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명헌│산왕 9번! 인텐셔널 파울

두근두근 러브레터 대소동


림을 쫓아 하늘로 뛰는 사람이 별을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지구가 평평하든 말든 오직 농구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정우성의 세상에도 믿지 못 할 일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나이가 비슷한 고교생에게 지는 것. 아버지가 갑자기 자신을 축구 선수로 키우겠다든가 하는 것. 그리고 정우성에게는 앞선 두 가지만큼, 어쩌면 두 가지보다 믿기 힘든 게 있었는데, 아침 일찍 자신의 라커 앞에서 고민하는 이명헌 같은 게 그랬다.

그것도 오른손에 편지를 들고 있는 이명헌 같은 거 말이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아침 5시부터 눈이 떠지는 날. 침상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을 뿐인데도 컨디션 좋은 게 느껴지는 날. 이런 날일수록 혼자서 미리 체력을 좀 빼두고 머리를 비워야 했다. 솔직히 삼점슛 쏘면 진짜 다 들어갈 것 같은 날이긴 한데, 그러다 못해 신현철의 암바에서도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인데. 괜히 오버했다가 같은 팀 가드에게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았다. 팀에서 페이스와 템포를 조절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기에.

여기서 더 건방지다고 생각되는 것도 싫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팀원들이 저를 미워하든 싫어하든 상관할 바 아니라 여기며 살아왔으나, 마음 맞는 팀원들에게는 역시 미움받고 싶지 않다. 산왕에 들어온 지 이제 막 1년을 채워가는 정우성에게 생긴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였다. 농구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고 싶다. 그게 코트 위에서 같은 속도로 달릴 줄 알면서도 저가 마음껏 뛰놀 수 있게끔 공을 패스하는 가드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린 러닝이었다. 사실상 상념만 가득 들고 뛴 러닝이었는데도 몸이 지나치게 가벼워서, 오늘은 삼점슛이 아니라 덩크만 해야 하는 날인가 싶었다. 그와 호흡을 맞추는 앨리웁 덩크는 또 그것대로 재밌어서 뭐든 상관없긴 했다. 그가 앨리웁을 써먹을 때는 대부분 신현철을 통해서긴 했지만 그런 패턴이야 깨버리면 그만이다. 원래 패턴 같은 것도 한 번씩 변화가 필요한 법이다. 오늘의 개인 목표치─신현철보다 덩크 많이 하기─까지 설정한 정우성은 금방 기숙사로 향했다. 아침 훈련이 시작되기 전 샤워를 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단체 팀복으로 받은 트레이닝 저지 지퍼를 내리며 안쪽으로 들어가던 정우성은 라커룸에 들어서자마자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 사람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는 탓이었다. 방금까지 미움받기 싫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명헌. 그가 ‘정우성’이 적힌 라커 앞에 서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 뭐 잘못했나?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랬다. 그도 그럴 게 윈터컵까지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고교 농구 데뷔를 끝낸 정우성을 가장 많이 지적하는 건 팀 감독도 아닌 이명헌이었던 것이다.

농구에 대한 것이었으면 한 귀로 흘려들었을 것인데, 그가 해오는 건 열에 아홉은 태도 지적이었다. 재미가 없어도 티 내지 마라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기합받기 싫으면 선배들 말 끝나기 전까지 끼어들지 마라, 얼굴만 봐도 아니까 사인 티 나게 주지 마라, 산왕의 얼굴이 되어서 팬이나 기자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각오해라……. 베시인지 뿅인지 하는 말꼬리들이 붙어도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는 딱딱한 말들.

남들 다 보는 코트 위에서 대놓고 혼나다 보면 지나가던 3학년 선배들이 한마디씩 툭툭 얹었다. 이명헌이 사람 하나 만드네. 솔직히 정우성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작 한 살 차이로 애 취급한다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것도 학기 초반이 잠깐이었다.

왜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까지 확실하게 붙인 딱딱한 설명은 애 취급이라기보다는 후배의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는 선배의 조언처럼 느껴졌다. 단지 정우성에게 부족한 부분이 드리블이나 슛폼 같은 게 아니라 경기 태도였을 뿐. 중학생이 되어서야 원온원이 아닌 팀으로 하는 농구를 배우고, 그렇게 맞지 않는 팀원들과 3년을 삐걱거리며 불협화음으로 고생했던 정우성에게는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방금 막 시작된 참이고, 산왕은 아침 러닝 같은 개인 훈련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학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잘못한 건 아직 없다. 어제는 타 학교 시합에서 집중을 못 했지만 오늘은 아직이다. 엊그제는 1학년끼리만 연습하다가 몸에 맞는 루즈볼을 만들어냈지만 오늘은 아직이었다. 사흘 전에도 뭔가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오늘은 아직이라는 거다.

그런 자신감을 갖고도 당장 정우성이 그에게 떳떳하게 말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라커룸, 내지는 사물함 앞에서 편지를 들고 서 있는 사람과 어울리는 말이 뭔지 너무 잘 알아서.

그건 자신과 이명헌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 그냥 이명헌에게 안 어울렸다. 그런 게 어울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중학교 시절 제 경기를 보러 와준 같은 반 여자애들. 혹은 지금도 종종 교문 밖에서 마주치는 팬들.

그러니까 아니어야 했다. 왜 아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아니어야 했다. 그리고 아마 아닐 거다. 슬쩍 다시 고개를 뺀 정우성은 금방 벽 뒤로 뒤통수를 갖다 붙였다. 이명헌의 손에 들린 짙은 남색 편지 봉투 때문이었다. 제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아예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등 뒤로 떠나갈 듯한 한숨이 또 한 번 들려온다. 그다음에는 끼이익, 하고 라커문이 열렸고, 얼마 가지 않아 쾅!! 하고 닫혔다. 화풀이를 한 건지 철제음끼리 부딪힌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사이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 참지 못한 정우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로부터 뒤돌아 있는 이명헌의 양손은 비어있었다.

지구가 평평해도 농구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던 정우성의 세계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이런 미친.

*

남자에게 편지를 받는 일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잘생겼는데 농구까지 잘한다는 건 꽤나 굉장한 매력이어서, 품 안으로 건네지는 선물들을 하나하나 받다 보면 그중에는 저와 비슷한 크기의 손이 끼어있었다. 대부분은 네가 산왕이라서 자랑스럽다는 팬의 편지였다. 고백은 그것에 곱절로 받은 것 같다. 근데 그 두 개가 합쳐진 남자의 고백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편지로 말이다. 처음이다 못해 다음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 놀라움도 잠깐이었다. 하긴, 남자가 날 좋아할 수도 있겠다. 수긍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잘생겼는데 농구까지 잘한다는 건 굉장한 매력이었으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같은 농구부원, 그것도 수준 높은 산왕의 농구부라면 제 플레이에 어떤 걸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우성의 자신감을 누를 수 있는 건 일본에는 없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다. 남자의 고백도 이해한 정우성이 문제로 삼는 건 그걸 건넨 이명헌이라는 사람이었다. 1년 동안 가드와 포워드로 묶이며 매 순간이 코트 위에서처럼 딱딱하거나 냉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단지 1학년 후배에게 반해서 편지를 쓸 것 같지도 않을 뿐.

