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무리에서 벗어나

꿈을 꾼 정우성

농구부 입단 후 정식으로 실력 테스트받던 첫날, 정우성은 직접 자신을 스카웃하러 왔던 산왕 공업 고등학교에게 작게 실망했다. 싸우는 상대도 없이 골대를 상대로 원온원을 흉내 내며 뽐내는 개인기에 감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볼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1학년과 2학년이 적절하게 섞인 시합은 평범하게 실망스러웠다. 명문이라던 산왕공고답게 그들은 2군 선수조차 다 전국에서 들어봤던 선수들이었지만, 결국 전국에서 최고라 불리는 세글자는 ‘정우성’이었다. 중학교 3년 내내 전국 대회에서 봐온 1학년은 물론 3학년에 밀려서 출전 기회도 별로 없었을 2학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일본은.

정우성의 실망이 커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있을 경기를 위해 비워야 하는 코트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와 체온 유지를 위해 저지를 찾던 그때였다. 수분 보충부터 하라고 물을 건네받은 건. 이어서 감독이 말했다. 넌 다음 시합에도 뛴다. 설명은 그게 전부였다. 여태까지 정우성이 봐왔던 감독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그의 목소리는 확신이 있었다.

1학년과 2학년의 수준을 확인하는 내전 다음으로 준비된 시합은 바로 3개월 뒤 있을 전국 대회 선발진을 결정 짓는 테스트 경기였다. 거기에 설 기회를 받은 1학년은 정우성이 유일했다. 그것도 입학하고 부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말이다. 그러나 정우성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년에도 전국 대회 우승을 거머쥔 3학년들이 벤치에서 일어나 하나둘씩 워밍업을 시작했다. 저들과 붙을 수 있다. 현재 국내 최강이라는 사람들과 겨룰 수 있다. 정우성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이다.

감독님은 과연 팀을 어떻게 나누실까. 누구와 팀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제일 강한 사람을 적으로 상대하고 싶다. 최강이라는 그들에게 도전하고 싶다. 나의 한계를 알고 싶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고 싶다! 산왕공고에 진학한 정우성이 마침내 설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신은 기도를 들어주셨다.

저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를 만나는 대신에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위치로 볼이 들어오는 포인트 가드로.

쓰라린 패배를 겪는 대신에 보란듯이 스크린을 열어주고 리바운드를 해내는 센터로.

3학년 뒤에 가려져 있던 2학년들이었다.

 

*

 

“원온원 부탁드립니다!!!”

2학년 라커룸의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정우성이 목소리를 냈다. 산왕은 학년 별로 쓰는 라커룸이 달랐다. 불필요한 군기나 구타 문화를 잡기 위함이었다. 개인 자유 연습 시간이 시작되면서 떠올랐던 달은 어느새 체육관을 넘어 라커룸까지 조금씩 비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개인 시간은 전부 끝났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그렇게 될 때까지 2학년 라커룸에 남아있던 유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시선을 교환하다가, 패기 넘치게 선배들의 라커룸을 열어젖힌 슈퍼 루키를 바라보았다.

“싫어.”

“싫다, 뿅.”

대답은 짠 것처럼 나왔다. 정우성이 눈을 깜빡였다. 뾰, 뿅? 뿅이 뭐지? 말실수한 건가? 혼란스러운 것도 잠깐이었다. 정우성은 개의치 않고 2학년 라커룸으로 발을 디뎠다.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유니폼을 반쯤 벗던 신현철이 미간을 구겼다. 이미 상탈을 끝낸 이명헌은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선을 넘은 후배를 바라보았다.

“멘토가 필요한 거면 차라리 3학년 선배들한테 가봐라.”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건가요?”

아직도 왼손에는 문고리를 쥐고 있는 놈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 채로 물었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말투였다. 농구부 전원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신현철이나 제가 아닌 2학년이 있었더라면 크게 문제 될 폭탄 발언이었다. 이번 신입으로 어마어마한 놈이 들어올 거라더니 이런 식으로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나요, 감독님. 벌써부터 내년 주장하기 싫어지는데요. 뿅. 이명헌은 라커에 처박아둔 흰 티셔츠를 꺼내 들었다. 하도 구겨진 탓에 앞뒤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잘하는 사람이랑 농구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너 같은 애들은 얼굴만 봐도 알아, 뿅”

이명헌이 티셔츠 중앙에 브랜드 로고처럼 박혀있을 산왕공고의 알파벳을 찾으며 말했다.

