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ㄹㄷㅋ/호백호] 겨울의 울음이 무섭게 아파도
불쌍한 양호열! 어떤 여름밤 이후 강백호는 자주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를 한없이 안타까이 여겼다. 어쩌다가 그런 취향이 생겨서는. 어쩌다가 이상한 거에 눈길 가서는.
이상한 거, 라고 말하긴 했지만 오해는 말라. 강백호는 스스로가 좋았다. 빠른 다리, 큰 손, 길쭉한 허우대, 열정의 현신 그 자체인 빨간 머리카락. 늠름하고 호탕한 성격과 세상 그 어디에도 없던 놀라운 천재성.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은 분명 자신이다. 하지만 멋진 건 멋진 거고, 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강백호의 매력은 먼지 묵은 상자와 비슷하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기 어려우며 혹자는 고물 취급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가치가 변하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안에 든 건 귀하고 대단한 보물이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눈이 높으며 그 반대는 옹이구멍이다. 제 매력은 발견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백호군단 앞에서 일장 연설 했을 때(연설이라기보다는 맨정신으로 행하는 주정에 가까웠지만), 뭔 소린지 당최 모르겠다는 놈들 사이에서 호열만은 완벽히 이해했다. 지극히 그의 의견에 동감하며 더 멋진 표현까지 제안해줬다.
“발견 못 한 가치라면 원석은 어때. 모든 보석은 돌멩이에서 시작하잖아. 널 먼지 구덩이에 넣고 싶지 않아.”
백호 또한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그 생각을 했다며 호열의 목을 한 팔로 휘감았다. 네 머리가 돌인 것도 닮았다고 중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더 깊이 감동했을 거다. 흐지부지된 칭찬이었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호열은 백호의 가치를 인정했다. 양호열은 진작에 상자를 열고 가장 큰 보석을 꺼낸 사람이다.
그래서 그럴까. 호열이 백호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게 된 건. 세상에서 가장 강백호를 잘 아는 사람이라 어찌할 수 없이 사랑에 빠졌나. 원석이라 하니까 또 생각나는 게 있는데, 중학 시절 아무도 없는 과학실에 몰래 들어간 적 있다. 그 시기 백호가 짝사랑하던 상대는 수정이었다. 유독 눈이 크고 맑았던 수정이. 수정은 백호를 볼 때마다 항상 눈을 반짝였다.
이건, 분명, 수정이도 날 좋아해서인 게 확실해! 짝사랑 상대에게서 쌍방의 흔적을 찾자 백호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번 고백은 백 퍼센트 성공한다. 늘 비슷한 예감을 했지마는 이번만은 달랐다. 백호는 마침내 성사될 고백이 이전보다 더 특별하길 바랐다. 수정이와 그가 오래오래 추억할 첫 시작이므로. 고민은 자연스레 수정 → 보석 → 과학실에 잠들어 있는 광물 표본으로 흘러갔다.
수정이가 수정을 받는다고 좋아할까? 같이 잠입한 호열이 선반 열쇠를 찾으면서 물었다. 노구식과 김대남의 놀라운 손재간, 발재간으로 과학 선생의 안경과 가발과 선생 자체를 밖으로 빼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표본을 넣은 선반이 열쇠로 잠겨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백호는 교사 서랍을 뒤지며 뭘 당연한 걸 묻고 앉았냐고 타박했다. 호열에게 수정이의 빛나는 두 눈과 둘이 서로를 마주볼 때 바뀌던 공기 따위를 설명해주자, 호열은 열쇠를 찾다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빛난다는 거, 걔 원래 그렇지 않냐. 눈이 크잖아.”
“달라, 인마!”
서류철 안쪽에서 열쇠를 찾아낸 백호가 호열에게 그것을 던졌다. 갑자기 던져진 열쇠에도 호열은 실수 없이 받아 자물쇠에 꽂았다. 정확히 찾았다. 호열은 표본함을 꺼내 백호에게 손짓했다. 예쁜 거 많네. 흑요석과 대리석, 방해석과 화강암 등 흔하고 흔치 않은 광물이 네모 칸마다 하나씩 자리를 차지했다. 백호는 얼른 이름표를 훑었다. 수정, 수정, 수정… 없다! 낭패감에 머리가 하얘진 백호에게 호열은 상자 왼쪽 구석을 가리켰다. 여기 있어.
