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메이 연성100제

011.

확률 게임

KAIMEI by TT

앞선 글 - 010. 트루먼쇼 : https://withglyph.com/tt_/1395097759

요즘 메이코가 이상하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보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메이코가 이전보다 조금 더 저를 살펴보고 있다는 점이다. 짧은 새에 스치듯 지나치는 시선 횟수가 늘어났다든가 길게 봐줘야 1초쯤 길어진 눈맞춤 따위의, 모든 사람들이 평소와 같다고 느낄 아주 평범하고 미세한 차이.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메이코 자신도 모를 습관까지 꿰고 있는 카이토에게는 숨길 수 없었다.

“카이토…… 그건 자의식 과잉이다 못해 안타깝게까지 느껴지는 거 알아?”

“진짜 미안한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직 일정이 남은 메이코와 지역 순회 로케를 떠난 미쿠를 제외하고 네 명이 모인 식탁에서 비웃음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린과 렌은 똑 닮은 얼굴로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근데 카이토가 말하면 진짜 같기도 해서.”

루카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이제 와서 메이코가 의식하고 있다고 느끼는 거야? 지금까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여준 적도 없었잖아.”

“그 말은 조금 아프네…….”

아마도 그건 제 지갑 속의 사진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을 단체 사진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놓은 진짜 부적을, 정황상 메이코가 발견해버린 것 같다. 어쩐지 사진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카이토는 멋쩍게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애들아.”

“그냥 평소와 같은 주접이었던 거야?”

“어휴, 그럴 줄 알았어.”

“뒷정리는 부탁할게.”

“응. 들어가서 쉬어, 카이토.”

식기를 정리하는 달그락 소리를 들으면서 카이토는 방으로 들어섰다. 귀가했을 때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두었던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지갑을 꺼냈다. 메이코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고 의심하던 즈음에 받은 새 지갑이다. 이전 지갑을 오래 써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했던 말을 신경 써 주었는지 디자인도 크게 다르지 않고 내부 구성도 비슷했다. 카이토는 새 지갑에도 이전과 똑같이 단체 사진을 넣어두었다. 그 뒤의 사진도 똑같이. 카이토는 단체 사진을 두어 번 쓸다가 뒤에 있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침대에 엎어지며 형광등 불빛에 역광으로 빛나는 사진을 올려다보다가 손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벅벅 쓸어 넘겼다. 마음이 복잡했다.

 

카이토 지갑 속의 사진은 메이코의 첫 CD 커버 촬영 때 사진이다. 자각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예능에서의 일이다. 질문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메이코가 촬영 당시 비하인드 컷을 모아서 기념 삼아 앨범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부적이기도 하다며. 카이토가 합류하기 전에 발매되었던 앨범이라 카이토는 비하인드 컷까지는 본 적이 없었다. 보고 싶어 하는 티를 내자 메이코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 반응에 주변 게스트들이 술렁이며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둘만 보시는 거냐, 우리도 보여달라, 한 장 달라고 해라―. 카이토는 그 말들을 적당히 걸러 듣고는 주변 성화에 못 이기겠다는 듯이 수줍게 물었다. 한 장 받을 수 있나요? 메이코는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주변을 훑고는 그래, 대답했다.

“앨범은 숙소에 있어요?”

숙소에 돌아와 저녁 먹은 뒷정리까지 마친 뒤에, 카이토는 거실에 앉아있는 메이코 옆에 슬쩍 앉으며 물었다. 일정이 다 끝나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방금 떠오른 것처럼 최대한 능청스러운 투였다. 어쩐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아서 메이코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손을 허벅지에 슥슥 문질렀다.

“진짜 볼 거야?”

“보고 싶어요.”

“나참, 뭐가 재밌겠다고 그런 걸.”

메이코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방에서 앨범을 가지고 나왔다. 앨범은 단순히 비하인드 컷만 모아둔 게 아니라 촬영 당일 준비 과정부터 뒤풀이까지의 사진이 시간별로 꽂혀있었다.

