.”

“시작도 전에 녹다운 되셔서요.”

장비들을 정렬하던 스승이 말을 얹었다. 승관이 그를 만나기 전 정한은 미리 경고했었다. 체육을 맡은 강 태사의 수업 강도는 여느 태사보다 훨씬 강하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같은 난사를 겪어낸 자의 진실된 조언이었다. 하지만 각오하는 것 외에 별달리 대처할 방법은 없었으므로 승관은 여즉 끝없는 적응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건 스승님께서 하도 굴리신 탓이고요. 어찌 조금도 변한 게 없답니까.”

“지식만큼 중요한 것이 육체의 힘입니다. 그래도 태자 전하보단 체능이 좋으신 듯하여 다행인 걸요.”

“진짜요? 안 되는데. 내가 승관이 지켜 주기로 했는데.”

스승이 물러가고 나서도 두 사람은 한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정한이 승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생긋 웃었다. 하지 마아 다 젖었어, 칭얼거리며 밀어내는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기력을 되찾은 승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진짜 나 지켜 줄 거야?”

“그럼. 그러려고 결혼했잖아.”

그렇지. 우리 결혼했지. 기혼자임을 실감하는 순간은 매번 낯설었다. 열이 오른 두 뺨에 홍조가 피어났다. 정한이 승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우리 물 마시러 가자. 목적지는 체육관 앞 정수기도, 수돗가도 아니었다.

희수당 우측으로 나 있는 좁은 샛길 입구엔 작은 규모의 약수터가 있었다.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광천수가 도달하는 곳이지만 옛날에는 이걸 연못인 줄 알고 방치해 두었다더랬다. 삼십 년 전쯤 수질검사를 거쳐 약수터가 되었지만 하도 구석진 곳에 위치한 까닭에 동궁전에 거처하며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찾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분이 그렇듯 탄산이 강할 줄 알았던 물맛은 뜻밖에도 제법 정상적이었다. 겨울철의 기온에 잔뜩 시원해져 그냥 녹은 직후의 얼음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땀에 온통 젖었던 트레이닝복이 불어오는 바람에 말라가기 시작했다. 정한이 입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어 승관에게 걸쳐 주었다. 빨리 식은 몸은 감기를 불러들이기에 딱 적합한 상태가 된다면서. 조금만 마시고 얼른 들어가자. 그저 이곳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라며 미련 없이 싱긋 웃어 보였다. 참으로 오랜만의 정적 어린 여백이었다. 막연히 흐르는 고요도 둘 사이에선 시선이 흐르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었다.

“바로 씻을 거야?”

“그럼. 숙제도 많아서 하고 자야 해.”

“그거 내 방에서 해.”

“왜.”

“형 오늘 승관이랑 자고 싶어.”

승관은 힘없이 실소했다. 오늘 밤, 숙제를 다 못 끝내거나 잠을 설치거나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을 것 같은 예감이 버젓이 드는 와중에도 거절하긴 싫어서. 그래. 고개를 끄덕이면 희게 웃는 정한의 얼굴이 또 좋아서. 제 순애도 정말이지 대판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에 힘을 더 주고. D마이너 해 봐. 아니 그건 메이저잖아. 아직 하이 코드도 아닌데 이렇게 어려워하면 어떡하냐. 이 둘 차이가 뭔지는 알지? 정한의 침소로 향하던 승관은 복도까지 울려 퍼지는 기타 음률과 정한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전하 소신은 이런 데에 재능이 없습니다 진짜⋯. 들려오는 음성으로 보아 서 주임 같았는데 설마 교습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방문을 벌컥 열자 침대 앞에 앉아 울상으로 기타를 쥐고 있던 서 주임이 구세주라도 본 양 승관을 맞이했다.

“전하⋯! 저 좀 살려 주세요. 손가락이 아픕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승관아, 나 밴드 하고 싶어.”

팔자 좋다. 네 정부인은 지금 바깥 외출도 못하고 쎄빠지게 수업 듣다 왔는데, 한가하게 밴드?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서 주임이 슬금슬금 기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분위기 파악은 둘째치고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길 원하는 듯 보였다. 하여튼 악덕 상사 짓이 도를 넘었다. 이건 뭐 노동청에 고발을 할 수도 없으니 그저 안타깝기만 할 노릇이었다.

“애먼 서 주임은 왜 괴롭혀.”

“우리끼리라도 해 보려고 기타 한 번 연습해 보라고 했지. 근데 실력 보니까 가망이 없어.”

서 주임이 상처 받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정한을 쳐다보았다. 무정히 자기만의 고뇌에 빠져 있던 정한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섰다. 맞아, 좌익위가 대학 다닐 때 드럼 쳤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가려던 몸이 승관에 의해 강제로 앉혀졌다. 왜에 승관아. 예쁜 눈으로 쳐다봐도 소용없었다. 정한이 승관을 꼭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너도 노래 못 한 지 오래됐잖아. 지금 내 뒤에서 몸 둘 바 모르는 서 주임이 보이지도 않는 건지, 허리춤에 뺨을 비비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승관은 결국 손짓하여 그를 내보냈다. 이 전하가 진짜 사람 쪽팔리게 한다 그치.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옆에 앉아 속삭였다.

