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할래요?

각설탕 하나, 사랑은 빼고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이상한 일에는 어느 정도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한 쪽 발목이 자주 꺾인다거나 있지도 않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거나 전날 입은 바지 주머니 속 사탕을 같이 세탁해버린다거나 하는 멍청한 실수를 포함해서 말이다. 도현이 심장 하나를 잃고 하나를 다시 얻었을 때, 아니 그보다 전에. 병원 침대에서 서서히 잠들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심장이 다 나아서 뛸 수 있게 되면, 아프지 않아도 되면, 아버지랑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할 텐데.

도현이 어느 날의 병원 옥상을 떠올렸다. 유리를 처음 만났던, 제 심장을 땅바닥에 처박으려 했던 그날의 날씨는 어땠던가.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옥상에서 회색 건물이 빽빽한 전경을 바라봤다. 이젠 저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심장이 쿵, 쿵. 귀가 먹먹할 정도로 박동하고 있었다. 이 심장을 이식받은 지도 햇수로 6년은 더 넘었다. 이젠 아프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와 대화로 한 시간을 훌쩍 보낼 수 있는데 뛰는 심장엔 멍이 번지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끼는 게 오늘은 비가 올 모양인지 건물 틈을 파고드는 회색 구름이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끼익,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대학생 시절부터 쭉 이곳에 살면서 손님이 옥상까지 온 적은 없었는데. 진 여사님은 병가, 유리는 방송국에. 누구지? 뒤돌아보자 체크무늬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희한한 복장의 남자가 서 있었다.

맨 인 블랙?

언제부턴가 닳도록 돌려보던 아버지의 비디오가 떠올랐다. 지금은 이미 다 늘어져 듣기 싫은 소리를 낼 뿐인 고물이었지만. 이상하게 꼬인 남자의 파마머리가 비구름이 몰고 온 찬 바람에 날렸다.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잠깐 시간 되면...

커피 한잔할래요?

21살의 도현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보살핌 덕에 무사히 원하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 앞의 24시간 영업 커피숍은 대학생들이 과제를 하며 밤새우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과제를 해도 사람 눈치는 볼 필요 없었다. 애초에 사장님도 대학생들을 반겼고 손님이라곤 온통 같은 학교 학생 뿐이었다. 음, 그러니까.. 싼데 맛이 없었다. 이런 곳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다른 학교 학생이 딱 한 명 있다. 과잠을 보고 건너편에 있는 이름있는 학교구나, 알았다. 매번 비슷한 시간대에 나타나는 남자는 도현이 과제를 하건 친구와 수다를 떨건 조용히 앉아 커피를 마시건. 늘 그대로였다. 과잠을 옆에 두고 정장차림으로 가만히 앉아서. 저 사람은 수업도 안 듣나.

도현의 눈엔 조금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노을 지는 하늘빛이 탁자와 그 남자의 옷이며 머리를 분홍빛으로 물들였을 때 가지게 된 감정처럼 묘했다.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는 그 눈은 반드시 우수에 가득 차 반짝였을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린 남자에 지레 찔려 의자를 고쳐 앉았다. 귀에 아주 작은 점까지 보일 정도로 밝은 노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도현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얼굴도 모르고, 도현이 아는 것이라곤 쓰다듬어 보고 싶을 정도로 동그란 뒤통수 뿐이다. 종일 밀크커피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식을 때까지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차를 세다가 한 모금, 두 모금. 커피는 몽땅 남기고 사라졌다. 수업이 끝나는 5시 반에 부랴부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래서 이번 수강 신청엔 꽤 심혈을 기울였다. 도현은 수업이 없는 금요일마다 남자를 보러 출석 도장을 찍었다. 사장님은 이제 도현의 이름을 외웠고 커피숍 쿠폰 도장칸은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 기간에도 도현은 말 한 번 붙여보지 못 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떨리는 손을 뻗으려면 떠나고, 슬쩍 다가가면 멀어지는 남자가 애석했다.

