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
요거트 100일 기념
잠에서 깨어난 앨버트는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로 제 침대 위를 훑었다. 방 안은 잠자리에 들었던 때와 같이 여전히 어두웠으며, 제 옆의 소년은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있었다. 잠들었구나. 다행이다, 푹 자고 있나 봐. 앨버트는 졸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눈앞의 요한을 보며 앨버트는 '요한 가그니얼 마틴'을 떠올렸다. 코피가 흘러도 예삿일이라는 듯 솜뭉치를 틀어넣은 뒤 남은 수업을 마저 듣는 모범생, O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성적표를 받아들어도 몇 개의 E가 불만스러워 다시 한번 도서관을 찾는 욕심쟁이, 수없는 핀잔에도 좀처럼 달라질 줄 모르는 자신을 포기할 법도 하건만 재차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잔소리꾼. 요한이 어떠한 마음으로 올곧은 자세를 고수하고 어떠한 생각으로 자신을 지도하는지, 앨버트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지치면 지칠수록 더욱 무리를 하는 사람, 순간의 해이조차도 용납하지 못해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 그것이 앨버트가 보았던 요한 가그니얼 마틴이었다.
그렇기에, 이제껏 본 중 가장 힘겨워 보이는 모습의 요한을 마주한 앨버트는 그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까 염려했다. 감히 누가 자신의 종자에게 상처를 내었는지, 무엇이 이 궂은 날 그가 자신의 집 앞으로 찾아오도록 만들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할 어떠한 상념들이 밤새 요한을 괴롭힐 것만 같아서, 앨버트는 오후 내내 밤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 앨버트가 비로소 마음을 놓은 것은 자고 싶지 않다며 투정을 부리는 저학년 아이들을 잠재우던 경험을 떠올린 뒤였다. 따뜻한 이불로 감싸거나 따뜻한 우유를 한 잔 건네 몸을 덥히고, 책을 읽어주거나 속살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어떤 아이든 속절없이 잠들었다. 이 방법이라면 요한도 분명 잠에 빠지리라고 앨버트는 자신했다.
그러니 앨버트가 "요한, 집이 너무 너저분해서 네가 지낼 만한 침실이 없어. 너만 괜찮다면 내 방에서 자야 할 것 같은데…." 따위의 엉성한 억지를 부려 요한을 제 방으로 끌어들인 데에는, 요한을 반드시 잠재우고 말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다만 순전한 꿍꿍이라고 하기에는 앨버트가 조금 억울했다. 앨버트의 집에는 손님용 침실이 여럿 마련되어 있었으나, 그 방들은 이제 보름달이 뜬 밤마다 앨버트를 세상과 격리하는 용도로 바뀌었다. 짐승의 발톱 자국이 길게 나 있는 벽지,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끄트머리가 세로 방향으로 잘게 조각난 커튼, 그리고 작은 이빨 자국이 여럿 남아 흉측스러운 침대 다리.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서 요한을 재울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방이나 부모님의 방 역시 있었으나, 이제 얌전한 여자아이로 살겠다고 가족들과 약속을 해둔 참이다. 만약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집에 외간 남자를 들였다는 것을 안 어른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놀라실까. 게다가 요한은 그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런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요한을 숨기려면 내 방이 제일 나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그렇게 앨버트는 요한의 손을 잡아끌었다.
적어도 수면에 관해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던 앨버트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난관이 다가왔다. 둘 중 누가 침대를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손님이 침대를 써야 한다는 앨버트와 주인이 침대를 써야 한다는 요한 사이의 충돌은 서로의 뜻에 타협하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며 마무리되었다. 손님과 주인, 두 사람 모두 침대를 쓰자는 것이었다.
"내 생각보다 침대가 넓은가 봐. 너 혼자 잘 때만큼 편하지는 않겠지만, 이만하면 꽤…."
요한과 함께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앨버트는 속닥댔다. 자신의 말에 대한 동의라도 구하듯 눈꺼풀을 올려 제 왼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앨버트는, 침대에 누웠다기보다는 벽에 붙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모양새로 굳어 있는 요한을 보았다. 하마터면 나직하던 목소리가 귀를 찢는 비명으로 변할 뻔했다.
"까, 깜짝이야. 왜 그렇게 몸을 구기고 있어?"
앨버트는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을 가린 어둠 탓에 그의 뺨이 붉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 제가 그쪽으로 더 가면 당신 어깨랑 제 어깨가 닿을 겁니다."
"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더 와. 내가 끝으로 갈게."