“괜히 상대해주다가 선배들과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다. 애초에 나는 센터로 전향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신현철이 마저 유니폼을 벗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얌전히 알아들으라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한 모습에 정우성이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가장 잘한 건 두 선배님이었는데도요?”

옷을 갈아입으려던 신현철과 이명헌의 손이 굳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짠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중에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후배다, 뿅.”

이명헌은 기껏 방향을 찾은 티셔츠를 다시 라커에 처박은 뒤에 유니폼을 꺼내 들었다.

“체육관 키는 네가 갖고 있겠지, 이명헌?”

신현철은 팔만 빼면 끝이었던 유니폼의 목구멍으로 다시 머리를 집어넣었다.

“점 찍힌 주장이라는 게 이럴 때 도움 되긴 하네, 뿅.”

“그거 벌써부터 너로 낙점한 게 아니라 네가 제일 말 잘 들어서라더라.”

“이 키를 건네받을 때 감독님께 들었다, 뿅. 앞으로의 산왕을 잘 부탁한다고.”

“…진짜냐?”

“뻥이다, 뿅.”

야, 임마!! 이명헌의 어깻죽지를 내려친 신현철은 맞은 상대보다 더 크게 눈을 떴다. 현재진행형으로 키가 크고 몸집이 불어나고 있는 신현철은 아직도 자신의 길이나 객관적인 파워를 잊고 행동할 때가 있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다 등 뒤로 블로킹이 꽂힌 이명헌이 맞은 부위를 붙잡고 부들거렸다. 솔직하게 정우성은 이게 지금 자신을 위한 몰래카메라는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선배와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말로 문제를 피하려던 직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태평해 보이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렇게 됐으니, 원온원을 할 거라면 저놈이랑 먼저해라. 나는 레프리 타임을 가져야겠다, 뿅.”

무엇보다 저 뿅뿅거리는 말버릇이.

반쯤 상체를 숙이기까지 한 이명헌은 바지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던졌다. 한 손으로 가볍게 받은 신현철은 그러고도 한참을 이명헌의 기색을 살폈다. 아닌 척해도 꽤 미안한 모양새였다. 뭐가 됐든 뿅뿅거리는 말버릇은 둘 사이에서 어떤 문제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제게만 들리는 말버릇이거나. 신현철이 체육관으로 향하는 건 이명헌의 어깻죽지에 핏줄이 터지지 않은 걸 확인한 다음이었다.

원온원 같은 소리를 꺼낸 건 정우성이었음에도 체육관을 향할 때는 신현철의 뒤에 붙은 조랑말 같은 모양새였다. 그때까지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당연하게도 이명헌의 말버릇이었다. 상대가 190cm의 신현철이든 3학년 선배든 감독이든 신경 않고 자신감을 뽐내며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하고야 마는 정우성이었지만, 어쩐지 이명헌에게만큼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겁먹은 건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같은 주전으로 이름을 올리고 친해지게 되면 또 모르겠지만 당장은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는 그가 누구보다 어려웠는데. 그런 말투를 쓰니까.

“저 녀석 말투가 신경 쓰이냐?”

잠긴 체육관의 문을 열던 신현철이 물었다. 네? 생각이 읽힌 게 부끄러웠던 정우성의 목소리가 튀었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 뻔한 부정을 가까스로 삼켰다. 아닌 척해도 역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냥 제 혼자 고집하는 말버릇이니까 무시해. 괜히 신경 쓰다간 네가 말린다.”

“오늘 경기 중에서는 한 번도 쓰지 않으시길래…….”

“선배들이 싫어하니까.”

명쾌한 대답이었다. 아닌 척해도 명문고다운 기합과 군기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했다. 의문이 해소된 정우성이 입을 다물고 얼마 되지 않아 체육관의 문이 열린다. 사람이 빠져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체육관 안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나마 여름이어서 다행이었지, 겨울이었으면 원온원이고 뭐고 당장 기숙사로 달려가야 했을 것이다. 이제 막 체육관의 위치를 외워가고 있을 정우성 대신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찾으러 벽을 더듬던 신현철이 우뚝 멈춰섰다.

“근데 너, 그 버릇은 고쳐라.”

“네? 저요?”

신현철의 등을 따라 조심조심 안으로 걷던 정우성이 놀라 물었다. 슛폼은 물론, 드리블이나 패스하는 데 있어서 지적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정우성이었다.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며, 이걸 보고 배우라고 학년 상관없이 농구부원을 모아다 놓고 쓰는 살아있는 교과서였으면 모를까. 눈을 굴리며 오늘의 행적을 짚어보던 정우성이 금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선배님들 있는데 노크도 안 하고 들어간 거요?”

