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호열백호│사랑을 흩뿌리는 로켓이 되어

나는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일생일대의 고백이 차여본 적 있는가?

강백호는 많다. 아주 무지하게 많다. 그러면서 별꼴도 다 당해봤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로 차였을 때는 솔직히 백호 군단이고 뭐고 자시고 눈물을 짤 뻔했다. 아니다, 백호 군단이 있는데도 눈물을 짜낸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무지하게 많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우연한 만남으로 새 사랑을 찾고, 고백할 때마다 손이 벌벌 떨리는 강백호지만 그런 만큼 거절 멘트는 나름 그럭저럭 익숙하다는 뜻이다.

“…뭐 착각한 거 같다, 백호야.”

그런데 이거는 처음이다.

“네가 날 왜 좋아해.”

이거는 진짜 처음이었다.

“나는 농구도 못 하는데.”

이런 거 처음이라고, 양호열.

*

체육관 바닥에 옆으로 돌아누운 강백호는 바닥에 기대지 않은 쪽 손으로 농구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런 순간에도 볼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날이 저물고 나무 바닥에서는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기어코 석 달 만에 재활까지 대성공해버린 농구 천재의 귀환을 알릴 복귀 경기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왔던 양호열에게 고백한 지는 딱 일주일이 지나있었고.

갑자기 왜 그랬냐고 물으면 강백호도 할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덜컥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건 아니었다. 웃는 얼굴을 본다고 꽃잎이 휘날리는 듯한 착시가 보인 것도 아니다. 옆에 선다고 뼛속 구석구석까지 간지러웠던 것도 아니고, 어깨를 부딪치면서 대화하다 보면 말을 더듬게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백할 때는 더듬었던 것도 같긴 한데, 아무튼.

단지 어느 날부턴가 다르게 느껴졌다. 재활 센터에서 나오자마자 하루도 빼먹지 않고 코트로 나와 슛을 쏘고 드리블을 연습하는 제 곁에, 하루도 빼먹지 않고 붙어오는 그의 순간들이. 모양 빠지는 드리블 연습을 몇 시간씩 하고 있어도 천재가 맞네, 실력이 하나도 안 죽었는데? 같은 말을 해주는 그의 목소리가. 당연하게 옆을 지키고, 등을 밀어주고, 앞에서 기다리며, 제가 서야 할 곳을 내어주는 양호열이, 소중했다.

처음엔 주머니에 넣어 놓고 잊은 뜨끈한 손난로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차갑게 식는 일이 없어서, 다음에는 아무리 만져도 화상을 입지 않는 작은 불꽃처럼 여겼다. 농구공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히기 시작한 두 손 위로 조심히 저를 밝히는 작은 온기를 올려놓고서, 코앞에서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 강백호는 생각했다. 어라, 이거, 정말, 너무, 되게, 진짜…….

…그래서,

그래서 말했을 뿐이야.

호열아, 있잖냐. 진짜 만약에, 정말 만약에……,

강백호의 생각 회로는 단순하다. 좋아한다면 말한다. 숨기지 않는다. 왜 그러냐고? 반대로 묻고 싶다. 왜 숨기냐고. 왜 말하지 않느냐고. 물론 참지 않은 결과는 오십 번의 퇴짜였지만 그럼에도 강백호는 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좋으면 좋다는 걸 참지 않는다. 따지자면 둘 다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의식하기 전부터 천천히 바뀌었던 감정인만큼 하루아침에 양호열의 앞에서 긴장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번 보면 되는 얼굴 괜히 두 번, 세 번 보고, 림에 집중하기 바쁠 때 언제 오나 체육관 문을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보다 보면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내, 내가 너… 조,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할 거냐.

