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들리 에버 애프터

신도 야근을 하나요? 여령 | 여수연

가만한 나날 by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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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즌 2가 출시되어 덧붙입니다. 

- if : 플레이어가 5장에서 천산을 내려온 후 활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않은 세계선으로 읽어 주세요. 

- 겪게 해 주고 싶은 일을 적었습니다. 드림도 뭣도 아니고 진짜 애매한...... 뭐든 괜찮으신 분만! 

1.

여령은 모든 기억을 들고 산을 내려가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낯설었다. 겪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전신을 끌어내리는 탈력. 사고를 집어삼키는 무력감. 그리고 무엇도 남지 않은 공허함. 빈 자리에 뿌리를 내린 복수심이 숨을 죽인 채 언제든 몸집을 불리려 들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웠고 동시에 깊은 물에 빠져 호흡하는 기분이 들었다. 언뜻 보기에 고요했다. 삶이 그녀에게 남았다. 수연이 없는 나날이 남았다. 붙잡아 둘 이유를 떠올리는 시늉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은 그날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야 했다. 딱 한번인 인생을. 언젠가 함께했던 삶을. 수없이 상상한 끝은 결국 생각으로만 그쳤다.

오랜 시간 비어 있던 집은 사람 사는 태가 나질 않았다. 여령은 감정보다 먼저 일상을 재건축했다. 거처를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관두었다. 너무 많은 추억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똑바로 바라볼 자신도 없었지만 확실하게 뒤로 할 자신도 없었다. 유예에게는 종종 미안했다. 말수가 적고 속이 깊으니 기척 없이 제 상태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모르지 않았지만 그의 감정이 우선은 아니었다. 여령은 여력이 없었다. 함께 슬퍼하며 화를 내 주던 친구는 사라졌다. 눈 내리던 날의 행운은 두 번 찾아올 일이 아니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매일 아침 얼굴을 비추는 것이 그녀 최선의 배려와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유예는 목숨을 담보로 자신과 계약했다. 위태로운 모습을 여기서 더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령은 대부분의 것들을 덤덤하게 넘겼다. 그러기 위해 노력했는데, 관성에 행위를 의탁하길 택했다. 절전 모드의 전자기기처럼 굴었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태워 버린 빵은 군말 없이 삼켰다. 알아서 운동화 끈을 묶고 아침저녁으로 인사와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동거인과 돌아가며 꼬박꼬박 설거지를 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무리해서 사회로 기어 돌아갔다. 걱정은 만류했고 제게 붙은 경호를 알아챘을 땐 내버려 뒀다. 실제로 백의 비호가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닌 누군가 덤비면 혼자 당해내지 못 할 테니까. 그런 건 바라지 않는 결말이다. 자신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복귀한 회사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사무실에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적인 대화가 아예 사라진 걸로 보아 적당하게 와전이 돌았거니 짐작했다. 결론적으로, 여령은 어느 궤도로 삶을 돌려 놓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딱 하나에 날카롭게 반응했는데, 복직 후 맞이하는 첫 주말이었다. 날이 맑았고 여령은 잠을 설쳤다. 그럼에도 도무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방안 어느 곳이든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살다 살다 휴일을 꺼리게 되다니⋯⋯. 어색한 발상이라 이질감이 들었다. 기껏 공백을 메워 보려 삶을 재촉한 것이 무색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괴로웠다. 초조함을 다스리는 게 어려웠다. 온통 혹사 당한 손톱에 기어이 또 입을 댔다. 정신 돌릴 곳이 필요했다.

현실로 다시 그녀를 끌어온 것은 아픔이었다. 재채기 같은 신음이 나왔다. 제법 벌어진 손끝에서 피가 솟았다. 손가락을 타고 손등으로 흘렀다. 노크만 하고 방에 들어선 유예는 기겁한 눈치였다. 성큼 다가와 부드럽게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아주 순식간이었다. 자격자가 사자를 뿌리치고 명령했다. 

손 치워요. 필요 이상의 언사였다. 아차 싶었지만 늦은 거다. 여령은 급하게 고갤 푹 숙이고 더듬더듬 변명했다.

"치유하면⋯⋯ 다른 상처들도 같이 없어지면 어떡해요."

저는 잊어 버리고 싶지 않아요. 가리키는 이는 없었지만 둘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꽉 들어찬 방안이 고요했다.

"주인님."

"네⋯⋯."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면목이 없었다. 곧 낯익고 낮은 음성이 깔렸다. 주인님이 잊고 싶지 않은 건 손대지 않겠습니다. 죄책감은 제 몫이니 고개 드세요. 우직한 발언. 여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마음 편하자고 목 끝까지 차오른 미안하단 말을 건넬까 봐 그랬다.

