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 단편집 <진부한 연애 소설> 1. 행복한 종말

행복한 종말

 

파블리첸코 중령이 사망했다.

파블리첸코 중령은 늘 그랬다. 두 눈은 열정으로 빛났고, 거친 손끝은 강인했으며, 제국군들에게는 커다란 공포였다. 태생적 기질부터가 출중한 군인이었던 그녀는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크나큰 기대와 무거운 사명에 썩 어긋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롯이 냉혈한만은 아니었다. 건조함과 냉정함만으로 자신을 옥죄는 수고야 기꺼이 감내했지만, 경례를 붙여오는 이에게 가족의 안부를 묻는 음성에는 진실한 온기가 있었다. 지휘상황실에 들어앉아 입만 놀리는 것이 아닌,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피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뿐인가. 공포와 향수병에 허덕이는 병사의 어깨를 두들기는 법 또한 알았다. 땀과 먼지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경쾌한 농담을 던질 때도 있었다.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차라리 그뿐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언젠가 싸구려 연초의 자욱한 연기 속, 두 병사가 소리 죽여 나누던 말이 이랬다. 

- 야.

- 왜.

- 저번에, 저쪽에 기습으로 털러 나갔을 때.

- 어.

- 상황종료 되고서, 중령님.

- 응? 중령님이 뭐.

- …….

- 중령님이 뭐?

- 울더라.

- 뭐?

- 다들 철수하는데 혼자 멍하니 서 있길래 뭔데? 하고 쓱 보니까, 죽어서 널브러진 괴물 새끼들을 빤히 보더니만… 갑자기 울더라니까.

- …….

- …잘못 봤겠지? 

- …그런 거겠지.

전쟁 속에서는 감정과 인간미의 거세가 최선이자 최고임에도, 자신은 뜨겁고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잊지 않고자 했던 노력을 향해 간혹 실없는 소리가 던져지기도 했다. 

- 거참, 중령님은 마음이 너무 약해. 왜, 아주 날 잡아잡슈, 뛰어들지 그래요?

당연히 진심은 아니지만 제법 소름 끼치는 농담에도, 

- 그래, 내가 평화의 제물로 바쳐진다면, 그래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럴 수 있다.

무서운 대꾸를 덤덤히 하던 중령이었다.

그따위 말본새 때문이었을까. 파블리첸코 중령은 실종되었다. 제국군의 주요 거점과 근접한, 오래전 버림받은 빈민촌의 경계를 따라 야간순찰을 하던 중이었다.

사라진 중령의 흔적을 뒤쫓던 수색대는 어느 폐허 속에서 비틀비틀 기어 나오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했던 소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흐느꼈다. 깡마른 어깨뼈가 불거져있었다. 

- 아버지가 날 팔아넘기려 했어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어딘지도 몰랐어요. 너무 많이 벗어나 버린 거예요… 근데 갑자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뒤에서, 아… 정말, 정말 발이 안 떨어져서, 너무 무서워서, …근데 그 사람,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무조건 달리랬어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달리기만 하랬어요, 그래서, 달렸는데,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더니… 그 끔찍한 점액투성이 괴물들이……!

피맺힌 외침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다시 흐느끼기 시작한 소녀를 둘러싼 이들은 참담한 시선만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예언서의 한 문장 같았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불구덩이 같은 전쟁 속에 내던져진 누구보다도 앞장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던 파블리첸코 중령이었으니까.

중령이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간 수색대는 그녀와 관련된 몇 가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색의 결과물들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마른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작전명이 새겨진 인식표가 확인되자 중령의 사망은 공식화되었다. 그간의 공로들을 인정하여 전시 중 장례의 거행이 유례없이 의논되었다. 모든 절차가 승인된 후 중앙 거점의 한 데로 자그마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닮은 잿빛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급하게 마련된 것도 그렇거니와 전시 중이어서 매우 간소했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오가는 발걸음들의 성격은 텁텁한 전쟁의 공기와는 반비례하였다. 참 우습게도, 중령의 살아생전 사진이 놓인 날은 그녀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11월의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평소와는 다른 맥락의 거수경례들이 오갔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신음을 내뱉었다. 괴로움, 오열, 흐느낌, 회상 같은 것이 끝도 없이 떠다녔다. 소리의 유무와 높낮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통함이 감도는 공간 속, 다량의 생화를 구하지 못해 흰 종이를 접어낸 조화에 둘러싸인 파블리첸코 중령은 묵묵했다.