“겨뤄야 할 상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하는 거.”

신현철이 대답함과 동시에 체육관에 불이 들어온다. 정우성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신현철의 눈을 비로소 마주 본다. 그는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거기에 이명헌과 함께 만담을 주고받던 고등학생은 없다. 은근히 후배를 챙겨주는 2학년 선배도 없고. 그런데도 겁이 나기보단 가슴이 뛰었다. 네, 고칠게요. 고치고 말고요. 더 이상 선배에게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정우성은 섣불리 입을 여는 대신에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퍽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농구공을 갖고 오겠다는 말로 신현철은 혼자 비품실 창고로 들어갔다. 1학년 때부터 번갈아 가면서 관리해도 체육관 가장 구석에 처박혀있는 골방의 먼지는 어쩔 수 없었다. 철창에 갇혀있는 듯한 농구공을 꺼내는데 어떤 무리도 없던 신현철은 잠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은연중에 저를 이길 것을 확신하고 있는 정우성으로부터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

 

신현철은 재능을 믿지 않는다.

설령 모든 것을 압도하는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꽃피울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코 재능은 응답하지 않는다. 신현철의 세상은 그랬다. 기도를 하고 신에게 비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직접 움직이고 행동으로 쟁취해내야 한다. 신현철이 살아온 세상이 그랬다. 키와 재능만을 믿고 까불다간 금방 사라졌다. 당장 3년 전 중학 MVP들을 보라. 그리고 그들 중에서 명성을 지금까지 이어오는 놈들이 얼마나 되는지 직접 세어 보라.

때문에 신현철은 약 1년 동안 키가 25cm가 크는 축복 속에서도 항상 자신을 갈고닦았다. 지금의 신현철을 있게 만드는 건 대학교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들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다. 신현철이 가드에서 센터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자신감이 되었고 용기가 되어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농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오래 하고 싶다는 열망. 결국 그것들이 지금의 신현철을 만들었고 산왕에 있게 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신현철이 재능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고 한들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농구화 밑창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신장 차이는 고작 4cm라고 해도 센터를 목표로 체격을 키우는 자신과 그는 골격부터가 달랐다. 달라야만 했다. 압박을 가해도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다. 신장 차이를 이용해 블로킹과 리바운드로 득점을 막고 있었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드리블로는 이길 수가 없다.

중학교 3년, 거기다 산왕공고까지 가드 포지션으로 왔던 신현철에게는 포기하기가 꽤 힘든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버리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정우성의 왼발에 모든 체중과 균형이 실린다. 안으로 파고들 것을 읽은 신현철이 재빨리 골 밑을 잡았다. 그러면 금방 상체를 들어 한순간 몸에 실린 힘을 풀었다. 눈앞에서 보여지고 있음에도 정말로 가능한가 싶은 바디컨트롤이었다. 일부러 페인트를 넣은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두려운 일이다.

이게 진짜 재능인가.

찬스를 놓치지 않은 정우성이 뛰었다. 마지막을 직감한 신현철이 높게 뛰었다. 골 앞에서 점프할 때면 이상하게 시간이 느려지고는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다음 순간 신현철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제 몸은 떨어지고 있는데, 정우성의 손에 있던 농구공이 이제야 골대를 향하는 게 보인 탓이었다. 더블 클러치였다.

“이걸로 10:4!!”

정우성이 우렁차게 외쳤다. 골망을 통과한 농구공이 체육관 바닥을 튀긴다. 신현철은 얼마 굴러가지 못하고 멈추는 농구공을 바라보다가, 오늘 낮에 있던 시합에서 기어코 출전을 따낸 1학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승리의 기쁨에 마음껏 도취되어 있었다. 살아있다는 얼굴이었다. 신현철은 결국 참지 못한다.

“넌, 농구를… 대체 얼마나,”

“질문은 잠깐 미뤄두자, 뿅.”

턱 끝까지 찬 숨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질문을 완성하려던 그때였다. 얄미운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른손에 낀 아대를 매만지고 있는 이명헌이 있었다. 레프리 타임을 갖겠다던 그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과 정우성의 원온원을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다.

“바로 붙어야 하니까, 뿅.”

아직 정우성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신현철이 조용히 이명헌을 바라보았다. 라커룸에서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부여잡고 있었던 오른쪽 어깨는 멀쩡해 보였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냐.”

