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년가약

우린 그곳으로 떠나


발 디딜 틈 없는 고철 탈것 속, 버스 손잡이를 꼭 쥐고 선 채 꾸벅꾸벅 졸던 승관은 돌연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번쩍 눈을 떴다. 용케 공간을 확보하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정한의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눈치를 보는 동시에 예의를 차리느라 목소리가 한껏 낮추어졌다. 네, 네 어쩐 일이세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 뭘 또 그런 걸. 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다행히 간단하게 용건이 끊겼다. 콩나물 단처럼 빈틈없이 끼어 선 승관은 공연히 조급해지는 마음에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도시의 핏줄처럼 길게 뻗은 노선도에서 집의 위치는 종점 부근이었다. 날짜로 보아 얼마 전 담근 김장김치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게 분명했다. 정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통보도 없는 야근이 일상이 된 지는 오래였다. 승관의 몸이 한쪽으로 휙 쏠렸다. 버스가 커브길을 돈 탓이었다. 저편에서 기회를 엿보던 누군가의 소지품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현관문을 열자 꼬릿하고 시원한 김치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간만에 사람 사는 집의 태가 났다.

“승관이 왔니?”

그녀는 마치 이 집의 주인처럼 능란한 동선으로 반찬을 정리하며 승관을 반겼다. 자식 걱정하는 모친의 마음씨는 여전했다. 가져온 건 김치뿐만이 아니었다. 무말랭이와 장아찌, 나물들도 종류별로 한가득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오셨어요.”

“우리 승관이 많이 먹고 다녀야지. 너 살이 더 빠졌어.”

피부도 까칠해졌고. 어머니가 걱정스레 승관의 뺨을 어루만졌다. 온종일 수술실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당연할 만도. 괜히 멋쩍어져 몸을 물린 승관이 부러 쾌활한 척 화제를 돌렸다.

“맛있겠다. 저 하나만 먹어 봐도 돼요?”

적당히 자른 김치 한 조각이 아삭하게 씹혔다. 초겨울이 한움큼 퍼지는 것처럼 시원했다. 손맛이 가득 담긴 매콤한 양념은 늘 그러했듯 승관의 입맛에 딱 맞았다. 배추의 상태도 아주 좋았다.

“맛있어요. 어머니 김치는 역시.”

“그래? 다행이네. 요즘은 좀 어때?”

아 이거 밥 당기는데, 텅 비어 있을 게 뻔한 밥솥을 흘끔거리던 승관이 씹다 말고 되물었다.

“네? 뭐가요?”

“기분이라든지, 몸 컨디션 같은 거.”

“아아. 완전 괜찮죠, 보시다시피. 걱정 마세요.”

혹시 원하시는 답이 있는 걸까. 눈치를 살폈지만 잡아낼 수 있는 게 전무했다. 그렇다고 또 직설적으로 묻진 못하겠어서. 슬금슬금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하다못해 즉석 밥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찬과 달걀 몇 알을 제외하면 죄다 인스턴트였고, 그마저도 한 손에 꼽을 만큼 가짓수가 적었다. 승관이 한껏 송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오실 줄 몰라서. 지금 반찬이 별로 없는데 계란말이라도 괜찮으세요?”

“아유, 됐다. 나는 이것만 전해 주러 온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시죠. 형도,”

“괜히 귀찮게 할 생각 없어. 너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형 오면 얼굴만 보고 가시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연신 사양하며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나오지 않아도 된다며 얼른 씻고 자라는 말씀 때문에 따라 내려가진 않았다. 승관은 늘 그러했듯 살가운 포옹과 함께 거듭 배웅을 했다. 얼른 들어가, 밖에 춥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다시 혼자가 된 승관은 엘리베이터가 안전하게 1층까지 도달하는 걸 보고 난 뒤에야 가볍게 돌아섰다. 대강 걸치고 나온 집업 속으로 시린 밤공기가 숨어들었다. 발소리만 울리는 텅 빈 복도엔 짙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승관의 목울대가 괜히 일렁였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스산한 분위기였다.

“악 깜짝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했던가. 지금 승관의 꼴이 딱 그 짝이리라. 승관은 태연히 방에서 나오는 정한을 보고 소스라쳤다. 뭐야? 언제 왔어? 비명에 묻혔던 물음이 긴급하게 터져나왔다. 여전히 심장께를 쥔 손을 떼진 않은 채였다.

“방금.”

부엌으로 걸어가던 정한이 승관을 흘긋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순간 열이 치밀어 정한의 뒤로 따라붙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내가 몇 번이나 전화했잖아.”

“못 들었어.”

“어머님 오셨다 가셨어. 인사라도 하지 그랬어.”

“으응, 이따 따로 전화할게 내가.”

막무가내로 튀어나오는 무심함에 승관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는 거들떠도 안 보고 반찬에만 호기심을 가지는 제 연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상해졌다. 무언가를 콕 집어낼 순 없었다만 최근 수시로 고개를 내미는 기시감과 설면함이 감정을 참으로 묘하게 만들었다. 분명 제가 알던 윤정한인데. 윤정한이 아닌 것만 같고. 얄팍한 정보를 주워든 누군가가 그의 탈을 뒤집어쓴 채 행세를 하고 있는 것만 같고.

가까이 다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번져오는 체취는 정한의 것이 맞았다. 몹시도 오래 써 와서 몸에 배이다시피 한, 둘만이 쓰는 샴푸와 바디로션의 향이었다.

“윤정한.”

“응.”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 있어?”

김치를 맛보던 정한이 승관을 돌아보았다. 무감한 눈길이 늦가을 찬바람처럼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승관은 저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왜 그래 진짜. 당장이라도 추궁하거나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혀끝에서만 맴돌다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승관아.”

“⋯⋯.”

“뭐가 불안해.”

형이, 그리고⋯⋯ 내가 불안해. 승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의국에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부스스 눈을 떠 보니 선욱이 옆자리에 앉아 떡볶이 포장을 벗기고 있었다. 넓은 공간 가운데서 뜯기는 비닐 소리만 요란했다. 그를 등지고 책상 위에 엎드리자 선욱이 승관을 불러왔다.

“안 먹냐.”

“어.”

“왜.”

“안 먹고 싶어.”

“너 점심도 걸렀다며. 배 안 고파?”

“어.”

선욱이 혀를 쯧 찼다.

“하여튼 내가 죽어도 이해 못 하겠는 인간 부류 두 가지. 하나는 박재열 하나는 부승관.”

박재열이 누구냐면 승관이 인턴이던 시절부터 독하기로 악명 높았던 CS 교수다. 인성과 별개로 실력은 뛰어났기 때문에 교수로서는 존경할 만 하다 쳐도 지금 선욱의 논점은 능력이 아니라 성격일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 인간이랑 동일선상에 놓인다고? 승관이 고개를 들고 선욱을 보았다. 선욱이 시선을 피하며 떡볶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자, 먹어 봐. 승관의 입을 흘긋 보곤 위치까지 맞추어 줬다. 이거 진짜 맛있어. 요즘 인기 많은 거래. 그새 떡이 분 만큼 어쩐지 기가 좀 죽어 있었다. 승관이 마지못해 입을 벌려 떡볶이를 받아 먹자 선욱은 이제 거의 울 지경이었다.

“몸 편하고 마음 편한 숙직실 침대 놔두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그러니 내가 신경이 쓰여 안 쓰여. 가뜩이나 티오도 눈곱만한 이 바닥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이 너 말고 더 있는 줄 알아?”

“내 코가 석 잔데 뭔 소릴.”

“많이 먹고 힘 좀 내란 뜻이야.”

“그래 고맙다. 떡볶이 맛있네.”

대답과 함께 시계를 확인한 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욱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가?”

“수술.”

“너 오늘 수술 있었냐?”

그러게. 있었네. 왜 있을까. 왜 세상엔 흉부외과 의사의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이다지도 많을까. 승관은 그렇다 할 회의를 느낄 새도 없이 의복을 정비하고 수술실로 향해야 했다. 하얀 붕대처럼 길게 뻗은 복도가 끝없이 멀게만 보였다.

해가 넘어갔다. 잔뜩 기울어진 달이 창 너머로 선명해졌을 때쯤에야 승관은 수술실 복도에 그대로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장장 아홉 시간에 걸친 고난이도 대동맥 수술이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했음에도 온 기가 다 빨리는 것 같았다. 핸드폰을 켰다. 새벽 3시 2분. 부재중 연락 0통. 긴장에 하도 깨물어 부푼 입술 사이로 크고 긴 숨이 흘러나왔다. 외롭게도 집에 돌아가는 길은 또 혼자일 터였다.

승관은 아파트 공동 현관을 눈앞에 두고 지하 주차장으로 걸음을 돌렸다. 엄두가 나지 않아 매번 실패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럼에도 월례행사처럼 주기적인 감행이었다. 차키를 조작하자 대답처럼 사이드미러가 열렸다. 그날 이후 버려지듯 한 자리에만 방치되어 있는, 정한과 승관이 반반씩 값을 지불했던 공동 소유의 차량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승관이 시동 버튼을 눌렀다. 차체가 덜덜거리며 약한 진동을 일으켰다. 문제 없이 잘 걸렸다. 주행을 하지 않았으니 배터리도 아직은 쓸 만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잡고 깜빡이를 켰다. 기어만 옮겨 놓으면 차는 출발할 것이다. 승관의 손이 한참 동안 기어 위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출발해 볼까. 조금만 앞으로 나가 볼까. 아주 조금만, 바퀴를 굴리는 건 괜찮을 텐데.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맴돌았다. 하지만 결심을 하기엔 턱없이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상념들이었다. 손을 물린 승관이 다급히 시동을 꺼 버렸다. 차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몇 차례 부릉거리며 으름장을 놓더니 금세 얌전해졌다. 핸들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비강으로 피비린내가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잔뜩 우울해진 채 귀가한 승관을 반겨 준 이는 놀랍게도 정한이었다. 승관은 시계와 정한을 번갈아 보며 눈을 의심했다. 왜 이 시간까지 이러고 있어? 저도 방금 온 거라는 말에 절로 한숨이 새었다. 하루를 48시간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그럼 푹 자고 일어나도 밤이려나. 그랬음 좋겠네.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어 그대로 소파 위에 늘어졌다. 정한이 자연스레 다가와 제 무릎에 머리를 받쳐 주었다.

