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23

진화랑 1개, 진화랑라스 1개. 2024년 5월 21일 연성

1. 처음 느껴보는 설레임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랑이 저를 껴안고 잠든 진을 바라보는 걸로 진화랑.

모든 일이 해결된 후 화랑은 백 도장까지 저를 찾아온 진과 그렇게 원하던 진검 승부를 낼 수 있었다. 승패는... 뭐, 지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 입에 담지 않을거지만. 그렇게 진검 승부 후에 곧바로 떠날 줄 알았던 진은 이상하리만큼 화랑의 주변에서 서성거렸고 결국 성질 급한 화랑이 버럭 성질을 내고 나서야 진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그는 눈을 부릅 뜰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고백에 가까운 그 말에 어어, 어??? 아니, 너... 아니아니아니, 너 노말 아니었냐. 아니아니아니... 자, 잠깐만. 남을 가지고 노는 그 화려한 언변 실력은 어디로 가고 고백을 처음 받아보는 순진한 처녀마냥 화랑은 말을 더듬었다. 화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이 양손으로 어깨를 붙잡더니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니야. 답변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냥 말로 전하고 싶었어. 그럼... 오늘은 이만 갈게. 라며 자기가 할 말만 내뱉은 진이 저도 부끄러운 것인지 귀 끝을 살짝 붉게 물들이고는 순식간에 이제는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 데빌의 날개를 꺼내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화랑만이 진이 떠난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백두산의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리고는 그제서야 허겁지겁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방에 들어와 제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누운 화랑이 생각에 잠겼다. 저 자식이 날 좋아한다고? 아니, 갑자기? 뜬금없이? 시그널을 준 것도 아니고 저 자식과 나와의 사이는 싸움 밖에 없는데? 아니 무엇보다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호감을 가지지...? 내가 뭘 했나? 난 딱히 저 자식한테 뭔가 한게 없는 것 같은데... 설마 그 조언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 그 녀석 안에 있는 그 데빌도 너라고 이야기 한 거... 설마 그거 하나 때문에...? 아니, 그 정도 조언은 다른 사람들도 했을 거 아냐? 아니... 아니아니아니, 잠깐.

" ...내가 왜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거야...! "

왠지 순간 억울해진 화랑이 번쩍 상체를 일으키더니 곧바로 충전 중이던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콜이 세번 울리고 받은 상대에 화랑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 있어? 어? 어디있냐고! 야쿠시마? 고 사이 잘도 집으로 날아갔구만. 아, 됐고. 일단... 음, 아. 위그드라실의 본부로 와. 이 시간에라고? 지금 몇시인데? 어... 음... 미안,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했다. 그럼... 내일 10시까지 갈테니까 대기타고 있어라. 1분이라도 늦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자기가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은 화랑이 액정에 찍힌 시간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액정에 찍힌 시간은 11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나, 내 방에 8시 전에 들어오지 않았나? 그럼... 나 3시간 넘게 그 자식 생각만 하고 있던거야...? 싸움이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 자식의 고백 때문에...? 이렇게 고민한다는거 자체가 나도 사실은 그 자식을... 아, 젠장. 그리고 뜬 눈으로 밤을 샌 화랑이 용케도 무사히 바이크를 몰고 위그드라실의 본부로 향했고 결국...

" 그래서... 두 사람 사귀기로 했다고? "

" 응 "

" 그래 "

" 진은 그렇다쳐도... 자네가 진의 고백에 오케이 할 줄 몰랐는데 "

" 뭐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야. 야, 진 "

" ...내 상담 상대였으니까, 리 숙부는 "

얼씨구, 이제 숙부라고 불러주네? 그래, 이제 다 해결 되었다. 이거지? 진의 말에 화랑이 코웃음을 쳤다. 그 전까지 미시마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무조건 적대하고 경계하던 진이었지만 라스와 리가 자신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에게 마음을 연 진이 제 연애 상담을 리에게 한 모양이었다. 뭔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모양새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 리는 생각치도 못한 연애 상담에 마블러스 하지 못하게 웃어버렸다고 회고하곤 했다. 진의 상담에 리의 대답은 그렇게 고민할 시간에 일단 부딪치고 안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라고 조언해주었고 덕분에 진이 각오를 다지고 화랑에게 고백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 하필이면 이 작자한테 상담을 했어? "

