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약속 클로에 드림(1)
비츠님 커미션
서쪽 나라는 욕망의 나라. 이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욕망과 열정을 사랑하고 긍정하다보니⋯⋯. 인간에게 없는 신비한 힘을 가져 배척받기 쉬운 마법사도 재미있으면 그만, 흥미로우면 오히려 좋지. 차별과 멸시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다보니 마법사임을 숨기지 않고 여행하는 마법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마법사와 인간 여행객은 어떻게 구분하냐고?
딱 보면 알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고. 감사인사와 함께 커다란 폭죽을 터뜨리고. 쓸쓸하고 깜깜한 밤에는 길잡이가 되어줄 빛을. 무더운 더위에는 시원한 바람을, 매서운 추위에는 따듯한 공기를 안고 있는 게 마법사인걸! 지루할 틈이 없어 보이는 건 다 마법사야.
지루할 틈이 없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행이란 그런 거잖아. 자극을 찾아서 새로운 것과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울리게 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새로 사랑하게 될 것을 위해 자리를 준비하고 싶으니까. 여행자 마법사에 대한 대화를 들을 때마다 시트린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남녀노소 인간 마법사 가릴 것 없이, 여행자는 항상 흥미롭고 즐거운 이야기를 가져다주는 걸. 그러다보니 자꾸 시선이 가고.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먼 지역에서 왔어요. 무도회장에 초대받아서 왔어요. 파티에 가려고 마차를 기다려요. 연극을 보고 싶어서 집에서 나왔어요. 사소한 것부터 거창한 것까지, 다양한 여행 이야기를 좋아하고 기대하는 시트린이 클로에를 발견 한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시트린이 여행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눈길을 줬으리라. 욕망이 가득한 이 거리에서, 서쪽에서 제일가는 재봉사가 되고 싶다고 하는 아이를 안 볼 이가 있다고? 눈길이 끌렸는데도 바로 가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고? 서쪽 태생이면 그럴 수가 없었다.
젊은 도련님들, 안녕하신가요?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나타난 마녀를 보고 도망가거나 외면하면 동쪽. 눈은 마주치지만 가벼운 인사가 끝이면 중앙.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긴 하지만 금방 헤어진다면 남쪽. 싸울 신호로 받아들이는 건 북쪽이고. 느닷없이 나타난 마녀를 보고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상대를 환영하면 서쪽이기에. 시트린은 클로에와 당연한 만남을 하고 당연하게 교류를 이어갈 수 있었다.
멋진 두근거림을 겪은 기념으로 티파티를 하자. 라스티카의 제안으로 근사한 티파티도 즐겼다.
서쪽 태생이 셋 모여서 그런가? 다른 사람이 보기엔 기묘하고 별난 만남이지만. 그들은 이 만남을 인연으로 묶어 종종 교류했다. 마법사는 약속할 수 없지만, 약속하지 않아도 부정기적으로 만나 티타임을 가지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고. 근황을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냈다. 시트린은 풍요의 거리 마녀지만 다른 곳으로 떠날 때도 있고. 라스티카와 클로에는 서쪽 나라 마법사지만 온 세상을 여행하고 다니기에 매일같이 만날 수는 없지만. 멋진 인연으로 이어진 그들은 언제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친근했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처럼 서로를 반가워했다. 클로에와 라스티카가 현자의 마법사가 되어도 이 인연은 여전했다.
아니 조금 다른가? 여행자 시절 라스티카와 클로에는 항상 함께였다. 클로에가 있으면 라스티카가 있고 라스티카가 있으면 클로에가 있었다. 누구 한 명만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이지 라스티카⋯! 혼자 돌아다니면 미아가 된다니까. 클로에가 뛰어오거나. 여기 있었구나. 클로에, 시트린도 좋은 오후야. 정말 멋진 날이지 않니? 이 멋진 날을 기념해서, 홍차가 마시고 싶어졌어. 라스티카가 걸어왔으니까.
현자의 마법사가 된 라스티카와 클로에는 함께 있을 때가 많고, 따로 있을 때도 있었다. 임무에 따라 사정과 상황이 다른 만큼 동행하기도 하고 따로 떨어지기도 하는지. 라스티카 혼자 시트린을 찾아오기도 하고. 클로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시트린과 만나기도 했다. 사소한 차이지만 엄청난 변화였다.
시트린은 여행자 클로에와 라스티카도 현자의 마법사가 된 클로에와 라스티카도 좋았지만. 굳이 꼭 저울에 올려서 어떤 쪽이 더 좋다고 판결을 내려야한다면, 현자의 마법사가 된 지금이 좋았다. 클로에의 이야기가 더 다채롭고 풍성해졌는걸.
예전 클로에가 지루하고 따분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저기, 있잖아.
비 온 뒤 물기를 머금어 싱그럽게 피어난 제비꽃처럼, 활기를 가지고 재잘재잘 떠드는 클로에가 사랑스럽다고!
마법관에서 다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데, 스물 두 명이 같은 건물에서 사니까. 좁은 것도 아닌데 북적북적해서 하루하루가 신기하다는 것. 다른 나라의 마법사들과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보이는 기질 차이가 있어, 매일 생각해야하는 게 늘어나 조금 어렵지만 즐겁다는 것. 친해지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 조심스럽게 유리 세공처럼 다뤄야하나, 아니면 좀 더 대담하게 나서는 게 좋을까. 매번 고민되고 긴장해서 걱정이야. 자기가 다가간 만큼 반응해주는 상대도 있는데. 어디까지 들어가도 좋을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데 또 좋아.
