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올가바네 단편집 <진부한 연애 소설> 5. 모든 것이 그대를 부수고 짓밟고 디뎌: 전쟁의 파편

모든 것이 그대를 부수고 짓밟고 디뎌 :

전쟁의 파편

 

 

 

 

 

1. 빌어처먹을 전쟁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고, 공포의 종식을 기원하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모든 것이 원래를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상이 하도 깊어 한없는 거북이 같았지만, 어쨌거나 본디를 향하여 더듬더듬 나아갔다. 이윽고 도래한 평화였다. 봄 같은 따사로움과 하나, 둘 자리 잡아가는 안온함에 나는 그럭저럭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돌아갈 곳의 부재는 애써 외면한 채.

폭풍이 소멸한 듯 느긋해진 기류 속, 여태 씌여졌던 ‘파블리첸코 중령’은 썩 필요 없는 프레임이 되어버렸다. 안온함 속 평범한 시민 ‘올가 파블리첸코’로 살아가도 충분하게 되었다. 구원 같은 전장의 영웅은 사실 기대의 소모품일지도 모른다. 폭력이 쏟아낸 달큰한 배설물일지도 모른다. 내다 버리기로 마음먹은 애착 인형일지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짊어왔던 군인의 지위를 완전히 내려놓은 날에는 하늘이 맑고 바람이 좋았다. 수많은 것을 상실한 것만 같은 기분에 남몰래 울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아주 조금.

골동품만큼은 아니어도 살아온 세월이 짧지는 않다. 재앙에 대한 온전한 자각을 시작으로, 제국의 최후까지 하루하루를 긴장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투쟁은 지독하게 외로웠고, 나는 미친 자처럼 괴로웠다.

그따위로 힘겹게 보내왔으면 이제는 잘 좀 살아내보기라도 하지. 빌어먹게도 나는 여전히 아팠다. 대충 짜내버리곤 방치했던 고름이 흉의 바닥에 남아있었다. 완전히 긁어내지 못해 썩은 것들을 내내 껴안아 앓았다. 키클롭스를 끼곤 전장을 누볐던 과거의 내가 종종 악을 썼다.

올가, 올가 파블리첸코, 네가 어떻게 날 버려? 네가 어떻게 날 외면해? 네가 그러면 행복할 줄 알아? 네가? 아직도 악몽에 기꺼이 시달리는 네가?

길어지는 심장의 신경질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들고 있던 물컵을 함부로 내던졌다. 유리의 파열음이 밀물 같았다. 수류탄을 연상했고, 웃었다. 진절머리가 나 죽겠어서. 흩어진 파편들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듯 방을 나섰다.

주머니로 손을 푹 찔러 넣은 나는 굳이 거울을 볼 필요도 없다. 메마르고 삭막한 표정. 어깨를 조금 떨었다. 여태 과거를 걷고 또 걷는 나는 흘러간 전시가 그리운 걸까. 잃어버린 중령의 타이틀이 아쉬운 걸까.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왕녀 -더 이상 왕녀 신분이 아니지만 나는 이 호칭을 아직도 내치지 못했다- 가 머무는 곳은 왕성 밖 민간인 거주지역이다. 내가 지내는 아발론의 왕성과는 느릿한 걸음으로 사, 오십 분 정도의 거리.맹주인 아발론의 군주가 상당히 좋은 제안들의 일련으로 왕성살이를 권했지만 단박에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런 왕녀와 대낮부터 와인에 취해 침대를 뒹굴었던 언젠가가 떠올랐다. 서로의 헐벗은 목덜미며 어깨, 팔, 가슴으로 너나없이 키스하던 중 왕녀는 싱그럽게 웃었다.

올가, 내가 왜 왕성에 들어가지 않았게요?

…글쎄요.

맞춰 봐요, 올가, 빨리-!

음…

내 마음을 읽어 보란 말이에요, 응?

그 뒤로 이어졌던 말 역시 기억한다.

어머, 올가,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예? 뭐가…?

음… 사랑스러움?

