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현실과 이상
청춘의 한 페이지를 채워주세요. 포스트잇을 붙여주시면 학생회가 전달해드립니다.
카이토는 짧은 문장 아래 붙어있는 수많은 포스트잇을 멀거니 보았다. 조그마한 포스트잇에는 급식으로 나왔으면 하는 음식이라거나 가고 싶은 수학여행 행선지라거나 누군가의 이름이라거나가 빼곡히 적혀있다.
“카이토!”
“카이토, 어떻게 됐어?”
포스트잇 하나하나에 두고 있던 시선을 돌린다. 린과 미쿠는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서는 잔뜩 들뜬 기대 어린 표정으로 카이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이토는 두 손으로 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응, 뭐.”
“뭐야? 어떻게 된 건데?”
“얼버무리지 말고 대답해줘!”
“잘 모르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린이 팔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는 대로 흔들려주면서, 카이토는 하하 웃음만 흘렸다.
‘좋아해.’
‘응, 알지. 나도 좋아해.’
‘……좋아해, 메이코.’
‘……카이토?’
의아해하며 눈을 맞추고, 눈이 둥그렇게 뜨이고, 그렇게 점차 당황이 번지던 얼굴이 선명하다. 그 뒤에는 뭐라고 했더라. 입 밖에 내고 난 직후보다 메이코의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에 더 심장이 쿵쿵 뛰어와서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제가 무어라 건넨 말에 메이코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곤.
카이토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상체를 들었다. 흘러내리는 이불을 쥐고 고개를 돌려보니 운동장에 깔린 붉은 노을이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교정 반대쪽 건물은 방금 1층 교실에 불이 꺼지는 걸 마지막으로 새카맣게 물들었다.
카이토는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렸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분명 학생회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왜 보건실에 누워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핸드폰에 붙어 있는 ‘잘 자요, 공주님 ^^’ 이라고 쓰인 메모를 보니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메모는 린이 썼고 옮긴 건 메이코구나. 공주님 안기로 보건실까지 데려왔을 게 뻔하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조용했다. 보통 이 시간에는 관현악부라든가 운동부라든가 밤늦게까지 부활동하는 애들이 남아있어 어느 부근이 시끌시끌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학교 부지 전체가 조용해서 저 멀리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오후 여덟 시면 강제로 하교해야 하는 축제 준비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이다. 원래는 일곱 시까지였는데 3년에 한 번 있는 중고등부 합동 축제다 보니 이번에는 한 시간이 늦춰졌다. 물론 학생회는 제외였다. 복도에 은은히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카이토는 잠시 멈춰 섰다.
학생회실 안에는 메이코 혼자 남아있었다. 의자에 삐뚠 자세로 비스듬하게 기대 앉아서 핸드폰을 두드리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는 방긋 웃는다.
“일어났어?”
“응, 다 끝난 거야? 내가 해야 했는데 미안해.”
“어차피 오늘치 마지막 점검만 남아있었어. 이제 나머지는 운이지.”
메이코가 핸드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이토도 제 가방을 찾아 들었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교무실로 가는 동안 메이코는 카이토가 잠든 동안의 일을 공유했다. 카이토는 내일 아침 한 번 더 확인해야 할 부분 목록을 메시지로 전달 받았다. 교무실에 열쇠를 반납하고 나오자, 메이코는 교무실 앞 게시판에서 포스트잇을 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글씨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축제 전날이 되니 며칠 전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축제가 끝나면 이것도 다 분류해야겠네.”
“그렇겠지.”
“나는 없겠지만.”
“마무리까지가 행사의 끝인데…….”
“……땡땡이 쳐도 돼?”
메이코는 한숨을 푹 쉬고 몇 걸음 앞서 걷다가, 곧 뒤돌아 카이토를 기다렸다. 둘은 다시 어깨를 나란히 맞추고 걸었다.