“형.”

“응.”

“나⋯⋯ 운전을 못 하겠어.”

이런 날, 택시 타고 오기 싫은데. 내가 운전해서 오면 편하고 좋을 텐데. 도저히 못 하겠어.

“⋯⋯.”

“몇 번 앉아 봤어. 핸들을 잡고, 나가 보려고 했거든. ⋯⋯잘 안 돼.”

“⋯형이 데리러 갈 수 있었음 갔을 텐데. 미안해.”

승관이 정한의 다리에다 코를 박았다. 야심한 새벽에 외출복 차림으로 이러고 있는 저들 꼴이 참 사납게 느껴졌다. 눈을 붙일 새도 없이 곧 출근을 해야 하는 몸. 붙어 있을 수 있는 찰나를 뒤로하고 또다시 떨어져 하루를 보내야만 하는 직업인의 운명. 원인 모를 칭얼거림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순간이 조금이나마 영원했음 좋겠다는 것밖에 달리 바랄 게 없었다.

“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경찰이 됐다고 했지.”

“응. 어릴 때부터 아빠한테서 배운 게 그거라.”

“근데 그러다⋯⋯ 형이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

“그건 의사도 마찬가진데?”

목숨을 다루는 일은 그만큼의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라고, 정한은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며 싱그럽게도 웃었다. 그래서, 승관이는 형이 자랑스럽지 않아? 제 뺨에 내려앉는 입술의 느낌이 또 좋아서 승관은 고갤 저어 버렸다. 윤정한이 어떻게 안 자랑스럽냐. 형 같은 사람을 안 좋아하면 그게 사람이니. 설령 그게 반대였어도 난 사람이길 포기했을 거라고. 형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형 서에 선배들, 음료수 같은 거 사다 드리면 좋아하시려나.”

“안 그래도 돼. 우리 선배들 음료수 안 좋아해.”

음료수 싫어하면 커피라도? 정한이 번잡스레 손을 내저었다. 그럼 오랜만에 인사라도 드리고 갈까 했지만 거절 의사가 돌아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젠 보다시피 나도 괜찮으니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라면서. 네가 인사 못 드린 몫까지 내가 더 잘 할게. 다정하기 짝이 없는 어름에 승관은 잠시 주저하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이 걱정되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승관이 보는 정한은 멀쩡했다. 승관의 앞에서 이렇게 살아 숨쉬며 제 이름을 불러 주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어떤가 보자, 우리 승관이.”

돌연 의국에 쳐들어온 진영이 승관의 옆에 털썩 앉더니 볼을 조물락거려 왔다. 한두 번도 아닌 상황이라 승관의 시선은 읽던 책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도 않았다. 진영의 손가락이 가끔 제 시야를 가릴 때마다 고개를 피하긴 했어도. 귀찮은 티를 아무리 내어 봤자 떨어질 성정이 아니었으므로 포기한 지도 오래였다. 정신의학과 펠로우 진영은 승관과 대학을 함께 다닌 동기이자 정한의 사촌 동생이었다. 승관은 스물하나 예과생 시절, 과제를 함께 하러 진영의 집에 갔다가 정한을 처음 만났다. 아 승관이는 형 처음 보겠구나, 인사해. 진영이 승관과 정한을 차례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저보다 세 살 많은 형이고, 경찰대학을 다니고 있다더랬다. 승관은 무감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정한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이후론 별달리 마주칠 일이 없었다. 진영의 방 안에서 함께 늦은 시간까지 자료를 찾다 곧바로 귀가했으니. 나갈 땐 먼저 잠자리에 든 듯하여 보지도 못했다. 일회성 만남이라 넘겨짚게 됐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실수로 진영의 집에 두고 간 전공 교재가 정한을 통해 승관에게 돌아왔다. 카페에서 만난 탓에 커피까지 얻어 먹었다. 빚 지고 사는 건 딱 질색인 승관이 갚으려 했지만 현금은 별로라며 다음에 맛있는 걸 사 달라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다음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자꾸, 자꾸 만났다. 여기 학식이 궁금했다며 굳이 승관의 학교까지 찾아와 점심을 먹고 가기도 하고, 진영과 둘이서 과제하는 걸 옆에서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보다 못한 진영이 바락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아 윤정한 진짜 걸리적거려 죽겠네 너 부승관 좋아하냐? 필터링 따위 거치지 않은 호통에 흠칫한 승관이 얼어붙어 있을 무렵 정한은 승관을 보며 예쁘게, 그리고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나 들켰네 승관아.

아무튼, 진영은 승관이 소아외과와 흉부외과 사이에서 심각하게 전공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정신의학과로의 길을 소신 있게 고집했던 녀석이었다. 사람이 말야, 뭐든 이 멘탈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해. 그러면 일단 모든 질병의 구십 퍼센트는 제끼고 가는 셈이라고. 그래서인지 그날 그 사건 이후 승관의 건강을 누구보다 염려해 주었던 이 또한 진영이었다. 예약 환자 진료만 끝나면 승관이 있는 B동까지 부지런히 걸어 찾아오곤 했다. 노력과 정성은 귀히 여겨줄 만했으나 언젠가 시간을 내어 상담을 해 보자는 제안은 한사코 거절했다. 사람 귀찮게 하는 데에는 타고난 기질을 가진 선수라고, 승관은 생각했다. 자기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성가시게 하냐는 이유였다.

“좋은 집 안 가고 왜 여기로 퇴근을 하냐 너는.”

“내가 데려다 줄게.”

“방향도 정반대면서 또. 기름값 좀 아껴.”

“너야말로 교통비 지출 안 아깝냐? 버스비도 오른 판국에 공짜 택시 두고 뭔 낭비야 이게.”

“택시?”

응, 택시. 흡족한 얼굴로 갸우뚱한 진영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내가 쟤를 어떻게 말릴까. 고개를 저으며 외투를 집어들자 승관을 훑은 진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승관아. 힘들면 언제든 말해.”

“항상 힘들다, 너 때문에.”

“그런 거 말고.”

“뭐, 연애상담이라도 해 주게?”

“네가 원하면 뭐든.”

승관이 코트를 입다 말고 진영을 보았다.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들면 또 속절없이 백기를 들게 된다. 가방을 챙겨든 승관이 진영을 일으켰다. 어디, 주차장으로 가면 돼? 더 있다간 잔소리가 또 이어질 것 같아 후다닥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승관을 천천히 따라잡는 진영의 표정엔 못내 켕기는 기색이 깔려 있었다.

나 왔어, 승관은 문을 열자마자 습관적으로 정한을 불렀다. 집안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시선이 한발 뒤늦게 신발장 아래로 향했다. 밤이 늦어 먼저 자는 줄 알았는데. 벗어 둔 신발조차 없었다.

“형 아직 안 왔나 보다. 들어와.”

진영이 쭈뼛쭈뼛 들어왔다. 야 네가 경찰이랑 연애하지 말란 말 들었어야 했나 봐, 실없이 농담을 던져 보았지만 진영은 집안을 둘러보느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머쓱해진 승관이 잰걸음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었다. 정한의 집에서 받은 반찬을 제외하면 마땅히 먹을 게 없었다. 매일 이랬던 거 같은데. 집에서 끼니를 때울 일이 적어 미뤄둔 탓이 컸다. 두 사람 모두 최근엔 대부분 야근과 외근을 번갈아 했으니. 덕분에 누군가를 대접해 줄 성의는 진즉 글러먹은 성 싶었다. 미안, 먹을 게 없다. 치킨이라도 시켜 줄까? 죄스럽게 말하니 진영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너한테 뭘 얻어 먹을 생각도 없었다면서. 비꼰다기엔 너무도 담담한 어투였다.

“⋯⋯형이 요즘 늦게 와?”

“그러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칼퇴였는데.”

“근황은 어떻냐.”

“뭐가?”

“너네 둘.”

갑자기 기저에 깔린 듯한 진영의 목소리가 낯설어 승관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여전히 정한은 승관에게 사랑을 말했지만 이따금 생경해지는 이 느낌을. 지뢰밭을 걷듯 어느 지점에서 터질지 모르는 이 이상하고도 소름 끼치는 감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오려는 문장을 삼키고 무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승관을 바라보던 진영이 최후의 카드를 내미는 플레이어처럼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캘린더를 보며 내일 스케줄을 탐독한 그가 두 시쯤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별달리 잡힌 수술도, 진료도 없음을 상기한 승관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A동 숙직실로 와. 내 방 알지? 212호.”

“갑자기 왜.”

“그냥 오라면 좀 와. 줄 게 있어서 그래.”

진영은 그렇게 당부하고 금방 돌아갔다. 텅 빈 집안에서 홀로 멍해진 승관이 그대로 서 있을 무렵, 얼마 되지 않아 정한이 도어락을 열고 들어왔다. 거실의 간접등만 켜 놓았던 탓에 어두침침한 기운이 현관 앞에서 으슬하게 감돌았다. 쪼르르 달려간 승관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오는 길에 진영이랑 안 마주쳤나 보네.”

“왔다 갔어?”

“어, 얼마 안 됐어.”

그렇구나. 보고 싶었어 애기야,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정한이 쏟아지듯 승관에게로 안겨 왔다. 승관도 좋아 마주안았다. 바깥 공기를 잔뜩 머금고 들어온 까닭인지 느껴지는 향이 서늘했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을 시킬 작정인지. 공연히 불안감이 들어 약속한 시간에 차라리 다른 스케줄이라도 생겼으면 했던 승관의 기도가 무색하게도, 지독한 평화로움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이렇다 할 표시는 안 냈어도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선욱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일부러 느려터진 속도로 올라오다 진영의 전화를 받았다. 알았어 간다 가. 돌아서는 발걸음이 질질 끌렸다.