쿠폰에 찍힌 죄 없는 파란 도장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하나만 더 모으면 아메리카노가 공짜. 하유리보다 빨리 모으겠네. 시답잖은 내기를 하는 게 취미였던 유리와 도현의 이번 승부는 누가누가 쿠폰 도장을 더 빨리 모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번 건으로 맛있는 밥이나 얻어먹어야겠다며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려 고개를 털었다.

도현은 삐걱, 소리를 내는 옥탑 계단을 오르면서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간지럽히는 걸 느꼈다. 생각이 딴 데로 가있어 그랬는지 바람이 좋았던 게 도현뿐은 아니었는지 쿠폰은 이미 저 멀리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린 후였다. 입을 떡 벌리고 멈춰 텅 비어버린 손을 허망하게 바라보는데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도현보다는 머리가 길었고, 단정한 정장 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썼다. 맨 인 블랙? 당장이라도 지금까지 본 걸 잊어주셔야겠습니다. 할 것 같은 이 남자는 뭐지. 아버지의 비디오로 봤던 영화가 떠올라 온갖 망상을 할쯤 남자가 커피숍 쿠폰을 건넸다.

" 떨어져 있어서요. "

" 아, 감사합니다. "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는데 한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남자의 선글라스 틈으로 보인 눈가가 붉었다.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전한 도현은 남자가 먼저 뒤돌아 내려갈 때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저 사람이, 커피숍의 그 남자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데 걸린 시간은 단 1초.

사랑에 빠지는 시간 0.1초.

어떡하지.

도현의 시야가 어지러웠다. 미처 생각을 거치지 못 한 몸뚱아리가 휘청이더니 남자의 팔을 잡았다. 삐걱거리던 낡은 계단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도현 자신도 놀란 얼굴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 있는데 남자가 팔을 빼내려 하자 급한 마음에 커피 한잔할래요? 같은 구닥다리 대사가 튀어나왔다.

기어이 마주 보고 앉게 된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밀크커피. 도현은 머그잔만 보며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 사실, 저번부터 꽤 오래 맴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 ...... "

도현이 고개를 푹 숙이며 정중히 사과했다. 반응이 없자 힐긋 눈동자를 굴려 남자의 표정을 살피는데 까만 선글라스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며 분노하는 것 같아 더 고개를 내렸다.

" ... 말을.. 걸고 싶었는데.... 그, 죄송합니다... “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이었다.

" 괜찮습니다. "

" 네에... "

남자의 말에도 울적함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도현은 커피를 마시며 소리 내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입을 꾹 다물고 꿀꺽, 작은 얼음 조각까지 모조리 삼켰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 그만 가보겠습니다. "

네? 도현의 목소리가 삑, 음을 이탈했다. 이대로 가면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땀에 젖은 손만 쥐었다 폈다. 고민하느라 바빴다. 때마침 테라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 위로 쏟아지는 오묘한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그 끝엔 찬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밖을 응시하고 있지 않을까. 도현은 감히 상상했다.

" 좋아해요. "

남자의 시선이 다시 도현을 향했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런다고 뱉은 말이 없는 게 되는 건 아니었다.

" 죄송합니다. "

간결한 거절이었다. 빨갛게 불이 들어온 컴퓨터가 자리를 비운 사이 깜빡거리다 과제를 전부 날려버렸을 때도 이렇게 막막한 심정은 아니었을 텐데. 도현은 어렸다. 남자의 나이는 모르지만 남자보다도 어렸고, 커피숍 사장님보다도, 커피숍 알바생보다도 어렸다. 그래서 감정을 숨기는 게 서툰 만큼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못 하고 물었다. 이기적인 질문이었다.

" 왜, 왜요? "

" .... "

" 혹시, 제가 막, 싫습니까? "

" 아뇨. "

" 아, 제가 불편하게 해서.. "

" 아닙니다. "

도현의 물기 서린 눈동자가 방황하며 일렁거렸다.