지난해 학생회장이었던 메이코는 원래대로라면 1학기 회장 선거를 마치고 물러났어야 했다. 그걸 새로 당선된 학생회장인 카이토가 2학기 첫 행사로 3년 주기의 큰 축제가 있으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핑계를 대며 붙들어놓았다. 기실 카이토가 학생회장이 된 이유도 메이코 때문이었다. 학생회실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메이코를 위해서 공부에 지치면 올 수 있을 마음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물론 그건 오판이었다. 이후에도 종종 놀러 오라는 카이토의 말에, 메이코는 축제를 마무리하면 학생회실에 방문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내가 있으면 네가 자리 잡기가 어렵잖아. 담담한 대꾸에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메이코를 위해 된 학생회장이기는 해도 책임감은 있었으니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하다 심심풀이로 나왔던 미래 이야기에 메이코가 대학교 원서를 다른 지역으로 넣을 거라는 말을 꺼내서다. 상향 지원도 안정권도 모두 타지역이라 내년부터는 다니게 될 학교 근처에서 자취할 예정이라고. 다른 애들은 꺅꺅거리며 놀러 갈 테니 재워달라는 말을 건네고 메이코도 얼마든지 오라고 대꾸했지만, 카이토는 가슴 안쪽이 철렁 떨어져 내려 무너지는 표정을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카이토에게는 나름대로 이상적인 미래 계획이 있었다. 메이코가 이 지역에서 진학을 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갈렸던 그때처럼 매일은 아니더라도 종종 함께 등교를 하다가, 카이토도 메이코와 같은 학교로 진학해 함께 수업을 듣는 그런 미래. 그렇게 늘 붙어 다니며 제 시야 안에 메이코를 두고 싶었다. 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카이토는 그날 바로 메이코의 지망 학교를 찾아보았다. 같은 과를 가는 건 적성상 무리였고, 카이토에게 맞을만한 과는 지금부터 공부에 매진해야 할 정도로 합격선이 높았다.
만약 메이코에게 축제 준비를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원서를 넣을 무렵에나 알게 되었을까? 그때라면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많이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칠 수 있었을 텐데. 축제가 끝나면 멀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카이토는 조급해졌다. 그래서였다. 이제까지 그렇게나 조심스러워했으면서도 충동적으로 고백을 건네버린 건.
“그래도 중등부 애들까지 있어서 일손이 많은 게 다행이야.”
“그만큼 신경 쓸 일도 많지만 아무래도. 준비도 사람이 많을수록 재밌으니까.”
“3년 뒤에는 미쿠가 하려나? 아, 미쿠도 3학년이지. 그럼 린인가?”
“그러지 않을까? 보통은 그대로 올라오잖아.”
“내년 학생회장 후보는 루카였지. 똑 부러지니까 잘하겠다.”
“응, 믿고 있어. 메이코를 보고 배우고 있으니까.”
메이코는 마치 며칠 전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카이토도 그랬다. 이건 암묵적인 합의인 걸까, 서로 회피하는 걸까? 메이코의 의중이야 알 수 없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카이토는 명확했다. 저는 회피하고 있다. 고백까지 했으면서 더 다가가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로. 어떤 식으로든 상기시켜서 축제가 끝나기도 전에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메이코가 언급하지 않는 이상 이제 둘의 관계는 평생토록 여기서 변하지 않겠지. 한 살 터울의 옆집 사는 소꿉친구, 십몇 년 지기, 가장 가까운 이성 친구. 둘을 수식하는 아주 많은 단어 그대로.
“너도 잘 하고 있어, 카이토.”
한 발짝 앞으로 간 메이코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메이코의 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볼 때마다 카이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가 제일 사랑하는 메이코의 표정이다. 천천히 뒷걸음 치는 속도에 맞추어 카이토도 걸음을 느리게 했다.
“봐봐. 이번 축제도 나한테 준비를 도와달라고는 했지만 내가 도운 것도 별로 없는걸. 나 없이도 잘 할 거야.”
