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삼

ㄹㄷㅋ

튀긴쥐 by h43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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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베이터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김광희는 지금, 초조하게 벽을 긁다 못해 이빨로 윗입술을 잘근대는 중이다. 돈 들여서 신축 공사를 했다던 건물 엘리베이터는 전면에 거울이 붙었을 뿐 공사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참다 못한 김광희는 결국 앓듯이 한 마디 하고 만다.

 

“더럽게 느려…….”

십 층에서 구 층 되는 이삼 초가 김광희에게는 한 시간도 족하게 다가왔다. 손 반대편에 들린 꺼질락 말락한 휴대폰 화면 속 메신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발신인은 혁규 형,

광희야 큰일 났다 민석이가 많이 다쳤어

삼십삼

김혁규 김광희 류민석

0.

김혁규 김광희 류민석. 주변인들의 한 마디: 베스트 프렌드. 하지만 그냥 베스트 프렌드랑은 다르다. 적어도 당사자 셋은 그렇다고 믿었다. 그럼 우리가 뭘까. 메가 베스트 프렌드? 이런 말 꺼내던 건 항상 김혁규였다. 그럼 김광희는 좀……. 하며 한 번 흘겨봤고 류민석은 형은 친구랑 섹스 하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셋은 그게 다였다. 아무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으니까. 메가베프 발언의 주인인 김혁규마저도 자기가 벌려놓은 말에 다시 덮어씌울 주장을 찾지 못했다. 김혁규와 김광희는 과거에 함께 학식을 먹었고 군필 복학생이나 조교가 되었을 때는 류민석에게 학식을 샀다. 밥상머리서 정 들었다는 핑계로 얼김에 셋이서 서로의 동거인 자리까지 꿰차게 된 것까지 완벽한 메가베프 서사임을 모두가 인지했다. 그래서 입술 세 개는 전부 다물린다. 하지만 꾹 다문 입술. 그리고 은근한 시선들은 그냥 친구……. 이 단출한 호명을 명백히 부정했다. 정제된 언어로 반박하지 못한다고 셋 사이에 공공연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리고 가끔은 구구절절한 논리가 필요 없는 감정도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랬다. 메가베프니 메가톤이니 하는 김혁규의 맥빠지는 헛소리가 무색해질 정도로 시선과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힐 때 산발하던 강렬한 열감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우정으로 치부할 수도 우정이었다고 발뺌할 수도 없는 완전한 성애. 김광희와 류민석은 일찍이 눈치 챘고 김혁규마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0-1.

김혁규에게 류민석이 했던 말이 있다. 난 형들만 있으면 될 거 같아. 류민석 주제에 제법 비장한 고백이었다. 어쩌면 김혁규는 류민석에게 그런 고백을 듣는 순간을 가장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삭임 듣던 순간 확장되던 세상을 잊지 못한다.

0-2.

김광희는 가끔씩 이 지독하게 유기적인 삼각형이 합의되던 순간을 반추했다. 사랑에 파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그의 의견은 바뀐 적이 없으나 이건 사랑의 총량을 믿는 김혁규와 상대적인 사랑에 예민한 류민석을 위함이었다. 김광희는 둘을 사랑했으므로 아주 흔쾌하게, 오케이. 했다.

그래서 류민석의 단축번호 1번은 김혁규가 됐다. 김혁규의 1번은 김광희였고 김광희의 1번은 류민석이 된다. 이것 말고도 셋의 합의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백 퍼센트 짜리 삼각형이 있다면 각자 33퍼센트의 몫을 하자는 게 룰이라면 룰이었다. 어느 날엔 김광희는 이런 지적을 했다.

“1퍼센트 남잖아.”

류민석이 질린 표정으로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남은 1퍼센트는 하자야. 원래 사람이라는 게 완벽할 수가 없어. 김혁규는 거기에 구태여 그런 법이 어딨냐며 얌전히 항의했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로 세 사람 모두 33퍼센트, 각자의 몫에 충실했다. 한 세기 전부터 이어진 일처일부제 세계관에는 셋이서 사랑하는 법의 매뉴얼은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김혁규 김광희 류민석 이 셋은 서로를 오래오래 사랑하기 위해 저들끼리 만들어놓은 룰을 지키며 사랑해 볼 양상이었다. 그들은 자조하면서도 내심 영원을 확신했다. 셋 다 우습게도 이 맛 간 폴리아모리가 주는 비정상만의 안락함을 느꼈다.