자신의 무거운 사랑을 싱거운 농담에 실어 산뜻하게 내보이던 여자였다. 훨씬 편한 왕성 생활을 외면한 이유는 모른다. 굳이 캐묻지 않은 나와, 끝내 알려주지 않았던 왕녀. 그쯤 숏컷이어서 산뜻한 느낌이었던 왕녀의 머리칼은 이제 제법 어깨를 덮는 기장이 되었다. 전쟁의 후폭풍 속에서 헤매는 나를 그럭저럭 살게 하던 연인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잘 한 것일까. 머리가 잠시 고민에 부리자, 쓸데없는 짓이랑 말라며 매서운 바람이 뺨을 후려갈긴다.

 

 

2. 멍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왕녀가 사는 아파트 앞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괜한 마음에 손끝으로 5층까지 헤아려보았다. 왕녀의 집은 아파트 꼭대기인 5층의 맨 왼쪽 방.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하지만 오늘부로 더 이상 찾으면 안 될.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냈다. 아파트 현관은 쉬이 열렸다. 저항 없는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5층까지 계단을 거침없이 걸어 올랐고, 이윽고 당도한 목적지의 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리곤 열려있는 문에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오늘은 분명 봉사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날일 텐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눈을 의심했다. 왕녀는 여태 봐왔던 모습 중 가장 흐트러진 자세로 거실의 둥근 테이블을 끼고 앉아있었다. 위아래로 살색인 속옷 차림이어서 자칫 나체로 보일법했다. 글라스로 가득 담긴 붉은 술과, 그 시뻘건 액체를 꿀떡꿀떡 잘도 넘기는 왕녀.

빈 잔을 가득 채우던 왕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크고 예쁜 눈이 수수하게 휘었다. 왕녀의 속눈썹은 길다.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길다.

“어머, 중령님, 웬일이세요?”

술에 취해 가벼이 휘청거리는 몸통과는 달리 발음은 꾹꾹 눌러쓰듯 또박또박했다.

“열쇠를… 돌려드리는 걸 잊어서.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현관 옆 탁자에 열쇠를 올려두고 돌아서는데,

“올가도 한 잔 할래요? 이거 되게 좋은 건데.”

나도 모르게 나온 한숨과 함께 발을 멈추었다. 나는 이별을 고했고 왕녀는 헤어짐을 수긍했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분명히 헤어졌는데. 쓰레기더미에 던져 내다 버리면 그만일 열쇠를 핑계로 삼은 나와, 기다렸다는 듯 답지 않게 흐트러져서는 술을 퍼마시는 왕녀. 우습다. 정말 우습다.

“올가는 술 안 좋아하는 거 알지만, 이거 정말 달다구요.”

“…….”

“관심 없어요?”

“…가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당기려는데,

“이 와인, 우리 첫 키스보다 달달할 걸요?”

덜컥, 뒷덜미를 붙들렸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눈웃음을 지어보인 왕녀는 호일도 벗겨내지 않은 새 와인병을 싱그럽게 흔들어 보였다.

“이거 진짜 괜찮다니까요. 중령님도 후회하지 않을 걸요?”

헐벗다시피 한 왕녀와 마주 앉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전쟁의 파편.

 

 

3. “어때요. 괜찮죠?”

확실히 와인은 매우 달았다. 점도가 높아 혀로 달라붙는 느낌도 좋았고, 떫은 기 없이 짙은 향도 좋았다. 술을 잘 모르는 나도 꽤 상급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왕녀와의 첫 키스보다 달진 않아 어쩐지 심술이 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지만 생각은 생각만으로 그친다. 심술에 더해진 이유 모를 섭섭함 뒤로 약간의 쓴웃음이 따라왔다.

왕녀가 부드럽게 턱을 괴었다. 삐딱 얹힌 고개. 제법 길어진 머리칼이 한 데로 우수수 쏠린다.

“중령님은 요새 뭐 하고 살아요?”

“…그냥… 책 읽고. 산책하고. 그럽니다.”

“그게 다예요?”

“…….”

“여전히 일기도 쓰고?”

“예.”

“그리고?”

