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 장르 연성

고립된 계절 (1)

통모짜 by 모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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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공주님은 온종일 꿈나라에서 배회하신대

언젠가 왕자님이 찾아와 그 저주를 풀어줄 때까지

하지만 왕자님이 언제쯤 올까 그 아무도 모른다네

봄꽃을 닮은 공주님이 잠들어 왕국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네

그렇다면 공주님이 있는 꿈나라는 항상 봄일 테니

나는 거기서 살고 싶네

살고 싶네

 

 

고립된 계절 

 

귀족 아가씨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려한 드레스, 혹은 반짝거리는 보석? 그게 아니라면 함께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하하호호 떠들 수 있는 또래의 소녀들? 확실한 건, 이 모든 것이 전부 귀족 영애들에게 권장되는 ‘소품’의 항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품을 다 갖춘다고 해서, 완벽한 귀족이 될 수는 없다.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이 세상 귀족 영애들은 모두 똑같은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채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며 무도회장을 활보했을 테다.

아오이는 티 파티에서 점잖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런가요, 영애? 천편일률적이라고 왕이 한탄했다고 하던가? 저마다 자기의 존재감을 뽐내려고 구는 이들 사이에서, 조용히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삼켜내는 소녀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아오이는 자기에게 알게 모르게 몰린 시선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받아내며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받침과 부딪히는 소리도 나지 않고, 차를 들이켜는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하며 정숙한 예법이 돋보이는 작태였다.

역시 시부야 가의 여식은 다르군요. 사교계를 오랫동안 호령해 왔던 노부인이 오래간만에 여는 티파티였다. 노부인은 긴장하지 말고, 모두 이 늙은이에게 새로운 소식이나 전해달라는 의미에서 모두를 불렀다고 했지만 그녀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였다면, 애초에 이 사교계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아오이는 노부인이 자기에게 은근하게 시선을 돌리는 걸 모르는 척 회피하며 찻잔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마음과는 달리, 여전히 똑바른 얼굴의 소녀가 찻물에 반사되어 그녀의 눈에 담겼다. 아오이는 입 안의 살을 콰득 씹었다. 가끔 버티고 싶지 않은 때가 그녀의 내면에서 들끓었다. 버티기 힘들다거나, 버티기 싫다거나 하는 힘겨움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오롯하게 그녀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듯한 강력한 충동이 그녀의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오이는 이 찻잔을 던지고 유유히 일어서 이 정원을 박차고 나가는 걸 잠시 상상했다가, 이내 그 상상을 접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못하리라,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부야 아오이는 그 정도의 대담함을 갖추지 못한 인간이었으니. 아오이의 평가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해도 과한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녀가 그런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였다면 이미 이 티파티를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리라. 아오이는 잠깐 시선을 떨구었던 일도 없다는 듯, 방긋 웃으며 대화에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었다.

노부인은 그런 아오이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잠깐 멈추거라.”

아오이는 마부에게 가볍게 지시했다. 평소 입을 여는 일이 드물었던 아가씨께서 난데없이 지시를 내리자 마부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황급히 말을 멈추었다. 말을 달래는 소리가 이어지기도 잠시, 아오이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받침대도 없이 단차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드레스를 움켜쥔 채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가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아가씨! 시부야 가의 마부는 꽤 충직한 하인이었고, 그는 아가씨를 무사히 저택에 데려가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시부야 가의 가주는 아랫것들에게 가혹한 편은 아니었으나,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마부가 안절부절못하며 마차와 아오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자, 아오이는 드레스의 주름을 툭툭 털어내며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 마. 잠깐 바람 쐬고 싶은 거니까.”

“아가씨……. 제가 같이 가드려야 하는데, 지금 마차가…….”

마부는 마차를 골목 어귀에 세운 것이 영 신경 쓰이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모시는 주인 앞에서 해서는 취하기에는 무례한 태도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그가 앞에 둔 주인은 가장 유한 아가씨였다. 아오이의 입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아. 다녀오기만 할 거니까. 정말로 잠깐. 아오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흐려지는 하늘을 향했다. 눈이 깜빡이며 속눈썹이 나풀거리기도 잠시, 그녀가 약속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땅거미가 지기 전까지 돌아올게.

왕궁이 위치한 수도였고, 더군다나 이곳은 귀족 상점가였으니 귀족 아가씨 혼자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리 위험할 일은 없었다. 마부는 그에 안도하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이곳에서 꼼짝 않고 있을 테니,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오이가 인사를 하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손을 펼치지도 못한 채 다시 거둬들였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예법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라고 마지막 고삐를 당긴 것이다.

아오이는 천천히 걸었다. 상점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구획 역시 일정하게 나뉘어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부터 마음껏 누비던 곳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지금, 아오이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이곳을 자유롭게 오갔다. 자유. 아오이는 자기가 떠올린 단어에 흠칫하며 발을 멈췄다. 그녀가 지금 자유롭다고 생각한 건가? 누구를? 아오이, 그녀 자신을?

아오이는 제 옆에 위치한 의상실을 바라보았다. 최근 사교계에 데뷔한 후작가의 여식이 이 의상실의 드레스를 입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더랬다.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도 숙녀의 귀감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한 달 전, 이 의상실에 들러 티파티용 드레스를 맞추었다. 지금 아오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였다. 그녀가 가차 없이 틀어쥐어 주름이 그대로 새겨진 드레스.

볼품없어. 아오이는 자조 어린 미소를 짓고는 그 말을 정정했다. 드레스 말고, 내가. 아오이는 두꺼운 의상실의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상점가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귀족은 상점가를 거닐지 않는 족속이다. 그들은 원하는 가게 앞까지 마차를 타고 가, 용무를 끝마친 후에는 다시 마차에 냉큼 올라타 떠났다. 그들의 시야에 담기는 것은 걷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라, 말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세상이다.

그게 갑갑했다. 아오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몇 번의 심호흡을 거쳤을까, 아까보다 한결 호흡하기 편했다. 답답함을 느낀 것이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으나, 이번만은 정말 견딜 수 없는 느낌이었다. 아니, 견디고 싶지 않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아오이의 능력이 부족하여 이러한 규율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비극의 단초였다. 간혹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멍하니 자수를 놓던 천을 바라보는 일이 생기겠지만, 아오이의 능력이 그걸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아오이는 그저 충동에 맡긴 마음을 갈무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완곡한 표현으로 돌려 거절하며, 벽에 기대어 춤을 추는 이들을 바라보던 때와 똑같이. 시부야 아오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는 반듯함에서 비롯되었다. 모순되게도, 그녀는 가장 단정하게 제 마음을 가다듬어 그 안에서 조막만 한 자유를 누린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아오이는 우뚝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귀족 여식이 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짧은 외유도 끝이었다.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한 가슴이 원망스러웠지만, 아오이는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평정심을 끌어냈다.

그녀는 계속 이대로 살아갈 것이다. 시부야 아오이로, 혹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가장 익숙한 미소를 지은 채로, 찻잔을 소리 없이 들어올리며.

그러나 어째서 마음이 이토록 허망한 것인지. 아오이는 이미 주름 진 드레스를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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