그리고 셋이서 연애했다. 셋이서 키스했고 셋이서 끌어안았다. 세 명 분의 사랑이 충돌할 때 그 셋은 비로소 완전해짐을 느꼈다. 셋이어서 좋아. 우리라는 개념이 좋아. 감상적이고 속 편한 소리가 잘도 나왔다. 김광희는 33퍼센트 논리에서 남게 되는 1퍼센트를 지적했고 류민석은 그건 인간의 고질적인 하자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모두가 1퍼센트의 부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완전했다.

류민석은 셋 중 한 사람도 1퍼센트의 몫을 더 지지 않고 공평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류민석의 곁에서 김혁규는 재기도 까다로운 소수점의 사랑을 생각한다. 그런 밤도 있었는데.

2.

응급실 로비에서 김혁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혼비백산한 와중에도 부스스한 뒤통수는 시선을 끈다. 김광희는 그 앞에 가 형, 하고 불렀다. 김혁규가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광희야.”

넋이 나간 표정. 지친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김광희는 김혁규를 오래 알았지만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김혁규를 끌어안았다. 소란한 로비를 배경으로 둘은 서로를 길게 토닥였다.

코마 상태래. 트럭에 치였는데 뇌 손상이 심하대. 복구가 불가능 할 수도 있고. 김혁규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무미건조하게 의사로부터 들은 말을 전달했다. 나열되는 문장들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얘기했는데?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었고 오늘 일찍 와? 같은 말도 주고 받았다. 아직 머릿속 류민석의 이미지는 생명력이 넘치고, 아주 건강했다. 그래서 김광희는 혼란스럽다. 류민석이 너절하게 피를 흘리는 모습 같은 게 상상될 리가 없다.

류민석의 단축번호 1번은 김혁규다. 최초로 사고 소식을 접한 사람이 김혁규가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과 행정실에서 키보드 두드리던 김혁규는 전화를 받자마자 응급실로 달려오느라 겉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채였다. 단축번호 룰은 유치한 마음으로 만든 건데 이런 때에 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작 사다리 타기로 정한 규칙이니 김광희가 류민석의 1번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류민석의 사고에 대해 김광희가 설명해야 했겠지. 공평하게 사랑했으니 고통은 모두의 몫이다. 하지만 먼저 사건을 떠안고 있던 김혁규는 별개의 문제였다. 불확실한 죄책감이 떠올랐다.

“보호자 관계 뭐라고 말했어?”

“동거인.”

“…맞지, 그게.”

김광희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실에서까지 동성 간 다자연애 광고할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거인. 각지기만 한 글자가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다. 우리는 우리니까. 고작 집 문서 따위로 정의될 사이는 아니었다. 류민석의 사고와는 별개로 조금 슬퍼진다. …정 없네. 김광희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김혁규도 그럴 셈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좀 퀭한 김혁규의 얼굴은 피곤이 역력했고 김광희도 급하게 반차를 쓰고 오느라 정장이며 머리가 죄 엉망이었다. 둘 다 힘들고, 생각이 많고, 아주 예민한 상태임을 무엇보다 서로가 안다. 그러면 김혁규와 김광희는 차라리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안하니만 못하지. 과유불급의 미학이다. 류민석은 모르는 둘만의 룰. 류민석을 소외시켰다기보다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왜냐면 류민석 걔는 유도리 있게 일을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징징 애처럼 굴어도 헷갈리게 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 사이에 류민석이 앉아 있었다면 이 정도로 공기가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형들 분위기 왜 이래? 나한테도 얘기해줘, 나도 껴줘. 그러니까 이건 이프에 해당되는 이야기. 김혁규와 김광희가 나란히 응급실 로비에 앉아 있게 된 원인이 류민석이 아니었다면. 김혁규는 아마도 수술실에 들어가있을 류민석이 많이 보고 싶다.

3.

응급실 로비에서 류민호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김광희는 류민호를 단 한 번 만났었다. 류민석은 그냥 뷔페만 먹고 튀라고 했지만 그래도 류민석의 형이니까, 하면서 10만원을 봉투에 넣었다. 3년 전 쑥맥 같던 새신랑은 어디 가고 수염이 거뭇하게 난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냥 다급해 보여서. 응급실에 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8살 아래 동생이 식물인간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게 김광희의 지론이었다.

