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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바네 단편집 <진부한 연애 소설> 2. 침묵마저도 공유하는

침묵마저도 공유하는

 

바네사, 그런 말 있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대. 

언젠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오라비가 해주었던 말이다. 그날처럼 바네사는 고개를 한껏 젖혀보았다. 깊은 밤하늘은 바라보는 눈조차 시리도록 차갑다. 어둠 속을 유영하는 건 엘펜하임에서 공수해 온 정찰 드론의 인공조명이어서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 없잖아요, 이 바보 오라버니.

그토록 믿고 따르며 의지했던 혈육은 타의로 세상을 뜬 지 오래. 태생부터가 천애고아였던 것처럼 덩그러니 남겨져 버린 바네사는 그나마 망자를 태운 한 줌 재를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깃털과 같은 색, 그래서 어쩐지 우습기도 한 재가 든 궤는 작다. 우뚝한 키에 벌어진 어깨와 높은 목이었던 옛 생과는 달리, 몸을 한껏 웅크린 바네사의 품에서도 숨겨질 만큼 작다.

눈물과 절규만이 슬픔을 표현하는 유일함이 아니다… 라는 걸 바네사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래서 저를 둘러싼 위로 앞에서는 울기는커녕 눈물의 끄트머리조차 조심 또 조심했던 것인데.

그런데.

제 팔뚝을 조심스레 짚어오는 온기를 느끼는 순간, 속에서 분주히 썩다 못해 곪아버린 고름이 팍! 터져버린 것이었다. 뭣이건 시작이 어렵지, 아슬아슬하던 방어기제가 깨져버리는 순간 인내심 따위는 와르르 무너지기 마련이다. 입술을 덜덜 떨며 바네사는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본다. 이렇게 울어본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의지와는 달리 끝도 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목으로 연신 훔쳐내던 바네사는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뗐다.  

“미안해요. 이런, 이런 모습 정말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 미안해요…”

기어이 말꼬리가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 바네사를 고요히 응시하며 말을 고르던 올가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차분하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울고 싶을 땐, 그냥 우는 겁니다.”

“……답지 않은 말씀을 하시네요.” 

“저야 감정은 숨기는 게 미덕이지만… 군인도 사람입니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사리 분별이 흐려지기도 하고, 몸이 지치면 마음도 무기력해지지요.”

“…….”

“그러니까… 지금처럼 못 견딜 정도로 사무치면, 그리하는 게 맞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저 역시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

“원하지 않으실 테니, 다른 곳에는 일절 말을 삼가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럴까요.” 

“밤이 깊어서 혹시 모르니,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어… 음…, 물론 저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바네사는 대답 대신 큰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더는 참지 않아 코끝이 빨개지고 두 눈이 붓도록 엉엉 울어댔다. 끝까지 꾹 참아보려고 했는데. 남 앞에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여태까지 잘도 견뎌왔던 것을, 그걸 못 참고는 이리도 꼴사납게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절대 이상하진 않다.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현실 속, 다정하고 따스했던 제 오라비의 부재가 떠오를 때마다 의연함의 가면을 쓰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니.

아아… 그저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면. 아주 미쳐서 저 강 속으로 뛰어들어버릴걸. 그래, 그렇게 한을 품고 죽어버리면… 악독한 악령이 되어 저 잔악무도한 치들을 지옥 밑바닥의 제일 깊은 곳에다 처넣을 수만 있다면! 

목구멍까지 넘실넘실 차오른 저주의 말들을 꺽꺽 삼키며 바네사는 잠시 아픈 생각을 해봤다. 그럼에도, 이내 고개를 털어낸 바네사는 다시금 삶과 투쟁의 의지를 다져본다.

나는 ‘남겨져 버린’ 사람이야. 지금까지도 그 고통은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지. 그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버린 내가, 그럼에도 그런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을 ‘남겨져 버린’ 자들의 슬픔과 허망함으로 채워지게 만들면 안 돼. 대범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자. 돌아보지 말자. 자꾸만 뒤를 돌아보지 말자.

솟아나는 의지를 재차 다져본 바네사는, 그제서야 올가의 어색한 손을 알아채곤 조금 웃었다. 길고 큰 울음의 여운이 남은 등을 도닥여주는 올가의 흰 손은 리듬도 엉망에 보기에도 별로지만, 따스하고 보드랍다. 마치 첫 빨래를 한 뒤, 마당에 널어놓아 보송보송하게 마른 햇솜 이불처럼. 마치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의 표정으로 제 옆에 지켜 앉은 올가의 어깨는 한참이나 말라 있었다. 그 마른 어깨 위로 바네사는 지친 머리를 가만 얹어본다.

“생각보다 더 마르셨구나. 식사를 잘하셔야 할 텐데.” 

“…….”

“고마워요. 정말. 너무나도.”

“…….”

“힘내볼게요. 정말 고마워요.”

“…….”

“오늘 덕분에 쌓였던 것들이 많이 풀렸어요. 생각 정리도 할 수 있었고… 모두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조금이나마 가 아니라,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담? 뭐, 뭔가 원하는 게 있으실까요?”

 “…….”

 “아아, 선물 고르기는 언제나 어려워요. 뭐라도 하나 말해주시면 참 좋을 텐데.”

 “…….”

 “말이 없으셔, 오늘따라.”

 “……저, 혹시… 바다를 좋아하시는지.”

 “바다? 바다는 갑자기?” 

“…바다, 를… 좋아합니다. 온종일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더군요. 특히 석양이 넘어가는 수평선의 색은… 함께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말입니다.” 

“어머, 물론이죠! 저는 바다를 잘 몰라서, 아 정말 재밌겠어요! 그럼 약속한 거죠? 진짜죠? 나중에 무르기 없기에요?”

 “…감사합니다.”

이 밤, 올가는 평소처럼 덤덤하면서도 목소리는 어딘지 조금 쉰 듯한 느낌이다. 날숨과 들숨을 따른 어깨의 오르내림에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 바네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가 더 고마워요.” 

“…….”

“우리, 진짜, 정말… 꼭 바다에 가요….”

몸을 좀 더 깊이 묻어보는 바네사와, 팔을 들어 묵묵히 어깨를 감싸주는 올가. 채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말라붙은 뺨으로 치렁한 머리칼이 닿았다.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아, 이제는 침묵마저도 공유하는 깊고 검은 밤. 언젠가의 바다를 꿈꾸는 두 사람의 입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설핏 솟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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