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와 꽃다발

AKCU by 에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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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빠져나오자 어느덧 파도가 오렌지빛 태양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녁이라 부르기에는 제법 이른 시간이었으나 우중충한 하늘을 물들이던 오후의 햇살마저 사라지자, 주변은 삽시간에 어둑해졌다. 그러나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과 가게의 빛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으므로 거리를 거니는 행인들의 낯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재잘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돌연 제 옆을 곁눈질했다. 비수기라고는 하나, 인파를 신경 쓴 것인지 거리와 가까워졌을 때부터 타니무라는 예의 그 안경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실은 점 하나만으로도 타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었다. 안경 하나로 감추기에는, 타니무라 아키토와 그의 동행인은 모두 어딘가 타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가 있었다.

 

이를테면 단정한 차림새와 곧은 행동거지, 말간 웃음 같은 것들. 터져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의 알갱이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에게로 가닿을 적마다 그들에게 향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이끌림은 잦았으나 순간은 짧았다. 타인의 지나친 관심을 기피하는 기질이 있는 사내가 친히 견뎌줄 수는 있을 정도로.

 

‘아마도 그런 거겠…지?’

 

잡기 싫으면 말라며 홱 하니 걸음을 옮길 때는 또 언제고, 이제는 보폭을 맞춰주기까지. 가장 친근히 지내왔으나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이였다. 하긴, 그러니 학창 시절부터 그에게서 체셔 고양이를 떠올린 것이겠지만.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I don't much care where.

Then it doesn't much matter which way you go……….

 

세상에서 제일 널리 알려진 이상한 나라의, 가장 유명한 대화를 떠올린 시라미네가 숨죽여 웃었다. 이제 와 떠올려 보니 그 명확하고도 냉소적인 말투까지 제법 닮았다 싶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특유의 의뭉스러운 미소는 사라졌으나―그보다는 변질됐다고 표현해야 할까?― 수수께끼 같은 태도는 건재했으니.

 

그렇다면 언젠가는 타니무라 아키토가 미궁처럼 여겨지지 않는 날이 오게 될까?

 

불쑥 솟아난 의문을 선뜻 따라나서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십여 년을 본 시라미네 치유리마저 그러했다. 만일 그러한 날이 오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그네들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이 그들의 본질을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각자의 삶을 설명하는데 있어, 서로의 존재는 썩 중요치 않음에도…….

 

“……너한테 쟤들을 어떻게 지워? 잊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효율 떨어지는 일 안 해.”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으려나. 그가 저희의, 저의 무게를 인정하였듯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그의 색채는 다른 것으로 덧입히려야 입힐 수 없는 존재였으므로. 어깨 위에 자리한 코트 자락을 고쳐 쥔 여자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직진, 직진, 우회전. 거침없이 나아간 발걸음의 끝이 유리문 끝에 닿았다.

 


 

카페는 캐러멜과 초콜릿의 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찬 바람을 몰아내듯, 고소하고도 달콤한 향이 그들의 발끝부터 맞잡은 손과 머리를 타고 올랐다. 추위 탓인지 평소보다 더욱 희게 질린 낯이 훈기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차 있는 자리를 죽 훑어보던 청년이 먼저,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핫초코 마시겠다고?” 조명에 닿은 눈동자가 적포도주처럼 반질거린다. 직전까지 핫초코에 마시멜로를 동동 띄워다 먹어야겠다며 종알거리던 여자를 견뎠으면서도 퍽 인내심 깊은 태도였다. 아까는 그랬는데요, 익숙하게 그 배려를 받아낸 치유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안이 따뜻하니까 시원한 게 마시고 싶어졌어요.”

“그럴 것 같긴 했어.”

“후후, 역시 아키쨩은 절 너무 잘 알고 있네요~”

 

최근 출시된 신상 메뉴는 없었으므로 그녀의 시선은 절로 에이드와 차가 적힌 메뉴판으로 향했다. “좋아요, 오늘은 블루베리 에이드로 할래요♪” “그럼 난 바닐라 라떼.” “케이크도 먹을까요, 우리?” “그러던가.” 흔쾌히 떨어진 승낙에 감사 대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매장에 흘러나오고 있던 재즈의 일부였다.

 


 

샛노란 시트와 하얀 요거트크림 사이로 연초록 과실이 반짝였다. 잔꽃 무늬가 새겨진 하얀 접시 옆으로 머그잔과 유리잔이 나란히 자리했다. 층층이 쌓아 올린 시트 위로 듬뿍 올라간 생크림과 동그란 과육, 작게 올라간 초콜릿이 잘 잡히도록 구도를 고심하던 여자가 뒤늦게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포크를 쥐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많이 배고팠어요?”

 

한입 크기로 잘린 케이크를 그의 입에 물려준 치유리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새콤달콤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깔끔 떠는 데가 있는 성정답게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먹은 타니무라가 뒤늦게서야 입을 열었다.

 

“아니, 별로.”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아키쨩, 역시 고양이를 닮았네요?”

“아, 그… 돼지 고양이 말이지.”

