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고 말해
싫어
서율은 그런 아이였다.
과자 하나를 주고 10분 기다리라 하면 그대로 기다렸다가 과자 한 개를 더 받는 아이.
받아쓰기 중에 옆자리 몰래 훔쳐보지 않는 아이.
준비물은 항상 전날 밤 책가방 안에 정돈해서 넣어놓는 아이.
그런데....
"이사님, 먹을 거 앞에 두고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저 놈.
김성룡 앞에서는 자꾸 그게 안 됐다. 서율이 제 맘을 알 리 없는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흘겨보고 차게 식은 피자 한 조각을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치즈를 우걱우걱 씹으면서도 이게 당최 뭔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하의 서율이, 천하의...!
"먹소가 오늘따라 왜 이런대?"
유치한 별명으로 항상 놀릴 생각만 그득하던 눈이 금방 걱정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끓는 것 같았다. 뭐 마려운 똥개새끼도 아니고 삽시간에 증오보다 커진 애정어린 감정을 담는 밝은 눈을 보고 있자면 인내심이 뚝뚝 끊겨서 버럭 화부터 나왔다.
"내가 뭐 진짜 돼진 줄 아냐?"
"아니었어요?"
"야!!"
그래. 지금처럼.
김성룡 앞에서 서율은 하룻강아지다.
뭣도 모르고 짖어댄다.
작은 눈길 한 번에 10분은 무슨 5분도 안 돼서 더 큰 관심에 안달나고 자꾸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삐뚤빼뚤 성의 없이 적힌 답안지를 훔쳐보고 생각이 실타래처럼 엉켜 정리가 안됐다. 책가방 안에서 잔뜩 구겨진 일기장 같은 마음이었다. 성룡 앞에서 인내심이 바닥나고 정신 없어지는 건 당연했다. 감정이 시간을 한참 앞서간 와중에 제정신이 유지가 되겠느냐고. 제 성격이 나쁘다는 걸 모르진 않는데 그게 하필이면 성룡 앞에서 극대화된다는 게 문제였다. 무슨,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는 초딩도 아니고. 아니. 요즘 애들도 이러면 반성문 쓴다던데. 서율은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속으로만 반성문을 얼마나 썼는지 셀 수가 없었다.
3학년 2반 서율.
8반 김성룡한테 자꾸 못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좋아해서 그랬습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심술부리는 게 진짜 짜친다고 생각했으면 죄송합니다. 사실 안 죄송합니다. 아니내가뭘잘못했는데
반성의 ㅂ자도 안 보이는 글의 끝은 항상 누구 탓 한 번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서율이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더운 숨을 내뱉으면 그놈의 새 부리 같은 입이 쭉 나와서 그럼 그게 내 탓이에요? 억울함을 표명하다 사라졌다. 니 탓은 아니지. 아니 반쯤은 책임이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죽어라 탓하는 건 또 서율 성격에 안 맞아서. 차라리 탓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한결 가벼웠을지도 모르겠다. 넌 니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지. 또, 또 심술이 치고 올라와서 성룡의 앞에 놓인 반쪽짜리 피자를 가져와 입에 쑤셔 넣었다. 많이 먹어요, 하고 어린애 보듯 쳐다보는 게 맘에 안 들어서 타는 속을 식히려 탄산에 둥둥 띄워진 얼음까지 씹어먹었다.
성룡이 서율을 향해 손을 흔들고 방긋 웃었다. 무슨 생각인지 하루종일 투덜대기만 하더니 혼자 풀었다가 뾰족하게 눈을 뜨고 무섭게 쳐다보다가. 그 탓에 성룡이 들어가지도 않는 피자를 꼭꼭 씹어 삼켰더랜다. 이유는 몰라도 성난 표정이 발톱을 세우고 뼈다귀를 숨기는 길거리 강아지 같아서 안 훔쳐먹어요, 답 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한테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냅킨으로 입을 툭 닦아주자 동그랗게 부푼 볼을 움직이며 고개를 젓는 게 여섯살 터울 동생이 있었다면 이랬겠구나 싶었다. 외동이라 다행이다.
가끔 서율의 씩씩대며 흥분으로 달아오르는 볼이 저보다 어린 나이를 실감하게 만들어서 성룡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저렇게 어린애 같은데 또 무서울 땐 엄청 무섭다니까. 어두운 골목에서 손을 흔들고 돌아서면서도 벌건 볼 한 번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없어도 밝은 서울의 밤은 자동차 소음, 건물 불빛들이 무색하게도 참 외롭다. 이런 사정 저런 사정으로 가족은 없고, 그렇다고 낯간지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관계는 부담스럽기만 하니까 성룡은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었다. 그럼 어떡해. 나이 서른 여덟 넘어서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저 담그려고 죽도록 패던 놈이랑 친구처럼 지내는 건 쉬워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노려봐도 이해 안 가는 것투성이였다.
성룡은 남들 눈에 비치는 모습과 다르게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감을 붕 뜨게 만드는 것도 본인 성정이라서 만났던 사람들마다 '난 아직도 너를 잘 모르겠더라' 하고 연락을 끊었다. 서로 궁금해하고 낯설수록 설레는 게 사랑이 아니었던가. 성룡은 매번 그런 식으로 이별을 겪었다.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고,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보다 눈물도 안 나오는 그런 이별.
성룡에겐 아직 버리지 못 한 로망이 하나 있다.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눈물콧물 질질 짜며 나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다거나 마음 깊숙이 남는 헤어짐이라든가...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자꾸 서율만 만났다 하면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차피 쟤는 이런 고민 안 할 게 뻔해서, 그게 부러워서 그런가. 추하다 추해. 추하다, 성룡아!
