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메이 연성100제

002.

가장 소중한 추억

KAIMEI by TT

누구든 그렇겠지만 메이코에게도 몇 가지 습관이 있다. 예를 들면 기분이 상했는데 티를 내고 싶지 않을 때에는 검지 손가락에 엄지 손톱을 꾹 눌러박는 것. 피곤한 날에는 쓴 맛이 짙게 나도록 내린 커피를 마시는 것. 배가 고프면 한 번씩 앞에 있는 물건을 톡 두드리는, 그런 것들.

붉은 손톱이 아직 반쯤 남아있는 커피잔을 두드린 채로 멈춘 걸 보면서 카이토는 짧게 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이건 적신호였다. 저 커피는 분명 쓰다 못해 목이 막힐 맛일 게 뻔했고, 커피잔에 맞닿은 검지손가락은 엄지 손톱에 사정없이 눌리고 긁혀 새빨갰다. 왜 저러는지도 예상이 갔다.

“메이코.”

카이토는 손을 뻗어 툭 삐쳐나온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늘 깔끔한 매무새를 하는 메이코도 이렇게 한 번씩 날카로워지는 날에는 허술한 구석을 보였다.

“식사는?”

꾹 다물린 입 가운데가 삐죽 올라섰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 걱정스럽다가도 이런 부분에선 웃음이 터지고 만다. 카이토가 메이코의 양볼을 감싸쥐고 입매를 살살 문지르자 잔뜩 찌푸려져 있던 미간까지 슬슬 풀렸다.

“아니, 배고파…….”

감싼 손에 얼굴을 기대오는 게 느껴진다. 카이토는 조금 더 가까워진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댔다. 깜빡이는 눈꺼풀을 따라서 속눈썹이 스칠 정도의 거리다. 거뭇한 눈밑을 쓸자 메이코는 간지럽다는 듯이 눈을 찡그리다가 이내 살포시 감는다. 그러면 카이토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긴장한 듯 느릿하게 내쉬는 숨을 아로새기면서, 천천히 눈을 감으며 가까이 다가간다. 코 끝이 가볍게 부딪쳤다. 숨결마저 섞여들 때에 손바닥을 기분 좋게 눌러오던 무게가 사라졌다. 카이토는 손을 말아 쥐고는 눈을 떴다. 저 멀리에 서있던 메이코가 카이토를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카이토.”

평소보다 신경 쓴 옷차림이다. 카이토는 입을 벙긋 벌렸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다시 다물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던 메이코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눈밑이 홧홧해졌다. 손등을 가져다대고서 살짝 고개를 돌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똑같이 힘이 들어가있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있어서 어쩐지 조금 억울했다.

“……메이코는.”

“응?”

“긴장되지 않아?”

메이코의 입이 벌어졌다. 볼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아까의 저처럼 아무런 소리도 뱉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첫 데이트인데.”

가슴께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메이코의 주먹은 제법 매웠지만 아프진 않았다. 카이토는 하하하, 터진 웃음을 고스란히 내뱉고서 제 가슴에 닿아있는 주먹을 감싸 쥐고 더 꾹 눌렀다. 두근, 두근. 평소보다 크게 뛰는 진동이 주먹을 타고 전해지게끔. 그리고 손을 펴면, 온전히 제 손만이 남아있다.

“카이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메이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카이토는 뻗어오는 손에 무릎을 살짝 굽혀 얼굴을 내렸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과한 행동이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걱정이 담뿍 담긴 얼굴을 다가오는 손바닥이 가렸다. 이마에 조심스럽게 시원함이 얹혔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쉬면 나아질 거야.”

“그래, 좀 누워 있을래?”

“응…….”

소파에 누웠다. 메이코는 한쪽에 개켜진 담요를 가져와 꼼꼼히 덮어주었다.

“한 숨 자. 약 사다놓을게.”

가슴 위로 모아둔 손을 토닥이고 일어서려 하기에, 카이토는 멀어지는 메이코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메이코.”

“응?”

“좋아해…….”

힘 빠진 손이 붙잡던 손가락을 놓치고 흘러내렸다. 가물한 눈을 덮던 그림자가 어느새 사라져서, 카이토는 눈을 감고 그 위에 손등을 얹고는 가슴을 부풀려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그래서. 이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뭔데?”

낯익은 목소리가 묻는다. 카이토가 대답하지 않자 같은 목소리가 다른 높낮이로 카이토를 부른다.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그만해…….”

“눈을 떠. 나를 봐 줘.”

그 목소리엔 거역할 수가 없다. 카이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눈을 뜨자 제 다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메이코’가 보였다. 메이코는 저렇게 방글거리며 웃지 않는다.

“하나만이라고 했는데 이래서는 하나만 가져갈 수가 없잖아.”

카이토의 턱을 검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고개를 갸웃 뉘인다. 메이코는 저런 몸짓을 하지 않는다.

