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왕국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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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왕국의 이야기

마법사와 기사의 이야기

친근한 자매 by 팡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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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매 간의 근친상간, 여성혐오적인 시대상과 발언, 자살 묘사, 감금, 살해, 방화, 폭력 묘사 주의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연히도, 혹은 뻔하게도, 왕실의 지난한 사치와 향락이 원인이었다. 폭정으로 서서히 기울던 왕국은 지독한 가뭄을 만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밭일을 하다 메마른 밭 위에 쓰러져 죽었다. 여인은 굶어죽어가는 아이를 끌어안고 조용히 시들었다. 아이는 부모를 잃고 헤매다 다리 밑에 묻혔다.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사들은 폭도가 되었다. 혹은 무기를 두고 도망쳐 사막에 고꾸라져 죽었다. 혹은 굶주림과 추위로 눈 먼 이들에게 매맞아 죽었다. 모두가 그러했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었다. 벌레처럼 죽은 이들의 시신이 온 나라에, 온 마을에 굴러다녔다. 배부른 것은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와, 왕실 뿐이었다. 밥 지을 솥조차 없어 굶어죽는 이들이 숱한데도, 황금을 녹여 만든 왕관을 쓴 이는 애첩의 머리에 와인을 부으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기회로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폭정과 가뭄으로 뭉그러졌다 해도 왕국은 왕국이다. 비가 오면, 강과 접한 평원에서는 다시금 밀이 자라날 것이다. 그리하여 저 땅은 시들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리 여긴 다른 국가들은 죽어가는 사자 주위를 맴도는 승냥이 떼마냥 왕국을 탐냈다. 이미 강병도, 군마도, 기사도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는 왕국은 다른 것으로 승냥이 떼를 유인해 시간을 벌었다.

왕이 말한다.

“너는 이 나라의 왕족이며, 왕녀로 태어난 이다. 그러니 왕국의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라. 나의 강을 건너고, 나의 산을 넘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곳의 왕과 결혼하여 그를 막거라. 수천의 군사와 수십의 기사 대신, 네가 헌신하여 이 나라의 평화를 지켜내라.”

첫째 왕녀가 말한다.

“아버지, 어찌 이러십니까. 그에 대해서는 저 또한 압니다. 나이 예순에 스무 명의 첩을 두고, 세명의 왕비를 둔 이를 압니다. 끝내 이 나라를 노릴 이를 압니다. 끝끝내 저의 목을 치고, 우리의 강을 건너고 우리의 산을 넘어 이 나라를 침범할 이를 압니다.”

왕은 다시금 말한다.

“네 감히 나의 말을 거역하느냐. 너를 보내면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미 내가 받았다.”

첫째 왕녀는 읍소한다.

“아버지, 왕이시여, 그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그 승냥이의 말을 진정 믿으십니까. 강자와 약자 간의 약속이 얼마나 허무하고 연약한지 모르십니까. 차라리 제게 검을 쥐여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이 나라의 국경을 지키게 하십시오.”

왕은 분노한다.

“네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구나. 어찌 이 왕국을, 400년을 이어온 나의 나라를 약하다 말하느냐. 너의 사욕으로 이 나라를 모욕하는구나. 너는 그에게 가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너는 탑 꼭대기 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리라.”

첫째 왕녀는 울며,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그곳에 저를 보내지는 말아주소서, 차라리 이 나라에서 죽게 하소서……. 그러나 왕은 완강했다. 너는 이 나라의 왕족으로 났으니 그 의무를 다하라. 왕은 말했고, 첫째 왕녀는 질질 끌려가 높은 탑에 감금당했다. 첫째 왕녀의 울음과 울부짖음이 밤새 탑을 울렸으나, 그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핏줄을 타고 이어진 광증으로 제 어미마저 베어버린 왕에게 감히 반박할 이는 없는 까닭이었다. 혹은, 이미 죽어 없어진 까닭이었다. 언니를 살려달라며 왕성의 뜰에 무릎 꿇은 동생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신부의 의사란 단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결혼의 준비는 수많은 이들을 굶기고 착취하며 차근차근 이어졌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을 날은 매일같이 다가왔다. 어느새 탑은 고요해졌다. 뜰에 무릎 꿇은 동생의 손은 동상으로 곱아들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결혼 전날 밤, 첫째 왕녀는 해냈다. 몰락해가는 왕국의 제일 기사이자, 걸음마를 뗀 이후 검을 놓은 적이 없다는 그는, 무너져가는 왕국을 붙들고 흩어진 기사와 병사를 어떻게든 그러모으던 그는 결국 탑의 창문을 뜯어내었고, 그 좁은 틈으로 제 몸을 우겨넣어, 마침내, 성공했다.