“…….”

“그리고?”

“글쎄요. 그 외에는 딱히.”

“에이, 너무 재미없게 산다.”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예.”

“그럼 나랑 연애나 계속 하지.”

“……,”

“그럼 심심할 일 없으셨을 텐데.”

“심심하다곤 안 했습니다.”

“그런가? 흐응, 그렇구나아.”

묘하게 끌리는 말꼬리와 함께 왕녀는 새 잔을 들이켰다. 꿀떡꿀떡 잘도 마신다.

짙은 술 향에 비끼는 왕녀를 보고 있자니 쓸데없는 회상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서둘러 잔을 들었다. 그리곤 미련 없이 쭈욱 마셔냈다.

 

 

4. “…….”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무늬의 천장이었다. 언제 집에 돌아왔지…? 한참을 멍한 눈을 하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시트가 스륵 내려가며 맨몸이 드러났다. 옆을 돌아보았다. 나처럼 헐벗은 왕녀가 등을 돌려 모로 누워있었다.

그래, 그랬었지. 나 역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건배는 끝이 보이질 않았고. 비틀비틀 다가온 왕녀가 순식간에 입을 맞춰왔고. 왕녀의 귓가로 키스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젠장!

팔을 들어보았다. 옅고 붉은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있었다. 관계 시 흔적을 남겨두는 건 왕녀의 나쁜 버릇. 난감한 마른세수를 했다. 불현듯 시선이 돌아간 창밖은 한참 어두웠다.

잠들어 있는 왕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어깨는 오늘도 아름답다. 거기에 더해서 처절하고. 툭 튀어나온 양 날개뼈가 유난히 처연해 보였다. 한때는 저 불거진 곳에서 천사의 날개가 돋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다.

나의 왼쪽 어깨 어딘가를 무의식적으로 더듬었다. 손끝으로 가만 눌러보는 건, 언젠가 왕녀 대신으로 입은 총상의 흔적. 그날 왕녀는 참 많이도 울었다. 눈물에 익사하는 게 아닐까, 그 와중에 픽 웃을 정도로 울었다. 잘 아물어 더이상 아프지 않은, 하지만 건드려 보면 당시의 통증이 되살아나는 흉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득바득 버텨보던 사고는 까무룩 기절해 회상을 풀어놓는다.

“…왕녀님.”

“…….”

“…….”

“……바네사.”

생사의 경계가 휘몰아치던 전장 한가운데서의 고백. 단정하면서도 발랄한 어투에 묻어나오는 담백함과 약간의 수줍음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지. 눈치로 조금은 예감하고 있었지만, 상상과 실제는 굉장히 달랐다. 더듬더듬 서툴렀던 첫 키스는 참 달았었다.

회상에 발동이 걸리자, 무심코 자신을 드러낸 기억은 수많은 파편의 동지들을 와르르 되살려낸다. 내가 사랑했던 왕녀는 종종 웃었고, 왕녀가 사랑하는 나 역시 웃었고, 서로의 이마와 코끝과 두 뺨과 입술을 다정히 맞대고, 나른히 부비고, 살갑게 온기를 나누고, 숨을 짙게 엉키고… 셀 수도 없이 서로를 원하고… 강렬히 섞어대고… 나른하고 따스했던 날들이 아우성을 친다. 덧대어지는 건 상당한 두통.

“왕녀님.”

“…….”

“…바네사.”

“…….”

“바네사. 왜 저를 사랑하십니까.”

“…….”

“저는… 왜 당신을 떠나려고 할까요.”

“…….”

왕녀와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이 아닌 것도 처음 같았다. 길고 긴 전시의 사계절을 왕녀와 보내며 괴로운 순간순간들을 견뎠다. 봄의 왕녀는 뜯어온 들꽃들로 나의 머리칼을 엮어 길게 땋아주곤 했다. 여름의 왕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벗어들곤 개울에 발을 풍덩 담갔다. 가을의 왕녀는 단풍잎을 주워 나의 귓가에 꽂아주었고, 겨울의 왕녀는 불 앞에 앉아 장작을 차근차근 던져 넣곤 했다. 올가, 들어봐요,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참 좋지 않아요? 열이 오른 귓가로 소곤거리던 목소리. 올가, 올가, 올가…

기억 속 따스한 사계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다.

