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꿈을 다시 꾼다면
에이스 달래기
두상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짧게 민 선수들의 구보 소리가 체육관을 울린다. 항상 맨 앞에서 대열을 이끌며 산왕의 구호를 외쳤던 이명헌은 체육관 문틀에 기대선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차기 주장으로 점찍어 놓은 2학년이 뛰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이명헌에게는 주장 일이 그랬다. 1학년으로 선발에 뽑혀 스타팅 가드가 된 그 날 그때부터 점 찍혀서 그랬는지 유독 길었던 것도 같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옆으로 신현철이 다가와 선다. 이명헌은 기척을 알아챘음에도 인사를 건네는 대신에 구보를 뛰는 농구부를 마저 지켜보았다. 신현철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농구부가 뛰고 있는 체육관을, 정확히는 구보를 뛰고 있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두 명으로 딱 맞아떨어져야 할 대열의 끝에는 낙오되는 1학년과 2학년을 이끌 김낙수 혼자서 뛰고 있었다. 세 명이 빠져있는 탓이었다. 그중 둘인 이명헌과 신현철은 대열에 끼어들어서 훈련에 참여하는 대신 체육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왕공고의 로고가 박힌 흰 티가 펄럭인다.
“정우성이, 미국 안 간댄다.”
마침내 팔짱 낀 신현철이 말했다. 대열에서 빠져있는 마지막 이름이었다.
“드디어 미쳤군용.”
이명헌이 듣자마자 대답했다.
여름의 전국 대회가 끝난 지 사흘이 되어가던 날이었다. 정우성의 출국까지는 딱 일주일이 남아있었다.
*
대학교와 연계된 미국 원정이 끝나고 정우성은 곧바로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가능성을 알아본 미국과 도전할 곳이 생긴 정우성 양쪽 모두가 적극적이었다. 산왕에서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누가 봐도 정우성을 위했던 미국 원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만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정우성의 재능을 매일 같이 옆에서 봐온 그들은 진심으로 정우성만 한 인재가 일본에 갇혀있는 것을 아쉬워했기에.
마침내 정우성이 기회를 잡은 날, 산왕의 모두는 자신이 기회를 잡은 것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줬다. 좋다 못해 학교 플랜카드에 내걸려서 자랑할만한 소식을 들고 온 정우성이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올해 초에 떠났어야 했을 비행기를 여름까지 잡아끈 건 정우성 본인이었다. 전국 대회만큼은 제대로 마무리 짓고 가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3학년 선배들에게 무패라는 기록을 선물해주겠다는 건방짐은 덤이었다. 그렇게 출전한 여름의 전국 대회에서 산왕공고는 2회전 탈락이라는 전대미문의 수치를 겪고 아키타현으로 돌아왔다. 상대는 가나가와현 북산고등학교. 전국 대회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던 곳이었다.
체육관 옆에 트인 길목으로 들어서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3학년이 되고 1학년과 2학년 앞에서는 못 할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이명헌과 신현철이 자주 찾게 되는 곳이었다. 신현철은 길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맞은 편에 있는 화단 벽돌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감독님이 뭐라고 했는데? 설마 우리가 달래야 하는 건가용?”
그 옆에 앉는 대신에 벽에 기대선 이명헌이 물었다.
“너한테 맡긴 거지. 네가 해왔던 거잖아, 에이스 멘탈 잡기.”
“싫어용. 안 할래용. 서러워서 울기만 하는 애는 달랠 줄 몰라용.”
이명헌은 일부러 과장스러울 정도로 경박하게 말했다. 무릎을 세워 팔을 올리고 있던 신현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 이거 좋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기에 들어갈 때면 자신만큼이나 침착해지는 놈이지만 코트 밖에서도 기분의 편차가 크지 않은 자신과 달리 신현철은 코트 밖에서는 솔직하고 당당했다.
“부모님이 직접 부탁하셨다.”
