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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바네 단편집 <진부한 연애 소설> 4. 인사의 방법: 바네사 테레즈 왕녀에게 부치는 마지막 편지

 

 

인사의 방법 :

바네사 테레즈 왕녀에게 부치는 마지막 편지

 

 

  

 

그리운 바네사에게.

바네사. 올가 파블리첸코 입니다. 잘 계시는지.

이렇게 적고 보니 지나치게 경직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본디 그런 성질이지만, 편지에서까지 딱딱하게 굴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인사말을 다시 적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바네사, 당신의 올가입니다. 어찌, 잘 계시는지.

이윽고 재건된 당신의 소중한 왕국에서 무탈하게 지내고 계십니까. 실은 안부를 따로 묻지 않아도 평안하시겠거니 해서, 흔한 표현들에 따라 지껄여보는 안녕 인사입니다. 큰 뜻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여쭙니다. 당신은 무탈하게 지내고 계십니까.

한 자 한 자를 쓰고 있는 지금은 한밤중입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빗줄기가 창문 두드리는 소음이 밤새 계속될 듯합니다. 벽난로에 장작을 잔뜩 넣어두어서 춥지는 않습니다. 오늘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이 밤을 관통하는 작은 촛불 하나는 생각 이상으로 큰 위안이 됩니다.

무심코 올려다본 아침의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었습니다. 진회색의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눈이 왔으면 했는데, 오후의 허리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듯하던 눈은 금방 비로 변했습니다. 낮 기온이 겨울치곤 따스했어서일 겁니다.

하지만 차라리 비가 내린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발론의 늦겨울은 매우 건조하니 말입니다. 그 탓인지 오늘 점심 식사를 끝내고 이를 닦던 중 코피가 조금 났습니다. 며칠째 코감기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물로 코를 풀다가 혈관이 터진 듯합니다.

이 이야기를 쓸까 말까 조금 고민했는데… 이 첫 장은 세 번째로 다시 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름 철자 하나를 틀렸고, 다음은 펜촉이 종이에 걸려 잉크가 튀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사말이 영 별로여서 망설임 없이 구겨버렸습니다.

바네사, 제가 당신의 편지에 오랫동안 답장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수많고 어지러운 문장들을 나에게 보이기 위해 당신은 아마도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상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상 덕분에 나는 괜찮았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다섯 차례… 를 곱씹어 읽은 후 벽난로 속으로 당신의 편지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습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답장을 바로 하려고 했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속마음을 솔직히 써내려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행여 기운을 차려 써재꼈을지라도 당장 부칠 용기 또한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잘 알잖습니까, 나란 인간을. 당신만이 알고 있는 올가 파블리첸코는 원래도 그랬었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말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니다. 저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며 당신은 굉장히 의연했을지도 모른다고.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길고 긴 편지지를 술술 채워나갔을 거라고. 적어도 제가 알던 당신은 항상 당당하고 꼿꼿했으니 말입니다.

나의 답장을 기다렸는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뒤늦게서야 안부를 전해봅니다. 나는 그럭저럭 잘 있는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실 이게 ‘잘’인지 ‘아닌지’ 가늠이 안 되어서입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서 잘 있는 듯하면서도, 못된 광대처럼 나를 둘러싼 상념들이 혼자가 된 나를 굉장히 괴롭혀댑니다.

지겹고 고까운 상념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숲의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에도, 고요히 흘러가는 시냇물에도, 불타는 주홍의 노을과 발치에 걸리는 달의 그림자에도 빌어먹을 상념들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외면하고 도망쳐도 그것들은 굉장히 빠르고 강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죄 당신입니다.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모든 곳에 바네사 당신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골초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담뱃값으로 나가는 돈이 제법 됩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였을 때 당신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 당신이 피우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질 거예요. 그 연기 속에서 당신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납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담배 같은 건 피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나를 다시 마주할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저는 결국 담배를 피우지 않았어요’.

최근에는 가끔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현역이었을 때는 반드시 삼가던 것을, 퇴역군인이 된 지금 럼이나 브랜디 두어 모금 정도는 꽤 도움이 됩니다. 그런 술을 조금 마시고 누우면 불면증을 누르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예전보다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대륙 동맹의 맹주인 아발론의 군주가 감사하게도 왕성의 도서관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해주어서, 일주일에 적어도 책 두 권 정도는 완독하는 거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전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군인의 길만을 오래 걸어오느라 시야가 좁은 제게 독서는 훌륭하고 다정한 선생님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이윽고 당신에게 답장을 쓸 생각이 든 엊그제에는 이상하게도 가벼운 연애소설이 보고 싶었습니다. 얇고 활자가 작은 중편의 그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어 순식간에 전부를 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는데 어쩐지 눈물이 나더군요.

