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 주세요, 부디
디지몬 어드벤처 02 할로윈 연성
동그란 정수리 위로 데굴데굴 구른 사탕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지런히 펼친 책에 시선을 고정하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금방 주울게!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사과의 내용을 곱씹을 새도 없이, 이오리는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학기 초보다 퍽 어두워진 형광등 빛을 모조리 반사한 포장지가 눈에 띄었다. 이내 이오리의 시야가 알록달록한 것들로 가득 찼다.
“히다 군! 오늘 할로윈이잖아. 사탕 좀 먹을래?”
이오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올라갔다. 손바닥 안에 사탕을 잔뜩 움켜쥔 소녀가 웃어 보였다. 팔에는 호박 모양 바구니를 건 채였다. 이오리는 학교가 나름 시끌벅적했던 것을 떠올렸다.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 와중, 얼굴에 겉옷을 뒤집어쓰고 복도를 종횡무진하던 아이들의 모습도. 오늘따라 학교가 좀 소란스럽네. 무심코 넘겼던 장면이 마치 퍼즐처럼 하나씩 모여 지금의 상황을 완벽히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되었다.
“혹시 사탕 싫어해?”
주변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의 원인이 이것이었나 보다.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이오리는 슬쩍 교실 내부를 흘깃거렸다. 아이들의 책상에 하나씩 사탕 껍질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따가 청소 시간이 고달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이오리는 손을 들었다. 봉긋하게 솟아 있는 사탕의 산에서 일부를 떼어내듯 사탕 하나를 집은 그가 담담하게 감사를 표했다. 이오리의 동급생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는, 뒷자리의 다른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순례라도 하는 것 같네.’
할로윈의 정의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탕을 손안에서 굴리고 있자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엄습했다. 이오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년이 손을 휘적여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주의를 끈 보람도 없이, 이오리는 소년이 입을 열기 전부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사탕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로, 소년이 중얼거렸다.
사탕 안 먹어, 히다? 할로윈의 마력은 대단했다. 다른 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사탕의 안부까지 상세히 물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대화가 성가시지는 않았다. 다만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하여 이오리는 부러 가방을 열고 사탕을 툭 떨어트렸다. 어째서 지금 사탕을 먹지 않느냐고 묻는 듯, 허망한 얼굴의 소년에게 조곤조곤 읊조리기까지 했다.
“이빨 썩으니까, 집에 가서 먹을 거야.”
“이빨 썩으니까, 집에 가서 먹는다고?”
편의점 선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이오리가 시선을 올렸다. 오늘따라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일이 잦다고 생각하는 건 덤이었다. 이오리의 길을 막는 듯─물론, 막을 의도는 없었으리라─ 기세등등하게 선 소년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넥타이는 어디에 던져 버리고 온 것인지, 자유분방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이오리는 가디건의 소매를 다시금 점검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이스케 상.”
“미야코한테는 사탕 안 먹는다고 해놓고, 왜 사탕 코너에서 떠나질 못해?”
이오리의 빈틈을 발견하고 꼬집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그저 순수한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다이스케가 이오리를 놀리려는 의도로 발화했더라도, 이오리는 별 상관하지 않았을 터다. 토마토 하나를 남길 수 없다며 씨름하던 소년은, 이제 먹기 싫은 토마토 하나 정도는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가 한 말에는 부끄럼 한 점 느끼지 않았다.
다만 다이스케가 그다음으로 한 질문이 문제였다. 몸은 일으켰지만, 붙박인 것처럼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과자가 가득 진열되어 있는 선반을 요령 좋게 잡은 채로 비딱하게 선 다이스케가 오히려 자세를 바로잡을 정도였다. 이오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진지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이스케가 씩 웃으며 이오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사탕을 먹고 싶은 거지? 좋아, 내가 사 줄게!”
“……네? 아닌데요.”
“아니긴 뭘 아니야. 자, 사양하지 말라고.”
다이스케가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젤리를 하나씩 골라 손에 쥐었다. 계산대 근처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미야코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다이스케는 연장자다운 행동에 심취한 나머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결국 이오리는 다이스케의 손으로부터 떨어지는 간식거리를 손바닥 가득 담아야 했다. 가방에 넣으려다가는 떨어트릴 것만 같아서, 이오리는 이대로 들고 가는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다이스케에게 속속들이 제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도 멋쩍었고, 무엇보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오래간만의 형 노릇에 뿌듯해하는 다이스케의 기분을 망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여 이오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편의점을 나섰다. 미야코가 뒤에서 다이스케에게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냐며 여상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아쉽게도, 문이 닫히는 바람에 그 이상의 대화는 들을 수 없었지만.
“이오리!”
현관문을 열자마자 우파몬이 이오리에게 다가왔다. 이오리는 우파몬을 보자마자 손바닥을 내렸다. 데굴데굴 구른 사탕 하나가 우파몬의 눈앞에 떨어졌고, 우파몬은 눈매를 내렸다. 이오리, 왜 또 사탕이야? 평소라면 사탕이나 초콜릿과 같은 간식거리를 환영했을 텐데, 그런 우파몬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러나 우파몬의 이러한 태도는 당연했다. 이오리는 한숨을 삼키며,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이오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다가는 동화 속의 남매처럼 사탕을 줄줄이 떨어트릴 판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빠르게 방에 들어가 사탕을 우수수 쏟았다. 가방에 든 몇 개의 사탕 역시 한 곳에 모아두는 걸 잊지 않았다. 사탕 봉지가 서로 부딪치며 바스락거렸다. 길거리에 널린 낙엽이 부딪치는 소리와도 비슷했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얼마 안 되는 나뭇잎을 거세게 흔들어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이오리는 바구니에 든 사탕을 뒤섞었다. 어떤 이가 찾아올지 모르기에, 사탕의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이오리가 며칠 동안 바쁘게 사 모은 것들이었다.
