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메이 연성100제

006.

저는 사실

KAIMEI by TT

메이코는 죽었다.

메이코의 가장 첫 기억은―이런 걸 첫 기억으로 쳐도 될지는 모르겠다만, 누군가 제 몸을 통과하는 묘한 감각이다. 거품기로 몸속을 휘저었다 뺀 것처럼 무언가 엉켜 딸려나가는 감각. 그러다 다시 되돌아와 빈 공간을 채우는 그런 낯선 감각. 속이 메슥거려서 헛구역질을 하다 눈을 떴더니 웬 거리 위에 서있었다. 메이코는 그 자리에서 멀뚱히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걸 보다가 밤이 되고 해가 뜨고 다시 밤이 되었을 때 제가 죽었다는 걸 인지했다.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을 제외하고는 살아생전에 무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서, 메이코는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나 여기서 무얼 해야 하는지를 한참을 생각했다.

아, 그래. 메이코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거리에 있는 건 그래서였다. 그게 누구인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메이코는 그날부터 그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마음이 내킬 때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구경하다 질리면 하늘을 보았다. 메이코가 한 번씩 하늘을 보다가 고개를 내리면 아무 것도 없이 널찍했던 거리에 벽돌이 깔리고 건물이 들어섰다. 계절마다 색이 달라지는 나무도 생기고 주기적으로 빛이 깜빡이는 등도 생겼다. 그래서 메이코는 어느날부턴가 제 시간감각이 고장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보면 다행이었다. 거리가 변화하는 모습만 보아도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기다림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면 아주 쓸쓸하고 괴로웠을 테니까.

 

“―메이코.”

누군가가 저를 불렀다. 제 이름이 불렸던 적이 없어서 메이코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메이코. 재차 불러올 때에야 메이코는 고개를 돌렸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는 선명한 색을 휘감고 있었다. 메이코는 기억하던 그 첫날부터 무채색의 세계만을 보아왔기에, 갑자기 찾아든 색이 너무도 눈부셔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너니?”

메이코가 물었다. 남자는 뜻을 물어보거나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어왔는데, 아주 이상하게도 그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이코는 아주 잠깐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팔을 뻗었다. 닿지 못해봐야 한동안 하지 못한 휘핑크림 체험이나 하게 되지 않겠나. 물론 그 메슥거림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 각오가 무색하게도 손이 맞닿았다. 온기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분명 닿는 감촉이 있었다. 메이코는 두 손으로 남자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홱 고개를 들었다.

“너구나.”

남자는 여전히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늘어뜨려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메이코, 나와 함께 갈래요?”

그 제안을 메이코가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메이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으니 여기에 계속 서있을 이유가 없었다. 제 고개짓에 남자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어보여서 메이코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잠시 멈추었던 남자의 숨결이 다시 천천히 새어나오며 메이코의 가슴부터 등으로 흘러갔다. 그 숨이 마치 죽어버린 제 몸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만 같아서, 메이코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남자를 따라간 뒤에 알았는데 남자는 머리며 눈이며 온통 새파란색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메이코는 그 색을 파랑이라고 부른다는 걸 남자에게 배웠다. 그건 메이코가 아는 유일한 색이 되었다.

 

남자는 작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며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어떻게든 노래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고, 작게나마 꿈을 이뤄 너무 기쁘다며 수줍게 말했다. 그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부탁해왔다.

“메이코가 옆에서 같이 노래를 해주면 좋겠어요.”

“내 목소리는 안 들리잖아.”

“나한테는 들리니까 괜찮잖아요. 내가 메이코랑 같이 부르고 싶은 거니까.”

쑥스러워하면서 발그레 물드는 얼굴이 어쩐지 사랑스러웠다. 그날부터 메이코는 남자와 함께 무대에 섰다. 남자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기다리는 시간도 그랬지만 함께 하는 시간은 더없이 빠르게 흘렀다. 남자는 나이를 먹었고 메이코는 남자와 처음 마주한 모습 그대로였다. 당연했다. 메이코는 죽었으니까.

