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메이 연성100제

005.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KAIMEI by TT


* 발매일 기준 설정 나이 기반, 메이코 카이토는 불명이라 좋아하는 숫자로 했습니다.
> 메이코 22세(2004), 카이토 22세(2006), 미쿠 16세(2007), 린렌 14세(2007), 루카 20세(2009)
> 루카 합류 연도 기준 : 메이코 27세, 카이토 25세, 미쿠 18세, 린렌 16세, 루카 20세

메이코 씨는 만약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요?

아까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더라. 아마 이렇게였던 것 같다. ‘후회는 있더라도 되돌리고 싶은 일은 없어요. 그 일을 겪었어야만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편집되지 않는다면 그걸 보고 누구는 참 멋있다고 감탄해줄 거고 누구는 참 모범적으로 대답했다고 혀를 차겠지. 표정까지 눈에 훤하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줘야지. 대외적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 대답 자체가 거짓말인 건 아니다. 메이코는 살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예를 들어, 이십대 초반에 길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대표님를 만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그 맹한 모습만 보고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겠지. 그 삶도 나름 재미있겠지만, 글쎄. 메이코는 굳이 시간을 되돌린다면 따위의 가정으로 바뀔 삶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어제 실수하고 후회했다면 시간을 되돌린다는 생각보단 그걸 바탕으로 오늘은 더 나은 삶을 살면 된다. 그래서 메이코는 어제의 자신보다 하루만큼 성장한 오늘의 자신을 더 아껴왔다. 그런데 뭐가 대외적이냐고? 이렇게까지 현재를 사랑하는 메이코라도 인생이 뒤바뀔만한 일이 아니라면 역시 한 가지쯤은 바꾸고 싶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보이는 숙소 창문은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 늦은 시간이니만큼 다들 잠들어서이길 바라지만 그러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성인이 되었다고 신나서 아직도 날뛰는 망아지가 둘이나 있어서다. 메이코가 숙소에 들어서며 센서등이 켜지자 거실에서 인기척이 났다.

“카이토. 안 자고 있었어?”

“응, 메이코가 오는 걸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 늦게까지 고생 많았어.”

잠깐 잠들었다가 깬 건지 카이토는 짧게 하품을 하면서 다가와 겉옷을 받아갔다.

“애들은?”

“미쿠랑 루카는 자고 있을 거고 린이랑 렌은 밖으로 나갔어.”

“그럴 줄 알았어. 이 시간에 그 애들 방에 불이 꺼져 있을 리가 없는데. 어디 간대?”

“심야 버스 타고 바다 보러 갔다가 아침에는 오겠대.”

“뭐?”

“음. 심야 버스에서 노래 부르면서 가보고 싶다더라. 로망이라고. 매니저도 따라 갔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무슨 내가 스무 살 때에나 하던 짓을. 아니, 그 나이대니까 그런 걸까? 메이코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카이토가 달래듯 메이코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뭐 하는 거야.”

“애들 성인되자마자 일 더 많아져서 바쁘다고 힘들어했잖아. 이번 겨울까지는 봐주자.”

“연말에 내 와인셀러만 안 털었어도 별 생각 없었을 거야.”

카이토가 웃었다. 눈에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모양새다. 메이코는 카이토를 돌려 세우고 등을 밀었다.

“너도 얼른 자. 피곤할 텐데 뭘 기다리고 있니.”

“인사해주고 싶어서. 잘 자, 메이코.”

“응, 너도.”

인사도 나눠놓고 계단 아래까지 졸졸 따라온 카이토는 메이코가 계단을 다 올라 뒤를 돌아볼 때까지 그대로 서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준다. 메이코도 작게 손을 흔들고 방으로 향했다. 그제야 아래서 발소리가 났다. 메이코는 방문을 닫고 습관처럼 거울을 봤다가 두 뺨을 문질렀다.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메이코가 카이토를 처음 만난 건 스물네 살이 되는 해였다. 정확히는 스물세 살이 되고 삼 개월 차에. 첫 가수니 음반이니 하는 것에 혹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사기 계약이라고 왁왁대면서도 소속사 이름을 알리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시기였다. 그렇게 조금씩 팔리기 시작할 즈음에 후배가 생길 거라는 이야길 들었다. 기뻤던 건 잠시였다.

