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이름
프리지아, 개나리, 민들레. 꽃의 이름을 담을 때면 작고 보송한 꽃잎들이 혀끝에서 춤추는 것만 같았다. 그 이름을 꺼낸 이가 저와 같은 심상을 공유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랬다. 작디작은 소녀였을 시절부터 사랑해왔던 몽글하고도 다정한 빛깔의 이름들에 어찌 질릴 수 있을까.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바보처럼 헤죽 웃고 있으려니 그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나 좋아? 그냥 꽃일 뿐이잖아.”
“그야 전부 희망적인 꽃인걸요. 아키쨩이 꽃말을 잘 알 것 같지는 않지만….”
“응, 모르는데.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거봐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까르르,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이름 모를 소년소녀의 웃음처럼, 여전히도 한없이 가볍고 쉬이 사라지는 웃음소리가. “그래도 재밌죠? 친구를 꽃이나 사물에 비유할 일은 잘 없잖아요.” “글쎄다…. 재미있나?” “에―….” 꽃잎처럼 짙은 눈동자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어둠은 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사내는 무엇이든 제가 내린 답을 품고 있었고, 설령 그렇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빠르게 도출해내는 법을 알았다.
“역시 잘 모르겠지만… 네가 보는 나는 어떤데.”
너와 내가 언제는 같던가. 짧게 내쉰 숨결 사이사이로 숨어든 말뜻을 포착한 치유리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꽃으로 비유하자면의 이야기죠?” “응, 그거.” 타니무라 아키토는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삭막하고도 현실적인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고, 시라미네 치유리 또한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감상적이고도 이상적인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서로가 변치 않고, 질리지 않는 한 그들의 탐구는 계속될 것이었다.
“옛날에는 장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보라색 리시안셔스나 만천홍, 모카라 같은 것들이려나요.”
겹겹이 휘감긴 꽃잎은 물감을 덧칠한 것처럼 진한 보랏빛은 빛조차 투과하지 않을 것처럼 어두운 빛을 띠었고 작고 보드라운 꽃송이들은 사내가 품은 색채처럼 눈을 찌를 듯 반짝였다. 꽃잎 하나하나의 잎끝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혀끝에 남은 꽃의 이름을 되뇌어보는 사이, 여자가 얽어둔 이름 하나하나를 검색해본 사내가 뚜한 투로 내뱉었다.
“이제 내 얼굴이 별로인가 봐?”
그 순간, 시라미네 치유리가 받은 충격을 그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타니무라 아키토는 시라미네 치유리가 열 살의 나이로 네버랜드에 들어섰을 적부터 목도한 이상적인 미美였고 그것은 9년의 시간을 지나, 두 사람이 섬을 떠날 때까지도 변하지 않는 명제였다.
아름답다, 찬란하다, 경이롭다…. 소녀는 자라며 미를 찬탄하는 온갖 단어들을 알았다. 그녀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귀한 미사여구들을 붙여야 한다면 시라미네 치유리는 망설임 없이 타니무라 아키토를 택할 것이고, 만일 그녀가 노래가 아닌 다른 예술을 체득하였다면 그를 뮤즈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타니무라 아키토는 그를 기반으로 한 작품마저 기록으로 치부하고 거절했을까? 답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같은 관계를 이루지는 못했을지도 모르겠노라고 여자는 조용히 뇌까렸다. 까탈스럽고도 선이 확고한 사내가 정반대에 귀찮기 그지없을 타인을 흥미롭게, 그리고 즐거이 받아들여 준 것은 여러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기적 같은 결과였으므로.
“진짜 질리기라도 했어? 갑자기 조용해졌네.”
“조용히 해보세요…. 저 지금 충격으로 울고 싶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이거…….”
이래서 잘생긴 사람은 셀카에 욕심이 없다고 하는 거군요. 한숨처럼 흘러나온 목소리 속에는 치유리가 조용히 녹여낸 경악이 눅진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아키쨩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따위의 비명을 예감했던 사내가 엷은 웃음을 흘리는 사이, 투덜거림을 주워 삼킨 여자가 물끄러미 사내의 낯을 눈에 담았다.
결 좋은 감청색 머리칼은 별 없는 밤의 빛처럼 은푸른 고리가 감돌았고 하얗고 서늘한 얼굴 위로 자리한 긴 속눈썹은 눈의 결정처럼 섬세히 세공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 자리한 눈동자는 또 어떤가. 어둠 속에서 바라볼 때면 얼핏 붉은빛으로도 보이는 그것은 빛을 받으면 오색찬란하게 반짝였다. 마치 저무는 석양을 품은 것처럼….
“어떻게 이 얼굴을 하고도 별로냐는 말을 할 수가 있죠? 제 눈이 높아진 건 아키쨩 탓이 70%일 테니까 책임져야 해요.”
“이렇게 태어난 게 내 자의도 아닌데 뭘 어떻게 책임을 져?”
“해주려고요? 매일 거울 보면서 나는 아름답다고 외치는 건 어때요.”
“진심인가…….”
아키토가 제 발언에 질색하건 말건, 입술을 비쭉 내민 치유리가 그의 볼을 밉지 않게 꼬집었다.
“저는 언제나 당신 얼굴을 칭찬해왔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번에는 어울릴 것 같다고 화관도 줬잖아요.”
“그래서 써줬잖아. 근데 지금은 다른 꽃이 생각난다며?”
“어울리는 거랑 생각나는 꽃은 다른 거라고요.”
바보 아키토, 투닥거림 끝에 따라붙은 것은 실로 유치한 타박이었다. 그러나 쉬이 피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제 손길을 피하지 않은 그를 존중하듯, 볼을 붙잡고 흔들리던 손은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옛날엔 아키쨩이 부끄러워했으니까 줄이고 있던 거라구요. 저는 여전히 아키쨩 얼굴이 최~고로 좋고….”
정 의심이 간다면 만천홍과 모카라의 꽃말을 찾아보세요. 그러면 그런 의심은 금방 사라질지도 모르죠.
투정과 속상함 따위가 하늘에 흩날리기라도 한 것처럼 맑고 높은 웃음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스러졌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