“촬영 전에 소속사 첫 CD니까 과정 사진을 잔뜩 남겨서 기념 앨범을 만들자는 말이 나왔거든. 촬영하는 카메라 말고도 각자 찍어보자 했는데 내가 카메라가 있어, 뭐가 있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도 예쁘게 인화가 되느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화질이 영 별로라면서 대표님이 카메라를 빌려주셨어. 부인 몰래 빌려주는 거니까 조심히 써 달랬는데 내가 사모님께 카메라 빌렸다고 말씀드렸지. 어차피 촬영 날에 오신댔는데 비밀로 해봐야 무슨 소용이니.”

카이토가 앨범을 흥미롭게 보는 게 즐거웠는지 메이코는 한 장 한 장을 짚어가며 사진 찍을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으로 촬영용 메이크업을 하느라 눈이 뻑뻑했다든가, 낯익은 얼굴이 있지 않냐며 그때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스태프가 지금은 고정 스태프로 일해주고 있다든가 하는 것들을. 사진을 쓸어내리는 손짓과 눈빛이 따뜻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다정했다. 이제껏 카이토 앞에서 지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부드럽다. 속이 간질거렸다. 카이토는 언젠가 훗날에 저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릴 때에도 저런 표정을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앨범을 거의 다 넘겼을 즈음, 메이코는 사진 한 장을 고르라고 했다.

“진짜 주실 거예요?”

“아하. 그건 방송용 멘트가 맞구나? 그럼 됐어.”

“아니, 주세요! 나중에 물어보면 받았다고 자랑할게요.”

“뭘 자랑까지 해. 또 물어보지는 않을걸?”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새는 소리를 내면서도 메이코는 앨범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는 카이토를 막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말은 언제 놓을 거야? 생각도 안 하는 거 같네.”

“존대가 입에 붙어서……”

“안 돼. 8월에 다른 애도 들어온댔잖아. 네가 그러고 있으면 걔도 깍듯하게 존댓말을 쓸 것 같아. 사진은 편하게 말하겠다고 약속하면 줄게.”

살짝 입을 삐죽거리는 게 귀엽다. 카이토가 웃음을 터뜨리자 메이코가 앨범을 빼앗으려는 듯이 손짓했다. 그 손짓을 피하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가 카이토는 또 혼이 나고 말았다.

 

그때 카이토가 고른 건 메이코가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고 한 손은 볼에 올린 채로 조금은 어색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웃는 사진이었다. 메이크업 직후에 찍었다고 했던, 처음 받은 촬영용 메이크업이 어색했다는 그 사진. 사진을 받을 무렵 카이토는 제 감정을 확립해가고 있었고, 조금 뒤에는 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 보관해놓던 사진을 지갑에 넣어둔 것도, 메이코에게 자주 지갑을 부탁했던 것도, 습관처럼 지갑 귀퉁이를 매만지던 것도 그래서였다. 만약 지갑이 닳고 그 탓에 숨겨둔 사진을 들키게 된다면 메이코가 눈치채고 의식해주지 않을까 하면서. 그러면 메이코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저에 대해 많이 고민해주겠지. 그러다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고 속삭여주거나, 대외적인 모습으로 다정함 한 톨 없이 필요한 말만 건네올 테다. 역시 후자일 확률이 더 높겠지만 숙소 생활을 대중에게 공개해두었으니 쫓겨나진 않을 거다. 그렇게 계속 얼굴을 맞대면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고백과 대답으로 관계가 바뀌는 걸 바로 확정시키는 것보다 행동으로 스며드는 게 더 가능성 있어 보이니까. ―참 대책 없는 망상이었다.