나이가 든 남자는 매우 바빠졌지만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 때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도 항상 메이코가 제 시야 안에 들어와있길 원했다. 메이코는 남자의 곁이 아니면 머무를 곳이 없는데도. 한 번씩 메이코가 제대로 저를 보고 있는지 살피다 눈이 마주치면 메이코가 제일 좋아하는 모양으로 예쁘게 눈웃음을 쳤다. 그러면 메이코도 함께 웃어주었다.

 

남자는 점차 앉거나 누워서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곡은 계속 만들었다. 남자가 만드는 곡을 제일 처음 부르는 건 늘 메이코였다. 메이코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남자는 옆에서 화음을 넣었다. 남자의 화음이 희미해질수록 남자의 새파란 빛도 점차 사그라져갔다. 메이코는 그게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 남자가 말했다.

“메이코는 한 번도 제 이름을 부르지 않네요.”

메이코는 여느 때처럼 창가에 앉아서 하늘을 보던 중이었다. 듣지 못해도 괜찮다는 듯이 흘리는 말에 메이코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가르쳐주지 않았잖아.” 메이코는 빠르게 덧붙였다. “알고는 있어. 많이 들었으니까.”

남자가 소리내어 웃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힘없는 웃음이다. 남자는 가끔 저렇게 웃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와서 메이코는 남자의 곁으로 가 그 손을 마주잡았다. 남자는 그 손을 한 번 꼭 쥐었다가 끌어 당겼다. 메이코는 남자가 당기는대로 그 품에 안겼다. 메이코는 여전히 온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서로 닿아있는 감촉은 퍽 좋아했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메이코.”

“응?”

“사실 나는.”

남자는 목이 막힌 듯이, 입을 벌린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스스로에게 중요하다 생각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랬다. 메이코에겐 찰나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남자가 메이코를 제 품에서 놓았다. 남자의 두 눈은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데도 푹 젖어있었다.

“나는…… 메이코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에요.”

쥐어짜내는 목소리가 고백한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덮은 이불을 꾹 잡았다.

“나는, 메이코의 시간과, 그 감정도 빼앗아왔어요.”

남자는 상체를 수그려 얼굴까지 이불에 묻었다. 뚝뚝 끊기며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따라 이불자락에 흔적이 남는다. 메이코는 웅크린 남자의 등에 제 얼굴을 대었다.

“카이토.”

처음 부르는 이름이다. 남자의 몸이 크게 덜컹였다.

“……괜찮아.”

남자가 상체를 다시 들어올리려다가 마는 것이 느껴졌다. 메이코가 남자를 온몸으로 안고 있어서다. 무게도 부피감도 없을 메이코는 남자가 움직이는대로 떠오를 텐데도 그랬다. 남자는 늘 메이코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주었으므로.

“나는 즐거웠어. 그걸로 됐어.”

“…….”

납득하지 못한 듯 했지만 메이코는 신경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곁에 있는다면 언젠가는 믿어주겠지. 메이코가 기다리던 사람이 남자가 아니었더라도, 메이코는 남자를 만나서 기다림을 끝냈으니까.

메이코가 몸을 일으키자 남자는 뻐근한지 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적당히 갠 죽을 먹고 앉아서 곡을 썼다. 메이코가 다시 창가로 자리를 옮길까 생각하는데 남자가 손을 잡아왔다.

“메이코.”

남자는 조금 가쁜 숨을 쉬면서, “그러면 다음에는, 절 기다려줄래요?” 중얼거리고는 책상 위로 엎어졌다. 갑작스러운 취침이었다. 최근 들어 남자는 체력이 다하면 금세 잠들어버리곤 했기에, 메이코는 듣지 못할 귀 옆에서 “그래, 그럴게.” 대답했다. 일어나면 한 번 더 대답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어느새 무채색으로 물들어버린 남자의 얼굴 옆에 제 얼굴을 뉘였다. 메이코는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또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다 누군가 찾아올 때까지, 한참동안 그 감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가 다시 텅 비었다. 메이코는 창가에 앉아있다가 제 감각으로 계절에 세 번쯤 바뀌었을 때 그 집에서 나왔다. 남자와 함께 다녔던 길을 되짚어 걷다보니 처음 눈을 떴던 거리에 도착했다. 그래서 메이코는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들이 으레 그러듯 자신의 기억을 살라먹으며.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잊은 채로.