“이걸 다 가져가길 바라?”

대꾸하지 않으니 휘어있던 눈이 새초롬해진다. 삐죽거리는 입매는 조금 닮았다.

“재미없네. 대꾸 좀 해봐.”

“고르는 의미가 없잖아.”

카이토는 제 대답에 다시금 휘어지는 눈을 꼼꼼히 눈에 담으며 마저 대답했다.

“그 전부가 하나니까.”

“그걸 고민하고 수긍 못하고 발악하는 게 재밌는 건데.”

‘메이코’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덮고 있던 담요도 앉아있던 소파도 사라졌다. 다행히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이토가 마른 세수를 하는 동안 방글 웃는 얼굴이 불쑥 시야에 들어찼다.

“자, 기억하려 노력해보든가. 곧 눈을 뜰 테니까.”

아주 기쁘다는 듯이 웃으면서.

 

손을 뻗으면 무언가 잡혀야할 것 같은데 잡히는 게 없었다. 카이토는 눈을 떴다. 하얀 천장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꼼꼼히 둘러진 커튼이 있다. 몸을 일으켜 앉아 창가를 보다가 아침식사를 했다. 일반실로 옮겨온지도 꽤 되었다. 환자식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회진 시간에는 담당 의사가 몇 가지를 의례적으로 물어보더니 조만간 퇴원해도 되겠다는 소견을 내렸다.

카이토가 휘말린 끔찍한 사고에서 의식을 찾은 건 일부라고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까지 들려오진 않았지만 병원 사람들이 신기하다며 자주 수군대던 건 몇 번 들었다. 몇몇 크게 다친 사람이 빠르게 회복해놓고서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마치 길고 긴 꿈을 꾸는 것처럼.

“그러니 소중하게 쓰세요.”

카이토는 퇴원 수속을 밟으며 직원이 하는 말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병원을 나서는데 가슴이 술렁였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접수처에서 수속을 도와주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주기에 고개를 까닥였다. 그 외엔 별다른 게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움직였다. 병원 앞 신호등에서는 초록불로 바뀌었을 때 옆으로 손을 뻗다가 거둬들였다. 누군가 있었다면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을 뻔했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허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들른 식당에서는 썩 즐기지 않는 메뉴를 주문했다가 남기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먹었다.

참 이상했다. 이상했지만 이유를 알 수는 없어서, 카이토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갔네.”

‘카이토’가 말했다. 메이코는 기대고 있던 머리를 바로 세우고 제 어깨에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던 손가락을 치워냈다. 잠깐 떨쳐졌던 손이 다시 어깨를 감싸 쥐어왔다.

“이제 너한테서도 사라질 텐데, 너는 뭐, 어떡할래?”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말투로 속삭인다. 메이코를 ‘카이토’의 얼굴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이토’가 방글거리며 따라붙었다.

“참 단순하지 않아? 살려준다는 말에 소중한 걸 턱턱 내놓는다니.”

“그 단순함이 좋았어.”

한참을 치대도 무시하던 메이코가 작게 대꾸했다.

“그게 좋아? 멍청하잖아.”

“너 같은 거한테 설명하고 싶지 않아.”

메이코는 검지 손가락을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카이토’가 이리저리 흔들던 몸을 멈추고 메이코의 앞을 막아섰다.

“그럼 너는 이제 내 거야. 약속했으니까.”

“그래.”

“하하. 잘 먹겠습니다.”

‘카이토’의 형태가 무너졌다. 무너지는대로 쌓였다가 찰흙처럼 뭉개졌다가 또 섞이며 솟아오른다. 고층 빌딩만큼 높아졌던 것이 제쪽으로 다시 덮치듯 쓰러지는 걸 보면서, 메이코는 눈을 감았다.

 

“제대로 깨어나게 해주는 거야?”

“그렇게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살려준다고 해놓고 숨만 붙여놓으면 손해잖아. 그리고 내가 먼저 거래를 해버리면 카이토는? 조건이 사라지잖아. 카이토에게도 제안했다며.”

“저쪽도 가장 소중한 게 너일 거라고 믿는 거야?”

하하하, 카이토와 똑같은 모양으로 웃음을 뱉던 ‘카이토’가 금세 낯을 굳혔다.

“흠, 어떡할까. 귀찮은데.”

쩝쩝 소리를 내며 입을 우물거린다. 지긋이 내려다보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자, ‘카이토’는 혀를 빼죽 내밀며 입을 늘렸다.

“그래, 뭐, 너를 주면 저쪽이 거래했을 때 깨어나게 해줄게.”

“……좋아. 약속할게.”

“저쪽이 거래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할 거야.”

 

눈은 이미 감고 있는데도 시야가 더 어두워졌다. 생각마저 끊기기 전에 메이코는 따뜻한 빛깔의 파란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것 봐, 했잖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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