“보호자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형이요, 친형.”

카운터 접수가 일사천리다. 혈연이란 뭘까. 피가 통했다는 이유만으로 김혁규와 김광희는 알 수 없었던 정보를 류민호가 알게 되는 것을 보며 김광희는 생각했다. 류민석의 장기가 어떻고 뼈는 몇 개가 부러졌으며, 김광희에게는 말해주지 않은 것들. 김광희는 부모님을 사랑했지만 그게 같은 DNA에서 비롯된 애정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 시간과 정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류민석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출가한 류민호보다는 자신과 김혁규가 류민석을 잘 안다고 확신했다.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류민호와 류민석이 공유한 피보다는 셋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더 짙을 것이다.

4.

김혁규는 류민호와 번호를 교환했다. 응급실 수속에 진저리가 나 지쳐있는 김광희보다는 자신이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김혁규도 3년 전 류민호의 결혼식에서 류민호를 봤었다. 그때 김광희는 형제가 닮은 구석이 없다고 했지만 김혁규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코가 비슷했고,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같다. 다시 재회한 류민호는 여전히 류민석과 닮아있었다. 다시는 웃음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3년 전 결혼식. 류민석은 김혁규와 김광희를 신세 지고 있는 형들이라고 소개했다. 류민호는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김광희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해온 것도 류민호였다.

“민석이 가장 친한 형들이죠. 와줘서 고맙습니다, 놀랐을 텐데.”

“아, 네……. 많이 놀라셨죠.”

“나도 정신이 없네……. 민석이랑은 거의 연락 안 하고 살았거든요. 걔도 이제 다 컸으니까. 부산에 계신 부모님께는 말씀 드렸습니다. 번호 줄 수 있어요? 민석이 관련한 일들은 제가 따로 연락할게요. 그리고……. 짐 정리도 해야 할 것 같고.”

휴대폰 키패드를 누르던 김혁규가 멈칫한다. 물건은 왜요? 하고 순간 따질 뻔 했다.

물론 이성으로는 이해했다. 형제 간이 얼마나 돈독하든 호적에 이름을 나란히 한 것은 둘이었다. 법적인 절차도 류민호의 앞으로 이뤄질 것이며 무엇보다……. 류민호는 류민석의 가족이니까. 김혁규는 세 사람 중 유난히 형과 가까웠다. 고로 가족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도 가족이긴 하잖아.

구두로만 엮인 관계는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빼앗긴다. 우리는 서로의 연인이자 가족. 그렇게 셋이서 명명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러니까 인정 받을 수 없다고. 저희 친해요, 밖에서는 이 한 마디밖에 못하는 관계라고……. 비정상은 아늑하지만 결코 안전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종종 현실로 끌려나왔다. 말한 적은 없지만, 김혁규는 현실의 벽을 마주할 때마다 탈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도.

김혁규는 김광희와 다르게 혈연이 주는 유대감을 믿는다. 단란함의 여부와는 별개로 가족끼리도 애도할 시간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족보다 덜하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류민호가 류민석을 맡겨두었단 듯이 당연하게 받아가는 것은 아니꼬웠다. 말대로 짐을 정리한다면 김혁규와 김광희에게는 류민석의 흔적이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김혁규는 명백히 싫다고 말할 위인도 되지 못했다. 차라리 자신이 류민석의 애인이라고 밝히면 사정을 좀 봐줄까? 결혼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역시 친구, 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는 너무 가볍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가정을 꾸린 경상도 헤테로 남자에게 동성애나 폴리아모리 같은 개념을 이해시키기에는 김혁규도 너무 지쳐있다. 그래서 그냥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김혁규와 류민호 사이에 있던 일은 이게 전부다.

5.

“혁규 형. 어떻게 할 거예요.”

“뭐를.”

“류민석.”

언젠가 류민석과 함께 본 영화를 떠올렸다. 주인공의 애인이 코마 상태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류민석은 그걸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혁규 형 나 식물인간 되면 10년 동안 병간호 해줄 거야? 그때 김혁규는 무서운 소리 말라며 류민석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었는데.

“병원에서 장기기증 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아까 찾아봤어.”

“김광희.”