 


 

카이토는 며칠에 한 번씩 어머니가 술에 취해 소리치는 소리를 듣는다. 왜 하필 내 자식이야? 네가 그 이름으로 짓자고 해서 그래! 다 당신 탓이야! 그러면 아버지는, 제발 진정 좀 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내가 잘못했다고 몇 번 이야기하게 만드는 거야? 라며 함께 소리친다. 끝은 늘 같다. 낳지 말 걸 그랬어. 당신이랑 만나지 말 걸 그랬어. 이 집안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펑펑 우는 소리가 잦아지고 나면 불이 꺼진다. 그러면 카이토도 머리 끝까지 덮은 이불을 내리고 눈을 감는다. 잠에 바로 들지는 않는다. 사위가 조용해지면 제가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니까.

 

카이토의 외가는 영안이 뜨이는 집안이었다. 카이토가 그랬고, 카이토의 어머니도 그랬다. 할머니도 그랬고, 그 위의 할머니도 그랬다고 들었다. 카이토는 그 중에서 유난히 잘 보는 편이었다. 카이토가 귀신과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던 건 단지 그들에게 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퍽 걱정스러워했다. 그 때 싸움이 없었던 건 대대로 내려오던 영안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이토의 인생이 바뀐 건 열 살 무렵, 외가에 방문하면서부터였다. 그날은 날이 맑아서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어머니도 카이토도 기분이 좋았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일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유독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역에 도착하고 기차에서 내리자 어떤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어머니를 쳐다보았으나 어머니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귀신이 내는 소리구나. 카이토는 들리지 않는 척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노래는 끝나지 않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귀신이 내는 소리가 기분 나쁘지 않을 수 있다니 이상했다. 계속 듣다보니 오히려 낯이 익었다. 절로 따라부르려는 걸 애써 참으면서 카이토는 어머니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가 할머니 만나는 게 긴장되냐며 놀리듯이 웃어서 카이토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어깨 너머를 본 순간에, 카이토는 쓰러졌다.

카이토가 다시 눈을 뜬 건 며칠이 지난 후였다. 눈을 뜨자마자 오줌이 너무 마려웠다. 카이토는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서도 무작정 방을 나와 걸었다. 처음 방문한 목조저택에서 길도 잃지 않고 화장실에 도착한 카이토는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이 새파래졌다. 마치 파랑 물감을 잔뜩 뿌려놓은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수까지 마치고 나오자, 쿵 쿵 하며 마룻바닥이 크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숨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디 갔었냐면서 끌어 안고 엉엉 우는데 카이토는 오히려 의아했다. 찾는 소리를 듣진 못했는데. 그러고 며칠이 더 지나서야 알았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카이토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마치 그러면 카이토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처음 만난 할머니는 푸근하게 생긴 인상으로 어머니와 많이 닮아있었다. 특히 눈매가 그랬다. 카이토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 서글한 눈매였다. 할머니는 그 눈매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카이토를 보았다. 그래서 이름은 신중히 지으랬는데. 혀를 차고는 카이토에게 적당히 설명해주었다. 집안의 까마득한 윗세대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저주가 있다고.

요약하면 그랬다. 가문 내에서는 영안이 크게 뜨인 새파란 아기가 간혹 태어났으며, 그 아기 이름은 대대로 카이토였고, 보통은 귀신에 홀려 말년까지 혼자 살다가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 귀신에 어떻게 홀렸다는 이야기도 없었고 요절하는 게 아니라 말년까지 살다 죽는다는 소리인데 무엇이 저주라는 건지 카이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 마음이란 게 그런 거다. 아무렴 잘 살기를 바라지, 귀신에게 홀리는 걸 바라진 않으니까.”

“그래서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저는 파랗게 태어나지도 않았었는데.”

“파랗지 않은 아기한테 카이토라는 이름을 주면 카이토들보다 더 불행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네가 왜 파래졌는지는 모르겠다.”

“그게 뭐야. 안 그럴 거예요.”

