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31

할로윈

KAIMEI by TT

X□년 ▽월 O◇일

며칠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는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써주지 못했다. 구급차에는 가족만 함께 탈 수 있다고 해서 택시를 타고 쫓아가는 중이다.

 

X□년 ▽월 XX일

몇 가지 검사를 더 했다. 진단을 받았다.

 

X□년 ▽월 X△일

같이 살자고 했다. 제정신이니? 라길래 솔직히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X□년 ▽월 X▽일

퇴원했다. 약을 꼬박꼬박 먹으라며 당부하는데 한귀로 흘려듣는 것 같아서 잘 챙겨 먹이겠다고 했다. 병원에 있었던 며칠 내내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더니 눈밑이 거맸다. 우선은 바로 집에 데려가서 재웠다. 어제 침대 시트를 갈아놓길 잘했지. 자는 동안에 짐을 챙겨오기로 해서 일어나야 했는데, 그 짧은 새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밟혔다.

 

X□년 ☆월 □일

집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늘어난 거라고는 한 사람과 옷장 하나 분량의 옷걸이와 모두 처분해도 이것만은 가져와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던 와인 셀러뿐인데도. 나가고 들어올 때 반겨주는 목소리가 좋다. 샤워를 하고 품에 안고서 함께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고 부르고 영화를 본다. 같은 식사를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든다. 바라마지않던 일인데. 설레고 기쁜데도 중간중간 까무룩 잠들어있는 얼굴을 보면...

 

X□년 ◎월 O일

집안에 늘 술병이 굴러다닌다. 와인 셀러에 열심히 모아두던 와인이 한 병 두 병 사라질수록 굴러다니는 병도 늘어난다. 여러 브랜드의 여러 모양 병들은 세워두고 세워두어도 다음날이면 또다시 데굴데굴 신발장까지 굴러와있다. 한 번씩 속에서 짜증이 치솟아 오르다가도, 해쓱한 얼굴로 어서오라며 말갛게 웃는 걸 보면 흩어져버려서 곤란하다. 병을 다시 가지런히 세워두면 비틀거리며 곁에 다가와 기대온다. 점점 가벼워지는 무게가 신경쓰인다.

 

X□년 ◇월 △일

와인 셀러가 많이 비었다. 그만 마시는 게 어때, 걱정으로 내뱉은 말은, 이제껏 참아왔는데 뭐 어때―라는 말로 덮였다.

 

X□년 ◇월 □O일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늘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면 머리카락만 빠져나와 있는 이불 덩어리가 웅크린다. 이불 덩어리를 한 번 끌어안아주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가지런히 세워둔다. 굴러다니는 병을 제외하면 사람이 사는 공간인데도 청소할 거리가 거의 없다. 침대 옆에 둔 물이 거의 줄지 않았다. 뚜껑이 꽉 닫혀있기에 한 번 열었다가 헐겁게 닫아두었다. 지난번에 소분해둔 죽은 많이 줄었다. 매일 같은 맛이 지겨울까봐 소분하면서 볶아둔 고명을 조금씩 다르게 뿌려넣었다.

 

X□년 O#월 X▽일

술병은 이제 방문 근처를 굴러다니고 있다. 더욱 말라붙은 팔다리를 주물러준다. 잠에서 깨면 한 번씩 몸부림을 쳐서 다치지 않게 이불로 둘러안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너도 지겹지 않니? 악에 받힌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오고,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색색 어깨를 떨어가며 숨을 내쉰다. 떨림이 잦아들고 나면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을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준다. 혼탁한 눈과 눈이 마주친다.