“이게 뭐야?”

“비타민.”

승관은 대뜸 내밀어진 알약 하나를 믿을 수 없다는 양 쳐다보았다. 그러자 되레 자존심이 상했는지 돌아오는 언성이 높아졌다.

“그 표정 뭐야?”

“생전 비타민은커녕 건강보조제 하나 안 챙겨먹던 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야, 나 의사야.”

“겨우 한 알로 뭔 효과를 봐?”

“부족하면 더 줄 수 있어.”

됐다, 승관이 헛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잊었나 본데 나도 의사야. 비아냥거리고 싶은 걸 겨우 삼키고선 비타민이라 칭해졌던 그 약을 받아들었다. 하얀 타원형의 정제였다. 진영이 덧붙였다. 그건 숙면을 취할 때 가장 효과가 크게 나타나니까 꼭 자기 전에 먹으라고. 일할 때 절대 먹지 말란 말을 에둘러 하는 거였다.

오는 내내 약통을 흔들어 보며 관찰했다. 노려보면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을 게슴츠레 뜨게 됐다. 승관이 통을 흔들 때마다 알약은 어항 속 금붕어처럼 좁은 공간 속을 바지런히 오갔다. 마음만 먹으면 성분을 조사해 볼 수도 있었지만 먹으면 안 될 약이리란 의심은 들지 않았다. 진영은 정한만큼이나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혹시 수면제인가. 승관더러 얻다 식욕과 잠을 동시에 팔아먹기라도 했냐며 걱정을 일삼던 진영이 떠올랐다. 그래도 약에 의지할 정도까진 아닌데. 저도 모르게 쯧 혀를 차자 마침 근처를 지나던 선욱이 자석처럼 승관의 옆으로 붙어왔다.

“그거 뭐야? 네 거야?”

“받았어. 비타민이래.”

“세상 별일이다. 부승관이 누구한테 비타민 챙김 받는 꼴을 다 보고.”

“그게 아닐 수도 있어.”

“딱 비타민처럼 생겼는데? 누가 줬길래?”

“윤진영.”

“윤 선생님이 주신 거면 뭐, 먹고 죽을 건 아니네. 그냥 좋은 거다 생각하고 먹어.”

승관이야 그렇다 치고 선욱에게 왜 진영에 대한 신뢰도가 하늘을 뚫고 치솟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결국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승관은 그날 밤 잘 준비를 마치자마자 물과 함께 한 알을 삼켰다. 정한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같았다. 진영이 줬다고 하니까 정한의 표정이 왠지 조금 가라앉았다. 먼저 잘게, 들어가는 정한의 뒷모습에 대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은 같이 자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약효는 좋았다. 수면제라 해도 곧바로 믿어 볼 만큼 잠이 쏟아졌다.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곯아떨어진 승관은 밤새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섭고 아픈 꿈이었다. 소스라쳐 눈을 떴다. 새벽 네 시. 창 밖은 거센 빗줄기에 가려져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폭우가 몰고 온 전염병처럼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 누군가 몸을 짓누르는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전화로도 병가 제출이 되나. 해 본 적이 없어 막막해졌다. 이 몸을 끌고 수술실에라도 들어갔다간 큰일을 치를 것 같았으니까. 잠꼬대처럼 정한을 불렀다. 정적만이 감도는 집안에 갈라진 승관의 목소리만이 낮게 울렸다. 이윽고 끼익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다. 눈앞에 정한이 보이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승관이 아이처럼 두 팔을 벌렸다. 자는 동안 열이 올랐는지 내쉬는 숨이 뜨거웠다. 승관아, 정한이 황급히 승관을 안아들었다.

“형이⋯ 혼자 재워서 미안해. 우리 승관이 혼자 둬서 미안해.”

펄펄 끓는 열 때문인지 방 한구석이 어지러이 휘었다. 바깥의 비가 제아무리 강하게 쏟아진다 한들 가장 가까이 들리는 목소리는 정한의 것이었다. 승관은 무력히 안긴 채로 심박을 감각했다. 깊은 곳 어딘가가 자꾸만 견딜 수 없이 쑤셔왔다. 잡아 쥐지 않으면 숨조차 못 쉴 것 같아서 손을 올려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이건, 고통보다는, 굉대한 슬픔에 가까워서. 승관이 울음에 잠겨 말했다.

“⋯이상해. 여기가 너무 아파. 아깐 어지러워서 몸살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여기, 심장이 아파.”

목놓아 울고 싶고, 슬퍼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어. 정한이 가만히 승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승관의 감긴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비 때문에⋯ 비가 와서 그래.”

비가 와서. 막아 내기도 힘든 센비가 내려서. 그래서 그래. 두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나아질 일인데, 이 세상에선 그러지도 못하니까. 승관은 정한의 차분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울기만 했다. 주먹을 쥐어 심장 부근을 콩콩 때려 보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정한은 그런 승관을 끝까지 묵묵히 끌어안고만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지나갈 거라는 것처럼. 그러니 편히 숨 쉬라는 듯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승관아. 괜찮아, 여기 형 있지. 우리 승관이 지켜 준댔잖아, 형이. 그치.”

“⋯⋯응.”

“형은⋯ 앞으로도 영원히 승관이 옆에 있을 거야. 어떤 일이 생기든, 생길 것을 걱정하든, 계속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무섭고 겁이 나도 버텨낼 수 있거든. 그거 되게 멋있는 건데, 알고 있어?”

나지막한 사랑의 음성이 승관의 귓가로 달콤하게 흘러들어왔다. 승관이 정한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익숙한 체취가 기분 좋게 풍겨왔다.

“그런 게 어딨어.”

“그럼, 승관이가 싫다 하면 그땐 갈게. 이건 어때.”

정한이 장난스레 생긋 웃었다. 그건 또 서러웠다. 승관이 또다시 흑, 하고 울음을 참았다. 어어 알았어, 알았어. 당황한 정한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바보야. 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이해 안 돼?”

“⋯⋯.”

“우리 승관이도 형 나이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어른 행세는. 승관의 입술이 화난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승관은 비가 퍼붓던 사흘 내내 꼬박 앓았다. 두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진통제를 먹어도 가시지 않았다. 끔찍한 꿈은 끝없이 이어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동일한 장면이 계속 반복됐다. 종일 악몽에서 뒤척이다 깨기를 반복했고, 그럴 때면 낮이라 정한도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서 울다가 또다시 기절하듯 잠을 잤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승관은 불 꺼진 천장을 향해 눈만 깜빡였다.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핼쓱해진 얼굴이 창백했다. 고개를 돌리다 무심코 책상 서랍을 보았다. 저기에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래 손대지 않아 생활 패턴에서도 잃어버린 파편 취급을 받던 제 책상이었다. 돌연 강박 같은 호기심이 들었다. 집착처럼 치민 궁금증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빙글 돌았지만 당장 열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비틀대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일기장 한 권만이 고이 놓여 있었다. 작년 생일날 정한이 선물로 주었던 일기장이었다. 승관은 그 감색 표지를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어떤 기억들의 집합체. 지나간 감정이 모여든 창고. 손때는 충분히 묻어 있었지만 닿은 온기가 이미 식은 지 꽤 되어 차가워진 표지에, 섣불리 손을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버릇처럼 써 오던 일기였다. 무수한 하루들의 일과와 찰나의 순간들, 얕게 느꼈던 기분까지 빠짐없이 기록해 놓던 거였다. 승관은 그제야, 언젠가부터 제 뇌리에 우물처럼 고여 있던 빈 공간의 존재를 서서히 감각하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그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 속 어딘가를 누군가 일부러 오려내어 간 것처럼, 흩어지고 균열된 시간들이 새까맣게 침전된 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또다시 머리 안쪽이 쿡쿡 쑤셨다. 승관은 기어가듯 침대 맡으로 다가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물을 들이부어도 해갈되지 못할 갈증에 숨이 끊겨 버릴 것 같았다. 목이 바싹 말라갔다. 연락처를 뒤지던 손가락이 기어이 한 사람을 찾았다.

[⋯⋯집이야?]

“⋯응.”

[바로 갈게.]

진영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의 말에 바보같이 안심이 되고 힘이 빠져서 눈물이 비져나왔다. 정한이 보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럴까. 가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만들어낸 수십 개의 아바타들이 아무도 모르는 새 자아를 찾아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왜소한 푸른 별의 자전은 그깟 방향쯤 바뀐다고 우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까마득한 암흑 속 유일하게 세포를 지니고 살아가는 별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알아줄 수도 없는.

도어락이 열렸다. 비번도 안 바꿨네, 진영이 혼잣말을 하며 들어오는 소리가 버젓이 들렸지만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비밀번호는 승관이랑 내 생일을 더하면 나오는 숫자라고, 예전 세 사람이 술자리를 가졌던 어느 날 정한이 자랑하듯 알려줬었다. 당시 승관은 술기운과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고 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질색을 했더랬다. 미안한데 진짜 하나도 안 궁금했던 정보거든?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거 신경안정제니까.”

승관의 미간이 좁혀졌다.

“부작용일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그럼 내가 왜 이래.”

“몸살이야.”

⋯비가 와서. 진영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승관이 앓으며 뒤척였다. 더 이상 추궁하거나 캐물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잦아들긴 했어도 바깥에선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어지러워. 못 일어나겠어.”

“형 보러 가자.”