그 침묵에 더하여, 묵묵함을 눈에 띄게 지키는 사람이 또 있었다. 로라반 파블리첸코. 고인의 머리칼과 옆모습을 닮은 그녀의 태도는 뛰어난 군인이자 신실한 동료를 떠나보내는 이들을 감명시켰다.

그렇게, 허술한 장례식장 속 많은 이들의 시선 속, 유일한 혈육인 제 언니를 잃은 로라반은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스물셋의 로라반은 제법 먼 곳으로 파견 중인 부대 소속이었다. 임시 빈소가 세워지고 추모의 조화가 꽤 쌓이고 나서야 제 언니의 사망을 뒤늦게야 알게 된 로라반은, 귀환 중 단 한 번 눈가 훔치는 시늉이 없었다. 한숨 한 번을 쉬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각인형처럼 빈 눈만을 하거나 까칠해진 입술을 떨어대느라고 그랬는가. 아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건네지는 위로에 거수경례로 답하며, 벼락같은 부재에 후려 처맞은 태도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고인의 빈소를 찾은 이들은 일제히 그랬다. 흐트러지지 않는 로라반에게 동정과 연민의 눈빛, 더하여 응원의 악수와 포옹을 건네었다.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선 제 3자들은 묵묵한 것이 조화와 떠나간 고인뿐만은 아니라 다행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보였고, 그리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로라반은 사실 그러지 못했다. 살아생전처럼 엇비슷한 높이가 아닌, 고개를 푹 숙여야 들여다볼 수 있는 올가의 얼굴. 사진 속 올가 파블리첸코의 입술은 꾹 다물려있으되, 당장이라도 웃음을 토해낼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령이라는 지위에 적합하게 진지한 이마와 눈매와는 달리 경쾌함이 묻어나는 삐죽한 입매. 언니가 이렇게 웃기도 하는 사람이었나? 로라반은 가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하여 활기찬 웃음소리가 환청이었다. 입체감이라곤 전무한 평면의 기록 속에서뿐이었대도, 청자는 고인의 혈육임을 알려주는 흰 꽃을 달은 로라반 뿐이었대도. 그래서 눈물과 비통함이 흐르는 이 공간 속 유일하게 묵묵한 것은 흰색의 조화뿐이다, 로라반은 그리 여겼다. 

 

 

◇◇◇

 

 

사실 제삼자들이 느낀 것과는 달리 로라반은 단 한 순간도 의연하지 못했다. 아무리 한 치 앞으로 기약할 수 없는 현실이 예고된 삶이라지만, 그 누가 지인의 벼락같은 부재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심지어 유일한 혈육이었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언니였다. 장례 내내 로라반이 이를 악물었던 연유는, 습득해온 군인의 자세에 따라 구겨진 이목구비를 내보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전에 떠난 부모의 역할을 진심으로 이행하길 즐겨 했던 제 언니에게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올가 파블리첸코의 흔적들을 태운 재가 담긴 궤를 받아들며 로라반은 의연함을 다짐했었다.  

그러나 임시 배정된 숙소에 들자마자 로라반은 무너지고 말았다. 침대 위로 엎어져 세상이 무너진 듯 흐느꼈다. 주먹으로 베개를 내려치며 서럽게 울었다. 언니의 부재에서 발한 외로움도 그랬고, 죽음이 흔한 현실에 익숙해진 타인들의 탄식은 금세 사그라질 걸 알아서였지만… 가장 큰 것은 서러움이었다. 저만한 키클롭스를 잘도 옆에 끼곤 전장을 누비던 올가 파블리첸코를 대신한 것들이 화火하여 분粉한 재가 담긴 궤는 작다. 썩 크지 않은 천으로도 매듭을 크게 지을 수 있을 만큼 작다.

- 나도 언니처럼 군인이 될래. 자원입대 할 거야.