조금씩 방향을 달리하며 이어가던 헛된 기대를 품고 현 상황에 안주하기로 마음 먹은 게 벌써 2년이 넘어간다. 왜 이제 와서 그때에나 상상했던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사진을 들킨 건지. 애초에 진짜 닳기를 바란 적도 없는데 고작 자주 매만진 정도로 지갑이 닳아버릴 줄은 몰랐다. 보통은 십 년도 넘게 쓰지 않나? 메이코가 속아서 불량품을 산 건 아니었는지 걱정될 정도다. 메이코는 곧고 물러서 잘 속아 넘어가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카이토는 손가락으로 사진 속 메이코의 이마를 슬슬 쓸다가 시계를 한 번 보고서 몸을 일으켰다. 곧 메이코가 올 시간이었다. 메이코는 일정 자체가 심야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밤 10시 전에는 숙소에 들어오는 편이었다. 이건 약 6년 전부터 지켜오던 메이코의 규칙이다. 애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나 뭐라나. 연장자가 그러면 애들도 자연스럽게 일정 시간 전에는 집에 들어오게 된다고. 저보다 열 살쯤 어린 애들이 후배가 된다는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뭘 찾아 읽은 건지, 하여튼 어디서 읽고 따라 하는 티가 팍팍 났다. 카이토는 아주 어리지도 않은 후배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편이 걱정되지 않으니까.

거실로 나오자 린과 렌이 소파 양 끝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카이토는 그 사이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곧 루카도 내려와 린 옆에 앉더니 후후 웃었다.

“다들 메이코 기다리는 거야?”

“응, 곧 자체 통금 시간이잖아.”

“난 그냥 텔레비전 보는 중이었는데.”

“뭐야, 제일 먼저 나와 있었으면서~”

루카 무릎 위에 다리를 올려두었던 린이 발로 툭툭 렌을 쳤다. 렌은 귀찮아하며 손을 두어 번 휘젓다가 카이토의 팔을 끌어 당겼다. 카이토는 순순히 일어나 렌 옆에 앉았다. 재작년쯤만 해도 같이 걷어차면서 싸우더니 린이 한 번 크게 넘어진 후로는 조금씩 참는 법을 배웠다. 그게 다른 사람을 방패로 삼는 모양이기는 하지만. 카이토는 뒤에 숨지 말라며 요리조리 뻗어대는 린의 발을 톡톡 두드렸다. 린이 피식 웃으면서 다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건 또 못 참겠는지, 입을 잔뜩 빼물고 있던 렌이 얌전해진 린의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야!”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발길질이 시작되고, 그 사이에서 카이토와 루카가 이리저리 밀쳐졌다. 딴에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기는 했으나 이렇게 정신없이 발이 왔다 갔다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카는 늘 있는 일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등받이에 바짝 기대어 앉아있었다. 적당히 질리면 끝나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카이토는 난처한 웃음을 흘리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메이코, 술 마시고 올 것 같던데.”

“엑.”

“진짜?”

즉효다. 둘은 발을 멈추고 카이토를 쳐다봤다.

“응, 친한 지인들끼리 모여서 저녁 먹는다고 연락 받았거든. 그럼 한잔하고 올 걸.”

“……오늘은 일찍 잘까. 내일 아침에 인사하지, 뭐.”

“나도 그냥 일찍 잘래. 오늘은 아냐. 카이토, 루카. 내일 봐! 잘 자!”

렌이 눈치를 보다가 먼저 소파에서 빠져나갔다. 린도 잠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인사하고 뛰어 올라갔다. 둘만 남게 되자 루카가 카이토를 빤히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왜?”

“난 별로 상관 없지만 카이토한테 양보할게.”

“양보라는 말은 조금.”

“그치만 좋지 않아?”

“…….”

할 말을 잃은 카이토를 두고 루카도 계단 위로 사라졌다. 거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술을 마시고 온다는 소리에 다들 떠나기는 했지만 메이코의 술버릇이 나쁜 건 아니다. 주량도 센 편이고, 취하더라도 실제로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표정이 조금 풀어지고 목소리가 약간 늘어지는 게 전부라서 대부분은 메이코가 술버릇이 있는 걸 모른다. 술버릇이 드러나는 건 숙소에 들어와 긴장이 풀어진 다음이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고 센서등이 켜졌다.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토는 발소리가 거실에 다다를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인기척이 옆에서 들릴 때에야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메이코.”