“석영이라고 적혔는데?”
“같은 뜻이야.”
“아하.”
과연 백호가 알던 것과 비슷한 생김새긴 했다. 육각 기둥의 투명한 돌덩어리는 큰 덩이와 작은 덩이로 이루어졌다. 통째로 나르면 들킬지 모르니 반으로 쪼개서 하나만 챙기자. 백호는 수정을 집어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뚝 부러뜨렸다. 큰 놈을 가져야지. 큼직한 수정 조각을 요모조모 살피며 장밋빛 미래를 그려 나갈 때, 불쑥 호열이 제 머리에 손을 올렸다. 자기 손과 백호의 머리카락을 번갈아 봤다. 네 머리가 더 빨갛네. 영문 모를 말과 함께 보여준 건 포도즙 색깔의 조그만 돌이었다.
“그건 뭐냐.”
“루비 원석이라는데. 그다지 안 빨갛지? 뭐, 교재용이라 어쩔 수 없나.”
“그것참 못생긴 돌이네.”
수정 외의 돌멩이에는 흥미가 없다. 대충 대답하며 작은 덩이를 상자에 휙 던졌다. 이제 후딱 정리하고 돌아가면 완전범죄인데 쿵짝이 맞게 움직여야 할 친구가 평소와 다르게 미적거렸다. 호열은 방금 백호가 그랬던 것처럼 루비를 손안에 굴리며 알듯 말듯 한 미소를 띠었다.
“빨갛고 못생긴… 하하, 너 같다.”
호열은 원석을 조심스레 돌려놓고 나서야 백호가 바라던 뒷정리를 했다.
침입의 흔적을 말끔하게 없애고 나가자 망을 보던 이용팔이 물었다. 성공했냐? 백호가 당당히 전리품을 들이밀었다.
“당장 고백하러 간다!”
결론적으로 백호는 뻥 차였다. 수정은 편지와 함께 받은 수정 조각을 백호에게 도로 건넸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돌려놓았으면 해. 저 투명한 눈동자는 사람의 속도 그렇게 들여다볼 줄 아나 보다. 여전히 반짝이는 눈의 수정이는 백호를 등지고 교실로 돌아갔다.
눈이 빛난다는 거 원래 그렇지 않냐. 걔 눈 크잖아….
멀어져가는 뒷모습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돌려놓으라니. 당장 실의에 빠졌는데 손안의 돌조각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그 이후의 행방은 알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백호군단이 지켜봤으므로 걔들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거니 싶다. 다만 그 추측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면 수정을 주워 백호군단에게 ‘이건 내가 처리할게.’ 라고 말하는 호열, 홀로 과학실에 들어가 선반을 여는 호열이 보였다. 그들 중 버려진 돌에 신경 써줄 만한 사람은 호열뿐이다.
수정을 돌려놓으면서 호열은 그가 관심 줬던 루비를 한 번 더 들여다봤을까. 울퉁불퉁한 표면을 조심히 문질러 봤을까. 별로 빨갛지도 않고 못나기만 한 돌멩이를 보면서, 그때의 미소를 다시 지으며, 백호를 생각했을까. 그날의 기억을 지닌 채 살다가 백호가 먼지투성이 상자를 운운할 때 네모난 표본함 속 루비를 떠올렸을까.
그날 백호가 본 호열은 루비를 예뻐했다.
호열은 그런 식으로 백호를 예뻐할까.
이런 거 물어볼 수는 없지…. 궁금해서 근질거릴 지경이지만 물을 수 없다. 이미 차버려 놓고선 근데 내가 왜 좋아? 언제부터 좋아했어? 쫑알거릴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다. 실연 베테랑으로서 백호는 호열이 걱정됐다. 친구로서 그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사는 신중히 다루어야 하는 사항이고, 호열은 눈치가 더럽게 빨라서 더 신중해야 하고, 제 절친의 문제였으니 더더욱 신중, 또 신중해야 했다. 그러니까 백호가 시침 뚝 떼고 아닌 척 호열을 도우려 하다가는 일에서 백까지 눈치챈 호열이 필요 없다며 백호와 한껏 거리를 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호열의 마음도 더 상하고.
그래서 백호는 이번만큼은 한발짝 떨어져서 움직이기로 했다.