아, 허리가 묘하게 아프다 싶더니… 그때 침대 끄트머리로 몸을 옮기다 그만 굴러떨어졌던 게. 통증을 의식하자 욱신거림이 제 존재감을 한층 더하는 것만 같아 앨버트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앨버트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황망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동안, 요한은 숨죽여 웃다 자리를 바꿔주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체온으로 데워져 따뜻하고 아늑한 자리에 누운 앨버트는 요한이 잠들기를 기다리며 온갖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냈다.
저녁에 오믈렛을 태워서 미안해. 덜 익은 것 같길래 살짝만 더 익혀주려고 했던 거였는데. 그냥 그때 줄 걸 그랬나 봐.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죠. … 그런데 그게 오믈렛이었어요? 저는 달걀 스크램블인 줄 알았는데요…. … 뭐라고? 아, 음… 그래, 모양이 조금 못나긴 했지. 그래도 스크램블 수준은….
죄송합니다.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와서요. 아니야, 마침 쓸쓸하던 참이었어. 혼자 있었다면 온종일 한마디도 못 하고 지냈을걸.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 오히려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이었는데. … 정말입니까? 빈말이라도 듣기는 좋네요….
세틴, 아니… 세르티나 블레이크 마틴 3세는…
여러 질문과 답이 오갔음에도, 앨버트는 대부분의 대화를 기억했다. 다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앨버트의 기억에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문장을 제대로 끝맺었는지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곳에서 소곤대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구든 졸음이 쏟아진다는 그 원칙을 몸소 증명한 셈이다. 아마 요한도 저 질문을 들을 즘 잠들었겠거니 생각하며, 앨버트는 손을 들어 눈을 가볍게 문지른 뒤 다시 그것이 있던 곳에 팔을 얹었다. 이불이라고 하기에는 새삼스러운 천의 감촉, 침대라고 하기에는 단단하며 낯선 느낌. 그러나 동시에, 따뜻하고 생생해 불쾌하지 않은…. 그제야 앨버트는 자신이 요한을 껴안고 잠들어 있었음을 알았다. 앨버트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반사적으로 두 팔을 풀어내며 양손을 거둬들였다.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요한은 정말로 깊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았음을 깨닫지 못한 자신 또한, 요사이로서는 드물게 깊고 편안한 잠에 빠졌던 것이 분명했다. 앨버트의 두려움은 보름에 가까워질수록 달과 함께 매일 차올라서, 둥글어지는 달이 세상을 비추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저 구체가 자신을 뒤따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스쳤다. 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스스로를 감추고 싶어 창문마다 커튼을 쳐두어도, 자그마한 틈새를 비집고 어김없이 새어드는 월광은 밤마다 앨버트를 꿈에서 깨어나도록 만들었다. 울렁이는 가슴을 억누를 적마다 앨버트는 이 가쁜 숨이 자신이 만월을 겁내는 탓인지, 혹은 제 안의 맹수가 만월을 갈망하는 탓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요한의 몸이 자신을 달빛으로부터 가리고 있었다. 앨버트는 자신이 다시 침대에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며 요한이 침대의 바깥쪽으로 자리를 고쳐 누운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대단하다고 칭송할 만한 일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넓지 않다던 요한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진실로 비정한 이라면 다른 이가 잠을 자다 떨어지든 말든 마음을 쓰지 않을 테니. 이러한 탓에, 앨버트는 자신이 경외하던 그 은빛의 기사를 요한이 막아주고 있는 듯 느껴졌다. 아득한 빛줄기가 내려앉은 요한의 얼굴이 마치 투구라도 걸친 듯 보이는 착각에, 앨버트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가지런하지 못해 안쓰러운 숨결과 흩어진 머리카락이 베개와 맞닿아 사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단정하지 못한 모습의 그는 처음이었다. 그 나약한 모습은 왜인지 앨버트의 눈길을 잡아끌어서, 며칠간 굶주리다 먹잇감을 마주친 포식동물이라도 된 양 앨버트는 숨을 죽이고 요한을 응시했다.
