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메이 연성100제

004.

러시안 룰렛 or 캅카즈 룰렛

KAIMEI by TT

앞선 글 - 002. 가장 소중한 추억 : https://penxle.com/tt_/1543189411

탁.

책상 위에 놓인 건 권총 한 정이다.

“기회는 여섯 번, 당첨은 딱 하나야. 자, 순서를 정할까.”

 

그동안 카이토가 눈을 뜨기를 기다려왔던 건 아주 많았지만 그 중 특히 중요했던 일은 하루하루 늘어가는 병원비와 장기 휴직으로 인한 통상해고 조치였다. 병원비야 제 과실도 아닌 우연히 휩쓸린 사고 때문이었으니 어떻게든 해결되었으나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면구스럽더라도 복직 문의를 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포기했다. 눈 뜨지 못하던 동안 달라진 햇수가 자잘한 일들까지 처리하는 중에 또 달라져 버렸으니 얼굴에 아무리 두껍게 철판을 깔더라도 불가능했다.

이미 날짜를 보고 예상했대로 자취방은 계약이 만료된지 오래였다. 남아있던 생활물품은 몇 달 전에 처분했고 중요해보이는 개인소지품만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봐야 통장, 노트북, 앨범뿐이라고 했지만 그 외에 다른 게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앨범도 남겨두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카이토는 집주인에게 제 물품을 건네 받으면서 집주인이 인상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쉽게도 집주인 네는 빈방이 남아있지 않았다. 부동산에 가기 전에 소지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아보려 은행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카이토가 모아둔 돈은 이만큼이 아니었는데. 세부내역을 보니 공동 명의 계좌였다. 함께 등록된 이름은 ‘메이코’. 카이토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다. 그걸 보고 은행원이 뭐라고 했는지, 저는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은행을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카이토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받아온 서류에서 계속 그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목표 금액은 10억이야.’

‘그렇게까지?’

‘평생 같이 모을 거니까 크게 생각해봤지.’

‘그럼 우리 결혼은 말년에나 할 수 있겠네.’

‘……총 금액으로 하자. 쓰는 것도 포함해서. 중간 목표 금액은 얼마로 할까?’

까르르, 겹치듯 웃는 목소리가 뒤에서 지나간다. ―한 번.

“어!”

웃다가 들고 있던 공을 놓친 어린애가 공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도 따라 뛰어갔다. 방금 뭐였지? 분명 중요했는데.

 

자취방을 구했다. 매트리스와 세탁기, 싱크대, 작은 냉장고, 가스레인지가 옵션으로 딸린 작은 원룸이다. 월세가 싼 만큼 대중교통과는 적당히 거리가 있고 방음도 모자라지만 다시 취업해서 자리 잡기 전까지 있기에는 괜찮은 정도였다. 카이토는 노트북을 켜서 며칠동안의 일과를 또 반복했다. 취업 사이트에서 이런저런 회사를 살펴보며 이력서를 보낼만한 곳을 고르고, 자기소개서를 한 번 더 수정한다. 톡톡, 키패드 옆을 두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점심이 다 지나있다. 있는 걸 간단하게 꺼내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 오후에는 할 일이 있었다.

메모해둔 주소는 이전에 살던 자취방과 가까웠다. 겨우 몇 블록 거리의, 출퇴근 할 때마다 지나치던 길목에 있는 빌라였다. 카이토는 우편함 앞에서 호수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우편함이 비어있는 걸 보니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손을 올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문앞까지 가놓고서 초인종을 누르지는 못했다. 명패 이름이 다르다. 이 호수는 맞는데? 빌라 밖으로 뛰어내려가 주소지를 확인했다. 이 주소도 맞는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가 띵, 울리는 도착음을 듣고 몸을 수그렸다. 그래. 계좌 개설 당시 주소지라면 이럴 수도 있겠다……. 몇 년이 지났는데. 머리를 벅벅 긁고 다시 빌라 밖으로 나와서는 일단 머리를 뒤로 쭉 젖혀 하늘을 한 번 봤다. 너무 당황해버렸으니까 일단은 진정부터. 적당히 숨을 고르고 가까운 부동산을 찾았다. 연락이 닿은 빌라 관리인에게서 ‘메이코’ 씨는 이미 계약 만료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 년 전의 사고로 병원에 장기 입원한 상태였어서 짐은 모두 처분했다나. 그렇구나. 낯익은 상황이다 싶더니만 제가 겪은 일이었다.