“깨어날 확률 같은 건 속 편한 소리야……. 다 좆같다고요. 10년 동안 수발을 들든 장기기증을 하든 선택지가 없어.”

김광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대꾸하면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었다. 김혁규는 김광희의 예민한 기질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자리를 피하기로 한다. 김광희도 구태여 대답을 들으려 하지는 않았다. 김광희는 유독 불안을 소화 시킬 줄을 몰랐다. 불안하니까 눈 앞에 있는 김혁규에게 자기 좀 붙잡아달라고 시위하는 거다. 그러나 김혁규도……. 여유 부릴 상황은 되지 못했다.

선택지를 가지지 못한 우리. 지금 ‘우리’에 속한 건 오직 김혁규와 김광희다. 류민석이 빠진 우리는 조금 생경하다. 퀭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김광희는 금세 꺾여서 일그러진 표정만 지었다. 둘 다 울지는 않았다. 울기에는 상황이 너무 벅차다.

6.

삼자대면은 금방 이뤄졌다. 병원 문을 나서던 김혁규와 김광희를 상담을 막 끝내고 나오던 류민호가 붙잡았다. 대면 장소는 병원 앞의 기사식당. 각자 앞에 류민호가 결제하기로 한 콩나물 국밥이 놓였다. 따끈한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뇌사 판정을 받았어요. 담당 의사는 장기기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깨어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드라마나 다큐 보면 10년 뒤에 깨어나기도 하잖아요…….”

“저라고 안 물어본 건 아니예요. 식물인간이랑 뇌사는 완전히 다르대요. 희망이 없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면. 혁규 씨랑 광희 씨가 민석이 가장 친한 형들이니까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는 건 알아요. 형인 나는 오죽 하겠습니까.”

류민호가 하는 말에 김광희는 김혁규의 눈치를 조금 봤다. 기실 어쩌라고 싶다. 장기기증 한다고 통보 하나. 심사가 뒤틀린 김혁규는 류민호의 말이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조금 서럽기도 하다. 류민석의 열여덟부터 스물셋까지 전부 지켜본 건 김혁규와 김광희지 류민호가 아니다. 저 남자보다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류민호의 말은 조금 의외였다.

“혁규 씨랑 광희 씨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어요.”

“네?”

“장기기증을 할 때, 사망자……. 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장기기증에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그건 혁규 씨랑 광희 씨가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새로운 선택지가 제시된 식탁 분위기는 여전히 삭막하다. 김혁규는 그새 좀 식은 국밥을 뒤적거렸다. 민석이, 어땠더라. 매번 귀찮게 굴던 애. 그런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무던한 성격은 아니었어도 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애. 그러나 김혁규는 그렇게 좋은 류민석이 장기기증에 쉽게 동의할 거라는 말만큼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왜냐면 만약 자기가 죽었더라면 류민석은 장기기증에 극구반대했을 것 같아서. 좋은 애는 맞지만 언제나 류민석의 우선순위는 류민석이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도 안다. 김혁규도, 김광희도 류민석의 그런 점이 좋았다. 김혁규는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민석이, 착한 동생이었어요……. 나이답지 않게 생각도 깊고.”

“그래요?”

“…생각 정리 좀 하고 다시 연락 드려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류민호는 그러라고 한다. 오늘 내로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콩나물 국밥은 식은지 오래다. 김혁규와 김광희는 몇 술 뜨지도 않은 그릇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까지 걷는 내내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창 퇴근 시간임에도 거리가 한산하다. 매번 팝송 채널이든 7080이든 소리로 빼곡하던 김광희의 차조차 오늘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잔뜩 긴장한 두 남자의 숨소리가 전부였다.

“광희야. 넌 어떨 것 같아? 죽고 나서 장기기증 할 거야?”

정적을 깨는 것은 김혁규다. 몰래 울기라도 했는지 빨갛게 충혈된 눈에 김광희의 상이 반사됐다. 그걸 보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우선이다. 왜 이렇게 됐지. 안주하던 평화가 너무 손쉽게 깨진 것 같았다.

“울었어요?”

“아니. 안 울었어. 그냥 눈이 좀 뻑뻑해. 그래서 어떨 것 같냐고.”

“하겠지. 아깝잖아요.”

뻔한 대답. 김혁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 빼내면 부활 못하려나. 이런 실없는 소리와 함께. 뭔 상관이에요. 김광희가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형은요.”