‘학교에서도 할로윈으로 소란스러울 줄 몰랐어.’
이가 썩을 테니, 사탕은 집에서 먹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달콤한 것을 섭취하는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니 말이다. 그러나 이오리가 단지 그 때문에 사탕을 모조리 집에 가져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오리에게 사탕 자체는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었으니까. 소년은 바구니를 휘젓는 손을 빼내지 않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우파몬.”
우파몬은 이오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책상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그러나 이오리는 우파몬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오리의 손길은 정갈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사탕은 흐트러지고, 바구니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혔다. 동그랗고 매끄러우면서도, 봉지 특유의 절단면이 가끔 미약한 고통을 선사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듯한 소리가 사위를 울리는 가운데, 우파몬은 이오리의 말을 기다렸다.
“올까요?”
주어가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우파몬은 그 질문이 내포한 의미를 수월하게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우파몬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응! 오지 않을까? 순진무구한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억눌렀다고 해도 쉬이 숨겨지지 않아서, 이오리에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이오리의 손이 멈췄다. 사탕 봉지의 까슬까슬한 면이 그의 손등을 콕콕 찔렀다.
디지몬은 단순히 디지털 공간에서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고, 디지털 공간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외피를 입은 채 공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애초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이면에 존재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야코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와 타케노우치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이오리가 생경한 감흥을 느낀 것은, 외투를 챙겨입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죽은 영혼이 살아 돌아온다는 할로윈 날에는 일부러 귀신 분장을 하여, 돌아온 영혼과 악령을 속인다고 한다. 그 말은 곧 할로윈에는 인간이 아닌 것과 인간을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기들을 흉내 낸 탓에, 누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한 영혼은 조금 성을 낼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인간이 자기를 발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라면, 인간이 아니되 인간의 세상에 잠깐이나마 섞이고 싶은 존재라면.
그들에게 할로윈 밤만큼 적절한 날이 없으리라.
이오리는 사탕을 한 줌 크게 쥐었다가 힘없이 떨어트렸다. 우파몬은 이오리에게 그들이 오리라고 말했다. 질문한 당사자로서는 모순되지만, 이오리는 자신이 기다리는 이들이 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실 그가 정말로 ‘그들’이 오기를 바라는지 확언할 수 없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이오리는 사탕을 모았다. 조금씩 사 모은 사탕이 바구니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아졌다. 이제 이오리는 그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그는 어떻게든 이 사탕을 다 소모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니되 인간의 세상을 알고 있는 이들이 찾아와 줘야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잠긴 진심은……. 이오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인간도 디지몬도 아니며, 이승과 저승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도 찾아올 수 있을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의문이었다. 달콤한 사탕을 혀 위에 굴릴 수도 없는 이가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찾아올 수 있을까?
그 순간이었다. 이오리는 불현듯 그가 떠올리는 걱정의 방향성이야말로 소망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수많은 나비로 화한 이가 찾아오기를 바라서 끝나지 않는 걱정을 한 것이라고. 막상 찾아온다고 해도 그 손에 사탕을 가득 쥐여 줄 수도 없는데도. 이오리는 바구니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러나 손끝에는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오리.”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위로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아마 착각은 아니리라. 조금씩 접촉하기 시작한 두 세계가 조금 더 문을 연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질책받지 않을 터였다. 여상하게 생각한 이오리는 금세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떨어져 나간 시선은 다시금 광활한 하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탕 껍질의 반질반질한 면에 반사된 하늘 위로 익히 본 적 있는 풍경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우파몬, 지금…….”
마치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서로 다른 비유에 공통점을 찾자면, 사람의 손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현상에 빗댔다는 점이다. 급하게 사탕 바구니로 시선을 돌린 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소년은 웃음을 터트렸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어쩌면 웃음보다는 감정을 토해내는 방식에 더 가까운 행위였으나, 그 발화의 의도만큼은 웃음의 원인과 비슷하리라.
사탕 위로 선명한 형태의 무언가가 떠올랐다. 날갯짓하듯이 몇 번 모습을 웅크렸다가 편 그것은 사탕 위에서 잠시간 떠돌았다. 어느새 다가온 우파몬이 이오리의 곁에서 속삭였다. 이오리, 그 말 해야지. 정작 사탕을 안 주면 장난을 친다는 으름장도 못 들은 입장으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이오리는 사탕이 제 주인에게 찾아가기를 원했다.
“마음대로 가져가세요.”
찾아가 주세요, 부디. 이오리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늘 너머에 존재하는 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비는 분명히 응답했다. 사탕을 한 아름 몸에 이고 떠날 수는 없었으나, 한순간 이곳에 내려앉을 수는 있었다. 한순간 겹쳤던 세상은 순식간에 분리되었다. 유성이 떨어지듯 하늘을 유영했던 어떤 이의 염원은 금세 부스러져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오리는 사탕을 쥔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원한 대로 이 사탕 바구니가 비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탕 바구니를 준비한 이유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이오리는 사탕 껍질을 조심스레 깠다. 딸기맛 사탕이 우파몬의 입에 쏙 들어갔다. 오늘 하루 학교에서 줄기차게 들은 말을 읊조리며, 이오리는 자신의 입에도 사탕을 하나 털어 넣었다.
Trick or Treat.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