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예를 들면 어떻게?”
“갑자기 자연재해가 마구 쏟아지는 거지. 해일이라거나, 지진이라거나, 화산 폭발이라거나.”
“운석이 떨어져도 되겠다.”
“아니면 핵 폭발.”
“핵은 좀 너무했다. 그건 아예 생태계가 망가지잖아.”
“어차피 멸망인데 뭐 어때.”
“이자식 이거 안되겠어. 이기적이야.”
“아, 왜! 지구 멸망이라며, 인류 멸망이 아니라! 둘은 다른 거랬어!”
“그만하고 내려, 내려. 다왔어.”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목소리가 멀어진다. 버스에서 내린 남학생들은 곧 버스 뒤쪽으로 사라졌다. 카이토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가 다음 정류장 안내 방송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정류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걷다가 편의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메이코가 사는 빌라가 나온다. 편의점에 들러 이온음료와 초콜릿, 얼음을 바구니에 넣고, 맥주 냉장고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돌아서서 딸기를 한 팩 챙기고, 푸딩과 젤리도 담고, 다시 돌아가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삑, 삑, 바코드를 찍는 동안에도 복잡한 눈으로 맥주캔을 보다가 결국 계산했다. 비닐봉투만큼의 무게가 가슴에 얹히는 걸 카이토는 적당히 합리화했다. 메이코가 좋아하는 건데, 뭐. 오늘 마시지만 않으면 되잖아.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때문인지 문 너머에서 느릿한 인기척이 났다. 문이 열리자 메이코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서서 손을 들어올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사이사이에 “어서 와.” 인사가 섞였다. 땀에 절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넘겨주고 열을 쟀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겁다. 통화할 땐 목이 조금 깔깔한 정도라고 해놓고선. 안으로 들어서면서 비닐봉투부터 내려놓았다. 묵직한 소리가 났다.
“뭘 이렇게 사왔어.”
“별 거 안 샀어. 얼른 다시 누워.”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메이코는 그대로 서있었다. 벽에서 곧 흘러내리기라도 할 모양새여서, 카이토는 냉장고에 옮겨 담던 손을 멈추고 메이코를 안아들었다. 평소라면 퍼뜩 소리쳤을 텐데 조용했다. 메이코는 가만히 눈만 끔뻑이더니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부볐다. 갈색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듣기 좋아…….”
뭐가. 내 심장 소리가? 환자라서 그런가, 말을 가리지 않네. 품에 얼굴을 더 바짝 붙이며 파고들어와서, 카이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침대에 누이고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자 열 섞인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답답해.”
찌푸린 이마 위로 꾹 짠 수건과 얼음 주머니를 올려둘 때에서야 메이코는 뒤척이기를 그만두었다. 냉장고를 마저 정리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보니 이불 밖으로 메이코의 손이 빠져나와 있었다. 이불 속으로 넣어주려 다가가자 손이 붙잡혔다. 후후, 웃음소리가 난다. 그 손을 맞잡으면서 카이토도 같이 웃었다.
힘겹게 색색거리던 소리는 금세 안정되었다. 카이토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서도 점점 힘이 빠졌다. 카이토는 그 손을 더 꼭 쥐었다. 얼음이 녹아내리며 달각 소리를 냈다. 건물에 가려져 햇빛이 들지 않는 닫힌 창문 너머로 간혹 우웅,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학생들이 지나가며 큰 소리로 대화하는지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이야기가 선명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눈을 감았다 떴는데 사위가 어두웠다. 제가 잡고 있던 메이코의 손이 없어서 카이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이코는 베란다에 있었다. 빨래를 걷다가 방을 나온 카이토를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벌써 깼어?”
“메이코야말로. 아픈데 더 누워있지 않고.”
“한숨 자고 나니까 많이 좋아져서. 사다준 젤리도 먹었어. 고마워.”
카이토는 빨래 바구니를 받아들고 거실에 내려두었다. 메이코가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왔다.
“죽 끓여두고 싶었는데 같이 잠들어버렸어.”
“괜찮아. 이것저것 많이 사왔던데. 말고는 먹을 것도 없었어.”
“그건 그렇더라…….”
그래도 해놓고 싶었어, 가느스름해지는 눈에 카이토가 서둘러 덧붙였다. 메이코는 팔꿈치로 카이토를 툭 치고 바닥에 앉았다. 메이코가 빨래 바구니에 손을 넣기 전에 카이토는 메이코의 얼굴을 감싸쥐고서 이마를 맞대었다. 여전히 따끈따끈하기는 했지만 카이토가 막 도착했을 무렵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때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으니까. 휴,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자 메이코가 키득거렸다.
“맥주도 있더라. 두 캔.”
“응. 나중에 마시자.”
“오늘 마시려고 사온 거 아니었어?”
“아픈 사람을 데리고 술을 왜 마셔…….”
"편의점도 가까운데 굳이 사왔으니까 그러지."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깜빡, 깜빡. 같은 타이밍에 접혔다 뜨인다.