아니나 다를까, 그가 떠나자마자 사람들이 밀려 들어온 탓에 라커는 확인도 못하고 체육관에 향하면 이명헌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정우성은 라커에 잠들어있는 남색 편지 봉투 그거 하나가 미치도록 신경 쓰여서 목표치는커녕 눈뜨자마자 좋았던 컨디션까지 날려 먹었는데, 이명헌은 평소와 똑같았다.

스타팅에 있는 유일한 1학년인 만큼 다른 동급생보다 더 챙겨주고 코트에서는 전적으로 믿어주기까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 경기가 끝나면 특별한 게 없다. 애초에 챙겨주는 것도 주장의 의무에 불과했다. 시선이 마주치면 먼저 눈을 피하기는커녕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해한다. 실수하면 귀엽게 봐주는 게 아니라 한숨부터 쉰다. 신현철에게 당해서 우는 소리를 내면 못 들은 척했고, 따로 말을 붙여온다면 반드시 용건이 있었다. 슈퍼 플레이에도 칭찬 대신 하이파이브를 위해 뻗은 손바닥이 끝.

그런데 날 좋아한다니.

이거 좀,

되게 기분 좋은데?

남들이라면 가로막힐 상황에서 정우성은 다시 한번 자신감을 빛낸다. 형태가 무엇이든 타인의 관심을 받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게 애정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상쾌한 기분은 따지자면 우쭐함에 가까웠다. 어떤 성취를 이뤄냈을 때나 따라오는 보상과도 같은 기쁨과 쾌감. 오늘따라 웃는 낯짝이 기분 나쁘다고 몇 번이고 초크가 걸려 왔지만 정우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도 이명헌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나 조바심 같은 건 나지 않았다.

공이 제 손안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

정우성이 ‘정우성’이 적힌 라커에 서는 건 모든 훈련이 끝난 뒤였다. 윈터컵을 마지막으로 고교 경기 일정이 전부 끝났음에도 산왕의 농구부는 전보다 훨씬 더 바쁘고 더 힘들었다. 갑작스럽게 미국 원정이 잡힌 탓이었다. 선수들이 농구의 본고장에 직접 갈 생각에 설렜던 건 처음 원정 소식을 들은 10분이 잠깐이었다. 그 뒤에는 바로 지옥 시작이었다. 정우성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이길까말까 한 세상이 궁금해서, 차라리 합숙 훈련을 시켜달라는─도망이라도 치겠다는 뜻이었다─절규 속에서도 혼자 신이 났다. 거기에 끼어들 수 있는 잡념은 딱 하나였다.

이명헌이 보낸, 남색 편지 봉투.

마음 같아선 훈련이 끝나자마자 라커룸을 열고 편지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끝까지 참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신현철 앞에서 남이 쓴 편지를 읽는 건 자살 행위라는 걸 알아서였다. 일부러 사람이 다 떠날 때까지 미적미적 씻은 뒤에 다시 마주 본 라커룸에는 이것저것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선발 대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최근 들어 정우성의 라커룸에는 몰래 다녀가는 손님이 많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심부름꾼들이었다.

타학교생, 그중에서도 특히 여학생은 한 발자국도 들어올 수 없는 게 교칙인 학교인 만큼 선수들의 선물은 농구부 라커룸에 들어갈 수 있는 심부름꾼들을 통해 전달되고는 했다. 손이 부족하다 싶으면 감독까지 쓰이는 일도 있었다. 평범한 학생이나 같은 농구부원에게 맡겨지는 선물들은 중간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라커룸 안에 정직하게 쌓였다.

평소라면 고맙기만 할 정성과 마음이지만 오늘은 조금 곤란했다. 물론 MMA 프로지망생─분명했다. 아니고선 그런 기술들을 그렇게 잘 쓸 수는 없다─에게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라커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잔뜩 구겨져서 가장 안쪽으로 밀려난 더플백이었다. 오늘 하루도 여기서 이렇게 고생했겠구나, 미약한 사과를 전한 뒤에는 바로 남색 편지 봉투를 찾았다. 금방 찾을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봉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선물을 뒤적이는 손길이 거칠어진다. 그러다 뭔가가 부욱 찢기는 소리가 나서 급하게 확인하면 스케치북이었다. 금방 다시 옆으로 치우고 라커를 뒤졌다가, 손이 뚝 하고 멈췄다.

설마 다시 가져갔나?

넣어 놓고 보니까 아니다 싶어서?

이명헌의 특기에 볼 스틸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아니, 이건 스틸이 아니라 반칙 아냐? 이 정도면 테크니컬 파울 수준이다. 분명 넣는 걸 봤, 지는 않았지만 라커 문을 열고 닫은 건 백 퍼센트 아니냐고. 페이크는 이명헌의 특기가 맞긴 한데. 평범한 후배처럼 대해져도 아무렇지 않았던 조바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참을 뒤지던 정우성은 결국 더플백을 꺼내 들고 다른 선물들부터 무작정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남색 편지 봉투가 나오는 건 가방 안이 터질 듯이 꽉 찬 다음이었다.

편지 봉투는 쇼핑백처럼 되어있는 다른 선물 틈에 얌전히 끼어 있었다. 정우성은 당장 꺼내 읽을 것처럼 봉투의 스티커 부분을 급히 열었다가, 금방 저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같은 방을 쓰는 동갑내기 룸메이트는 이미 2층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한때는 훈련이 끝나고 스타팅 멤버들만 또 따로 야간 훈련을 받는 게 굉장히 억울했는데, 이럴 때만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은 정우성은 편지 봉투를 마저 여는 대신에 선물 정리부터 시작했다.

먼저 부피가 너무 큰 선물들은 본가에 보낼 짐 박스에 넣어두고 바로바로 확인하기 편한 편지들은 한 곁에 빼두었다. 칭찬에 정신을 빼놓으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팬들에게는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명헌이 만들어놓은 정우성의 사회성 중 하나였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난 날이면 네 경기를 보고 가슴이 뛰어 잠을 못 잤다는 응원들이 특히 뿌듯하게 다가오기도 했고. 얼추 정리되면 그제서야 1층 침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뒤, 팬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내렸다. 당연하게도, 온 신경은 따로 빼둔 편지 중에서도 또 따로 빼둔 남색 편지 봉투에 쏠려 있었다.

