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한나│좋아하는 게 나라서 미안
오해하는 송태섭
“한나는 부럽다, 그런 잘생긴 남친도 있고.”
자습은 선생님 방해 없이 잘 수 있는 시간 정도로 알고 있던 송태섭이 눈을 번쩍 떴다. 그다음에는 상반신을 벌떡 세우려는 걸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떠드는 목소리는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같은 농구부라서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잖아. 다른 목소리가 달래듯이 말했다. 송태섭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이거… 내 이야기인가? 내 이야기지? 솔직히 지금도 들리라고 말한 거잖아. 같은 반중에 내가 한나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 소문은 퍼지고 퍼져서 기어코 어렵게 사귄 타학교 연인들의 귀까지 들어가지 않았던가. 송태섭이 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송태섭이 이한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전교로 퍼지면 모를까, 둘이 사귄다는 소문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송태섭의 태도는 그녀를 체육관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오늘까지 똑같았다. 그럼에도 이런 소문이 도는 건, 혹시, 한나 쪽에서 뭔가가 달라진 게…….
“하긴, 중학교도 같은 학교였댔지.”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거친 소리와 함께 모두의 이목이 소문난 문제아에게 꽂힌다. 직전까지 침 흘리던 책에 얼굴까지 딱 붙인 탓에 활자가 옮겨붙은 뺨이 붉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았다. 거기에 큰 충격을 받고 있는 표정까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비웃는 놈은 없었다. 송태섭은 몰랐구나. 다 같이 그런 생각을 했을 뿐. 이야기의 또 다른 당사자였던 이한나는 반 회장으로서 잠시 선생님께 불려가 있었다.
“한나가 누구랑 사귄다고?”
시선은 책상 위 어딘가에 두고 있던 송태섭이 물었다. 멍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기세에 놀랐던 여학생들이 잠시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 한 명이 송태섭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정말로 몰랐냐는 듯.
“너네 농구부 1학년 루키.”
그중에서 잘생긴 애. 강백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서태웅.
*
체육관 바닥에 앉아있는 송태섭은 무릎을 세워, 다리 안쪽에 가둔 농구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방과 후 북산고 체육관은 농구부의 개인 연습으로 한창이다. 전국 대회의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덕분이었다. 결과는 3회전 탈락이었으나 최강을 꺾었던 순간은 모두의 안에서 강하게 남아있었다. 북산 같이 벤치가 준비되지 않은 팀에서 든든한 토대였던 3학년의 은퇴를 앞두고 누구도 투지를 잃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저 무리에 강백호가 빠진 건 큰 손실이었지만.
산왕전이 끝나고 북산의 리바운드와 두 번째 센터가 된 강백호는 재활 센터에 들어갔다. 등 부상 때문이었다.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채소연이 모두의 근황을 건네는 편지 한 장을 보내면 세 장의 답장을 보내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송태섭에게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겨울의 선발 대회가 시작하기 전에는 강백호가 이 체육관에 돌아올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 마치 청소년 국가대표 연습을 위해 떠난 서태웅이 겨울 전에는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송태섭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한나 남자친구 서태웅’이 그들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세 마디 만에 알았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체 왜 한나가 서태웅 같은 놈이랑 만나는 줄 알았냐고 추궁했더니, 한나가 뭔가 달라졌다지 않은가. 송태섭은 끽해야 서태웅이 여자한테 다정하게 구는 건 처음 봐서 그랬다는 말이나 예상하고 있었다. 바로 반박해줄 말도 있었다. 걔는 머리에 농구밖에 없는 놈이라서 농구부 매니저인 한나 말을 잘 듣고 있을 뿐이라고. 직접 보면 그렇게 다정하게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여자는 무슨 애초에 사람한테 다정한 놈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데 한나가 달라졌단다.
가장 먼저 물통을 챙겨주고, 남들 한 번 챙길 때 두 번 챙기고, 제일 먼저 말을 건넨단다. 코트와 멀리 떨어진 응원석에 앉아있는 그들이 발견한 변화였다.
“앞으로 팀을 이끌어갈 주장께서 그러고 있어도 돼?”
