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內

그가 유언을 전하는 방법

누군가의 삶은 부치지 못한 편지

BGM: 헤어져야 사랑을 알죠 - 스탠딩 에그

죽음과 사랑에는 형태적인 연관성이 있다.

그건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죽음 이후에야 오는 사랑에 관한 편지

사랑과 죽음의 팡세, 박시하


정예부대의 보급물자에는 못 보던 물품이 한 종류 끼어 있었다. 상부에서는 몹시도 '친절하게' 꾸러미마다 종이 묶음 한 뭉치를 넣어두었다. 이는 임무의 중대성, 위험성을 알리는 장치인 동시에, 대원들이 미리 유서를 작성하도록 해 이후 혼선을 방지하려는 통솔부의 대처이기도 했다.

물론 객관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렇다는 것이고…. 죽음을 대비하라는 말을 들은 뮈르 캠벨은 정작 떨떠름했다. 너무도 현실에 맞닿은 발언은 남자를 꿈만 같던 일상에서 일깨웠다. 진을 만나 잠시간 겪은 평화는 이다지도 취약했다. 가슴이 철렁한 뮐은 한참을, 정말 한참을 종잇장만 만지작대며 눈을 굴렸다.

"뭐… 군인이 죽으면 군번줄이면 됐지…."

그와 다르게 체중과 함께 실려오는 진의 말소리는 다정한 듯 무심했다. 뮈르 캠벨은 그런 진에게 '제가 죽어도 군번줄 하나면 되시겠어요', 하고 핀잔 주듯 물으면서도 결국에는 그의 등을 품에 당겨 토닥거렸다. 남들에게는 다소 매정하게까지 들렸을 진의 말이다만, 뮈르는 나름대로 그를 이해했다.

SS급 가이드로 일생을 군부대에 몸 담아온 진은, 이를테면 가지 하나 없이 펼쳐진 창공을 노니는 새였다. 구름 아래를 기는 날벌레들과 달리 그는 투명한 날개를 으스러트릴 강풍도, 잔가지 사이에 매복한 거미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진에게 죽음은 언제나 대비되어 있으면서도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일 터였다.

유난히도 맑은 하늘은 그러나 뮈르 캠벨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세상이었다. 같은 SS급 가이드라도 진 허숄트와 뮈르 캠벨은 생리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에, 아무래도 두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진이 도전과 성취로 요약할 삶은, 뮈르에게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일 뿐이었다. 진이 손을 잡아주지 않는 시간을 뮈르는 그저 견디는 것에 가까웠다. 즉, 뮐이 보기에는 본인이야말로 눈송이 한 점에도 껍질이 짓눌려 속이 터져버릴 수 있는 바로 그 비충(飛蟲)이었다.

따라서 뮐은 삶의 가능성이 얄팍한 이들이 으레 그렇듯 최악을 가정하는 일에 익숙했다.

뮈르 캠벨은 삼 개월이 지난 어느 시점까지도 짐 속에 접힌 채로 묻힌, 하이얀 백짓장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군인이라면 군번줄 하나면 된다는 말은, 뮐에게는 '한 끼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헛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펜을 쥔 손을 몇 번이나 구깃한 종이 위로 덧대었고, 그때마다 알파벳 한 글자조차 적어내리지 못하고 볼펜을 수납했다. 낱장 위 공백을 엿보며 멀뚱하니 시간을 소모하느라 귀퉁이에 남긴 까만색 볼펜 똥만이 그가 작성한 유언의 전부였다.

유서라는 것은 남은 이들에게 전해주는 생애의 증명이었다. 살면서 무엇 하나 입증하지 못한 뮈르 캠벨이 난관에 부닥친 것도 당연했다. 그에게는 누군가에게 남겨줄 물건도, 물건을 남겨줄 사람도 희박하기만 했다.

끈질긴 시도 끝에 제 안에서 '형제'라는 가치를 캐낸 뮈르 캠벨은 모든 자산을 의동생인 뤼거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지만, 지면에는 여전히 너무 많은 공간이 비어 있었다. 순백의 여백은 뮈르가 겨울 내음을, 그리고 그 내음을 달고 사는 진 허숄트라는 남자를 내내 떠올리게 했으나 그 단상들은 펜촉이 종이에 닿으면 조급하게 녹아내렸다. 형태가 온전하지 못한 진과 뮈르의 관계성은 눈송이처럼, 아주 약간의 충격에도 누그러졌다.

진은 뮈르를 언제나 '내 강아지'라고 부르며 목줄을 채워 주었지만, 뮈르는 혼자 남겨질 주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애시당초 진 같은 남자를 고작 뮈르 캠벨 한 명이 덜어진 일로 '혼자 남겨졌다' 표현하는 게 옳을지 의문이었다. 뮈르가 그의 삶에 난입하기 전부터 진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함께하며 진은 뮈르를 우울 속에서 건져내었으나, 뮈르 그 자신은 진에게 번거로움을 대가로한 웃음 몇 조각 외에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반대로 진을 뺀 뮈르 캠벨의 삶은 심히 단조로웠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조차 진에게서 받아온 선물이었다. 뮈르 캠벨은 목에 걸린 레더 초커를 지문으로 더듬으며 고심에 빠져들었다. 그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전부 욕심이었다. 당신이 계속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가끔은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또, 다른 강아지가 생겨도 저만큼은 예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장마처럼 우거지는 욕망들을 펜 끝에서 덜어내며 뮈르 캠벨은 입안을 잘근거렸다. 이성은 이런 낱말들은 남겨질 사람을 위한 예의가 아니라고 일러주는데, 이기적인 심정은 무덤 안까지 진 허숄트의 일부를 앗아가라고 난폭히 그를 종용했다.