“아잇, 체셔 고양이는 돼지 고양이가 아니라니까요~!”

 

빽 소리를 내지른 치유리가 툴툴거리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뽀그르르, 검보라빛 액체 사이로 거품이 일고 긴 유리잔을 가득 채운 얼음들이 움직이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자아냈다.

 

“저는 사실, 아키쨩이 졸업하더니 결벽증이 생긴 줄 알았어요.”

 

짧게 목을 축인 여자가 미소를 입에 걸었다. 느닷없는 화제 전환마저 익숙히 흘려넘긴 청년이 제 안경을 접어두고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겠지만,” 웃을 듯 말 듯, 묘한 낯이었다.

 

“장갑을 꼈다고 다 결벽증인 건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요. 유달리 신경 쓰는 눈치기에 그랬죠.”

 

그것 외엔 딱히 끼고 다닐 이유도 없잖아요? 가벼이 되물은 여자가 손을 뻗었다. 쫙 펼쳐진 채, 맞닿기를 기다리는 모습에 사내가 얕게 코웃음을 쳤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지는 않다니까.” “그래도요.” 얄쌍한 손이 그녀의 손과 닿았다.

 

“봐요, 역시 아키쨩은 손도 예쁜걸요.”

 

한마디쯤 긴 손가락은 상처 하나 없이 고왔다. 저는 당신 얼굴 다음으로는 손이 좋아요. 제가 아키쨩이었다면 달마다 네일을 했을걸요. 그가 말하는 이유 따위는 실바람이나 다름없다는 듯, 입술 새로 염려나 불안 대신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가 쏟아져 내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해명하고 다니는 건 효율이 안 좋잖아.”

 

그러니 미추 따위보다는 효율을 택했을 뿐이라고, 뚜하니 한마디를 내뱉은 타니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쉬이 납득해 줄 것이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시라미네 치유리 또한 필사적으로 제어구를 착용하고 다니던 시절이 있다지마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이였고 효율을 따지는 상대에게조차 토끼 사과를 운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찌 본질이 쉬이 변질될 것이라 믿겠는가.

 

“효율로 따지자면야 그렇겠지만, 그것과 기분은 다른 이야기잖아요?”

 

구태여 라떼아트를 만들고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깎아내고. 네일을 하는 것만 해도 그렇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소프라노가 톡톡 튀었다. 노래하듯 말을 이은 치유리가 부러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놓았다. 다시금 포크를 쥔 여자가 심혈을 기울이며 케이크를 잘라내는 사이, 조금은 미지근해진 음료를 입에 머금은 아키토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좋아지나?”

“일단 저는 그랬는데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네.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물건조차 애착을 보인 적 없는 사내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역시 없으려나….’

 

시라미네 치유리는 알고 있다. 무언가를 오래도록, 깊이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불행하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는 것을. 타니무라 아키토는 언제나 인간관계는커녕, 세상살이조차 무심히 흘려넘겼으나 불행을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명해지는 건 관심 없고, 적당히 벌어먹을 만큼 벌어서 내 집 마련하고 싶은데.”

 

그러니 더더욱, 그 열의 없는 눈빛이 기쁨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녀의 앨리스는 감정만큼은 조종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과 달리 제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증표는 될 수 없음을 알았고, 제 마음과 욕심을 타인에게 밀어붙이는 것은 어떠한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없이 케이크를 입안으로 밀어 넣은 치유리가 눈을 굴렸다. 부드럽고 촉촉한 시트와 요거트크림이 달콤하고도 상큼한 식감을 선사했다. 그 절묘함 속에서 톡, 하고 과육이 터지며 다시금 달콤한 하모니를 자아낸다.

 

으음, 이건 집에서 만들어 볼 수 있으려나? 크림이 묻는 것만 빼면 좋아할 것 같은데. 과일은 좀 좋은 걸 쓴다고 쳐도 요거트의 비율이…….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때면 종종 하던 고민이 방울방울 흘렀다. 일순간, 의문에 대한 답조차 잊었던 치유리의 눈에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과실이 닿았다.

 

“아키쨩, 옛날에 결정석 받고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건 열심히 모았었잖아요. 유쨩한테 엄청 집착했으면서.

……그건 보통 받았다가 아니라 강탈이라고 하지.

아무튼요, 열심히 노력해서 받은 거잖아요?

 

언젠가 그가 보여주었던 높다란 보석함,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소년이 소중히 품었던 둥지. 그 엄청난 애착에 동기들 모두가 입을 모아 웃던 시절이 있었다. 정말 대단했었는데, 그가 그것을 모으지 않게 되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은 휘발되고 스러지기 마련이라, 세피아 색으로 물드는 필름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던 여름조차 서서히 물거품이 되어 흩어지는 것처럼.

 

시기를 떠올려 내지 못한 여자가 애매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 시절엔 열중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는데 말이죠. 변명 같은 중얼거림을 입안으로 녹여 삼킨 치유리가 부러 다정한 투로 입을 열었다.

 

“꽃다발 받아본 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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