끊어서 숨을 쉬던 정대만이 옆에 앉아왔다. 채치수와 권준호가 떠난 와중에 유일하게 남은 3학년이었다. 3점 슛이나 볼 컨트롤 같은 중요한 감각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 주제에 심폐 지구력만큼은 아직도 복구 못한 그는 벌써부터 숨이 거칠었다. 등은 벽에 기댄 채 고개가 꺾일 정도로 물을 들이켜는 정대만을 보던 송태섭이 결국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선배.”
정대만은 대답 대신 눈동자만 굴렸다.
“저 위로가 필요해요.”
그리고 마시던 물을 그대로 뱉어내려다 참았다. 사레에 들렸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콜록거리는 와중에도 자기가 들은 걸 믿지 못한 정대만의 시선이 송태섭에게 고정됐다.
“네가 뭐, 뭐? 뭐가 필요하다고?”
“빨리 저보다 못난 거 세 가지만 말해주세요.”
평소라면 사람 놀리지 말라고 이쯤에서 목소리를 높이든 머리를 쥐어박든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건 송태섭의 얼굴 때문이었다.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항상 한쪽이 삐쭉 올라가 있던 눈썹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 체육관에 없는 것을 쫓는 것 같았다. 항상 깝죽거려도 속은 단단하게 꽉 차 있는 놈이라는 건 정대만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이가 저릴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단단함은 무너지지 않는다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표현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송태섭은 깊다. 어쩌면 초등학생 정도에 멈춰있는 키는 밑으로 자라고 있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리고 넓다. 마치 바다처럼.
“일단 순발력이 떨어지고 후배한테 맞춰줄 줄 모른다, 두 개는 제가 채워드렸거든요.”
아니? 취소.
“그니까 하나만요.”
기어코 원온원 뜨자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정대만이 다시 굳었다. 송태섭은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기껏 왁스와 드라이기로 꼼꼼하게 세웠을 머리가 망가지든 말든 상관 하지 않고. 산왕전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진짜 딱 하나면 되거든요. 재촉하는 목소리에 정대만이 급히 시선을 옮겼다.
“나, 나?”
“네, 선배요.”
키가 크고, 솔직히 좀 잘생겼고, 농구도 못 하지는 않고, 공부는… 나도 못 하지 참. 패션 센스는 내가 더 나은데, 사교성은 이 선배가 더 좋으려나. 송태섭은 정대만을 대신해서 그의 장점을 셌다. 키가 크고, 솔직히 좀 잘생겼고, 농구도 못 하지는 않고 아무튼 그런 정대만이 자신보다 못난 게 필요해서였다. 그런 송태섭의 생각을 모를 정대만이 쭈뼛거리기 시작한다. 물통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2, 2년 동안 농구 안 한 거…?”
“그냥 꺼져요, 진짜.”
그날 북산고의 개인 연습은 기어코 천 점 내기 원온원을 하려는 두 사람을 말리는 일로 마무리 되었다. 바보 같은 숫자 단위였지만 바보인 그들이라면 진짜 할 것 같았다. 비로소 채치수의 빈자리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북산고 농구부에서는 장신에 속하는 정대만과 도내 최상위 가드들과도 붙어서 지지 않았던 송태섭을 힘으로 말리는 건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싸움 아닌 싸움을 멈추는 건 마침내 북산고 감독과 매니저가 들어오면서였다. 안감독을 본 정대만이 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고, 이한나를 본 송태섭은.
*
사실은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한나가 서태웅에게 보인 태도가 달라졌다는 말에도 송태섭은 정말 괜찮았다. 아무튼 너희가 잘못 본 거라고 우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집을 피울 걸 알아서였을까? 최초로 송태섭이 들리게끔 말했던 애가 삐딱하게 턱을 괸 채로 입을 열었다. 근데 네가 신경 쓸 자격이나 있어?
여태까지 한나한테 고백도 안 한 건 너잖아.
제 방에 들어오는 동시에 매고 있던 더플백을 떨어트렸다. 노트와 펜 대신에 수건과 유니폼, 농구화 같은 게 들어있는 가방에서는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송태섭은 이불보에 그대로 눕는 대신에 평소에는 제대로 앉지도 않는 책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씻지도 않고 자는 곳에 눕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언제 꺼내놓은 건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리걸 패드에 머리를 박았다. 모든 게 최악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농구 중에 가장 엉망이었던 드리블이, 시합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하는 주장이, 기어코 교체돼서도 선수 컨디션을 체크하러 온 매니저를 피해 다니는 내가, 여태까지 이한나한테 고백 비스무리한 건 조금도 못 한 송태섭이.