당신과 처음으로 함께 했던 밤이 떠오릅니다. 함께 올려다본 별이 빛나고 있었고,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한나절의 밀물 같았고, 봄이 목전이었지만 제법 서늘했던 그날 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나누어 공유했지만… 이제 똑똑히 언급할 수 있는 것은 타오르는 불길 같던 당신의 체온뿐입니다. 그 온기에 감사했습니다. 아주 많이.

그리운 바네사. 나는 한때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따스한 봄에는 꿀이 돋은 꽃을 따먹고,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냇가에 종아리까지 담가 물장난을 치고, 가을에는 밤이나 도토리를 줍고, 겨울에는 서로에게 이마를 묻어 체온을 나누고. 같은 책을 읽고, 발걸음을 나란히 하여 산책을 하고, 부드러운 빵과 스튜를 먹고. 소박한 미소가 지어지는 삶을.

체온들. 당신의 체온들. 내가 원했으며 기대했던 그 체온들. 어떤 것들은 과거에 존재했고, 어떤 것들은 허망한 상상 속에서 식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당신은 모두 잊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합니다만…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바네사 당신에게, 이윽고 진중한 사과를 표합니다.

내 귓가에 입술이 닳도록 사랑해요, 사랑해요, 속삭여주던 당신과는 달리,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 많이 늦어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사과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사과합니다. 아마 예전의 당신은 굉장히 속상했을 것입니다.

이유를 이제야 고백합니다. 나는 무서웠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많은 것들은 전시의 화마에 죽거나, 다치거나,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말 자체가 일종의 저주처럼 느껴졌습니다. 겹겹이 씌워진 주박 같았습니다.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었습니다. 그랬던 나는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를 바로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건 바로 바네사 당신이었는데. 그걸 깨달은 지금 다시 한 번 사과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소리 내어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당신에게 사랑 고백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대도 미래가 변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했듯, 바네사 당신과 영원을 함께하는 꿈을 꾸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상상이었을지. 감히 일개 퇴역군인이, 한 나라의 왕녀와.

그래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재차 고백합니다. 오늘의 나는 그간 삼갔던 표현으로, 당신을 오롯이 내려놓습니다.

불태웠긴 했어도 다섯 번이나 읽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협약에 따른 국혼.

붕괴 직전까지 갔었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다시는 없는 기회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태 나는 건방지게도 당신은 괜찮았을 거란 뉘앙스로 떠들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괴롭습니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꿈꾸던 미래가 어그러지는 것이 싫었을 겁니다. 당신답지 못하게 의연하지도 않았을 거고. 결국 울어버렸을 겁니다. 그 증거로 한참 비뚤어지게 찍힌 직인을 보았습니다. 흔들린 글씨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번진 눈물 자국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이해해보려 합니다. 당신을, 당신의 국가를, 당신의 국민들을, 당신의 운명을.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미워하겠습니다. 대의 앞에 버려진 내가, 여전히 나의 영혼까지 바칠 수 있는 당신을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을 용서하지 말라 하셔서, 오히려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친애하는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왕녀님.

왕녀님의 적들은 모조리 창과 방패의 위세가 꺾여 왕녀님께 아무 해악도 끼치지 못하길 바랍니다. 왕녀님의 국가는 언제나 비옥하며 부유해 아무 굶주림이 없길 바랍니다. 왕녀님의 국민들이 흔들리지 않는 평화 속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왕녀님과 왕녀님의 자손 또 그들의 자손과 자손들이 대대손손 번창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그만 펜을 놓겠습니다. 말이 길어지면 생각이 짧아진다 들었습니다. 저, 올가 파블리첸코는 알드 룬의 고귀한 왕녀님께, 거짓 없는 진심을 다해 적은 편지를 이만 접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올가 파블리첸코 드림.

 

추신.

사실 제가 왕녀님을 미워할 자격이 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되도록 죽을 만큼, 정말 죽을 만큼 왕녀님을 미워하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러하니 부디 행복하십시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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