 

 

5. 방수 처리가 된 나무로

짜인 욕조는 나와 왕녀를 온전히 담기엔 부족했다. 따듯한 물이 가득한 욕조로 먼저 들은 쪽은 왕녀였다. 그녀가 성큼 들어앉자 찰박, 물이 넘쳐났다. 바닥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길을 눈으로 좇자니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이 났다. 청록색 타일의 바닥은 넘쳐난 물 때문에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다리부터 들였다. 천천히 내려앉자 다시금 왈칵, 물이 넘쳐났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굳게 다짐했다.

이미 머리를 적셔낸 왕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더운물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내내 긴장 중이었던 근육이 제법 풀어졌다. 물속으로 얼굴을 푹 처박았다, 요란스럽게 들었다. 얌전한 손이 불쑥 다가왔다. 피하지 못했다. 관성 같은 것일까. 이마와 뺨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어주는 손끝은 전쟁의 흔적이 제법 가시었다.

남의 기분도 모르고 평화롭게 오르는 김에 얼굴이 달기 시작했다. 흠씬 젖은 손을 뺨에 대어보았다. 맞닿은 피부의 경계선은 따스하지만, 그 아래는 피할 수 없는 한겨울 같다.

“…중령님.”

“예.”

“사랑해요.”

“…….”

“진짜로.”

“……”

“정말로.”

“…….”

“사랑해요, 올가.”

“…….”

노신사처럼 정중한, 새벽 별처럼 나직한, 아이처럼 개구진. 다채로운 고백들이 수증기가 꽉 들어찬 공간 속에서 나긋하게 공명한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시선을 피하여 푹 젖은 머리칼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왕녀의 낮은 웃음이 났다. 문득 울고 싶어졌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희뿌연 수증기 안이니, 들키지 않고도 흐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고개를 젓게 된다. 왕녀가 착각이라도 해버리면 안 되지 않을까.

작은 웃음소리 이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왕녀가 문득 말했다. 나긋한 목소리였다.

“혹시, 손톱을 깎아드려도 될까요, 올가?”

“…손톱?”

“많이 길으신 거 같아서…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올가가 손톱 소제를 너무 잘해서 말이에요.”

“…….”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한 번만 하게 해줘요, 올가.”

“…….”

“예? 중령님?”

“…….”

이번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6. 타닥, 타닥, 작은 소음이

소박한 거실을 울렸다. 나직하게 타오르는 불 앞에 나란히 앉은 왕녀와 나는 말이 없다. 한때의 우리는 이 작은 벽난로를 참 좋아했다. 내가 불쏘시개로 나무를 뒤적이면 왕녀는 알드 룬의 민요를 발랄한 허밍으로 불렀다. 나, 나나나- 나나- 나아- 날아오르는 불티를 보며 왕녀는 예쁘다! 작은 외침을 했고, 그러면 나는 일부러 불쏘시개를 더 크게 휘적였다. 문득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졌지만,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파편 같은 여자.

복잡해진 속을 제대로 들쑤시려는지, 가벼운 무게감이 상념에 지친 어깨 위로 톡, 내려앉았다. 그뿐이면 나을 것인데, 어깨로 제 뺨을 부비적 하고 비벼온다. 왕녀는 참 신기한 재주가 있다. 그렇게나 중량이 대단한 과거를, 이렇게나 쉬이 재현해낸다.

한참 부벼 오던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왕녀의 손끝으로 향했다. 어딘지 앳된 손끝이, 휴지도 놓지 않고 깎아 여기저기 튄 손톱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냈다. 마치 이삭줍기를 보는 듯했다. 왕녀는 한껏 모은 손톱 조각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곤 골똘히 들여다보다, 불 속으로 대충 던져버렸다.

“올가.”

“…….”

“중령님.”

“…….”