매우 진지한 뒤통수를 퍽 갈기며, 

- 내가 그럴라고 여기 너 데려온 줄 알아? 그러기만 해봐, 아주 발가벗겨서 내쫓아버릴 테니까.

걱정의 진심을 못된 농담에 담아 던진 후, 입을 삐쭉이는 로라반의 머리를 퍽퍽 쓰다듬어주곤 하던 올가는 이제 없다. 남은 흔적들만이 저보다도 마른 로라반의 품으로 푹 안겨서도 한참이 남는다. 궤를 감싼 천의 매듭은 여전히 단단하다.

모로 누워 오래된 대화를 떠올리는 눈가가 짓물렀다.

- 언니. 언니.

- 왜.

- 우리가,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있을까?

- 갑자기.

-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 …당연히 이기지. 우리가.

- 그으래? 정말?

- 어. 난 오래 살아야 해. 진짜 오래 살 거다.

- 왜?

- 왜긴 왜냐. 그래야 이 거지 같은 전쟁 끝나는 꼴을 기대라도 해보지 않겠어.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군인도 때려치우고 맘 놓고 연애도 하고,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고….

- …근데, 언니.

- 왜.

- 어…….

- 뭐. 할 말 있음 빨리 해. 이제 나가봐야 돼.

- 음…….

- 뭐. 뭔 말이 하고 싶은데. 할 거면 십 초 안에 해라. 안 그럼 꿀밤이다. 나도 군인 할래, 자원입대 할래, 그딴 헛소리면 십 초 안에 해도 꿀밤이다.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그런 생각을 했거던. 지금은 전쟁 중이고, 허구한 날 다 죽어나가고, 우리도 언제 당장 죽을지 모르고… 뭐 그런 건 어쩔 수 없지만 음. 막막 싫다고 그러는 대신, 그냥 그러려니 모두 껴안고 가면… 되레 그게 낫지 않나. 뭐 그런. 아니. 더 좋을 수도?

- ? 지금 그게 말이야 밥이야. 뭔 소리가 하고 싶은데.

- 그니까 내 말은, 그냥 차라리 즐기라고. 언니 표현대로 거지 같은것 까지 다 즐기라고.…….

- 언니가 말은 안 해서 그르지, 힘든 거, 지친 거 다 알아. 죽고 죽이고 하는 거 괴로워하는 것도 하지만, 언니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은근 많잖아. 그니까 음… 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가 결국 이길 거야. 언니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겠지. 세운 공이 많으니까. 그날을 위해 지금 힘들어도 꾹 참고 견뎌서,

- 아 그만. 됐고. 뭐 잘못 먹었냐. 쪼끄만 게 뭘 알고.

- 힝.

- 별 소릴 다 지껄이네. 하지 마, 그딴 소리.

- ……뭐. 그냥 난 그렇다고. 얼른 가 늦겠다. 밥은?

- 밥 먹을 시간이 어딨어.

- 어? 아직 야간일과까지 여유 좀 있지 않아?

- 아까 회의 잡혔다. 좀이라도 늦었다간 총에 맞아 뒤지기 전에 피가 말려 죽을 거다. 나참, 딴 거는 무뚝뚝한 놈이 사람 피곤하게 갈구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히지.

- 누구?

- 나한테 절대 안 쪼는 배짱 두둑한 놈이 그 자식 말고 더 있나.

- 누구?

- 루스, 그놈 말고 또 있냐고.

 

루스, 그놈 말고 또 있냐고. 

그 뚱한 말꼬리에 로라반은 벼락같이 회상을 중단한다. 

사실 장례식장을 지키던 로라반이 루스 중위를 잊고 있던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딱히 비난받을 성격의 것도 아니었고. 장례식장이 해체되는 순간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그를 원망한대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번뜩 떠오른 무언가에 로라반은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회상 속, 내내 멍하던 귓전으로 루스 중위가 어쩌고 하던 잡음들이 여러 번 스쳤던 것도 같다. 어째서 이제야 생각났을까.

한참 후에야 방으로 돌아온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재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따뜻하고 상냥한 속내를 의무에 대한 압박감으로 찍어 눌러야 했던 제 언니가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사람. 파블리첸코 중령의 충직한 부관이자 신실한 친구였던 루스 중위의 무탈함을 알게 된 로라반은 오랫동안 울었다. 딱히 이렇다 짚어내어 정의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에 휩싸인 채.