" 자네의 머리 속에서 내가 어떤 이미지인지 궁금하군 "

" 능력이 너무 넘쳐서 여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은 기생 오라비 "

" ...반은 맞군 "

" 나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거든? "

아니, 리 숙부가 말한 반이 맞다는 건 앞의 능력이 너무 넘쳐난다는 쪽 아닐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한 진과 제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반박하지 못하는 리에 - 반박을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거지만 - 화랑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다가 후아암, 크게 하품을 했다. 잠을 못잤냐는 질문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누구씨의 고백 때문에 고민하느랴 잠을 못잤더니... 라고 작게 중얼거린 화랑에 잠시 뭔가 생각하던 진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화랑이 기함을 토했다.

" ...니 어머니가 날 보고 싶어한다고? 준씨가? "

" 응... "

" ...설마 너 준씨한테도 말했냐? "

" ...... "

뭐라 한 마디 하려던 화랑은 이내 그래,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이것저것 다 이야기 해주고 싶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다 알려야겠지... 가자. 일단 화부터 낼거라고 생각했던 화랑이 생각보다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랑이 왜, 화낼까?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황급히 고개를 흔들고는 서둘러 화랑을 끌어안고 날개를 꺼내 날아올랐다.

" 후아암, 가는데 얼마나 걸려? "

" 1시간 정도 걸릴거야 "

" 그래? 그럼... 좀 자자. 적어도 정신 좀 돌아와야 하니까 도착하기 10분 전엔 깨워라 "

그 말을 하고는 자세를 조금 더 편안하게 바꾼 화랑이 눈을 감는 걸 본 진이 슬쩍 웃고 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재빠르게 창문을 넘어 날아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진 그 빈자리를 바라보던 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앞 날이 걱정이군. 리는 자신과의 영상 통화에서 카자마 진의 이름만 들어도 일단 인상부터 찌푸리던 제 오랜 지인이자 화랑의 아버지와도 같은 그 남자를 떠올렸다. 리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의 집까지 단숨에 날아간 화랑은 도착 10분 전 깨어나 적당히 정신을 차리고 그대로 진의 엄마인 준까지 만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준은 화랑을 반갑게 맞이했고 그 동안과 마찬가지로 진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들으며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하루를 신세지게 되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화랑은 바로 사범인 백두산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화랑은 깨닫지 못했다. 내용을 들은 백두산의 그 싸늘한 목소리를.

" 이상한 짓 하면 죽일거야 "

" 사귀기로 한지 얼마 안되서 그런 짓은 안할거니까... 그리고 잊었나본데 집엔 엄마도 계시거든...? "

그 말을 끝으로 제 침대에 같이 누운 화랑을 끌어안은 진이 눈을 감았다. 하긴 네가 그럴 인간은 아니지. 데빌이면 모르겠지만. 속으로 말을 삼킨 화랑도 일단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들지 못했다. 제 심장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화랑이 눈을 깜박이며 슬그머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어둠과 희미한 달빛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온 건 저를 끌어안고 잠이 든 진이었다. 평상 시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얼굴만 보다가 잠이 든 얼굴을 보니 그제서야 제 나이대에 맞는 - 그래봤자 저와 동갑이긴 했지만 - 그 순한 얼굴이 오히려 신선했다. 이 자식... 남자가 왜 이리 속눈썹이 길어? 마치 마스카라라도 한 듯 길고 곧게 뻗어있는 속눈썹을 보던 화랑이 자세를 바꾸려다 제 몸을 단단히 부여잡은 팔에 결국 포기하고는 다시 가만히 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맨날... 미간을 찌푸린 얼굴만 봤는데... 하, 같이 자니까 이젠 이런 얼굴도 보고... 괜시리... 설레네. 그리고 순간 화랑은 저도 모르게 한 생각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거야! 라며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조금 신선하긴 하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녀석은... 집안 문제로 수심에 잠겨 있는 모습이 다였으니까... 이 녀석의 웃는 얼굴 본게 언제더라... 이 자식과 싸우겠다고 군대 탈영하고 만났던 그때 였나... 오래전이긴 하네... 하아, 이제 다 끝났으니까... 이 자식도 좀 편하게 살면 좋을련만... 데빌은... 힘만 남기고 사라진건가... 아니면 그냥 얌전히 숨어 있을 뿐인건지... 다시 한번 더 화랑이 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슬쩍 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진의 이마부터 코끝까지 천천히 훑으며 내려왔다. 제 손 끝으로 진의 온기가 옮겨온 것 같은 따스함에 헤에, 화랑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작은 탄성을 내뱉었을 때.