“안녕하세요, 카이토입니다. 며칠 전에 스물두 살 되었습니다.”

숙소에 찾아와 맑은 얼굴로 인사하는 남자를 보자마자 메이코는 대표의 멱살을 잡았다. 이 시기의 메이코는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울 만큼 철이 없고, 예민하고, 성질머리가 급했다.

“대표님 미쳤어요? 숙소 같이 써야 한다며.”

하지만 멱살 잡을만한 사유였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스물셋, 스물둘의 젊은 청년을 한 숙소에 몰아넣는 정신 나간 소속사가 여기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대표는 퍽 난감하단 표정이었다.

“내가 성별을 말하지 않았었구나. 미안해, 메이코. 근데 카이토도 머물 곳이 없대서 어쩔 수가 없었어……. 이 녀석 착한 건 내가 장담할 테니까. 너만큼 오래 봐온 애야.”

“일 년쯤밖에 안됐단 거잖아요. 대표님 집에서 재워요!”

“아니, 우리 집은 아무래도 가족이 있으니까…….”

“저기, 죄송해요……. 저는 사무실에서 자도 괜찮아요.”

“그럼 그렇게 해.”

메이코는 곧바로 카이토를 숙소에서 쫓아냈다.

 

아무런 일정이 없는 느긋한 날이다. 메이코는 느지막히 눈을 떴다. 간단히 씻고 1층으로 내려가니 거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모두의 이름 옆에 외출 자석이, 제 이름 옆에는 집 자석이 붙어있었다. 어제 바꾸는 걸 잊었는데 카이토가 해놓은 모양이었다. 이 화이트보드는 루카까지 숙소에 합류했을 때에 미쿠가 냈던 제안이었다. 일정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귀가 여부는 알고 싶다면서. 외출, 집, 휴식 세 종류의 자석이 있는데 집과 휴식이 뭐가 다르냐며 린이 궁금해하자 한참 고민하던 미쿠는 ‘휴식일 때는 연락하지 않기로 하자!’랬고, 그 뒤에는 렌이 매번 휴식을 붙여놓기 시작했다. 그 뒤는 뻔했고 당연하게도 중재는 카이토가 했다.

일정표를 보니 오늘은 저녁까지 혼자 있을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외출을 하든 누군가 남아있든 해서 조용할 일이 없었는데 어쩐지 어색했다. 거실 소파에 앉자 자리가 넉넉했다. 널찍한 소파도, 베란다가 있는 거실도, 1층과 2층이 나뉘어진 숙소도 새삼 낯설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방 두 칸짜리 월세방이 숙소였다. 한 칸은 메이코가 썼고 한 칸은 언젠가 들어올 후배를 위해서였다. 메이코는 후배가 생기는 걸 꽤 기대했기 때문에, 소파도 없고 거실과 부엌이 나뉘어 있지도 않은 좁은 숙소에서 잠에 못 드는 밤이면 귀여운 후배와 해보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보곤 했었다. 결국 그 방을 카이토가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꽤나 실망했었지. 물론 생각해두었던 것들은 그 뒤에 들어온 애들과 하기는 했다.

삑, 삑.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현관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카이토가 들어섰다. 신발을 벗다가 메이코를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메이코.”

“카이토, 오늘 저녁에야 오는 거 아니었어?”

“아, 오전 스케쥴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잠깐 들렀어. 이따 다시 나가야지.”

“왔다갔다하면 오히려 시간만 쓰는 거 아냐?”

“여기 오는 게 짧아도 더 편하게 쉴 수 있는 걸.”