유예 씨가 유능한 건 알아요. 지금은 그냥 결함 상태라 그래요. 손끝에 피를 매단 자격자가 부적절하게 농담했다. 염려받고 싶지 않았다. 자책 없이는 걱정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신경이 벼랑 끝이었다. 그걸 알아서 그저 가볍게 대하고 싶었는데, 덧붙일수록 건너편 표정이 애매해져 여령은 그만 말을 삼갔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일이다. 치료하면 되는 일이다. 시간이 걸린들 새살이 돋아나고, 흔적이 남을지언정 아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일들이 있다. 말끔히 나아 툭툭 털고 일어설 수는 없는 일들이 있다.

여령은 피가 떨어지는 바닥을 보면서 놀라지 않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모든 게 제 일 같지 않았다.

-

머리 위로 보이는 하늘이 옅고 밝았다. 올해 찾아온 겨울은 유달리 따뜻했다.

얇은 외투만을 입어도 무방한 날이 이어졌다. 지는 노을이 매일 아름다웠다. 부는 바람이 시리지 않고 부드러웠다. 그러니 여령에게는 계절마저 부재를 슬퍼할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자 얼굴 맞대고 앉아 있기가 민망했다. 사과할 때를 놓친 미안함과 과민 반응의 죄책감이 혼재했다. 여령은 어물거리다 결국 자릴 박찼다. 도망치듯 밖으로 향했다. 잠시 돌아보니 따라올 기색은 아니라 당부를 삼켰다. 휴지를 몇 장 챙겼다. 지혈은 건너뛰고 이미 흐른 것들만 문질러 닦았다. '저녁에 돌아올게요.' 최소한의 예의로 문자 하나 남겼다.

목적지 없이 나왔으니 갈 곳도 많지 않았다.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고 싶었건만 익숙한 곳으로 발이 닿았다. 집 앞 골목, 가로등 밑, 인형 뽑기 기계, 병원, 카페, 강변. 하나같이 수연과 함께 지나쳐 걸었던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강변에선 모두가 웃고 있었다. 딱 저 혼자만 안색이 시꺼멨다. 여령만 초대장 없이 파티에 온 불청객 같았다. 걸음이 질질 끌렸다. 순간 주눅이 들었다. 누구하고 눈 마주치고 싶지 않아 고갤 숙였다. 

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왔다. 아마 유예는 그 자리에서 치유의 능력을 쓸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한참을 앞서 나갔다. 전적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지만 여령은 원래 제 탓을 먼저 찾는다.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민망해서. 순간이나마 하대한 것이 미안해서. 엄청 무안했겠지⋯⋯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인파와 동떨어져 움직이던 여령은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꿍얼거리다 힘을 풀었다. 이런 상태로는 깊이 생각 하지 않는 게 이득이다. 사고에 낀 불순물이 떨어지도록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힘을 좀 풀고. 기대서 바람 쐬는 시간 같은 게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여령은 숨을 깊게 마셨다. 여전히 주변 공기가 부드러웠다.

불현듯 울음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갤 돌리자 아이가 엎어져 있었다. 달리다 넘어진 모양인지 자세가 요상했다. 점점 아픔이 밀려오는 것 같이 보였는데, 얼마 안 지나 있는 대로 입을 벌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보호자인 듯 저만치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이들이 보였다. 안쓰러워야 할 텐데 어쩐지 귀엽고 웃음이 나서 입술을 꽉 물었다. 아마 수연이 있었다면 같이 웃었을 것이다. 웃다가, 가장 먼저 다가가서 다정하게 일으켜 주겠지. 먼지 털고 눈물을 문질러 줬을 것이다. 수연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를 사랑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을 했으니까.

아, 또다시.

여령은 다시 한 번, 불현듯 깨닫는다. 결국 언제라도 삶 속에서 수연을 겹쳐 보게 될 것임을. 추억은 노력으로 틀어막을 수 없는 영역에 있음을. 그러니 앞으로 몇 번이나 지금처럼 예고 없이 슬퍼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마주해야 할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수용해야 했다. 자주 또 가끔씩 네가 튀어나올 것이다. 문득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멈춰야만 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여령은 강가로 눈을 돌렸다. 빛이 부서지고 차오르는 물 위를 응시했다. 가슴께가 시큰했다. 오지 않은 미래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날카롭게 긁었다. 여러 번 새겨 봐도 자신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런 게 적응이 되기는 하는 거야?

좀만 방심하면 튀어나오고⋯⋯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세상 일 다 갑작스럽지 뭐⋯⋯.)

나 아직 수연이랑 헤어질 결심이 안 서. (결심까지?)

그냥 내버려 두지 내가 알아서 하게⋯⋯ 때 되면 잘할 텐데. (때가 어딨어? 완벽한 때라는 거 다 허상이야.)