" ...뭐해? "

스르륵, 잠든 줄 알았던 진이 어느새 눈을 뜨고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엣. 진이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화랑은 진이 잠에서 깨어나자 당황한 표정으로 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얼굴에 진이 작게 웃었다. 피곤한거 아니었어? 그 말에 짜증을 내려던 화랑이 이내 작게 숨을 토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시끄러워서 못자겠단 말이지... "

" 시끄러워? 밖은... 조용한 것 같은데 "

" 그게 아니라... 아오... 내 심장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못자겠다고... "

" 어...? "

" 아, 진짜... 대충 알아 좀 들어라...! 설레여서인지 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그 소리 때문에... 못자겠다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

덥썩 제 멱살을 잡고 작게 소리를 내지른 화랑에 눈을 깜박이던 진이 결국 작게 웃고는 그대로 몸을 움직여 화랑의 가슴에 제 머리를 가져가 가만히 귀를 기울었다. 두근두근. 화랑이 그렇게 말해서인지 정말로 그의 심장이 시끄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러네. 그 말에 화랑이 괜시리 더 퉁명스럽게 툴툴거리며 떨어지라며 슬쩍 진의 이마를 손으로 미는 순간, 진이 그 손을 덥썩 붙잡아 제 심장이 있을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야, 뭐하는... 뭐라 한마디 하려고 했던 화랑은 순간 제 손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맥박에 입을 다물었다. 저 못지 않게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이 지금 진의 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 나도 너랑 같아, 화랑 "

"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아 "

" 아니, 눈 뜨면 민망해 할 것 같아서 그냥 감고 있었는데... 손으로 만지는 것 같아서... "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있던 화랑이 알았으니까 빨랑 다시 누워. 라며 제 옆을 손으로 툭툭 쳤다. 그 행동에 진이 다시 침대에 눕자 이번엔 화랑이 덥썩 진을 끌어안더니 그 가슴에 가만히 이마를 기댔다. 네 심장 소리를 ASMR 삼아서 잘거니까... 너도 빨리 자. 이거... 화랑 나름대로의 어리광일까...?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그 붉은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진이 팔을 들어 저도 화랑을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빨리 자라고 했지만 둘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바로 잠들지 못할거라는 걸.


2. 양아치인데 공부 고트급으로 잘하는 화랑과 그런 화랑에게 공부 가르쳐주는 진, 그리고 그 모습을 자주 목격하는 라스로 진화랑라스. (연작 예상됩니다)

이 고등학교에는 3개의 불가사의가 있었다. 첫번째는 24시가 되는 순간 학교를 순찰하는 분홍색 여성이 나타난다는 것. 두번째는 이 학교 최고의 양아치와 모범생인 부회장이 절친한 사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그 결과가 대자보로 떡하니 2학년 구간인 학교 2층 중앙 게시판에 붙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상위 20명만 공개한다는 점일까나. 많은 학생들이 게시판 앞에 붙어 상위 20명을 확인하는 동안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의 이유는 대자보에 붙어있던 20명 중 5등에 적힌 이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웅성거림은 그 이름의 주인공이 게시판 앞에 나타남으로서 뚝 끊겼다. 흐응. 학생에 어울리지 않는 노을빛의 머리색을 하고 와이셔츠의 단추는 다 풀고 교칙에 어긋나는 하얀 티셔츠를 안에 받쳐입은 그는 무감각한 눈으로 대자보를 보다 제 옆의 저와 다르게 단정하게 교복을 갖춰입은 소년을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 누가 모범생 부회장님 아니랄까봐 또 1등이냐? "

