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피는 곳에서
조선시대 (계유정난 배경) AU
春.
매화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피었다. 하얀 먼지처럼 내려앉은 겨울의 마지막 눈이 자취를 감출 무렵이면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달짝지근한 향기를 내뿜었다. 궐 안의 매화는 유독 곱고 향긋한 것이 가득했다. 무어든 가장 빼어난 것만을 눈에 담을 분이 계신 궁궐은 그러한 곳이었다. 무엇이든 반짝이고, 모두가 화려해 길을 잃은 작고 초라한 의녀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는 곳. 비슷한 모양새의 벽과 건물 사이를 헤매는 동안 안내자로 의지할 것이라고는 사방으로 가지를 꺼내들곤 제각각의 방향을 가리키는 매화나무 몇 그루가 다였다. 하염없이 걷는 걸음이 목적지를 잃었다. 멈춰선 것은 검붉은 옷자락의 사내 앞이었다.
“내의원의 의녀가 어쩌다 길도 못 찾고 헤매고 있습니까?”
장난스레 올라간 눈꼬리는 평소라면 경계할 부류에 속한다. 신분이 높은 자들 중에서는 간혹 심심풀이로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있기에. 그러나 그의 붉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셀레스테는 잠시간 숨을 멈춘다. 어쩐지 곧 잊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궁에 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는 양반집 자제의 여유가 묻어났다. 그 덕에 셀레스테는 쉬이 걸음을 돌릴 수 있다. 절대로 오래 엮여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물러나보겠습니다, 말을 남기고 멀어지려는 걸음을 사내는 붙들어세운다. 앳된 여인의 개울을 닮은 푸른 두 눈이 일렁였다. 당황한 낯이 만연한 이에게 길을 일러주며.
“내의원은 오른쪽입니다.”
길고 곧게 뻗은 고운 손가락이 방향을 가리킨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멀어지는 여인도, 그리 일러주고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사내도, 마음에 남을 파동과 함께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夏.
여름은 찰나에 걸쳐 찾아온다. 온갖 녹음은 우거지고 생명은 속도를 붙여 자라났다. 청년의 태를 완연하게 입은 자는 드높은 기지로 하염없이 곧게 자라났으며 어린 풀은 끝내 단단해졌다. 그럼에도, 화창한 여름날에는 바람결에 맞추어 휘이 흔들리기를 알았다. 그는 대나무가 되어 푸르게 서 있다. 스칼렛은 걸었다. 호위를 맡은 지도 이 년이었다. 내금위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조정에 한 차례 폭풍우가 몰아친 후였다. 스칼렛이 지켜야 할 이는 처음 그 자리에 섰을 때부터 약했고, 끝내 스칼렛이 임무를 맡은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왕위를 빼앗겼다. 왕이 바뀌었다. 그러나 호위하는 자신의 자리는 변함이 없다. 왕과 상왕이 대적할 때 왕을 지키는 자신은 누구를 지켜야 할까? 스칼렛 본인보다 한참이나 어렸던 왕의 모습이 자꾸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임금은 모두 하늘 같다더니, 추락하는 하늘도 있는가보다. 그러나 어떠한 일을 도모하기에는 보는 눈도 많았으며 가진 힘도 미약했다. 아직은 어쩔 수 없었다.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 누군가 왕을 몰아내려 한다거나, 뭐 그러한 중대한 일은 아니었지만. 스칼렛은 문득 왜 이에 작은 아쉬움의 감정이 남는지 조금 고민했다. 여하튼, 제법 큰 매 한 마리가 난데없이 임금 앞에 나타나 요란을 떠는 탓에 팔뚝을 긁혔다. 눈대중으로 살펴보건대 그리 심하지 않아 보여 그냥 두었다. 잠시간 생각으로 멈추었던 걸음을 떼려던 차에, 조금 전부터 이쪽을 보는 듯하던 이가 마침내 다가왔다. 손에 든 것은 하얀 천으로 감싼 작은 꾸러미였고, 당위성을 띠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미는 손동작이 무척이나 익숙해보였다.
느릿하게 지나가는 배경 속 마주친 두 눈동자는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관찰했다. 셀레스테에겐 낯익은, 스칼렛에겐 낯설지 않으나 여즉 생경한 서로를. 스칼렛은 생각에 잠겼다. 차림으로 보아 의녀의 신분인 이에게, 낯설지 않은 감각이 일 이유가 없을 텐데. 궁을 지나치다 보았던가. 고민에 빠진 새 기어코 허공에 떠도는 제 두 손에 꾸러미가 안겨졌다.
“ 상처에 좋은 약재입니다. ”
힐끗 제 상처에 시선을 주었다. 지나치다 들었든, 보았든, 그리 조용한 일도 아니었으니 그럴 법 하다. 다만 의문인 것은 호의이다. 어떠한 이유로, 왜, 구태여 찾아가며. 앞에 선 이도 짐작할 물음을 답하라 할 셈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추궁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여전히 묵묵히 입술을 열지 않는 것은 순전히 곧장 의도를 알아차리는 앞의 여인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할지도.