카이토는 그 길로 병원을 찾았다. 퇴원한 후에도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들었지만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그 병원이다. 변명하자면 바쁘기도 했거니와 퇴원 당시 묘하게 술렁거리던 속이 기분 나빠서였다. 물론 이상이 없다고 느낀 점이 대부분의 몫이다. 어쨌든 지금은 괜찮았다. 카이토는 바로 접수처로 향했다. 접수처에 앉아있던 직원이 아는 척을 했다. 갈색 빛 도는 짧은 단발머리를 보고서 퇴원 수속을 도와줬던 직원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흔한 머리 모양인데도 이상하게 눈에 남아있었다. 이 직원뿐만은 아니고 길을 걷다 마주치는 갈색 빛 단발머리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카이토는 인파에 쓸려가다가도, 한적한 거리리에서도, 신호등을 건너다가도 멈춰섰다. 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득해지던 시야가 돌아왔다. 카이토는 가져온 서류철을 내밀었다.

“‘메이코’ 씨라고, 저랑 같은 사고로 입원한 사람이라는데 아직 병원에 있나요?”

“그 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카이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친지도 친구도 지인도 아니다. 공동 명의 계좌를 개설한 사이? 그게 대체 무슨 사인데?

“기본적으로 관계가 증명된 사람에 한해서만 안내를 드릴 수 있어서요. 모르시면 확인해드릴 수 없어요.”

직원이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펼쳐보지도 않은 서류철을 되돌려주었다. 카이토는 빼앗듯 받아들고 서류를 꺼내려다가 그만뒀다.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치솟았다가 의아해하는 직원의 표정을 보고나니 가라앉았다. 서류철을 가방에 챙겨넣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 귓가를 손가락으로 두 번 톡톡 두드렸다. “머리 풀렸어요.”

아까부터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귀 옆으로 빠져나와 있는 게 계속 신경 쓰였다. 직원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뒤돌아섰다. ―두 번. 병원 입구까지 걸어나왔을 때서야 헛웃음이 났다. 짜증은 그렇다 쳐도 갑자기 머리 이야기는 왜 했던 거야?

 

‘메이코’ 씨와의 계좌는 공동 명의지만 입금한 금액에 한해 출금이 자유롭다는 특약사항이 붙어있었다. 이런 조건을 붙일 거면 왜 공동 명의로 한 거야? 의미가 없잖아. 카이토는 누운 채로 서류를 팔락팔락 넘겼다. 믿기지가 않아서 은행에 다녀온 날부터 매일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아무리 봐도 서류 하단마다 적혀있는 건 제 서명이었고 제 인감이었다. 그 옆에는 깔끔한 글씨체로 ‘메이코’라고 적혀있다. 인감까지 어른스러운 모양새라서 본 적도 없지만 똑부러진 성격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카이토는 서류로 얼굴을 덮었다. 생각하지 않으려던 가정이 형태를 갖춰간다. 나는 기억에도 없는데.

이건 술이다. 카이토는 앨범 귀퉁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무언가 있을까 싶어 펼쳐본 앨범에는 온통 백지만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귀퉁이에 있는 이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낙서였다. 그래도 보자마자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리큐어 샵을 함께 운영하는 카페가 있는데, 추가금을 내면 메뉴에 리큐어를 섞어주었다. 그 가게의 아포가토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가게에 갔던 기억도 없으면서 맛있었다는 감상만 남아있다. 이건 ‘메이코’ 씨 영향인가? 그렇다면 한 번 직접 가보고 싶었다.

가게는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리큐어 샵과 카페를 가벽으로 분리해 놓았는데 리큐어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사실 직접 이런 가게를 방문해본 건 처음이라 비교군이 없긴 했다. 카이토는 한참 서성이며 구경하다가 메뉴에 추가할 리큐어로 그랑 마르니에를 골랐다.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기도 했고 설명으로 판단하건대 기억하는 맛도 이녀석인 것 같았다. 아포가토를 주문하고 한쪽 구석 자리로 몸을 밀어넣었다. 창밖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선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카이토는 손가락을 꾹 누르다가 저를 향해 걸어오는 직원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세 번. 넓적한 고블렛에 움큼 담겨 있는 아이스크림 위로 직원이 직접 리큐어를 흘려 넣어주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딱 반만큼 젖어들어갔다. 카이토는 조그만 숟가락으로 한 입 떠서 입에 물었다. 맛있다. 그런데 이걸 왜 먹으러 왔었지?

 

카페에서도 돌아오는 길에서도 계속 고민해봤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포기하자. 뭘 포기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걱정했던 금전 부분도 결국 제 돈을 인출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공동 명의라고 남의 돈까지 가져다 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애초에 그러려면 ‘메이코’ 씨 본인이 있기도 해야했다―, ‘메이코’ 씨를 찾아본 건 그냥 궁금해서였으니까.