" 이번엔 너도 등수 올랐네, 화랑 "

" 뭐, 내 입장에서는 대자보에 이름 오를 정도만 하면 되긴하는데... 스티브 그 자식한테 질 수는 없으니까 "

스티브는... 7등이네. 어디보자, 대회 나가서 이 상황을 모르는 여우 자식한테 승리의 말이나 해줄까나. 킥킥 작게 웃으며 역시나 교칙 금지 물품인 폰을 꺼낸 화랑이라 불린 소년이 휘파람을 부르며 스티브의 번호를 찾자 그 옆에서 2학년 전교 1등이자 부회장인 진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화랑의 손목을 잡고는 그대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학교 제일의 양아치이자 교칙을 밥 먹듯이 어기는 화랑이라고 해도 대놓고 학생들 앞에서 규칙을 위반하는 걸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진에 아랑곳 하지 않고 통화를 건 화랑이 통화 상대인 스티브를 한껏 놀려대다 힘내라는 응원의 말을 건네는 걸 들으며 진이 평상시에는 비어있는 학생회실의 문을 연 순간 먼저 학생회실을 방문한 제 3자에 진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뭐야, 왜 멈춰. 타이밍 좋게 통화를 끊고 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은 화랑이 빼꼼 진의 어깨 너머로 안을 들어다보았다. 그리고.

" 진이랑... 화랑인가? "

" 엥, 뭐야. 회장이 여기 왜 있어? 오늘 학생회 회의 없지 않아? "

" 정리할게 있어서 말이야 "

" 흐응, 그럼 방해 좀 할게 "

아까와는 반대로 화랑이 먼저 앞장서서 학생회실로 들어서고 그 뒤를 진이 따랐다. 학생회실의 중앙 책상에 앉아 있던 건 3학년 학생회장인 라스였다. 정리할게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던지 서류를 보며 뭔가 작성 중인 라스가 문을 연 진과 그 뒤의 화랑을 발견하고는 화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도 떨어졌겠다, 거침없이 들어온 화랑이 진을 먼저 소파에 앉게하더니 털썩 그 무릎을 베고 누웠다. 화랑... 어처구니 없다는 진의 목소리에도 마이웨이인 화랑은 작게 휘파람을 부르며 폰을 꺼내 게임을 실행할 뿐이었다.

" 화랑, 너무 당연하다는 듯 폰 꺼내서 게임 하지마 "

" 싫-어. 아, 오후 수업 안들어갈거야. 땡땡이 친다. 너도 들어가지마 "

" 그건... "

" 아, 모범생 진짜. 어차피 중간고사도 끝났고 결과도 나왔겠다, 하루 정도는 여유롭게 있어도 되잖아 "

" 음... "

" 그래, 봐줬다. 내가 틀린 문제로 오답 노트 작성은 어때? "

진짜 선심쓰듯 내뱉은 말에 잠시 고민하던 진이 슬쩍 라스를 바라보았다. 라스는 서류 작성에 집중한 듯 둘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체였다. 뭐... 괜찮겠지. 화랑의 돌발 행동에 자주 휘말려 익숙해진 진은 땡땡이는 치지만 공부는 하겠다는 화랑의 제안을 수락했다. 어차피 안된다고 해도 화랑은 이 학생회실을 나가 다른 곳에 박혀서 땡땡이를 칠테니까. 그럴바에야 제 눈이 닿는 곳에 두는게 진으로서는 이득이었다. 진의 수락에 얼굴이 핀 화랑은 다시 게임에 집중했고 진은 그런 화랑의 머리 끝을 매만지며 같이 게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둘을 라스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의 마지막 세번째 불가사의, 그건 학교 최고의 양아치인 화랑의 성적이 탑급이라는 것이었다. 작년 학교에 체육 특기생으로 전학 온 화랑은 첫날부터 노을빛을 연상시키는 목덜미를 덮는 붉은 머리칼과 자유분방하게 입은 교복으로 첫날부터 학교 태풍의 눈으로 등극했다. 겉모습도 겉모습이지만 학교 밖에서 다른 학교의 양아치들과 싸우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 것도 컸다. 그나마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 다들 화랑과 거리를 둘 뿐 무서워 한다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이런 화랑과 진은 이미 아는 사이었다. 전학 온 첫 날, 다짜고짜 학생회실의 문을 벌컥 열며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는 화랑에 진이 제 머리를 감싸쥔 걸 학생회가 목격했었으니까. 그 후 진이 다행스럽게도 화랑의 목줄을 잘 잡고 컨트롤하며 둘은 무사히 2학년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분명 1학년 2학기 기말 고사에서 밑바닥의 성적을 기록했던 화랑은 2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무려... 19등을 기록했다.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은 날 학생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고 화랑은 저한테 밀려 21위를 한 학생에게 무려 멱살이 잡혀 부회장에게 알랑 거리더니 시험지라도 받은거냐며 모독을 당했다. 그 모독에 화랑은 그 학생을 패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그 학생이 틀린 문제를 해설과 설명을 해주며 역관광을 해줬다. 칠판 앞에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직접 문제 풀이를 하던 화랑이 이제 됐냐? 이럴 시간에 오답 노트나 작성하는게 도움 될 걸? 이 얼간이들아. 퍽, 들고 있던 분필을 그대로 칠판에 던져 박살내고는 유유히 교실을 나갔고 공부로 역관광 당한 학생이 멍하니 앉아있던 그 날 이후 학교에 세번째 불가사의로 등록된 것이었다.