“글쎄?……. 죽으면 끝인데, 살 사람은 살라고 하는 게 맞나…….”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 김혁규는 체력이 고갈 나면 생각을 포기한 깡통처럼 굴고는 했다. 메마른 감상에 김광희도 더이상 할 말은 없었다. 형답네. 그냥 이랬다.

“근데 나 죽었는데 네가 너무 쉽게 장기기증에 동의하면 슬플 것 같아.”

“무슨 뜻이에요.”

“붙잡아주면 좋겠다고. 민석이도 그럴 것 같아서 아까 생각 좀 한다고 했어…….”

“…”

“고집 세잖아. 너나 내가 사고 당했으면 우리 몸에서 장기 하나도 못 빠져나가게 할 걸. 절대 안된다면서.”

이 관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것. 고작 한 마디 들었는데 류민석의 행동이 전부 그려지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봤다. 오래 사랑했고. 그러니 생전에 장기기증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같은 황당무계한 주제를 가지고도 섣불리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민석이 속상해 할까?”

“완전.”

“왤까.”

“…정 없잖아요.”

결국 정으로 귀결된다. 사랑이긴 했지만 그걸 견고하게 붙여놓은 건 아무래도 정이 맞다. 류민석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형이, 이런 말들을 잘도 했었다. 류민석이 두려워 할 것은 육신을 이루던 장기가 각지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혁규와 김광희 그들 사이에서 죽음이 간단히 해결될 명제가 되는 걸 두려워 할 테다. …그렇다고 김혁규와 김광희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게 해답일까.

7.

부모님은 민석이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혁규 씨가 답장 주는대로 담당선생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 라는 미전송 메세지. 김혁규의 손끝이 아직도 전송 버튼 언저리를 맴돌았다. 류민석의 생각을 하면 장기기증에 반대하는 게 맞는데 어째서인지 뒷맛이 찝찝했다. 신상미상의 환자 여럿을 살릴 수 있다는 인류애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고결한 사고가 돌아갈 정도로 지금의 김혁규는 여유 있지 않다.

…좀 더 본질적인 면으로 들어가자면 자신의 선택이 곧 류민석의 의사가 되는 게 기껍지 않았다. 이것도 일종의 고인모독일 것이다. 김혁규는 자기성찰이 꽤 되는 축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죄책감의 출처는 아직도 모르겠다.

류민석은 복잡한 인간이다. 솔직히 김광희는 류민석이 착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리광 부려도 류민석은 꽤 실속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고, 머리 회전도 빠르다. 하지만 좋은 사람임에는 확실히 동의했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힘든 건 되려 더 견디질 못하던……. 그러니 이렇게 류민석의 생각만으로도 골머리를 앓고 있을 테다.

정이 많아서 모르는 사람 사정에도 속상해할 것 같은데. 그래서 더이상 쓰지 못할 장기라면 흔쾌히 내어줄 것 같다가도 그렇지 않다. 만약 김혁규나 김광희가 사고를 당했다면 두 번 죽이기 싫다고 기어코 막았을 것이다. 류민석은 너무 입체적이고, 김광희가 그의 모든 면을 알고 있다는 점은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저 다 씻었는데.”

“잠시만……. 조금 이따가.”

“연락은요.”

“응, 아직……. 좀 더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샤워를 마친 김광희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며 나왔다. 물을 끼얹으니 얼굴에 생기가 좀 도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까지 연락 드려야 한다며. 김광희는 거의 쓰러지듯 김혁규의 옆에 앉았다. 네이비색 3인용 소파에서 두명 분만 푹 꺼져서 왼쪽 가장자리가 과하게 올라왔다.

세 사람 중 귀가가 가장 늦었던 김광희는 이제서야 집이 좀 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넓은 평수도 아닌데 사람 하나 없다고 이렇게 비어 보일 줄은 몰랐다. 아직은 류민석의 사고가 실감되지 않는다. 아직 대학에 다니는 류민석은 엠티니 뭐니를 따라간다며 사흘 정도 집을 비운 적이 있다. 그냥 그때 같다. 다음 주가 되면 여독의 여파로 눈 밑이 퀭해진 류민석이 캐리어를 달달달 끌고 집으로 들어오겠지 싶다.

“혁규 형. 민석이한테 미안해요?”