단 둘뿐인 공원의 농구 코트에서였다. 아르바이트에서 잘렸다던 양호열은 그날도 제 옆에 있었다. 팔을 뒤로 해 상체에 힘을 뺄 수 있도록 지지대처럼 세우고 있던 양호열의 눈이 커지는 것도 잠깐이었다. 강백호, 너 또 내기에서 졌구나!! 양호열은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거기다 농담 같은 게 아니라고 대답하면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처음부터 웃겨서 웃은 게 아니라는 것처럼. 자세까지 바로한 다음에 꺼낸 건 소연이의 이름이었다. 우리 몰래 차였어? 그래서 그래? 강백호는 그것도 부정했다. 지낸 시간이 있는데, 거 좀 좋아하면 안 되냐? 차마 시선은 마주치지 못하고 툴툴거리면 양호열이 말했다.

…뭐 착각한 거 같다, 백호야.

누워있던 강백호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널 친구 이상으로 본 적 없다는 말이면 침 세 번 퉤퉤퉤 딱 뱉고 없던 일로 하자고 웃기라도 하지, 양호열은 양손을 힘없이 늘어트린 채로 말했다. 농구도 안 하는 나를, 네가 왜 좋아하냐고. 대답의 모양새는 분명 거절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 담긴 건 자책이었다. 강백호가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양호열이 자기 자신을 깎아내린다. 그게 말이 되나? 심지어 농구를 안 해서란다. 그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근데 양호열은 되게 했다.

이건 다 못 들은 걸로 할게. 내일부터는 다시 친구로 지내자. 할 수 있잖아, 천재니까.

천재라는 건 그런 데다 붙이는 게 아니라고 버럭버럭하면 양호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래도 오늘 일은 내 말대로 하는 거다. 그렇게 일주일. 강백호는 한 번도 양호열과 대화하지 못했다.

학교를 안 나오는 건 아닌데, 성실하게 잘 다니는 것도 아닌 녀석이 작정하고 돌아다니니 찾기가 더럽게 어려웠다. 제자리에 꼬박꼬박 돌아와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건 의외로 수업 시간뿐이었다. 붙잡을 타이밍을 재고 있으면 선생들의 정신 공격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면 이미 하교 시간이었다. 운 좋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깨도 양호열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같은 반 나머지 백호 군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척했다. 끼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죽어라 연습해도 체육관 앞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일주일. 새롭게 주장이 된 송태섭이 신경 써오고, 정대만이 뭐라도 도우려 하고, 여우 자식이 시비를 걸고, 한나 선배가 걱정한 일주일. 대입 전까지는 코트의 금도 밟지 않겠다고 선언한 고릴라가 정신 차리라고 혼내고, 안경 선배가 무슨 고민 있냐고 물어온 일주일. 한 손으로 든 농구공을 무작정 벽에 던졌다. 힘껏 던진 만큼 세게 튕겨 나온 농구공이 금방 힘없이 바닥에 구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가 싫다고 하지 그랬냐.

코를 훌쩍였다. 유독 밤공기가 차가운 탓이었다.

*

양호열이 사라진 일상은 재미가 하나씩 사라졌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뜨뜻하고 식지도 않는 손난로를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강백호는 더 이상 교실에서 양호열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가 앞에 있는 자리 배치상 양호열은 보이지 않았고, 선생의 간교한 계략을 가까스로 버티고 뒤돌면 이미 떠난 뒤였다. 어떻게 그렇게 타이밍을 알고 쏙쏙 빠져나가는지. 눈에 이쑤시개를 끼워서라도 수업을 버티려고 하면 보다 못한 노구식이 말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걔 수업 제낀 지 한참 됐어.

옥상 계단실 너머, 제일 뒤쪽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아 등을 깔고 누웠다. 옥상의 시멘트 바닥은 체육관의 나무 바닥과는 다른 느낌이다. 둘 다 평평하고 딱딱한 것은 똑같을 텐데도 시멘트 바닥은 묘하게 어깨가 결렸다. 중학교 시절까지 합치면 체육관 바닥 같은 것보다도 시멘트 바닥이 훨씬 익숙할 텐데 말이다. 아닌가, 제일 오래 뒹군 건 길거리 아스팔트 바닥인가. 그것도 시멘트를 깔아서 만드는 걸 생각하면 어쨌든 거기서 거기였다.