아, 여기서 계산 틀린거였냐! 아오! 화랑의 큰소리가 학생회실에 울려퍼졌다. 어쩐지, 수식은 맞았는데 왜 틀렸는가 했더니... 작게 투덜거리며 화랑이 들고 있던 펜으로 맞는 답을 적어넣었다. 어려운 건 잘 계산해놓고 덧셈, 뺄셈에서 틀리면 안되지. 진의 말에 쳇, 혀를 찬 화랑이 펄럭, 시험지를 뒤집었다. 게임도 질렸는지 자세를 바로잡은 화랑이 시험지를 꺼내자 자연스럽게 오답노트 작성을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났다. 맞다, 회장은 오후 수업 안들어가? 시험지를 뒤집은 후 화랑이 문득 여전히 중앙 책상에서 뭔가 작업 중인 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조용해서 눈치채지 못했네. 진이 작게 중얼거리고는 같이 라스를 바라보았다. 라스는 여전히 서류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 교사진에게 허락은 받았다. 그러니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

" 헤에, 역시 선생들의 신뢰를 받는 학생회장이다 이거구만. 그럼 신경 끄고 계속 할까, 진 "

이거 헷갈렸다고. 잠시 라스를 바라보던 진은 손가락으로 틀린 문제를 짚는 화랑에 시선을 돌려 문제를 확인하고는 이내 아, 이 문제는... 라며 입을 연 순간. 학교 전체에 울리는 음악 소리, 그 음악 소리는 학교 안내 방송을 뜻하는 소리였다. 잠시 후 음악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 아아, 들리나? 좋아. 카자마 진 부회장, 방송을 듣는 즉시 교감실로 와주게. 다시 한번 더 말하지. 카자마 진 부회장, 방송 듣는 즉시 교감실로 오게나 ]

" 이 느끼한 목소리... 뭐야, 교감이야? 교감이 널 왜 찾아? "

" 글쎄... 하지만 방송까지 하면서 찾는거 보니 급한 일인가 본데 잠깐 다녀올게. 그 동안 쉬는 시간은 어때? "

" 좋지~ "

쉬는 시간을 가지자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대로 다시 소파에 누운 화랑을 보며 작게 웃은 진이 라스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일어나 학생회실을 나갔다. 흐음~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습관적으로 게임을 켠 화랑이 액정을 두드리며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토독토독, 예쁘게 기른 손톱이 리듬감 있게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학생회실에 울려퍼졌다. 그 고요함 속에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기분 좋게 들려서일까, 화랑은 제 머리 맡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흐음, 으음. 콧노래를 부르며 액정을 두드리던 화랑은 액정을 가리는 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슬쩍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스가 보였다. 화랑이 어느새 죽어버린 제 캐릭터에 칫, 혀를 차며 게임을 끄고 라스를 노려보았다.