 

 

 

◇◇◇

 

 

목발을 깊게 짚어 붕 뜬 왼쪽 다리. 루스 중위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방문을 여는 순간 조금 당황한 로라반은, 하지만 늦지 않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제 언니를 소중히 담은 궤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음.”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따로 연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만.”

나름 예의를 차리고 있다 해도 말이 썩 예쁘게 나오질 않았다. 이유 모를 반발심에서 발한 삐딱함을 얹어 루스 중위와 마주한 로라반은, 

“나는, 올가의 종말에 협조했지.”

당최 무슨 뜻인지 모를 한 마디에 결국 미간을 구겼지만, 푹 꺼진 뺨의 상처와 붕대가 두터운 오른손이 연결되자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다.

삐그덕. 침대로 천천히 걸터앉는 루스 중위를 좇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묘한 침묵 속, 뻣뻣한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로라반은 벽걸이 달력을 눈짓했다. 고독과 상실감의 열흘. 그립고 또 그리운 언니는 열흘이나 더 멀어져 버렸다. 통보받은 복귀날짜를 되새기며 그러쥐는 주먹이 시렸다.

나는, 올가의 종말에 협조했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후 루스 중위는 말하는 방법을 잊은 듯하다. 가끔이나 버석한 입술을 혀끝으로 축일 뿐. 걸터앉은 침대가 썩 높지를 않아 한쪽 무릎이 비죽 솟은 루스 중위는 다부진 체격이 무색하도록 풀이 죽어 보였다. 안으로 굽어진 어깨. 축 가라앉은 시선. 창백한 손가락. 침대의 가장자리로 걸쳐둔 목발이 아슬아슬.

올가 파블리첸코. 눈물과 비탄을 유발한 장본인. 예고된 죽음 속으로 지독하게 뛰어든 사람. 그랬던 당사자는 참으로 얄밉게 사진 속에서 실실 쪼개고 있던지라, 새하얀 조화를 거들어가며 묵묵함을 꾸며냈던 자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라며 쓸쓸했던 로라반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불현듯 지나갔다.

창밖을 뚫어지게 응 시하는 루스 중위의 옆모습. 회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한 작은 액자 속엔 오래전의 올가와 로라반이 있었다.

자신에게 꽂혀오는 두 눈이 습해 보여 조금 멍해진, 그러나 몸에 밴대로 경직을 고수하는 로라반에게 루스 중위는 제 옆을 툭툭 두들겼다. 미적거리던 로라반이 겨우 걸터앉자 지어지는 웃음이 제법 부드럽다.

“편하게 해. 지금 나는 파블리첸코 중령님의 부관이 아닌 올가의 친구로서 온 거니까.”

눈빛과 어조에서 거짓은 없어 보였다. 제 언니와 그의 우정이 신실했음을 새삼스레 상기한 로라반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살짝 숙여지는 이마. 무릎 위로 말아 올린 주먹이 꼼지락꼼지락.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었어서… 진작 연락을 드리고 뵈었어야 했는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많이 심각하진 않아. 다리를 다쳤고, 자빠질 때 바닥을 헛짚어서 손목을 조금 삐었지.”

“…….”

“금방 퇴원했지. 뭐, 큰 부상을 입었대도 불구가 되는 지경이 아니고서야.”

“…네.”

“만약 그랬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기어 나왔겠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

“…네? 무슨…”

“내 손으로 해야 할 일이.”

높낮이가 없는 문장을 속으로 되뇌며, 로라반은 간밤 자신을 호출했던 누군가의 조심성 없는 혼잣말을 떠올렸다. 루스 중위 참 대단한 충성심이야? 중령이 부관 하나는 잘 뒀어.

“중위님.”

“음.”

“그… 파블리첸코 중령님의,”

“편하게 호칭해도 돼.”

“……그… 언니의 장례 전반을 자진해서 도맡으셨단 걸 어제서야 전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모두 제가 해야 했던 일이었는데. 사정상 본의 아니게 누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당연한 거였지. 다른 누가 아닌, 내가 해야 했던 일이었어.”