깍지 낀 양손을 뒤로해 베개처럼 받치고 있던 강백호가 홱 하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시멘트 바닥이든 길거리 아스팔트 바닥이든 항상 그 옆에 있던 건 양호열이었다. 그 시절 강백호는 제 인생에 양호열이 빠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사실 지금도 강백호는 양호열이 빠진 제 인생을 상상하지 못한다. 오십 번이나 차였으면서, 그 인연이 친구로 남은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뭘 믿고 고백했냐고?

그러게.

근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와도 괜찮았는데. 아, 여태까지는 옆에 호열이가 있었지 참. 호열이가 나 대신 알려주고, 말려주고 다 했었지. 그러다 미처 보지 못한 선을 넘어버리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따라 들어와 줬었는데. 믿은 거 하나 없이 감정만 들고 고백하는 와중에도 딱 그거 하나 믿었다. 누구의 감정이 어떻든 우리들의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다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라던, 네 말.

구기듯 웅크리고 있던 몸을 다시 대자로 쫙 펴서 누웠다. 사람 속도 모르고 맑게 갠 하늘에 괜히 심술이 나서 눈을 감았다. 근데 다른 거 아무리 생각해봐도 착각은 아닌 것 같은 게, 친구로 지내자는 말에도 막연하게 기뻤단 말이지. 그건 역시, 내가 너를,

“좋아해, 호열아.”

눈을 번쩍 뜬 강백호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뭐지? 내 입은 얌전히 있는데? 애초에 제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높고 고운 목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옥상의 계단실에 가로막힌 시야가 보였다. 옥상 위 고백. 전통이고 클래식이다. 알긴 아는데, 진짜 아는데, 진짜 나도 많이 써먹은 방식인데! 이렇게 지켜보는 건 하고 싶지 않았거든!!

“입학식 때부터 널 좋아했어.”

처음 듣는 목소리가, 더듬지도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계단실 뒤쪽 벽을 짚고 일어나던 강백호가 굳은 것처럼 멈춰섰다. 이 벽 너머에 그렇게 저를 피해 다니던 양호열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성과 본능이 저울에 올라간다. 그리고 올라가자마자 본능이 내려앉고 이성이 저 하늘 위로 튀어 오른다. 망설임 없이 벽에 기댄 강백호는 티 나지 않게 고개만 아주 살짝 뺐다. 강백호가 있는 쪽으로부터 등을 지고 서 있는 건 양호열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양호열의 뒤에 서보는 게 이번이 처음인 건가.

허리 옆에 딱 붙어 있던 손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 뒷머리가 깔끔하게 정돈된 뒷목을 쓸기 시작한다. 고민이 가득 담긴 손짓이다. 홀린 듯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가 단정한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했던 강백호가 후다닥 벽에 등을 붙였다. 야, 이거 진짜 착각이 아닌데?

“고마워.”

이어지는 양호열의 답은 짧다. 강백호는 거기서 그의 대답을 읽는다. 미간이 팍 찌푸려지고 아랫입술이 불퉁하게 튀어 나갔다. 그다음에는 이제 뭐라고 대답할래. 이번에도 어? 농구 같은 거 못 하는데 같은 소리 할 거냐? 그게 아니면 친구도 아닌 여자애한테 뭐라고 말할래? 한 번 들어나 보자. 곤경에 처한 양호열을 비웃어주려던 강백호의 입꼬리가 어느 지점에서 더 올라가지 못한다.

그게 아니면, 받아줄 수도, 있겠구나. 친구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귀여운 여자애 고백.

강백호가 고개를 세게 털었다. 받아줄 거면 저런 식으로 고맙다는 말은 안 한다. 그건 오십 번 넘게 차여본 강백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짧게 훅, 훅, 훅 숨을 내쉰 강백호가 다시 조심스럽게 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뺐다.