“…”

“민석이 왜 사고 났는지 알아요?”

중학생 여자애 대신 차에 치였대. 민석이네 형님한테 들었어요.

김광희의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단조롭다. 아마 긴장했다. 또 다시 새로운 선택지. 김혁규도 김광희도 문제를 목전에 두면 빙 둘러 가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둘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주던 것은 언제나 류민석이었는데. 이제는 오로지 둘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민석을 위해서.

8.

김혁규의 여전히 열여덟의 류민석을 기억한다. 고작 점심 사준 것 가지고 왜 이렇게 잘해주냐며 쭈뼛거리던 류민석을. 너 많이 크라고. 무미건조한 대답에 류민석은 수줍어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저도 잘해드릴게요, 혁규 형.

“너는 왜?”

“형 좋아서요.”

제 사람이니까요. 사뭇 진지한 열여덟 짜리의 표정이 장관이라 그때 김혁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앳된 티도 벗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워서. 그때 김혁규의 표정을 심상치 않게 살폈는지 그 날 이후로 류민석이 김혁규를 ‘내 사람’이라고 명명하는 일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김혁규는 여전히 자신의 일부분을 류민석의 몫으로 내어주고 싶다. 비록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들여다보지는 못했더라도.

8-1.

류민석은 어려운 인간이다. 손해 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손해 뿐인 비정상 관계에는 누구보다 안주할 줄 알아서. 무작정 유치한 애는 아니어서……. 만약 ‘내 사람’인 김혁규와 김광희가 식물인간이 되어도 장기기증이라면 극구반대할 사람일 게 뻔해서. 그런데 겁 없이 트럭에 치일 줄도 아는 사람이라

어려웠다. 왜 하필 다정하지?

9.

돌파구라기엔 막힌 벽이었고 선택지보다는 답안지에 가까웠다. 정답은 애초부터 정해져있던 것 같다. 애써 회피하지만 김혁규도 김광희도 은연 중에 알고 있다. 오직 이타심만을 발휘해 트럭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무용해진 심장 따위야 기꺼이 내어준다는 것은. 류민석을 결론 짓기 위해 김혁규와 김광희가 앓은 반나절이 무색해진다.

“정말 류민석이 원한다고 생각하세요?”

긴장한 줄만 알았던 김광희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특유의 불안한 얼굴.

“솔직히 싫거든요. 이미 죽은 애 또 죽이는 것 같아서. 그냥 걔가 가지고 태어난 심장, 뼈, 이런 거 도로 들고 땅에 묻히면 좋겠어요.”

“나도 싫어.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 근데 지금은 욕심 부릴 때가 아니잖아. 최대한 민석이한테……. 해줄 수 있는 걸 해줘야 하지 않을까.”

부딪히는 진심과 진심. 어쩌면 장기기증 때문에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은 류민석의 영혼이 아니라 김혁규와 김광희였을지도 모른다. 장기기증에 긍정적인 것처럼 쿨하게 말해놓고, 정작 곳곳으로 흩어질 류민석의 일부를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김혁규는 헛웃음에 가까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모든 걸 체념한 얼굴. 김광희는 이 표정을 잘 모른다. 김혁규는 웃지 않으면 제법 냉랭했는데 여지껏 그게 가장 무서운 얼굴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다음도 있었나 보다. 김광희는 그제서야 ‘우리’를 안락하게 감싸고 있던 껍데기에 금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회피하고 싶어도 받아들여야 했다. 김혁규는 류민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류민석이 조금 원망스러웠고, 따지고 싶기도 하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평소에는 잘만 애처럼 굴다가 왜 이런 상황에서만 지나치지를 못해, 항상.

10.

만약 상주 자리에 김혁규나 김광희가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김혁규는 장례식장에서 교회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던 것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 류민석도 그런 걸 받기를 원했을까?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는 종종 올렸으니까. 성경에서는 동성애도 애인을 많이 두는 것도 죄악이라던 말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그 말을 했던 전도사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데도.

김혁규와 김광희에게 주어진 일이라곤 장례식장 직원과 류민석의 형수를 거들어 육개장을 푸는 일이었다. 이마저도 류민호의 배려다. 3일 내내 류민석의 영정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 발인까지 있겠다는 막내아들의 친구들을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는 류민석의 가족들을 납득시키느라 류민호가 애를 꽤 먹었다. 김혁규와 김광희는 류민호를 거쳐 류민석의 친한 형들로 소개 됐다.