높고 곧은 콧날, 찌푸린 듯 보여 강직한 인상을 더해 주었으나 지금은 풀이 죽은 듯 슬쩍 처진 짙은 눈썹. 현관에서 마주쳤을 때 그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듯 보인 것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뚫어져라 쳐다보니 눈가가 조금 부어올라 있었다. 손끝으로 매만져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제법 긴 속눈썹과 감긴 눈꺼풀 아래에는, 4월의 나무 그늘과 같은 서늘한 녹색 눈동자가 있을 것이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눈에 담자 앨버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귀여워, 자는 동안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고. … 귀여워? 귀엽다고? 요한은 신입생도 아닌데? 심지어 나보다 일찍 태어났고, 나보다 키도 큰데. 도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거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생각 탓인지, 그녀는 순간적으로 제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앨버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물렀으나, 침대가 벽에 붙어있는 탓에 괜히 등허리나 부딪힐 뿐이었다. 통증 탓에 눈꺼풀을 찡그리고 있노라면, 이 찰나의 순간 그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것마저 아까웠다. 넋을 놓고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에, 앨버트는 눈앞의 소년을 더욱 잘 볼 수 있도록 그것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달빛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달빛이 이렇게 기껍던 적이 있던가. 그렇게 두렵고 원망스럽던 광채가 지금만큼은 경탄스러웠다. 달님, 이 방 안을 조금만 더 밝혀주세요. 이 순간을 제 눈에 확실히 담아둘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앨버트는 달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한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낮의 하늘은 태양이 밝기에 별이 보이지 않듯, 온갖 틈새로 스며들던 빛이 오늘만큼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은 제 곁에 달보다도 더욱 마음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있던 탓이다.
아까와 같이 제 양팔을 그의 허리에 감으면,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올 것은 따뜻하고 안락한 사람이리라. 거짓말쟁이, 언제는 자기가 차가운 양철 나무꾼이라고 말했으면서. 차갑지도 딱딱하지도 않은걸. 앨버트는 작게 웃음 지었다. 요한의 어깨에 머리를 가볍게 대보면, 그 안에서 맥동하는 심장은 앨버트의 머리카락이 그의 잠옷 위를 스치며 내는 소리를 덮었다. 이윽고 앨버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에 닿았던 따뜻한 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팔을 조금만 뻗으면 붙잡힐 텐데. 앨버트는 주저하며 손끝을 슬쩍 내밀었다. 가게의 매대에서 훔친 사탕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어린아이가 된 양 겁이 났으며, 별이 박힌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뻗을 때처럼 손이 떨려왔다.
그러니까, 달빛 내린 네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굴러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와 한 침대에 누워있기를, 또다시 서로의 속삭임 속에서 잠들기를 바랐다. 어두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방 안에 있어도, 손으로 곁을 더듬었을 때 네가 손에 잡힌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잠든 동안 새벽이 밝아왔으면 했다. 그렇게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아주 먼 미래까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 손은 목적으로 삼은 곳에 다다르지 못한 채 거두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요한이었다. 그러니 그를 안고 싶다면 정정당당하게 묻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너를 끌어안아도 돼? 한 달에 한 번은 손이 아닌 앞발을 가지는데.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과서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난 아마 취직도 못 할 거야!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어려울 테고, 달이 차오르는 동안 온통 예민해져 네게 화를 내게 될지도 모르지. 만일 하루라도 약을 잊는다면 너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해치려 들 거야. 나와 함께 있으면 너까지 손가락질당할지도 몰라…. 그런데도, 내가 너를 안아도 괜찮겠어? 아, 그야말로 최악의 고백이다.
한밤중 낯선 숲속을 헤매던 짐승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빼곡한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하나의 일등성을 마주한다면, 그 생물은 그 별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 별에 닿을 수 있기를, 그 별이 자신 역시 밝혀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이 지상에 붙잡히기를 원해서는 안 되며, 아침이면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에서 빛날 별을 좇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앨버트는 스스로의 가슴을 억눌렀다. 달빛 아래서 가질 수 없는 것은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 이 애정은 밤이 지나 아침이 오면 잊힐 큐피드의 변덕이어야 한다.
태양신이여, 당신 역시 심술궂은 큐피드의 화살촉에 그 심장을 꿰뚫려 보셨지요. 미래를 아는 재주가 있으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열망에 빠져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위해 탄식하셨지요. 그러니 태양이여,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오늘만큼은 금빛 마차를 모는 일에 게으름을 부려주시기를. 이 밤이 오래도록 이어져, 제가 달빛 아래서 이 별을 조금이나마 더 바랄 수 있게끔 허락해 주시기를. 다만 잔인하게도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셔야만 한다면, 오늘의 헛된 꿈이 당신의 휘광 안에 녹아 사그라지도록 도우소서.
"간지러워, 요한…."
맨살을 드러내놓은 등에 입술이 와닿자, 앨버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푹신한 베개에 가로막힌 웃음소리는 작고 먹먹해 함께 침대에 누운 이만이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말로만 일어나라고 하면 꿈쩍도 안 하시더니, 이번엔 용케 일어나시네요."