“나 참, 왜 대답을 안 해요? 사람이 부르는데.”

“…아… 미안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좀…”

“무슨 생각이요?”

“…….”

“흐응, 미안하면 나 좀 도와줄래요?”

벌떡 일어나 침실로 향하는 왕녀의 잠옷 원피스 자락이 팔랑팔랑. 저것은 언젠가 내가 선물로 주었던 것이었다. 깜짝 선물에 두 눈이 동그래졌던 왕녀에게 비싯 웃으며 ‘오다 주웠습니다’ 이따위 농담을 할 줄을 알았다, 그 시절의 나는.

돌아온 왕녀의 손에는 연두색 상자가 들려있었다. 어디서 봤다 싶더니만, 의아한 눈을 하다 번뜩 깨달았다. 왕녀에게 처음으로 선물했던 걸 담은 상자였다. 적당한 굽 높이에 앞코가 동그랗고 엇갈리는 끈을 묶을 수 있는 구두. 한 무릎을 꿇고 구두끈을 엮어주는 나의 정수리로 내려앉았던 손은 어찌나 따스했었던지.

내 옆으로 푹 주저앉은 왕녀가 연두색의 상자를 열었다.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시선이 갔다. 내용물들을 눈으로 가만가만 더듬었고, 눈썹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여태 맑았던 왕녀는 덤덤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또다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히 덤덤해진 표정과는 달리 왕녀의 목소리는 살짝 높았다. 마치 흥분감에 휩싸인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올가한테서 처음 받은 편지에요. 제가 드린 편지의 답장. 올가… 중령님의 글씨가 이렇게 멋들어진 걸 알았으면 진작에 편지를 드렸을 텐데.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올가가 써줬던 답장들이에요. 그리고 이건… 기억나요? 우리 서로 참 좋을 때 주고받았던 교환일기. 올가, 그거 기억나요? 그날그날 일기 쓴 종이 끄트머리에, 오늘은 몇 번이나 키클롭스를 당겼는지 작게 기록했었잖아요. 이거 봐요, 여기는 3, 음… 여기는 1, 여기는, 2, 여기는… 6… 여섯 번 방아쇠를 당겼던 이 날에 올가가 되게 가라앉아있었던 게 생각나네요. 덩달아 저도 우울했었는데. 이거는, 올가가 좋아한댔던 로맨스 소설. 제목이… 진부한 연애소설. 무지 어려운 책만 읽을 거 같은데, 꽤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뭐, 그래서 더 좋았던 거지만요. 이건… 팬던트 목걸이… 딱 한 번 집에서 해보고 바로 보관해두었지 뭐에요. 올가 성격상 왜 선물 준 거 안 하냐고 물을 거 같진 않아서 조금은 맘이 편했죠. 왜 안 했었냐면요, 음, 그냥, 아까웠어요. 이렇게 예쁜 걸… 팬던트 안에는, 올가! 이거 봐요! 이거 기억나요? 올가가 주었던 네 잎 클로버! 이렇게 잎이 큰 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책 사이에 꽂아 잘 말려두었죠. 좋은데, 조금 아쉬운 건 수분이 빠지면서 색도 같이 살짝 바래버린 거? 그리고, 또 이건…”

처음 선물했던 구두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상자 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불 속으로 던져 넣는 손을 멀거니 보았다. 우두커니 보고만 있다가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 편지가 많았다. 왕녀를 도와 편지 하나하나를 벽난로로 던져 넣었다. 불이 탄다. 편지가 탄다. 추억들이 탄다. 화장되는 것들은 이제 돌이키지 못한다…

이윽고 속이 텅 빈 종이상자를 발치에 두고 가만 보던 왕녀가 나를 향해 웃었다.

“사랑해요, 올가.”

“…….”

“그러니까, 이젠 다시 오지 말아요.”

연두색의 상자가 벽난로 안으로 휙 들어간다. 작지도 크지도 않았던 상자가 불살라질수록 왕녀의 입매가 묘하게 솟았다. 나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축축해진 뺨을 덤덤히 훔쳐내었다.

fin.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