한 번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드니 궁금하다가도 손이 멈췄다. 아무리 잘 쓴 글이어도 처음 읽었을 때 묘한 설렘을 두 번째에도 똑같이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정우성은 그랬다. 한 번 내용을 알아버리면 그다음에는 재미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말이어도 결국 문장이나 단어 같은 건 달라지거나 바뀌지 않기에.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활자에 그때의 기분과 감성을 담아 평생을 간직한다고 한다. 낭만적이었지만 매일매일이 새로운 자극과 도전으로 목마른 정우성에게는 그닥 맞지 않았다. 한 번으로 끝나는 걸 아는 만큼 이명헌의 편지는 최대한 아껴 먹고 싶은 자극이었다. 찔러서 피를 내도 아무렇지 않게 패스를 던질 것 같은 그 사람이 대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만 놓고 보면 책이나 문학 같은 거랑 잘 어울리긴 했다. 국어 몇 점이라고 했더라. 성적이 높다고는 들었지만 어느 과목이 높은지는 몰랐다. 아닌가, 높은 건 교과목이 아니라 현장 실습뿐이라고 했던가. 근데 실습은 체육 특기 전형으로 빼주지 않나. 난 빼줬는데. 국어 점수 좀 높다고 편지를 잘 쓰는 건 또 아니긴 해. 근데 그 형이라면 국어 점수가 어떻든 글을 잘 쓸 것 같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하루에 절반이 넘는 시간을 체육관에서 땀 흘리며 공 튀기는 데다가 쓰는 데도 그런 이미지가 있다는 게. 근데 편지에도 용인지 뿅인지 모를 말꼬리를 붙여놨을까. 설마 노래 가사를 적어두지는 않았겠지. 그런 편지들도 많던데. 아니면 처음 본 순간을 적어놨다든가.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를, 같은 거. 아, 안 되겠다. 결국 정우성은 참지 못하고 따로 빼둔 남색 편지 봉투로 손을 뻗었다. 하고 싶은 건 그때그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지고 이 정도면 오래 참은 거다. 누가 참으라고 한 적도 없지만.

드디어 꺼낸 편지지는 봉투보다 좀 더 옅은 색깔이었다. 어디 문구점에서 세트로 파는 것 같았다. 이명헌이 이런 걸 자의로 샀다고? 진짜? 반신반의하며 뒤집어 양면을 확인했다. 뒷면은 깨끗했고, 앞은 받는 이의 이름도 없이 대뜸 첫 줄부터 줄글로 쓰여 있었다.

림을 쫓아서 하늘로 뛰는 사람이 별을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첫 문장이었다. 나는 그렇게 당연하게 시작했다. 두 번째 문장이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은 너같아. 그다음 문장, 그 단어마저 사랑하게 되는 것까지. 를 읽은 정우성은 그 뒤부터는 숨도 쉬지 않고 편지를 읽었다. 빼곡하게 채워진 글자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다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다 읽으면 또 처음부터 다시. 또다시. 어떤 훈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도 그날 정우성은 다른 편지는 읽지 못했다. 보내는 이의 이름도 없는 남색 편지지 한 장을 들고 날이 새도록 읽고 또 읽었을 뿐. 잠에 든 건 첫 문단까지는 눈감고도 외울 수 있을 만큼 읽어내린 뒤였다. 부족한 수면으로 치른 업보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정우성이 들고 다니는 편지에 대해서는 빠르게 소문이 돌았다.

드디어 타교에 여친이 생겼다더라, 아주 푹 빠져서 꽉 잡혀 산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문은 금방 번져나갔다. 근원지는 누구도 아닌 정우성이었다. 정확히는 훈련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편지를 꺼내 읽는 정우성. 꺼내 읽지 못할 때도 항상 주머니 속에 품고 다녔다. 손에서 놓는 건 주머니가 없는 유니폼을 입고 나서였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가장 먼저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뛰어갔다. 찝찝한 게 이유라고는 하지만 라커룸에 모셔둔 게 혹시라도 사라질까, 구겨질까 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런 식으로 들고 다니니 편지지가 구겨지고 꼬질꼬질해지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우성만의 물건을 아끼는 방식이었다.

하도 아끼고 싸매는 탓에 대체 뭐라고 적혀있는지 궁금해서 볼라치면 절대 보지 못하게 숨겼다. 완전히 보물 취급이었다. 처음엔 목격하는 그 즉시 관절기를 시전하던 신현철도 나중에는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바보는 때려도 약이 안 든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으로 떠나는 원정 경기 소식 이후로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했던 정우성의 편지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딱 한 명이었다.

주장 이명헌.

팀 감독조차 정우성이 미국 원정을 앞두고 새로운 기복 요인을 달고 왔나 싶어 앓는 와중에도 이명헌만큼은 덤덤했다. 신현철이 카프 크러셔인지 카프리썬인지를 시전할 때는 또 금방 운다고 핀잔을 줬고, 최동오가 요즘 정우성이 무섭게 집중한다고 일러와도 편해서 좋다고 넘겼다. 김낙수가 어떻게든 편지의 내용을 알아내겠다고 다짐할 땐 그 즉시 현철이에게 알려주라고 응원 겸 조언을 했고, 정성구가 타교의 여자친구에 대해 추측하면 대영이나 해남은 아닐 거라고 거들었다. 이유도 단순했다. 거리가 너무 머니까.

딱 그 정도였다. 주변이 뭔갈 하니까 반응하는 정도.

그리고 정우성은 그런 이명헌에도 초조하지 않았다. 불만이 없다는 게 더 맞겠다. 편지 덕분이었다. 편지는 고백과 거절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고백한 사람이 거절까지 할 수 있냐 싶지만, 앞으로도 네가 똑같이 농구 하길 바란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말은 분명한 거절이었다.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는 완고함과 지금 이대로여도 만족하는 소박함. 어쩌면 그런 마음조차 제가 알지 못하길 바랐을 것이다.

정우성은 그 문장이 좋았다. 그런 문장까지 좋았다. 오래 보는 게 아니고서야 적지 못할 표현들이 좋았고 마음이 없으면 쓰지 못하는 글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런 마음을 끝내 참지 못하고 제 손에 편지 형태로 쥐여준 이명헌이었다. 공을 뺏을 생각이 없는 상대와 원온원 하는 기분이었다. 그럼 재미가 없어야 하는데, 질리지도 않고 재밌었다.

슬슬 문장을 다 외워갈 때쯤에는 내용보다도 글씨체에 집중해서 편지를 뜯어봤다. 필체 하나하나마저도 이명헌 같아서였다. 둥근 부분에선 마땅히 둥글었는데, 그럼에도 각진 것처럼 뻣뻣하고 딱딱했다. 편지에 있는 줄이라고는 공백을 칸칸이 나눈 밑줄밖에 없는데도 위아래 간격이 딱 맞고 흐트러짐 없이 바르고 정갈했다. 얼핏 답답하게 느껴지는 글씨체로 적혀있는 단어는 별, 림, 하늘, 사랑, 불가항력같이 한없이 낯간지러운 것들이어서, 입으로 읽을 땐 부드럽기만 했다. 거기에 종이 이곳저곳에서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티가 나는 흔적들. 정우성은 그 모든 게 코트 위에 있는 이명헌 같다 느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 궁금했던 것도 같다. 항상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적막함 밑으로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길래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1학년 후배를 이렇게 간질거리고도 뿌듯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가 적은 단어의 뜻을 곱씹을 때면 이명헌이 제게 느끼는 감정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불가항력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 저가 이명헌에게 그런 존재라 생각하면 소름 끼칠 만큼 좋았다.

딱 그 정도였다. 이명헌씩이나 되는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사실에 들뜨는 정도. 저렇게 침착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나에게 편지를 썼다는 기묘한 성취감. 농구가 아닌 일에도 이토록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정우성은 이날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편지 하나 잘 쓴다고 사람이 이렇게 궁금해질 수 있다는 것도.