“…어… 상관의… 그러니까, 그…, ……그런 일 또한 부관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에 포함되는 겁니까?”

“꼭 그렇진 않아. 다만 내가 자진했던 건 지금 로라반, 널 찾아온 것과 같은…, 그러니까 부관이 아닌 친구여서. 그리고 나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로라반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얼…?”

“중령님, 아니. 올가 그 망할 자식의 못된 말버릇.”

“네?”

“내가 말했지. 올가의 종말에 협조했다고.”

그 한 문장을 제대로 곱씹기도 전에 로라반의 이마가 번쩍 들린다. 

“행복한 종말.”

기묘한 표정이 되어버린 로라반을 응시하는 루스 중위의 웃음이 쓸쓸해진다. 

행복한 종말. 가슴 속에 쌓인 고뇌와 우울을 제법 그럴싸하게 숨겨왔던 올가의 케케묵은 말버릇이었다.

행복한, 

종말.

기질이 아주 다른 두 단어의 기묘한 조합을 납득할 수 없었던 언젠가의 로라반에게, 올가는 뺨을 긁적여가며 띄엄띄엄 말했었다.

- 그게, 그런 거야. 그니까, 그게… 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있어. 누가 봐도 멋진 외모에 능력도 대단해, 그래서, 음. 부와 명예도 보장되어 있고… 그래서 막, 엄청나게 찬란해 보이잖아. 근데, 그게 정말로 그렇기만 한 거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어? 현재나, 미래나, 뭐… 그런 것들. 그 잡스러운 것들이 치대면, 결국엔 완벽하지 못하단 말야. 그러니까, 아, 그… 그 행복이 끝나버려야 아주 완벽한… 아, 머리꼭지에 피도 안 마른 애한테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참 나.

선천적인 우울함도 없었고 살아생전의 말버릇 따라 ‘거지같은’ 현실에도 온기를 잃지 않았던 올가였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기저는 어쩔 수 없이 어두웠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 오랜 고뇌였다. 그것에 더해져,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발동한 반동형성이었을까.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습해버린 반어법이었을까. ‘행복한 종말’. 그따위 거지같은 조합의 탄생은. 

기억을 더듬어가던 로라반의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번쩍 떠올랐다. 피와 살, 두 눈과 심장, 가진 것 최후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갖다 바칠 수 있다며, 배를 째어 속 꺼내는 시늉을 하며 웃던 올가 파블리첸코는 영혼 같은 동반자가 있었다. 약속된 부와 명예가 한순간에 사라진대도. 당장 머리에 총구가 들이 밀어진대도. 전쟁의 공포에 미친 자가 되어버린대도. 따스한 미소와 손길로 올가를 오롯이 껴안을 것이 자명했던 여자. 무너진 왕국 알드 룬의 왕녀 바네사 테레즈.

로라반은 그녀를 종종 따랐었다. 따스한 미소와 싱그러운 발랄함이 좋았다.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손이 좋았다. 종종 연주해주던 바이올린의 선율이 좋았다. 그녀의 손에 덜 여문 정수리를 맡기며 어찌나 맑게 웃던 로라반이었던가.

“일 년 전 이맘때였나… 중대한 게릴라 작전에 편성됐었지, 바네사 테레즈 왕녀. 당시 그 작전의 총지휘관은 올가였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로라반은, 가벼운 부상만 달고 귀환했던 제 언니의 굳어버린 얼굴을 더듬어본다. 곧 유연한 속도로 달라 붙어오는 기억의 파편들. 저를 불쑥 찾아왔던 언니에게선 익숙하지 않게도 술 냄새가 많이 났었다. 로라반은 그날 난생 처음 보고 들었다. 언제나 꼿꼿하며 용감했던 제 언니의 흐트러진 모습과 죽어가는 짐승을 닮은 웅얼거림.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손아귀 안으로 아프게 구겨져 있던 사진 한 장.