승관이 멈칫하며 진영을 쳐다보았다. 형을 갑자기 왜⋯? 어리둥절한 되물음에도 꿋꿋이 몸을 일으켜 준 진영은 깔끔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오라는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멀미 증상을 호소하는 투정은 들어 주지도 않았다. 진영은 승관을 차에 태운 뒤 내비게이션 목적지도 설정하지 않은 채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선 아무런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표정을 읽을 줄 아는 만큼이나 숨길 수 있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승관은 한동안 진영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손가락 한 마디 가량 열어 놓은 창 틈으로 바깥바람이 들이치자 요동치던 속이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았다. 승관이 다시금 눈치껏 진영을 흘끔거렸다.

“진영아.”

“왜.”

“우리 어디 가는데.”

“⋯⋯.”

“형 지금 일하는 중일 텐데. 어디 있을 줄 알고,”

“네가 형을 봐야 정신을 차릴 거 같아서.”

승관의 말을 끊어낸 진영이 핸들을 고쳐 잡았다. 언성 한번 높이지 않았는데 괜스레 크게 야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조금 울적해졌다. 도착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진영이 알맞은 자리에 차를 세웠다. 빈번히 와 보았던 사람처럼 군더더기 없는 능숙한 주차였다.

그새 하늘이 개어 있었다. 홍수라도 일으킬 것처럼 며칠 내내 가득 새까맣던 비구름은 그새 사라져 온데간데 없었다. 창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알고 온 장소라기엔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겁을 먹고 자리에서 버티던 승관은 진영의 소리 없는 채근에 우물쭈물 따라 내렸다. 정갈한 건물은 언뜻 보기에도 매우 커 보였다. 진영은 승관의 손을 잡아끌고 걸었다. 건물의 규모와는 달리 넓지 않은 로비엔 건물의 외모처럼 단정하고 소박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극소수 오가고 있었다.

“진영아. 여기 어딘데.”

“조용히 하고 따라와.”

“아니, 형이 왜 여기 있⋯⋯,”

모퉁이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서자 승관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그제야 그 건물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영이 한 자리에 멈추어 섰다. 말을 잃어버린 승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쪽을 보았다. 그 자리엔 정한 대신 작년 여름에 찍었던 두 사람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심장이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 끝없이 망가져 가던 승관의 의식이 마침내 어그러졌다. 안개 속 달빛처럼 잔뜩 이지러져 시야마저 흐릿하게 변했다. 주먹을 강하게 쥐어 손톱의 감각이라도 느껴 보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허벅지를 때렸다. 충격이 미치자 다리가 휘청였다. 그러는 중에도 승관의 시선은 끝없이 한 공간만을 배회했다.

“승관아.”

상자 위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다.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몸이 굳어 그럴 수가 없었다.

“⋯⋯.”

故윤정한.

승관은 멍하니 손을 뻗어 유리 너머 정한의 이름을 매만졌다. 닿지 않았다. 양감을 느껴야 실감이라도 할 것 같았는데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형이 왜 여기 있어. 소리쳐서라도 묻고 싶었다. 진영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형⋯⋯ 이제 그만 보내 주자.”

— 그래서. 형이랑 영상통화 같은 건 했어?

— 했지. 잠복근무한다고 조명도 다 꺼진 차 안에서.

선욱이 혀를 내둘렀다. 목소리 아니었음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판국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사랑한다곤 하더라. 선배고 후배고 다 있는 데서. 어이가 없어서 진짜. 승관이 헛웃음을 지으며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 ⋯⋯그래도 네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형이 좀 어려운 일 하냐.

— ⋯⋯.

— 하나는 온종일 환자 수술하고 하나는 온종일 범죄자 잡으러 다니고. 환상의 커플이야 아주.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환상이고 뭐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차라리 주말부부나 롱디가 백배 나을 거 같지. 살림도 합친 데다가 직장마저 같은 도시 내에 있건만 얼굴 보는 날이 일 주일에 세 번도 안 된다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가뜩이나 부스스한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으으, 앓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자판기 앞에 궁상맞게 쭈그려 앉아 다음 스케줄을 상기했다. 곧 중환자실 회진을 돌아야 했다.

— 좋은 저녁입니다, 아버님!

오는 길 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얼굴 근육을 푼 승관이 중환자실 문을 열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늘 그랬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승관은 여느 때처럼 바이탈을 확인하고 호흡을 살폈다. 안도의 미소가 사르르 번졌다. 잠들어 있는 손을 들어 주물렀다. 퍼져오는 삶의 온기가 만연했다.

— 수술 부위 회복도 잘 하고 계시고. 컨디션도 좋으시네요. 이제 눈만 뜨시면 되는데.

아버님 정성껏 돌봐 드린 의사 사위 얼굴 봐 주셔야죠, 칭얼거리며 안기고 싶은 마음을 손장난으로 대신했다.

— 어서 쾌차하세요. 정한이 형은 지금 며칠째 잠복근무인지 모르겠어요. 얼굴 까먹을 지경.

— ⋯⋯.

— 아버님 다치게 한 강도살인범 그놈이요. 형이 아버님을 닮아서 화나면 되게 무서운데, 지금 그 상태로 그 새끼 잡으러 다니고 있어요. 저도 뭐 말리진 못하겠으니까. 무사히 잡고 나면 좌천 좀 됐음 좋겠네요, 어디 안전하고 조용한 시골 파출소 같은 데로. 아님 아예 막 높은 쪽으로 발령 나서 사무만 봐도 좋겠다.

깊은 잠에 빠진 얼굴은 온화한 빛을 띤 채 고요했다. 말을 마친 승관이 헤실헤실 웃었다. 바빠서 문자 해도 답 없는 정한이나 투정 부려도 대답 안 돌아오는 아버지나 별반 다를 바는 없었으니 이질감이 느껴질 건 아니었다. 농담처럼 덧붙였다. 깨어나시면 정한이 형 혼 좀 내 주세요. 애인한테 겁나 소홀해요.

끝나면 내려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어ㅎㅎ   오후 8:17

퇴근을 앞두고 도착한 문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바로 전화를 걸자 정말 병원 앞이랬다. 웬일이래. 아버님한테 이른 거 들켰나. 보기 드문 강력부 형사의 칼퇴근이었다. 승관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오후까지만 해도 회진은커녕 제가 입원실에 눕지만 않으면 다행일 몸 상태였으나 정한의 연락 한 통에 싹 나은 기분이었다. 조수석에 올라 방긋거리자 정한이 승관의 뺨을 감싸쥐었다. 따뜻한 바람 냄새가 났다. 보고 싶었어? 응, 보고 싶었어. 매일 봐도 매일 보고 싶은 사람인데 이틀이나 만나지 못했으니 상사병 앓기 직전이었던 건 당연지사였다.

— 형아.

— 응?

— 우리 결혼하자.

아버님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결연한 승관의 표정에 정한이 푸핫 웃었다.

— 갑자기 왜.

— 떨어져 있어도 불안하고, 지금 이렇게 옆에 있어도 불안해서.

— 결혼하면 안 불안해?

— ⋯⋯.

— 승관이가 안 불안하다면 그렇게 하자.

승관이 잠시 유심해졌다. 다행히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현실이 적시됐다. 아무래도 혼인신고서 쓰기 전에 정한이 사직서부터 내는 게 맞을 거 같았다.

— 우리 모아둔 돈 많아?

— 결혼식 올릴 정도는 돼.

그럼 평생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단 의미다. 무엇이 좋을까.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과, 함께 살다 결혼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상대는 윤정한이었다. 일단 집 가자, 돌아가서 얘기해. 정한이 핸들을 돌리는 시늉을 하며 능글거렸다.

— 집 말고 구청으로 갈까?

— 아 됐어! 빨리 집, 빨리.

놀리는 게 얄미워서 정한의 어깨를 팍 때렸다. 아!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답지 않게 흘러나온 신음에 두 사람 모두 놀라 잠시 정지됐다. 이윽고 치미는 불길함에 겉옷을 벗기려 하자 정한이 승관의 손을 잡아쥐었다.

— 괜찮아.

— ⋯잔말 말고 손 놔.

— 그냥 멍 든 거야. 어제 뛰다가 좀 굴렀어. 집에 가서 파스 붙여 줘.

정한이 해맑게 웃어 보이며 액셀을 밟았다. 승관이 뭐라 화를 낼 새도 없었다.

집에 와서 보니 과연 온통 멍투성이였다. 그 어혈들은 누군가에게 맞거나 싸우다가 생긴 게 아니었다. 생김새나 위치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넘어져서 구르다 생긴 멍들이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승관이 정한의 맨몸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왼쪽 뺨과 귓가에도 푸르스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절로 험한 말이 짓씹혔다. 시멘트나 아스팔트 도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탓을 하자면 넘어진 제 애인의 몫일 텐데, 정한에게 책임을 묻고 싶진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숨을 삼켰다.

— 이럴 거면 그만둬.

— 그만두면?

— 나랑 멀리 떠나자.

— ⋯⋯.

—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오래 살자.

오래, 살자. 작은 혀 위에 얹기에 몹시도 무거운 네 글자였다. 승관을 향해 돌아앉은 정한이 천진하게 물었다.

— 이거 청혼이야?

— 맘대로 생각해.

승관의 몸을 껴안은 정한이 어르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번 사건만 끝나면 그만둘게. 좋아하는 곳에 가서 살자. 볼과 목, 귀, 구석구석 맨살이 맞닿았다. 숨이 금방 거칠어졌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도 같았다. 사랑에 미쳐서, 세상이 종말의 징조를 부르짖어도 알아채지 못할 날이. 필연적으로 부승관이 윤정한의, 윤정한이 부승관의 전부가 되고 말아버릴 날들이.

정한이 여권 사진을 찍자고 했다. 승관이 사진관을 알아보려 하자 직접 찍자며 카메라를 들고 왔다. 반신반의했지만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여 그의 의견에 따랐다. 은박지를 대충 덕지덕지 붙여 만든 반사판을 거치하고 흰 벽 앞에 의자를 두고 앉으니 그야말로 우스꽝스런 야매가 따로 없었다. 스스로도 이 꼴이 웃겨서 두 사람은 한바탕 웃었다. 이것도 다 한때의 추억이니 남겨 놓는 게 좋다고, 정한이 비뚤어진 삼각대를 바로 세웠다.