“비누 냄새…….”
“일어나서 씻었으니까…….”
분명 열만 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열 때문인지 맞닿은 체온 때문인지 메이코의 얼굴이 방금 전보다 붉어보여서 엄지 손가락으로 눈밑을 살살 문질렀다. 메이코는 얼굴에 열이 오르면 눈밑이 제일 먼저 붉어졌다. 가까이에 있어도 바로 띄는 곳이라 그렇게 보이는 걸까? 보이는 건 느낌 탓이래도 손으로 기억하는 감촉으론 다른 어디보다도 제일 따뜻해서, 카이토는 메이코의 열에 달뜬 눈밑을 매번 만지작거리곤 했다.
“……카이토.”
메이코가 몸을 물렸다. 메이코는 시선을 내리 깔았다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나 아직 환자야.”
“아.”
카이토는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저도 모르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몸을 제대로 앉히고서 느릿하게 빨래를 개키는 메이코를 따라 빨래바구니에 손을 넣었다가, 그대로 빼내어 마른 세수를 하며 몸을 수그렸다. 풉, 메이코에게서 웃음이 샜다. 카이토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서 한참동안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카이토가 다시 고개를 든 건 빨래 바구니가 텅 빈 뒤였다. 어쩐지 빨래를 개는 게 싫어서 딴청 부렸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지금은 그런 사유가 아니었지만서도. 메이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짓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에 걱정이 앞섰다.
“이거 봐 봐, 카이토.”
“응?”
“새로 산 건데,”
펼쳐서 보여주는 건 레이스 속옷이다.
“―다음에 입어줄게. 오늘은 안되지만.”
“메이코!”
이럴 줄 알았어. 카이토는 다시 얼굴을 가리고 이마를 떨어뜨렸다. 한나절 전만 해도 아프던 사람 맞아? 상상해버린 저에게도 자괴감이 들어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숙주가 되어버린 기분이야. 혐오스러워…….”
“어머.”
입을 살짝 가리고 웃는 게 얄밉다. 치뜬 눈으로 예쁘게 접힌 발그레한 눈가를 보다가 카이토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메이코는…… 눈 밑이 너무 야해.”
“하긴, 엄청 좋아하더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카이토는 귀가 야해. 나는, 음. 아마 제일 좋아해.”
메이코는 이제 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카이토는 턱을 끌어 얼굴을 들었다. 메이코는 바로 옆에서 반쯤 누운 채로 카이토를 보고 있었다. 메이코의 눈동자에 파란 덩어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제 눈동자에도 메이코가 저렇게 비치고 있을까. 메이코는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면 좋겠다. 저 부스스한 머리카락이라거나 다정한 눈매라거나. 집으로 찾아오게 된 건 갑작스러운 불상사였지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시간이 생긴 건 순수하게 기뻤다. 카이토가 손을 내밀자 메이코가 손을 들어올리다가 내렸다.
“지금은 좀. 진짜 감기를 옮기게 될 것 같아서……. 나 때문에 카이토가 아프면 정말 슬플 거야.”
“아프면 병간호 해 줄 거야?”
“그건, 아! 카이토, 회사는?”
“연차 냈어.”
“어쩐지 미안해…….”
“티내지 않으려고 했으면서.”
카이토는 메이코의 목소리 톤 하나로도 컨디션을 추측할 수 있는데도. 메이코가 "당연하지." 대꾸하기에 카이토는 눈을 흘기면서 메이코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킁, 메이코가 숨 막힌 소리를 냈다. 그대로 끌어안고 몸을 굴리자, 뭐하는 거야?! 조금 높은 톤이 품속에서 뭉개진다. 카이토는 메이코를 제 몸 위로 올리고서 조금 더 힘주어 안았다.
“그러면 속상해. 연차 사유는 세상이 멸망할 것 같아서라고 했으니까.”
“그게 뭐야.”
“어쩔 수 없잖아. 메이코는 내 세상인데.”
가만히 안겨서 가슴에 귀를 대고 있던 메이코가 상체를 들어올렸다.
“안되겠다. 그냥 옮을래? 내일은 병가 내.”
“병간호는……”
“나도 연차 낼게. 세상이 멸망할 것 같다고.”
사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눈빛이 간지럽다. 카이토가 웃자 메이코도 따라 웃었다. 메이코의 뒷목을 매만지던 손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얼굴이 가까워지는만큼 메이코의 눈꺼풀도 닫혀갔다. 살짝 고개를 틀고서, 그대로 입술이 닿는다. 맞닿은 가슴에서는 서로의 고동이 귀까지 들려왔다. 갈급하게 숨을 섞으면서 카이토는 메이코의 눈밑을 문질렀다. 따뜻하다. 메이코도 카이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가 새빨개.”
“응, 메이코도.”
웃음은 입안에서 흩어졌다.
내일 메이코의 세상이 멸망할 가능성이 생겨 버릴까? 그건 모르겠지만, 아마 내일 지구가 멸망하게 되더라도 우린 같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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