응할 마음은 없었다.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다 못해 편지를 보낸 적도 없다는 듯 구는 이명헌의 태도는 거슬린다거나 괘씸하다기보다는 고마운 쪽에 속했다. 이게 바로 팀원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주장이라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도 했다. 정우성으로서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괜히 그랬다가 그의 컨디션에 지장이라도 가면? 미국 원정이 코앞이었다. 이명헌을 대체할 가드는 일본을 뒤져봐도 없다. 정우성은 순조롭게 신화를 쌓아가는 산왕의 무엇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즐거움은 저도 모르게 이곳저곳 스며들어있던 그의 애정을 확인하는 일로 충분했다.

벌써부터 주장을 맡은 이명헌을 도와 차기 부주장으로 거론되는 정성구에게 그의 필체에 관해 물어보고, 한눈에 봐도 깔끔하며 필체마저 이명헌답다는 대답을 듣는 게 즐겁다. 최동오에게 이명헌이 주장으로서 4번을 달게 되는 그날 그때부터 9번 유니폼은 제게 주기로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들떴고, 김낙수로부터 명헌이가 요즘 너 많이 신경 쓰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듣는 게 신이 났다. 그것으로 정우성은 충분했다.

가능하다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

인생에서 변화는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고는 한다.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뒀을 때, 정우성은 집 앞 마당에 농구 코트가 생길 줄 몰랐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팀 농구가 그렇게 답답한 것일 줄 몰랐고, 고등학생이 될 때는 미국으로 원정 경기를 떠날 줄 몰랐다. 그런 예기치 않은 변화의 특징은 사람이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명헌의 편지처럼 말이다. 그날도 정우성은 코트 위에서 뛰는 이명헌을 바라보며 멋대로 그를 편지지 안에 구겨 넣고 있었다.

“너 또 그 편지 생각하고 있었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오였다. 놀란 정우성이 급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저 그렇게 티 나요?”

“설마 숨기려고 했었어? 오늘이 지나면 소문은 아키타 도내로 퍼질걸.”

최동오가 턱 끝으로 코트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1학년과 2학년이 섞인 2군들의 연습 경기가 한창이었다. 상대는 아키타현 도내 2위로 성적을 마무리한 학교였다. 벌써부터 내년 인터 하이를 노리고 있는 학교 감독들은 방학을 앞두고서도 연습 시합을 마다하지 않았다. 3학년을 대체할 2학년 주전들을 테스트할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상대의 내년 전력을 체크하는데 연습 경기만큼 좋은 게 없었다.

“네가 편지 받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오랜만에 본다.”

본 게임은 2군의 시합이 끝난 다음이었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2학년들과 같이 몸을 풀고 있던 정우성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팬레터라는 게 익숙지 않았을 때 이야기가 부끄러운 탓이었다. 이명헌은 정성구와 함께 감독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년 인터 하이에 쓸만한 벤치를 뽑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잡지 기자님들까지 궁금해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말 안 할 거예요.”

최동오가 너스레를 떨면 정우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명랑하기까지 했다. 편지에 관한 건 아버지가 물어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번이라도 농구를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편지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정우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산왕의 누구에게도 편지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였다. 그 경험을 누구에게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 첫 문장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정우성이었다. 자신에게 온 편지였다.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이명헌이다. 그런 정우성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최동오가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하여튼 넌 명헌이한테 고마워해라.”

그를 따라 웃는 낯으로 잘 대화하던 정우성의 입꼬리가 굳는다.

“그거 이명헌이 준 거잖아.”

그런 다음에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온몸이 기름칠이 부족한 부품처럼 삐걱거리는 기분이었다. 특히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목 근육이 그랬다.

“선배, 알, 알고 있었어요?”

정우성이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나 사실 봤거든.”

그러면 최동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벌리던 정우성이 급히 기억을 되돌렸다. 어디서부터 최동오가 있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라커룸엔 분명 단둘이었는데. 설마 숙소에서 이명헌이 편지를 들고 가는 걸 본 걸까? 아니면 제 편지를 몰래 봤다든가. 그래도 보내는 이가 적혀 있지 않아서 모를 텐데. 대체 어디 서 있던 거지? 센터들만큼은 아니어도 어디 숨겨지기에 쉬운 키는 아니었다. 김낙수라면 확실히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긴 한데, 그것도 아니면 설마, 이명헌이, 편지 쓰는걸,

“귀엽게 생기긴 했더라.”

“네?”

“네 편지 상대.”

정우성의 미간이 확 구겨진다. 간단하게 워밍업하던 최동오가 눈짓으로 스쳐 지나가듯 정우성의 표정을 확인했다가 기겁한다. 한 마디 했다, 한 마디! 뭘 또 그렇게 바로 눈을 치켜떠? 그런 다음에는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알았다, 알았어! 확실히 내가 이런 장난 치면 좀 불안하긴 하지? 그래도 상대도 보통은 아니잖아. 완벽하게 애를 달래는 목소리를 듣다 보면 기분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애 취급 때문은 아니었다. 기분 나쁜 건 저를 달래겠답시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니까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거. 이명헌이 보통이 아니긴 하지. 근데 그걸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아서였는데.

“나 그렇게 일찍 와서 편지 전해달라는 건 처음 봤거든.”

최동오가 말했다.

“그것도 명헌이한테 부탁할 줄은 몰랐어.”

사실 편지도 처음엔 명헌이가 받은 건 줄 알았다. 1학년부터 경기 뛰어서 그런지 걔가 그래 보여도 은근히 팬이 많거든. 이번 선발 대회에서도 활약 많이 했고. 근데 그런 명헌이도 너만은 못 하는구나. 태연하게 능청 떠는 최동오의 말을 끊는 건 날카로운 휘슬 소리였다. 앞선 연습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었다. 최동오! 정우성!! 빨리 와서 준비해라! 선수를 찾는 감독의 목소리가 체육관을 가득 채운다. 이크, 너무 떠들었나 보다. 그래도 걱정 마라, 나 입 무거운 거 알지? 마지막으로 등을 두드린 최동오가 먼저 코트 근처로 달려갔다. 정우성이 움직이는 건 휘슬이 한 번 더 울리고 난 다음이었다.

*

경기를 지켜보던 도진우는 가까스로 이마를 짚으려던 걸 참아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정우성 때문이었다. 아키타현 도내 2위 학교였지만 정우성을 집중시키는 데는 턱없이 부족할 상대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출전시켰던 건 개인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스쿱샷의 완성도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정우성의 머리에는 기술을 써먹는다든가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손에 공이 들어오면 잠깐이나마 집중했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그 움직임도 집중한다기보다는 몇 백번씩이고 해온 동작을 반복하는 것에 가까웠다.

불만족스럽게 코트를 바라보고 있으면 얼마 가지 않아 이명헌과 시선이 마주친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있던 이명헌이 금방 코트를 둘러보고, 다시 감독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이끌어 보겠다는 뜻이었다. 1학년 때부터 코트를 활용하는 시야가 남달랐던 이명헌은 감독이 요구하는 걸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챘다. 정우성의 태도에도 스코어 자체에 문제가 없는 건 그의 영리한 운영 덕분이었다. 신현철은 물론, 새로운 스타팅 주전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최동오나 정성구의 움직임도 좋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정우성은, 일단 편지 생각만 안 했으면 좋겠다. 그건 재밌는 상대를 만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까. 결국 도진우가 관자놀이 근처 어딘가를 짚는다. 그것조차도, 이명헌은 놓치지 않았다.