…그런데 호열이 자식, 키가 저렇게 컸었나. 아니 키야 당연히 제가 더 크지만, 어쩐지 이상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삐딱해지지 않는 자세도, 턱을 치켜드는 식으로 상대를 깔보지 않는 눈길도 전부 다. 그러고 보니까 쟤 여자 앞에서 어땠더라. 두 번 정도 눈을 깜빡이고 나면 마침내 눈앞에 있는 양호열이 강백호가 모르는 양호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강백호는 여자 앞에 있는 양호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순간 심장이 덜컥였다. 찬바람이 부는 착각이 드는 것도 같다. 그게 뼛속 구석구석을 이상하게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아닌가? 근육이 간지러운 건가?

“미안해.”

양호열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강백호는 그제야 제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휘유, 양호열 주제에 말이야. 천재를 쫄리게 하고 있어. 물론 겁먹었다는 건 절대 아닌데, 근데, 호열아, 너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

양호열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면서도 끝까지 울지는 않는 상대를 지켜보았다. 옥상에 마주 설 때부터 눈을 마주치지 못한 아이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양호열은 그 용기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제가 좋다고 진심으로 부딪혀오는 사람에게 할 말은 절대 아니었지만, 부러웠다. 결단을 내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고교 생활에, 후회 없이 살아갈 저 아이의 나날들이.

정직하게 밖에 내놓고 있던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슬슬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가 코끝을 차갑게 만든다. 이제 막 하교하기 시작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부터는 온갖 체육 특기생들의 시간이다. 유도부는 이미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으면 체육관에서는 농구공이 바닥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난간 너머에 옥상 전경을 보던 양호열이 이내 몸을 돌린다. 그리고 기겁한다. 체육관에서 제일 시끄럽게 이리저리 튈 붉은색 농구공이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탓이었다.

짧게 밀었던 머리는 길고 긴 재활과 함께 자연스레 자랐지만, 쓰다듬으면 여전히 까슬할 것 같았다. 아직 농구공이라 불러도 손색없다는 뜻이었다. 표정을 구길 대로 구긴 강백호는 계단실 문을 틀어막듯이 서 있었다. 이러면 은근슬쩍 흘러가듯 지나칠 수가 없다. 곤란한 일이다. 하기야 강백호가 일주일이면 많이 참은 거지. 슬슬 터질 때가 됐긴 했다.

구식이가 알려줬나, 용팔이일 수도 있겠다. 은근히 눈치가 빠른 그는 제 편을 드는 듯 무리의 이름이 백호 군단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김대남이 이 꼴을 강백호에게 보여주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양호열의 눈이 가늘어진다. 순박한 인상을 만들어내는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눈매는 좁아질 때도 눈웃음 짓는 것처럼 보이고는 했다.

옥상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 애랑 마주쳤는지, 뭔갈 듣기라도 한 건지, 묻는 대신에 언제나처럼 삐딱하게 자세를 잡았다.

“연습 안 갔어? 되게 오랜만에 보네.”

“너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양호열이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살짝 웃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상한 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양호열은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너한테 말하면 거짓말인 거 바로 알 거 아니냐. 우리가 붙어 다닌 시간이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 없어. 아까 그건 그냥 무안하지 말라고,”

“나는 왜 피했냐.”

“마음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서 피해 다녀준 거지. 조만간 다시 얼굴 보고 인사하려고 했어.”

“그때는 내일이라고 했잖아.”

“내가 필요했었나 보지, 뭐.”

“안 됐다고 하면 또 피해 다닐 거냐.”

“한 번만 좀,”

반사적으로 열린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강백호에게 도망치게 해달라고 빌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도 강백호는 도망치게 해주지 않는다. 왜 도망치고 싶은 거냐고 더 난처한 질문을 해올 뿐. 결국 양호열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강백호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다.

“난 남자야.”

“? 보면 알아.”