" 뭐야, 왜? 진 없다고 뭐라고 할려고? "

"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

" 그럼 뭐야. 난 지금 쉬는 시간이라고? "

" 그냥 조금 궁금해서 말이지. 넌 공부랑은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왜 진이 너에게 공부를 가르치는거지? 그것도 집에까지 데리고 오면서 "

" 집? 아~ 맞다. 댁도 미시마 가 사람이지 "

미시마 가. 그래, 이 학교는 미시마 가가 설립한 학교였다. 그렇기에 이 학교를 다니는 미시마 가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징이 있다면 그 누구도 미시마 라는 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학년에 재학 중인 레이나는 아예 성을 사용하지 않았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진은 어머니의 성인 카자마, 3학년에 재학 중인 라스는 알렉산데르손이라는 성을 사용했다. 그건 미시마 가에 깔린 어두운 부분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이건 지금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 넘어가고.

화랑의 말에 라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사정의 미시마 가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학교에 재학 중인 세 사람의 사이가 그닥 나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히 같은 학생회에 속해 있는 진과 라스의 사이는 오히려 우호적인 사이에 속했다. 그렇기에 라스는 진이 화랑을 데리고 학생회실에 와서 공부를 봐주는 걸 몇번이나 목격했고 심지어 하교 후 미시마 가에까지 데려와 공부를 봐주고 하루 밤 머무르게 하는 것도 봤다. 성격 상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진이 화랑을 이렇게까지 챙기는 이유가 라스로서는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 당신 뭐 진의 인간 관계 관리해? 그런 건 왜 궁금한거야? "

" 성격 상 전혀 맞지 않을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나 친한 걸 보면 누구나 궁금해하지 않을까 "

" ...그거 왠지 나를 까는 것 같은데. 뭐, 나랑 진은 과거부터 친구였고 친구한테 공부를 배우는 게 뭐 나쁜 건가? 그리고 내가 공부를 배우는 이유는 단 하나야, 사범님한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지 "

" 사범님...? 아, 체육 교사인 백두산 선생님을 말하는건가 "

" 그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가족이 없어. 이런 나를 사범님이 거둬서 키워주셨고. 그런 사범님한테 적어도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뿐이야. 그리고 일단 공부를 잘하면 겉모습이나 행동이 양아치여도 선생들이 어느 정도 봐주잖아? "

불순한 목적이 반, 순수한 목적이 반이 섞인 대답에 라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태풍의 눈 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한 라스가 움직이자 화랑이 몸을 일으켰고 라스가 그 옆에 앉아 시험지를 손에 쥐고 잠시 눈으로 훑었다. 흐음, 이 부분. 수식이 반대야. 라스의 손이 아까 진이 부름을 받고 가기 전 화랑이 가리켰던 문제 부분을 가리켰다. 반대? 고개를 갸웃거린 화랑이 그의 옆에 붙더니 제가 풀면서 작성했던 수식을 눈으로 훑었다. 어디 부분 말하는거야? 여기다, 여기. 라스의 손에 들린 시험지를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 화랑이 그의 옆으로 더 다가왔다. 으음... 이게 왜 반대라는거야. 화랑의 질문에 라스가 가슴 포켓에 꽃아놨던 펜을 들어 수식을 적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흐음, 응... 그렇군... 라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화랑이 피식 웃었다.

" 왜 웃는거지? "

" 당신도 전교 1등에 모범생이지? 누가 미시마 가 사람 아니랄까봐 설명하는 모습이 똑같아서. 우리 학교 수학 선생들보다 이해하기 훨 나은데 둘 다 진로를 선생으로 잡는게 어때? "

" ...칭찬으로 듣지 "

라스가 일어나더니 이내 방금 전까지 작성하던 서류를 들고는 말없이 학생회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던 화랑이 하아, 한숨 비슷한 숨을 내쉬고는 이내 다시 털썩 소파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카자마 진 이 자식은 교감이란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늦어...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던 화랑이 이내 에라 모르겠다 중얼거리고는 옆으로 편하게 자세를 잡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작성한 서류를 제출하고 정리를 위해 돌아 온 라스는 소파에서 잠든 화랑을 보고는 소리도 없이 책상을 정리하고 조용히 소파 뒤로 다가와 잠든 그를 내려다 보았다. 깨어있을 땐 시끄럽고 이리저리 바쁘더니 잘 때는 그 누구보다 조용하고 얌전하다. 충전 중인걸까, 속으로 중얼거린 라스는 아까 전 화랑의 말을 떠올렸다.

