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紅禍.
잡지 벽성霹聲 5호간, 백상白象 최해무崔解無 데-뷰작 中 한 대목.
등장 인물.
운 - 부둣가에서 하역 일을 하는 조선인 잡부.
송제 - 하역장 노무감독, 국적 불명.
석매 - 바닷가 큰당골네.
후동 어머니 - 객줏집 주인.
조선인 군중들.
중략.
2막.
야밤 부둣가 근처, 파도 소리가 세차다. 세 칸짜리 당골네 집, 맨 오른쪽 신당 방에 불이 밝히어져 있다. 바람벽이 겨우 버티고 선 모양새에 해풍 절은 서까래가 처마 밑으로 기일게 뻗었다. 비가 추적추적하여 그 아래로 물방울이 시시때때로 떨어진다. 방 안에는 한 때에 울긋불긋했을 무신도가 걸리어져 있고, 양 옆에 도자기 불꽃과 종이꽃 서너 개가 늘어서 있다. 운, 양 무릎 꿇어 앉았다. 큰당골네는 방울 쥔 채로 가부좌를 틀었다.
석매 : 운이,
운 : 예, 당골네.
석매 : 나 인제 죽을 때가 다 된 삭신일세.
운 : (석매의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벌써 세 사람이나 죽어부렀소.
석매 : 목청이야 빌리어 줄 수는 있어두 굿은 안 디야.
운 : 고 창고 안에 뭣이 들었는지 아시잖소.
석매 : 신령님이 하여 줄 수 있는 일이 아녀.
운 : 내가 네 사람 째 될 지도 모르오.
석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방울이 쨍그랑, 흔들리자 운이 몸을 움찔, 한다. 방울 세 개가 방바닥에 굴러 정신 사나운 소리를 낸다. 운과 석매, 동시에 물끄러미 그것을 본다. 석매, 긴 한숨을 쉬고 도로 가부좌 틀어 앉는다.
석매 : 날 더러 죽으라는고나.
운 : 당골님네가 워째 죽소!
석매 : (목소리 아주 낮추어 위협적으로) 느이네가 안 졸라두 신령님께선 고렇게 말하신다.
운 : 무어요?
석매, 방울을 두어 번 흔든다. 눈을 감았다가, 도로 뜰 때에 늙어 구부정한 노인이 아닌 꼿꼿한 젊은이의 폼이다. 운, 얼른 조아린다.
석매 : 운아,
운 : 예, 어르신.
석매 : 사당패적에 너 어름산이였다지?
운 : ......예.
석매 : 너 그러니 하역 일 할 적에두 멋모르구 펄떡펄떡 뛰어댕기는 꼴 하지 않니. 자, 보아라, 인제 네가 탈 줄이 없는 판이다. 너 장구재비는 해 본 적 있노냐.
운 : 몇 개만 맞추어 볼 줄 압니다.
석매 : 되얐다!
석매, 자리에서 번뜩 일어선다. 방울을 쨍그랑, 떨구어 두고 먼 산 바라보며 큰 칼 집어다 어깨에 얹고서 방을 한 번 휘돌아친다. 운, 조아린 몸 그대로 고개 들고. 석매, 무섭게 뇌까린다. 저 멀리 중모리 장단 얹히고.
석매 : 자아, 자아. 시방삼세 보살님들이 나더러 인제 가라구 하시는고나! 요 망할 것아. 창새기 빠진 꼴 하여 걷는 이들이 부둣가에서 밤낮 으흐흐, 으흐흐, 당골님네, 나 좀 안아 주소, 손이라두 부여 잡아 주소, 으흐흐, 하고 우는 소리 해대는 것 너두 알지! 그래! 아이고, 할머님네, 나는 싫소, 아이고, 장군님네. 아이고, 아이고. 내 굿은 누가 하여 주지! 운이 너두 인제 눈이 다 멀었고나!
운 : 아니오!
석매 : 아니긴 무에 아냐! 귀鬼가 들렸고나! 이놈의 새끼! 이놈의 새끼!
석매, 들고 있던 칼을 냅다 던지고서 지전紙錢 잡아 쳐올린다. 꿇어앉은 운, 지전이 채찍이라도 된 듯 몸을 숫제 웅크려 버린다.
석매 : 보아라! 인제 굿거리 장단을 하여 주어야지! 요것이 내 굿이야. 요것이! 오온 숭한 것만 보다가, 염병 걸린 것마냥 뛰다가, 이 제자 삭신이 다 닳아 없소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곡하는 소리 내던 석매, 우뚝 멈추어 선다. 운, 고개를 다시 처든다. 마당으로 우르르 뛰쳐나가 하늘 본 채 우뚝 섰다.
석매 : 운아.
운 : 예,
석매 : 놋쇠 주발 구해 오니라. 쌀 석 말, 무명천 두 필, 탁주 한 동이, 창호지 여섯 필, 듣구 있지. 비린내 나는 놈들은 썩 물리구 산에서 난 것들만 가져다 상 차리그라. 아니, 간재미 무침 올려야지. 전복도 구할 수 있는가 보아라. (작게 훌쩍인다.) 아니, 가는 길에 무얼 그리 많이 묵고 싶어 환장했는가. 홍어애국이나 한 그럭. (어깨를 떤다.) 아니, 도야지 괴기도 삶아다가. (숫제 몸을 와들와들 떨며 주저앉아 운다.) 으허어엉.......
운, 뛰쳐나가 석매의 어깨 꼭 감싸 안고 고개 조아린다.
운 : 잘못했구만이라. 미안허오. 당골네, 우지 마오. 안 하문 되는 것 아뇨. 내 그 처녀 안 보믄 될 일 아뇨...!
석매 : 염병할눔의 새끼.
운 : 나보담 당골네 제사상 차리란 말은 하지 마오.내, 내 당골네 고향 진도서 젤로 좋은 전복 구해다 드릴 테니 제사상에 올리지 마소. 내 그 처녀 안 볼 테요. 아니 보고 평생 살라요.
석매 : 그러다간 네눔 제사상 먼첨 차릴 것이다.
운 : (침묵.)
석매 : 신령님이 하랍신다.
운 : ......당골네,
석매 : 인나서 주발부텀 구해라. 동네에 놋쇠가 싸그리 마르기 전에 손님 씻길 것은 냉겨 두어야 허니. (사이) 안 가고 뭣해.
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굴을 슥슥 문질러 닦고 깊이 반절을 한다. 퇴장. 석매는 하늘 본 채 여전히 남아 있다.
석매 : 불 나는고나. 방앳불인가. (사이) 봉홧불인가. (사이) 내 다비식인갑다.
석매, 갈 지之자 걸음으로 걸어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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