알아. 무서워서 그래. (뭐가?)

슬픔이 오는 것도 무서워 나는 아픈 게 싫으니까. 근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다음에, 이런 아픔에도 수연이가 없는 일상에도 익숙해지는 나를 보는 게 싫어. 싫을 것 같아. 그게 무서워. 지금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계속 떠올리게 될 거고⋯⋯ 그치만 그러다 언젠가는 아프지 않은 채로 넘기게 되면, 어떡해? 괜찮아지는 모습도 싫어. 혼자 행복할 때마다 내가 너무 미울 것 같아. 그런데도 나는 지금처럼 도망쳐서 아무 곳이나 가 있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      )

⋯⋯.

(      )

⋯⋯.

(      )

⋯⋯.

(어휴⋯⋯ 이 바보야.)

뭐? 

(뭐, 너 부르는 줄은 알아?)

야. (뭐.)

발끈하려던 여령이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누가 대답하는 거야?

2.

아니다 싶으면 잠깐 멈추고 둘러보자.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혹은 어디로 향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위한 일인지.

여령은 휘둥그레하고 주변을 살폈다. 옅고 맑던 하늘, 아직 그대로다. 사람들 소리? 좀 작아졌지만 들린다. 바람도 여전히 상냥하다. 달라진 게 없는데? 몇 번을 미어캣처럼 휙휙 둘러보고 나서야 다시 바로 앉았다. 그새 깜빡 졸았나⋯⋯. 그럴듯한 의문이 스친다. 팔자 심하게 좋다. 긴장 좀 풀렸기로서니 잘도 잠이 드네 벤치에 구겨져서⋯⋯.

"왁!"

그런데 아주 갑자기. 무언가 확 덮쳤다. 여령은 깜짝 놀라 덩달아 빽 소리 질렀다. 크고 날카롭게. 아주 오랜만에.

뒤에서 들려온 소리는 제 것이 아니다. 동시에 목에 감긴 팔도 제 것이 아니다. 근데, 제 것보다도 익숙하다. 여령은 소리 다 지르고 삽시간에 굳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설마설마한다. 이거 분명히⋯⋯. 삐걱거리며 고갤 돌린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분명⋯⋯.

돌아보면 보이는 그 얼굴이 너무 익숙해서,

"너 뭐야?"

눈을 맞추는 순간 안도하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황당하게도.


사랑하는 친구와 재회한 건에 대하여.

첫 질문 : 너 뭐야?

잠시 후 두 번째 질문 : 너⋯⋯ 뭐야?

두 번 다 황당하긴 매한가지였는데 어쩔 수 없이 어투가 변했다. 세 번째부턴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뻐끔거렸다. 바쁘게 눈을 굴려 살폈다. 눈앞의 사람이 진짜인지. 아니 애초에 사람이 아닌 건가? 도통 뭔가를 알 수 없었다. 여령이 자신을 부산스럽게 인지하는 동안, 여수연은 가만히 기다렸다. 여령을 들여다보면서. 입 모양조차 사그라들 때까지. 마찬가지로 서로를 바라볼 때까지. 그리고 그제야 씩 웃는다. 웃더니 껴안는다. 아까처럼 확. 여령은 여전히 굳어 있다. 끼쳐오는 온도와 향기. 그리고 귓가의 낯익은 음성.

보고 싶었어.

그 말에 결국⋯⋯ 여령은 눈물을 터트렸다. 품 안에서. 마침내.


"너 진짜 뭐야⋯⋯."

세 번째 질문. 이번엔 말끝에 울음이 가득 묻었다. 뭐긴 뭐야 여수연이지. 대수롭지 않게 답하니 괴롭게 찡그린다. 그거 말고 진짜 뭐냐고⋯⋯ 너 어떻게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너 진짜야? 거짓말이야? 환상이야? 환각이야? 나 미쳐 버렸어? 그것도 아니면⋯⋯.

"나 결국 죽었어?"

"야, 너는 뭔."

어디까지 가나 듣던 수연이 기겁했다. 살벌해졌다 그새?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눈앞의 친구는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어지러운 눈치였다. 안심시키고 싶어 토닥였다. 일정한 박자에 맞춰 박동이 잦아들 수 있도록. 떨림이 멎을 수 있도록. 그러고서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슬쩍 본 머리에 먼지가 있어 그것도 떼어냈다. 어깰 붙잡아 밀어내 보니 그새 눈물범벅이었다. 어이구⋯⋯. 수연은 몰래 이를 꽉 물었다. 우는 모습은 처음 만났던 어린 날이랑 별로 다를 게 없다. 일단 진정하고 하나씩 물어 봐. 천천히 대답해 줄 수 있으니까. 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아 주었다. 웃음 참으며 달래느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울보야. 더 울 거야? 나 그냥 더 안고 있어? 여령은 잠시 망설이다 그 질문에는 또 고갤 저었다. 젓는데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결국 못 참고 웃었다.