눈이 쌓일 정도로 내린 어느 날, 새하얀 눈발이 날리고 온 세상이 희게 뒤덮인 어느 날, 그는 탑 아래로 몸을 던졌다. 붉게 물든 눈 위로 붉은 머리칼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제 언니를 꺼내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읍소하던 둘째 왕녀였다.

그 날, 둘째 왕녀는 제 아비의 목을 찔렀다.

아비는, 왕은, 제 머리에서 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제 목을 붙잡고 컥컥거렸다. 벌벌 떨리는 손이 왕녀를 향했다가, 제 목을 관통한 단검을 붙들었다. 왕가에 길이길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초대 왕비의 보검이었다. 새파란 보석이 박힌 그 검은 왕의 피를 양껏 빨아 번들거렸다. 왕은 컥컥거리는 소리만을 내다가, 옥좌에 추하게 널부러졌다. 핏줄이 선 두 눈은 죽은 후에도 광증으로 가득했다. 둘째 왕녀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홀 중앙에 놓인 화로의 불꽃을 키웠다. 이 땅에 붉은 깃발이 설 때부터 타올랐다는 불꽃이었다. 왕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 천명된 불이었다.

왕성을 모조리 뒤덮을 불길은, 왕조의 시작과 함께했다는 불꽃으로부터, 광증에 미쳐 제 자식을 팔고 제 자식에게 살해된 왕의 시체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빨간 깃발이 그보다 새빨간 불길에 삼켜졌다. 왕성 곳곳에 자랑스럽게도 걸려있던 깃발들은 차례차례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 날렸다. 황금으로 주조한 왕좌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지독한 화염이 온 왕성을 뒤덮었다. 그 불꽃은 이제는 왕녀가 아니게 된 동생의 의지에 따라 사흘밤낮을 타올랐다.

동생은, 언니를 살려달라 울부짖던 뜰에 서서 불타는 왕성을 바라보았다. 화염에 휩싸인 탓일까, 새빨개진 눈도, 그 위에 흩어져있던 붉은 머리칼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둘째 왕녀도 마찬가지로 자취를 감추었다. 왕성에는 오롯이 화염만이 남았다. 그 화염은, 그 불꽃은, 왕성에 깃발이 단 한 개도 남지 않게 된 순간까지, 왕국의 역사서가 모조리 잿더미로 변한 그 순간까지 타오르다가, 어느날의 함박눈 아래에 고요히 스러졌다.


별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그를 처음 눈에 담은 순간, 나는 알았다. 세상에는, 날 때부터 찬란한 이가 있다. 영원히 빛날 별로 태어난 이가 존재한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신 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가 나를 보고, 내가 그를 본 순간,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웃어보인 그 순간에, 나는 내가 그를 지독하고 지독하게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고 말았다.

나의 언니가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별무리가 떨어져 내렸다고 한다. 그 찬란하던 밤이 지나 첫새벽이 밝아올 때, 나의 언니는 세상에 났다. 위대한 왕이던 나의 어머니는, 밤을 새운 산고 끝에 그를 낳았고, 여전히 피 흘리면서도 그를 안아 왕국에 내보였다. 왕국의 모든 이들은 별과 함께 태어난 나의 언니를 칭송하고, 그를 땅에 발 딛은 별이라 불렀다. 그 호칭은 나의 언니가 자라면서 더더욱 견고해져갔다. 그는, 정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별과 같은 이였으니까.