결국 이명헌이 입을 다물었다.
“그냥 고집이 아니야. 그 녀석 진심으로 이곳에 남을 생각이다.”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신현철은 고개를 드는 대신 이명헌의 발치를 바라봤다. 이명헌이 기대고 서 있는 시멘트벽에서는 사흘 전에 벽에 기대 주저앉던 정우성이 보였다. 왜 정우성이 남으려는지 1학년 때부터 봐온 둘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침묵은 잠깐이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이명헌이었다.
신현철은 그 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경기 중에 정우성이 지나치게 흥분했을 때 가라앉힐 수 있는 건 이명헌뿐이다. 마찬가지로 정우성이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에 빠져있을 때 끌어올리는 일 역시 이명헌만이 할 수 있었다. 코트에서 합을 맞춘 선수들에게만 허용되는 유대감이었다. 벽의 코너를 돌아 그늘 밖으로 몸을 빼던 이명헌이 걸음을 멈춰선 건 그때였다.
“뭐해? 따라와용.”
“아까 말했잖아. 주장인 네게 맡긴 거라고.”
당연하게 동행을 말하는 이명헌에게 신현철도 당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명헌은 태연하게 자신을 거절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졸려 보이기도 하고 깊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이 가늘어진다.
“그런 말로 빠져나가려는 거 다 아니까 웃기지 말고 따라와. 에이스 고집 꺾는 덴 원래 코브라 트위스트가 제격이에용.”
가만히 앉아있던 신현철이 움찔했다. 들켰나 싶은 표정도 잠시, 미국에 보내기 전에 암바를 걸 수 있다고 하니 몸이 먼저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또 체육관에 정우성을 보러온 여자애들이 몰렸다고 했나. 3년을 만난 해남을 속이고 지학을 속여도 3년을 맞춰온 제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시선을 위로 올려 뭔가 생각하는 듯싶던 이명헌은 아직도 고민이 남은 신현철에게 쐐기를 박기로 한다.
“같이 가주면 현필이 드리블 한 번 봐줄게용.”
“야, 너 그 말 꼭 지켜라.”
신현철이 벌떡 일어났다. 그니까 빨리 따라와용. 이명헌이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는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 길에 쓸리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뒤이어 신현필이 어디가 약하고 어느 부분에서 자존감이 낮은지, 코칭을 해줄 때는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지 같은 코멘트들이 줄줄 붙는다. 이명헌은 앞만 보고 걸었는데도 신현철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 신현필에게 유독 엄해 보여도 뒤에서는 항상 이런 식이다. 누구보다도 챙기고 신경 쓴다. 친동생이라는 각별함도 분명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챙겨야 할 후배는 모두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게 신현철이라는 놈이다.
줄의 맨 앞에서 주장인 자신이 부주장인 정성구와 함께 뛰면 신현철은 김낙수와 함께 맨 뒷줄에서 뛰었다. 신현철은 패배 후 10바퀴 뛰는 구보를 30바퀴 뛰라고 해도 묵묵히 뛰며 헛구역질하며 쓰러지고 싶어 하는 후배들을 챙기는 데 있어서 김낙수만큼이나 제격인 사람이었다. 포기하지 말고 더 뛰라면서 군기를 잡는 데도 딱 맞았고.
이러니 정우성을 달래는데 신현철을 두고 갈 수가. 감사하게도 정우성의 부모님이나 감독님은 저가 정우성을 잘 다룬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명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명헌은 정우성을 달래지 못한다. 그의 텐션을 조절하고 코트 위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게 판을 풀어나가며,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 줄 수 있는 선배는 되어줄 수 있어도, 그를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등을 굽혀서 진심으로 눈높이를 맞추는 형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명헌은 정우성을 달래는 데 신현철을 두고 갈 수 없다.
게다가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채찍과 당근은 한 세트라고.
*
고교 농구에 권태를 느끼면서도 지고 싶었던 적은 없다.