카이토와 눈이 마주치자 곧게 서 있던 몸이 살짝 흐트러졌다. 취했군.

“다녀왔어~”

메이코가 다가와서는 바닥에 털썩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른 애들은?”

“린이랑 렌은 자러 갔고, 루카도 아마. 미쿠는 아직 로케.”

“응, 미쿠는 알지. 그렇구나. 다들 착한 애들이네, 벌써 자고.”

카이토도 소파에서 내려와 메이코 옆으로 옮겨 앉았다. 메이코는 젖힌 고개를 돌려 카이토를 보며 푸스스 웃었다. 카이토도 고개를 뉘여서 시선을 맞췄다.

“많이 마셨어?”

“조금 마신다는 게 어쩌다 보니. 축하할 일도 있었고, 너네 이야기가 나왔지 뭐야.”

메이코는 기분이 좋으면 술을 많이 마신다. 카이토의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살살 꼬면서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떤 칭찬을 들었고 저는 어떤 자랑을 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하다가 한 번씩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있는 힘껏 머리를 쓰다듬어 헝클어댔다. 착해, 귀여워, 너무 장해, 속삭이면서. 애들이 도망간 원인이다. 어린애 취급을 하면서 마구 칭찬해대는 버릇. 메이코는 필름이 끊기는 타입도 아니라서, 다음날에 술버릇으로 투덜대면 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말을 술김에 했던 거라며 아침에 또 귀여워했다.

“이상해!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가? 내가 키운 것 같고 그래. 애들이 칭찬 받으니까 왜 이렇게 짠하고 기쁘고 행복한지 모르겠어.”

물론 카이토에게까지 어린애 취급을 하며 귀여워하지는 않는다. 대신 애들이 있을 때에는 하지 않을 말을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했다.

“린이랑 렌도 벌써 이번 생일이면 만 스무 살인데 이제 같이 살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가끔 혼자 살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다들 언젠가 독립하고 결혼하고 할 텐데. 애들이 행복하면 좋은 건데도 상상하니까 서운해! 이런 건 닥치고 나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치? 이게 부모 마음일까? 진짜도 아닌데 그런 걸 느껴도 될까? 어떻게 생각해, 카이토?”

눈썹을 늘어뜨리며 묻는다.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조금만 더 있으면 쟤네 인생의 반을 함께 지내는 거고, 앞으로 더 길어질 텐데. 카이토는 메이코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스치는 손가락에 메이코가 얼굴을 비벼와서 잠깐 머뭇거리다 어깨를 감싸 쥐고 토닥였다. 메이코는 평균보다 키가 크고 옷도 딱 맞는 걸 깔끔하게 갖춰 입다 보니 어느 정도 체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이렇게 손에 쥐어보면 부러질 듯 가냘팠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질색하겠지만 적어도 카이토가 느끼기엔 그랬다. 이렇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연약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걸 저만 볼 수 있기에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특별함에 또 한 번 가슴이 설렜다.

 

카이토가 현 상황을 유지하자고 마음 먹은 건 메이코에게 처음 ‘이대로 계속’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다. 메이코가 그러길 원한다는 이유도 있었고 지금까지의 관계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제일 크게 마음을 움직인 건 따로 있었다.

만 스물을 넘긴 미쿠가 미성년자일 때에는 거절해왔던 장기 일정이나 심야 프로그램 촬영을 다니느라 숙소에 들어오는 날이 손에 꼽을 즈음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신드롬을 몰고 온 미쿠의 인기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고, 성인이 되자 또 다시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메이코도 카이토도 어딜 가나 미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질문도 있었고 칭찬도 있었다. 시기 어린 말이 섞여 있기도 했다. 미쿠의 데뷔 초기에 겪었던 일과 비슷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미쿠가 이제는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잠깐 이야기 좀 들어줄래?”