"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그거뿐이에요.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밀크커피를 홀짝거렸다. 도현에겐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거워 순간 공기의 무게까지 위압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남자는 더 말을 얹지 않았지만 그 남자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떠났음을 도현은 알았다. 붉게 번진 눈가와 멍하니 바라보는 하늘. 어머니의 임종을 알리던 의사의 말. 아버지에게 형량을 고하던 판사의 목소리. 그런 것들 이후로 도현이 한동안 그랬으니까. 살며시 눈을 감자 고였던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사랑이란 때론 아무런 이유 없이 피어난다.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는 민들레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시인들은 주위를 이루는 모든 것을 낭만으로 노래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의미 없는 이끌림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도현은 사랑하고 있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도 그 마음마저 묻진 못한 남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올곧은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는. 빛나는. 반짝이는. 사람.

띄엄띄엄 생각을 정리하던 도현이 눈가를 꾹 눌렀다.

" 죄송해요. "

" ...네. "

" 이제 안 울 겁니다. "

남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머그잔을 내려놓자 탁자와 부딪혀 청아한 소리가 났다.

"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

" 뭡니까? "

남자의 말은 깔끔하게 가지를 쳐낸 나무처럼 굴곡이 없어 어떤 감정인지 유추하기가 힘들었다. 도현은 치기 어린 말을 이어 나갔다. 진심을 꾹 눌러담았음은 확실했다.

" 나중에 만나면, 그땐 꼭 이름을 알려주세요. "

" 이름이요. "

" 네. 제 이름이 궁금해지실 때쯤 찾아와주세요. "

" ..... "

도현이 꽤 고집 있는 어투로 힘을 주어 일렀다. 그럴싸한 핑계도 포함해서.

" 명함은 원래, 교환이니까. "

" ...예. 그렇게 하죠. "

무슨 생각인지. 방금까지 울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근거 첨부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머그잔 속 밀크커피는 반도 줄지 않았고 속을 모르게 하는 선글라스도 그대로였다.

" 나중에 커피 같이 마셔요. 쿠폰 안 쓰고 가지고 있을게요. "

" 이 커피숍. 내후년에 없어진답니다. "

" 와, 그때까지 안 오실 생각인 거죠. 너무하다. "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보네. 도현이 울렁거림을 부드럽게 넘기고 모른척했다. 괜찮아. 어차피 안 될 거란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 오기였다. 아니, 발악정도.

" 다시 만나면 먼저 말해주세요. "

커피 한잔하자고. 

남자가 쉽사리 긍정하지 않자 도현은 제 입 안에 남은 커피가 껄끄러울 정도로 쓰게만 느껴졌다.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의식했다.

어쩌면 너를 볼 때 내 눈이 이 사람과 꼭 닮아있을까.

오늘의 의뢰인은 건물주 조여사의 지인이었다.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며 사진을 보여줬는데 사무장님의 봉고차 아래에서 발견됐다. 의뢰를 받은 지 단 24분만에 해결된 사건이었다.

남자는 익숙한 길에서 이미 오래전 꽃집으로 바뀌어버린 커피숍의 흔적을 발견했다. 벽에 붙은 포스터가 그대로였다. 맞은편에 위치한 건물은 옆으로 크기를 늘려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있었다.

최도현 법률 사무소.

남자는 작게 웃었다. 먼저 이름 소개를 선수 친 친절한 사무소 설명에 대한 순수한 웃음이 반, 저 이름을 확신하는 본인에 대한 우스움 반이었다. 여전한 계단을 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삐걱거린다. 옥상은 멀지 않았다. 헐겁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연 많아 보이는 인영이 흔들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너를 통해 알게 된 그 눈은 노을 지는 하늘을 닮아있어 보고 있자면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터무니 없는 부탁에도 몇 년이 지나 여길 왔나보다.

난간에 기대있던 인영이 돌아보면 남자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최도현과 천지훈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마주친 순간이었다.

이번 글은 유독 민망해서 사족을 붙여보자면.. 둘이 사랑을 나눌 일은 없어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순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던 이십대의 최도현은 처음으로 마주한 천지훈의 눈을 보고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겠죠. 아마 그게 처음으로 내뱉을 말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찾아와줘서 그 말을 기억해줘서 고맙다고요...

저도 항상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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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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