…진짜로 서태웅이 나을지도. 둘이 진짜 사귀면 한나는 주변에서 걱정이 아닌 부러움을 사겠지. 오늘 있었던 일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서태웅만큼 든든한 에이스가 없었는데, 스스로와 비교하려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래서 위로 좀 해달라고 했더니 그 선배는 2년 같은 소리나 하고 있고. 차라리 가짜 이빨 소리를 하든가. 그때를 회상한 송태섭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구겨진다.
정말로 서태웅을 만난다면 키도 크니까 하이힐 같은 것도 부담 없이 신을 수 있겠다. 한나가 하이힐을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한나가 그런 걸 신고 싶다면 자신이 깔창을 맞추든지 할 테지만. 아니? 한나는 하이힐을 신는 데 남자친구 키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겠지만! 아, 좋아.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는 걸 쫓으며 살아가는 한나가 좋다.
생각의 흐름이 도랑으로 쏙 들어간다. 송태섭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덩달아 리걸 패드의 첫 장이 구겨진다. 고백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어떤 자만을 한 건 아니다. 자신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한나에 관한 송태섭의 확신은 좋아한다는 짧고, 단순하고, 얼핏 보면 촌스럽기까지 한 단어가 전부다.
그럼에도 고백할 생각을 하지 못한 건, 그냥 벤치에서 나를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같이 데이트하면 당연히 설레겠지만, 진심으로 농구를 대하는 너에게까지 문제아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도 송태섭은 한나에게 장미나 꽃, 인형 같은 진부한 선물보다도 팀의 우승을 쥐여 주고 싶었다. 그게 한나가 자신에게서 가장 받고 싶을 선물이기도 했고, 이한나를 처음 본 날 송태섭이 결심한 마음이기도 했다.
농구를 사랑하고 북산을 응원하는 그녀에게 북산의 우승을 가져다주고 싶다. 그때까지도 긴가민가했던 농구부에 대한 마음을 굳히던 날이었다. 그땐 진짜 하루빨리 주전에 들어서 한나의 눈에 띄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솔직히 패스랑 드리블에 허세가 담긴 건 맞았어. 한나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감고 있던 송태섭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거울이 있다면 오늘 있었던 일 중에 제일 놀란 자신이 있을 것이다.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어떤 사실을 알아버린 탓이었다.
이 겁쟁이 새끼.
스스로를 가감 없이 비난한 송태섭은 이번엔 소리 날 정도로 책상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노트로도 완화되지 않은 충격이 골을 울렸다. 혹이 나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혹이 나다 못해 멍들 정도로 누가 패줬으면 좋겠는 심정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래서인가. 그래서 한나가 서태웅이라는 이름의 여우에게 눈을 돌렸나. 별로 믿지 않았던 한나의 달라진 태도가 그제야 마음에 걸렸다. 내가 이 모양이라서 한나가 서태웅을 택했나. 한나가 좋아한다면 아무리 서태웅이라도 넘어오는 건 시간문제다. 농구와 관련 없는 사람은 얼굴도 기억 못하는 것 같았지만, 한나는 농구부 매니저니까. 심지어 한나는 똑똑하고 사람에게 잘 맞춰줄 줄도 알았다. 농구에 관해서 대화하면 아마 밤새도록 가능할 테다. 거기다가 예쁘지, 웃으면 아름답기까지 한데, 옷도 잘 입지, 공부도 잘하지, 강백호 같은 초짜도 잘 챙기지, 겁먹고 도망치는 누구랑 다르게 당당히 맞설 줄도 알고…….
하나둘씩 늘어놓다 보면 송태섭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좋아했는데, 자신이 너무 겁이 많은 탓이었다.
*
머리를 묶으며 체육관에 다가가면 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구기 종목의 공들보다 유독 무거운 농구공은 땅을 치고 튀어 오를 때면 심장 박동과 비슷한 고동이 울린다. 이한나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들리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항상 체육관 문을 열면 강백호가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어도 문을 열면 강백호가 농구공을 끌어안고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산왕전이 끝나고 빼앗긴 일상에도 이한나는 씁쓸해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강백호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농구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 강백호가 돌아올 거란 믿음이 있기에 가질 수 있는 긍정이었다.