한참 말이 없던 루스 중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저 올가의 탓만은 아니었지. 당시 그 작전에 왕녀를 편성한 건 지휘관다운 결정이었다. 거기에, 예상과는 달리 먼저 치고 들어온 제국군의 병력을 자발적으로 유인했던 건 왕녀… 의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지였을 거고. 그 누구를, 또 그 무엇을 탓할 건 없지.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하필 그때 올가의 옆에 없었던 내가. 그래서 모든 것은 내 과실이라고 생각해. 부관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어야 했어. 그래서 나는 죽도록 괴로웠다. 올가만큼이나.”

기억 속, 피어나는 봄꽃 같았던 여자가 언젠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내막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로라반은 시선을 떨구었다. 발끝이나 세어보는 눈앞으로 피어오르는 것은 잔인한 현실과는 지나치리만큼 동떨어졌던 여자의 미소. 회상은 여태까지도 색이 덜 바래어 눈이 부시도록 화사하다.  

쓸쓸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가는 루스 중위의 눈동자는 깊은 밤의 바다로 침몰하는 난파선을 닮았다.

“올가가 실종… 되었던 그 날 밤, 같이 순찰을 돌던 중 뜬금없이 그러더군. 밤공기나 쐬다 가자며. 제멋대로 바닥에 드러누워선 한참 하늘만 보더니, 그런 말을 했었다. 루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지. 그런데 지금 저 하늘에 반짝이는 게 다 마도 공학 드론 같은 걸 거 아냐. 아, 정말 삭막하다. 그렇게, 밤 산책이나 나온 것처럼 한가롭게.”

“…….”

“그리고… 그래. 그 일 이후로 나는 올가의 부관이었던 자로서 있는 힘을 다해왔다. 하지만, …차라리 그때 그만 부대이동 같은 걸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해. 아주, 굉장히, 후회스럽다.”

“…?”

“…이 다리, 완전히 아물려면 한참 걸리겠지. 총상을 입어본 적 있나?”

“아니요.”

“처음엔 약간 따끔하더니, 한참 동안 이상하리만치 아무 느낌도 없더군. 그러다 피를 보는 순간부터는 온몸 전체로 타들어 가는 고통이 있었다. 가벼운 순찰 중이어서 반자동 소총이었던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다리 하나가 날아가고도 남았을 테지.”

“…….”

“올가는, 네 언니는, 웃고 있었어. 그 역겨운 괴물들의 무리 안으로 뛰어들면서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그래, 맞아, 하하, 웃고 있었지… 그것들을 유인하며 빠

르게 멀어지는 걸 따라가지 못했다. 졸지에 총상 입은 내 다리나, 자빠지다가 삔 손목 때문이었다면, 그래도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이라도 쳤을 텐데… 참나, 그 아주 신이 나서 실실 쪼개던 꼴이.”

“……네?” 

루스 중위는 잠시 숨을 참았다. 날카롭게 꽂히던 한 방의 총성이 바로 귓전이었다. 끈적한 점액을 뿌려대는 괴물들을 향해 뛰어들기 전, 루스 중위는 자신에게 겨누어졌던 총구를 상기했다. 서늘함이 사무친 간절함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소리는 낮았지만 입 모양은 새기듯 선연했었다. 

- 오지 마. 명령이다. 제발.

상관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거부하며 뛰어나가려는 의지는, 그러나 반걸음도 채 내딛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살아있는 온기를 가진 인간보다는 죽음처럼 서늘한 총알이 훨씬 빨랐다. 생생한 회상 속, 의도한 총상의 사과 대신이었을 어그러진 웃음과 함께 돌아서던 뒷모습.

“군의관이 그러더군. 운이 좋았다고. 상처가 깊은데도 불구 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면서.”

“…….”

“확실히 솜씨가 훌륭해, 올가는. 그렇지?”

“…….”

“그런 식으로, 나는 종말에 협조했다.”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차마 소리에 실어낼 수 없던 질문을 알아들어 끄덕인 로라반은, 어쩐 일인지 원망 따위의 기색이 부재하다. 그저 속으로 읊조리고 말 뿐이다. 이 지독한 인간들. 하지만 본능에 가까운 관념으로 제 언니의 최후를 그려본 로라반은 남은 말을 삼갔다. 한참 말려 올라간 바짓단 아래의 깁스를 훑는 시선이 비현실적으로 덤덤하다. 루스 중위는 일그러진 얼굴을 깊게 감싸고 있었다.

