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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바네 단편집 <진부한 연애 소설> 3. 안녕히 주무세요: 올가 파블리첸코를 위한 소小왈츠

안녕히 주무세요 :

올가 파블리첸코를 위한 소小왈츠

 

 

 

 

 

“임무 종료.” 

어차피 제 말을 들을 자는 없었다. 해서 일부러 크게 중얼거린 올가는, 그러나 온종일 뭉개고 있던 자리를 터는 대신 옥상의 허름한 난간 벽으로 아무렇게나 등을 묻었다. 뭐, 말이 좋아 난간 벽이다. 크고 작은 포탄의 흔적들과 한데로는 와르르 무너져 내린 잔해들. 대충 보아도 제 역할을 못 하는 엉망진창 모양새. 전시의 참상이 담긴 꼴을 둘러보는 올가는 오늘따라 유난히 소름이 돋았다. 초겨울의 밤공기가 썰렁하다. 덩달아 팍 식어버린 야상 안주머니를 더듬는다. 조금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는 손이 비현실적으로 희다.

“끊어야 되는데.” 

항상 그렇듯 말뿐이다. 새 담뱃갑을 쥐곤 손바닥으로 탁탁, 소리 나게 치대는 동작은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성냥이…” 

지금은 딱히 서두를 것도 없어 주머니를 느긋하게 더듬는 올가였다. 곧 찾아낸 성냥을 척 긋곤 불을 붙인다. 어둠 속 담뱃불이 벌겋게 돋는다.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성냥 대가리가 난간 벽으로 시꺼먼 호를 그리었다. 하느작하느작 오르는 연기는 짙은 잿빛.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날개를 닮은 색이어서 올가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 만다. 후우, 내뿜은 숨을 눈으로 차근차근 따라가 본다. 매캐한 진회색의 기체는 아마도 팔 할이 한숨.

오늘은 조금 힘든 편이었다. 키클롭스의 방아쇠를 일곱 번이나 당겼다. 보통은 한둘, 많아봤자 서넛이었는데. 백발백중 이름 높은 명사수도 꼭두새벽부터 한밤중인 지금까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으니 기력이 부족할 수밖에.

“…아. 정말 싫다.”

무엇이 싫다는 것일까. 지겹도록 녹여 먹은 건빵? 하늘을 뒤흔드는 포탄의 소리? 귀를 찢는듯한 높은 비명? 한나절 동안 굳게 금했던 니코틴의 기운이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머리가 핑 돌고 손끝이 자잘하게 떨려온다. 옅은 현기증이 신호탄이었던 듯 의무감과 집중력, 인내심, 뭐 그런 것들에 짓눌렸던 본능들이 너나없이 고개를 들었다. 밀물 같은 허기와 갈증에 올가는 짧아진 담배를 난간 벽에 직 그어 껐다. 흙먼지로 더럽혀진 위로 시꺼먼 호가 더해졌다. 

야상 주머니로 손을 푹 찔러 넣어 봐도 손끝은 시리다.

“건빵, 건빵이….” 

주머니 안쪽까지 밤바람에 냉기가 가득했다. 으으, 미간을 팍 찌푸리며 뒤적이던 손으로 작은 봉지가 부스럭 딸려 나왔다. 낮에 먹다 남은 건빵이었다. 워낙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눅지 않은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으며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한참 낮았다. 

“물이 없는데.”  

오다가다 홀짝이던 수통의 물은 저녁 즈음에 다 비워버렸다. 예상보다 작전 시간이 길어져서였다. 텅 빈 수통은 탈탈 털어 봐도 소용이 없다. 갈증이 훅 솟구친 올가는 그냥 빠른 복귀를 해버릴까, 고민하다 그대로 옥상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밤하늘이 밝았다. 흐린 시선을 하던 올가의 귓전을 문득 스치는 환청 같은 것이 있었다. 

중령님, 그거 아세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대요. 

해방군을 이끄는 알드 룬의 왕녀, 바네사 테레즈가 언젠가 발랄하게 해주던 말이었다. 불운하게 운명을 달리한 제 오라버니가 종종 해줬던 이야기라고 했다. 왜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을까. 하지만 올가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쉬이 넘겨본다.

그럼에도 바네사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하늘을 향해 들어보는 손끝은 메말랐지만 진지하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밤하늘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눈이 부시다 못해 쨍 멀어버릴 듯한 빛들. 공중에 뜬 빛의 점들을 세는 것이 곧 지겨워진 올가는, 무언가를 움켜쥐듯 주먹을 쥐락펴락, 하곤 팔을 툭 떨어트렸다.

“…물, 마시고, 싶어.” 

아예 팔다리를 내뻗은 채 새 담배를 무는 동작이 능숙하고 유려하다. 불을 붙이고, 첫 숨을 내뿜고, 손끝의 감각에 의지해 남은 담배의 개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네 개비가 남았다. 오늘은 이놈들을 죄 해치우고 복귀해야겠다, 생각하며 빠르게 필터를 빨았다. 