공을 잡고 림에 집어넣었던 그 순간부터 오직 승리만을 좇아 살았다. 아버지를 이긴 뒤로는 져본 적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지기 싫었는지. 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1점 차든 몇 점 차든 결국 남는 건 패배라는 글자뿐이라는 걸. 그 글자의 의미는 코트 위에 더는 설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걸.
2회전 탈락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정우성은 처음으로 농구 코트에서 쫓겨나는 기분을 느꼈다. 끝내 집중하지 못해 교체되는 일은 있었지만 경기장에서 멀어지는 버스의 좌석은 다시 코트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던 벤치와는 달랐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다.
덜컥, 잠가두었던 기숙사 문에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2층 침대를 등받이 삼아 기대앉아 있었던 정우성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보다도 문이 먼저 열렸다. 거기서 들어오는 건 어쩐지 예상했던 얼굴들이었다.
너 이 자식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화가 난 목소리치고는 퍽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신현철이 먼저 다가섰고, 뒤따라 들어온 이명헌이 문을 닫았다. 손에는 기숙사용 마스터키가 있었다. 표정에 변화라고는 조금도 없는 주제에 그는 수상할 정도로 웃어른들의 신임을 잘 샀다. 교내 성적이 우수해서만은 아니었다.
일어설 타이밍을 놓친 정우성은 평소처럼 신현철의 타박을 받아치거나 방관자를 고수하는 이명헌에게 SOS를 치는 대신에 입을 다물었다. 단체 훈련에 멋대로 빠진 저를 찾아온다면 그들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장은 제일 보고 싶지 않은 둘이었기 때문이다. 힘을 준 턱이 잘게 떨린다. 마찬가지로 힘을 주고 있던 눈가가 뜨거워진다.
아, 그 표정이다.
신현철과 이명헌은 동시에 생각했다.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면서용.”
그때와 달리 입을 연 이명헌은 정우성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서 말했다.
“여기서 지고 미국에서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때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정우성이 대답했다.
“갚아주고 갈 겁니다. 세 배로.”
“미국행이 그렇게 쉬운 줄 아냐? 이미 한 번 미룬 기회다. 두 번은 없어.”
할 겁니다. 정우성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승리를 자신할 때면 이상할 만큼 단단해지던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누군가에게 확신이 되어 주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전국에서 산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상대가 몇 없다면 전국에서 정우성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상대는 없다. 재미는 찰나에 불과할 뿐, 강한 상대를 만나 원온원에 불타도 끝에는 결국 뻔하다는 감상만이 남는다. 정우성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와서, 정우성은 패배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
“똑바로 구분해, 정우성. 지금 겁먹은 건 아닌가용?”
“이명헌.”
이명헌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현철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둘의 입장과 역할이 바뀌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한 번 지고 나니까 미국이 너무 멀어 보여서 겁먹은 거 아닌가용?”
“그런 거 아니에요.”
신현철의 제지에도 이명헌은 개의치 않았다. 덩달아 정우성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때와 달리 정우성의 앞에 서서 무릎 한쪽을 굽히고 허리까지 숙인 이명헌이 정우성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표정과 말투는 언제나처럼 덤덤했지만 목소리가 차가웠다.
냉정함은 이명헌을 수식하는 말 중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단어 중 하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침착함을 기반한다. 평소라면 제 뒤에 서서 방관하기를 택해야 할 이명헌이 먼저 움직이던 그 순간, 덩달아 몇 걸음 내디뎠던 신현철은 결국 그를 말리는 대신에 하고싶은 대로 두기를 택한다. 이명헌이 주장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정신 똑바로 차려. 미국을 거절하고 일본에 남는 게 고작 복수 때문이라니용.”
정우성은 패배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 농구의 고장인 미국이라면 모를까 더 할 게 없다고 생각한 고교 농구에서, 그것도 들어본 적도 없는 무명 팀에게 지는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딴 거, 너 없이도 할 수 있거든?”