신현철이 덤덤하게 물으면 이명헌은 그가 아닌 정우성을 바라보았다.

“전략이라고 해라, 뿅.”

마찬가지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겨라.”

어느샌가 농구공을 주워든 신현철이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정우성은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대신에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서 있는 곳에서 두 세걸음 정도 뒤로 물러선다. 모든 본능에 농구를 새겨둔 덕분이었다. 정우성이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골 밑으로 생긴 자리만큼 이명헌이 다가와 섰다. 이윽고 완성된 점프볼 구도에서 정우성은 비로소 그들의 대화를 이해한다. 숨이 조금, 찬다. 이제 센터를 배워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철저했던 압박 수비 탓이었다.

일부러 크게 숨을 들이쉬고 벅찬 티를 내봐도 마주 선 그는 어떤 흔들림도 없다. 눈의 초점이 제게 맞아 있다는 것 빼고는 무엇도 읽히지 않는다. 저런 얼굴 뒤로 전략을 세우고 수 싸움을 하는 게 이명헌이라는 사람이라는 거지. 정우성은 이명헌과의 원온원은 신현철을 상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산왕에 들어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높은 확률로 이번 가드를 제치고 산왕공고의 주전을 맡을 이명헌은 확실히 드리블에 빈틈이 없었다. 코트를 넓게 쓰고, 이쪽의 생각을 읽고 절대 유리한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정우성은 지지 않는다. 아까와 달리 체격과 신장은 이쪽이 절대적 우위였다. 드리블로 자신을 제치려는 그를 끈질기게 쫓아갔다.

한편, 라인 밖에서 그들의 원온원을 보고 있던 신현철은 정우성의 기량에 대해서 산왕공고의 전원이 다시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력 테스트에서부터 묘하게 집중을 못 하는 듯, 상대를 앞에 두고도 산만한 구석이 있던 놈은 원온원을 시작하자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집중력은 선발 테스트 조차도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들게 하는 정도였다. 볼을 들고 있는 건 이명헌이었지만 그가 유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표정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몸에 흐른 땀이 그가 얼마나 몰려있는지를 대신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명헌에게 있어 제일의 장점은 평정과 침착함이다. 쫓는 입장이 되어도, 쫓기는 입장이 되어도 그는 흥분하지 않는다. 때로는 같은 사고회로를 지니고 있나 싶을 정도로 차분한 그의 냉정함은 지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그런 이명헌이 당황하고 있었다. 피부 위로 드러나는 건 없었으나 코트 위에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온 신현철에게는 보였다.

코트 위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이성과 타협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객관화가 필요했다. 그건 신현철이 꼽는 이명헌의 제일의 장점이었다. 그는 팀과 상대의 전력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어떤 감정도, 자존심도, 정도 들고 가지 않는다. 산왕이라는 절대불변의 왕좌에 앉아 있어서가 아니다. 이명헌에게 그런 오만함은 없다. 이명헌은 이제 막 주전으로 선발된 1학년을 상대하면서도, 풀 컨디션으로 붙을시 자기 자신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이명헌은 그런 가드다. 그런 가드이기 때문에 이명헌은 산왕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판단력에서 기반되는 심리전.

어느샌가 공은 정우성의 손에 있었다. 치열한 드리블 싸움으로 벌써 몇 번째 공수가 바뀌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우성은 굉장히 즐거웠다. 냉정하게 공이 아닌 자신을 쫓고 있는 이명헌이 다음은 어떤 움직임으로 자신을 막을지 기대가 됐는데, 이 원온원에서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이 뒤에는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다.

정우성이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내가 더 농구를 잘하니까!!

“방금 네가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했지?”

용.

드라이브인을 시도하기 위해 공을 잡던 그때였다. 아까와는 다른 말꼬리가 붙는다. 인지하기도 전에 손에서 농구공이 위로 빠졌다. 패턴을 읽고 찰나를 노린 스틸이었다. 찬스를 만든 이명헌은 놓치지 않고 허공에 뜬 볼을 잡는다. 제게 일어난 일을 머리보다도 몸으로 먼저 이해한 정우성이 즉시 몸을 돌렸다. 골 밑까지 다다르는데 한 걸음, 그리고 막기 위해 블로킹을 뛰는 데 또 한 걸음. 이게 닿으면 다시 빼앗을 수 있었다. 정우성의 확신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한 적 없다. 단 한 순간도!

마침내 정우성이 뛰었다.

이명헌의 손에는 볼이 없었고, 그는 뛰지도 않은 상태였다.

