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다
구름이 드리운 하늘이 잿빛으로 범람했다. 당장에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으나, 바람을 타고 소금기를 머금은 물내음은 공상 속의 바다보다 불유쾌한 데가 있었다. 하물며 여름도, 겨울도 아닌 가을의 바다는 더욱 그러했다. 얼핏 스산한 감이 있는 날씨를 온몸으로 알리듯, 거세게 넘실거리는 파도가 하얀 운동화 앞코를 적시고는 다시금 멀어졌다.
이런 날씨라면 아무리 감상적인 사람이라도 기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라미네 치유리는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이라 이름난 이였고, 사람 많은 곳을 기피 하는 타니무라 아키토의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었으니 좋은 것이 아니냐며 웃을 줄 알았다.
“네 취향은 좀 다르지 않나?”
다소 변덕스러운 데가 있는 타니무라와 달리, 시라미네 치유리의 취향은 단순하고도 확고하다. 밝고 부드러운 것,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데가 있고 마음 깊이 와닿는 것, 폭풍의 언덕보다는 제인 에어, 리어왕보다는 빨간 머리 앤을.
그것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친우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짙고 선명한 눈동자 속에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연보라빛 눈동자가 잠시 맞닿는가 싶더니, 그 눈길을 피해 데로록 굴러간다.
“그렇긴 한데요,”
흠, 가볍게 콧숨을 내쉰 여자가 양팔을 쭉 뻗었다. 품이 낙낙한 니트 가디건 사이로 하얀 손끝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일단, 첫 번째로는 생각보다 별로 안 추워서 좋아요.” 하얀 원피스에 가디건과 샌들이 전부인 단촐한 차림새로는 초가을, 그것도 궂은 날씨를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쵸? 제법 좋은 징조예요~” 동의를 구하듯 생글 미소 지은 치유리가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긴 치맛자락이 풀어 내린 머리카락과 함께 넓게 퍼지며 흔들거리다, 바람을 타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흐음…. 사내는 손에 쥔 종이컵에 입술을 붙인 채, 다소 감흥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창 시절부터 추위를 타던 모습을 봐왔던 처지다. 저러다 곧 춥다며 발을 동동 구르거나 안에 들어가자고 조르게 되겠지. 어렵잖게 그려지는 미래였으니 아키토는 핀잔을 늘어놓는 대신, 제가 품은 의문을 입술 위에 올렸다.
“첫 번째가 그거면 다른 이유는?”
“좋은 질문이네요♪ 두 번째로는 역시, 바다의 매력은 여름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려나요?”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네가 가을 바다의 매력을 알고 있다는 뜻이야?”
“아뇨! 전 놀러 갈 때는 주로 여름에 가는걸요. MV 촬영차 겨울에 가본 적은 있지만~?”
그러니까 지금부터 알아보겠다는 뜻이네요, 아키쨩이랑 같이! 이미 수십 년간 검증된 걸 두고 다른 것을 굳이 찾아보는 건 효율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에, 냉정해요~ 아키쨩은 역시 곧잘 못된 말을 한다니까요. 전혀 다른 음계의 목소리가 화음처럼 얽혔다. 재잘거리며 항변하던 치유리가 돌연 까르르 웃으며 그의 옷자락 끝을 붙들었다.
“아무튼 뭐 어떤가요. 망해도 아키쨩이 있잖아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엄~청 즐거울걸요?”
물론 매력적인 이유를 더욱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습관처럼 둥그런 눈매가 부드러이 접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동자 사이에서 작은 별빛만이 가느다랗게 빛났다.
“이번 이유는 만족했나요?”
“글쎄,”
단절에 가까운 답 뒤로 짧은 침묵이 엉켰다. 사내는 뜸을 들이듯 천천히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달콤하고도 고소한 향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몸을 데웠다.
“…질리진 않을 것 같네.”
“에에엣~, 그거 이번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의미인가요?”
“벌써 눈치챘어?”
“그야 아키쨩은 제가 이런 이야길 하면 항상 그랬는걸요.”
‘이해했다’에는 어떠한 의미가 깃들 수 있을까. 네버랜드에 갇혔던 시절부터 바깥 세계로까지.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지내오고, 서로의 반응을 얼추 짐작해 내게 되었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장 많이 일컫는 말은 언제나 ‘전혀 이해할 수 없다’에 머물러 있었다. 적잖이 알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그랬다.
여전히 시라미네 치유리는 타니무라 아키토를, 타니무라 아키토는 시라미네 치유리를. 아주 낯익고도 낯선 서로를 알기 위해 매번 지극히도 많은 눈길을 들인다.
“그 정도면 너도 그 애를 꽤 아는 편이지 않나?”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으니까….”
“묘하게 고집스러운 면이 있네.”
수많은 시간 속에서도 서로의 미지未知와 미지微旨로 남은 소년소녀가 앳된 티를 벗어내고 웃었다. “저도 여전히 아키쨩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작은 덧붙임을 지워내듯 바람이 되돌아왔다. 긴 바람 끝이 금빛 머리채를 손에 쥐고 춤을 추다 사내의 품속으로, 이어 그 뒤의 파도 속으로 달아났다. 가볍게 걸쳤던 외투가 넓게 퍼지며 흡사 거인 같은 실루엣을 자아낸다. 바람결에 옷자락의 끝을 놓친 치유리가 잔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가을 바다의 매력이네요.”
“바람이 많이 부는 게?”
“아키쨩이 보다 거대해지는 게요.”