순식간에 발등 위로 무게추가 떨어진 듯하다. 그건 혹시 대답이야? 목구멍에 턱 걸리는 말을 카이토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축제는 총 이틀이었다. 첫날은 교내 관계자들만, 둘째 날은 초대권이 있는 외부인도 함께했다. 첫날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가장 큰 별다른 일이라고 한다면 고백 장소 쟁탈전―그냥 눈치싸움이었다― 따위의, 소소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소소하지 않았을 일 정도였다. 카이토는 순찰을 돌던 중 창문 아래서 고백 장소가 겹쳐 당황하는 녀석들을 발견하고는, 제가 이미 고백해버리지 않았더라면 저 틈바구니에 끼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바빠서 시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걸 꽤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고.
문득 얼마 전에 애들이 이상적인 청춘의 한 페이지에 대해 떠들었던 게 떠올랐다. 교복 입고 데이트 하기, 손 잡고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음식 사 먹기 같은 소소한 것부터, 벚나무 아래서나 축제 불꽃놀이 아래서 고백 받는 순정만화스러운 것까지. 그걸 들으면서 카이토도 상상했더랬다.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나무 아래서 메이코에게 고백을 건네는 저라거나, 그걸 흔쾌히 받아주는 메이코라거나, 함께 손을 잡고 축제를 구경하다 캠프파이어 때는 마주 보고 포크 댄스를 추는 그런 일들을. 카이토는 고개를 저으며 상상을 털어냈다.
둘째 날은 당연하겠지만 첫날보다 정신이 없었다. 정문 안쪽으로 그득한 사람들은 배부한 초대권보다도 많아 보였다. 정문만 통과하면 교내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초대권 소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데, 이 정도라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선생님도 학생들도 순찰 인원을 많이 잡아두었었지만. 카이토도 오늘은 내내 순찰을 돌 예정이었다. 축제 부스나 공연은 대체로 어제 다 구경했고 이런 인파를 순찰 외의 일로 돌아다니는 건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오늘만 하는 부스도 있는데 진짜 순찰만 하고 있게?”
“선생님들도 순찰 돌아주신댔는데 조금 놀아도 되지 않을까?”
“너희가 즐겁게 놀면 됐어.”
“메이코가 순찰 좀 빼달라고 하길래 둘이 약속 잡은 줄 알았는데, 응?”
“아니야…….”
어쩐지 일정표에 메이코 이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했다. 다른 사람과 축제를 돌아보기로 한 걸까? 예상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다가 그만두었다. 입안이 썼다.
시간은 참 바쁘게도 흘러갔다. 여기저기에서 호출 당하고 바쁘게 움직이던 카이토도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는 조금 쉴 수 있었다. 물론 잠시였지만. 외부인 퇴장 시간 10분 전부터 방송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토는 정각이 되자마자 안내 방송을 했다. 이 뒤에는 경광봉을 들고 퇴장을 돕고, 다음엔 학생회실로 돌아가 투표함을 정리해야 했다. 그게 끝나면 캠프파이어와 포크 댄스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학생 귀가를 시키면 끝이었다. 이제 정말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카이토는 챙겨둔 경광봉을 들고서 방송실을 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퇴장 시간입니다!”
어깨를 확 붙들어 안으며 귓가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귀 옆에서 메이코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메이코!”
“한참 찾았잖아.”
“무슨 일 있어?”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카이토는 모두에게 잊히지 못할 이벤트가 좋아, 너만 잊지 못할 이벤트가 좋아?”
“뭐?”
메이코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 카이토에게 매달려 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런 스킨십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터라 카이토는 그럴 때마다 저 혼자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서부터는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평소라면 전처럼 두근거리는 걸 어떻게든 숨기려 애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메이코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는 것 같아 오히려 속이 쓰렸다. 그러면서도 제 볼에 바짝 붙은 얼굴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 열이 오르는 게 왠지 분했다. 카이토는 고개를 반대로 뉘며 물었다.
