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계절 (2)
혼담이 오가는 나이가 되자, 아오이가 가장 먼저 맞이한 초상화는 시부야 가문과 익히 알고 지내던 가문의 것이었다. 이미 얼굴도 알고 있는 사이에서 초상화가 의미가 있나요? 담담하게 묻는 딸의 얼굴이 어떻게 보인 것인지, 그녀를 똑 닮은 중년의 남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미가 있지, 관례와 과정은 중요한 법이다. 딱 떨어지는 완고한 말은 아오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렇군요. 아오이는 체념하지 않았다. 체념은 용기 있는 이들의 전유물이다. 그녀는 애초에 불만을 품을 만큼의 용기도 지니지 못한 비겁한 이였으니, 그녀에게는 체념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아오이는 초상화를 대충 훑어보았고, 그 영식에 대하여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혼담을 넣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였고, 아오이의 단정한 예법은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아버지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 초상화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앞에 들이밀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혹한 이는 아니었으나, 공과 사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초상화를 들이밀어 아오이의 반응을 확인해 보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혼담에 질색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어렸을 때처럼 무릎 위에라도 앉혀 교육을 시킬 생각이었을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벌써 흐릿해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아오이는 미소 지었다. 아버지의 교육과 어머니의 훈육을 절대적인 방침처럼 여기며 순종하던 때가 안개 낀 날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혹시 모르지. 그런 교육이 다시 필요해졌을지도. 엄격한 귀족 가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니, 농담으로라도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초상화를 보았을 때의 그 기분이란, 분명 교육으로도 교정할 수 없는 마음가짐이리라.
여전히 답답한 심경을 가누지 못하고, 아오이는 정원의 나무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분간 초상화를 건네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찾아온 탓인지 몸에 힘이 쭉 빠졌기 때문이다. 방에 올라가서 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오이는 늦은 오후의 햇빛 아래 자연스레 이완되는 몸을 굳이 꾸역꾸역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죄다 흔들고 지나갔다. 짓궂은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행태였다. 폭풍이라도 치는 걸까. 늦봄이 되면, 수도에는 으레 그렇듯 폭풍이 찾아왔다. 수도를 둘러싼 방어진에 대륙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딪히며 폭풍으로 변모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아오이도 그 원인을 잘 몰랐다. 그저 폭풍이 이는 시기가 오면, 수도에 있는 이들은 모두 집 안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달이 차오르는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폭풍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은 아오이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그렇다면 당분간 혼담이 들어올 일은 정말 없겠네. 자신도 모르게 안도한 소녀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방만하게 누웠다. 정원사가 보았다면 아가씨를 연거푸 부르며 달려왔을 작태였지만, 알게 뭐란 말인가.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 수도의 분위기는 금세라도 긴장이 풀릴 것처럼 느슨해지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은 귀족 가의 여식이라도 다를 것 없었다. 높은 담장 위로 보이는 하늘과 나뭇잎 사이를 투과하는 햇빛의 색깔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오이가 때늦은 휴식에 열중했다.
“─꿈나라에서 배회하신대.”
낯선 노랫말이 들린 것은 아오이의 눈이 슬금슬금 감기려고 한 때였다. 졸음이 쏟아져 흐릿하게만 들리는 노랫말 사이로 익숙한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귀족 시가지에 어째서 저런 유행가가 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저런 유행가가 수도에 나돌고 있는 사실 자체를 꿈에도 몰랐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아오이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노랫말에 귀를 기울였다. 평민 아이들을 이용해 노래를 퍼트려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이들의 일화는 이 대륙에 군주가 나타났을 때부터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역사책에 나온 일화와 이 노래는 궤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주님이 있는 꿈나라는 항상 봄일 테니─.”
공주님. 아오이는 왕국의 유일한 공주님을 떠올렸다. 태어난 이후부터 한 번도 바깥 활동을 하지 않은 공주는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얼굴도, 성격도, 머물고 있는 궁의 이름까지도 모두 감춰진 존재였다. 키미시마 사키. 왕조의 성을 이어받은 왕국의 유일한 적자로, 시간이 지나 성인식을 치른다면 왕국을 이어받으리라고 예상되고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바깥 활동을 하지 않은 왕국의 후계자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게다가 이런 노래까지…….’
이 노래는 명백하게 공주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아오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의미가 있나? 그녀가 치열하게 고민한다고 해서, 저 노래가 멈출까? 그러진 않을 것이다. 시부야 가문은 대대로 수도에서 떠나지 않았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지만 왕당파보다는 귀족파에 가까운 가문이었다. 저런 유행가가 노리고 있는 대상이 왕위 계승권자인 공주인 이상, 아오이가 부친에게 이에 관하여 언질을 준다고 해도 달라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럴 텐데도. 아오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을 퍼뜩 떴다.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곧 폭풍이 찾아올 테니, 움직일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그러니 말해야 하는 것이라며, 지금 눈감고 지나갈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는 것이라며, 아오이는 자기 자신을 몇 번이고 어르고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살고 싶네─…….”
그녀가 정원을 뒤로할 때까지, 노래는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봄꽃을 닮은 공주님은 어두운 방 안에서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시녀를 부르면 해결될 일이었으나, 공주를 모시는 시녀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자리를 채운 하녀들은 모두 눈이 먼 자들이었다. 공주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제가 뻔히 할 수 있는 일을 지시하는 것에 본능적인 거북함을 느꼈고, 그때마다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하기 시작했다.
사키는 이 궁에서 혼자였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이들은 공주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공주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령과 비슷하였지만 유령은 아니었으니, 사키는 봄이 한창인 계절에 겉도는 병든 나무 같은 존재였다.
사키의 마지막 시녀가 죽은 지도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그 아이는 먼 변방의 영지에서 올라온 공주 또래의 영애였다. 아직 앳된 얼굴로 방긋 웃으며, 처음 만난 공주님에게 겁을 먹었다가도 이내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리라 작은 손을 가슴에 얹고 맹세했다.
그 아이는 사키의 눈동자 색을 가족에게 발설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다. 역모죄였다. 울부짖는 공주를 견디다 못한 왕은, 그 아이가 왕가에 대한 강한 불신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발설했으니 그 죗값을 무는 것이 당연하다고 부연했다. 어린 공주님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의 연속이었지만, 사키는 외로워진 자기의 옆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이야. 그 애는 분명히 잘못하지 않았는데, 사키의 봄꽃같은 눈동자는 명분이었다. 아마도 그 애가 어린 마음에 부모에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왕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사키는 그제야 자기가 속한 세계를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병약하여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그녀가 이 왕국을 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왕과 왕비가 걱정하는 것까지도.
공주의 눈동자에 피었던 봄은 금세 져버렸고, 혹독한 겨울이 도래했다. 살아남아야 했지만, 사키는 살아남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왕국에 도래하는 봄은 진정한 봄이 아니게 되었다. 그 봄을 진정으로 피우기 위해서는 공주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이 그 기운을 거두어야만 했다.
곧 폭풍이 찾아올 것이다. 사키는 건들거리던 창가를 단단하게 고정한 후,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그러나 늦봄의 폭풍 역시 공주님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을 몰아낼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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