셀레스테는 차분히, 또한 간략하게 손에 들려준 약재에 대해 설명했다. 애초에 크게 유난을 떠는 성품은 아니었고, 재량껏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기에 별 대단한 약재를 가져온 것도 아니다. 우연히 지나치다 본 장면에서 그 주인공이 낯익었고, 기억을 헤집어보니 봄의 일이 떠올랐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이쯤에서 걸음을 돌리려던 차에 마침내 목소리가 울렸다.
“ 이름은. ”
한갓 의녀의 이름은 알아 무엇할 것이며 양반집 자제에 저 높은 벼슬에 있는 이가 기억이나 할 텐가. 그럼에도 거부하지 못한다. 셀레스테프레즌입니다. 이를 끝으로 정말 은발의 내금위에게서 물러나 돌아섰다. 더 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결국 제 이름만 알려줬으나 뭐 어떠한가 싶은 생각. 구태여 알려 들지 않았다.
스칼렛은 멀어지는 하얀 머리칼을 보며 천천히 되뇌었다. 제 이름을 말해주지 못했는데. 그러나 궁은 넓다.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스칼렛의 이름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곧 별 생각이 없어져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줄곧 머릿속을 괴롭히는 제 임금에 대한 고민으로도 인생에 고뇌할 거리가 너무나도 많았다.
秋.
매미 소리가 사그라들고 나뭇가지 위 단풍이라는 이름의 화마가 스쳐갔다. 희고 또 노란 빛의 국화는 소복이 피어 오가는 이를 맞이했다. 흐르는 계절만큼 걸음도 따라 흘러 셀레스테는 이제 궁을 제법 잘 알게 되었다. 제 이름을 알아놓고 여즉 이름을 모르는 그 내금위 또한 마주칠 때면 가벼운 목례를 건네는 사이가 되었다. 익숙함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 인사가 걸어들어오는 줄을 모르고, 가벼운 의미가 차차 묵직해지는 줄을 모르고.
바쁜 걸음 사이로 주고 받던 눈인사가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선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핑계 하에 한갓진 곳에 멈추어 선 채로 가벼운 농을 나누었다. 드문드문 만나던 시간은 고운 별빛만이 그들을 지켜보는 밤으로 옮겨 갔고, 헤어질 때 나누던 작별 인사는 다음을 기약하는 약조로 변화했다. 셀레스테는 어느새 그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았다. 스칼렛은 어느새 쌉싸름한 약초의 향을 반기고 있었다.
철 지난 나뭇잎이 제 힘을 다 쓰지 못하고 떨구어진다. 세상은 그 나뭇잎이 하강하는 찰나, 그 작은 시간만큼을 스칼렛과 셀레스테에게 허했다. 우연으로 마주쳤고 보답하고자 다시 만났던 이들은 차츰 옷자락에 꽃향기 스며들듯 서로의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아마 모를 테지. 준비되지 않은, 서로를 향한 섣부른 다정은 결국 서로의 목을 겨누는 칼끝의 독이 된다. 당신과 나의 다정이 그러했다. 우리는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을 뻗는 것과 같은 미련한 짓을 시작해버렸다. 끝내 거둘 수 없는 손짓이었고 미처 등 돌릴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이따금 한적한 가을밤 가까스로 서로의 형체를 확인하는 것에서 그치더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감정의 전이는 순식간이다. 타오르는 횃불이 주변을 집어삼킬 수록 무한히 몸집을 불려나가는 것과 닮았다. 고요한 두 가슴에 번진 산불이었다.
셀레스테는 스칼렛의 이름을 배웠다. 그가 궁에서 무얼 하는지 배웠고, 그 은빛 머리칼이 찰랑일 때 비추는 햇빛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꽤 찬란하여 제 혼을 빼놓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붉은 두 눈동자에 담긴 세상이 참 넓다는 걸 배웠다. 스칼렛은 셀레스테의 이야기를 배웠다. 궁 밖에서 보낸 그녀의 시간을 배웠고, 백색 머리칼이 셀레스테가 뒤돌아볼 때 흩날리는 모습이 환하여 작렬하는 태양을 보는 것 같다는 것을 배웠다. 푸른 두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이 많이 행복해보인다는 것을 배웠다.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았고, 그렇게 하나씩 배워가며 웃음짓는 이들을 지나쳐 전속력으로 달음박질 친 서늘한 가을이 서둘러 달아나버렸다.
스칼렛은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스스로가 그리 의로운 이라 믿진 않았는데도 기어코 행동하기로 한 제 변덕에 본인조차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선한 이의 영향인지, 잠깐 스치듯 지나간 제 가엾고 어린 군주의 잔상 탓인지. 뜻을 함께하는 문관과 무관을 만났고, 차근히 계획을 다졌다. 한편 현 왕의 앞에선 가면이라도 쓴 듯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내금위였다. 셀레스테의 앞에선 사랑에 빠진 어린 애였다. 무엇이 온전한 자신인지도 놓쳐버릴 것처럼 혼란한 가을이었다. 그렇게 가을을 떠나보냈다.
冬.