집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늦은 밤이었다. 해가 다 질 무렵까지 앉아 있었으니 당연하긴 했다. 씻고 나자 눈이 너무 뻑뻑해서 바로 이불에 누웠다. 그리고 분명 잠들었을 텐데.

온통 어두운 공간이었다. 인지하자마자 눈 앞에서 내가 쓰러졌다.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서. 후두둑 소리를 내며 허물어진 몸이 스멀스멀 어둠에 삼켜졌다.

“한 번. 망설이질 않네. 들리니까 자신 있었나. 뭐, 다음은 누가 할래?”

‘카이토’가 묻는다. 휘 둘러보더니 지목한다.

“이번에는 네가 해.”

지목 당한 ‘카이토’가 화들짝 놀라더니 얼결에 총을 건네 받는다. 마구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가쁜 심호흡을 하며 총구를 머리에 가져다 댄다. 파열음이 났다. 무릎부터 고꾸라지는 몸을 어둠이 삼켜갔다.

“두 번. 아, 다행이다. 이 녀석이 이겼으면 짜증났을 거야. 비슷한 거에 눈을 돌리잖아. 저도 싫었을 걸. 그러니 당겼지.”

‘카이토’가 웃는다. 다음을 고르는 듯 느릿하게 시선을 돌린다. 그 옆에서 말없이 뻗어나간 손이 총을 쥐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탕! 하고 날아간다. 쓰러지는 건 아까보다 느렸다. 꼭 그만큼 어둠도 느리게 다가가 삼켰다.

“세―! 번. 놀랐네. 갑자기 다가와서.”

‘카이토’가 쓰러진 손가락에 걸려있는 총을 뽑아냈다.

“나머지는 아직인가? 아, 위화감이 없었구나. 그래서 뭘 기억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거야.”

‘카이토’의 입이 죽 찢어졌다. 그러더니 다른 ‘카이토’를 쏜다. 이번엔 털썩 소리가 나기도 전에 어둠이 몸을 삼켰다.

“네 번. 자, 이제 너와 나만 남았어. 확률은 반반이야. 누가 이길 것 같아? 카이토.”

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카이토’가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는 건 참 이상한 광경이다. 카이토는 눈을 피해야할지 마주 봐야할지를 고민하다가 침만 꿀꺽 삼켰다.

“너랑 나만 남았으니까 하는 말인데, 원래는 그냥 먹히면 끝이야. 생각나든 말든.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메□코가 자신을 나한테 줬단 말이지? 그러면 나는 다 먹어야 해. 너와의 관계성에서 남은 게 없을 때까지. 알겠어? 귀찮아 죽겠단 말야, 너 때문에.”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 없었는데 이번엔 무슨 행정적 문제니 어쩌구니, 자꾸 생각해내고 말이야. 짜증나고 귀찮고 피곤하고. 투덜거리면서 총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한다. 잠깐 눈치를 보다가 총을 빼앗아들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것이 제 손에 들어와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손이 덜덜 떨렸다. ‘카이토’는 제게 겨눠진 총구를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거 당겨서 내가 살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이기면 너는 평생 위화감을 느끼면서 □□코의 흔적을 더듬게 될 건데. 그러면 또 내가 나타나서 그걸 먹어 치워야 하겠지? 나는 솔직히 네가 이겼으면 좋겠어. 귀찮으니까. 나는 배 좀 고픈 것보다 귀찮은 게 더 싫다고. 그래서 내기를 건 거야. 이겨보라고 말이야. 네가 이기면 □□□를 기억할 수 있어. 네가 뭘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때. 너도 계속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기는 싫잖아.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당기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카이토는 제 관자놀이로 총구를 댔다가 뗐다. 이미 여러 발 발사된 총구가 뜨거웠다.

“그거 가지고 겁 먹으면 어떡해.”

손이 다가왔다.

 

카이토는 눈을 떴다. 누워서 한참 숨을 고른다. 들리는 건 제 숨소리뿐이다. 등이 흠뻑 젖어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실로 가는 동안 몇 번씩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악몽 때문인지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무슨 정신으로 샤워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저녁에 고민하다가 사온 그랑 마르니에를 꺼냈다. 제대로 마시는 법은 잘 몰라서 적당히 얼음잔을 만들어 부었다. 이게 온더락이던가. 물론 다르겠지만 큰 틀로는 아무래도. 홀짝이다가 부들대던 손 덕분에 흘리고 말았다. 대충 혀로 핥아 닦아내다가 문득 냄새를 맡았다. 갓 씻고 나와 선명한 비누 향과 은은히 섞인 달달한 시트러스 향. ―아, 이거. 내가 사랑하는 냄새다. 왜인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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