그의 나이 고작 일곱에, 그는 왕국 제일의 기사에게 찾아갔다. 그는 나이 스물에 내로라하는 기사들을 죄 꺾고 왕국의 제일가는 기사가 된 이였다. 그러나, 그는 쉰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을거라 선언했던 이였다. 하지만, 인간이 별의 반짝임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기사는 위대했으나, 그럼에도 한낱 인간이었고, 그리하여 그 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나의 언니를 제자로 들였다. 그의 평생에 걸쳐 유일할 제자였다.

그가 열살이 되던 해,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왕궁 중앙의 화로에 발을 디뎠다. 왕이 될 이만이 오롯이 설 수 있다는 그 불꽃 속에서, 그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화염은 그를 불사를듯 커졌다가, 그의 몸을 휘감고, 그리고, 고요히 잦아들었다. 그 불꽃은 제 주인을 찾았다는듯 그를 섬겼다. 그 해, 그는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 누구도 이견을 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우연히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고 만 이였다. 그 어떤 자질도, 빛도 없었다. 그저 운 좋게, 혹은 불운하게도 왕실에 태어나고만 쭉정이. 그것이 나였다. 나를 잉태할 때, 나의 어머니는 취해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름조차 없는 그저 궁인이었다. 나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름 남기지 못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이.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나는 왕궁에서 태어나 자랄 수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무언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하는 쭉정이. 그리하여 누구도 알지 못한 무언가. 누구도 나에 대해 알지 못했고, 어떤 이들을 나를 시녀로 착각했다. 그것이 서럽지도 않았다. 제각기 재능을 인정받아, 혹은 고귀한 이들 아래에서 자라나 이곳에 들었을 시녀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그걸 너무도 잘 알았기에, 내게 손 내미는 이가 그리도 찬란해 보였으리라.

“저런, 길을 잃었니?”

그 다정하던 말씨와, 내게 뻗어진 크고, 굳은살이 곳곳에 박힌 손과, 다정히 날 바라보던 금빛 눈동자. 웃을 때 휘어지던 눈꼬리와, 올라가던 입꼬리, 깊게 파이던 볼우물, 내 뺨을 쓸어주던, 단단하고도 다정한 온기.

누가 별빛에 눈 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날부로, 나는 그의 동생이 되었다.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언니와 한 침상에서 함께 잠들 것을 허락받았고, 함께 배웠고, 한 사람의 ‘왕녀’가 되는 것 또한 허락받았다.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던 어머니는 언니와 함께일 때는 잠시나마 내게 시선을 두었다. 정진하거라, 하는 냉정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언니는 어머니께서 엄하셔 그렇다며, 다정히 나를 끌어안으며 위로해주곤 했다. 나는 그런 언니의 품에 안겨 생각했다. 이것은 혈육의 정인가, 혹은 그동안 갖지 못한 애정과 인정에 대한 욕망인가, 그도 아니면, 감히 가져서는 안되는 어떠한 애정인가. 나는 답을 내지 않고 그저 그 품에 파고들었다. 점차 고르게 변하는, 잠든 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채 고민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언니는 검을 다루었다. 마법은 도저히 못하겠다며 웃곤 했다. 그러나 검을 쥐면, 그 누구도 언니를 대적할 수 없었다.

나는 검을 내려놓았다. 대신 왕궁 도서관의 모든 마법서를 읽고 또 읽었다. 나는 황금을 녹이고 성을 무너뜨릴 불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언니는 늘상 웃었다. 양 볼에 깊은 보조개를 남기며, 이가 다 드러나도록 시원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도통 웃지를 않았다. 보조개 따위는 없는, 그렇게 시원하게 웃을 수도 없는 이의 미소는 가치가 없다. 그리 믿었다.

언니는 귀족들과 왕족들 사이에 끼어있는 것을 즐긴 적이 없었다. 위선과 가식은 늘 불편하다 말했다.

나는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한 이들 사이에서 차라리 편안했다. 그곳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거짓말을 하니까.