와그작, 와그작..
초코바 먹는 소리가
와그작,
와그작!
"야이씨! 남의 귀에다 대고 처먹지 말라고 새끼야!"
"왜요~"
서율의 귀가 새빨개졌다가 금방 제 피부색으로 돌아온다. 큰 손으로 귀를 덮으면 성룡이 남은 초코바를 슬쩍 내밀어 권하지만 한쪽 입꼬리를 들썩이며 절대 싫다는 듯 남은 손을 저었다. 니가 먹던 걸 내가 어떻게 먹냐. 그런 의미가 담긴 표정을 성룡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작은 초코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크흠, 헛기침을 하고 미지근한 물을 벌컥 마셨다.
어떡하냐, 씨...
좋아하는 사람이 집을 막 들락날락하는데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요?
부엌에서 편한 차림의 성룡을 힐긋, 물이 딴 길로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힐긋. 집안에 괜히 들여놨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정신없이 요동치는 데에 기력을 다 쓴 것 같았다. 김성룡 저거는 생각도 없이 티비나 보면서 웃는데 좀 억울할 정도로. 서율이 턱을 타고 흐르던 물을 옷 소매로 슥 닦고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을 꺼내 성룡에게 건넸다. 땡큐용, 하고 자연스러운 애교가 묻은 말투를 듣자마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병이 찌그러졌다.
"...이사님? 야, 먹소!"
"어? 아."
성룡의 흰색 맨투맨 위로 물길이 진회색빛 그림을 그렸다. 아 진짜 뭐해요! 하고 쫑알대는 어투에 서율이 쫓기듯 방으로 들어가 옷을 잔뜩 싸들고 나왔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 민망해 혀를 찼다.
"옷 많다고 자랑해요?"
셔츠부터 편한 맨투맨, 예전에 입었던 후드티, 딸려 나온 캡모자, 가끔 입는 겉옷까지 모조리 들고 온 폼이 웃겨 성룡이 성큼 일어나 밑에 깔린 티셔츠 하나를 잡아당겼다. 쭉 밀려나온 옷이 떨어지자 서율 품에 가득 올라온 옷더미 사이로 끼워넣고 빈 방으로 향했다.
"어디 가냐?"
"엉?"
"어디 가냐고."
"옷 갈아입으러."
여기서 홀딱 벗어요, 그럼?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지다 못해 펑하고 터져버릴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성룡이 유유히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땐 기운이 쭉 빠져 소파에 기대서 분을 삭힐 뿐이었다.
저, 저. 또 뭐에 꽁해서 저러고 있어?
성룡이 본 서율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성격 나쁘고, 쪼잔하고, 그리고 애 같은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랑 만나면 연애가 아니라 육아하는 기분이겠네. 조금 품이 큰 티셔츠를 아래로 잡아당겨 주름을 펴고 그 옆에 앉았다. 불편한지 옆으로 살짝 몸을 트는 서율을 보다가 비싼 소파의 착석감을 즐기기로 했다. 어우, 이거 완전 푹신하네. 까칠해서 그런가 좋은 것만 쓴단 말이지. 소파 위에서 한참을 방방거리자 서율이 지겹다는 얼굴로 성룡의 팔을 잡았다.
"그만 좀 해라."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갈색 눈동자가 서율의 하얀 얼굴 위로 굴러갔다.
얘 나 좋아하네.
그것도 엄청.
모른 척 하기가 지긋지긋했다.
자꾸 붉어지는 얼굴이, 부러 틱틱대는 말들이 나를 향하는 게 아니라고 단정짓기엔 38년치 눈칫밥이 서럽다고 울 것 같았다.
허무맹랑할 정도로 현실감을 붕 뜨게 하면서 본인은 그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사람과 무서울 정도로 독선적이고 차가우면서 애같은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성룡은 그런 아이였다.
남들보다 수가 밝아 간식 하나를 바로 먹는 것보다 10분이란 시간을 할애해서 간식 하나, 칭찬 한 번 더 받는 게 이득이란 걸 알면서도 과자를 덥석 입에 넣는 아이.
시험 중에 책상 선을 넘어오는 지우개도 다 내 거라고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아이.
등교 시간에 들른 문방구에서 미술 시간에 쓸 색종이보다 구슬 꾸러미를 사는 아이.
뭐든지 호기심이, 재미가 우선이던 정말 '어린애' 다운 아이.
큰 일 한 번 겪고 보니 이젠 계산대로 사는 것보다 몸 부딪히며 사는 게 더 즐겁다고.
어릴 때처럼. 애처럼.
너처럼.
서율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앳돼 보였다. 나를 좋아한다고 외치는 저 표정을 지금까지 어떻게 외면해왔을까. 성룡의 몸이 기울었다. 푹신한 소파가 소리도 없이 쏠려 움푹 바닥이 파이고 머리칼이, 이마가, 콧잔등이, 뺨이 스쳤다가 서로의 품과 맞닿았다. 뜨거워.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동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투명하게 들렸다.
반쯤은 말도 안 되는 오기로, 반은 확신으로.
"이사님, 나랑 그거 해볼래요?"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울고불면서 구질거리는 추한 연애.
세기말 영화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랑.
그런 거창한 거 아니어도.
그냥,
"좋...."
"응?"
"존나 뭐?"
성룡이 소리내서 웃었다.
이것저것 재면서 빙빙 돌리지 말고요.
그냥 좋다고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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