“고생이네. 오전 일 수고 많았어.”

카이토는 외투를 소파 위에 걸쳐놓고 몸을 기울였다.

“뭐 하고 있었어?”

“아무 것도.”

“아침은 먹었어?”

“앉아있는데 너무 조용해서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일어나서 부엌에 들어가보지도 않았구나.”

말 돌리는 게 너무 티가 나긴 했다. 카이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정수리에 머리를 부딪쳐왔다. 힘주어 꾹꾹 부벼대고 고개를 든다. 정전기에 머리카락이 함께 떠올랐다.

“미용실 다녀왔던 머리 아냐? 그렇게 해도 돼?”

“괜찮아. 오후는 영상 촬영도 아니니까.”

카이토는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성큼성큼 부엌으로 걸어갔다. 카이토의 오늘 오후 일정은 라디오였던가? 분명 시작은 가수였는데 어느샌가 노래보다는 다른 활동을 더 하고 있었다. 저도, 카이토도, 다른 애들도.

카이토는 금세 요깃거리를 만들어 왔다. 냉장고에 있던 것들로 적당히 썰고 볶은 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옛날 생각이면 어떤 거?”

그냥 넘기지는 않았나보다. 메이코는 웃음을 흘리면서 음식물을 삼켰다.

“너 처음 만났을 때.”

“아.”

“그리고…… 아직 나 혼자 있었을 때? 그때처럼 조용한데 넓고 쾌적해서 낯설다는 생각?”

“지금도 낯설어?”

“음, 아니. 카이토가 있으면 익숙하지.”

배시시 웃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카이토 그릇에는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카이토는 음식을 천천히 먹는 편이었다. 메이코는 카이토가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딱히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 메이코는 재차 카이토와 제법 오래된 사이라는 걸 실감했다. 말 없이 같이 있기만 해도 편안한 관계라니. 카이토가 그릇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이코도 따라 일어나서 뒷정리를 도왔다.

“카이토는 이제 나가야 하지?”

“그래야겠지…….”

“라디오가 시청자 눈에는 안 보여도 머리는 다듬어. 스탭들이 보잖아.”

아까부터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어 정리해주고는 볼을 꾹 감싸쥐었다. 카이토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잘생겼네. 그치? 오늘도 잘 하고 와.”

“메이코……?”

“나는 들어가서 책 읽다가 낮잠 좀 자야겠어. 잘 다녀 와.”

메이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옛날 생각에 죄책감이 되살아나서 조금은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실패였다. 발그랗게 열이 오르던 카이토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덩달아 부끄러워지고 말았으니까.

 

카이토는 메이코가 숙소에서 쫓아낸 후로 정말 사무실 생활을 했다. 잠은 침낭을 깔고 자고 씻는 건 저녁에 대표를 동행해 숙소에 방문해서 씻었다. 그리고 짧은 회의와 일정을 공유하고 나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푹 자지는 못하는지 그 짧은 새에 눈밑이 거매지고 볼이 홀쭉해져서는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이 딱해보였으나 메이코는 애써 모른 척했다. 대표가 장담한대로 카이토가 착하고 순하기는 했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한 집에서 생활하기에는 지금까지 듣고 봐온 남자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걸로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어떡할 건데? 그러면 재기 불능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났을 무렵, 숙소에 도둑이 들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없어서 피해는 적었으나 온 집안이 뒤집어져 있는 건 충격이었다. 가구가 뒤집어져 있는 건 물론이고 옷가지며 가재도구까지 다 여기저기 팽개쳐진 상태였다. 가져갈 게 없어서 불만이었는지 식칼이나 가위, 젓가락 같은 걸 아무데나 꽂아놓기까지 했다. 그에 두려움이 더 컸는지 분노가 더 컸는지는 이제와서 기억나진 않지만, 대표한테 전화를 걸 때 손가락이 헛돌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연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땀범벅이 된 채 뛰어온 카이토가 안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보고서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도왔던 것도. 알고보니 그 건물 사람들 대부분이 도둑에게 당했다고 했다. 세입자들의 항의에 집주인은 결국 현관문을 전부 교체해주기로 약속했다.