“난 원래도 너보다 컸는데…….”
“어릴 땐 제가 더 컸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커졌어요?” 농담 어린 투정을 부풀리듯 뺨이 가볍게 부풀었다. 그것을 따라 흘끗,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의 고개가 얕게 기울었다.
“무슨 소리야. 난 어릴 때도 너보다 컸어.”
우습다는 듯, 입꼬리 끝에 옅게 걸린 미소와 달리 혀끝에는 터무니없다는 기색이 가득 녹아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언동이라, 치유리는 쌍심지를 켜며 너무해요― 하고 소리치는 대신 발꿈치를 들어 올려 서로의 키를 가늠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손등이 사내의 볼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을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을, 어린 시절의 키를 가늠해 보던 여자가 결국 패배를 시인하듯 고개를 저었다.
“………치사해요, 제가 어릴 때 아키쨩한테 조금만 살살 커달라고 부탁도 했던 것 같은 데도요.”
“그랬던가… 난 그때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을 것 같은데.”
가벼운 핀잔들이 투정을 얽고 흐려진다. 천천히 흘러가던 구름이 마침내 해를 빗겨서고 은회색 하늘 위로 빛이 깃든다. 물결 위로 아롱아롱 흩어지는 빛무리를 좇아 두 쌍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때마침 천천히 기울어지던 태양이 그들의 머리 위로 가닿으며 은빛 테를 덧그렸다. 결 좋은 남청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여자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와아…. 탄성쯤이야 으레 있던 일이다. 가벼이 그것을 흘려넘기려는 그의 손을 보다 작은 손이 다급하게 붙들었다.
“아키쨩, 아키쨩!”
“또 왜?”
“저, 방금, 엄청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여기요, 여기. 꼭 여기여야 해요? 모래사장 위로 하얀 샌들이 주욱 금을 그렸다. 파도가 지워버릴까 싶어 콩콩 발을 구르고서야―애석하게도 정말로 그곳에 파도가 밀려든다면 그의 발이 축축해지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그녀가 웃으며 저만치로 달려 나갔다. 색이 바랜 모래사장 저편으로 옅은 색채를 품은 인영이 녹아들 듯 스러진다.
시라미네 치유리가 돌아온 것은 하얀 포말이 운동화 끝을 몇 차례나 간질인 후였다. 수신호를 보내듯 양손을 휘젓고, 모래사장 위에서 점프를 해가며 제 존재감을 알리던 치유리의 걸음이 멈추었다. 우뚝 멈춘 다리 대신, 손에 들린 라무네 병이 불투명하게 반질거린다.
느닷없는 탄산수의 등장이었으나 언제나 그렇듯 설명은 뒤로 밀려나고, 화창하고도 상쾌한 음률의 CM이 흘러나왔다. 이어 병을 렌즈 삼아 저 멀리― 바닷가에 선 청년을 비추어 본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원체 짙고 독특한 색을 띠던 사내였으니 주위의 풍경에도 일절 잡아먹히지 않은 그의 모습 정도야 얼추 예견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맑고 투명한 유리병과 그 안에 담긴 푸른 탄산수, 가을 하늘의 청명한 빛을 받아 푸르게 반짝이는 청년의 모습이란…….
“음, 으음, 음?”
예상했던 풍경과 얼추 부합해야 할 터인데, 묘한 부조화에 입술이 꾹 다물리고 기다란 머리채가 비스듬히 쏟아졌다. “아키쨩!” 감출 기미도 없이 충격을 죄 얼굴 위로 드러낸 여자가 뽀르르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한참을 들고 있던 커피는 다 식어버린 것인지, 붙들은 손은 찬 공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붉은 기가 감돌았다.
“아키쨩에게도 안 어울리는 분야가 있네요!?”
“또 무슨 헛소리야?”
은은하게 감돌았던 미소가 흐려지고 기다란 속눈썹 끝에 추궁이 어린다. 움츠러들 법도 하건만, 그럼에도 여자는 꿋꿋이 제 할 말만을 입에 담았다.
“왜, 청량음료 광고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아키쨩이라면 그것도 어울릴지도~ 싶었죠.”
“그건 애초에 봄이나 여름을 배경으로 찍잖아.”
“그래도요! 아키쨩의 얼굴이라면 다 잡아먹을 줄 알았죠~!”
아키쨩은 예쁘기도 엄청 예쁘지만 파랗고 반짝반짝하잖아요. 실로 단순한 이유였다. 그런데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퍽 그럴듯하였는지, 아쉬움을 가득 늘어놓던 여자가 그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손이 왜 그렇게 차요?”
“네가 거기서 기다리라며.”
“아차차… 아키쨩이 감기에 걸리면 병원비 줄게요.”
“됐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죽 만들어 줄까요? 토끼 사과도 깎아서.”
이유야 어찌됐든 실패는 실패였고, 당장은 그것을 곱씹기보다 홀로 바닷바람을 맞아 굳어진 사내의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것이 중요할 성 싶었으므로.
일단 핫 초콜렛부터 마시러 가요. 마시멜로 둥둥 띄워서. 아까 갔던 카페로 갈까, 여기 커피 맛있네. 전 좋아요! 바람을 타고 다시 재잘거림이 널리 퍼진다. 모래사장 위로 어지러이 새겨진 발자욱이 긴 파도 한 번에 무상스레 사라진다. 실로 무의미한 행위들이었으나 친애와 호기심을 어찌 효율과 저울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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