카이토는 장담했다. 그 때에는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던 날은 조금 흐린 날씨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역으로 가는데 또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여전히 듣지 못하는 듯했다. 카이토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한 여자를 보았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시가지에서 유난히도 사람이 없는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여자를. 분명 색이 선명한데도 카이토는 그 여자가 귀신이라는 걸 알았다. 여자가 손짓할 때마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비가 떨어지지도 않는데 여자의 발이 닿는 곳마다 물이 튀는 것 같아서 카이토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멈춰 선 카이토를 따라 하늘로 한 번, 여자가 춤추는 구석으로 한 번 시선을 돌렸다가 그 팔을 잡아 당기며 걸음을 빨리 했다. 카이토가 넘어질 뻔했지만 어머니는 기차에 올라탈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카이토는 늘 여자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들린다기보다는 카이토 스스로 되뇌인다는 게 맞았다.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신문을 뒤지기도 했다. 뭐라고 찾아야할지를 모르다보니 나오는 것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물어본 건 미루고 미루던 방법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할머니가 안타깝다는 듯이 신음을 흘렸다.

“홀렸구나, 아가야.”

그제야 알았다. 이게 홀린 거구나.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는 윽박 지르며 벗어나라 소리치지는 않았다. 그저 그게 순리였다는 것처럼 체념한 목소리로 잠시만 기다리라 하더니 곧 돌아와 바삭바삭 종이 넘기는 소리를 냈다.

여자의 이름은 메이코였다. 윗세대의 윗세대의, 어쨌든 선조 시절에도 그 자리에서 어느 시기에는 춤을 추고, 어느 시기에는 노래를 부르면서, 또 어느 시기에는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를 반복하는 지박령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적혀있는 건 그게 전부라며 잠깐 뜸을 들이다가 너무 깊이 빠지지 않길 바란다고 한 마디만 덧붙였다. 그 당부를 흘려 들으면서 카이토는 생각했다. 메이코는 지박령이 아니야. 어떻게 아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하게나마 제가 크면 메이코를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용돈이 줄어들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카이토가 메이코를 보기 위해 푯값을 모은다는 걸 눈치챘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부모님이 싸우는 빈도가 늘어났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없는 사람인 양 행동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카이토를 불러 앉혔다.

“귀신 보러 가려고 돈 모은다 들었다.”

“그걸 믿으세요?”

“그러면 어디다 쓰고 있는 거니?”

아버지의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변명거리를 생각해둔 적은 없었지만 카이토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나오는대로 대답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서 악기 살 돈을 모으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였다. 스스로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코와 함께하고 싶은 미래를 그렸다. 메이코를 위해 곡을 만들자. 그리고 그 곡을 메이코가 불러주면 좋겠다. 그러면 저는 옆에서 연주를 하면서 화음을 넣을 거다. 메이코의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다면 제 장례식에서 틀어달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너도 이미 느꼈겠지만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네 엄마와는 이혼할 거야.”

“네.”

“너는 누굴 따라가고 싶니.”

카이토는 아버지의 피곤에 찌들어 늙어버린 얼굴을 보았다. 늘 찌푸리고 있던 미간 사이로 깊게 주름이 패여있다. 그것에 딱히 감상은 들지 않았다.

“저는 혼자 살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다는 듯이 대답했다. 안도인지 모를 것이 언뜻 스쳤으나 카이토는 못 본 체 했다.

 

베이스를 샀다. 혼자 노래를 부르며 연주하려면 기타가 낫지 않겠느냐고 주변에서 권했지만 카이토는 베이스를 고집했다. 묵직하게 받쳐주는 소리가 좋아서였다. 메이코가 노래를 부를 때 함께 튀는 소리를 내기보다는 그 목소리를 더욱 돋보이게끔 해주고 싶었다.

 

습작으로 내놓은 곡들은 의외로 인기를 얻었다. 덕분에 인지도가 올라가서 근방에서 꽤 실력있는 밴드에게 고정 제안을 받기까지 했다. 수락했으나 합류는 지금 만드는 곡이 완성될 때까지로 미뤘다. 어쩐지 첫 소절부터 느낌이 좋아서 다른 데에 눈을 팔고 싶지 않았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는지 메이코에게 들려주어도 창피하지는 않을 곡이 완성됐다. 카이토는 곡을 완성하자마자 연습실을 뛰쳐나가서 기차에 올랐다. 지금까지 여러 번 기차를 탔지만 늘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쥔 채 시간을 재촉하던 카이토는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구르듯이 뛰어나왔다. 시가지까지 한달음에 내달려서는 오늘도 희미한 노랫소리를 흘리는 메이코를 보았다. 너무 세차게 뛰는 심장 때문에 두어 번 가슴을 두드리고서는 가까이 다가섰다.

