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uatorium

검정이 전하는 생애 가장 뜨거운 편지

―전적으로 사랑스러운 난행의 교착점에게.

저기요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데

함께 추락하러 왔어요 썩은 살구처럼

 

_함께 추락하러 왔어요, 서덕준

Seong-Jin Cho - Debussy: Suite Bergamasque L.75 III. Clair De Lune


(1)

아이제이아 깁슨은 남십자자리가 거꾸로 보이는 동토에서 태어났다. 그와 양친은 오래된 3층 빌라의 12평방미터 짜리 가옥에 거주했다. 그러나 골조가 밖으로 드러난 그 구조물의 넓이는 차라리 12제곱킬로미터나, 또 때로는 12제곱밀리미터와 마찬가지처럼 느껴졌다. 순환기류에 갇힌 극남의 땅. 그곳에는 탈로도,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가정에서, 아이는 사만다와 브랜든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야곱의 자식처럼 여겨졌다. 144지구의 어른들은 눈과 밤의 부스러기로 빚은 소년을 사랑했다. 그 감정이 설혹 우월감에 입각한 동정이나, 탐미주의에 현혹된 일시적 관심에 기반한다 해도 그러했다. 주정 심한 어머니나 일자무식한 아버지에 비해 삶은 그에게 관대했고, 딱딱히 언 빵쯤은 아이의 까만 손에 쉽게 들려졌다. 생활 수준에 못지 않게 내면이 곤궁했던 부모는 따라서 그의 설백을 뻥뻥 좀먹었다. 그들은 먼저 신이 아이에게 내린 심미적 완성도의 수혜를 받았으며, 아이가 각성한 후에는 더 나아가 제 자식을 진정 ‘요셉’¹으로 취급했다.

11세, 아이제이아가 어미와 아비의 손에 등 떠밀려 도착한 도살장은 ‘네오-베를린’이라는 거창한 꼬리표가 붙은 도시였다. 구겨진 수표 몇 장에 환심과 함께 팔린 아이는 이제 난전亂廛에 가까운 가게의 2층에서 기식했다. 높이 비약해야 할 인생의 변곡점, 그는 가장 먼저 도회에 성행하는 투철한 계급의식에 대해 깨우쳤다. 하늘은 아이제이아에게 기적과도 같은 특혜들, 이를테면 거창한 아름다움과 신성에 가까운 이능을 내리며 그 대가로 행복의 운고雲高를 아주 낮게 제한했다. 네오-베를린에서도 궁핍한 시민들이 거주하는 슈판다우에서 그에게 허용된 최대치의 애정이란 가공유 크림을 바른 조악한 케이크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란 구실이 전제됐다.

다만 낮달은 그토록 군색한 가식조차 빛으로 이해했다. 당숙을 향한 조공은 그가 채 성년이 되지 못한 17세부터 6년 간이나 이어졌고, 그것은 아이제이아라는 별이 옹졸한 친척들에게 내리쬐는 인광燐光이었다.

기대치는 가없이 낮아졌다. 하여 매스컴이 부조리한 패널티 보다 그 능력의 걸출함에 대해 조명할 때도 그는 그저 과묵을 선택했다. 희생과 헌신은 곧잘 호흡처럼 치부됐다. 남자의 백야는 그의 세상 또한 극주와 극야로, 단정하고 지루한 흑백으로 구분했다. 반투명한 망막의 건너에서 흐릿한 강산과 풍월을 관조하며, 그의 내핵은 단지 살기 위해 부글부글 들끓었다.

초연에 근사한 불신. 생존에 치중한 무심. 야멸찬 손속으로 생의 중력을 덜어내며, 그는 비로소 팽팽한 허공에서 부유했다. 아이제이아 제인 깁슨에게 자유란 이토록 지절至切한 가치이며, 친애란 감히 목숨을 위협하는 서슬이었다.

¹: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나 그곳에서 오히려 크게 출세하여 후에 곤궁에 몰린 아버지와 형들을 맞아들였다.


(2)

그러므로 포도의 풋내가 만연하던 그 밤에 그가 서명한 반쪽짜리 계약이 철저히 계산된 탐욕이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그를 우활한 사내로 판단 내렸을 테나, 그 또한 일찌감치 비겁하고 비열하게 당신의 만취를 이용하였다.

멀고도 외로운 그의 우주에서 번번이 모든 감정과 감각에 값을 치르는 우매한 상인이라곤 결국 당신 하나뿐이라더라. 구조의 신호라 부르기도 민망한, 꺼져가는 숨과 뜨겁게 흐른 체혈에 구태여 응급 처치를 감행하는 가이드는 매번 당신이었다. 2만 6,280시간. 누적된 이해가 당신의 신용을 축적했다. 남자는 하늘색 이슥하던 그날에 당신의 취기를 빌어 불공정 거래를 성사하며 벌써 깨달았다; 무엇 하나 허투루 받는 법이 없는 악셀 레너드라는 장사치에게 제가 부채의 의식을 양각할 것을.

이야기와 하루.

습관이 될 만큼.

마음―가장 우선할 것. 먼저 이야기할 것.