상복을 입은 류민석의 형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얼핏 류민석이 문자로 보냈던 사이버 청첩장을 떠올렸다. 류민호 김지원 두 사람이 만나 인연을……. 김광희는 김지원을 기억하지만 그쪽에서는 김광희를 생각해낼 여유조차 없어보였다. 바쁘게 육개장 쟁반을 나르던 김지원을 물끄러미 보던 김광희는 다시 손님들의 음료수를 챙겨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지원은 별로 슬퍼보이지 않았다. 그게 화나지는 않았고 조금 씁쓸하다. 저 여자야 류민석을 명절이나 가족식사자리에서 몇 번 본 게 다일 테니까. 가족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아이러니함의 연속이다.

“상복은 가족이 입는 건데 우린 못 입잖아요. …그럼 우리는 뭘까.”

존나 이상한 사회부적응자집단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메스꺼워졌는지 김광희의 피부가 파리하다. 신발을 정리하던 김혁규가 신발 집게를 내려놨다. 벽에 비스듬히 세워놓는다고 한 게 미끄러져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비정상인 건 알아. 아는데……. 근데 우리끼리는 영원히 괜찮을 줄 알았어요. 하나도 안 괜찮잖아, 지금.”

“정상 비정상 그 소리 좀 하지마.”

“형은 되게 태연하네요. 좋겠네.”

“나도 힘들어. 네가 이럴 수록 더.”

“버티고 있어요?”

김혁규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인 동시에 기저에 당연하게 존재하는 말. 진심은 왜 항상 상처를 입히는지 모르겠다. 이전에 관계에 금이 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을 때처럼, 이제는 우리 관계가 정말 예전 같지 않게 되었음을 확신한다.

“우리는……. 우리야. 계속.”

“…….”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류민석이 없어도. 침묵이 이어졌다. 이것 역시 과유불급의 미학일까. 문득 말을 참는 게 아니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김광희는 생각한다.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11.

김광희는 사랑의 총량을 믿지 않는다. 애초에 마음을 계산할 수 있다면 김광희가 겪은 불행의 80퍼센트는 사라졌을 테니까. 그러니 각자의 몫으로 33퍼센트 씩 마음을 나눠 가지자던 말 역시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까운 엉터리 논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정말 우리의, 나를 이루는 33퍼센트였을지도 몰라. 한계에 다다른 김광희는 깨닫는다. 류민석이 없는 ‘우리’는 너무 위태롭다.

12.

폭풍 같은 사흘이 지났다. 이제는 발인만을 앞두고 있고, 김혁규와 김광희는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그날 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일 거라는 고백으로 이 명제는 보류된지 오래다. 미루는 것도 일종의 해결이라면 해결일지. 아직 둘은 서로를 직면할 용기가 서지 않는다.

김혁규는 여전히 33퍼센트의 몫을 한다. 김광희 역시 33퍼센트. 34퍼센트는 공석이다. 100이 되기에는 두 사람에게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러니까 김광희의 단축번호 1번이 김혁규가 되는 날에, 김혁규의 우선이 김광희가 되는 날에. 비로소 100에 근접한 숫자는 되지 않을까 하고 김광희는 생각한다. 둘 사이에는 허방이 생겼을 뿐이다. 위태로울지라도 사랑을 아예 허물 수는 없다는 것이 김광희의 결론. 최선의 선택이다.

김광희는 류민호를 도와 장례식 비용 장부를 정리하는 김혁규를 내려다봤다. 부스스하고 동그란 머리. 류민석이 사랑해 마지않았고 김광희는 내심 걱정했던 퀭하지만 초연한 눈. 김혁규는 아직 김광희처럼 미래에 대해 생각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곧 김혁규에게도 찾아오기는 할 것이다. 김광희처럼 수학적인 접근은 아니고……. 이제 좀 살 만 하다, 같은 김혁규 식의 표현으로.

“사람 눈을 왜 그렇게 봐요? 변태 같이.”

“눈 있잖아, 민석이 눈. 사실은 조금 욕심 냈어.”