진로를 선생으로 잡는게 어떤가... 라. 미시마 가의 숙명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진은 이미 진로가 결정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역시나 미시마 가가 설립한 대학교로 진학, 경영학과에서 공부 후 졸업하면 바로 미시마 재벌에 소속되어 일하게 될거다. 남들이 보면 잘 닦인 길을 걷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자신과 진에게 그 길은 잘 닦인 길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가는 그린 마일과도 같았다. 레이나는... 논외니까 제외지만. 그제서야 라스는 왜 진이 화랑을 챙기며 제 옆에 두는지 알 것 같았다. 주어진 길만을 걸어야하는 진에게 화랑은 자신을 숨쉬게 해줄 수 있는 존재였을거다. 화랑이 하는 모든 돌발행동과 진에게 제안하는 모든 말들은 남들이 보기엔 일상의 파괴지만 진에겐 주어진 길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의 반항과도 같았을테니까. 그 전에는 수업을 땡땡이치고 그, 카즈야에게 반항한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을거다. 조금은... 부럽고... 질투가 나는군. 라스의 왼손이 소파 등받이를 붙잡더니 천천히 화랑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눈이 시린 노을빛을 닮은 머리칼에 손이 닿기 직전.

" 건들지마 "

언제 들어온건지 진이 문 앞에 서서 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없이 성큼성큼 다가온 진이 라스의 손을 툭 가볍게 쳐냈다. 이런 민감한 반응 또한 처음보는 라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보다 이내 다시 손을 뻗어 기어코 그 노을빛 머리칼을 매만졌다. 진의 눈에서 번개가 튀었다.

" 그렇게 민감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나? 내가 해를 끼칠 것도 아닌데 "

" 건들지 말라고 했어, 라스 "

" 너만 독점하는건 좀 불공평하지 않을까. 숨을 쉬고 싶은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

" 그럼 다른 사람을 찾아. 화랑은 내꺼야. 내가 찾았고 내가 손에 쥐었어 "

" 목줄을 완전히 쥔게 아니잖아? "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을 뗀 라스가 진과 눈을 마주쳐왔다. 분노한 진의 눈에서 번개가 튀는걸 본 라스가 가볍게 웃었다. 억압된 환경에서 주어진 길만을 걸어야하는 비슷한 운명을 지닌 둘. 그리고 둘 중 진에게만 숨을 쉴수 있게 해주는 자유로운 존재가 손에 들어왔다. 그래, 라스는 그것이 부럽고 질투가 났다. 하지만 조금은 다행이라면. 라스가 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농담이야. 남의 것을 강탈할 정도로 급하진 않으니까 "

" ...... "

" 하지만 "

라스가 이번에도 발걸음이 들리지 않게 조용히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는 나가기 직전 중얼거린 목소리가 진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목줄을 단단히 잡아야할거다. 아무도 붙잡지 않은 목줄을 가만히 바라볼 생각은 없으니까. 라스가 학생회실을 나가고 닫힌 문을 보던 진이 입을 꾹 다물고는 잠든 화랑의 머리 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줄을 완전히 쥔게 아니다. 그래, 그 말 그대로였다. 자신과 화랑은 그저 친구일 뿐이니까. 화랑은 자신을 공부를 잘하는 친구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화랑을... 진이 손을 뻗어 화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너는... 나를 숨쉬게 하기도 하지만 가끔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그래서 더... "

손에 쥐고 놓아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건 제 욕심으로 화랑의 자유를 속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은 제 욕심을 꾹꾹 누르며 화랑의 목줄을 완전히 잡지 않았다. 진은 좀 더 보고 싶었다. 화랑이 자유롭게 저를 이끌고 나아가는 모습을. 진이 작게 한숨을 쉬며 일어나 화랑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머리를 제 무릎 위로 올려 무릎 베개를 해주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평온한 시간을 앞으로도 온전히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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