“호열이하고 미팅 다녀오라고?”
구식이 백호의 말을 반복했다. 백호는 부러 어른스럽게 목을 내리깔았다. 그래! 이 형님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너희 네 놈 연애도 못 하고 청춘을 버리는 게 너무 아깝더라. 오늘부터 늬들이 연애를 하던 살림을 차리던 신경 안 쓸 테니 어여 다녀와라!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에 구식은 콧수염을 긁적였다. 썩 구미가 당겨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호열이랑 뭐 때문에 싸웠냐.”
헉. 백호는 가슴에 주먹을 올린 자세로 굳었다.
“미팅이라니… 그것도 너는 발 빼고. 가장 여자에 눈 돈 놈이 없으면 호열이가 퍽이나 너랑 아무 연관 없다고 생각하겠다.”
이 자식, 못 본 새에 눈치가 늘었나. 저 건조한 평가마저 백호는 생각지도 못한 시각이었다. 갑자기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조급해진 백호는 구식이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것도 잊고 구식의 어깨를 잡았다.
“그, 그러면 어떡해?”
백호는 호열이 여자에게 눈을 돌리길 바랐다. 그 어이없는 방황을 끝내고 그가 가야 할 길을 가길 빌었다. 왜 남자에게 눈길이 가서는. 남자는 좋아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못생겼고 난폭하다. 수많은 사내놈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으면서도 호열은 그따위 것에 마음이 갔나?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백호가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호열도 이해하면 금세 달라질 텐데.
할 수 있으면 당장 그랬어!
그날 밤 호열의 외침이 고막에 제대로 들러붙었다. 호열은 억울해했으며, 백호에게 짜증도 났고,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고 슬퍼했다. 그 강렬한 감정이 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호열을 돕고 싶다는 마음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너희가 무슨 일 있었는지 나야 모른다만… 그냥 내버려 둬. 걔 성격상 뭔가 필요했으면 말했겠지. 그게 네 맘에 안 들거나 호열이가 아무 말 안 하니까 네가 이러는 거 아냐? 괜히 들쑤시지 말고 놔둬라. 그게 도와주는 거야. 호열이는 그래.”
구식은 백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위로하는 몸짓이다. 위로라니, 왜 그걸 자신에게 할까. 호열이야말로 위로가 필요한데. 어쩐지 호열에게 가야 할 손길을 빼앗은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백호는 정말로 구식의 말이 옳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그는 호열에게 도움을 줄 존재가 아니다.
마음이 아팠다.
종치니까 난 간다. 어깨 위 손을 떼어낸 구식이 기다란 복도를 가로질렀다. 여름의 햇살은 너무도 강해 바닥에 내린 빛만으로도 천장과 벽이 번쩍거렸다. 아이들의 와이셔츠와 흑요석 같은 머리칼, 흰 피부에도 빛이 튀어 백호의 눈매가 점점 가느스름해졌다. 풍경의 테두리가 뭉그러지고 완전히 흐려지면서 거뭇해졌다. 닫히기 직전 시야에서 종이 접시만 한 동그라미가 들어와 눈을 뜨면 방금도 생각한 안면이 있다. 그 밤이 지나가고 처음 마주쳤을 때 호열은 이렇게 말했다.
없던 일로 하자니까. 난 벌써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제일 걱정인 건 너야.
간밤의 소동은 꿈이라 여겨질 만큼 미끄러운 표정.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 밤을 담았다. 낯부끄러운 전날이 벌써 먼 과거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준 호열. 혼자 긴 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희끗한 미소를 짓던 호열. 백호는 그런 눈속임에 속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 같은 시간을 살아가니까. 그렇게 상처받은 널 기억하는데 벌써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백호는 그 앞에서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호열은 안심한 기색으로 그를 떠나 기다란 복도를 가로질렀다.
사랑을 잊으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나. 사랑에 숱하게 빠졌던 백호도 섣불리 답할 수 없는 문제다. 그의 사랑이야 빠르게 피고 졌다지만 그것이 호열에게도 통하는 이치일까. 머잖아 새 꽃이 자라날까. 바람 자락에 뿌리뽑힌 자리가 금세 메꿔질까. 기실 이 실연 자체가 호열에게 큰 사건이 아니길 바랐다.