한편 코트 위 요주의 인물이 되어있는 정우성은 감독의 예상과는 달리 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이명헌의 이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뿐.

누구의 이름도 없이 시작한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게 이명헌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당연하게 읽었으니까.

상대 팀 에이스는 쓸데없이 움직임이 컸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어디로 움직일지가 보였다. 막히면 돌파보다도 패스를 선택하는 타입. 상체를 낮추고 압박하면 금방 주변을 살폈다. 에이스가 아니라 꼭 포인트 가드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그것도 이미 선수들의 위치는 전부 파악하고 있으면서, 상대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페이크로 주변을 살피는 가드. 물론 눈앞에 상대는 정말로 당황하고 긴장해서 이리저리 시선이 튀는 것뿐이지만서도. 그가 오른쪽 열린 공간으로 볼을 돌린 건 그때였다. 정우성이 한발 늦게 손을 뻗으면 끝에 맞고 튕겨 나갔다. 루즈볼을 잡는 건 근처에서 리바운드를 대기하고 있던 정성구였다. 상대는 크게 아쉬워하지만 산왕은 기회를 잡은 것에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땅히 정우성이 잡아야 했던 공이기 때문이다.

농구에 관해서는 절대 약한 소리 하지 않는 정우성이었지만 오늘 같은 날만큼은 제발 벤치로 보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가까스로 살린 볼을 당연하게 받아드는 사람이 이명헌이었으니까. 드리블하며 이번에는 어떤 선수를 어디서부터 공략할지 생각하는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다. 벤치로 쫓겨날 수 없다면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이대로 혼자서 흘려보내면 될 일이라는 건 알았다. 어차피 응할 생각도 없던 마음이었으니, 상대를 착각한 게 이제 와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물론 그 착각이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불 속에 틀어박혀서 한 사흘 정도는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수치심까지 혼자 묻어놓고 가면 됐다. 그러다 나중에 사실 그때 명헌이 형이 보낸 편지인 줄 알았다고 당사자에게 너스레 떨며 그 당시에 있었던 웃긴 헤프닝으로 끝내면 될 일이다. 정우성도 알았다. 알았는데, 그래서 그 편지를 쓴 게 이명헌이 아니라는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정말 이명헌이 보낸 게 아니라고? 그런 의심이 계속 들었다. 그 뻣뻣하고 정갈한 글씨체가 이명헌의 것이 아니라는 건 의심을 넘어서 그냥 믿고 싶지 않았다. 정우성과 불가항력을 엮은 투박함이 이명헌이 아니라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고, 그날 제 라커 앞에서 쉬었던 한숨이 어떤 망설임이나 고민이 아닌 귀찮음이었다는 건 가정으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편지의 발신인이 이명헌이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받을 이도 보내는 이도 적지 않는 엉뚱함이나, 제 농구가 변함없길 바라던 마음까지 무엇 하나 이명헌과 어울리지 않은 게 없었다. 칙칙한 편지지 색상은 또 어떤가.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오직 검은 볼펜 글씨 하나로 채워진 내용으로 끝이었던 건? 마치 제 옆에서 같이 농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던 표현들은? 그것들이 정말 이명헌이 아닐 수가 있나? 이 정도로 어울리면 그냥 이명헌이 쓴 걸로 하면 안 되나?

진짜로 양보하긴 싫지만, 아량 넓게 천만번 정도 양보해서 정말로 편지를 쓴 게 이명헌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보였던 무미건조하고 담백한 태도들 밑으로 꾹꾹 눌린 감정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선배들을 쿡쿡 찔러 알아낸 이명헌의 평소가 보이는 그대로였다면. 양보라는 건 일단은 내 소유를 확실하게 해놓고 하는 건데도 어떤 생각들은 예의라는 걸 모르고 쏟아지고는 한다. 지금이 그랬다. 정우성은 단지 가정만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내고 싶지 않은 결과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하지만 정말로, 이명헌은 진짜 챙겨야 할 후배 그 이상으로 날 보는 게 아니었다면. 태연하고 덤덤함을 꾸며내서 애써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해오던 게 아니라, 진짜 나를 모르고 관심이 없던 거라면.

그건 안 되는 거 아니야?

발이 걸리는 느낌이 들고 나면 삐익!! 정신을 깨우는 휘슬이 울렸다.

“산왕 9번! 인텐셔널 파울!”

귀가 째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멈춰선 정우성이 주변을 살폈다. 어느샌가 볼을 잡고 원맨 속공을 준비하려던 상대 팀 포워드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우성은 산왕 9번이 이명헌이 아닌 자신임을 깨닫는다. 뒤늦게 상황이 이해된 정우성이 심판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회로가 빠르게 농구 쪽으로 돌아간다. 디펜스 파울이면 모를까, 인텐셔널을 받을 건 아니었다. 애초에 고의로 태클을 건다든가 할 정신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자유투 두 번을 넣는다고 해서 따라잡힐 점수 차는 아니지만 스포츠에서 기세라는 건 굉장히 중요했는데.

“잠깐만요!”

“정우성.”

항의를 막는 건 이명헌이었다. 억울함을 토해내려던 정우성이 단번에 입을 닫았다. 연습 시합인 만큼 경기용 조끼로 유니폼을 대신하고 있는 그의 번호는 4번이었다. 정우성은 아직도 9번이 이명헌의 번호 같아서 헷갈리는데, 이명헌은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언제나 정우성에게 보여주던 모습 그대로였다. 무덤덤하고, 건조하며, 저를 믿지만 인간적으로 신뢰하진 않고, 말을 붙여올 때는 항상 용건이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주장의 의무로서 챙기지만 조금 귀찮아하는.

테크니컬 파울을 외칠 준비를 하던 심판이 작게 혀를 찼다. 그가 농구공을 들고 코트 안으로 들어서면 상대 팀 포워드는 그제야 일어서서 자유투를 준비했다. 리바운드 준비해용. 이명헌은 골대 밑으로 모이는 팀원들을 익숙하게 이끌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금방 갚아주면 된다며 정성구와 최동오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지만 정우성은 그제야 제 양보를 무시하고 밀려든 파도의 정체가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 번 정도 공을 튕기던 상대가 슛을 던졌다.

이명헌은 정우성을 후배 이상으로 본 적이 없다.

공은 백보드에 튕기는 것도 없이 매끄럽게 들어간다.

그리고 정우성은 이명헌의 후배로 남고 싶지 않았다.

곧이어 던진 두 번째 공이 림을 맞고 튕겨 나갔다. 신현철이 리바운드를 잡고, 속공으로 이어지는 공격에서 제일 늦은 건 포워드인 정우성이었다. 발이 빠른 만큼 늦어도 금방 치고 나왔지만 서 있어야 할 자리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에이스를 향했던 이명헌의 패스가 기어코 땅에 처박힌다. 그때까지도 팔짱을 끼고 벤치에 앉아있던 감독이 몸을 일으켰고, 정우성은 다음 파울에 코트 위에서 쫓겨날 것을 직감했다.

*

“정우성, 잠깐 따로 얘기 좀 해용.”