"야, 너는 주말이면 오후까지도 자면서 오늘은 왜 그렇게 일찍 눈을 뜨냐? 일어나서 뭐 하지도 않더만."

고심해서 새 화제를 던졌다. 여령이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너 다 보고 있었어? 수연은 솔직히 답했다. 아니, 다는 아니고⋯⋯ 오늘만.

"오늘만?"

"그래, 오늘만."

"왜?"

"왜냐니 나도 몰라."

"뭐?"

"소멸했잖아. 원래 못 보는 게 맞는데, 갑자기 눈이 떠지길래. 떠 보니까 그냥 보였어. 그래서 바로 온 거야."

"⋯⋯."

"왜, 왜. 왜 또 울려고 하는데. 소멸이라고 해서? 야아아⋯⋯. 울지 마. 울리러 온 거 아니란 말이야. 그냥 소멸 말고 다른 말로 말할까? 재가 되어 사라짐, 뭐 이런 거?"

이번엔 입장이 반대였다. 수연이 안절부절하고 가만 듣고 있던 여령 쪽에서 터진다. 웃는 얼굴에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야 그게 뭐야 웃기지도 않아 진짜⋯⋯. 됐거든? 어색하게 뚝딱거리던 수연은 그제야 안심한다. 우는 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웃을 때도 그대로다.

"그럼⋯ 이거 꿈이야?"

"응. 너 아까 그 벤치에서 자고 있어. 한 자리 다 차지하고."

"헐⋯⋯."

감탄사인지 황망함인지 모를 추임새를 뱉은 여령이 대뜸 팔을 뻗었다. 수연의 얼굴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 봤다. 확인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수연도 그걸 알아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얌전히 머릴 내맡기고 뜯어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 잘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말랐어? 너 정말 수연이야? 내 앞에 현존실존하는 수연이? 물어보듯이 각도 마다 표정이 변했고 전부 잘 읽혔다. 그게 좋았다. 관찰을 끝낸 여령이 조심스럽게 턱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힘을 실어 어깨를 퍽 때렸다.

아야아⋯⋯. 방심하고 한 방 먹은 수연이 멋쩍게 웃었다. 이번에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변명 대신 맞은 곳을 문질렀다. 미안해, 먼저 두고 가서. 나오려던 사과를 갈무리했다. 이미 두 번이나 울렸으니까. 나 때문에. 그런 건 이제 족하다. 재회 첫 장을 눈물로 다 적셔 쭈글쭈글해지도록 만들고 싶진 않았다. 원망과 미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여령에게 목적부터 밝혔다. 울리려고 온 거 아니란 말 진짜야. 도와주러 왔어.

돕는다고? 단풍처럼 눈가가 벌게진 여령이 물었다. 아파하는 수연에게 미안해서 그새 한풀 꺾인 기색이다.

"돕겠다고? 뭘 돕는다고?"

"너."

너 도와주러 왔지 남 도와주러 네 꿈에 나왔겠냐 내가? 수연이 맞는 말로 응답한다. 

"너 안 봐도 뻔해 어떻게 하고 있을지. 아니 이제 뻔하진 않은데⋯⋯ 잘 지낸 모습이 아니잖아. 나도 뭐⋯⋯ 할 말도 좀 있고."

"할 말?"

"여기선 좀 그래."

다른 데 가자. 너 가고 싶은 곳. 덧붙이자 여령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복잡해 보인다. 아마 너무 많은 게 갑자기 몰려왔으니 적응하기 바쁜 모양이다. 짐작한 수연은 조용히 기다려 준다. 다행히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다. 걱정 없이 한순간도 눈 떼지 않고 속도를 맞춰 줄 수 있었다. 곧 여령도 눈을 맞댄다. 사라질까 봐 잘 깜빡이지도 않고 수연을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그냥 가고 싶은 데 말하면 돼? 아무 곳이나 상관 없어?"

"당연하지."

이거 꿈이라니까. 순간 이동도 할 수 있어.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입을 벌린다. 미쳤다⋯⋯.

"진짜 아무 데나? 그럼 우주도?"

"우주 가고 싶어? 우주에서 뭐 하고 싶은데 나랑?"

"그냥⋯⋯."

"그냥?"

"둘이 둥둥 떠 있고 싶었어. 거기라면 아무도 못 쫓아올 테니까."