침묵하고 끄덕이기. 그런 행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를 돕고 싶다. 무대뽀로 돌진하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니까. 꼼짝없이 가만히 버텨내는 게 더 견디기 힘드니까. 하지만 이게 호열에게 최선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라면 따라야겠지. 아랫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여름은 유독 버겁다. 호흡이 갑갑하다.
끝나지 않을 법한 더위도 시간 앞에는 장사 없다. 여름 방학을 끝내면서, 윈터컵을 준비하면서, 교복을 바꿔 입으면서 어느덧 공기에는 서늘함이 섞여들었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백호가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슬슬 이발해야겠다.
“슬슬 머리 잘라야겠네.”
호열의 말에 백호가 음, 소리를 냈다. 시간이 약이라는 게 사람 사이에도 통하는 이치라 백호와 호열도 예전의 온도를 얼렁뚱땅 되찾았다. 완벽히 똑같지 않아도 아주 다르지도 않다. 약간의 어색함 정도야 안고 갈 만하다. 성장하면서 생긴 변화라 생각하기로 했다. 한번 자라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윈터컵도 끝났는데 이제 뭘 할 예정?”
대남이 묻자 백호가 답했다.
“훈련 가야지. 송태섭 겨울 방학에도 감시하러 온대.”
농구부 주장으로서 송태섭은 정말로 책임감이 강했다. 거의 모든 삼 학년이 부 활동에 물러난 데다가 차기 주장까지 정해졌음에도 태섭은 변함없는 관심을 쏟았다. 풍문으로는 일부 부원을 보면서 ‘정말 괜찮을까. 저것들을 두고 졸업해도.’ 라고 중얼거렸다는데, 뭐, 태생이 천재인 백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괜히 훈련 똑바로 안 하냐는 소릴 듣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제법 대견하게 잘 해내는 걸, 강백호.”
“과연 천재 농구 선수인가.”
“그럼 방학 때 아예 시간 없냐?”
“그건 아니지. 왜?”
구식이 하굣길 대열에서 빠져나와 그들 앞에 섰다. 콧수염 너머 입술이 능글맞게 올라갔다.
“방학 때 단체 미팅 어떠냐. 옆 학교에서 제안이 왔걸랑. 우리 백호군단이 다 오케이 하면 인원 맞춰서 친구 데려온대.”
“미팅?”
의아한 호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백호는 소름이 쭈뼛 돋았다. 심장이 쿵쾅거렸으며 반쯤 언 입술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백호의 곤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식은 우리도 곧 삼 학년인데 청춘이란 걸 즐겨야 하지 않겠냐고 열변을 토했고, 대남과 용팔은 아주 쌍수 들며 구식의 의견을 반겼다. 그리고 호열은, 양호열은…?
“다 합하면 열 명이나 되는데 나란히 앉을 장소가 있나.”
“왜 없어? 카페에 긴 의자도 많고 노래방도 있잖아.”
“그렇긴 하네.”
“그래서 백호 넌 시간 언제 되냐?”
몰려진 시선에 백호가 급히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겨울 공기에 노출된 뺨이 달구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글쎄. 확인해봐야 알겠는데. 입이 제대로 돌아갔는지 꼴사납게 더듬거렸다. 대남이 백호와 몸통을 부딪쳤다. 얘 벌써 긴장한 거 봐라! 백호군단의 웃음이 골목길을 채웠다.
겹친 웃음소리에서 호열의 것을 포착했다. 그것을 깨닫자 얼굴이 정말, 정말로 터질 것 같았다. 밀려오는 감각을 견디기 어려워 눈을 꼭 감았다.
그럼 시간 확인하면 말해라! 갈림길 어귀에서 구식이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네 사람이 새로운 갈림길로 향하던 중 백호가 우뚝 멈춰 섰다. …아! 나 교실에 뭐 두고 온 거 생각났다! 먼저 가! 난 다시 갈게!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발은 속공 때만큼 빨랐다. 조금 전 지나친 갈림길에 이르자 급히 방향을 꺾었다. 조금 전 헤어진 친구가 보였다. 백호는 숨을 멈췄다. 벅찬 숨까지 모두 끌어모아 포효했다.
“노오구우우시이이이익!”