“메이코?”

“좀 걸을까. 바람도 쐴 겸.”

날씨가 하루하루 쌀쌀해지는 무렵이었다. 카이토는 검은 목폴라에 후드티만 뒤집어쓴 메이코의 옷차림을 보고 겉옷을 한 겹 더 껴입고 밖으로 나섰다. 이야기 좀 하자던 메이코는 저 혼자 성큼성큼 앞서 걷고 있었다. 카이토는 그 뒤를 바짝 쫓아 걸었다.

무슨 이야기일까? 제 마음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 밖으로 나온 거라면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걸음 속도는 조금씩 느려지는데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 좋지 못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른 탓이다. 모든 사람이 메이코가 선택할 사람은 카이토밖에 없다고 말하더라도, 아직 카이토에게는 메이코가 저를 선택한다는 확률이 낮았으므로.

메이코는 한참을 걷다가 사람 없는 놀이터가 나오자 그제야 뒤돌아서 카이토에게 손짓했다. 차가운 벤치에 털썩 앉는 모습을 보고 겉옷을 깔아줄까 하다가 그냥 옆에 앉았다. 아직 완연한 겨울도 아닌데 웬 유난이냐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하기도 했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메이코에게 다시 일어나 달라고 말할 수 없기도 했다.

“있잖아, 카이토.”

깊은 한숨과 섞여 나온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카이토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내가 딱히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런데, 너는 결혼 생각 같은 게 있어?”

“어?”

“아니,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 수상한 의도로 물어보는 건 아니야. 지금까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언젠가는?”

한순간 심장이 뚝 떨어져 내렸다가 차분한 표정에 정신을 차렸다. 말투로 보건대 정말 의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구나. 다들 그렇겠지. ……미쿠도 빨리 독립하거나 결혼하거나 하고 싶어 할까? 아니, 대답 안 해줘도 아니란 거 알아. 미쿠는 여섯이서, 더 늘어나도 좋으니까 가능하면 오래 다 함께 지내고 싶다고 했거든. 그런데 꼭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신경 쓰고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왜 다 들려오는 데서 이야기를 할까? 진짜 눈앞에 있으면 말도 못할 거면서. 우리 애 가지고 엄한 소리는 대체 왜 하는 거야?”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턱을 괸 채로 줄줄 늘어놓는 말에 점점 짜증이 실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메이코가 대표님한테 녹음기를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를 렌이 했었지. 진짜 던지지는 않았겠지만. 스태프가 선 넘은 뒷담을 하는 걸 메이코가 들었댔나. 하루 동안 털어버리려다가 못한 모양이었다. 긴장을 풀자, 걷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이 그제야 옷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카이토는 메이코가 내뱉는 짜증을 흘려들으면서 겉옷 하나를 벗어 조금씩 움츠러드는 메이코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갑자기 끌고 나와서 혼자 짜증 내고 있네. 미안해. 너밖에 이야기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냐, 나는 오히려 짜증이라도 말해주는 게 좋은데. 그리고 날 떠올렸다는 점도.”

“이런 거 받아주지 마. 매일 불러내는 수가 있어.”

“매일 불러 줘. 메이코는 도통 기대질 않으니까 이렇게라도 좀 더 의지해주면 좋겠어.”

“뭐야, 그게…….”

메이코는 머쓱해 하며 어깨 위의 겉옷을 매만지다가 팔을 뀄다. 카이토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메이코에게 건넸다. 메이코가 쳐다보자 손을 살짝 흔들었다.

“매번 힘내는 메이코에게 주는 선물.”

“이게?”

“속상할 땐 단 걸 물고 있으면 좀 나아진대서.”

“카이토는 뭐가 속상한데?”