수연은 처음으로 잠시 표정을 지웠다. 그날의 여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떠밀리며 치러야 했던 헤어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말의 순간 수연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위협으로 선택지가 좁혀졌단 사실을 무시할 순 없지만, 마지막은 그녀의 손으로 직접 택한 길이었다. 함께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다만 그날 이후로 정확히 오늘까지의 공백을 수연은 알 수 없다. 그 역시 선택의 일환이다. 자라나고 달라지는 서로를 볼 수 없는 것. 상처 받지 않는 대신 함께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오늘은.

네가 겪을 모든 상실을 다 덮어줄 순 없지만, 불안에 떨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너무 준비도 없이 헤어져야 했으니까. 적어도 다가올 날들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혼자서 쓰러졌을 때 조금 덜 다칠 수 있도록.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었다. 처음 눈이 뜨이자 곧장 번뜩였던 다짐이었다. 재차 새기자 용기가 솟았다.

"⋯⋯ 재가 되어 사라짐 할 만하네. 네가 이런 말 하는 것도 다 듣고."

"뭐?"

우주 갈 수 있는데 좀 허접할 걸. 구현이 덜 돼. 너 과탐 싫어했잖아. 덩달아 수연의 표정과 동기화 되었던 여령은 잠시 황당하단 얼굴을 한다. 그런 말이 나와? 웃음이 나와? 심각하게 흘기며 팔을 벌려 껴안았다. 뼈 아픈 농담에 수연이 미운데, 속도 모르고 장난이나 하고 당장 따지고 싶은 것도 한둘이 아닌데, 그렇게 날 두고 가더니 이제 갑자기 나타나서 웃는 거냐고 화내고 싶은데⋯⋯ 그런데⋯⋯ 그 전에 당장 한 번만 더 안아 보고 싶어서.

3.

결국 두 사람은 지구 반대편으로 왔다. 모래가 하얗고 햇살이 곧게 쬐는 곳이었다. 반사되는 물빛이 맑았다. 얕아 보이기도, 아주 오래 발이 닿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화이트 헤이븐. 너 예전에 야근하면서 퇴사하고 싶다고 세계 휴양지 찾을 때 봤던 곳. 나한테 전화로 얘기했어. 와 난 기억도 안 나는데⋯⋯. 무의식이 원래 그래. 대화가 발밑 모래알처럼 흘렀다. 여령은 멍하게 돌아보며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풍경이 평화로웠다. 눈 돌리는 곳마다 장관이다. 맨살에 닿는 백사장이 적당히 달궈져 따뜻했다.

"꿈이 좋긴 좋다⋯⋯."

돈도 안 내고 공짜로 해외라니. 사람 아무도 없이 단 둘이서. 원래 여기 미어터질 거 아냐 그것도 이 주말이면. 어느새 풀썩 뒤로 누워 웅얼거리는 여령에게 수연이 대꾸했다. 오늘 주말 아닌데?

"어?"

"주말 아니라고."

"맞을 텐데? 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잖아. 주말 아니면 그 시간에 쉴 수 있을 리가⋯⋯."

진짜라니까. 수연이 대뜸 확신했다. 팔을 뻗어 여령의 주머니를 뒤졌다. 야, 야. 뭐 해.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에 움직이질 못 하겠다. 새로운 장난인가? 만류하려는데, 그새 눈앞으로 액정이 들이밀어졌다.

"봐."

잠금 화면을 켠 수연은 의기양양했다. 내 말이 맞지? 표정. 가끔 보던 것이다. 여령은 그 표정과 휴대폰 액정을 번갈아보다가, 뭐가 잘못된 건지를 몰라 한 번 더 봤다. 똑같은 배경 화면. 똑같은 시간. 11월 31일. 알림이 온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요일이 없다. 왜? 급하게 날짜를 다시 확인하니 그대로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상하다 날짜는 그대로인데⋯⋯. 31일. 무심코 고개를 내린 여령이 제 손등을 보고 깨달았다.

31일? 휙 보니 액정 너머로 무언가 뿌듯한 웃음이 보였다. 이거⋯⋯ 아냐 됐다⋯⋯. 여령은 따져 보려다 그만두었다. 꿈인데 뭔들. 수긍이 빠르자 수연이 되물었다. 더 안 놀라?

"그게 끝?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는데."

"놀랐지. 근데⋯⋯ 나는 너 나왔을 때 다 놀라서. 이제 놀랄 거리가 없어. 살면서 뭐가 나와도 아까처럼은 안 놀랄 수 있을 것 같아."

"용감해졌네. 좋았어."