뒤를 돌아본 구식은 한겨울에 어울리는 낯이 되었다. 아주 새하얘졌다. 주택가에 등장한 짐승의 포효에 어느 누가 일사불란하게 대응할쏘냐. 먹잇감은 그대로 멱살을 잡혀 ‘으컥’ 이라는 가련한 의성어만 뱉었다. 그가 기절을 하든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이 되든 눈에 요만큼도 안 들어오는 백호가 붙잡은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네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언제는 미팅 안 한댔잖아! 다 티 난다며! 가만히 냅두는 게 도와주는 거랬으면서 멋대로 잘도-! 허무함과 황당함이 분노와 적절히 섞여 최상의 각성제가 되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노구식이 뭐냐, 노구식 일가도 번쩍 들 수 있을 법했다. 백호의 불같은 추궁에 얼음 동상이던 구식이 점차 사람의 눈을 되찾아갔다. 균열이 간 눈썹으로 백호를 꼬나보더니 급히 한 손을 들어 발언권을 제시했다.
“뭐, 뭔 소리야? 뭘 도와? 여름 방학 전에 그거? 너희 설마 아직도 안 풀었냐?”
이제 구식은 멱살 잡힌 손을 쳐댔다. 백호가 내려주자 잔뜩 구겨진 옷가지를 의미 없이 털었다. 구식은 꽤 억울해했다.
“이미 한참 지난 이야기잖아? 그 이후로 별말 없었으니 당연히 화해했겠거니 싶었지. 이 미팅은 그거랑 별개라고. 네가 연애 금지령도 풀었겠다, 청춘도 아깝겠다, 우리 사이 모두 모두 좋은 거 같으니 꺼낸 얘긴데… 네가 방금 한 말은 내 생각이 틀렸단 뜻이냐? 아직 호열이랑 뭐가 남았어?”
꾸밈없는 지적에 백호가 되레 움찔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됐네.”
구식이 심드렁히 양손을 깍지 껴 뒤통수를 감쌌다. 안절부절못하는 백호와 달리 구식은 이 사건을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아까 호열이 반응 멀쩡했잖냐. 싫어하는 눈치도 아녔고. 나야 사정은 다 모르지만 내 보기에 걔 지금 괜찮아. 너도 좋다고 해야지.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국 네가 원하는 방향대로 된 거잖아?”
…그런가? 백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얼버무리며 구식과 헤어지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섰다. 이건 좋은 상황인가? 아니, 맞다, 이건 좋은 일이다. 바라지 마지않던 상황 아닌가. 이렇게나 자연스레 미팅을 조성하다니. 마침내 호열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 환경이 만들어졌다. 한 학기 전의 강백호라면 도무지 해낼 수 없던 일이다. 아니, 미팅을 받아들인 자체만으로 목적을 이룬 거 아닐까? 실연의 상처는 진작 나았을지도 모른다. 백호가 눈치 없어 미처 깨닫지 못한 거다. 이 얼마나 안심인가! 백호는 호열이 대견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사내자식답게, 씩씩하게 털어내서는, 벌써 백호를 잊고…
…벌써?
두 다리가 우뚝 멈췄다. 생각도 멈췄다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길 한가운데에 선 강백호는 지나간 여름을 회상했다. 반년 조금 안 되는 과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호열은 그 나날을 길게 보냈다. 최대한 길게 늘여 천천히 마음을 버려뒀다. 맘 구석 하나를 정리하는데 반년은 충분히 차고 넘칠 기간일 테다.
반면 백호에게는 지난 반년이 짧았다. 농구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 그 외는 눈 깜짝할 새에 스쳐 지나갔다. 그렇기에 호열을 상처 입혔던 밤이 엊그제 같기만 했다. 눈앞에 양호열을 생생히 세워 반년간 줄곧 그 밤을 찾아갔다.
반년 내내 양호열을 생각했다.
할 수 있으면 당장 그랬어!
손으로 입을 덮었다. 기억이 입술 사이로 나왔다. 작고 귀엽고 차분한 여자애. 호열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호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할 수만 있으면 당장 그럴 거라고. 그렇담 지금의 호열은, 여름을 떠난 호열은 그날의 바램을 이룬 걸까.
