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같은 건 순식간이니까.
전웆
하얀 바탕으로 봐주세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바람을 쐬고 들어왔다.
덜컥거리는 소리가 심한 문을 조심히 밀어 잠그고 살금살금 제 이부자리로 돌아왔다.
밤새 게임하고 놀자며 뛰어다니던 애들은 10시 점호가 끝나기 무섭게 피곤함에 절어 잠이 들었다. 아침밥 제일 먼저 먹을 거라고 염불 외던 이지훈도 잠들고, 숙소 지하 치킨집에서 제일 먼저 시켜 먹자던 권순영도 잠들고, 가장 마지막까지 눈 뜨고 있던 문준휘도 사실은 제일 먼저 잠들어있었다.
나는, 저주 비스무리한 것이 시작되면서부터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하다.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나가면 복도가 아니라 문명과 동떨어진 마을이 나오다, 이윽고 바다를 가면 저 멀리 하늘에서 비행기가 떠다닐 것 같다.
잠이 오면 그 꿈을 피해서 도망치기 바빴건만, 잠이 오지 않는 이런 밤이면 꿈속의 그 사람을 떠올린다.
꿈에서 나는 집에 있었다. 집을 나와서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벗어나 바다로 향하면,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다. 그와 손을 잡고 얕게 올라온 바다에 들어가 걷기도 했고, 한바탕 꿈인 걸 알지도 못하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 다른 생물들을 보기도 하다, 가끔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모래 위에 앉아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눴다. 눈만 뜨면 생기는 흉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조용한 꿈.
졸음으로 피곤해진 눈은 뻑뻑한데 정신은 멀끔하다. 자세를 돌려 누우니 사람 걷는 소리가 난다. 귀를 기울이니 옆방 애들 웃는 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으니 파도 소리가 들리고, 다시 눈을 뜨니 애들 웃는 소리가 들리고, 귀를 기울이니 파도 소리가 들리고, 앞을 보니 텅 빈 이부자리가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잠이 들었던 걸까? 손목시계의 어두운 화면을 보니 5분이 지나 있었다.
텅 빈 이부자리는 이지훈의 것이다. 나는 베란다 문을 잠갔는데, 문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눈이 뻑뻑했다. 다시 눈을 뜨니 텅 빈 이부자리는 없다. 흉 따윈 생기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눈을 감으니 애들 웃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옆 이부자리는 여전히 혹은 이제서야 비워졌고, 잠가뒀던 베란다의 문도 아주 조금 열려있었다. 안경을 끼고 본 베란다는 아무도 없다. 기울어지려는 몸을 이끌고 걸어가니 저 멀리 숙소 앞 해변에 이지훈이 서 있다가, 이내 바닷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줍지도 않고 조용하게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세상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1층 로비의 불빛과 등대의 불빛과 이지훈이 들었을 핸드폰 불빛과 저 멀리 둥둥 움직이는 배의 불빛과 자동차 전조등의 불빛도 보이는데, 달이고 별이고 도통 보일 생각이 없었다.
혹여 누군가 방을 확인할까 봐 문을 열고 복도를 확인했으나 약간의 미등을 제외하곤 전부 불이 꺼져있었고, 사람 걷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죽은 듯이 잠들었다.
나는 그것을 밟지 않기 위해 인상을 쓰고 조심스럽고 느리게 움직여 다시금 베란다로 몸을 옮긴다. 바닷바람이 문틈 새로 크게 휘몰아치는데 뒤돌아도 아이들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동도 없다. 파도가 그를 삼킬 듯이 잠깐 움츠러들었다가 그 아가리를 벌리고, 그는 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삼켜진다.
이지훈은 뭐 때문에 다들 잠든 이 시각에 바다로 갔을까? 사실은 그러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억센 파도 속으로 그가 몸을 내줬고, 원래 밟고 있던 모래는 자국도 남기지 않고 쓸려가 버렸다.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난간 밖으로 체중 실은 몸을 내밀어,
"야 저너누, 너 뭐해."