“어?”

그물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농구공이 튀기는 소리도, 득점을 성공한 자의 환희도 없다.

“…….”

“…….”

농구공의 위치를 확인한 세 사람이 가만히 서 있었다. 누가 보면 멍청해보인다고 놀려도 할 말 없는 꼴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이명헌의 손에서 그대로 사라진 줄 알았던 농구공은 신현철의 손에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뭐 하는 거냐, 이명헌.”

“…실수, 뿅.”

이명헌이 정우성에게서 스틸한 공을 신현철에게 패스했다. 

다른 것도 아닌 원온원 게임에서 말이다.

“…선배, 방금은 용 이라고?”

“그것도 실수다, 뿅.”

신현철이 높게 공을 던졌다. 살짝 짜증이 섞여있는 패스였다. 정우성은 그것을 무리 없이 받았다. 그럼 이건 무슨 파울이라고 해야 해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인텐셔널이라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뿅. 아뇨, 그건 너무 빨리 끝나니까 그냥 공격권만 가져갈게요. 선배도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잖아요! 정우성이 시원하게 말했다. 이명헌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야 당연하게도, 실수가 아니다. 농구를 몇년을 했는데 원온원에서 그런 실수를 할까.

그저 무의식적으로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다.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알았다. 정우성의 수비에 공을 빼앗길 것을. 때문에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판단한 무의식이, 팀이라 생각한 신현철에게 공을 던졌을 뿐인 이야기다. 턱 근처의 옷깃을 잡아당긴 이명헌은 농구가 땀을 흘리는 스포츠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당황한 티가 얼마나 났을까. 가까스로 살린 찬스를 신현철에게 패스로 줘버린 시점에서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난 것과 다름없다. 증거는 관전자의 입장을 택한 신현철이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다. 스코어가 어떻든 종료 휘슬이 불리기 전까지는 절대 단정 짓지 않는 놈인데 말이야.

분명 체력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슬슬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야간 자율 연습까지 마치고 하는 원온원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라면 결과다. 이래서 일부러 신현철이한테 먼저 맡겨둔 건데. 땀을 닦은 이명헌은 오직 득점만을 위해 달려드는 어린 1학년을 보았다. 점수와 승리는 줘도 페이스만큼은 절대 줄 수 없다. 신현철과 달리 이명헌은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를 택한다.

그게 산왕의 가드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저희, 다음, 원온원은…, 언제 할까요?!”

“절대 안해, 뿅.”

“안 해, 이 자식아.”

체육관 바닥에 대자로 뻗은 정우성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치만 제 장기인 슛은 한 번도 못 했는데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목소리였다. 페이스를 넘기지 않은 대신에 원온원 지옥이라 쓰고 드리블-프레스 지옥이라고 읽는 곳에서 버텨야 했던 이명헌은 신현철의 물통까지 빼앗아 마시고 있었다. 너랑 또 하면 내가 말꼬리를 바꾼다, 뿅. 그거 그냥 바꿔도 상관 없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지, 뿅. 달밤의 원온원으로 제법 거리가 가까워진 건지 이명헌은 농담을 던지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신현철은 묘하게 허물어진 이명헌의 벽을 보며, 그가 앞으로 남은 고교 생활 2년의 전부를 주전 정우성에게 걸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까 정우성한테 물어볼 거 있지 않았나, 뿅.”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명헌이 슬쩍 신현철을 올려다보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신현철이 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농구의 열기에 젖어있을 때면 모를까 맨정신으로 물으려니 민망하다 못해 부끄럽게 느껴진 탓이었다.

”큼, 그래서 농구는 언제부터 시작했다고?”

메마른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신현철이 물었다. 선배들과의 만족스러운 원온원을 끝낸 후 애처럼 웃던 정우성이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잠깐이었다.

“기억이라는 게 있을 때부터 했습니다.”

정우성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후배에게 진 선배들이 꺼낼 독한 대답을 알고서도. 과장도 정도껏 해라, 그게 뭐냐, 그렇게 안 해도 네가 천재인 걸 안다, 알아달라고 티내는 거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선배들은 분명 좋은 사람들이다. 농구를 하면 그 사람이 보인다. 정우성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좋은 사람이기에 변할 때가 있다. 물론 정우성은 그들이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비웃거나 믿지 못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불신과 비아냥 따위로는 제가 보내온 시간 중 무엇도 깎아내리지 못 한다.