백호는 반짝이는 두 눈을 떠올렸다. 중학생 시절의 수정이. 백호를 설레게 하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사실은 전혀 백호를 좋아하는 게 아녔던, 그 반짝임은 진실이었으나 담긴 감정은 백호의 착각에 불과했던. 백호는 호열에게도 그런 착각을 뒤집어씌웠나? 여전히 그가… 백호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착각을 해 온 걸까.
하지만 눈길은 그대로였는걸. 대상 없는 항변이 나왔다. 수정이와 다르게 호열이는 원래 날 좋아했잖아. 나를 좋아했던 게 맞잖아. 예나 지금이나 눈빛이 한결같은데, 그럼 마음도 그대로인 거 아냐?
반박도 즉시 나왔다. 그 녀석 속내 감추기에는 도가 텄으니까. 눈빛 같은 걸로는 알 수 없지. 언제나 그랬지. 나는 걔가 날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몰라. 직접 말해줘야 겨우 안다고.
강백호를 좋아하지 않는 양호열. 상상도 못 해 본 문장이다. 떠올린 것만으로 뇌에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호열이 백호를 연애 대상으로 보는 것도 상상해본 적 없지만 이 가정도 마찬가지다. 백호에게 모든 종류의 호감이 사라진 호열. 더 이상 백호를 예뻐하지 않는 호열…
“여기서 뭐 해?”
집에 갔어야 할 호열이 백호 앞에 나타났다. 호열은 짝다리를 짚은 채 엄지로 뒤편을 가리켰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너 따라가다 중간에 놓쳤어. 어디 갔다가 온 거야? 물건은, 잃어버렸어? 왜 이리 울상이야?”
그러니까 저 변함없는 눈동자가 어느 순간부터 꾸며낸 것이라면-
“너 미팅 갈 거냐?”
“어?”
예상 못한 소리를 들은 호열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꿍꿍이인가 백호를 노려보길 수 초, 곧이어 어깨를 으쓱였다. 안 갈 건 없지? 호의적인 반응에 백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런 경험도 괜찮을 거 같은데. 요새 재밌는 일이 없기도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호열의 낯은 무던했다. 백호를 의식하지 않는 듯한, 지난여름을 한참 전에 지워낸 것만 같은 얼굴. 직면한 현실에 속이 메슥거렸다. 왜 나는, 호열이가 이러는 게 불편하지. 이 마음이 얼굴에도 떠올랐는지 호열이 돌연 백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너 괜찮냐? 왜 그래? 왜 이러는 거야?
그러게. 나 지금 왜 이러지? 호열을 시원하게 뻥 차버린 건 자신인데, 반년 전만 해도 호열의 고백이 껄끄러웠는데, 친구로 지내자느니 미안하다느니 구차한 변명을 대가며 거절했는데, 한참 지난 지금 이러고 있을까.
백호는 호열의 물음에 어떤 대답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 개월, 육 개월은 누군가를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루만에도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백호는 그 사실을 예전부터 알았다.
반대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방금 깨달았다….
“야, 백호야. 강백호. 대체 왜 이래? 속이 안 좋아? 물건 못 찾아서 그래? 같이 찾으러 가자. 다시 한번 학교로 가보자. 찾다 보면 분명 나올 거야.”
다급히 백호를 부르는 호열의 얼굴에는 걱정만이 가득했다. 그저 친구로만 바라보는 너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사랑의 반짝거림이 사라진 나는 어떤 모습이야?
백호는 호열이 제 진짜 모습을 알아차릴까 봐 두려워졌다. 호열은 줄곧 백호를 멋지게 봐줬지만 실상은 다른 걸 백호는 안다. 감당 안 되게 커다랗고 얼굴은 사납다. 걸핏하면 발끈하는 데다가 수정과 석영이 같은 말인 것도 모르는 자신을 지긋지긋해하면 어쩌지. 호열에게만큼은 미움받기 싫다. 그가 여느 여자애들처럼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본다면 분명 견딜 수 없다.
게다가 이미 나는 호열이가 좋아졌단 말이야.
말이 턱에서 툭툭 걸렸다. 백호는 지금 가망 없는 고백을 해야 한다. 미팅을 가겠다는 호열을 뜯어말려야 한다. 무슨 자격으로. 먼젓번 실연을 선사한 주제에 이제 와서. 매섭게 손을 쳐내는 호열이 눈앞에 그려졌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맞이해야 할 거절에 벌써 서러운 울음이 나왔다. 이대로 그냥 엉엉 울어서 호열의 머릿속에 미팅을 지워버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랬다.