"100년간의 잠에 빠진 채라도 일어나드려야지. 기사님께서 입을 맞춰주시는걸…. 많이 기다렸어?"
앨버트는 베개에 파묻은 고개를 들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정돈되지 않은 흐트러진 머리칼은 그 역시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앨버트는 생각했다.
"네, 아주 오래 기다렸습니다. 정말로 100년은 기다린 기분이에요."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투로 한 번 농담을 던진 요한은 앨버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덧붙였다. 일어나세요, 시트를 갈아야겠습니다. 밤 동안 더러워졌잖아요. 앨버트는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더 누워있을래. 지금은 일어나기 싫어, 허리가 아프단 말이야."
조금 봐줘, 네가 이렇게 만든 거니까. 붉은 머리 여자는 종알대며 팔을 뻗어 남편을 품 안에 가뒀다. 방금 깬 탓에 팔에는 힘이 도통 들어가지 않았으나, 요한은 사지에 몰린 사냥감이라도 되듯 순순히 앨버트의 손에 붙잡혀주었다.
"잘 잤습니까?"
글쎄, 잘 잤나? 어떤 꿈을 꾸었더라. 좋은 꿈을 꾼 것도 같고, 나쁜 꿈을 꾼 것도 같았다. 앨버트는 나쁜 꿈이라기에는 달콤했으며, 좋은 꿈이라기에는 쓰던 꿈을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요한의 키가 지금보다 살짝 더 작았던 시절, 자신이 다이애나라는 이름으로 10년을 살기 전. 그때나 지금이나 앨버트는 반쪽이 짐승인 인간이었으며, 요한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요한을 마음껏 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아, 요한. 고백할 게 하나 있어."
앨버트는 요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요한은 앨버트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고백이요? 뭡니까? 설마, 또 사고라도 친 건….“
"그런 거 아니야. 우리 둘이 같은 침대에서 잤던 때 있잖아. 어제처럼 말고, 10년쯤 전에."
"아…. 네, 그랬죠."
"그날, 자다가 눈을 떴더니 내가 널 안고 있더라. 아마 뒤척이다가 그랬나 봐."
… 고백한다는 게 그거예요? 앨버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요한은 질문을 던지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고? … 어떻게?"
"당신이 저를 얼마나 꽉 껴안던지, 사람이 잘 수가 있어야죠. 그날 한숨도 못 잤습니다."
무안해진 앨버트는 눈썹을 찡그리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아니, 사람이 잠결에 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세게 안지도 않았다고. 게다가 그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하려고 했거든. 요한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참나…. 그럼 뭘 고백하시려는 건데요?"
요한은 앨버트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를 기다리며 눈썹을 까딱였다. 그 모습을 본 앨버트는 답을 하는 대신 천연스럽게 눈을 내리감았다.
"글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뭡니까? 장난하는 거죠? 그러지 말고 제대로 알려줘요. 앨버트의 품 안에서 요한은 심통을 내듯 표정을 찡그렸다. 앨버트는 미소가 번진 얼굴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보는 그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더더욱 아름다운 것 같다고. 심술을 부리는 것이 귀여우니 그날부터 그를 사랑했다는 말은 조금 나중에 들려줘야겠다고. 어쩌면 오후에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혹은 그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다행히도 오늘 하루가 지나는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순간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설령 오늘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일 아침 그보다 먼저 일어나 고백으로 그의 잠을 깨우면 된다. 언젠가 머지않은 미래에는 그 고백에 대한 답으로 그가 사랑에 빠진 순간을 들어내리라.
이제는 잘 잤냐는 그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앨버트는 간밤에 좋은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네가 있는데 좋지 않을 리 없었다.
크레페 aisle님 작업물
언제나 저와 놀아주셔서정말감사합니다 너무즐거워요…
아래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에요,
앞부분은 알퐁스 도데의 별을 떠올리며 썼어요… 사람을 몇 주간 만나지 못하던 목동이 사랑하는 이의 예상치 못한 방문을 겪고, 그가 잠든 모습을 지켜봄< 이 부분에서 요한을 바라보는 앨버트를 떠올림
한편으로는 잠든 주인 아가씨가 어깨에 기댄 모습을 지켜보는 하인이라는 점에서 요한에게도 '별'의 화자미가 있다 싶었어요
근데 너무 앨버트 혼자 이상한 짓 하고 있길래 성인 요거트도 같이 넣엇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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