그리고 그 오만한 자존심은 무심코 뜻하지 않은 이들의 자존심까지 짓눌러버리고는 한다. 이명헌이 정우성의 멱살을 쥐어 코앞까지 끌어왔다. 미간까지 찌푸리고 있는 이명헌은 진심으로 상대에게 화내고 있었다. 정우성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제 멱살을 잡은 이명헌의 손을 붙잡는다.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사소하고 볼품 없었다. 신현철은 끼어들기를 선택하는 대신에 팔짱 낀 채 격투기 없이도 뒤엉키려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길 거라고 확신했어요.”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코트가 아니라 신사에서요.”
“…….”
“내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필요한 경험을 달라고 기도했어요.”
끝에 가서는 발음이 흐려진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화내는 상대에게 지지 않고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정우성의 코끝이 움찔거린다. 선명하게 올라간 눈매가 파르르 떨리고, 결국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가 샜다.
정우성은 쉽게 울었다. 아픈 건 싫고, 원래 사람은 아프면 우는 게 당연한 거라면서 하다 하다 음식이 조금 맵기만 해도 눈물을 보였다. 그렇게 눈물을 짜낸 정우성은 눈을 벅벅 문지르고 몇 초 만에 평소로 돌아왔다. 정우성은 쉽게 우는데도, 정우성이 우는 날 아무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였다.
“선배들이랑 하는 마지막 농구에서 우승하고 싶었어요.”
마찬가지로 그날의 정우성을 지나치지 못했던 이명헌의 손에서 힘이 풀린다.
“그래서 진 내가 용서가 안 됩니다.”
코트로 다시 돌아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정우성의 멱살을 쥐었던 이명헌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그의 통곡이 시작된다. 신현철과 이명헌은 이 방에 자신들 뿐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심으로 서러워서 우는 어린 에이스의 처절함 같은 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음에도, 자신까지 비통해지는 기분을 낙수가, 성구가, 동오가, 산왕의 모두가 다시 느끼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신현철이 이명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느샌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온 이명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현철에게 자리를 비켰다.
“정우성.”
신현철이 불러도 정우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앞에서 자신을 달래려는 선배는, 형은, 누구보다도 함께 우승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신현철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우성.”
“…….”
군기를 잡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달래는 목소리에 우성이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었다. 예상했지만 울음으로 번진 얼굴은 엉망이었다. 농구부 창립 이래로 가장 잘생겼다던 빡빡이도 결국 패배 앞에서는 똑같았다.
“네가 있어서 지금의 산왕이 최강 중에서도 최강이 될 수 있었던 건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네가 그간 봐온 우리는 너 하나 없다고 약해질 만큼 볼품없는 팀이냐?”
“…….”
“고개 젓지 말고 말로 해, 자식아.”
“…아닙니다.”
잠긴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날 북산을 상대로 전력을 다한 건 너 혼자냐?”
“아닙니다.”
이번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전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기고 싶었던 건 너 혼자냐?”
“아닙니다.”
“그래, 그날은 모두가 이기고 싶어 했고, 모두가 진 날이다.”
정우성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명헌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패배 앞에서는 다 똑같았다. 이명헌도, 정우성도, 신현철도.
“그리고 네가 없어도 우리는 이기고 싶어 할 거고, 이길 거다. 그게 산왕이니까.”
그리고 산왕이었다. 신현철도, 정우성도, 이명헌도.
“그러니 다시는 주제넘게 너 혼자만의 패배라 생각하고, 짐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라.”
“하지만, 하지만… 제가 더 잘했더라면,”
“의미 없는 가정이네용.”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이명헌이 단번에 대답했다.
“후회돼요.”
“그게 널 성장시킬 거다.”
“패배가 궁금했지만 다신 겪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마음으로 계속 연습하면 되는 거예용.”
“두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괜찮은 거예요? 형들도 처음 겪는 패배면서…….”