그는 늘상 몰래 거리에 나가 길거리의 음유시인들의 류트에 맞춰 발을 구르곤 했다.

나는 홀로 거리에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니는, 왕국을 지독하게 사랑했다.

나는, 왕국을, 단 한 순간도…….

언니가 열다섯이 되던 해, 그는 대륙의 모든 이들을 수용하는 아카데미로 떠났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 돌아올 때마다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가끔은 왕국에 돌아오는 것을 미루고 타국으로 여행을 가곤 했다. 나는 그들의 소문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찬란했다. 마치 별과 같은 이들이었다. 어떤 이는 차디찬 설산의 군주였고, 어떤 이는 새파란 바다의 주인이었으며, 어떤 이는 하늘을 찌르는 마탑의 우두머리였다. 어떤 이는 온 대륙의 산천을 제것마냥 누비고 다녔고, 어떤 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음률을 자아냈다. 어떤 이는 신의 사랑을 받아, 수없이 많은 이들을 치료하고 살려냈다.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아름답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은 빌어먹게도 아름답고, 빛났으며, 나의 언니는, 정말 빌어먹게도,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은 지독하게도 잘 어울렸다.

그들의 존재가 내게 외치는듯했다. 너는 자격이 없다고. 그의 옆자리에 설 자격 따위는 없다고. 비천하게 태어나 적선으로 구원받은, 그 주제에 저를 구한 제 자매를 사랑하는 이는, 결코 그의 옆에 설 수 없다고.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것은 나였다.

나는 귀족들의 불안함과 열등감을 자극했다. 완벽한 정통성과 자질을 가진 이. 왕국을 지독히 사랑하고, 거리의 아이들마저 칭송하는 이. 모든 이에게 관대하나, 귀족에게는, 힘있는 자에게는 엄격한 이. 그러나 도저히 깎아내릴 수 없는 이를 선망하고, 열망하면서도, 어떻게든 추락시키려 하는 이들을 이용했다.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닮았으니까. 그들과 나는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악수를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것을 잘 알았고, 그렇기에 서로를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하여 추악한 것들은 손을 맞잡아 아름다운 것을 끌어내렸다. 그 과정에서 신비로운 검증이나, 고귀한 이의 인정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은 제것을 가지는 이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 권력과 힘. 그렇게 나는 왕관을 손에 넣었다. 동시에, 나의 언니 또한 내 손 안에 쥐여졌다.

언니는 화내지 않았다. 그것이 너의 선택이니? 하는 질문만을 하나 남겼다.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를 저 탑 위로 모셔라, 그저 그리 말했다. 제것이었던 궁에서 쫓겨나 한갓진 탑 위에 갇히면서도, 그는 분노 한자락, 울음 한자락 보이지 않았다. 배신감조차도 비추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와 같은 미소, 괜찮다는 말 한 마디. 그저 예전과 같은, 적선과도 같은 태도.

그 모든 것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그러나 나에게는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결국 나는 그를 내 손아귀 안에 쥐었다. 그는 영영 저 안에 갇혀 살아갈 것이다. 그의 옆에는, 아니, 적어도 그의 곁에는 나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영영 이곳에 있을테니까. 이곳에, 내가 손에 쥔 이 왕국 안에. 그래, 나는 그리 스스로를 위로하며 내가 한 일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탑의 문을 열었을 때, 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왕국의 모든 곳에,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이들을 보냈다. 모든 거리를, 모든 숲을, 모든 바다를, 사막을, 집을, 전부 뒤졌다. 거리에서 죽은 이들이 도착하는 안치소마저 뒤졌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흔적 하나 없이, 그는 사라진 후였다.