메이코는 그뒤로도 한동안은 숙소를 혼자 사용했다. 자리에 누워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계단을 오르는 소리 같은 걸 듣다가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여전히 카이토의 입주를 거부하면서 사무실에서 자는 카이토보다도 안색이 나빠지다 피로 누적으로 쓰러져버리고 난 뒤에야, 같이 사는 사람이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는 말을 수용했다. 그러자 대표는 또 속 터지는 소리를 했다.

“이렇게 함께 살게 된 거 둘이 잘 지내 봐. 눈 맞으라는 소리는 아니고, 봐 봐. 메이코도 스물둘에 데뷔했고 카이토도 스물둘에 데뷔하게 되니까 둘이 동갑 데뷔조잖아. 안 그래?”

―따위의 헛소리였다. 대표는 어딘가 붕 뜬 구석이 있어서 간혹 어떻게 이러나 싶을 정도로 태평하게 굴었다. 믿어서 그런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메이코가 느끼기엔 후자 같았다. 상황이 그쯤 되니 메이코도 반쯤 체념했다.

어쨌든 그때는 그게 카이토 탓이 아닌데도 카이토 탓을 했다. 카이토가 남자인 것도, 하필 이 소속사에 두 번째로 들어온 것도, 도둑이 들어서 같이 지내게 된 것도. 일하면서 문제를 만들지는 않았으나 둘이 있을 때는 분위기가 굉장히 나빴다. 물론 메이코가 일방적으로 만든 분위기였다. 대표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난 올해로 스물넷이 된다며 되지 않는 기싸움까지 걸었더랬다. 그 뒤로 카이토는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렀다. 그 상황이 나아진 게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쿠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둘이서 계속 발품 파느라 고생했으니까 그 유대감 때문이었을 거다. 그러고보니 이름으로 부른 것도 언제부터였지? 미쿠가 왔을 때에는 이미 메이코였는데.

 

문자가 왔다. 메이코는 책을 덮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책도 진도가 느렸고 낮잠도 잊어버렸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핸드폰을 보았다. ‘메이코, 깨어 있으면 밥 먹으러 내려 와(웃는 이모티콘)’ 카이토였다. 2층이 금남구역이다보니 부를 일이 있으면 종종 이렇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1층으로 내려가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식사는 대체로 카이토와 메이코가 준비했는데, 카이토가 그때그때 요리를 하는 편이라면 메이코는 큰 냄비에 국이나 카레 같은 것들을 팔팔 끓여놓는 편이었다. 둘이 없어도 애들이 챙겨 먹을 수 있게 준비하려 했더니 그렇게 되었지만 며칠동안 먹기에는 물린다는 평이 있었다. 그건 메이코도 같은 의견이기는 했으나 적당히 묵살했다. 식사 당번 이야기도 나왔으나 일정이 워낙 불규칙하다보니 정할 수가 없어져서 결국 현상 유지였다. 오늘도 그랬다. 미쿠와 루카는 드라마 밤 촬영을 함께 갔고, 린과 렌은 1박 짜리 예능 프로그램을 가서 식탁엔 메이코와 카이토 둘 뿐이었다.

“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힘을 줬어?”

놓인 가짓수가 많았다.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알 수도 없어서 메이코는 절로 감탄했다. 카이토가 김이 올라오는 찌개를 식탁에 올려놓고 마주 앉았다.

“만들어 놓으면 다들 챙겨 먹긴 하니까. 일찍 온 김에 이것저것 해 봤어.”

“이러다 카이토가 결혼이라도 한다고 숙소를 나가버리면 어떡하지? 애들 다 집에서 밥 안 먹을 거 같아.”