발인이 곧이라 그런지 사흘 내내 소란스러웠던 접객실도 지금은 김혁규와 김광희 뿐이다. 김광희 앞에 앉은 김혁규가 속닥였다. 김광희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광희 너한테는 욕심 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나도 민석이 눈만큼은 다른 사람한테 주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서?”

“형님한테 각막은 안된다고 했어. 그게 다야. 알겠다고는 하셨는데, 어떻게 될지는 몰라. 물어보기도 그렇고.”

“나 참…….”

김혁규는 늘 얌전하게 구는 주제에 돌발적인 구석이 있다. 류민석이 알았다면 좋아했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다시 삼켜진다. 무슨 말 하려던 거 아니었냐고 묻는 김혁규에게 김광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이 좀 쓰다. 아무렇지 않게 류민석을 떠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류민석을 잃은지 엿새가 되어가는데, 어찌나 정신 없이 살았는지……. 이제 시작이구나 싶어서 김광희는 괜히 주먹을 세게 쥐었다. 깎지 못한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따끔했다.

13.

류민석의 유골이 봉안된 곳은 납골당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었다. 민석이가 마중 나오는 것 같겠다. 셋이서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으며 김혁규는 그런 말을 했다. 김광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봉안까지 마친 뒤 김혁규와 김광희는 강원도로 떠났다. 몇 주 전부터 류민석은 여름이 되면 셋이서 강원도로 휴가 가자고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인원도 계절도 전부 수틀려버렸다. 그냥 류민석이 괜찮다고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가는 일이 없게 될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타는 동안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김광희는 해안도로가 나타나자 입을 겨우 뗐다.

“아직 저 사랑해요?”

“응.”

“셋이 아니라 둘이어도?”

“괜찮아.”

연인끼리의 대화치고는 너무 엽기적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정말로, 모든 게 불측지연이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깨끗하게 허물지 못한 사랑은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지. 폐부에서부터 들끓는 감정들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 침잠한다.

“내가 널 사랑하는 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과는 별개의 일이니까…….”

김혁규가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김광희의 손을 덮는다. 창밖으로는 7번 국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늦봄의 쾌청한 날씨. 이 순간에 조합되는 것은 전부 다른 세계에서 온 것들이라 김광희로 하여금 야릇한 기분이 들게 한다. 산뜻한 바람과 달콤한 고백과, 그리고 죽은 애인의 영정.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김광희가 긴장한 얼굴로 물어온다. 김혁규는 겹쳐진 손을 지분거리며, 이렇게 대답한다.

“…울어도 되지 않을까.”

“…내려요.”

“해수욕장까지 안 가도 돼?”

“이쯤이면 돼요.”

해안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다니는 차 없이 도로는 한산하다. 염분을 머금은 바닷바람을 맞아서 머리카락이 이마에 다닥다닥 붙는데도 김광희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렇게 둘이서 바닷바람을 맞았다. 류민석이 원했던 여름 휴가는 이런 풍경이 아니었겠지만. 둘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자.”

김광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 김혁규에게 건넸다. 한 주먹도 안 될 것 같은 손수건 뭉치를 풀어보니 하얀 가루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김혁규는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정체를 깨달아버린다. 아연한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표정. 차에서 김광희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하다.

“…이건 범죄 아니야?”

“뭐 어때요. 몰래 한 줌 퍼왔어요. 괜한 소리 말고……. 이게 눈이길 빌어야 돼요. 눈이라면 항아리에 갇혀있는 것보다 바다도 보고 산도 보고. 바람도 타는 게 좋잖아.”

그냥 그렇게 믿기로 한다. 김광희의 말대로 이게 류민석의 눈이라면, 바다도 보고 산도 보고 바람도 타는 게 좋으니까. 뼛가루가 바람을 타고 스르르 날아가기 시작한다. 눈 앞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아깝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멀리멀리 날아가면 좋겠다. 류민석의 몇 퍼센트였을까, 이건.

손수건 위에 가루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김혁규는 비로소 울기 시작했다. 슬픔에도 유예기간이 있다더니 엿새 동안 밀린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다. 손을 떠나는 유골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상하다. 김혁규는 바다를 등진 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허락 받은 건 김광희인데 오히려 의쪽은 의연했다. 슬픔이 다 가신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김혁규가 슬퍼할 차례니까.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둘은 오랫동안 껴안았다. 이제는 서로가 유일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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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단한 기러기

    나안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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