나는 그제야 깨닫는 것이었다. 그는 잡힌 적이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은 그의 용인 하에 일어났으며, 나는, 별을 내 손 안에 넣었다 착각했으나, 태양을 향해 손을 뻗어 잡았다 장난치는 어린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나는 텅빈 왕좌 앞, 왕의 홀에 놓인 화로를 바라본다. 그 언젠가, 언니는 저 화로 위에 맨발로 올라서, 저 불길을 굴복시켜 제 종복으로 삼았더랬다. 시녀들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그 광경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내가 만일 저 위에 맨발로 올라선다면, 저것은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 먹어치울 것이다. 먼 옛날, 사흘을 쉬지 않고 타올라 이 땅을 정화했듯이, 나를 불태워 없앨 것이다. 그리되면, 아마 언니는 돌아오겠지. 왕이 사라져 혼란에 빠진 왕국을 가만두지 못할테니까. 언니는 이 왕국을 언제나 사랑했으니까.

그래, 언니는, 이 왕국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래서, 나는 차마 이 나라를 내버리지 못했다. 저 화로 위에 올라서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나의 집무실로 향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언니가 자랑스러워할만한 이가 되면. 이 나라를, 이 왕국을, 나를 사랑한 적 없었던, 단연코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 없는 이 왕국을 아름답게 가꾸면. 그래서, 이 왕국이 그가 보기에 만족할만한 곳이 되면, 참 어여쁘다 말할 수 있는 곳이 되면, 그러면, 언젠가는 돌아올까? 언젠가, 하늘에서 사라진 별이 이듬해 다시금 같은 자리에서 반짝이듯이, 그렇게 돌아와줄까? 돌아와서, 나를 끌어안아줄까? 예전처럼 칭찬해줄까? 참 고생했구나, 잘했구나, 하고, 그렇게 말해줄까? 내 손 안에 쥐여줄까?

참으로 멍청하고 미련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별을 쥐고자 하면, 그 손이 다 타버릴 것이 뻔한데.

그러나, 내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뿐이므로.

그리하여, 나는 묻는다.

별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아주 오래 전, 이 땅에는 하나의 전설이 존재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이들을 자매로 묶어 키우면, 언젠가 그들이 거대한 용이 되리라는 전설이.

“한 날 한 시에 난 너희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일 것이며…….”

붉은 머리칼을 단정히 땋아내린 한 아이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긴 연설문을 듣다 못해 기어이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슬쩍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누구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기도에 열중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니, 딱 한 명, 눈을 감고 있지 않던 이가 있었다.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저를 보고 있던 아이. 제 옆에 서있는, 자신과 한 날 한 시에 났다는 아이. 해질녘의 태양과도 같은 새빨간 머리칼을 지닌 아이. 그는 저를 가만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눈꼬리가 가늘게 휘며 금빛 눈동자를 가렸다. 깊이 파인 볼우물 위로 옅은 홍조가 돈다. 그것이 한낮의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금발의 아이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았다. 열심히 기도하는 다른 어른들처럼.

그 날, 해질녘의 태양빛을 가진 이와, 한낮의 태양빛을 가진 이는 자매가 되었다. 그들은 다른 마을의, 다른 가족의 딸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사이였다. 오랜 전설에 따라, 그들은 신전에 마련된 거울처럼 같은 구조를 가진 방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아니, 사실상 그 문은 의미가 없었다. 그 문은 닫혀있던 적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가까워져, 진짜 형제자매보다도 훨씬 가깝고 친밀해졌다.

어떤 이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고, 어떤 이는 붉은 머리칼을 가졌다. 어떤 이는 푸른 눈동자를 가졌고, 어떤 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졌다. 어떤 이는 교활한 불꽃을 다루었고, 어떤 이는 정직하게 검을 휘둘렀다. 어떤 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고, 어떤 이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세상이었다. 언제나 함께할, 서로가 없는 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 같은 배에서 나지는 않았으나, 같은 배에서 난 이들보다 가까운 사이.