정우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명헌과 신현철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으로. 코를 훌쩍이던 정우성이 또 3학년 둘이서만 아는 분위기를 읽어내기도 전에 머리 위로 강렬한 주먹이 내리꽂힌다. 신현철의 것이었다. 겨우 그쳐가던 눈물이 또 터진다.
“딱밤 갖고 울지 마!”
“선배는 이게 딱밤이에요?!”
“항상 우리를 이겨놓고 그런 말을 하는 게 괘씸해서 그런다.”
“너는 좀 치욕스럽게 지는 경험이 많이 필요해용.”
…저 위로 해주려고 온 거 아니었어요? 분위기 좀 풀리자마자 이래도 돼요?! 저 아직 아파요! 힘들다고요!! 맞은 부위를 감싸 쥔 정우성이 울먹이며 말했다.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다. 신현철의 뒤로 빠져, 마침내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 이명헌이 한숨을 쉬었다. 눈물을 짜내던 정우성이 입을 다물었다. 아닌 척해도 이명헌이 제 멱살을 잡아 왔던 일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탓이었다.
용용 같은 말버릇을 붙이고 있어도 실상은 딱딱한 사람이다. 머리로 알고 있는 일을 또 피부로 체험하고 싶진 않았다. 벽에 기대고 있던 이명헌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은 그의 등 뒤로 향한다. 각이 잡힌 뒷짐이었다.
“잘 들어용, 정우성. 현철이가 말했듯 우리는 너 없는 선발 대회에 나가서 우승할 거예용”
더 이상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울컥함이 밀려온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머리로 알다 못해 자신보다도 잘 알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정우성이 1학년으로 들어와 주전을 따내고 본격적으로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명헌은 제가 조금이라도 집중 못한다 싶으면 곧바로 감독에게 교체를 요청했다. 집중을 못 해도 팀에서 가장 높은 득점을 올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에이스라면 더 눈에 띄어야 해용. 그럭저럭 잘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넌. 그러니 이번에도 자신을 망설임 없이 미국으로 보내놓은 이명헌이 덧붙일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 가서 우리를 자랑해용”
“…네?”
“내가 있었던 팀이 이렇게 강하고 대단했다고, 가서 자랑하라고.”
정우성이 이해하기도 전에 신현철이 뒤이어 말했다. 어느샌가 아예 주저앉은 그 역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다. 승리를 자신하는 목소리는 단단하기만 했다. 마치 코트위에서 다른 선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듯이. 나를 기다리듯이.
미국에서 산왕이 자랑이 될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될 것이다. 되고야 말 것이다. 왜냐면, 산왕이니까. 정우성이 진다고 변하지 않는 산왕이다.
모든 산왕의 선수는 산왕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을 갖고 자랑삼는다. 무패의 역사가 만들어낸 자부심이었다. 그런 역사와 명문이라는 명예보다도 재밌는 농구를 바라고 산왕에 왔던 정우성은 비로소 자신이 산왕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너를 산왕의 자랑으로 삼을 거니까용.”
아, 정말로 여기서 더 울고 싶진 않았는데.
“저, 미국 갈게요.”
마침내 정우성이 입을 열었다.
“가서 많이 지고, 많이 배워서…… 많이 잘할게요.”
“문법이 엉망이군용.”
“너 이래서 걔네랑 콜은 맞추겠냐.”
놀리듯 말해도 정우성은 한 번 터진 울음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에 처절함은 없다. 마주 앉은 신현철은 사내자식이 그만 좀 울라며 일부러 거칠게 머리를 벅벅 쓰다듬는다. 하지 말라는 미약한 반항조차 울음에 섞인다. 이명헌은 이번에도 말리지 않는다. 투박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느껴질 손길에, 딱딱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모습에, 그렇게 자신들의 에이스에 대한 작별 인사를 담는다.