경기가 끝나면 이명헌은 곧바로 정우성에게 다가갔다. 경기 결과는 산왕의 승리였다. 스코어 역시 압도적이었다. 이명헌과 신현철을 기반으로 2학년들의 합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맞은 덕분이었다. 전반전에 벤치로 들어가서 후반전까지도 내내 앉아있어야 했던 정우성은 자신의 농구화 앞코만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 상황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복이 있는 에이스가 오늘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고, 그를 컨트롤 하는데 제법 재능을 보이는 주장이 감독과 3학년을 대신해서 귀찮은 잔소리를 한다.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상이었다. 불필요한 확인 사살이기도 했다.

체육관 구석 귀퉁이쯤에서 말을 꺼낼 줄 알았던 이명헌은 체육관을 나서서 개수대 근처까지 정우성을 끌고 갔다. 입 다물고 그의 등을 쫓던 정우성은 다른 후배였어도 이렇게 따로 나왔을 거냐는 물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이래 놓고서 다른 후배들이랑 똑같이 본다고 할 수 있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돌아올 대답을 알았다.

산왕은 미국으로 가는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었고, 이명헌은 주장이자 포인트가드로서 그때까지 모두의 최상을 유지하고 싶을 테니까.

“왜 불려왔는지도 모르는 표정이네용.”

체육관의 훈련 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야 이명헌이 뒷짐 진 채 입을 열었다. 다른 후배였어도 훈련 소리가 대화에 방해된다 느끼면 여기까지 나와서 이야기할 거라는 뜻이었다. 한 번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세상은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하게 보였다. 정우성이 급하게 입 안쪽 여린 살을 씹었다. 자칫하다간 턱이 떨릴 것 같아서였다.

“원정 경기 때문에 들뜬 건 알겠는데, 벌써부터 국내 시합을 이렇게 하면 곤란해용.”

“미국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더 큰일이고용.”

반항을 담아 말하면 이명헌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최근에 정신 팔고 다녔던 거, 감독님이나 선배들이 왜 봐줬다고 생각해용.”

“…….”

“그래도 네가 농구는 제대로 했으니까.”

속에 있던 숨을 토해낸 이명헌은 각 잡힌 뒷짐을 유지하는 대신에 팔짱을 꼈다. 정우성은 이 패턴을 알았다. 이명헌은 주장이나 선배로서 말하기보다도 사람 대 사람으로 말할 때 저런 자세를 했다. 그때까지도 고집스럽게 입을 닫고 있으면 그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쉬었다. 고민이나 망설임이 아닌 귀찮음의 한숨이었다. 살을 깨무는 걸로는 도저히 안 돼서 다음에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짧게 정돈된 손톱은 공과 수천 번 접촉하며 맨들맨들해진 손바닥을 뚫기는 무리였지만 그런 각오라도 필요했다.

“연인이 생긴 건 축하해.”

각오가 없이는 어떤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근데 이렇게까지 감정 조절 못 하고 코트 위까지 끌고 오면,”

“형이 준 거잖아요.”

사실, 각오가 있어도 어떤 건 참기가 어려웠다.

“형이 준 편지였잖아요.”

이명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가장 불필요한 말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정우성이 해야 하는 건 무례하게 군 부분을 사과하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반성이었다. 그게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는 유일한 말이었다. 되돌린다는 표현도 조금은 우스웠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형은 그렇게 당연하게 시작했다면서요…….”

그래서 정우성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자신과 이명헌 사이에 있는 일상이니 평범이니 당연한 것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다 바꿔버리고 싶어서. 미간을 찌푸린 이명헌이 다음에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잠깐만용,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형이 저한테!”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이명헌을 마주 본 그 순간이었다. 성대에서 곧바로 넘어와야 할 목소리가 어디선가 막혔다. 이명헌은 정말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지, 상황 자체를 따라오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너머로 어째서인지 최동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듯 들렸다. 사실 편지도 처음엔 명헌이가 받은 건 줄 알았다. 1학년부터 경기 뛰어서 그런지 걔가 그래 보여도 은근히 팬이 많거든. 이번 선발 대회에서도 활약 많이 했고……. 마침내 정우성은 그게 어떤 불길한 예감의 다른 형태라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그 편지는,

“내가 그날 너한테 팬 선물 전해준 건 맞는데.”

이명헌이 쓰지 않은 것을 넘어서─

“거기에 편지가 있었다고?”

눈가까지 찌푸리고 있던 이명헌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술을 작게 열고 숨을 들이켰다.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난 얼굴이었다. 다음에 새어 나오는 건 탄식이었다. 드디어 맥락을 짚고 모든 걸 이해한 사람의 모습에 정우성은 뒤도 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원온원 승부에서 첫 도망이었다. 잠깐만, 정우성! 같은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면 거기서 대체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당장 이명헌이 쓴 게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한계인데, 그것조차도 내게 왔던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 편지에 들어갈 이름이 이명헌이 아니라는 게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데, 사실은 정우성이 편지에서 빠져야 하는 이름이었다면.

어차피 둘 다 이름에 별(星)도 없는데, 이딴 편지 같은 거 그냥 지학에다가 갖다 버리고 싶다. 하루에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정우성은 자신을 쫓는 이명헌에도 다리를 멈추지 않고 도망쳤다.

어떤 불가항력이었다.

*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이명헌이 찾아온 건 그날 밤이었다.

한밤중에 울린 노크 소리에 문을 열면 그곳에 이명헌이 서 있었다. 재빨리 문을 닫으려고 하자 이명헌이 먼저 발을 끼워 넣었다. 여기선 이야기 못 하고, 잠깐 나와용. 표정은 언제나 평소와 같았다. 정우성은 결국 아무것도 못 바꿨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생각 정리를 다 끝내고 온 것 같았다.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나 이명헌은 물러선다는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훈련이고 뭐고 냅다 도망쳐서 방에 틀어박혔던 걸 그가 다 커버쳤을 거라 생각하면 선택지가 있어도 고르지 못하는 게 맞긴 했다.

“길게 말 안 할게. 편지 섞였다.”

기숙사 건물을 나오자마자 이명헌이 말했다. 그는 말꼬리를 붙이지 않았을 때 자신의 말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지나칠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우성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겨울에 접어든 만큼 날씨는 트레이닝 저지 하나로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 건데 잘못 들어갔어. 네 마음에 든 것 같은데, 나도 찾고 있던 거라 미안하다.”

“형이… 쓴 거예요, 받은 거예요?”

정우성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명헌이 편지를 찾고 있었다는 말이 자꾸 귓가에서 맴돌았다. 찬바람보다도 그게 더 귀를 아프게 했다.

“받은 거용.”

이명헌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흙이 덮인 시멘트 바닥을 내려보던 정우성이 급히 얼굴 근육을 끌어당겼다. 입가에서 새어나온 하얀 숨이 앞을 뿌옇게 만들었다가 금방 사라진다.

“와악!! 역시 그렇죠? 어쩐지 저한테 오기에는 문장들이 되게 진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나 되게 티 내고 다녔는데, 상대분에게도 민폐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네.”

있는 힘껏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어떤 신호라도 됐는지 눈 밑이 시큰시큰했다. 저가 평균 이상으로 눈물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랬기에 더더욱 울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애써 오늘 낮의 일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뒤늦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리려는 시도였다.