— 승관이는 여행 가면 어디로 가고 싶어?

— 너무 많은데. 하나만 말해야 해?

— 그 중에 제일 가고 싶은 곳.

— 헝가리 부다페스트! 진영이가 거기 진짜 좋았댔어.

— 들었어. 나도 거기 가고 싶었는데.

— 프랑스도 좋고, 이탈리아도 좋아. 내친김에 유럽 일주를 할까? 나는 형이랑 가면 어디든 다 좋아.

그 말을 하고 살짝 웃었는데, 정한은 승관이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덜컥 셔터를 눌러 버렸다. 아 뭐야! 당황한 승관이 허둥지둥 카메라로 달려갔지만 이미 사진은 찍힌 뒤였다. 잽싸게 촬영본을 보던 정한이 해사하게 웃었다. 승관아 거짓말 아니고 진짜 잘 나왔어. 승관은 정한에게도 똑같이 복수해 줄 요량으로 이를 갈며 카메라를 확인했다. 하지만 보이는 결과물은 정말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을 수준이었다. 희미하고 자연스러운 미소와 딱 맞는 어깨의 각도까지. 정한은 승관에게 그런 진부한 질문들을 하며 분주히 앵글을 조정했던 모양이었다.

— 승관이는 내가 진짜 좋은가 보다.

— ⋯⋯.

— 내 얘기 할 때 제일 예쁘다.

사람 할 말 잃게 하는 데는 선수였다. 정한은 그 엄청난 말을 하고서도 한번 씩 웃고 말았다. 오케이 그럼 내 차례! 후다닥 의자에 앉더니 승관에게 손짓을 했다. 어? 어. 승관은 잠시 멍하다가 서툴게 카메라를 잡았다. 삼각대에 꽂는 것만도 고난이도였다. 결국 정한이 손을 더했다. <여권 사진 샘플>을 수없이 참고해 가며 각도를 맞추었다. 피사체는 승관을 보며 내내 예쁘게 웃었는데, 승관은 정한과 달리 십수 번은 셔터를 눌러야 했다.

어쨌든 무사히 사진을 찍은 두 사람은 인화까지 마친 뒤 여권 발급까지 일사천리로 끝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직 일이 남아 있었다. 정한이 휴가를 내기에 강력팀은 너무나도 바빴고, 승관 또한 그 즈음 이상하게 환자가 몰려 눈코 뜰 새가 없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꿈처럼 각자의 서랍 속에 여권을 가두어 두고 과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성과 뒤에 따라올 대단한 선물에 잔뜩 기대감을 품고서.

서로가 상상치도 못할 업무량에 시달리다 집으로 오면 둘 중 한 명은 이미 외출복 차림으로 소파나 침대에 헝클어지듯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의 겉옷을 벗기고 똑바로 이불을 덮어 주는 것이 상대의 할 일이었고, 이는 과반수 승관의 몫이었다. 승관은 부지기수적으로 그 옆에 앉아서 잠든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저 안에 숨겨진 눈동자에 대한 갈망도 약간은 섞인 채로. 놓기 싫어 따뜻한 손을 꼭 맞잡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밤이 아주 깊게 물들면 그제야 몸을 일으켜, 정한의 이마나 뺨에 도장 찍듯 입을 맞추며 들리지 않을 인사를 했다. 사랑해, 잘 자.

— [수술 네 번?]

정한이 경악하듯 되물었다. 그 병원엔 흉부외과 의사가 너밖에 없다니? 그러는 저 또한 강력팀 형사가 저뿐인 것처럼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는 처지였으면서 잘도 뻔뻔스러웠다. 그래도 집도의 아닌 게 어디냐며, 그저 교수 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포지션이라 괜찮다며 정한을 안심시켰지만 사실 마음 같진 않았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이러지도 않았으니. 승관은 전화를 끊고서도 해갈되지 않는 막막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의국 의자와 바닥을 잇는 다리처럼 잔뜩 기울어져 뻗어 있노라니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복 차림의 진영이었다.

— 왜 또 죽상이야? 설마 당직?

— 약올리려고 왔음 가라.

아이 들켰네, 진영이 뒷머리를 긁으며 승관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봉지 하나를 승관 쪽으로 쭉 밀어 주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볼 기운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영은 언제나 그랬듯 승관의 컨디션을 재깍재깍 잘도 알아챘다. 누굴 꼭 닮아서는.

— 짜장면 포장해 온 거야. 불기 전에 먹어. 형은?

— 일하는 중.

전화도 맘껏 못 하겠네, 어쩌냐. 진영이 쯧쯧 혀를 찼다. 괜한 동정이고 뭐고 우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윤정한이 보고 싶었다. 서에 있다면 당장 달려가고도 남았을 텐데. 승관은 지금 정한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 야, 너 헝가리 교환학생 갔던 거 기억나냐?

— 나기야 나지.

갑자기 그때 얘기는 왜. 진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의자에서 등을 떼고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 형이랑 여행 가기로 했거든. 거기로 갈까 생각 중인데, 괜찮은 볼거리 있음 추천 좀 해 달라고. 부쩍 심해진 기복이 여실히 드러나자 황당한 눈으로 승관을 보던 진영이 이내 가볍게 웃었다. 하여튼, 사랑에 미친 새끼. 승관은 대꾸도 없이 짜장면을 쭉 빨아당겼다. 다행히 아직 쫄깃한 면발이 잇새에서 쫀득쫀득 아스라졌다. 거긴 소식 아직이래? 이젠 한껏 무뎌진 목소리로 진영이 물어왔다. 거기라 함은 정한 쪽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사건, 아직 수사 중이냐고. 승관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놈 잡았으면 내가 진즉 형이랑 짐 싸들고 헝가리로 떠났겠지 이 모자란 놈아. 진영이 돌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여 왔다.

— 야, 내가 전에 형이 통화하는 거 얼핏 들었거든? 그 새끼 완전 악질이던데.

— 맞지⋯⋯ 악질.

— 아니 그것도 그건데. 한번 목표로 설정한 사람한텐 꼭 뭐든 저질러야 직성이 풀린다나 봐. 자기 잡으려던 삼촌 그렇게 만든 것만 봐도 뻔해. 우리 삼촌이 좀 건장하냐. 누구한테 함부로 당하실 분이 아닌데.

— ⋯⋯.

— 형도 조심하라고 해. 자칫하다 위험해지는 거 순식간이야.

승관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천연한 동공 위로 단숨에 근심이 깃들었다. 그 모습에 외려 당황한 건 진영이었다. 윤정한 몸 사리는 거 하난 알아주잖냐. 형이야 알아서 잘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러는 거야.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사람 일이라고. 승관이 이마를 짚었다. 면을 씹는 것도 잊고 짜증만 삼켰다. 그러게 내가 경찰하고는 사귀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진영의 푸념에 어이를 상실한 채 되물었다.

— 그게 맘대로 되냐? 그럼 의사 남친은 괜찮대?

끄응, 진영이 뒷말을 삼켰다. 할 말은 많지만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승관은 점차 불어가는 짜장면을 서둘러 흡입했다. 좌우지간 필연이었음 싶었다. 정한이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고, 승관 또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함께 꿈을 보러 가고. 미래를 원하고, 영원을 약속하고. 승관은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앞일은 닥칠 거라고. 그것이 어떤 색이든, 분명 제가 바라던 방향으로 흘러가리라 믿었다. 지금 이 호출 방송은 좀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 [TA 응급환자입니다. 흉부외과 호출, 응급실로 신속히 와 주시길 바랍니다.]

아닌 밤중에 교통사고 환자라고. 승관은 허둥지둥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건 너 먹어라, 대강 밀어주고선 서둘러 의국을 빠져나갔다. 아이고 팔자야. 등 뒤로 진영의 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온통 피투성이라 외모를 분간할 순 없었지만 중년의 남성 정도로 보였다. 골절된 갈비뼈가 장기를 찔러 기흉이 생겨 있었다. 승관은 다급히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응급조치를 끝내고 수술 준비에 들어가야 했는데. 무언가 허전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 보호자 연락은 됐나요?

— 저 그게⋯⋯.

환자를 인계받았던 간호사가 머뭇거렸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없으면 일단 수술부터 들어가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승관의 시야에 누군가 잡혀든 찰나. 간호사가 눈을 꾹 감고 서둘러 대답했다.

— 도주하던 범죄자였대요.

정한에게 고정된 시선이 크게 진동했다. 승관은 그 순간 실려온 남성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들은 귀를 의심할 만한 말임과 동시에 이 상황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답이었다. 정한이 착잡한 얼굴로 승관을 향해 걸어왔다.

지금 수술을 하면 살릴 수 있는 환자였다. 그러나 살려야 하는가. 정한의 아버지를 중환자실에 가둔 장본인. 정한이 승관과의 약속까지 미뤄가며 잡아야만 했던 범인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형의 가족마저 앗아갈 뻔했던 범죄자를 살려야 할 의무도, 의사에겐 존재하는 걸까. 정한이 승관에게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수술 동의서를 달라는 뜻이었다. 싸인할 사람 찾던 거 아니었어?

— 나 여기선 보호자 아닌가. 추격하다 사고가 났으니 목격자이기도 하니까.

— ⋯⋯싸인 안 하면,

— ⋯⋯.

— 보호자가 거부해서, 수술을 안 하면⋯ 죽을 수 있어.

사실을 전달해 주는 거였다. 방법도 충분히 있다고. 형의 결정에 모든 게 달려 있다고. 승관의 낯에 깔린 의미를 읽어낸 정한은 잠시 반응하지 못했다. 정한이 원한다면 어떤 짓이든 저지를 준비가 된 것처럼. 그때 응급실 출입구가 열렸다. 달려들어온 교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환자 상태를 전달받았다. 주변이 급격히 소란해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정한이 승관의 손에서 동의서를 빼앗아 싸인했다. 승관은 그걸 무력히 지켜보았다.