속에 있는 모든 걸 털어내듯 말하면 강백호는 단순 무식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게 만화 속 그림이었다면 그의 얼굴 옆에는 물음표 서너 개가 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 멍청한 얼굴을 계속 눈에 담아두는 대신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무슨 실험이야? 남자 좋아할 수 있는지 어떤지 알아보려고?”

“천재가 그런 걸 왜 하는데!”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 너 여태까지 남자 좋아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난간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었음에도 강백호의 표정이 그려진다. 미간을 구기지만 눈은 동그랗게 떴을 것이고, 아랫입술이 삐죽 오르지만 시비 걸 때처럼 턱까지 빠져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안감독의 작전을 듣거나 농구의 이론 설명을 들을 때면 강백호는 그런 얼굴을 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게 있을 때, 어려운 게 있을 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게 있을 때.

“나는 그냥,”

마침내 강백호가 답을 낸다.

“너라서 좋았던 건데……?”

마침내 양호열의 아랫입술이 강백호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말려들어 간다. 그제서야 질문의 의도를 읽어낸 강백호가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너 자꾸 천재의 마음을 멋대로 생각하는데!! 난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거기에 네가 농구를 잘하고 못하고 그런 건 없다고!!”

“틀려, 백호야.”

“애초에!!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 중에 농구를 잘하는 게 좋아서 좋아했던 사람 없었거든?!”

“있었어.”

“으, 응?”

아예 오른쪽 무릎은 그의 쪽으로 빼놓고 기세 좋게 떠들던 강백호가 굳었다.

“있었어, 너. 중학교 2학년 때, 3학년 선배가 농구 하는 거 보고 반해서 고백했었잖아.”

“너는 뭔, 무슨,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

“그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양호열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양호열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을까.”

강백호는 사랑도 싸움처럼 한다. 그리고 강백호는 싸움에 재능이 없다. 중학교 시절 그에게 얻어터진 양아치까지 갈 필요도 없이, 당장 백호 군단만 데려와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따져 묻겠지만, 정말이었다. 강백호는 싸움을 못 한다.

강백호가 잘하는 건 각목으로 등을 얻어맞아도 간지럽다는 듯 버티고 그 두 배 되는 힘으로 상대방의 코뼈를 뭉개는 일이다. 그게 싸움을 잘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키가 작은 탓에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 팔의 리치를 재고, 치고 빠지며 상대가 주먹을 내지를지 발로 찰지 움직임을 읽어야 했던 양호열이 보기에는 강백호는 싸움을 더럽게도 못 하는 놈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겠어.”

“네가 하는 거짓말은 내가 알, 테니까…?”

눈을 깜빡인 강백호는 직전에 양호열이 했던 변명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넌 대체 내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네 옆에 있었다고 생각해.”

“…친, 친구?”

“백호야, 제발.”

이 새끼 방금 씨발이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강백호는 그런 솔직한 감상을 드물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양호열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진 탓이었다. 양호열은 싸움을 잘했다.

“넌 나 때문에 잠을 설쳐본 적도 없잖아.”

무식한 강백호와 달리 싸움을 잘하는 양호열은 사랑은 싸움보다 더 비겁하게 했다.

“난 되게 많아. 넌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거 되게 많아.”

그래서 양호열은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넌 나랑 친구도 못 된다고 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살만했지? 조금 외로워도 버틸 만했지?”

떨리는 목소리 앞에서 강백호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난 아냐, 백호야. 거절한 고백에 일주일을 도망쳤어. 넌 사귀다 헤어지면 다시 친구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헤어지면 다신 너 못 봐. 그런 거 싫어. 친구로도 못 있게 되는 거 하기 싫어, 그런 건 하기 싫다, 백호야…….”

바지 주머니에 처박혀 있던 손이, 그 손등이 제 눈가를 꾹 짚었다. 비겁한데 도망치지도 못한 자의 최후였다. 추워지는 날씨에 따라 식어야 하는 손끝이 뜨겁기만 하다. 눈가의 열기가 옮겨붙은 탓이었다. 모두에게 공평해야 할 세상이 제게는 유독 불공평했다. 결단을 내려도, 말해도, 삼켜도, 모든 선택에 후회가 남는다.