모든 게 낯설지만 그게 또 좋다고 베시시 웃는 클로에가 좋아서, 시트린도 방긋 웃으면서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친해지고 싶은 아이는 어떤 아이야? 그 아이들한테도 옷을 만들어줄 거야? 간단한 질문을 던지면 클로에 어, 으음, 그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솔직하게 물꼬를 틀었다. 일단 구상하고, 있는 건 있어.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가도 어떤 건데? 시트린이 관심을 가지면 확실한 실루엣을 망설임 없이 그렸다.
루틸은 밝은 색이 잘 어울리는데, 빗자루를 타고 매랑 경쟁 할 정도로 빠르고 잽싸니까. 활동성과 통기성을 우선시하는 게 좋을 거 같고. 히스클리프는 인형처럼 예쁜데 자세도 바르니까. 기능보다는 디자인을 우선시해서, 뽐내고 싶어져. 카인은 듬직하고 멋있는데⋯⋯. 장난스럽거나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니까. 보고 있으면 조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져서⋯⋯. 그렇구나. 완성되면 보여줄래? 응! 시트린은 클로에와 잔뜩 떠들고 왕창 이야기 하다 헤어지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클로에 입에서 시트린은 모르는 마법사 이름이 나오더니 가끔 현자님 이름이 들려왔고. 디자인과 옷, 재봉함 말고 다른 주제로 대화가 시작하기도 했다. 오늘 수업에서 어떤 마법을 배웠는데. 어떤 걸 배웠는데. 임무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소문이 돌고 있어 혹시 아는 거 없어? 여행자 클로에라면 나올 리 없는 반응이 쭉쭉 나오는 게 낯설면서 좋아서 시트린은 한 두 마디 장단을 맞추면서 경청하고. 아는 대로 대답해주고 현자의 마법사 클로에를 배웅했다.
현자의 마법사. <거대한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키기 위해 현자가 소환한 마법사. 이 세계에서 왔다던 현자와 클로에는 그런 관계로 묶여있다. 라스티카와 클로에는 서로에게 서로가 묻어나고 배는 사제 관계지. 그렇다면 시트린과 클로에의 관계는 뭘까? 풍요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클로에를 배웅하고, 시트린은 잠깐 이 인연을 곱씹었다.
그냥 아는 사이인 서쪽 마법사? 근데 너무 많은 걸 공유하고 있는데. 동료? 같은 서쪽 마법사고 시트린은 클로에가 위험하다면 기꺼이 힘을 빌려줄 의향도 있지만, 동료라는 표현이 어색했다. 친구? 이것도 살짝 엇나간 거 같은데. 친구 사이에 나이는 상관없지만,
라스티카랑 나랑 친구? 클로에랑 나랑 친구? 몇 번 곱씹고 시트린은 웃었다. 그럼 우리 관계는 뭘까? 어떤 이름이 제일 잘 어울릴까? 클로에에게 물어보면 내 지인이라면서, 아는 사이인 마법사라고 바로 소개하겠지만. 시트린 속 클로에는 아직 깔끔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관계였다.
시트린은 클로에가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무언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친구가 생겼어. 뭘 만들었어.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고민 중이야. 그런 일이 있었어. 앞으로 뭘 할 건데 기대 된다. 그런 이야기는 계속 듣고 싶고 클로에가 위험하면 도움이 되고 싶지만⋯⋯. 모든 걸 알고 싶지는 않아.
그 옷을 입은 친구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듣고 싶어도 그 자리에 서있고 싶지는 않아. 그 풍경 속에 있고 싶지는 않아. 깊게 개입하지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널 지켜보고 싶어. 네가 어떤 날을 특별하게 여겼는지 그 눈동자에 어떤 순간을 담기로 했는지는 궁금하지만. 중요한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을때, 날 기준으로 무언가를 택하길 바라진 않아. 너랑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지만 날 우선순위로 삼지 않았으면 해.
오랜 시간 살아온 마녀면서 대가로 사랑 이야기를 수집해온 서쪽 마녀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클로에가 웃으면서 좋아하는 걸 이야기 해주길 바라. 그 좋아하는 것에 내가 포함되거나 들어가는 것도 좋아. 그치만 내가 클로에의 전부가 되거나, 모든 걸 대변하게 되는 건 별로야. 중심이 되는 것도 싫어.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관계로 지내자. 내가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을 가지고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마음이 불타길 바라.
왜 이럴까⋯⋯. 왜 이러겠어? 시트린은 자기 자신이 클로에를 생각보다도 더,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걸 인정했다. 마음에 들다 못해 좋아하게 된 거야. 입을 맞추고 싶거나 연인이 되고 싶은 뜨거운 연정과는 다른 호감이었다. 오랜 세월 앞에서는 제일이라는 말만큼 의미 없는 단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 있게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네가 제일이라고 말하고 싶어. 그런 좋아해였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근사한 작품을 내는 미술가를 사랑해서, 네 그림을 가장 큰 전시관에 걸어두고 싶은 그런 마음과 비슷한데. 살짝 달라.
네가 언제든지 유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되고 싶어. 네가 중심인 이야기를 들려줘. 네 리듬에 맞춰서 춤을 추다가, 가끔은 즉흥적으로 아무 음률이나 잡아서 몸을 움직이고 싶어. 반짝반짝 빛나는 클로에의 눈동자가 나와는 상관없이 빛을 내고. 목표를 잡은 대로 망설임 없이 가다가 가끔 손을 잡는 정도가 좋은데.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클로에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가고 싶어져, 함께 주목을 받는 것도 좋아.
깔끔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게 아니구나. 뭐 하나로 고정 되긴 아까워서, 애매한 상태로 남고 싶은 거야. 네 팬이 되고 싶다가도, 너와 함께 올라오는 배우가 되고 싶기도 하고. 든든한 아군이 되고 싶기도 하고.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관자로 남고 싶기도 하니까. 네가 어떤 길을 갈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우리가 이어갈 기묘하고 애매한 관계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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