“형아. 어릴 때부터 이랬어? 이렇게 막무가내로 시종관들 익위사들 부려먹고 살았어?”

“그게 아니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어?”

“됐어. 이제 승관이 왔으니까 안 심심해.”

정한이 승관을 껴안은 채 그대로 널브러졌다. 침대 위 두껍고 푹신한 이불이 두 사람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가을 초입이나 되어야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저를 애석히 여겨 가장 좋아하는 걸로 답답함을 환기해 줄 셈이었다면 고맙지만 그 정도로 간절하진 않았다. 물론 바깥 세상에 미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승관이 사랑해 마지않는 존재에 우선순위는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다. 노래 없인 어떻게든 살아도 윤정한 없는 세상에선 조금도 살아가지 못하는 게 부승관인데. 감히 뭘 걱정해. 가설에서 오류가 나니 결론이 맞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우리 뭐 하고 놀까 승관아.”

“나 피곤한데.”

“잘 거야?”

“아니. 그냥 이러고 있을래.”

슬금슬금 팔을 올려 정한의 허리 위에 걸쳤다. 갑자기 서 주임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가뜩이나 미친놈 기질을 감추지 못하던 이 태자가 점점 고딩 하나한테 속절없이 빠져들더니 국혼을 기점으로 하여선 아예 대놓고 사랑에 돌아버린 꼴을 의도치 않게 내내 지켜봐 온 사람이다. 게다가 이 고딩마저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여서, 스스로의 세계에 윤정한밖에 없는 듯 살아가는 줄 알겠지.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가 봐도 눈꼴시렵긴 한데. 남이 보면 참, 얘도 얘지만 쟤도 쟤다 할 게 뻔했다. 하여튼 끼리끼리 사랑하는 데는 재주를 타고난 위인들이라면서. 우연한 시선 끝으로 벽에 걸린 큰 액자가 보였다. 구장복을 걸친 정한과 적의를 입은 승관이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혼례식 날 찍었던 사진이었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

“항상 비슷하지, 말투랑 자세 교육이랑 체력 단련까진. 그래도 몸이 익었는지 이젠 꽤 버틸 만해. 스페인어랑 프랑스어는 오늘 처음 했는데⋯.”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듯 정한의 표정에 공감대가 서렸다.

“존나게 어려웠어.”

영어 하나로도 골머리가 썩는 처지에 무려 6개 국어를 기대하는 게 맞냔 말이다. 제아무리 유엔의 공식 언어들이라 할지라도 서기 이천 년을 넘긴 요즘 시대에 통역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아날로그적으로 무리를 해서야 되나 싶었다. 그래도 하니까 되긴 되더라, 정한은 위로랍시고 그랬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타 좀 줘 봐. 스트레스나 풀게.”

정한이 덥석 일어나 기타를 건넸다. 스프러스 목재로 만들어져 상아빛을 띠는 어쿠스틱 드레드넛이었다. 이건 또 언제 구해놨대. 승관은 침착하게 조율을 시작했다. 건성으로 현을 퉁기는데도 기타의 음색은 굴러가는 옥구슬처럼 맑기만 했다. 이거 봐 서유빈 재능이 없는 거지 악기 잘못이 아니라니까. 정한이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서 주임은 기타를 탓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민하느라 한참 동안 허공을 노닐던 손끝이 이내 천천히 멜로디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느릿한 박자가 아름다운 선율에 깃들어 한층 나긋해졌다.

“이 노래 알아?”

고개를 젓는 정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One touch and you got me stoned, Higher than I've ever known.* 바로 이렇게 숨결이 맞닿는 거리에서. 흐드러진 석양의 절정이 두껍게 난 창을 투과해 번져올 무렵,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서로의 모습 위로 배경음악이 깔리면 터질 듯 부푼 심장이 멋모르고 뛰어댔다. 사랑이란 게 대체 뭐길래, 흠뻑 지친 하루 끝에서도 당신만 보면 한없이 애가 타고 벅차올라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고. 그러니 어딘지 모를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 생쯤 흘러가는 시간과 너에게 기꺼이 맡겨 보겠다고. 방 안으로 한껏 스민 노을빛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마저 무겁게 집어삼켜갔다.

I'm out my head, so into you And I don't know how you do it But I'm forever ruined by you,

By you.

눈부신 자상自傷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조력에 항복한 새벽녘의 윤슬처럼. 마치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노랫말은 뚜렷한 사랑을 발음하고 있었다.

*Justin Bieber - Off My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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