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하나 니노

문제: 파란(2)

모든 멸망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감정을 동반한다. 체념과 후회와 우울 같은 것들.

 

그는 생각한다. 멸망의 사연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전할 몇 가지 말들을 생각해 본다.

 

첫 번째. 당신이 옳았네요. 신은 실존했고, 멸망은 지척까지 다가왔어요. 두 번째. 모르겠고 일단 기도나 해야겠네요. 세 번째. 어째서? ……팔백이십아홉번째.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많은 것들을 체념하지 않았을 텐데요. 팔백삼십 번째. 음악 같은 거, 사실은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어. 수취인이 부재한 편지 같은 후회들을 죽 늘어둔다. 늘 애매한 마음가짐으로는 원망조차 올바른 곳에 털어놓을 수도 없는 법이다. 원하지 않는 재능은 언제나 있느니만 못 한 것이다. 그는 안다. 천재라는 허명만큼 사람을 옭아매는 것도 또 없고, 목적이 분명한 애정만큼 숨을 틀어막는 것도 또 없는 법이다. 과거가 의도치 않게 모두에게 밝혀졌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했었던가. 억울하지는 않으냐고 물었지만 정말, 정말로 그렇지 않았다. 체념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체념하는 데에 익숙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지만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공감할 수 없는 타인을 위로하는 일이다. 그도 알고 있다. 그게 기만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말 몇 마디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썩 수지가 맞는 일이다.

 

당신은 언제나 이름 모를 신에게 기도를 했고, 멸망의 근원을 알게 된 지금 당연히 당신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필요로 한다. 당신의 구원은 절대자다. 당신이 지닌 비극의 총량은 대관절 어떻게 되기에 범인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어 저 먼 이방의 신에게까지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말인지. 줄어든 대화의 원인은 언제나 성장이고, 부쩍 짧아진 바짓단만큼 애잔한 것도 또 없다. 성장의 가장 큰 후유증은 역시 하나다.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보는 것들이 달라지면 결국 삶을 채우는 요소까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저 먼 미래의 나는 지금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신파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야 없다지만 어쩐지 자꾸 그렇게 되어가는 것만 같다. 어른이 되면 조금 더 높아진 시야에서 삶을 관조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다. 다만 나이를 조금 더 먹어도 당신의 구원이 결코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삶을 바닥으로 내다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자신의 경험에조차 공감할 수 없으니 마냥 하릴없이 다정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정하다는 건 결국 누구에게도 애정을 쏟아붓지 못한다는 뜻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너무 많이 되짚어 보아 새삼스러운 것들을 잠시 되짚어본다. 천재라는 허명과 있느니만 못 한 재능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이내 더 큰 비극 앞에서 가치를 잃는다. 어떤 감정이 더 큰 감정 아래 빛을 잃는 것처럼 어떤 고민들은 더 큰 고민 앞에서 퇴색되게 된다. 그것이 그가 아는 삶의 순리고, 진리다.

 

원래 세상은 멸망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예고된 멸망도 어쩌면 당연한 순리일지 모르겠다. 시작과 끝은 태초부터 하나. 수없이 기록되고 기억된 반복으로 인해 점차 닳아가는 공기의 수명. 언젠가 찾아올 끝. 태어난 모든 것들이 죽어가듯 세상도 어쩌면 자신의 끝을 기다리는 존재에 불과했던걸까. 세상 모든 것들에 인격이 있으리라 사고하는 물활론적 사고에서 여전히 졸업하지 못했다.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그건 핑계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그는 대관절 무엇을 그리워했던 걸까. 햇수를 셀 수 없을 만큼 긴 삶은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였을까. 멸망은 과연 그에게 있어 일종의 향수鄕愁였던 걸까. 그렇다면 그걸 막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애초에 이건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일까. 운명을 믿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건만. 세상에는 한낱 개인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말을 여태 안일하게 일종의 저주나 체념이라 생각해 왔던 건 자신이 아닌가. 비가역적인 형태로 손상되어 가는 세계. 일정이 정해진 끝. 범람하는 파도와 물에 잠겨드는 기억들. 그 끝은 그렇다면 일종의 축제가 되는 걸까. 그야 축하할 일이다. 영원히 이어지던 노스탤지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방이다. 어쩌면 탈출이고.

 

멸망은 늘 여름 바다의 파도와 함께 온다. 모든 운명이 그렇듯.

 

눈 앞에 파랑이 선연하다. 그리고 그는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하늘을 본다. 시선을 조금 더 멀리 흘리면 그곳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다. 파랗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하늘과 깊은 산속의 신사. 지나친 파란의 흔적들과 그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멸망의 기억들. 그건 어쩌면 운명 같고, 청춘 같다. 얌전히 눈을 감고 동의어로 묶을 수는 없겠지만, 유의어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흰 생각들이 뇌리를 가득 메우게 둔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문제는 조금씩 작은 사념들로 분해된다. 세상 끝에서 출발한 거대한 파도가 부서지고 부서진 끝에 아주 작고 미세한 포말로 화하는 것처럼.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결국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가 쌓아온 수많은 반복들은 결국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걸까. 그건 그저 세상을 닳게 하는 일종의 장해였을까. 우리의 궤적은 결국 세상 한 구석에 마련된 재난이었을까.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바라는 일이 죄가 되는 줄은 몰랐다. 아니, 정말 몰랐나? 부정하고 싶어 외면하던 것을 이제야 직면하게 된 건 아닐까.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고민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당장 멸망이 도래해도 좋다, 벌써 팔백번이 넘게 미뤄진 축제 쯤이야. 한 번쯤 더 미루게 되어도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멸망을 한 회차 더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한들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문제 1. 여전히 음악을 계속하고 싶은가.

문제 1-1. 멸망이 지척에 다가왔다 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문제 2. 나는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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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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