— 승관아.

— ⋯⋯.

— 살려.

말려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정한이 승관의 양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댔다.

— 저 새끼, 죄질이 더러워서 죽어도 마땅한 거 맞아. 근데 적어도 죗값은 치르고 죽게 해야지. 형이 말했잖아. 우린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고. 넌 의사고, 저 사람은 범인이기 전에 환자야.

— ⋯⋯.

— 정신 차려, 부승관. 당장은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수술 끝나면 정당하게 구속시킬게. 자기가 저지른 죄의 벌 똑바로 받도록. 형이 그렇게 해낼게. 믿어, 승관아.

그러니까 빨리 가. 정한이 승관을 돌려세웠다. 수술 동의서는 유효했다.

심전도계 비프음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규칙적으로 파공하는 날카로운 소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듯 잔잔하고 안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승관은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본연의 순백색을 잃어버린 수술 장갑이 손을 옥죄며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하. 아주 오랜만인 듯한 숨이 탁 터져나왔다.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그를 차갑게 응시했다.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낯빛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봉합술을 마치자마자 수술실을 뛰쳐나온 승관은 얼마 가지 못하고 벽을 짚었다.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까닭이었다. 버티기 위해 몸을 기대다가 이내 스르르 내려앉았다. 호흡이 버거워져 마스크를 벗었다. 손아귀 속에서 천 조각이 힘없이 찌그러졌다.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승관은 언젠가부터 울고 있었다. 이미 두 뺨이 축축했다. 들이키는 숨이 까슬했다. 먼지가 조각난 뒤 갈라지고 부서져 기도에 박혀 버린 것처럼 따끔거려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하필 왜 오늘 당직이어서. 하필 방송을 듣자마자 응급실로 달려가서. 불가항력은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법이니까, 조금만 천천히 속도를 늦추어 도달했더라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이 역겨웠다. 더 이상의 이성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수술 도중에 치밀었던 몇 차례의 충동을 참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손톱을 세워 손바닥에 박아넣었다. 정한이 귀히 여기라던 손을 짓이기고 싶었다.

— [삼촌⋯ 깨어나셨어.]

진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면회를 간 참에 눈을 떴다고 했다. 백여 일만에 마주한 그의 모습은 여전했다. 자신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근엄함과 단단함을 잃지 않았던 그가 끝내 승관을 보며 흐릿하게 웃어 보였을 때, 승관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활력 징후와 회복 속도 모두 정상이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질 일정이 빠르게 잡혔다. 병원엔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었다. 승관의 컨디션은 매일 극과 극을 오갔다. 회진 루트에 ‘그’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원치 않는 자의 회복력은 빨랐다.

출근을 하려고 보니 현관 앞에 정한의 신발이 있었다. 제가 잠든 새 퇴근을 한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잠시 멈칫하려는데 등 뒤에서 정한이 승관을 불러왔다. 잠에서 막 깬 듯한 목소리였다.

— 출근해?

— ⋯⋯응.

— 말해 줄 거 있는데. 들어와 보니 네가 자고 있길래.

— 이따 말해 줘도 돼.

— 구속영장 신청했어. 오늘 내로 법원에 청구 들어갈 거야.

서둘러 신발에 발을 꿰던 승관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정한이 천천히 다가와 등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던 예전의 그 목소리로 승관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기억하던 속도와 온도를 그대로 품은 채로.

— 승관아.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 잘했어, 고생 많았다.

— ⋯⋯.

— 고마워.

승관은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돌아서서 정한을 껴안았다. 그립던 체온이었다. 더 이상 너 울게 하기 싫었는데, 내가 미안해. 젖은 뺨을 닦아 주는 손가락에서 얕은 굳은살이 느껴졌다. 승관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 안 울어. 말과 달리 훌쩍였다. 동시에 모두 삼켜냈다. 아픔도, 슬픔도, 과거도. 그러니 자연히 미래도 순탄할 줄 알았다. 그리고 며칠 뒤, 전담판사를 거친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종결됐다.

정한에게 돌아온 답은 기각이었다.

도주의 우려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피해자가 뚜렷하고 그 중 경찰이 포함된 까닭에 수사의 방향성은 조금도 틀어지지 않았다. 수사 기록을 전달받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거라고 했다. 사건 진행은 수월했고, 할 일을 다한 정한은 그제야 휴가 신청서를 써 냈다. 연차를 모두 끌어당겨 쓴, 2주가 살짝 넘는 기간이었다. 통 큰 배짱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와 비교해 조금 소심해질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기구했다. 어찌 되었든 승관은 출발 이틀 전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 신세였으니.

그래도 그 중 오프가 끼어 있는 것이 천운이었다. 여행을 나흘 앞둔 날, 모처럼 늦잠을 푹 즐긴 두 사람은 해가 깊이 저물고서야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단순한 산책마저도 즐거웠다. 모처럼 쐬어 보는 밤공기였다. 낮 동안 부다페스트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고 대강의 일정을 맞춰 두었으니 이젠 천천히 숙소를 알아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질 않아 승관은 몇 번이고 정한을 보며 현실을 상기했다. 형 이거 꿈 아니지. 우리 휴가 낸 거 맞고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지. 자꾸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한은 그때마다 대답 대신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고 싶었던 거 다 하자. 좋은 대로 뭐든 하자. 그 모든 것이 추억과 시간과 기억이 될 테니까. 아쉽지 않게 놀다 오자. 내친김에 눌러 살고 싶어지면, 사직서 준비와 함께 집을 알아봐도 좋고. 농담 섞인 소망과 다짐이 남다른 평화 속으로 나른히 안겨들었다. 그날 승관이 마주한 정한의 눈동자엔 조금 어지러운 빛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기대와 희망을 품은 색이라 감히 정언할 수도 없었는데, 밤이었음에도 분명히 눈이 시려웠고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승관은 그렇게 버거운 사랑을 감각할 때마다 입술을 옴찔거렸고 두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그걸 눈치챈 정한이 아주아주 다정한 난기로 승관의 몸을 끌어당겨 안을 때까지. 애틋하고 행복해 어쩔 줄 모르겠던 시절의 사랑. 중력에 이끌려 지구 주위를 궤도로 삼은 인공위성의 파편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다. 군청색 하늘 아래에서 유일하게 볕을 인 존재는 오로지 윤정한이었다. 자칫 사랑한단 말과 헷갈릴 수 있어 좋았다. 그의 존재가 승관을 살고 싶어지게 했으니.

— 우리 드라이브 갈까?

그렇게 제안하는 정한의 두 뺨이 조금 들떠 있었다. 이 설렘을 조금만 더 만끽하고 싶다는 듯. 숙소 예약하자며, 승관이 싫지 않은 듯 투덜댔다. 어차피 출발하려면 나흘이나 남았고 우리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잠잘 곳을 찾지 못해 길바닥에다 침낭을 깔아도 너랑 둘이라면 뭐든 좋다고 했던 정한이었다. 그깟 숙소 예약 같은 거 조금 미룬다고 뭐가 달라지랴. 승관의 투정은 씨알도 안 먹힐 핑계에 불과했다. 어디 가려고. 몰라. 어디까지 돌 건지는 생각하고 가야지. 그냥 발 닿는 대로 가면 안 돼? 그러다 부산까지 가 봐야 정신 차리겠네 이 형. 어 재밌겠는데. 제정신이야? 의미 없는 대화가 탁구공처럼 잠든 허공에서 쉴 틈 없이 오갔다. 결국 정해진 바는 없었다. 엑셀 밟고 핸들 돌리면 그게 다 길이란다. 말이야 방구야! 승관이 역정을 냈지만 정한은 타격 없이 웃기만 했다. 주차장 입구를 앞에 두고 멈춰 선 승관이 제 뒤편을 가리켰다.

— 그럼 우리 뭐라도 가져가자. 너무 맨몸이야. 최소한 겉옷은 있어야 될 거 아냐. 내 폰도 없고.

— 그래? 그럼 승관이가 갔다 오자.

— ⋯⋯이럴 줄 알았어.

정한이 장난스레 손을 흔들었다. 형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승관아, 얼른 다녀와! 약이 올랐다. 방금 전까지 사랑스러워 죽을 지경 아니었던가. 어째 감정이란 게 부침개 뒤집듯 휙휙 바뀌어들었다. 참자 참아. 심호흡을 한 승관이 집을 향해 달려가며 크게 외쳤다. 내가 빨리 오나 봐라! 춥든 말든 알아서 해! 등 뒤에서 물색없는 정한의 웃음소리가 사르르 번져왔다.

공동현관을 십 미터 가량 남겨 두었을 무렵이었다. 뺨에 툭 닿는 찬 물기에 흠칫 놀란 승관이 하늘을 보았다. 분명 저녁까진 맑았던 것 같았는데. 환해야 할 달덩이가 구름에 가려진 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두 번 떨어진다 싶던 빗방울은 눈 깜짝할 새 속도와 그 크기를 불려갔다. 삽시간에 머리칼을 적신 승관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의 기세가 심상찮았다. 보통 소낙비가 아닌 듯싶었다.

집에 오자마자 가장 따뜻해 보일 만한 옷을 두 벌 골라 품에 안았다. 빼곡한 털 때문에 부피와 무게가 상당했다. 으, 한탄 섞인 신음을 뱉으며 습관처럼 제 핸드폰을 확인하던 승관의 눈동자가 별안간 가라앉았다.