메이코와 시선이 맞닿았다.

카이토는 그 찌푸린 얼굴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파랑?”

“네, 내 눈 색은 파란색이에요.”

“그렇구나.”

“왜요?”

“그걸 보고 알았어. 그 색이 너무 눈부셔서. 네가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걸.”

그 대답에 카이토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왔다. 아. 정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카이토는 꾹 삼켜내기로 했다.

 

메이코는 모든 순간을 카이토와 보냈다. 메이코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 저뿐이라서라는 걸 카이토는 알고 있었다. 간혹 같이 있으면서도 메이코는 하늘을 보았다. “무얼 보고 있어요?” 카이토가 물으니 메이코는 하늘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그걸 본다고 했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반짝이는 하늘이 제일 아름다웠다면서.

 

메이코는 간혹 흐릿해질 때가 있어서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면 불안했다. 무게가 없어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고, 부피감이 없어서 안고 있어도 힘을 주면 연기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더욱이 메이코의 시간은 제멋대로라서, 한 번씩 생각에 잠겨 몇 날 며칠을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도 그게 찰나인 줄 알았다. 그럴 때마다 카이토는 메이코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눈이 마주치면 메이코는 다시 웃어주었으니까.

 

하루하루 눈에 띄게 가누기 힘들어지는 몸이었지만 오늘은 눈이 번쩍 뜨였다. 숨쉬기도 편하고 둔하던 감각도 살아나서, 평소라면 누운 채로 멍하니 조금 더 시간을 보냈을 카이토를 금세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카이토는 직감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메이코가 마주 웃어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사정없이 찔러오던 죄책감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날이었다.

카이토는 메이코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살았다. 그 어린 날 메이코에게 색이 입혀진 때부터 느껴온 건 날이 갈수록 불어나 카이토의 숨통을 조였다. 무채색이었던 메이코가 색을 얻은 것처럼 메이코에게 무채색이었을 제가 빛난다고 들었던 그 날, 카이토는 메이코가 기다리던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걸 여실히 느끼고 말았다. 그건 제가 아니라 파랗게 태어날 ‘카이토’의 자리였다. 카이토는 이제껏 그걸 꾹꾹 눌러 삼켜왔다. 그러다 깨달았다. 메이코는 한 번도 저를 카이토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슬펐다.

 

언제부턴가 카이토는 제 곡이 메이코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느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메이코에게 마치 삶의 이유 같았다. 그래서 카이토는 메이코를 제 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곡을 써야만 한다고 믿었다.

놓친 펜이 책상을 구르다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는 꽤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나? 벌써 끝난 건가? 지금 쓰는 곡도 이제 막바지인데. 카이토는 여기서 펜을 줍기 위해 몸을 수그리면 그대로 일어나지 못할 거란 걸 느꼈다. 조급해져서 메이코를 돌아보자, 곁에 앉아 카이토가 그려넣는 악보를 구경하던 메이코는 어느샌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며칠을 그러고 앉아있을 것만 같은 표정이다. 그래서는 안 됐다. 카이토는 메이코의 손을 쥐었다. 숨이 가빠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있는 힘껏 쥐어짜냈다.

“메이코.”

메이코가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평소처럼 배시시 웃는다.

“그러면 다음에는, 절 기다려줄래요?”

이기적인 말을 내뱉는다. 메이코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카이토는 그 얼굴을 머릿속에 꼼꼼히 그려넣으며 생각했다. 영혼에까지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다시 태어나도 메이코를 기억할 텐데. 바로 달려갈 텐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준다면 내가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진짜라고. 눈이 무거웠다. 머리가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했다. 카이토는 메이코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얼굴이 책상에 닿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이어지는 글 : 007.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 https://penxle.com/tt_/2126540788



사담 안넣을랬는데 이거 업로드하고 프세카 매칭된 곡이 천년의 독주가라서 안 달 수가 없었어요.
가사가 완전 찰떡이야 이런 건 아니지만 그냥 뭔가 진짜 맘이 그래서.........ㅇ(-( 그래서 첨부함

흑흑 카이메이........ 카이메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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