“응?”

메이코가 사탕을 꺼낸 주머니를 눈짓했다. 이런 데는 또 세심하게 신경 쓰지. 카이토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소곤거렸다.

“사실 며칠 전에 린이 준 건데 잊고 있었던 거야.”

“린한테 받은 걸 나한테 선물이라고 준 거야? 일러야겠네.”

“비밀로 해줘…….”

하하하. 메이코가 웃었다. 사탕을 까서 입에 넣길래 카이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메이코가 사탕 포장지를 쥐여주었다. 거스름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동이 어쩐지 기쁘다. 카이토는 그 쓰레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메이코가 카이토의 어깨로 머리를 기대와서, 카이토는 그 머리 위에 제 머리를 살짝 뉘였다. 이 정도는 이제 꽤 자연스럽다. 아마 메이코에게만. 이럴 때마다 카이토는 늘 시끄러워지는 속이 메이코에게 들리기를 바라기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뭐, 다 녹음해서 대표님한테 넘기기는 했어. 수위 높은 것들은 알아서 잘 처리해주시겠지. 그러라고 있는 대표 자리니까.”

“잘했어. 그런 건 또 잘 하시잖아.”

“……무뎌져야지 싶은데도 애들 뒷담에는 그게 참 어렵네.”

어깨에 이마를 부비던 메이코가 푹 고개를 숙였다. 카이토는 고개를 바로 하고 메이코를 바라보았다.

“메이코?”

“이상하다. 나 너무 속상했나 봐.”

메이코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잠깐만, 하더니 고개를 숙인 채로 느릿하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제 어깨에 흔적이 남지도 않았고 메이코의 볼도 젖어있지 않다. 보이는 건 살짝 붉어진 눈가와 일렁이는 눈동자뿐이었지만, 카이토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걸 느꼈다. 메이코가 눈물을 흘렸다. 이제까지 몇 년 동안 어떤 힘든 상황에서 한 번을 보인 적 없었던.

“사탕, 비밀로 해줄 테니까 이것도 비밀이야.”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이토.”

“어, 어?”

“너한테는 늘 의지하고 있어. 제일 많이 기대고 있을걸? 봐, 오늘 끌고 나오기도 하고.”

쑥스럽게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카이토는 얼굴을 감싸 쥐고 허리를 숙였다. 홧홧한 열감이 손바닥 때문인지 얼굴 때문인지 모르겠다. 메이코의 눈물 때문인지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카이토는 메이코에게서의 저를 조금 상향 조정했다. 아니, 꽤. 그렇다면 지금이 제 마음을 내비쳐 보일 타이밍으로 꽤 좋지 않을까? 고백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하게 티가 나는 정도라면.

“부끄럽니?”

“당연하지…….”

그 대답에 카이토의 시선에 맞춰 허리를 숙인 메이코가 키득거렸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에 빛나고 있다. 이런 매 순간마다 카이토는 목이 메여버리고 만다.

“후후. 계속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몇 년 더 있으면 변해야겠지.”

말을 할까? 애들이 독립해도 나만은 옆에 있겠다든지, 나는 언제고 함께 있을 거라든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서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너도 결혼 생각이 있다고 했으니까 나만 남게 되려나? 조금 쓸쓸하네.”

“……미리 생각하지 마. 그냥 막연하게일 뿐이야. 애들도 아직 생각해본 적 없을걸? 바뀌게 되면 그때 쓸쓸해 하면 돼.”

“응. 고마워, 카이토. 그래도 애들 다 클 때까진 안 된다? 2년 남았어. 지켜볼 거야~”

맥이 풀렸다. 카이토는 하하, 적당히 웃는 소리를 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들한테 한 번 물어볼까? 내가 몰랐던 야심가면 어떡해.”

“그런 뒷담에 넘어가진 마…….”

“하하하!”