패배는 순간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너를 주저앉힐 수 없다. 우리의 자랑이었던 너를 꺾지 못한다. 설령 일어서지 못 해도 우리가 다시 잡아서 일으켜 세우면 그만이다. 그러니 잘 다녀와라, 정우성.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다는 약한 소리는 하지 말고. 우리들의 어린 에이스.
산왕의 자랑이여.
*
아이씨, 이거 되는 거 맞아? 제대로 한 거 맞냐, 낙수야?
응, 검색해서 나오는 대로 다 했어. 상대가 전화를 받으면 연결이 될 거야.
어, 켜졌다!!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이는 동시에 화면이 바뀐다. 그리 크지도 않은 컴퓨터 모니터에 수십 명이 달라붙는다. 묘하게 버벅거리는 화면이 켜지고 나면 정우성이 보였다. 등 뒤로는 개인 기숙사가 보였다. 아직 해가 한창인 이곳과는 그곳은 밤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야, 우성아!! 잘 지내냐!! 우성아!!! 우리 잘 보여?? 우성아! 미국은 어떠냐!! 거기 진짜 신현필이 깔렸냐?! 춥진 않아?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수십 개의 목소리가 섞이고 물린다. 화상 전화 연결을 위해 의자 앞에 앉아있던 낙수는 이미 깔려서 보이질 않았다. 카메라 위치를 다시 잡기라도 하는지, 묘하게 이상한 곳을 보던 정우성의 시선이 마침내 모니터 너머에 농구부원들과 맞고 나면 인사가 오간다. 또다시 목소리가 커진다. 그것을 진정시킨 건 부주장인 정성구였다.
“미국에 간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 머리야?”
3학년의 특권으로 겨우 앞자리를 차지한 최동오가 물었다. 미국으로 떠난 지 벌써 5개월을 채워가는데도 정우성의 머리는 여전히 두상이 뚜렷하게 보일 만큼 짧았다. 아, 이거요? 모니터를 가득 채운 그리운 얼굴들에 웃던 정우성이 머쓱하게 제 뒤통수를 긁었다.
“뭔가 계속 마음을 다 잡게 되는 느낌이라서요”
아, 뭔지 알아. 기합 들어가지. 그거. 뒤에서 누군가가 맞장구쳤다. 처음에 머리 밀 때는 진짜 싫었는데.
“그리고 계속 산왕에 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조용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거기서 언제 오냐고,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낸 건 또 누구였는지. 우성아아……. 사내놈들이 징그러운 줄도 모르고 이름을 늘리고 하나둘씩 울음을 터트린다. 아, 왜 울어요!! 미국에 와서 우는 버릇을 고쳤다는 정우성은 말과 달리 금방 눈가가 빨갰다. 그들을 달래는 건 겨우겨우 수십 명의 존 프레스에서 빠져나온 김낙수를 비롯한 3학년들이었다.
“자, 그래서요? 선발 대회는 어떻게 됐어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면 정우성도 목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물었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 지학이랑 해남이 완전 칼을 갈았다면서요. 설마하니 북산한테 또 진 건 아니죠? 거기서도 누구 하나 미국으로 온다던데. 코를 훌쩍이고 가까스로 울음을 진정시킨 그들이 멍하니 모니터 속 정우성을 보던 것도 잠깐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둘씩 자리를 비켰다. 마치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는 듯.
우리 진짜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킨 정성구가 덧붙였다. 네가 정말 보고 싶더라. 따라나선 최동오가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말을 마무리한 김낙수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선다. 단 하나만의 대답을 기다리던 정우성이 눈을 깜빡인다. 드디어 산왕공고의 주변이 보여지는 카메라로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두 사람이 잡힌다. 정우성의 얼굴이 밝아지고, 코끝이 붉어진다. 이명헌이 또 그러냐는 듯 웃었다. 신현철이 그 어깨 위로 팔을 걸었다.
“어떻게 됐냐고?”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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