 

X□년 OO월 ♡일

어젯밤부터 크게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냉각시트를 이마에 붙여주고 굳어있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주무르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색색 소리가 나지 않는 게 신경쓰여서 코밑에 손가락을 대어보기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동이 터올 즈음에야 눈꺼풀이 뜨였는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울었다. 아무런 흐느낌도 없이, 누워있는 얼굴의 그 눈꼬리를 따라 옆으로 흘러내리면서, 귓바퀴로도 흐르고 베개로도 흘렀다. 이제껏 아파서 몸부림치며 우는 것도 몇 번이나 봐왔지만, 진짜 우는 건 처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X□년 OO월 XX일

(따로 붙여둔 종이)

내가 떠나면 울어줘. 그치만 올해까지만이야. 올해가 지나고 나면 내 생각으로 울지 말아줘. 차라리 웃는 게 나을 것 같아. 너는 웃는 게 정말 예쁘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내년까지는 날 기억해줘. 사소한 거 하나에도 우리가 그랬었지―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잊어버려줘. 그리고 행복해야해. 작은 일 하나에도 기뻐해줘. 너는 내 행복이니까 내가 기뻐하고 행복해하면 나도 계속 행복할 거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고마워. 사랑해.

남아있는 와인 두 병은 선물이야. 돌아오는 네 생일, 내 생일에 한 병씩 마셔줘.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좋은 일 있을 때 마셔주는 게 더 기쁠 것 같기도 하고.

 

X□년 OX월 ◇일

침대 시트를 갈지 못하고 있다.

 

X□년 OX월 O◎일

집에는 더 이상 빈 병이 굴러다니지 않는다. 한쪽 벽면에 가지런히 나열해둔 여러 브랜드의 여러 모양 병들은 조금씩 먼지가 쌓이고 있다. 와인 셀러에는 단 두 병이 보관되어 있다. 서로의 생년에 만들어졌던 와인이다. 멋들어진 타이핑으로 쓰여진 연도 아래에 삐뚤빼뚤하게 날짜도 적어두었다. 병이 둥글어서 예쁘게 쓰이질 않는다며 투덜대던 게 선하다.

 

X□년 OX월 □O일

내일은 □X일일 거야. 아니, O□월이야. 나한테 올해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너무 짧았는데, 겨우 이 짧은 시간만 울 수 있게 해준 건 너무 가혹하잖아.

 

X□년 O△월 O☆일

일상을 살고 있다. 살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작은 일 하나에도 기뻐하라고 해서 요즘은 눈이 내리는 걸 보아도 그냥 웃는다. 동기 하나가 밥을 사준다고 했는데 약속이 있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 셀러에 남은 건 이제 한 병이다.

 

X□년 O♡월 X◎일

벚꽃이 폈다. 작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즈음에는 도시락을 싸서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었다. 서로 바빠진 탓에 그날만큼은 쉴 수 있도록 전날까지 둘 다 야근을 했었다. 코피가 날만큼 열심히 했다니까, 실없이 웃으면서 CD를 고르던 게 생각난다. 그때 무심코 넘기지 말걸.

 

X△년 ♡월 O#일

시간이 흐를수록 빈 자리가 당연해져간다. 우울과 무기력이 잠식되지 않게끔 노력하고 있다.

 

X△년 ♡월 O▽일

잊어달라고 했고 행복하라고 했다. 말하지 않은 모든 걸 스스로 상상하며 나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이 슬픔과 눈물은 관성이다. 빈자리를 채울 취미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동안 함께 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나만의 취미를 찾기가 어렵다.

 

X□년 O◎월 XX일

(엉망으로 뭉개진 글씨)보고 싶어.

 

X△년 O#일 □O일

집에 돌아왔는데 신발장에 빈 병이 굴러와 있었다. 도둑이 들었나 싶어 핸드폰을 들었는데 집안은 그대로였다. 병이 누워있었다. 신발장에도, 거실에도, 방에도. 마치 발자국처럼 놓여서. 방문을 열면 살짝 구겨진 이불이 빼꼼 젖혀지며 어서 와 인사를 할 것만 같다. 울지 말라고 해놓고서 사람을 울려버리는 건, 그래, 늘 네가 자주 하는 일이었지.

 

X△년 OO월 ♡일

오랜만에 청소를 하면서 빈 병에 쌓인 먼지도 깨끗이 닦아냈다. 굳이 바닥에 둘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다시 와인 셀러에 진열해두었다. 한 병만 들어 있었을 땐 쓸쓸해보였는데, 다시 가득 채워두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청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청소가 끝나면 나머지 한 병을 마시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손이 가지 않는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마시는 게 더 기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 때까지 계속 기억하고 있을게.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에 마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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