언뜻 서정적으로 쓰인 거래의 품목은 기실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당신이 남긴 메모를 곁눈으로 훔쳐보며 딱 그만큼의 온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다. 차마 친애라고 평하지 조차 못 할, 계산적인 당신조차 쉽게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왜소하고 무용한 단 한 톨의 마음.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만큼 우스운 교제이나, 남자에게는 딱 그만큼의 심사만이 안전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당신은 호라이즌의 ‘그’ 까막새였다. 거먼 새의 목청이 허밍을 지저귀는 동안 그의 발은 결코 헛딛는 일이 없었고, 그 명징한 현실이야말로 사내가 당신에게 건넨 얄팍한 신뢰의 기원이었다. 설사 취한 머리로 이 밤을 전부 망각한다손 치더라도, 당신은 그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유통상이 될 것이 자명했다. 혹은, 적어도 그때의 남자는 그렇게 예견하였다.


(3)

그게 두려워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으려오.

그리고 이 어두운 밤의 침상을 결코 다시 떠나지 않겠소.

여기, 이곳에 머물겠소⋯⋯.

Saucy Dog -

허나 장장 열흘이 지난 저물녘으로부터 송신된 답언은 이변이었다. 아니, 푄 바람²으로 가뭄이 고착된 그의 심정이야말로 이변이었나. 명멸하는 그 대신 화광을 자처하던 당신을 업고 문득 개안이 사무치더라. 당신이란 삭풍이 몰아닥치는 남극의 영토는 내내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유난히 맑은 천공에서 홀로 작현하며 그는 내둥 목이 말랐다.

동풍에 자꾸만 모서리를 내어주며 저 빙하는 기어이 그를 가두진 않는 기후가 무진 궁금했었다. 좁아지는 간극을 바라보며 저 왜성은 하필 먼거리를 비행하는 위성의 날개가 염려됐었다. 배성과 항성의 랑데부, 그리고 죽음으로 명명된 고작 두어 시간의 별리엔 저 불량한 기적이 다시없이 신을 원망했었다. 즉 작금 당신이 마주한 것은 그 반지름의 깊이만큼이나 갈급한 영혼이었다.

“내가, 나만이 당신을 가질 수 있게 해줘…….”

그러니 영리한 천칭이여, 짐짓 다욕한 구절을 접시에 올리지만 그렇다면 당신은 아니. 보다 난폭한 건 언제나 ‘나’의 욕망이었다. 유현하던 몰각의 어름, 젖지 않은 당신의 발을 들어올리며 나는 일찍이 바람의 피랍과 같은 허상을 애타게 소원했었다. 세기의 투쟁을 당면하던 밤은 또 어떠했던가. 그 밤, 남자는 기어코 왁자한 인파를 헤쳐 당신에게 횡행했었다. 암색으로 피리한 그 낯은 가르릉 부는 당신의 한 줄 기식에도 알록달록 물이 들었다.

우주가 유기한 그라는 수난. 검정은 폭이 넓어 언제나 검정이었다.³ 당신이 뭘 넣어도 그는 고요하게 검정이었다. 해서 오늘의 파각을 거치고서야 그 안감의 이채가 번들거린다. 새까만 순종으로 돌돌 포장했던 하이얀 흑심이 남몰래 희뜩거린다.

“허락이라고… 하하, 아…. 악셀, 악셀 레너드… 내가 얼마나 간절히 당신의 소유가 되고 싶었는지 당신은 몰라…. ”

어느 때보다 명확한 의지로, 레이(Ray)―반드시 내게 당도할 다시 한 줄기 빛살에게. 꽃잎 같은 혓바닥이 지분지분 입안을 찌르고 어두운 손아귀가 도드라진 등뼈를 어루만진다. 피륙 아래 만져지는 골격의 양감. 그것과 더욱 친밀히 접촉하려고 조조히 옷붙일 밀어내렸나. 솟고 꺼진 움푹한 윤곽에서 저 권형의 리브라가 앞서 떠난 채충의 집게를 연상하고 마침내 실소가 터져나온다. 입가의 여울이 넘실거린다. 비애에 수장되지 않고 척척한 목소리가 깊은 입굴에서 장알거린다.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을… 당신이 나를 날게 하고 있잖아, 레이⁴…….

열 가닥 손뼈가 엇물리고 전갈의 두 집게발, 주벤엘게누비와 주벤에샤마리가 찬란한 눈길로 그를 그러모은다. 그러면 ‘아웃사이더’―우주가 미아로 정의한 그 천체에 최초의 이방인이 방문하고 그는 더 외롭지 않다. 길 찾은 저 흑백의 이분법은 당신으로 진작 엉망이었다. 꼭 기한조차 없던 그 백지장이 한낱 공수표로 남은 것과 같이, 기다란 증명조차 그에겐 불필요하다.

“……‘내 센티넬’이라고 불러줘요, 응?”

불거진 눈매. 창백한 두 홍채가 진노랗게 물들면 이것은 그가 당신에게 전하는 바알보다 뜨거운 한 통의 편지. 하야스레한 지면紙面에는 쓰이지 않은 ‘CQD’ 세 개의 활자가 또렷하고 그것은 아주 진솔한 구호 신호를 당신에 타전하였다. 다만 시허연 광구가 구조의 당도보다 일찍 고슬고슬한 당신의 땅을 디뎠나. 그리하여 마침내 저 암막이 당신에게로, 난행의 교착점으로 내려앉는다.

²: 수증기를 포함한 공기 덩어리가 바람받이 사면을 타고 올라가면서 비를 뿌린 후, 산을 넘어 다시 사면으로 내려올때 고온건조해진 공기의 상태가 지역적으로 가뭄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³: 행성표류기, 김희준; ⁴: 타이타닉, 1997.


답록입니다. 오늘부터 악셀 레이-레너드는 제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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