이미 오래전에 숨을 고른 신현철이 땅에 떨어진 농구공을 주워 들었다.

“그럴 것 같았다.”

이놈도 정우성에게 걸었군. 이명헌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산왕을 원맨팀으로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까지도 이놈과 같겠지. 이명헌은 많은 말 대신에 신현철이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이어 자연스럽게 잡고 일어설 지지대가 되어줄 그의 팔이 되돌아온다. 이명헌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그 팔을 붙잡는다. 어떤 약속이었다.

곧 에이스를 달게 될 어린 1학년은 절대 모를 센터와 가드만의 약속.

“믿어… 주시는 겁니까?”

그때까지도 체육관 바닥에 앉아 있던 정우성이 말했다. 어딘가 얼이 빠져 있었다. 신현철과 이명헌의 표정에 의아함이 물든다. 그럼 그걸 믿지 못할 이유가 있냐는 얼굴이었다.

“비웃지도 않고요?”

“안 비웃어. 농구바보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뿅.”

“그래, 비웃는다고 하면 차라리 이 자식 말버릇이지.”

“말 다 했냐? 뿅.”

“…그니까 현철 선배의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하트처럼 말이죠?”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아까부터.”

“아아아!! 항복! 항복이요!!!”

참지 못한 신현철이 아직 앉아 있는 정우성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아주 살짝, 정말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도 벌써 팔뚝으로 탭을 치고 난리가 났다. 어쩐지 밀려오는 괘씸함에 신현철은 일부러 3초를 더 죄이다가 놓아주었다.

“…뭐야, 우냐?”

“그거야 선배가 고릴라처럼 무식하게 헤드락을 거니까!!”

조였던 목을 붙잡고 캑캑거리던 정우성이 소리 지르듯 대꾸했다.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어쭈? 이 자식이? 꺾이지 않은 정우성의 기세에 신현철이 기어코 암바를 시도한다. 농구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격투기 기술이었음에도 제법 그럴듯한 폼이었다. 듣자 하니 동생과 항상 저러고 논다나 뭐라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정우성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 기겁하며 이명헌의 옆으로 도망쳤다.

“애초에 전 아픈 건 잘 못 참는다고요!!”

이명헌과 신현철이 동시에 몸을 굳혔다. 무언가가 뒤늦게 떠오른 모습이었다.

“…그럼 이제 내일의 너는 진짜로 큰일 났다고 봐야겠군.”

신현철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아, 이래서 안 하겠다고 했던 건데…….”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이명헌은 슬슬 익숙해지려던 말꼬리까지 떼고서 말했다. 이럴 때면 유독 착착 맞아가는 두 사람의 합에 정우성이 불길함을 느꼈다. 내일의 훈련에 뭐가 있는 건 분명했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이상으로 설명해주질 않았다. 왜, 왜요. 뭔데요. 이명헌이 정우성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한숨 쉬었다. 이놈도 도망가겠네, 뿅. 아니 제가 왜 도망쳐요? 저 안 도망칠 건데요? 적당한 곳에 잡고 서서 비품실 안으로 농구공을 골인시킨 신현철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빙빙 돌리며 걸어 나왔다. 뭐, 상관없지. 이제 다시는 야간 자율 끝나고 원온원 하자는 소리 안 할 거 아니냐. 그건 좀 낫겠다, 뿅. 고개를 끄덕인 이명헌이 마지막으로 허리를 폈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예요?”

“안 해.”

“안 해, 뿅.”

“아, 진짜! 이럴 때까지!!”

이명헌이 체육관 불을 껐다. 정우성이 허겁지겁 개인 짐을 챙겨 체육관을 나왔다. 저만한 에이스가 도망가면 산왕도 손해 아니에요?! 산왕은 역사적으로 원맨팀이었던 적이 없다, 뿅. 현철 선배, 원래 명헌 선배는 한 마디도 안 져요? 선배를 이기려는 네가 괘씸한 거다. 이리와 이 자식아! 또 헤드락을 걸려는 모습에 정우성이 냅다 달렸다. 두 사람분의 원온원을 치르고도 놀라운 체력이었다. 체력에는 더 이상 질 수 없었던 신현철이 쫓아 달렸다. 이명헌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달빛에 비친 세 개의 그림자가 들쭉날쭉 따로 논다. 마치 산봉우리 세 개가 멋대로 솟았다 꺼지는 것만 같다. 결국 끝에 가서는 나란히 선 그들이 훗날 산왕 공업 고등학교의 최강선발진으로 묶이는 건 머지않은 미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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