그때였다. 바스락, 아주 작은 소음이 돋았다. 유난히 예민한 귀가 옥상 문 너머로 오감을 빠르게 안내한다. 민첩하게 일어난 올가는 옷자락 밑을 더듬었다. 깊은 허벅다리 바깥쪽으로 고정해둔 단도가 있었다. 날렵한 눈매가 잘게 조여진다. 야상에 가려진 검의 손잡이로 소리 없이 손을 가져가던 올가는, 

“중령님, 저예요!” 

생각지도 못했던 음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후우, 안도의 작은 숨을 내쉬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네사였다. 거친 겨울바람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아… 왕녀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어쩐 일로…?”

“아아, 밤공기가 제법 좋네요. 여기는 더 그런 거 같아요. 높은 옥상이어서 그런가?” 

질문에 맞는 대답을 내놓는 대신 바네사는 한껏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참 많은 밤이네요. 그렇죠?”

“혼자 오셨습니까.”

“하핫, 그럼 누구랑 오나요?”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밤에는 더더욱.”

“응. 아, 맞아요, 그래요, 이거.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불쑥 내밀어지는 건 수통이었다. 찰랑, 상쾌한 물소리가 들렸다. 짙은 피로와 독한 담배 기운에 둔해진 올가의 손이 묵직한 수통을 받아들었다. 물이 없는 걸 어떻게 아셨지. 제법인 무게를 가늠하는 두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자, 

“목이 많이 마르실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

“오늘 임무 종료가 엄청나게 늦어졌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거든요. 보통은 작은 수통 하나만 가지고 다니시니까. 그래서 왔어요, 목이 많이 마르실까 봐.” 

두 손을 모아 잡으며 바네사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런 왕녀를 고요히 응시하는 올가의 두 눈. 생각한다. 전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 하지만 무엇보다도 용감하며 의지가 꺾이지 않는 여자. 

가뭄처럼 말라 있던 식도를 적셔주는 물은 정말이지, 오래된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음료처럼 차갑고 달았다. 가득 차 있던 수통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내뱉는 숨이 밭았다.

“감사합니다, 왕녀님.”

“뭘요. 저도 오랜만에 산책 같은 산책도 하고, 아, 정말이지 밤공기가 너무너무 좋은 거 있죠?” 

쌀쌀한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살살 털어 정리한 바네사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펄럭, 하곤 푹 가라앉는 치맛자락을 보며 올가는 또다시 의아한 눈이 되었다. 그 멀건 얼굴을 올려다보며 바네사는 맞은편 자리를 툭툭, 가볍게 두들겼다. 

 “서 계시지만 말고 좀 앉으세요, 올가 경. 오늘 많이 힘드셨을 텐데.”

“아… 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바네사를 보며 올가는 새삼 느낀다. 생각 이상으로 강인한 사람이라고.  

양옆으로 까닥이던 흥겨운 고갯짓이 멈추었다.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굳은 듯한, 오로지 두 눈만을 깜박이는 바네사의 얼굴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피곤이 묻어있었다. 그 옆모습을 힐끗 보며 올가는 생각한다. 속눈썹이 길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바네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중령님.”

“네, 왕녀님.”

“음….”

“…….”

“중령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올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바네사는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랑.” 

 올가는 뺨만 긁적거리다,

 “…사랑, 말씀, 입니까?”

겨우 한 마디를 했다. 그마저도 더듬더듬 이어낸 문장. 그런 올가의 반응이 재미있는 것인지 뭔지, 바네사는 아까보다도 더 빛나는 눈이 되었다.

“네. 사랑이요.”

“음… 어렵네요. 뭔가 좀 갑작스럽긴 합니다만.”

“아하핫, 제가 가끔 엉뚱하잖아요? …그러니까 중령님 생각은, 어때요?”

공중으로 불쑥 솟은 물음표만큼이나 생기 있는 표정. 대충하는 대답은 통하지 않겠구나, 짐작한 올가는 선선한 손으로 품 안의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삐딱하게 물어 까딱거리는 입술 사이로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 ‘사랑’이라는 단어에만 국한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저 혼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던 것이 있긴 합니다.”

“그래요? 어떤 건데요?”

“마음, 말입니다.”

“마음?”

“…마음은… 마음은 여는 게 아니라, 열리게 하는 거라고.”

이번에는 바네사의 눈이 활짝 커졌다. 크고 동그랗게 벌어진 두 눈을 힐끔 곁눈질 한 올가는, 어쩐지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건 억지로 여는 게 아닌, 자연스럽게, 스스로 열리게끔….”

“와. 멋져요.”

“임무를 위해 대기하는 중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것도 그런 생각 중 하나… 아. 뭔가 쑥스럽군요.”

“아니, 왜요?”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랑 딱히 나누어본 적이 없습니다.”

올가의 헛기침에 바네사가 고운 손사래를 친다.