“내용 읽어봤어요? 되게 정성이 담겨 있는 편지였죠. 농구에 대해서도 잘 아는 거 같고, 글씨체도 단정하고, 정말 오래, 상대를 지켜보고 쓴 것 같고, 저도 닳도록 읽었거든요. 눈 감고도 끝까지 쓸 수 있을 걸요? 형도 저한테 편지 받으러 올 정도면 그 사람이 되게 마음에 드는, 드는 거겠죠.”

“정우성, 편지용.”

횡설수설 말하면 이명헌이 간단하게 정리했다. 정우성의 입안에서 말이 헤맨다. 아, 네, 그 편지요. 편지, 알죠. 저 제대로 챙겨 왔어요. 형이 나한테 주기만 했던 남색 편지지. 근데 내 것도 아니라고 하길래 되게 조심스럽게 갖고 왔는데요, 그거 있잖아요.

“그냥 제가 가지면 안 돼요?”

“그 편지가 마음에 든 건 알겠는데,”

“아뇨, 이제 싫어요.”

“그럼 내놔용.”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대답했다. 정우성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애 같이 굴려는 건 아니었다. 건방지게 굴려는 것도 아니다. 정우성의 바람은 최초로 돌아가 있었다. 그에게 더 미움받고 싶지 않다. 나랑 같은 속도로 뛸 줄 아는 이명헌에게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편지를 준다면, 그리고 이명헌이 편지를 읽는다면 그 뒤에 어떻게 될 지는 굳이 그려보지 않아도 뻔했다.

사랑하게 될 거다. 정우성은 이제 첫 문장을 봐도 설레지가 않는데, 이명헌은 설렐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봐준 사람을 사랑하고 보답하려 하겠지. 설령 상대가 이명헌의 농구가 변함없길 바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완고함과 소박함이 이명헌과 잘 어울린다는 건 지긋지긋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답장을 써줄 수도 있었다. 정우성은 모르는 이명헌의 진짜 필체로. 그리고 나는 그냥, 어쩌다가 편지로 벌어진 소동에 얽힌 후배로 남고. 나중에 가서는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웃긴 헤프닝으로 취급할 수도 있었다. 뭉툭한 손톱으로 손바닥을 짓누르고,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입안을 깨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이상형이면 지금부터 책 읽을게요.”

그래서 정우성은 발악했다.

“편지로 고백하면 받아줘요? 그럼 나도 가서 편지지 사 올게요.”

“정우성.”

이명헌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물든다.

“이 사람 만나지 마요.”

한계였다.

“좋아해요.”

정우성의 힘으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내가 형 좋아해요. 그 불가항력에 패배한 직후에는 울음이 터졌다. 한 번 입밖으로 내뱉고 나니 뒤늦은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 편지가 좋았던 건 그 뒤에 이명헌이 있어서였기 때문이다. 멋대로 문장을 곱씹고 가슴에 품었던 건 그게 이명헌이 쓴 거라 믿어서였다. 이명헌이 좋아서 그 문장이 좋았다. 이명헌이 좋아서 그런 문장까지 좋았다. 그가 쓴 게 아니라면 뭘 가져와도 싫었다.

“…좋은 사람이라며.”

한참을 훌쩍이고 있으면 이명헌이 말했다.

“그니까 다시 만나지도 말라고요. 자신 없으니까. 나 지는 거 싫어해요. 형은 알잖아요.”

건방지게 말했지만 어조는 애원에 가까웠다. 못 이길까 무서웠다. 넘지 못할 벽 앞에서는 웃음이 나와야 했는데,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웃는 것도 내가 이겨낼 거란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구나. 뭘 해도 뚫지 못할 것 같은 게 앞에 있을 때는 미친 듯이 서럽구나. 처음 알았다. 근데 그것마저도 알려준 사람은 이명헌이었다.

그것까지 알고 나면 정말로 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서야 제대로 단둘이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시작하자마자 쫓겨나긴 싫었다. 그런데 이런 시선으로 이명헌을 보는 사람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코트에서 승부를 낼 수는 없나. 그게 진짜 정정당당한 거 아닌가. 그럼 안 질 자신이 있는데. 있다 못해 차고 흘러넘치는데. 하필 편지는 코트 밖에서 온 볼이라서, 정우성이 할 수 있는 건 미국 원정 경기를 앞두고 우는 에이스로서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다.

내가 잘하는 게 우는 거라니, 진짜 최악이다. 자기 자신이 애처럼 느껴져서 싫을 수가 있나. 근데 만약 이걸 잘해서 이명헌이 가지 않는다면 사흘은 아무것도 안 먹고 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내놔용.”

마침내 이명헌이 입을 열었다. 한 손은 허리에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눈가를 짚고 있었다. 당장 그에게 더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정우성은 순순히 주머니에서 남색 편지지를 꺼냈다. 아래위로 두 번 접혀서 작은 정사각형이 된 그것은 얼핏 보기엔 쪽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명헌이 손을 뻗어 건네진 것을 잡고, 제쪽으로 빼면 그만큼 상대의 손이 딸려오다가 덜컥 멈췄다. 정우성이 편지를 놓지 않은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올려다보면 뺨에 눈물이 말라붙을 새도 없이 울고 있는 정우성이 고집스러울 만큼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성.”

엄하게 말해도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체력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이명헌이었으나 힘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게 저보다 6cm가 더 큰데다가 아직도 성장 중인 팀 내 에이스, 그것도 풀업 점퍼가 특기인 포워드의 팔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두 손을 써서 잡아 빼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팔뚝 그 어딘가에 힘을 주고 당기는 그다음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편지가 양쪽으로 찢어졌다.

“미, 미안해요!!”

고집을 부리는 와중에도 거기까지는 예상 못했는지, 화들짝 놀란 정우성이 잡고 있던 것을 놓았다. 아차 하는 표정을 무시하고 마침내 손에 들어온 편지를 읽었다. 크게 찢긴 걸 빼면 편지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만 귀퉁이에 적힌 글자들은 해져있었고,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곳에 적힌 문장은 그냥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묘한 습기까지 배어있는 편지는 특별할 것 하나 없었다. 쟤는 이게 뭐가 그렇게 소중해서 한시도 놓지 않고 들고 있었을까. 반쯤 갈라져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편지 너머에는 뒤늦게 얼굴을 닦는 정우성이 있었다. 이명헌은 찢어진 편지를 힘들게 해독하는 대신에 그것을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대로 읽지도 않는 모습에 정우성의 눈이 커진다.

“형, 그거,”

“닳도록 읽었다면서.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하는데용.”

“진짜 저보고 말하라고요?”

“네가 찢었잖아용.”

고민도 없이 말하면 정우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입술을 열었다. 제가 지은 죄를 아는 얼굴이었다.

“…림을 쫓아서 하늘로 뛰는 사람이 별을 사랑하게 되는 건,”

“취소. 듣기 거북해용.”

이명헌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서 고개를 돌렸다.

“형 지금 제가 말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설마하니 중간에 끊길 줄 몰랐던 정우성이 되려 목소리를 냈다. 금방 또 눈 밑이 그렁그렁해진다. 이명헌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거나 달래주는 대신에 팔짱을 꼈다.

“내가 쓴 거야.”

그래서 직접 듣기 거북해용.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나 어조 같은 건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평화로워서, 정우성은 무심코 그렇구나 넘길 뻔했다.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세 번 정도 느리게 눈을 깜빡인 다음이었다. 다음에는 소리 지르듯 내질렀다.