해서, 로라반은 장례식에서 보이지 않았던 루스 중위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수정한다. 되레 치열했다고. 아래턱이 저려오다 못해 무감각해질 정도로 이를 악다물었던 자신만큼 치열했다고.

“내가 원망스럽겠지. 사실 올가를 구할… 수는 없었겠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방관자고, 내가 말한 것들은 모두 거짓 없는 사실이야. 군사법원에 날 고발해도 좋아. 네가 원한다면 나는 그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 물론 올가 그 망할 자식이 했던 멍청한 짓은 함구한다. 맹세해.”

진지한 음성에 로라반은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창가로 느릿느릿 붙어 팔꿈치를 괴었다. 이상하리만치 메마른 눈가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로라반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어쩌면, 이미 예감했었다고.

 

 

◇◇◇

 

 

로라반의 복귀가 얼마 남지 않은 밤, 루스 중위는 다시금 임시 숙소를 찾아왔지만 안으로 들어서진 않았다. 목발을 짚어 비스듬한 꼴로 열린 문에 기대어 있기만 했다. 

“…어째서 언니한테는 내내 안 계셨습니까?”

허리를 숙여 군화 끈을 꿰는 로라반이 아닌, 침대 한쪽으로 고요히 놓인 궤를 향해  중위는 작게 웃었다.

“그 여자가 먼저 갔으니까.”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르며 로라반은 내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걸리는 반짝임은 마도 공학 기술로 생산한 드론들이어서 현실의 참혹함만 배로 선명해졌지만, 그럼에도 스쳐 지나가는 빛들은 인공적이어도 찬란하기야 했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저 혼자 훌쩍 달아나버린 것이 미안해져 별이라도 되진 않았을까. 밤하늘을 잘게 세어보는 로라반의 손끝을 눈치챈 루스 중위는 되레 불편한 걸음의 속도를 높여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밤하늘을 훑던 로라반은 루스 중위가 멈추고 나서야 시린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

어째서 기억 속의 왕녀까지 이곳에 동반했느냐. 이런 물음을 던질 것도 없었다. 올가의 마지막 웃음이 얼추 내려앉았을 자리 위로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뉘어졌다. 손끝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바닥에 그어본 로라반의 눈가는 말라 있다. 

회상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 루스 중위는 종이로 만든 흰 조화 두 개를 사진 앞에 두었다. 거수경례를 붙인 그를 바라보던 로라반 역시 군인의 경례를 붙였다. 단정히 놓인 두 개의 조화는 잿빛 장례식장을 채웠던 것들보다도 화사하게 빛이 났다.

잠시 멍하니 있던 로라반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여태 못 알아챘지. 사진 속 고인의 의아한 점은 기묘하게 삐죽 솟은 입매뿐만이 아니었다. 피사체인 올가는 한쪽으로 상당히 치우쳐있었다. 

어째서 이런 사진을?

상식을 벗어난 구도에서 발한 궁금증은, 흐트러지는 중심을 악착같이 잡아가며 꼿꼿하게 서 있던 루스 중위가 풀어주었다.

“당연하지만, 영정사진도 내가 골랐지.”

이제는 힘에 부친 듯, 결국 목발을 내던지곤 주섬주섬 구겨지며 루스 중위가 말을 이었다.

“이 꼴로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찾느라 혼났다. 저거. 필름.”

“…….”

“너, 너네 언니란 사람이 얼마나 웃긴 자식인지 아냐. 어딜 간다 만다 말도 없이 사라져선, 돌아오자마자 잔소리를 하건 말건. 결재해달란 서류는 나 몰라라. 필름이랑 인화한 사진을 들이밀었었지. 나 완전  잘 나왔지, 작게 웃으면서.”

“…….”

“좀 된 이야기지. 내 기억이 맞다면 한… 반년 전쯤?”

“…….”

“어째서, 냐고 묻진 않는군.”

“…알고 있으니까….”

“음.”

“…….”

“…….”

“…하지만… 왜 저렇게?”

루스 중위는 대답 대신 읏차, 힘겹게 일어나 절뚝절뚝 거닐기 시작했다. 훌쩍 높은 키가 무색하리만큼 드리워진 그림자는 뭉툭하다. 밤 산책이라도 하는듯한 뒷모습을 눈으로 따르던 로라반은 무릎을 세워 모았다. 