메이코가 한숨을 폭 내쉬자 카이토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메이코는 가끔 쓸 데 없는 걱정을 해.”

“응?”

“내가 먼저 숙소를 나갈 일은 없을 거야.”

마주한 눈이 어쩐지 불퉁해보인다. 메이코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 뒤엔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점심 때는 편안했던 식사 시간이 갑자기 불편해졌다. 메이코는 일찍 입맛을 잃었다. 티나지 않을 정도로 깨작거리다가 카이토가 다 먹고 나서야 함께 일어섰다. 그릇을 정리하려는데 카이토가 막아섰다.

“뒷정리는 나 혼자 할게.”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 들어가서 쉬어.”

부드럽게 밀어내는 통에 메이코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가 제 방으로 올라왔다. 카이토는 아닌 척 했지만 기분이 상한 티가 났다. 실수했다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메이코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시금 어제의 질문이 생각났다. 그래, 메이코는 아주 강하게 긍정했다. 가능하다면 꼭 바꾸고 싶은 일이 있었다.

 

메이코가 카이토의 지갑 안쪽을 보게 된 건 아주 우연찮은 일이었다. 장을 보러 왔는데 지갑을 놓고 왔다며 가져다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날따라 달랐던 건 오래된 지갑이 닳아있었던 것뿐이었다. 카이토의 지갑은 옛날 어느 시점에서 메이코가 일방적인 화해의 의미로 건넸던 선물이었다. 꽤 오래도록 사용하고 있어 바꾸는 게 어떻느냐 몇 번 물어봤으나 카이토는 오래 써서 이게 더 편하다고만 했다. 그래도 역시 새 지갑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닳아버린 부분을 매만졌더니 터진 실밥 사이로 사진 귀퉁이가 튀어나왔다. 메이코는 사진이 상할까봐 지갑을 열었다.

사실 카이토의 지갑을 열어본다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카이토가 남 앞에서 지갑 여닫는 걸 거리끼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메이코가 카이토 대신 그 지갑을 열었던 적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그 안에 몇 년 전에 찍었던 대표까지 포함된 일곱 명의 단체 사진이 있다는 건 메이코만이 아니라 카이토와 가까운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진의 뒤에 있었다. 비뚤어진 단체 사진 뒤에는 잘 보이지 않게 숨겨둔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 그건 메이코도 처음 알았다. 뒷면만 보이는 사진을 뒤집어보았다가, 메이코는 지갑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사진은 메이코의 단독 사진이었다.

메이코는 그 뒤에 카이토에게 새로운 지갑을 선물했다. 카이토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지갑을 바꿨다. 그 외에 특별히 눈에 띄도록 달리 행동한 건 없었다. 메이코는 평소처럼 카이토를 대했고 카이토도 평소와 같았다. 다만 카이토를 조금 더 의식하게 되었다. 벌써 몇 년이나 함께 했는데도 몰랐던 습관이라거나 웃는 얼굴에서 미묘하게 티나는 감정이라거나를 살펴보다가, 메이코는 어느 순간 직감했다. 맙소사. 이러다 나까지 카이토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메이코는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사진을 발견한 것도, 카이토를 살펴보던 것도.

물론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까지 질질 끌고 오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카이토도 눈치채고 있었을 거다. 아까처럼 메이코가 무심코 잊을 때마다 은근히 드러내는 것들이 꼭 그래보였다. 하지만 바로 지금이라도 1층에 내려가 카이토를 마주친다면 카이토는 기분 상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메이코를 대할 것이다. 그러면 메이코도 모른 척하고 평소가 반복되겠지. 메이코는 제가 모르는 때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 이 상황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모두와 가족처럼 함께 지내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깨지는 건 저나 카이토 때문이 아니라 애들 때문이었으면 했다. 가령 독립이라거나 하는 즐거운 일로.

카이토는 어쩌고 싶은 걸까? 늘 한 번씩은 생각해보지만 혼자서는 더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메이코는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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