수연이 대놓고 체크했다. 강아지 살피는 수의사처럼. 햄스터 돌보는 어린아이처럼. 본인이 아는 선에서 설명도 시작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하루 따로 빼 준 것 같아.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 같거든? 근데 특별히 해 주느라 고민 좀 하다가 아예 시간 밖으로 빼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근데 시간은 흐르니까 그냥 24시간 박스 같은 데 넣어둔 건가? 여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진지하게 중얼거리더니 여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령은 일단 맞잡는다. 영문을 모르는데도 그랬다. 무조건적인 신뢰다. 그 덕에 감동받은 수연은 짧은 순간 짜르르 했다. 보답하기 위해 성큼성큼 물가로 향했다. 야. 야야야 여수연 잠깐만 잠깐만 여수연! 여수여언 수연아 우리 들어가게? 지금? 앞에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발끝부터 닿는 물이 차갑다. 야, 바다까지 왔는데 물놀이를 안 해? 그 뒤로 철썩이는 파도 소리. 선명한 바다. 여령은 문득 현실감이 없다. 물론 이건 현실은 아니지 꿈이니까. 근데, 맞잡은 손은 진짜다. 거짓이 없다. 감촉이 여령에게 말해 준다. 지금을 놓치지 말라고.

여령은, 이제야 모든 생각을 멈춘다. 꽉 잡혔던 손에 힘을 푼다. 야 누가 물놀이를 손 꼭 잡고 하냐? 수연은 잠시 여령을 들여다본다. 아무래도 준비된 모양이다. 내 친구는 똑똑하구나. 금방 알아채는구나. 좀만 들어주면 또 금세 자라고 단단해지겠구나. 기특하기도 섭섭하기도 하다. 그래서 수연은 손을 풀었다. 풀고 물을 뿌렸다. 시원함 반절 섭섭함 반절 어서 빨리 함께 놀고 싶은 마음 반절이 담긴 도합 150의 감정으로. 여령도 시원하게 웃고는 맞뿌린다. 이제 소리 지르는 게 자연스럽다. 꿈이라 그런지 바닷물이 찝찝하지 않았다. 끈적이지도 않는다. 주변에 해파리도 없다. 걱정할 게 없었다.

4.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까?

둘은 흠뻑 젖은 채 나란히 누웠다. 한참 서로에게 물 먹이고 바닷속을 유영했더니 누구라 할 것 없이 힘이 빠졌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다행히 둘 다 춥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었다. 빨갛게 번지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 보기만 했다. 여령은 문득 손이 허전하다 느꼈다. 이제 보니 상처가 나아가고 있었다. 이것도 꿈이라서 그런가. 약도 안 바르고 소금물에 절였는데. 빤히 보다 고갤 돌리자 수연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름답다, 그치.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런 얘길 해서, 여령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말하는 수연이 사무치게 아름다워서. 넘실거리는 붉은 빛 속의 수연이 그날과 달리 평온해 보여서. 어쩌면 수연이는 좋은 기억들로 날 덮어 주려고 온 걸지도 몰라. 깃털 잔뜩 든 포근하고 푹신한 이불처럼. 따뜻할 수 있게. 조금 덜 슬플 수 있게.

우리 캠프파이어 하자. 그래서 여령은 불쑥 뱉었다. 수연이 제 슬픈 기억들 위로 덮인 따뜻한 막이 되어 준다면, 저 역시 그러고 싶었다. 알아주지 못 한 아픔에 미안하기보단 기쁨을 덧입혀 주고 싶었다. 진작 이랬다면 좋았을 텐데. 많은 날들을 함께 보내며 천천히 하나씩 들어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울컥울컥 가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후회로 채워 보낼 수 없는 시간이란 것마저 알았다.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우선은 이것부터. 수연이 저와 함께 아프지 않은 불을 쬐면 좋을 것 같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불도 있단 사실을 둘이서 겪고 싶었다. 두고두고 꺼내 볼 추억이 될 수 있게.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까? 여령이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난 저승에 있다가 온 것도 아니라. 수연이 솔직히 답했다. 발치에서 모닥불이 듣기 좋게 튀었다. 장작도 없이 활활 타올랐다. 색이 파랗게 솟구치다 주황빛으로, 다시 파란 빛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난 사실 우리 다시 만나면, 만날 줄도 몰랐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 이것보다는 더⋯⋯ 뭐랄까, 무거울 줄 알았지. 울고불고 내가 화낼 줄 알았어. 너 그때 왜 그렇게 가 버렸냐고. 힘들 땐 서로 얘기하기로 했는데. 왜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힘들어했냐고. 근데 막상 보니까 아니더라. 보자마자 알았어. 나는 너한테 화 못 내. 원망한다고도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냥 외로웠던 거야 니가 없으니까. 보고 싶기만 했나 봐. 보니까 너무 좋았거든.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수연아⋯⋯."