"……."

하지만 내게 참지 말라고 알려준 건 진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비겁한 변명을 대며 남자는 문자열을 길게, 길게 적어내렸다. 그는 진 허숄트에게 남길 유품으로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닳도록 읽던 책의 구절을, 영혼에 각인한 기억을 선택했다.

I will be thy chased rose and take thy name.

My heart will continue drumming its love for you the same;

And though thy mother and father mean nothing to me—

You are the sun rising over the bosom of my heart’s sea.

I will go with you hand in young hand

And be like your shadow roaming with you across the land.

In your eyes I see the myriad truths of my own soul

A kaleidoscope of sea shells in a pretty bowl—

To you, my love, I will always be true—

And that is why I say that I do—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잊지마. 합의된 약속이 아니라도, 설령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끝의 끝까지 나는 당신의 소유라고. 뮈르 캠벨은 꼭 자신이 남몰래 건넸던 고백 만큼이나 저열한 바람을 꾹꾹 눌러 적었다.


그건 아주 불운한 사고라고 했다. 갑자기 열린 균열, 도시 한복판에서 펼쳐진 재앙에 대비할 인력은 근처 식당가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군인 몇이 전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행에는 소위 계급의 SS급 가이드 하나가 끼어 있었고, 그가 센티넬들을 통솔해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크리처를 상대한 덕분에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다.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건 C급과 A급의 센티넬 각 한 명, 그리고 SS급 가이드인 뮈르 캠벨 뿐이었다.

처음 보고를 받았을 당시 진 허숄트는 흑단나무로 짠 어두운 탁상이 중심을 잡고 있는 그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크리처, 균열, 지원부대의 요청… 그런 단어들이 열거되는 동안 내내 침묵하던 남자의 눈동자는 현장 인원의 성명을 보고받을 때 불길을, 아니, 물길을 일으켰다.

"직접 간다고 해. 너, 그리고 너는 따라오고. 나머지는 다른 녀석들이 이어 받아서 처리하고."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지시를 마치고, 코트를 걸칠 틈도 없이 나서 보폭을 늘려 달릴 때도 겪어본 바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진 허숄트에게 실패나 착오는 생경하기만 했고, 그는 자신의 삶에도 오류가 끼어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곧 파멸될 어떤 것이다 어느 날의 너처럼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이광호

"끼이이이익―"

녹슨 문의 경첩을 여닫을 때처럼 철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고가 발생한 지점에서 불과 30걸음이 남은 위치였다. 120bpm을 넘겨본 적 없는 심박수가 미친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진 허숄트는 자신의 머리가 콘크리트에 갈리는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끔찍하고 예리한 예감이 저며들며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호흡이 어려워졌다.

뮈르 캠벨의 시체는 그가 사랑한 푸른 머리칼이 절반이나 뜯겨 나갈 정도로 극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머리의 반절이 뜯겨 나갔지만, 아무래도 큰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진 허숄트는 사체를 제대로 살필 정신조차 없었으므로.

소리없이 절규하던 남자는 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습팀에게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를 넘겨주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우체국에서는 진 허숄트 명의의 연립주택으로 군번줄 하나와 편지 한 봉투를 우송하였다.


흰 봉투는 절반이 거뭇한 피로 말라붙어서, 그게 뮈르 캠벨의 피라는 걸 알고 있어서, 진 허숄트는 유서를 받고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것을 읽어보지 못했다. 죽음과 피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렇게 뮈르에게서 진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뮈르 캠벨은 뒤척이는 밤이면 저를 도닥이는 진 허숄트가 있었지만, 진에게는 기댈 온기가 통채로 뽑혀나간 후였다.

남자는 닫힌 봉투의 입구에 손가락을 덧대어보며 몇 날을, 며칠을, 아니 몇 주와 몇 달을 정적에 잠겨 살았다. 고요 속에도 따라붙는 음성과 기억이 진에게는 고통이었다. 함께 눕던 소파에 기대면 허벅지 위에 없는 무게감과 함께 색색대는 숨소리가 환청이 되어 돌아왔고, 두 사람이 쓰기에 딱 알맞던 침대는 누울 때마다 커다란 공허감으로 남자를 짓눌렀다.

세 달. 꼭 뮈르 캠벨이 자신의 유언을 고심한 시간 만큼이나 주저하던 진 허숄트는 그제야 색이 바랜 편지를 펼쳐 보았다.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전하는 성실하고도 순진한 서약문. 우습게도 뮐의 유서는, 바람은, 수신인에게 전해지기 전부터 이루어졌다. 검증하지 않아도 모든 삶에는 궤적이 남았다.

한 마디 필적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애정은 그와 그의 집에 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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