“내가 뭔가 해야 하는 거야?”
“아니, 카이토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음, 그러면.”
고개를 돌리자 장난기를 가득 품은 눈이 예쁘게 휘어진 채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이토는 아닌 척 다시 시선을 피했다.
“축제니까 모두에게 잊히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진짜? 진짜지?”
“응?”
“그래. 이따가 봐, 카이토!”
메이코가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조금 들뜬 모습이다. 뭔가를 기획하고 있었나? 서운한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카이토 개인으로서도 학생회장으로서도. 카이토는 애써 속을 가라앉혔다.
중고등부 학생회 임원이 모두 모인 덕에 투표함 정리는 금세 끝이 났다. 카이토는 학생회실에서 운동장에 바글바글하게 모인 학생들을 보았다. 먼저 내려간 학생회 아이들도 한쪽 구석의 천막 아래에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조금 있으면 카이토도 아래로 내려가서 마이크를 들고 서야 한다.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성미에 맞지도 않은데 이러고 있는 꼴이라니. 새삼 진하게 허탈감이 몰려왔다. 맡은 이상 끝까지 하기야 하겠지만 기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천막 밖으로 나온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메이코다. 메이코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카이토도 마주 흔들어주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갈 시간이었다.
캠프파이어 식순은 간단하다. 학생회장의 짧은 감사 인사, 학급별 동아리별 모범 부스 시상, 모범 공연 시상, 통합 인기 투표 시상을 하고 학생회 임원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한다. 뽑힌 사람이 공개적으로 청춘의 한 페이지에 적고 싶었던 걸 이야기하고 나면 쌓아둔 땔감에 불이 붙고 음악이 시작된다. 그다음에는 포크 댄스가 30분 정도 이어지고 끝. 카이토는 순서를 되뇌며 운동장을 걸어 나가서, 최대한 간결하게 준비해둔 문구를 읊고 시상을 마쳤다. 다음은 제비뽑기다. 해맑은 얼굴을 한 린이 추첨함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중등부 학생회장 카가미네 린입니다!”
“와~”
“원래는 제가 뽑아야 하는 게 맞지만! 오늘은 특별히! 이번 축제에 도움을 주신 작년 고등부 학생회장 선배에게 이 영광을 양보하겠습니다! 나와주세요, 메이코 선배!”
“와~~~”
이야기 된 적 없는 진행이다. 카이토가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는 동안 메이코가 앞으로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장난스럽게 샐쭉 웃는다. 메이코가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추첨함에 손을 넣는 걸 보다가 깨달았다. 아까 물어봤던 게 이거였나? 빠져나온 손에서 종이를 건네받은 린이 와하하 웃었다.
“메이코 선배! 자신을 뽑으셨는데요?!”
“난 도우미라니까 왜 임원 목록에 내가 들어가 있던 거야?!”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볼을 감싸는 게 작위적이다. 둘이 짰구나. 제지를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린이 먼저 물었다.
“학생회장!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뽑아야 하나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린이 학생회 임원 방향으로 마이크를 돌리자, ‘괜찮아요!’ 익숙한 목소리가 외쳤다. 미쿠였다. 다른 애들도 표정이 묘하게 밝은 걸 보니 제가 뽑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학생들 방향으로 마이크가 돌아가자 여기서도 괜찮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 진짜로 말한다?”
이제는 무슨 일이 시작되어도 말릴 수 없게 됐다. 당황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메이코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메이코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기타 연주가 시작됐다. 카이토는 연주법을 듣자마자 알았다. 이건 렌이다. 어디서 연주하고 있는 거람. 완전히 짰잖아, 너희들. 지금 다 티 내고 있잖아.
“……있잖아. 넌 바라는 거 없으니 평소처럼 지내자고 했었지. 근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카이토는 들고 있던 마이크를 놓칠 뻔했다. 손에 힘을 주어 두 손으로 마이크를 꾹 움켜쥐고 있는데, 정면을 보고 있던 메이코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 순간에 오오, 낮게 울리던 함성도 뚝 멈추었다.