“그럼 앞으로 저랑 나누시면 되겠네요.”

“…….”

“왜 대답이 없으셔요? 싫으신 건가요?”

“…….”

“음, 아 그래. 저는 말이에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면요.”

“…….”

“나답지 않은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

올가를 향해 작게 웃어 보이곤, 밤하늘로 시선을 돌려 아예 생글거리는 바네사가 이어 하는 말이 이렇다.

“한 나라의 왕녀로 태어나고 자랐어요. 고운 옷, 따뜻한 식사, 편안한 침대밖에 몰랐었죠. 화려하게 장식된 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초대해 느긋한 티타임을 가지고, 악사들의 멋진 음악에 맞춰 왈츠를 추고.”

“…….”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이제는 제 양말의 구멍쯤은 잘도 기울 수 있게 됐어요. 거친 볏짚을 쌓아 만든 침대에서도 뒤척임 없이 잘 자고요. 건더기라곤 감자와 당근뿐인 스튜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아요. 티타임? 사치에요. 함께 나누어 마시는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 바가지가 더 소중해요.”

“…….”

“어쨌거나 사랑은, 그런 거 아닐까요? 나답지 않은 것들에 익숙해지는. 그런.”

“…….” 

“방금 말씀드린 사랑은 범위가 좀 넓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관계에서도 해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

“예를 들어, 이런 것?”

곱게 튀어 오르는 말끝과 함께 바네사는 올가의 입술에 물린 담배를 훅 빼가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돌발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향해 바네사는 방긋 웃어 보이곤, 불을 붙이지 않은 채였던 새 담배를 보란 듯이 뚝, 부러뜨렸다.

“건강에 안 좋아요.”

“…….”

“화내실 건가요?”

“…….”

“보통 언성을 조금 높이신다고,”

“……아닙니다.”

“그래요? 아, 그럼 참 잘 됐다. 이김에 담배를 끊으시는 건 어떨까요?”

잔소리 비슷한 걸 밝고 맑게 하며 바네사는 무릎을 세워 모았다. 밤공기는 꽤 쌀쌀해, 성큼 올라간 밑단 아래의 종아리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생각에 골똘히 잠긴 듯 잠시 묵묵하던 바네사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중령님, 혹시 왈츠를 출 줄 아세요?”

“음… 춤에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저랑 한 곡 추실까요?”

“네?”

“제가 알려드릴게요!”

여전히 바닥으로 엉덩이를 착 붙인 채, 바네사는 올가를 향해 몸을 완전히 틀었다. 우아하게 내밀어지는 손과, 상당히 난감하다는 표정. 바네사는 어딘지 모르게 신이 잔뜩 났다.

“자, 봐요. 일단 왼손으로 제 허리를 감싸주시고.”

갈 곳을 잃어버려 허공에서 헤매던 올가의 손을 잡아끌어 인도해주는 바네사였다.

“네, 그렇게- 아 너무 손에 힘주지 말아요. 부드럽게, 부드럽게… 이제, 이 손이랑 제 이쪽 손이랑 잡아야 해요.”

“어, 왕녀님, 제가…,”

“참, 저항군 최고의 저격수 파블리첸코 중령님이 왜 이렇게 부끄러움을 타실까?”

“…….”

“이제 그냥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면 돼요.”

앉은뱅이 자세로 상체만 얽힌 모습이 우습기는 하되, 

“붙어있으니까 좀 따스하네요, 중령님.”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뭔가, 되게 노곤노곤하네요.”

“…….”

“중령님, 지금 체온이 되게 높아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어깨로 턱을 얹은 두 사람은, 이윽고 제법 상체를 붙인 채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스며들 듯 미끄러질 듯, 성기게 마주 붙은 두 손은 어느새 서로의 손가락이 엉기고 또 엉켜간다. 이윽고 손바닥 사이의 아주 작은 틈조차 달라붙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평안한 기운이 천천히 내려앉아 쌓이는 듯하다.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숨소리가 낮아지셨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다른 때보단 더 피곤하긴 합니다.”

“잠시 눈 붙이는 건 어떠세요.”

“하지만 복귀를… 해야…,”

“조금 늦어도 괜찮을 거예요.”

“…….”

“오늘 하루는 다 끝났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

“그러니까 잠깐 쪽잠이라도.”

“…….”

“…….”

“…….”

“……중령님?”

“…….”

“……잠이 드셨네.”

여전히 손바닥을 맞잡은 채였다. 잠에 빠져 축 떨어지는 손을 내려받아 잡은 바네사는 나직한 가락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걱정이 없던 시절, 제 유모가 한참 잠투정하던 어린 바네사를 도닥여주며 불러주던 자장가. 

“…안녕히 주무세요.”

온통 고요한 가운데 돋는 소음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는 올가의 고른 숨소리, 그리고 바네사가 울음을 참기 위해 코를 훌쩍이는 소리. 

무색의 바람을 탄 추위가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 한겨울이 목전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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