승관아 제발ㅠㅠ 내가 밥 사줄게   오후 11:46

여기 지금 비상사태⋯⋯   오전 11:59

오늘 당직이라던 선욱의 문자였다. 몇 통 와 있던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 교수의 이름까지 목도한 승관은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한낱 펠로우를, 그것도 교수가 오프날 부르는 건 백번 생각해 봐도 말 그대로 ‘비상사태’임이 틀림없었다. 야심해진 밤 병원에 머물고 있는 당직 인원만으로는 처치가 불가능한 상황이란 의미였다. 하 씨, 승관이 작게 된소리를 짓씹었다. 기다리고 있을 정한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그냥 휴가 내고 쨀걸. 눈치고 뭐고 될대로 되라지 저질러 버릴걸. 온갖 후회가 막심해졌다. 하지만 뒤늦게 돌이켜 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승관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정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병원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야심차게 부산까지도 가 보려던 드라이브 계획은, 어쭙잖게 병원으로 틀어져 버렸다.

뚜르르르. 우산을 달랑달랑 흔들며 정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하염없는 신호만 이어졌다. 기다리면서 할 일도 없을 텐데 또 장난을 치나 싶었다. 오기가 발동한 승관이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서도 무한정 굴러가던 신호음이 덜컥 끊겼다. 건너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층수 모니터와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 보던 승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유난히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6층.

— 형? 기다리고 있지? 있잖아 나 지금 병원에,

— ⋯⋯승관아.

5층.

가슴 속 무언가가 쿵 내려앉았다. 목소리 틈으로 섞여드는 가쁜 호흡을 똑똑히 들어 버린 승관의 낯빛이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4층.

까무룩 꺼져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었다. 승관은 귀에 댄 핸드폰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 형⋯ 아파? 아픈 거야? 다쳤어?

3층.

—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잘 안 돼 승관아. 네가⋯.

— 무슨 일이야. ⋯⋯윤정한. 거기 있어?

2층.

— ⋯⋯.

소름 끼치는 정적이 감돌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죽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한 승관이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설마 그 새끼가,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와. 미친 듯한 자기 세뇌도 무용했다.

1층.

문이 열리자마자 내달렸다. 우산을 쓸 정신도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죽을 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정한은 차 앞에 쓰러져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려 바닥에 그어진 백색 선이 이미 검붉었다. 다급히 달려가 정한을 일으켰다. 형 눈 떠 봐. 안 돼. 잠들지 마. 의식을 확인하는 손조차 바들바들 떨려 왔다. 푹 젖은 승관이 울며 애원했다. 제발. 들고 온 겉옷을 꾹꾹 뭉쳐 복부에 대고 지혈했다. 정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나왔다. 하얀 옷이 금세 핏빛으로 번졌다. 구급차를 부를 시간도 없었다. 어서 출발해야 했다. 정한을 일으켜 차에 태웠다.

시동을 건 승관은 망설이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행여 정한이 잠들까 싶어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조금만 참아. 얼른 병원 가서 치료 받자. 우리 형, 이깟 상처 하나로 안 죽잖아. 약한 사람 아니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내가 형 살려줄 테니까 조금만. 정한은 버티고 있었다. 승관의 바람대로, 예측대로. 온 힘을 다해 살고자 애쓰고 있었다. 새벽 도로 위엔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신호가 뻥뻥 뚫렸고, 차는 속력을 내며 병원을 향해 엔진을 과열시켰다. 습자지처럼 금세 찢어질 것만 같은 남빛 하늘이 진동하며 비를 토해냈다. 차오른 눈물과 거센 빗줄기가 눈앞을 뿌옇게 가로막았다. 와이퍼가 유리창 위를 바삐 오갔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벅벅 눈가를 문질러 시야를 틔우고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응급실 간호사가 익숙한 목소리를 눈치채고 알은 체를 했다.

— 부승관 선생님? 진,

— 복부 자상 환자. 상처가 깊습니다. 마취과 연결하고 바로 수술방 잡아 주세요. TS 교수님께 콜 좀 해주시고.

— 어? 지금 환자랑 같이 오시는 거예요?

— 네, 2분 안에 도착할 거니까 빨리요.

덩달아 급해진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정한이 창백해진 얼굴로 피식 웃었다. 우리 승관이 진짜 의사 같네.

— 형 말대로⋯⋯ 멋진 사람 됐네, 우리 애기.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고 싶냐 너는.

— 승관아. 네 얼굴이⋯ 안 보여.

— 운전 중이잖아. 수술 끝나고 실컷 봐. 아무도 안 말려.

보고 싶은데, 정한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승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계기판의 화살표가 달달 떨며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어서, 조금만 더⋯⋯ 초록불이 켜진 신호등만 보고 집중하느라, 저 멀리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병원에 한 시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해, 정한을 살려야 해서, 한적한 도로 위를 황망하게 달리던 차는 오른쪽 교차로에서 신호를 어기고 돌진해 오는 덤프트럭 한 대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길의 중앙. 정확한 교차점에서 빗길에 미끌린 두 차량이 굉음을 내며 부딪혔다. 트럭의 머리가 정한이 타고 있던 조수석을 깊이 들이받았다. 거대한 충격에 몸뚱이가 크게 튀었다.

어둠마저 안일하게 흐트러져 두 눈을 가려 버린 탓에 인사조차 못하고 작별을 해야만 했던 밤.

승관은 정한을 잃었던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큰 충격이나 외상의 후유증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누군가는 우울증에 빠지고, 누군가는 특정 물건 혹은 상황에 트라우마가 생기고, 기억을 잃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보이기도 해. 그게, PTSD야.”

“⋯⋯.”

“너는 그날 아주 크게 다쳤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몇 번이나 되돌아오다가, 형의 장례식이 모두 끝난 후에야 눈을 떴어.”

승관이 삐걱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이 왜 죽어. 왜 윤정한이 이 세상에 없어.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새카만 기저로 진영을 올려다보았다. 비틀대다 기어이 무너져 내렸다. 천천하고도 빠르게, 수많은 나날의 장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정한이 승관에게로 날아들고. 저 대신 그 커다란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뒤 일말의 미동도 느껴지지 않던 몸. 참기 힘든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우느라 제가 기절하는지도 몰랐던 순간. 어렴풋이 건넸던, 사랑한다는 마지막 인사. 감당할 수 없는 기억들이 버겁게 몰아쳤다. 초점을 잃은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무릎을 꿇은 진영이 승관을 끌어안았다. 숨이 자꾸만 급히 차올랐다. 꾹 감은 눈 아래에서도 모든 것이 선명했다. 빈 공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많이 견뎠어, 승관아. 잘 버텨냈어. 이제 아프지 말자, 응?”

“아니⋯⋯ 아니라고 해.”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아니라고 말해, 이 기억이 틀린 거라고. 승관은 몸부림치며 울었다. 사진 속 정한은 그런 승관을 빤히 보면서도 환한 미소만 띄우고 있었다. 이대로 죽으면, 꿈에서 깰까. 그러면 형이 예전처럼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을까. 다시 형의 이름을 부르고, 형이 눈을 뜨면. 아주 무섭고 슬픈 꿈을 꿨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에 와닿는 모든 감각들은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다.

정한을 떠나보내던 날엔 비가 많이 왔다고 했다. 진영이 말해 주었다. 의식 없던 승관의 상태 또한 그날 가장 고비였다고. 함께 가 버릴까 봐, 네가 형의 손을 잡고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건 기적이랬다. 만약 그것이 진짜였다면, 형이 너를 놓아 준 게 아닐까 싶어서. 제 몫까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오라는 뜻일 거라고. 승관은 눈을 뜨던 날의 진영을 기억했다. 처음 보는 눈물 범벅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당황스러움부터 앞서서 엉겁결에 친구를 달랬더랬다. 왜 울어, 응? 진영아, 나 때문이야? 어리둥절한 승관을 부둥켜안고 진영은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고맙다는 말만 수없이 되풀이했었다. 부쩍 서늘해지던 바람은 승관의 생을 돌려준 대신 그의 세상을 가져간 셈이었다.

집에 돌아온 승관은 정한의 방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데만도 단단한 결심과 반복과 시간이 필요했다. 방 내부는 그대로였다. 온기와 체취와 가구와 물건들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지만 잃어버린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분실물처럼 정처 없이 불안해 보였다. 킁, 코를 훌쩍인 승관이 진영에게서 받아온 유품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해질녘의 감빛 햇살이 덧칠한 수채화 물감처럼 방 안으로 짙게 번져왔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형. 형이 나 살린 거 맞지.”

이불을 쥔 손가락이 무언가를 참느라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형이 원했던 대로 나는, 살아야겠지.”

결국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근데 형 없이 어떻게 살아. 모든 처음을 가져가 놓고 내 습관마저 돼 버렸으면서, 이제 와 혼자 남겨두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진짜 너무 아프고 힘들 것 같은데.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땐 어떡해. 형을 아무리 그리워하고 울부짖어도 해결될 수 없는 일일 텐데.

“꿈에 나와 줘. 나와서 뭐라도 알려줘. 나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리고,”

“⋯⋯.”

“사랑한다고⋯ 말해줘.”

듣고 싶어, 형 목소리로. 승관이 울먹이며 몸을 웅크렸다.

“보고 싶어⋯⋯.”

몇 달이 흘렀다. 짧은 수 개월 사이에는 늘 그러했듯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십일월의 한파가 닥쳤고 그에 놀라 발작처럼 첫눈이 쏟아졌으며 정신을 차려 보니 패딩을 껴입고 있더랬다. 세 차례의 공휴일이 지나갔고, 머지않아 봄이었다. 진영은 대학병원을 퇴사한 뒤 개인병원을 개설하기 위해 이곳저곳 부동산을 쏘다니고 있었으며 장기간 휴가를 낸 승관은 겸사겸사 진영의 일을 도우면서 출국 준비에 시간을 쏟는 중이었다.

[정리는 다 끝났냐.]

“거의.”

[밥은?]

“먹었지.”

[응, 나 지금 너네 집 앞이야. 들어갈게.]

비밀번호를 바꾸든가 해야지. 캐리어를 잠그던 승관은 꺼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허망하게 되뇌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오는 진영의 모습은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됐다. 포장된 음식을 싸오거나 직접 요리해 먹을 재료를 사 들고 오거나. 이번엔 전자였다. 정신건강엔 잘 먹고 잘 자는 게 제일 중요하다나 뭐라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승관이 경악에 물든 낯으로 외쳤다.