그렇기에,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이별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한 날 한 시에 났으니, 늘 서로가 존재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죽을 것이다. 누구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알았다. 어떻게 제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있을까?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마을의 사내를 죄 쓰러뜨릴 수 있게 된 적발의 검사는, 타오르는 태양보다 찬란히 웃던 어떤 이는, 검은 머리의 사내를 만났다. 그는 제 아내가 될 이를 보러 온 이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을 피워낸 적발의 마법사는, 그 불꽃보다도 뜨겁게 타오를 수 있게 된 어떤 이는, 갈색 머리의 사내를 만났다. 그 또한 제 아내가 될 이를 보러 온 이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날, 두 마을에는 잔치가 열렸다. 끊어지지 않을 용의 축복을 기원하고, 자매와 형제의 결합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함께 자란 자매와 마찬가지로 함께 자란 형제. 두 쌍의 용을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하늘 높이 울렸다.

두 사내는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요란한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밤을 밝혀, 동이 틀 때까지도 마을은 온통 환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밤낮이 일곱 번 지나가고, 형제가 자매를 맞이하러 간 날, 그들이 본 것은 불꽃에 뒤덮인 신전이었다. 쇠를 녹이고, 돌을 살라먹는 화염이었다. 그 지독한 불은 꼬박 사흘을 지난 후에야 스스로 사그러들었다.

불꽃을 본 이들은 외쳤다. 마녀다! 사악한 마녀가 용을 집어삼켰다! 그리하여 형제는 제 아내들을 되찾기 위해 검을 들고 말 위에 올랐다. 열기로 벌개진 얼굴을 하고, 그들은 숲 곳곳을 뒤집어놓고, 호수의 밑바닥을 뒤졌으며, 모든 골짜기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어이 마녀와 용을 찾아냈다. 작은 오두막에 숨어, 머리를 맞대고 잠든 그들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맞잡은 손이 애틋했다. 신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그 오두막 안에는, 두 사람이 삶을 이어온 흔적이 가득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껏 그리 살아왔다 해도, 영영 그리 살거라 믿고 그리 살거라 열망한다 해도,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아내니까. 적어도, 형제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사람을 떼어내 끌어냈다.

먼저 쓰러진 것은 기사였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휘두른 기사는, 마법사를 감싸다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뒤늦게 깨어난 마법사는 제 상처를 감싸고 헐떡이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를 보아야했다. 기사를 베어낸 검은 머리의 사내는 마법사마저 잡으려 천천히 걸어왔다. 익숙하지만 낯선 말이 귓전에 흩어졌다. 마법사는, 숨을 헐떡이며 핏물로 얼룩진 대지에 손을 짚었다. 핏물이 손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마법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지독한 불길을 다시금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 모조리 불길이 되었다. 새빨간 불길은 혀를 날름거리며 마법사의 몸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그 불길에 핏물을 더하고, 그 불길에 바람을 더하며, 마법사는 피를 토하며 외쳤다.

“너희는 기어코 멸망하리라. 너희의 땅은 메말라 갈라질 것이다. 너희의 핏줄에는 광기가 흐를 것이다. 너희는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너희의 씨가 마르고 대가 끊겨, 불길 속에 추락하여 멸망하리라. 그 모든 순간에 내가 함께 하리라. 그 모든 멸망에 내가 손을 보탤 것이고, 그 모든 불길에 바람을 일으켜, 너희는 끝내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잿더미가 될 것이다.

이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나의 저주는 이 나라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하여 멸망해 스러질 날에, 나의 영혼 또한 스러지리라.

저주한다, 너희를 통렬히 저주한다! 나의 영혼을 다 걸어, 나는 너희를 저주한다!“

불길에 휩싸인 이가 외치는 저주의 말은 그 자리의 모든 이의 귓가에 선명히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제 주인마저 집어삼킨 불길이 온 숲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신전을 불태운 불꽃과 같아, 사흘 내내 타오른 후에야 스스로 사그라졌다. 불이 다 꺼진 후에야, 뒤늦은 첫눈이 새까맣게 타 재가 된 땅을 덮었다.

눈이 다 녹고, 땅에 덮인 재가 땅에 스며들즈음, 말을 탄 기사가 그 땅 위에 섰다. 그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불꽃을 화로에 심어 그 땅 깊숙히 새겼다.

그리하여,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느 역사서에도 남지 못할 이야기이다. 동시에,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만은 않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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