“미팅 가지 마, 호열아.”
그래도 백호는 해야 할 말을 꺼냈다. 호열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려고. 호열이 먼저 체면 따위 상관 안 하고 그에게 고백해주었다. 백호 또한 호열처럼 사나이답게 맞서야 한다. 그게 비록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모양새여도, 너무 늦었다며 뻥 차이는 게 확정이어도 그래야만 한다. 호열을 생각한다면 꼭 그래야 한다.
“나 이제 네가 좋아….”
그래도 조금의 욕심을 부리자면 그가 여전히 백호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속내를 밝히자 꾸역꾸역 참은 눈물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백호는 볼썽사납게 훌쩍이며 호열의 소매를 잡았다. 너무 늦게 대답한 건 나도 아는데 한 번만 봐줘. 다시 날 좋아해 줘. 어려운 부탁 아니잖아. 내 부탁 잘 들어줬잖아. 내가 많이 노력할 테니까, 호열아아-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용케 할 말은 다 했다. 물기 어린 볼이 따끔거렸다. 이 추운 날에 실연의 상처가 가슴을 뻥 뚫을 걸 생각하면 배는 서럽다. 백호는 눈물 콧물이 얼어가든 말든 계속 울었다.
호열은 말이 없었다. 백호는 조용한 그와 대면하는 게 무서웠다. 정확히는 침묵의 이유를 듣는 게 무서웠다. 소매 끝을 더 구겨 잡았다. 땡깡으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날밤이 새도록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호열은 단호한 면이 있으니까, 결국 백호는 현실을 받아들여야겠지….
손등에서 따끔함이 느껴졌다. 뜨거운 물방울이 백호의 손 위로 떨어졌다. 호열을 잡은 손이다. 백호는 흠뻑 젖은 눈가를 닦아 시야를 깨끗하게 했다. 차게 식은 몸은 어느새 덜덜 떨렸다. 호열이도 추울 텐데. 나란히 감기에 걸리면 더 원망할지도 모른다. 호열의 상태를 보려 고개를 들자, 백호는 한순간 울음을 그쳤다.
호열이 울고 있었다. 백호만큼 얼굴을 구기며. 못내 야속하다는 듯 노려보며. 눈이 마주치자 호열은 제 눈을 벅벅 닦아냈다. 귀 끝까지 시뻘게져서는 백호의 옷깃을 잡았다. 코앞까지 들이민 얼굴은 원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기쁨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바보, 왜 이렇게 느려. 너 정말 느려터졌어, 강백호.”
호열의 손끝이 백호의 눈가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에 백호가 흠칫 눈을 감자 호열은 살짝 손을 떼었다가 그대로 목으로 옮겨 끌어안았다. 강한 압박이 백호를 조였다. 옷감을 타고 체온이 번져갔다. 눈물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들렸다. 호열이 울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나 너 때문에 마음고생 엄청 했거든? 너 안 봐줄 거야. 내가 힘들었던 만큼 너도 고생시킬 거야. 내 청춘이고 뭐고 다 도루묵 됐으니까 나도 네 옆에서 엄청 눌러앉을 거야. 그래야 직성이 풀리겠어. 발 빼기 금지야. 절대 안 봐줘.”
호열은 코를 킁, 훌쩍이며 백호의 머리에 제 머리를 비볐다. 각오 단단히 해. 으름 놓는 말투에도 그 끝에는 바라던 애정이 있어서, 백호는 밀려오는 감동에 휩쓸려 호열을 꽉 옭아맸다. 그럴게. 나도 그럴게. 나도 내 청춘 너한테 다 바칠게. 부릅뜬 두 눈에는 스산한 겨울 구름만이 보였지만 상관 없었다. 맞닿은 가슴팍, 붙잡은 팔다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온기가 전해졌다. 등에 얹은 손을 올려 목덜미를 짚었다. 마주친 시선에서 따뜻한 애정이 흘러나왔다.
백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호열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반쯤 뜬 눈은 여전히 빛을 내었고 입가의 궤적은 남풍을 닮아 완만히 올라갔다. 닿아오는 바람에 백호도 느리게 눈을 감았다.
입술 끝에 내린 봄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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