“나 밥 먹었다니까!”

“야, 시계를 봐라. 저녁 시간이잖아.”

“점심 먹은 지 두 시간도 안 됐어.”

“왜 그렇게 늦게 먹었어? 그럼 이거 간식으로 먹어.”

“너 같은 미친 놈이나 갈비탕을 간식으로 먹지.”

“정신과 의사한테 미친 놈이라니. 서운한걸.”

진영은 전혀 섭섭하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비닐을 뜯었다.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분명 2인분이라 했던 것 같은데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질질 끌려와 식탁 앞에 앉자 손수 숟가락까지 쥐어 준 진영이 맑게 웃었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정한을 닮아 있었다. 승관은 그걸 응시하느라 조금 멍해졌다.

“그나저나 벌써 내일이 출국이네. 헝가리 간다던 네 말 듣고 놀란 게 엊그제 같은데.”

진영이 중요한 말을 하듯 입가에 손을 갖다대었다.

“거기가 나한텐 약속의 땅이야. 되게 많이 배웠거든. 방황하던 마음도 거기서 다잡았고.”

무언가를 꿈꾸기 좋은 땅. 부다페스트는 그런 곳이랬다. 미래든, 과거든, 자기 자신이든 사랑하는 존재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언약을 맺을 수 있다면서. 그러니 네가 다시 환하게 웃어 보았음 좋겠다고. 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진영의 바람뿐만은 아니리라. 정한의 소원일 수도 있었다. 아름답고 눈부신 하늘 아래서 구태여 그림자를 찾아 속에 숨는 건 슬픈 일임을 알았다. 언제든 지켜 준댔다. 승관은 그와의 약속을 믿었다. 다가오는 출국일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그 믿음이 전부였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되지?”

“맘대로.”

부탁인 척 내밀어지는 통보였다. 이 집에서 눈을 붙여 봤자 소파 신세를 못 면할 텐데 매번 저랬다. 가란다고 갈 놈도 아니었을뿐더러 떠나 있는 동안은 못 만날 테니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진영이 소파 위에 마구 흐트러져 있는 옷들을 보더니 한숨을 지었다. 오늘은 저걸 덮고 자야 할 운명임을 직감하는 듯했다. 진영의 표정을 읽은 승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제 방 안을 살폈다. 열린 방문 틈으로 이튿날 끌고 갈 캐리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내 방에서 자, 캐리어는 치워 줄 테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진영을 향해 승관이 게슴츠레 웃었다.

“나 오늘 형 방에서 잘 거야.”

아. 진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승관은 불 꺼진 방 침대에 기대어 앉아 멍했다.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시야를 희게 밝혔다.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에 메일 알림이 떠올랐다. 어딘가에서 연락이 올 시간은 아니었는데. 무심코 새 메일을 확인한 승관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승관이에게

∧  보낸 사람   윤정한

     받는 사람   부승관

     20XX년 2월 24일 (목) 오전 12:00

∧  첨부 1개 534MB 모두 저장 이미지로 보기

>  승관이에게.mp4 534.3MB

몹시도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세 글자.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겹던 이름이었다. 승관은 넋을 잃고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도착한 동영상 외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알 것 같은 날짜였다.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되감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승관이 조심스럽게 영상을 재생시켰다.

5년 전 오늘은, 정한의 대학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졸업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뭐야? 내 폰이야?]

[어. 나중에 형한테 보내주기 귀찮아서 아예 이걸로 찍게.]

아, 그래. 제복 차림의 정한이 실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앵글 밖에서 깔깔거리는 진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식이 모두 끝난 이후인지 현장은 시끌벅적했다. 모두가 자유롭게 사진을 찍거나 축하를 나누는 분위기였으며, 정한과 진영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뒤편으로 낯익은 학교 본관의 모습이 장엄하게 드러났다. 그 언젠가 승관이 깜짝 마중을 나간답시고 숨어들던 샛길도 저 멀리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정한이 정모를 벗고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했다. 잠자코 그 광경을 찍던 진영이 인터뷰하듯 질문을 던졌다.

[무려 사랑하는 애인의 졸업식인데 실습 끌려가느라 못 온 부승관에게 한 마디 하시자면요?]

승관의 이름을 듣자마자 정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겠어요. 승관이 졸업식엔 내가 꼭 가 줘야지. 혼자 졸업하니까 되게 외롭네.]

[이렇게 날 또 없는 사람 취급 하고. 승관아, 내가 이런 취급 받으려고 너 대신 온 거야.]

[이거 승관이한테 보여 줄 거야? 언제?]

[뭘 언제야. 오늘 밤에 보여 줘야지. 또 뭔 생각 하냐?]

진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심하던 정한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거 타임캡슐 하자, 우리.]

[그게 뭔 말이야?]

[내가 이 영상을 승관이한테 예약 메일로 보내 놓는 거야. 5년 뒤 오늘 날짜에 도착하도록.]

[왜 하필 5년인데?]

[펠로우 2~3년차면 제일 바쁠 때니까?]

[⋯⋯굳이?]

[재밌잖아.]

[찍었다는 것도 비밀로 하고?]

[응.]

정한이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히히 웃어 보였다. 때가 묻지 않은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진영이 화면 안으로 침범해 정한을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승관아 네 애인 진짜 또라이 같애. 지금은 모르겠지만 5년 뒤의 너는 알 거야. 윤정한이 보통 미친 놈 아니라는 거.

[내가 커플 이벤트나 해 주려고 여기까지 와 준 줄 알아?]

[온 김에 해 주면 좋지.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줄게.]

[먹을 걸로 유혹할 나이는 한참 지나지 않았냐.]

[싫음 말아라. 윤진영 자휴 때렸다고 삼촌한테 말씀드려야겠다.]

[이렇게 치사하게 나온다고?]

프히, 눈가가 발개진 승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짓궂음에 대책없이 놀아나는 건 진영이나 승관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쉰 진영이 말을 이었다.

[자, 그럼 5년 뒤의 승관이한테 하고 싶은 말.]

막상 하려니까 떨리는지 정한의 목울대가 한번 들썩였다. 어딜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을 멋진 차림과 외모를 하고 긴장하는 윤정한. 승관이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모습이었다. 그 아름다운 사람이 제 이름을 불러왔다.

[승관아. 우리 결혼하자.]

[와, 이건 좀 상상 못한 발언인데.]

[내가 살면서 이렇다 할 확신을 가져 본 적이 거의 없거든? 난 내가 여길 졸업하고서도 경찰로 살아갈지 잘 모르겠는데, 너한테만큼은 욕심이 나. 부승관이란 사람한테는, 이유 없는 확신이 자꾸만 들어. 왠지 내 미래엔 네가 영원할 것 같아. 직감보다 약속처럼 보인다면⋯⋯ 형은 지킬 자신 충분히 있으니까. 5년 뒤에 승관이가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아직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일 텐데, 너도 나랑 똑같은 소원을 빌고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의 ⋯훗날 같은.]

“⋯⋯바보.”

수줍음에 붉어진 두 뺨을 액정 위로 매만지던 승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툭 떨어진 눈물이 소매를 적셨다. 다 아는 척, 똑똑한 척 혼자 다 하면 뭐 해. 그 간단한 약속 하나 못 지켜 줬으면서.

[일과에 여유가 없어지면 화끈하게 휴가 내고 여행도 가자. 비행기 타고 멀리 떠나는 거야.]

“⋯⋯.”

[사랑해, 승관아. 우리 걱정하거나 슬퍼할 일 없도록 열심히 살자.]

몇 번 흔들리던 영상은 이내 끝이 났다. 정신이 없어 뭘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던 그날의 아쉬운 변명이 그제야 거짓임을 알았다. 5년 뒤의 오늘을 위해 장난스레 숨겨왔을 정한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그다웠다. 승관은 끈덕지게 숨을 삼키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가 불쑥 갈라졌다.

“⋯나 내일 출국해. 그 먼 땅까지 잘 도착할 수 있겠지?”

마지막 화면에 고정된 정한의 낯 위로 환한 미소가 한가득 배어 있었다.

“우리가 같이 가기로 했던 곳인데⋯⋯ 나 혼자 가서 미안해. 여기 형 여권도 있고⋯ 짐도 다 있는데, 형만 없어서⋯⋯ 같이 못 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승관이 애써 웃어 보였다.

“돌아오면 말해 줄게. 뭐가 재밌었는지, 어디가 예뻤는지⋯⋯. 계획했던 곳들 다 둘러보고 나서. 여긴 형이 분명 좋아할 나라였다고, 그래서 나도 정말 행복했다고 자랑할게. 형 생일 때 울기만 하느라 못 줬던 선물도 사 올 거야.”

고마워. 형 덕분에 모든 게 아름다웠고 뭐든 견뎌낼 수 있었어. 잊겠단 말은 못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살아 볼게. 형은 오래오래 날 사랑했을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내 세상은 충분히 값지게 빛나고 있다고. 승관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밤을 무서워하면 저 멀리 높이 뜬 달을 가리켜 줄 수 있었던. 그럼에도 두려우면 백야를 품은 대낮을 선사해 주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품을 내어 주었던 유일한 사람. 가슴팍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좁고 깊은 온기였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정한의 이름을 눌렀다. 까마득한 과거의 대화 아래, 빈 공간에 느린 속도로 글자가 채워져 갔다.

1  오전 12:21   사랑해

깊어가는 밤. 천공엔 안개 한 점 없었고 세상은 조밀하게 그윽했다. 젖은 호흡 틈으로 새벽의 공기가 들어찼다. 지구 반대편의 대비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영영 머물며 낯선 유랑객을 반기는 등대처럼, 부다페스트의 아침은 승관을 맞이하기 위해 눈부시게 달려올 터였다.

허물어진 땅 위로도 태양은 떠오르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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