비죽 솟은 무릎 위로 턱을 묻자, 한참 내려 깔리는 시선을 단박에 장악한 올가가 씨익 웃는다. 야속해진 로라반이 비스듬히 뺨을 틀자, 이번엔 왕녀의 연하고 상냥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어쩜 둘 다 그래? 뭐가 그렇게 좋다고 똑같이 웃고 있냐. 진짜 재수 없어. 완전 짜증 나. 비죽 내밀어지는 입술.

그러나 로라반은 결국 푹, 웃고 말았다. 제법 비어있어 멀건 배경색이 어색한 올가의 왼편은, 그럼에도 절대 허전하지 않다. 되레 꽉 들어찬 느낌.

그제야 로라반은 새삼스레 깨닫는다.

…어째서 언니한테는 내내 안 계셨습니까.

그 여자가 먼저 갔으니까.

우문현답이었음을.

 

 

◇◇◇

 

 

이른 새벽, 마지막 짐을 챙긴 로라반은 창틀로 기댔다. 창밖의 풍경이 아찔해질 정도로 시렸다. 피비린내가 섞인 잿빛 하늘과는 반대로 로라반의 군복은 말끔해졌다. 야속하게 달아나버린 친우의 역할을 이어받아 로라반을 챙기는 루스 중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끝도 없이 길어질 것만 같던 침묵은 로라반이 깨뜨렸다. 허전해진 창틀로 놓인 묵묵한 궤를 덮은 손등 위로는 깊은 핏줄이 툭 불거졌다. 

“중위님.”

“음.”

“그러셨죠. 종말에 협조하셨다고.”

“그랬지.”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닌 줄 알았지만… 사실은 모른 척했었나 봅니다.”

“…….”

“그러니, 끝까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그래.”

“그리고는, 아주 모르는 것처럼 살고 싶습니다.”

“…….”

“언니가 정말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근데 자꾸만 우리는 알고 있다고, 그랬었다고, 그러면서 자꾸 파헤치고 끄집어내고 그런다면… 언니가 편히 쉬지 못할 거 같습니다.”

“음.”

“많이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 순간에서조차도 웃을 수 있었을까요. 언니는.”

“…….”

“…….”

“…….”

“…이것들, 유품 화장한 것들은 뿌리려고 합니다.”

“네가 보관하지 그래.”

“뿌리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네. 그게 맞는 거 같습니다.”

“어디에.”

“전에 언니와 그분이 처음 만났던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행복한 곳이군.”

“네..”

“정말로 행복한 곳이군.”

“네. 그렇습니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루스 중위가 정중하게 다가오자, 로라반은 작게 숨을 고른 후 품속으로 손을 들였다. 

올가의 남겨진 몇몇 것 중 찾아낸, 미소가 맑았던 여자의 여러 흔적까지 모아 불살라낸 한 줌의 재. 비둘기색의 가루를 감싸 오므라진 그것은 보기와는 다르게 가볍지 않다. 작고 묵묵한 궤 역시. 조금은 홀가분해진 속으로 로라반은 궤를 감싼 천의 매듭을 끌렀다.  

그럭저럭 고인들의 대체가 된 재가 조금씩,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상당한 세월의 증거들이 죄다 분했대도, 최후의 순간까지 끌어안았던 마음이 무거웠대도. 

조심스럽게 굴어도 재는 흩날릴 수밖에 없다. 로라반과 루스 중위의 군복으로 뿌연 흔적이 늘어간다. 하지만 아무도 치워내지 않는다. 털어내는 시늉도 말고, 손끝으로 집어 모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묻으면 묻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둘 뿐이다.

이윽고 검은 천의 매듭을 단단하게 지어낸 로라반은 이마를 푹 수그렸다. 들썩이기 시작한 어깨를 다독여주는 루스 중위의 뺨으로도 눈물이 죽 흘렀다.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때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려고도 않았다. 한숨을 삼키려고도 않았다. 

궤가 조용히 웃었다. 깊은 매듭의 사이사이로 여명이 스며들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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