“나는 청춘의 한 페이지로만 남고 싶지 않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카이토?”
“어, 어?”
갑작스러운 흐름에 카이토가 얼빠진 소리를 흘리자 메이코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카이토는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카이토의 표정을 살펴보려는 듯 까치발을 들어대는 학생들도 보이지 않게 됐다. 보이는 거라곤 웃음 띤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메이코 뿐이었고, 들리는 거라곤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제게 다가오는 메이코의 발걸음 뿐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을 네 인생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첫 페이지로 만들어줄래?”
웅성임이 멎은 건지 제 시간이 멈춘 건지도 알 수 없다. 온통 조용한 와중에 선명한 건 오직 제게로 뻗어오는 메이코의 손이다. 메이코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카이토가 크게 뜬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메이코가 한 번 더 씨익 웃었다. 카이토가 제일 사랑하는 그 미소로.
“널 좋아해.”
오래된 학교 마이크에는 잡히지 않았는지 조그맣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귀에 닿았다. 아, 만약 이게 만화였다면 나는 여기서 기절했을지도 몰라. 카이토는 순간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단어를 인식하자마자 얼굴에 열이 몰려서 새빨갛게 변했을 게 틀림없었다. 메이코가 내민 손이 까딱까딱 흔들렸다. 카이토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메이코가 맞잡아오는 게 느껴져서, 카이토는 손을 잡아당겨 메이코를 품에 끌어안고 정수리에 코를 박았다. 이렇게까지 꾹 끌어안은 건 처음인데도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은 게 맞나?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와아악―! 뒤늦게 격한 함성이 들린다. 길게 이어지는 휘파람도 함께. 그제야 깨달았다. 여긴 학교 운동장이었다. 카이토가 당황에 젖은 새빨간 얼굴로 메이코를 놓아주자, 메이코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카이토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이거까지야.”
쪽, 볼에 보드라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동시에 땔감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포크 댄스 타임이에요! 둥글게! 짝지어서 둥글게 서주세요!”
상황을 정리하듯 린이 소리쳤다. 학생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사이로 굳어있는 카이토를 메이코가 끌고서 천막으로 데려갔다. 학생회 임원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게 뭐야?”
단단단, 통통 튀는 음악을 들으며 카이토가 물었다.
“서프라이즈?”
“……아니, 그러니까……”
“모두에게 잊히지 않을?”
“……”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폭 감싼 채 고개를 숙인 카이토를 메이코가 감싸 안았다.
“그때 바로 대답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할 건 아니지.”
“그치만 며칠 내내 골머리 썩이는 게 눈에 훤히 보이던데?”
“그걸 놀리는 건 미안해해야지…….”
“하하하! 그래도, 응. 기왕 알았으니까 뭔가 기억에 남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다. 공개 고백을 선택한 건 저였다. 공개 고백인 줄 알았다면 나만 잊지 못할 걸 선택했겠지……. 그건 또 어떤 거였을지. 카이토가 헛웃음을 짓자 메이코가 살짝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래야 내가 졸업해도 너한테는 내가 있다는 걸 다들 알지.”
“어?”
“안 그래? 이제 너 임자 있는 사람이야.”
메이코가 귓가에서 배시시 웃었다. 그래, 아무렴 어때. 창피한 건 한순간이다. 잘 되었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음침하게 시야 안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땅을 파는 것보단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게 좋지. 메이코의 연인, 메이코의 옆자리, 메이코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사람. 다시 현실감이 없어졌다.
카이토는 얼굴을 덮던 손을 내려 메이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맞닿은 가슴에서 울리는 두근거림은 제 것일까, 메이코의 것일까. 일단 분명한 건 제 상상보다 현실의 메이코가 더욱 예측할 수 없고 사랑스럽다는 점과― 내년 수험 전까지 카이토는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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