이제는 얼굴에 그늘 한 점도 없다. 카이토는 쾌활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어쩐지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들어가자. 바람도 차고, 애들도 걱정하겠어.”

“응. 가자.”

돌아가는 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애들 몫까지 아이스크림을 샀다. 봉투는 카이토가 들었다. 메이코는 나왔을 때처럼 성큼성큼 앞서 걸었고, 카이토는 그 한 발짝 뒤에서 따라 걸었다.

그래, 아무렴 어때. 메이코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건 저였고, 눈물을 보인 것도 저였다. 메이코는 결혼 생각도 없어 보이니, 명실상부 메이코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바로 카이토였다. 그렇다면 메이코가 바라는 대로 이 거리에서 멈춰 있어 보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히 행복하고 버거우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지금 이상으로 바라는 게 생겨서 이 관계가 무너져도 후회하지 않을 때가 온다면, 그때야말로 진짜 노력해보자.

 

―라고 다짐했었다. 그때껏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만큼 메이코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건, 제가 있는 게 익숙해지게끔 노력해왔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으니까. 메이코가 제 마음을 눈치채고 거리를 두려 해도 스며들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계속 확률을 따지며 저를 저평가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머리로는 할 수 있다고 여겨도 막상 직접 겪으면 무너지는 마음을 주워 담는 게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카이토는 지금까지처럼만 한다면, 여기서 더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마음 먹기 전까지는.

“늘 고마워, 카이토. 매번 이런 것까지 들어주고.”

메이코는 풀어진 얼굴로 웃고는 어깨를 들썩여 카이토의 손을 떨쳐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켠 다음 몸을 일으킨다.

“씻고 자야겠다.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

“……응. 잘 자, 메이코.”

메이코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고, 카이토는 메이코를 계단 앞까지 배웅했다. 겨우 열 몇 걸음을 뒤따라 걸으며 무너지는 표정을 수습한다. 메이코는 계단을 다 올라가서야 뒤를 돌았다. 손은 흔들어주기에 카이토도 마주 흔들었다. 메이코는 금세 뒤돌아 사라졌다. 카이토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한동안 계단 앞을 떠나지 못했다.

카이토의 방은 당연하겠지만 나오기 전과 똑같았다. 직전까지 누워 있어 조금 흐트러진 이불과 책상 위에 올려둔 지갑, 그 아래 숨겨둔 메이코의 사진까지. 카이토는 사진 속 메이코를 보다가 지갑 속에 넣었다. 눈이 아려서 마른세수를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그대로 누웠다.

카이토는 메이코의 얼굴에서 찰나에 스친 아차 하는 표정을 보았다. 메이코는 술에 취해 있었으니까 그게 아주 잠깐이거나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늘 메이코를 살펴보는 카이토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명백히 저를 의식하는 티가 났다. 그건 요 한동안의 긴가민가하여 모르는 척 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이게 청신호일까, 적신호일까? 겨우 손 한 번 떨쳐진 걸로 확연히 느껴버린 거리감이 아파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카이토는 메이코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오래도록 여섯이서 함께하는 생활. 애들이 먼저 떠나면 쓸쓸해 하면서도 기쁘게 송별하고, 다시 둘만 남으면 평생 서로를 지탱하는 그런 미래.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건 메이코와 내가 로맨틱한 관계가 되면 오지 않을 미래인가? 아니다. 메이코가 바라는 일은 카이토도 바라는 일이었다. 메이코가 바라서가 아니라, 카이토도 메이코처럼 부모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다. 메이코와 결혼? 물론 하면 좋겠지, 행복하겠지. 하지만 그건 애들이 모두 떠난 뒤여도 상관없다. 그러면 지금과 달라질 게 있나? 물론 몇 가지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카이토는 꾸물꾸물 침대를 굴러 바로 누우면서 다시금 다짐했다. 메이코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상 답은 하나였다. 미뤄두었던 노력할 때가 된 것뿐이다.

이어지는 글 : 주제가 맞으면 또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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