동요 없이 진심을 전했는데, 결국 눈물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수연은 구태여 달래지 않았다. 다만 여령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게. 남은 손으로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응원하면서.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령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그중에 제가 도울 수 있는 일도. 남겨줄 수 있는 말들도.

"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얘기했지?"

여령이 고갤 끄덕였다. 하나도 납득할 수 없었기에 슬펐다.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는 운명이라니.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거 봐. 오늘 좀 봐. 다시 이어졌잖아. 끝난 줄 알았는데. 삶은 단편이 아니야. 아주 긴 본편도 있고 오늘 같은 외전도 있는 거야.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인 거야. 우리 산에서 만난 날, 내가 한 말 기억해?

"행복해져야 해."

"알아⋯⋯."

"인생은?"

"딱 한 번인 거 나도 안다고⋯⋯."

"그리고 또?"

"⋯⋯ 나를 위해서 살라고."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우리 여령이. 아주아주 똑똑해 아주아주 기특해. 잘 외웠네. 울어도 돼. 힘든 만큼 힘들어해. 그래도 햇볕은 맨날 꼭 봐. 울고 싶은 만큼 울면 또 보이는 게 있을 거야. 그럼 거기로 가면 돼. 옆에 누가 있으면 그 사람 손 잘 잡고. 혼자 있으면 팔 씩씩하게 휘두르면서 가고.

"내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단 말 진짜야."

"⋯⋯."

"이것도 알지? 나 더 안 물어 봐도 되지?"

"그래. 다 알아."

여령이 꿍얼거렸다. 여전히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수연은 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담아둔 슬픔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등 뒤로 별들이 빼곡히 반짝였다. 이젠 정말 때가 되었나 보다. 여령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엉덩이를 털지도 않고 일어선 수연이 말했다. 여전히 손 놓지 않은 채였다. 별 보러 갈래? 좀 더 가까이서. 뜻을 알아챈 여령이 반색했다. 우리 날 수도 있어?

"여기선 안 되는 거 없다니까."

벌떡 일어선 여령과 수연의 눈높이가 맞았다. 손 놓지 말고. 동시에 무릎을 한 번 굽혔다가, 뛰어오르면 돼. 호흡의 템포가 똑같아 한 사람의 숨 같았다. 몇 번 더 들이쉬고 내쉬었다. 서서히 떠올랐고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던 빛들이 펼쳐졌다. 이번엔 수연마저도 넋을 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여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긴 얘기가 될 것이다.

나도 그래.

응?

나도 네 친구라서 좋았어. 고마웠어. 과거형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고마워. 사실 나는 네가 있어서 살 수 있었어. 지금도 그래. 그래도 이젠 다른 이유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알아. 오늘 이 풍경도 너 아니었으면 없었어. 나 혼자였으면 이렇게 서정적으로 만들 리가 없어.

"그러니까, 나도 고마워."

둘은 서로를 보았다. 하늘에 동동 떠서 마주 보고 펑펑 울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우리 이제 어떻게 나가?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 손 놓으면 끝나는 것 같아. 열두 시 되면 끝나는 거 아니고? 신데렐라처럼?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여령아.

그냥 여기서 인사해 줄래? 잘 가라고.

"지금 아니면 보내기 싫을 것 같아, 내가."

아, 정말. 못 이기겠다. 견디지 못 한 여령이 수연을 껴안았다. 우리 즐거웠지? 여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진짜 존나 많이 웃었지, 오랜만에.

다행이야. 다시 안아볼 수 있어서. 진심에 익숙해진 여령이 덧붙였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눈을 꽉 감고 감각을 몸에 새겼다. 이제 말할게. 응. 진짜 말할게. 응. 이제 진짜로. 응.

"잘 가, 수연아."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웃어주고 싶어 힘껏 웃으려 했다. 수연이를 따라서.

5.

꿈에서 깬 여령은 다시 꿈을 꾸는가 싶었다. 1인실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나 분명 공원에 있었는데? 이번엔 과거 체험인가? 너무 놀라 확 몸을 일으키려니 무언가 턱 걸렸다. 링거 줄이었다.

"너⋯⋯."

또 다시 익숙한 목소리다. 걱정에 찬 눈동자가 단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지한이 앉아 있었다. 여령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공원에서 자다가 누구한테 맞았나? 그래서 신고 당하고 병원에? 근데 저 사람이 어떻게 알고? 아니 저 사람은 어떻게든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마는⋯⋯. 표정이 심각해지자 이마 근처로 손을 뻗던 지한이 멈칫했다. 빠르게 거두고는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향했다.

왜 도망을⋯⋯ 날 때린 게 혹시 백지한 씨? 믿을 수 없는 일을 겪고 왔더니 발상이 이리저리 튀었다. 노크 소리가 제동을 걸어 줬다. 트레이를 들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호출하러 가셨구나. 난 또. 가볍고 황당한 감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 첫 독대다. 이 정도로 의지와 상관 없이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에 비해서는 만남이 가볍게 지나갔다. 슬프거나 애틋할 새가 없었다.

