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왕국의 이야기

마녀와 용

아주 오래 전, 이 땅에는 하나의 전설이 존재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이들을 자매로 묶어 키우면, 언젠가 그들이 거대한 용이 되리라는 전설이.

“한 날 한 시에 난 너희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일 것이며…….”

붉은 머리칼을 단정히 땋아내린 한 아이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긴 연설문을 듣다 못해 기어이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슬쩍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누구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기도에 열중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니, 딱 한 명, 눈을 감고 있지 않던 이가 있었다.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저를 보고 있던 아이. 제 옆에 서있는, 자신과 한 날 한 시에 났다는 아이. 해질녘의 태양과도 같은 새빨간 머리칼을 지닌 아이. 그는 저를 가만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눈꼬리가 가늘게 휘며 금빛 눈동자를 가렸다. 깊이 파인 볼우물 위로 옅은 홍조가 돈다. 그것이 한낮의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금발의 아이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았다. 열심히 기도하는 다른 어른들처럼.

그 날, 해질녘의 태양빛을 가진 이와, 한낮의 태양빛을 가진 이는 자매가 되었다. 그들은 다른 마을의, 다른 가족의 딸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사이였다. 오랜 전설에 따라, 그들은 신전에 마련된 거울처럼 같은 구조를 가진 방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아니, 사실상 그 문은 의미가 없었다. 그 문은 닫혀있던 적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가까워져, 진짜 형제자매보다도 훨씬 가깝고 친밀해졌다.

어떤 이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고, 어떤 이는 붉은 머리칼을 가졌다. 어떤 이는 푸른 눈동자를 가졌고, 어떤 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졌다. 어떤 이는 교활한 불꽃을 다루었고, 어떤 이는 정직하게 검을 휘둘렀다. 어떤 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고, 어떤 이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세상이었다. 언제나 함께할, 서로가 없는 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 같은 배에서 나지는 않았으나, 같은 배에서 난 이들보다 가까운 사이.

그렇기에,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이별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한 날 한 시에 났으니, 늘 서로가 존재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죽을 것이다. 누구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알았다. 어떻게 제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있을까?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마을의 사내를 죄 쓰러뜨릴 수 있게 된 적발의 검사는, 타오르는 태양보다 찬란히 웃던 어떤 이는, 검은 머리의 사내를 만났다. 그는 제 아내가 될 이를 보러 온 이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을 피워낸 적발의 마법사는, 그 불꽃보다도 뜨겁게 타오를 수 있게 된 어떤 이는, 갈색 머리의 사내를 만났다. 그 또한 제 아내가 될 이를 보러 온 이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날, 두 마을에는 잔치가 열렸다. 끊어지지 않을 용의 축복을 기원하고, 자매와 형제의 결합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함께 자란 자매와 마찬가지로 함께 자란 형제. 두 쌍의 용을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하늘 높이 울렸다.

두 사내는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요란한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밤을 밝혀, 동이 틀 때까지도 마을은 온통 환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밤낮이 일곱 번 지나가고, 형제가 자매를 맞이하러 간 날, 그들이 본 것은 불꽃에 뒤덮인 신전이었다. 쇠를 녹이고, 돌을 살라먹는 화염이었다. 그 지독한 불은 꼬박 사흘을 지난 후에야 스스로 사그러들었다.

불꽃을 본 이들은 외쳤다. 마녀다! 사악한 마녀가 용을 집어삼켰다! 그리하여 형제는 제 아내들을 되찾기 위해 검을 들고 말 위에 올랐다. 열기로 벌개진 얼굴을 하고, 그들은 숲 곳곳을 뒤집어놓고, 호수의 밑바닥을 뒤졌으며, 모든 골짜기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어이 마녀와 용을 찾아냈다. 작은 오두막에 숨어, 머리를 맞대고 잠든 그들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맞잡은 손이 애틋했다. 신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그 오두막 안에는, 두 사람이 삶을 이어온 흔적이 가득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껏 그리 살아왔다 해도, 영영 그리 살거라 믿고 그리 살거라 열망한다 해도,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아내니까. 적어도, 형제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사람을 떼어내 끌어냈다.

먼저 쓰러진 것은 기사였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휘두른 기사는, 마법사를 감싸다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뒤늦게 깨어난 마법사는 제 상처를 감싸고 헐떡이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를 보아야했다. 기사를 베어낸 검은 머리의 사내는 마법사마저 잡으려 천천히 걸어왔다. 익숙하지만 낯선 말이 귓전에 흩어졌다. 마법사는, 숨을 헐떡이며 핏물로 얼룩진 대지에 손을 짚었다. 핏물이 손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마법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지독한 불길을 다시금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 모조리 불길이 되었다. 새빨간 불길은 혀를 날름거리며 마법사의 몸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그 불길에 핏물을 더하고, 그 불길에 바람을 더하며, 마법사는 피를 토하며 외쳤다.

“너희는 기어코 멸망하리라. 너희의 땅은 메말라 갈라질 것이다. 너희의 핏줄에는 광기가 흐를 것이다. 너희는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너희의 씨가 마르고 대가 끊겨, 불길 속에 추락하여 멸망하리라. 그 모든 순간에 내가 함께 하리라. 그 모든 멸망에 내가 손을 보탤 것이고, 그 모든 불길에 바람을 일으켜, 너희는 끝내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잿더미가 될 것이다.

이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나의 저주는 이 나라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하여 멸망해 스러질 날에, 나의 영혼 또한 스러지리라.

저주한다, 너희를 통렬히 저주한다! 나의 영혼을 다 걸어, 나는 너희를 저주한다!“

불길에 휩싸인 이가 외치는 저주의 말은 그 자리의 모든 이의 귓가에 선명히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제 주인마저 집어삼킨 불길이 온 숲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신전을 불태운 불꽃과 같아, 사흘 내내 타오른 후에야 스스로 사그라졌다. 불이 다 꺼진 후에야, 뒤늦은 첫눈이 새까맣게 타 재가 된 땅을 덮었다.

눈이 다 녹고, 땅에 덮인 재가 땅에 스며들즈음, 말을 탄 이들이 그 땅 위에 섰다. 그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불꽃을 화로에 심어 그 땅 깊숙히 새겼다.

그리하여, 왕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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