조금 걸음을 빨리해 체육관 문을 열면 그곳에는 또 다른 문제아가 공을 튀기고 있었다. 한나의 눈이 조금 커진다. 새롭게 주전을 노리는 1학년, 내지는 2학년을 예상한 그곳에는 골대를 향해 레이업 슛을 시도하는 송태섭이 있었다. 넋 놓고 보는 것도 잠깐이었다. 진심을 다하면서도 무리하지 않게끔 균형을 지켜오던 놈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어제에 대한 반성이었다.
농구에 완벽히 몰입한 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닫은 이한나는 적당히 그의 시야가 걸리지 않을 곳에 자리 잡고 벽에 기대섰다. 제일 먼저 체크해야 하는 비품실은 송태섭을 가로질러야지만 있었다. 약한 장거리 슛을 보완하려는 건지, 항상 드리블을 연습하던 송태섭은 오늘따라 뛰고 또 뛰었다. 일찍 나오는 와중에도 꼼꼼하게 만졌을 머리가 점점 땀에 풀려 내려온다. 그 밑에 한쪽 귀에만 박힌 피어싱이 이따금씩 존재를 알려왔다. 이한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꾸미는 사람은 확실히 뭔가 다른 게 있단 말이지.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소리들이 뚝 끊긴 건 그때였다.
“한, 한나야…….”
뒤이어 멍청한 목소리가 샌다. 해석하자면 언제부터 거기서 보고 있었냐는 뜻이었다. 집중하라고 1학년 때부터 말해와도 고쳐지지 않은 고질병이었다. 그 대신에 정확해질 때까지 노룩패스를 연습했고. 바보다운 선택이었다. 이한나는 모른 척을 관두고 송태섭에게 다가갔다.
“되게 오랜만이네? 네가 아침 연습하는 거.”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으면 숨을 몰아쉬던 송태섭이 옷을 잡아끌어 땀을 닦았다. 제 앞에만 서면 속없는 사람처럼 실실거리던 얼굴은 어떤 결단을 내린 것 같이 굳어있었다. 그즈음 송태섭이 이러고 있는 이유가 어제의 일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눈치챈 이한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송태섭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태웅은 너한테 잘 못 해줄 거야.”
여기서 태웅이가 왜 나오는지. 갑자기 뭔 헛소리인가 싶은 것도 잠깐이었다. 2학년 1반을 시작으로 빠르게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는 이한나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제 심각할 정도로 경기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절 피하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을 캐고 다니다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래서?”
이한나는 제가 알고 있는 것, 알게 된 것 중 무엇도 티 내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가드가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송태섭은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폈다가, 금방 다시 쥐었다. 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이 그대로 입밖에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서태웅은 분명 너한테 한참 부족하고 엉망인 놈일 테지만, 그래도 네가 그 자식을 좋아한다면, 가, 가지, 가지 말라고는,”
“똑바로 말 안 하면 진짜 가버릴 거야.”
“가지 마.”
송태섭이 똑바로 말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머리가 차갑게 식고 제정신이 들면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인의 명령도 무시하고 열렸던 입술은 차마 다시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래턱이 잘게 떨렸다. 이대로라면 눈밑까지 열이 오를 것 같다. 가까스로 초점을 잡으면 앞에는 한나가 서 있었다. 한나가 서서, 다정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 마, 한나야.”
결국 송태섭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고야 만다. 그새를 못 참고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이 시작된다. 정말로 어제까지는 네가 행복하면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그 정도 마음인 줄 알았을 때 냅두지 그랬어. 아, 이렇게 생각 많은 놈이라는 거 알면 진짜 싫어하겠지. 근데 싫어도 좋아해…….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지금까지 잘,”
“참아온 거 아니야. 도망친 거야.”
한나가 팔짱을 끼고 말하면 태섭이 단번에 대답했다. 목소리는 물기로 젖어있었다. 그는 왼쪽 손바닥 끝으로 눈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덩달아 숙여진 고개 때문에 표정은 더 보이지 않았다.