 링거 다 맞으시고 퇴원하시면 돼요. 손은 드레싱 해 뒀으니 붕대 감아드릴게요. 간호사는 사무적이고 친절했다. 큰 문제 없다는 태도였다. 여령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다 괜찮아지는 건가요? 뉘앙스가 미묘했다. 상대도 느꼈는지 잠시 여령을 응시했다. 투여 속도를 조절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단 몸을 추스르고 나면, 그다음엔 훨씬 나아지실 거예요.

아까보다 좀 더 상냥한 답변이었다.

귀갓길은 유예가 동행했다. 여령은 단순한 과로 진단을 받았다. 집에 돌아가는 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불러내기 전부터 이미 병원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같이 돌아가는 길엔 서로 말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전적 있는 여령이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제가 죄송했어요 무례하게 말해서. 유예 씨가 저에게 나쁜 짓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유예는 다 듣고도 묵묵했다. 여령도 재촉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만 맞춰 걸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없는 곳에서 다치지만 마세요.

충직한 그는 집 앞에 다다라서야 입을 열었다. 이건⋯⋯ 엄밀히 따지면 다친 게 아니라 잠든 건데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예상 못한 반응인지 유예가 망설였다.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네?"

"잠에 드신 동안에요."

여령은 잠시 말을 골랐다.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문 열고 신발을 벗어 두자 유예가 가지런히 정리했다. 일상적인 풍경이다. 소파에 앉은 여령이 옆으로 유예를 불렀다. 눈 마주치고 회상하다가는 울 일이 빤했다.

수연이를 만났어요. 뱉어 놓고 옆자리를 살폈다.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입 속이 간질거렸다.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는데⋯⋯ 같이 눈을 감았다 떴더니 금방 바다였어요. 거기서는 산소통도 없이 몇 시간씩 잠수할 수 있었고 물 속에서도 말하고 들을 수 있었고⋯⋯ 또 손가락만 튕기면 모닥불이 생기고⋯⋯ 손을 잡고 무릎을 굽혀서 뛰었더니 밤하늘까지 갈 수 있었어요.

"저더러 행복하래요."

어디서든. 언제든. 삶은 자꾸 이어지는 시간이래요. 그니까 짧게 연속으로 행복하라고. 그리고 자기한테 인사해 달랬어요. 저한테 인사받고 싶다고. 그냥 여기에서, 잘 가라고 해 달랬어요. 그래서⋯⋯. 그리고 잠시 멈췄다. 꿈이 생생해 말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제야 유예가 고갤 가까이 했다. 고민을 거듭하더니, 여령의 눈 위로 손을 얹었다. 묻지 않고 예민하게 마음을 살폈다. 여령은 느리게 눈 감았다.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감촉이 시원했다.

그래서⋯⋯ 인사했어요. 잘 가라고. 근데 다음에 또 보자고. 사족이 불퉁했다. 유예가 엷게 웃었다. 하산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답은 들으셨습니까?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하다고 했어요.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언제가 됐든⋯⋯ 어떤 모습이 됐든. 알아볼 수 있을 거랬어요. 말을 마친 주인이 조용했다. 숨소리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 유예가 손을 거두며 언질했다.

"백이 번호를 사 뒀다고 합니다. 주인님이 알아 두셔야 할 것 같다고."

"아⋯⋯."

수연이 번호 말하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저 데려간 것도? 네, 맞습니다. 경호 팀에게 연락을 해 두었더군요. 한 시간 단위로 상태를 보고받기로. 그거 스토킹 아니에요? 얘기해 봐야 될 것 같은데⋯⋯. 내일쯤 연락 드리시죠. 오늘은 마저 쉬시고요. 그도 당신이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까요. 사리에 맞는 답이었다. 여령이 반만 수긍했다. 문자만 보내 둘게요. 유예도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 덕분에 괜찮아요. 다음엔 그냥 깨워 주세요.

- 고마워요.

답장이 오진 않았다. 예상한 반응이다.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6.

일어나서 본 손에는 새 붕대가 감겨 있었다. 두껍고 깔끔했다. 잠든 사이 갈아 둔 모양이었다. 이건 유예의 다정함이다.

여령은 그가 고마웠다. 여전히 모든 회복의 과정은 그녀에게 수연을 상기시켰다. 돌아오지 못 할 일들을 마주 보게 하고, 지난하던 슬픔과 상실감이 한꺼번에 가시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여령은. 사실 이제서야, 드디어⋯⋯ 

저로서 조금씩 아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22.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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