“형이 받은 거라면서요!!!”

“뻥인데용.”

“…그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형 지금 이거 장난 같아서 이러는 거죠. 제가 너무 애같이 구니까, 저 달래려고, 나 그만 울게 하려고, 미국 가서 잘해야 하니까 지금 농담이라고 이러는 거죠. 제가 이렇게 울고 있어도 저 지금 엄청 진지해요, 형. 장난으로 하는 거 하나도 없다고요. 우다다 쏟아져 나오는 불신에 이명헌이 한숨 쉬었다. 애 같은 걸 스스로 알긴 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신용이 정우성이 못 믿을 급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지금 급하게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아예 어깨를 붙잡아온다. 손아귀 힘이 억셌다. 어떤 변명도, 반항도, 도망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은 너랑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 정우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일찍이 포기한 이명헌이 말했다. 세 번째 문장이었다.

“적고 보니까 되게 흔하게 쓰이더라고용.”

“그럼, 그러면, 그러면…, 아까 낮에는 왜.”

“그날 너한테 선물 좀 전해 달라고 부탁받긴 했어. 커다란 쇼핑백 같은 거용.”

이윽고 정우성은 쇼핑백처럼 되어있던 선물 틈바구니에 끼어있던 편지 봉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때 이명헌의 왼손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위치상 보이지 않기도 했고, 당장 오른손에 들고 있는 편지 봉투가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와서였는데.

“어쩌다 같이 들어간 것 같은데, 진짜로 줄 생각은 없었어용.”

“잠깐만, 그러면 여태까지 형이 쓴 편지인 줄도 몰랐다고요? 내가 그렇게 들고 다녔는데?!”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해줬잖아용.”

정우성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발신인 이명헌이 확실해지자 이제는 그것대로 편지가 마음에 안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명헌은 제 인생에 끼어들 생각이 요만큼도 없던 것이다.

“그렇게 포기할 거면 편지는 왜 썼어요.”

“몸이 먼저 움직이던데.”

단순하다 못해 시원한 대답이었다. 어떤 고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편지라면 진짜 전해줘도 안 읽을 거라 생각했고.”

“저 편지는 꼬박꼬박 다 읽어요. 너무 큰 건 집에 보내놓고 읽고요.”

“그건 좀 의외네용.”

“형이 팬들한테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예요. 코를 훌쩍이던 정우성이 덧붙였다. 처음으로 할 말이 없어진 이명헌이 입을 닫고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사랑이 아니어도 감정을 주고받는 데 있어서 승리와 패배를 붙일 줄 알았다. 정우성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근데 아니었구나. 승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하나 안심은 되네용.”

“뭔, 뭔데요.”

아직도 이명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정우성이 불안해하며 물었다.

“미국으로 떠나도 편지로 붙잡고 있으면 되겠구나.”

“…네?”

“만나자는 말인데용.”

저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이명헌이 대답했다. 지구는 둥글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쉽게요? 아니, 잠깐만요. 형, 제가 미국 갈 거라고 확신해요?”

“너니까 당연히 가겠지.”

기세 좋게 묻던 정우성이 주춤했다. 이런 순간에도 당연하다고 제게 꽂히는 신뢰가 좋아서였다. 이번 원정 경기에 저뿐만 아니라 부모님까지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거기에 이명헌까지 더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코끝이 간지러운 기분도 잠깐이었다. 정말로 원정에서 좋은 결과가 있다면, 그러면, 그다음은.

“…미국 가면 연락 힘든데, 그러다 헤어지면요.”

“헤어지는 거겠지.”

“아니! 그렇다고 그게 바로 나오면 안 되죠!! 형 아까부터 왜 이렇게 쉽게 쉽게 대답해요? 혹시 제가 그렇게 간단해요?”

또 한 번 시원하게 나온 대답에 정우성이 펄쩍 뛰었다. 만나자는 말이야 솔직히 간단하게 나올 수 있다고 해도 헤어지자는 말만큼은 무거워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만나자고 한 지 5분도 안 돼서 말이다. 물론 정우성은 할 수만 있다면 헤어지자는 말에 돌덩이랑 같이 자물쇠를 매달아 놓고 바다 어딘가에 빠트릴 생각이었다. 영영 떠오르지 못하도록 어디다가 봉인해둘 생각이었는데, 그 돌덩이가 이명헌인 기분이었다.

원래 읽히는 게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어려울 수가 있나. 그의 애정이 다 보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다른 의미로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양손으로 머리를 짚었다가 파울에 항의하듯 크게 벌리는 등 정신 사납게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이명헌이 고요하게 눈을 맞춰온다.

“우성, 내 편지가 간단했어?”

정우성이 움찔했다. 사랑하지 않는 이상 쓸 수 없는 문장들. 그걸 여기서 꺼내오는 건 반칙이었다.

“……아뇨.”

“그런 거지.”

그럼에도 파울을 저지른 그에게 순순히 공을 넘기면 이명헌은 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편지 형이 쓴 거 아니죠.”

도저히 편지를 쓴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순함과 간단명료함에 정우성이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완전히 토라진 애 같은 말투에 이명헌이 옅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삐쭉 올라가 있던 아랫입술에 힘이 풀리는 건 한순간이다. 이제 귀찮아하지 않는구나. 이명헌은 제가 느낀 애틋함을, 꾹꾹 눌러서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울컥함은 그 뒤에 따라왔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보이는 그대로야.”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널 봤는데.”

나는 그렇게 당연하게 시작했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깔끔해서 어느 날은 오히려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문장이 그제서야 이명헌과 겹쳐진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농구로 생각해. 눈앞에 볼을 쫓는 게 다인 것처럼, 그냥 그게 전부인 거야.”

이래도 어렵나? 그러길래 내가 평소에 집중 좀 하라고 했잖아용.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가까스로 다시금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인 거라고, 그냥 그게 다라고 덧없게 말했지만 그런 게 아님을 알아서였다. 이명헌이 그런 말을 할수록 편지의 문장들이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불가항력이 좋다고 했지. 나로 만들어진 단어 같아서. 그리고 싫어졌다고 했지. 너무 흔해서. 그게 눈앞에 보이는 걸 그대로 옮겨적었을 뿐이라면, 당신은 대체 나를, 얼마나.

“못 믿겠으면 편지로 써줄게.”

“형, 좋아해요.”

“…….”

“좋아해요, 형.”

“그래, 나도.”

이제 슬슬 들어가자, 춥다. 간단하게 챙겨입은 저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이명헌이 앞서 걸었다. 그와 달리 마음을 글로 적는 재주 같은 건 없었던 정우성은 그의 옆에 서서 몇 번씩이고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좋아해요, 진짜 좋아해요, 좋아해, 다르게 어떻게 말하지? 사랑한다고 말할까요? 그러면 조용히 듣고 있던 이명헌은 시끄러우니 입을 다물라고 그제서야 대답했다. 아직은 좋아한다는 말이 듣기 좋다고 덧붙이는 건 다음이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을 잘못 썼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그건 당신에게 수식되어야 하는 말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볼을 쫓아가듯 살아가는 당신은 어쩌면 별보다도 더…….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