“널 생각할 때면 내 농구에는 형이 없어져.”
“…….”
“그게 무서워서 지금까지 도망쳤던 거야.”
송태섭이 이어서 말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얼굴 대신 보이는 그의 왼쪽 손목에는 항상 두 명 몫의 손목 보호대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한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가 뛰고 있던 농구 코트 바닥을 보다가, 다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이제는… 괜찮아.”
산왕을 이겼으니까. 송태섭의 목소리가 작게 샜다. 오늘, 송태섭의 왼쪽 손목에는 검은색의 손목 보호대만이 있었다. 이한나가 아직 알지 못한 송태섭이었다. 그리고 이한나는 마침내 보게 된 사람의 진심을 겁내지 않는다.
“그럼 이제 나 태웅이한테 가도 돼?”
“…….”
미약하게나마 속내를 털어놓던 송태섭이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세게 입술을 악무셨는지, 턱의 근육이 섰다. 그 꼴을 보며 가까스로 한숨을 참은 한나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이런 분위기에서까지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답답함이 저 끝에서부터 몰려온 탓이었다.
“너 진짜 바보야?”
“네 앞에 서면 나는,”
“그딴 소리는 됐고! 내가 왜 너한테 넘버원 가드라고 써준 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한나는 망설임 없이 송태섭의 오른쪽 팔을 붙들었다. 태섭이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넌 한 번도 겁먹고 도망친 적 없어.”
그리고 다시, 이한나에게 붙잡힌다.
“겁이 나도 끝에는 언제나 맞서 싸웠잖아. 지금도 봐. 나한테 다 말했지?”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왼손을 내렸다. 그러면 제 앞에서 웃고 있는 한나의 얼굴이 보였다. 빠르게 하늘을 타고 올라오던 햇빛이 창가를 스쳐 체육관 안으로 쏟아진다. 그 순간 송태섭은 더 이상 바다를 보지 못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았다. 한나가 자신을 잡고 있어서였다. 태섭이 앞으로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리고 지금까지 네 농구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상관없어. 복잡한 이야기가 있는 거 같은데, 원래 매니저는 누구보다도 넓은 농구 코트를 가지고 있거든? 거기에 네 형의 농구까지 들어와도 괜찮으니까…….”
결국 참지 못한 송태섭이 이한나를 끌어안아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당황하는 기색도 잠시 차가운 손이 자신을 끌어안은 팔을 붙잡는다. 떨쳐내려는 게 아닌, 송태섭을 지지해주기 위함이었다. 송태섭은 체온을 식힐 만큼 차가운 손이었음에도 차갑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열을 식히는 차가움이 다정하게만 느껴졌다. 이러니 한나야,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제는 다르게 겁이 난다. 이런 너를 정말 다른 사람들이 가만둘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한나야, 우리 결혼하자.”
태섭이 속도 없는 놈처럼 말했다.
“받아주니까 또 금방 기어오르지? 우리 아직 3학년도 안 됐어.”
한나가 지겹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 하자아. 애원하듯 말끝을 늘렸다. 나는 너랑 함께면 다 괜찮을 것 같아. 그런 말을 이어붙여도 한나는 웃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이 상황이 재밌는 사람처럼. 분명 이한나를 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 무지하게 많을 거다. 한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문제아를 만나는 게 걱정된다는 핑계로 접근해올지도 모르지. 그러면, 그런 일이 생긴다면 싸워야지. 그리고 반드시 이길 테다. 너도 분명 나를 응원해주겠지. 나는 네가 직접 고른 넘버원 가드니까.
아, 젠장.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다.
태섭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한나의 귓가에 쏟아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오늘까지. 뒤에 가서는 짧은 입맞춤으로 변해가도 한나는 간지러워서 웃기만 할 뿐, 밀어내지 않았다. 이 세상 모두가 송태섭을 부러워할 순간이었다.
그래서 서태웅이랑은 뭐였던 거야.
유소년 대표로 뽑혔잖아. 합숙 가기 전에 부상이 생기지 않도록 더 챙겨준 것뿐이야.
…….
너 방금 하지 말라고 하려다 참았지.
한, 한나야아….
시끄럽고, 다른 애들 올 때 됐으니까 슬슬 비켜.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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