양호열은 제 초라한 모습을 강백호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여기서 떠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걸로 대답을 남기고 간다면 끝내 받아들이겠지만, 그 끔찍한 기분을 평생 안고 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다고 변명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들을 생각을 하면 당장 등을 밀어서 쫓아내고 싶었는데,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빈다는데 양호열은 그 소원을 지금 빌었다. 그냥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이다음을 몰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계단실의 문이 열리거나, 누가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더듬거리는 강백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호열이 고개를 드는 건 그 때문이었다. 강백호는 조용히 있을 줄 모르는 놈인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그렇게 고개를 들어서 본 곳에는 기어코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완벽한 농구공이 서 있었다. 그때까지도 눈가를 시리게 만들었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얼굴이었다.

“…너 내 말 제대로 듣긴 했어?”

눈이 마주치고 다시 목소리를 내면 이번에는 강백호가 고개를 돌렸다. 교복 마이깃에 가려진 목덜미가 머리만큼이나 시뻘겠다. 아니, 제대로 들었거든. 진짜 제대로 들었거든. 근데 너….

“그렇게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내가 싫다고는 안 하는구나 싶어서…….”

“…….”

“…….”

“진지하게 안 들었지.”

“진지하게 들었거든!!! 근데, 호열이 네가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그냥, 좋던데…….”

가슴도 쪼끔, 시큰하는 거 같기도 했고. 검지로 코끝을 튕긴 강백호가 말했다. 킁, 코를 훌쩍이는 건 덤이었다. 양호열의 손등이 완전히 내려간다.

“네가 바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러니까 진짜 어이가 없다.”

완벽하게 바보 취급하는 목소리였다. 강백호의 얼굴에 힘이 들어간다. 놀리고, 화낸다. 상황만 보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똑같이 양호열처럼 주머니에 손을 쑤셔 박은 강백호는 이내 남은 거리를 마저 좁힌다. 터벅터벅 걷는 발소리에는 어떤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다.

오히려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제게 다가오는 모습에 양호열이 당황하며 도망치려 했다. 그리고 그걸 강백호가 막았다. 양호열의 어깨 위로 강백호가 팔을 걸었다. 직전까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기어코 다 잊은 건가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 지금 어깨 동무를 해올 수가 있나? 근데 강백호는 그걸 했다. 재활만 한 주제에 또 키까지 키워오며 무거워진 체중이 위에서부터 짓누른다.

“양호열, 여기서 우리가 안 헤어질 거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이냐?”

그리고 말한다. 무슨 작전을 내리는 것처럼 은밀하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자기만의 확신을 담아서.

“자, 집중해봐, 호열아. 네, 네가 그렇게 날 좋아하고, 어, 나도 너를, 꽤 많이, 정, 정말로… 좋아하는데…….”

“…….”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닐까.”

앞을 보며 말하던 강백호가 뺨을 긁적이다가, 눈을 맞춰온다.

“한 번만 해보자, 호열아.”

결국 양호열이 다시 얼굴을 짚었다. 야, 임마! 얼굴 가리지 말고!! 강백호가 큰 목소리를 낸다. 양호열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런 거에 다음이 있으면 안 돼, 멍청아. 그렇게라도 말해야 했는데. 신장 차이로 귀에 닿은 강백호의 가슴팍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크고, 선명하게, 그리고 빠르게.

아. 큰일 났다. 큰일났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고백을 내가 해야 했다. 나는 죽어도 너를 못 놓을 텐데. 네가 날 두고 코트로 달려가 버리든, 금방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리든 나는 못 놓을 텐데. 헤어지자고는 죽어도 못할 거,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를 강백호가 웃는다. 큰일 났다, 백호야. 나 진짜 큰일 났다…….

“양호열, 할 거지?”

해 볼 거지? 강백호가 웃으며 묻는다. 결국 양호열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려운 행복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