눈부신 흰색이 세상을 잠식했다. 영원할 것 같은 낙엽의 추락이 멎어버렸다. 첫눈을 함께하며 미래를 노래했던 둘의 현재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한겨울이었다. 매서운 눈발에 휩쓸려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한겨울이었다. 자정의 뒤뜰, 스치는 손끝을 어느 궁인이 보았기에. 실은 놀라울 것은 없던 것이, 일전의 그 어리고 유약했던 군주의 곁에 있던 인물들에게 왕이 지켜볼 자 하나 붙이지 않을 리가 없었지 않은가. 설령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이 곁을 지키던 젊은 호위라 하여도. 쥐여 흔들릴까, 바스라져 사라지려나.
세조 1년. 명의 사신이 조선 땅을 찾았다. 스칼렛은 별운검으로 발탁되었다. 셀레스테에게 씩 웃어보이는 미소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성공한다면 후에 만나겠지만 실패한다면 오늘이 그들의 마지막일 테니. 어느 때보다 힘껏 진심을 담았다. 셀레스테프레즌. 매일이 그대를 보는 마지막 날이라면 어떨지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그대가 이 궁을 떠났으면 좋겠다. 안전하지 않을 것이야.
셀레스테는 스칼렛의 표정에서 위화감을 읽었다. 묻기엔 묵직하나 모른 척 하기엔 불안한 일이다. 청명한 두 눈이 스칼렛을 바라봤다. 스칼렛파이어,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어든, 모두 이룩할 수 있길. 그러나 당신 곁을 떠나달라는 그 부탁만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끝내 고갤 내젓기만 했다. 처음, 봄의 그 어느 날, 당신이 기억하지 못할 순간 나의 시작을 함께했으니 그 결말이 어떠하든 그 또한 함께하리라. 하늘의 달이 만월이었다. 환한 보름달이 세상의 주목에서 둘을 가리려는 듯 부옇게 흐려진 구름 뒤로 숨바꼭질을 계속한다. 빛의 부재 속 마주치는 두 눈동자가 마침내 오늘의 이별을 고하려는 듯 잔잔하게 흔들렸다. 무심코 들어올린 스칼렛의 왼손이 허공을 방황하다 가볍게 손가락을 굽혀 빈 공간을 그러쥐었다. 해야할 말이 많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말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서. 그런 스칼렛의 손 앞에서 셀레스테의 손끝이 멎었다. 차마 닿지는 못한 한 줌의 거리를 두고 하강하는 몸짓이 찬 겨울바람에 싸여 흩어진다.
온갖 방향으로 몰아치는 돌풍 사이에서 사치를 부리고 있었던 걸까? 뒤돌아 걸어가는 스칼렛의 상념이 함께 휘날렸다. 밤이 잦아든다.
이른 아침.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박동하는 심장은 별운검의 복장 안으로 숨긴 채 눈빛을 교환한다. 그것만으로 오늘의 모든 결의는 끝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왕의 앞에 나섰다. 이어지는 시간이 느릿한 듯 빠르다. 검집에서 시리게 빛나는 날을 빼어든 이후로는 모든 것이 부옇기만 하다. 가로막는 이들에 대한 몇 번의 검격이 손끝에서 일어난 것도 같고. 목표했던 붉은 옷자락에 닿기도 전 세상이 하얗게 부서지며 자리에 쓰러졌다. 마침내 안녕을 고할 시간이 왔다. 이루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세상에 남겨둔 채로.
같은 시각. 셀레스테의 앞에 무장한 이들이 들이닥쳤다. 무릎을 꿇린 채 호령하듯 죄를 읊는 이의 표정이 따분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져 그 또한 서글펐다. 궁의 여인이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은 죄. 품은 사내가 반역자인 죄. 거짓되었다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그리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곧장 형에 처해질 것을 기다렸음에도 유예가 있는 것은 심장을 쥐어짜내는 상실감을 기어코 이어가게 만들려는 탓인가. 두 발이 묶이고 두 눈이 가려진 채로 어딘가에 끌려가는 동안 단 한 번의 거부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며, 핏빛으로 번져가는 시야를 애써 또렷하게 보려 했다. 도무지 상이 선명하게 잡히질 않는다. 셀레스테프레즌. 하늘을 닮은 네 눈동자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불쾌한 감각 속에서도 하고픈 말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무력한 마지막이라니. 얄궂게도 맑은 겨울 하늘은 햇빛마저 허락하여 죽음의 순간을 찬란하게 장식한다. 마지막 호흡을 쥐어짜 속삭이기를, 셀레스테프레즌, 다음 생에선 우리 평화로이 함께하길 바라.
回.
봄이 다시 찾아왔다. 매화의 꽃잎은 여즉 여리게 하늘거리다가, 불어온 바람의 거친 손길에 제각각 떨어져 흩날린다. 대나무 곧은 가지 위에 올라앉은 작고 고운 날개가 안쓰럽게 몸부림친다. 날아라, 어린 새여. 담장 안에 국한된 잃어버린 자유 대신. 발이 매여 더는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여. 멀찍이 비행하여 네 끝에 닿아라. 핏빛 붉은 색으로 얼룩진 고운 꽃 한 송이를 보는 날에는 안부를 전해주련.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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