옆 이부자리는 여전히 혹은 이제서야 비어 있지 않다. 이지훈이 웃고 있었나? 다시 바다를 보고, 다시 이지훈을 보고, 이지훈은 가만히 앉아 있고, 나는 피와 땀으로 목덜미가 축축했고, 걔의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종일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 아침부터 낚시하러 나간 배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웅성거리는 어른들의 말소리나, 어제만 해도 보이던 갈매기 떼의 실종이라던가, 한번 불 때마다 사람 하나 날려보낼 듯이 부는 바람으로 날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의 행을 하늘의 뜻으로 빌지 말고,
땅을 좀먹을 것처럼 파도가 넘실거린다. 해변 근처에서 놀던 애들은 어른들의 호통에 잽싸게 도망치는데, 왜인지 본인은 도망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 저 바다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쳐 봐야 소용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인간의 업을 내세로 빌지 말고,
마을 이장이라는 사람이 기어코 애먼 사람 하나를 땅에 묻어버리고 나 몰라라 하며 여유를 부리다가, 파도가 모래사장을 다 잡아먹고 나서야 주민 대피령을 알린 것이 화근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생각으로 신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
인간의 목을 긁고 찢고 죄고 나온 것이 새의 소리가 되고, 곧 소리로 말미암아 물길이 튼다. 바다 위로 거대한 땅이 바닷물을 우글거리며 올라온다. 조개껍데기 부닥치는 소리가 꼭 해골 부딪히는 소리인지라, 우리는 지은 죄로 벌 받는 것이라.
두려워
땅이 올라 언덕이 되고, 언덕이 봉우리가 되고, 봉우리 밑으론 산이 되는데, 산봉우리에선 물이 끊임없이 올라와 활화산처럼 분출한다. 물속에서 물이 올라오고 물 위에서 그것이 몸집을 부풀리고, 우리는 그제서야 그것이 흙이 아니라 오롯이 바다였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바다가 태양에 닿을 것처럼 솟았던 몸을 앞으로 숙인다. 바다가 눈앞에 있다.
두려워말라.
인간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것이요. 이조차 벌이 아니라 자연 순리에 따른 우연일 수 있으나, 모든 우연은 결코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그것을 우리는 운명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끝은 욕심으로 시작한 것이니.
끝은 욕심으로 시작한다.
전원우를 만난 건 별이 탄생한 것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생겨난 일이었다. 파도를 타고 타고 휩쓸려 도착한 땅에서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다가온 걔와 마주쳤고,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났어야 할 운명이라고 얘기했다. 그렇지만 모든 우연은 결코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은 즐겁고, 추억은 아름다우며, 오래 기억되겠지. 그렇지만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고 만년 같은 건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나를 봐, 난 아직 여기 있어."
너를 보면서 네가 없을 때를 상정하고,
"그냥 그런 건 생각 안 하면 안 될까?..."
네 마지막은 어떨지 상상하다, 너가 없어서 네가 있을 때를 상정할 걸.
너你 좇-ᄒᆞᆫ逐好恨 아·기阿只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
생사生死길 가논 곧去奴隱處 모·ᄅᆞ고毛冬乎古 ᄀᆞᆺᄇᆞ-다惱叱古如.
내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서
미안.
윤회輪廻의 고리마저 낡게 만든 죄요.
바다여, 일만년一萬年 다신 돌아오지 말지어다.
버스에 탄 3시간 내내 깜빡 졸아서 그 꿈이 나올까 봐 멀미약과 함께 정신을 쏙 빼놓고 온 저의 뒤로 모자를 든 이지훈이 따라나왔다. 두 사람이 느리작 나오는 사이에 벌써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권순영과 문준휘가 선생님의 주의사항 담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다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은 걸 깨닫고 쫓아올까 봐 무리에서 쓱 빠진 이지훈과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사 오신 아이스크림을 들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그늘진 곳에 앉아서 한 달 후에 있을 기말고사에 대한 얘기도 하고, 권순영이 목청 크게 뭐라 뭐라 외치는 걸 보면서 웃기도 했다. 이지훈은 계속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다를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지면에서 올라온 열기가 갑자기 훅 덮쳐온다. 목덜미에 흐르지도 않은 땀을 훔쳐내니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만년 같은 건 순식간에 지나갈 거야.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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